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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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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4일 09시 59분 등록

로버트 프로스트, 걷지 않은 길, 솔출판사 1995

몇 년 전 詩에 심취하여 한동안 시만 읽은 적이 있지만, 영시를 읽는 것은 처음이다. 간간히 시 모음집 같은 데서 접하는 번역시는 조금 낯설었다. 번역이라고 하는 프리즘을 통해 시적 감동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았다. 더욱이 이 책은 8권의 프로스트 시집에서 추려낸 시선집이다. 굽이굽이 편역자의 손길을 거쳐 내게 온 것을 경이롭게 여겨야 할 처지인 것이다.

이번에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집을 읽어보니 접해본 시라고는, 그 유명한 ‘걷지 않은 길’과 ‘눈 오는 밤, 숲가에 서서’ 의 딱 두 편이었다.


걷지 않은 길

노랗게 물든 숲속에 둘로 갈라진 길,
한꺼번에 두 길을 갈 수 없어
섭섭히 여기며 오랫동안 서 있었네.
눈이 미치는 데까지 한 쪽 길을 바라보았네,
길이 휘어 덤불로 사라지는 곳까지.

이윽고 다른 쪽을 걸으니 역시 아름다운 길,
풀이 무성하고 인적이 덜해
마음이 그쪽으로 더 끌린 걸까.
하기야 지나다닌 흔적으로 말하자면
두 길이 거진 같았었지.

그날 아침 두 길 모두 잎이 덮여 있었는데
아직은 아무도 걸은 자국 없었지.
어쩌랴, 첫째 길은 훗날 걸을 수밖에!
하지만 길이 길로 통하는 세상이니
그 길을 걷게 될 날 기약없었네.

멀고먼 훗날 어딘가에서
한숨지며 오늘 일을 말하고 있으리라.
숲속에서 두 길이 갈라졌는데
인적이 덜한 길을 택했었기에
오늘의 이 운명이 정해졌다고.


두 갈래 길에서 이렇듯, 먼 장래까지 볼 수 있는 젊은이라면 먼 훗날, ‘걷지 않은 길’에 대해 회한을 가질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못하는, 자기최면이 강한 성격이라 아무리 내 발등을 찍는 결정을 했다고 해도, 후회같은 것은 안한다. 언제나 내게는 길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오류가 내 인생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내 기질이 시킨 일이었기 때문에 아마 다른 길에서 버틸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세월에서 얻은 약간의 지혜를 가지고, 전보다 심사숙고 하는척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는 숨쉴 수 없는 유형의 인간이라는 것을.


주저하기

들과 숲을 지나
담장을 넘어 나아갔네.
경관 좋은 언덕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다 내려왔지.
그리고 한길 따라 집으로 돌아왔네.
그러고 나니, 아, 이게 끝인가.

땅에 떨어진 잎 모두 죽어 있고,
다른 가랑잎들이 잠을 잘 때에
참나무에 매달린 잎들만
하나씩 하나씩 풀려나서
굳어버린 눈밭을 긁으며
기어다니려 하네.

말없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랑잎들
이제는 여기 저기 굴러다니지 않네.
마지막 과꽃 포기 사라지고
금누매꽃들도 시드는구나.
마음은 아직도 못 견디게 찾고 있건만
발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 묻고 있네


신기할 정도로 내 마음을 대변하는듯한 시가 두 어 편 있었다. 세월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묵은 일기장을 들여다 보면, 인생의 암초란 암초에는 모두 걸려 허우적대던 내가 보인다. 진정 기록이란 좋은 것이다. 기록이 없었다면 두루뭉실 큰 기억만 들쑥날쑥할텐데, 기록으로 해서 섬세한 디테일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어쩌면 내가 이런 일들을 다 겪었구나,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지금의 평안이 거저 얻은 것이 아니구나...
여기에 참 좋은 표현이 있다. 나도 나무 숲과 인간 세상을 넘나들며, ‘산 자와 죽은 자들 가리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바라보련다.


유리한 위치

나무 숲이 지겨우면 다시 인간 세상을 찾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새벽에 소가 풀을 뜯는 비탈로 가서
늘어진 노간주나무 사이에 누워
몸을 숨기고 바라본다.
멀리 하얗게 드러나는 사람들의 집, 더 멀리
맞은편 언덕 위의 무덤, 산 자와 죽은 자들
가리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바라본다.

정오 무렵 이것도 싫증이 나면
돌아누워 팔베개를 고치면 된다. 보라!
햇볕 쬐는 언덕에 내 얼굴 이글거리고
미풍처럼 파랑꽃을 흔드는 내 숨결.
대지를 냄새 맡으며, 풀을 뜯어서 냄새 맡으며
개미 구멍을 들여다본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네 번이나 퓰리처상을 받았고, 일생 동안 마흔 군데가 넘는 미국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등, 생전에 최고의 영예를 누린 시인이다. 그는 89년의 긴 일생을 통해 수백 편의 시를 썼으며, 지금 우리가 불과 몇 편의 시를 통해 그의 방대한 시세계를 살펴보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시집 뒤에 붙여있는 해설을 읽어보니, 과연 프로스트는 자연이나 삶 속에서 느끼는 환희만 노래한 것이 아니었다. 의외로 자연에 대한 공포를 노래한 시도 많으며, 警世적 비전을 제시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로버트 프로스트는 여전히 ‘걷지 않은 길’과 ‘눈 오는 밤, 숲가에 서서’의 시인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선입견을 뒤집을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을 보면, 나는 英詩에 대해 너무 인색한 것 같다.


눈 오는 밤, 숲가에 서서

이게 누구네 숲인지 나는 알고 있지.
하지만 그의 집은 마을에 있어
그는 알지 못하리, 내가 여기 멈춰 서서
눈 덮이는 자기 숲을 지켜보고 있음을.

내 작은 말은 이상히 여기리라.
근처에 농가도 없는데 어찌하여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서 멈출까고.
올해 들어 가장 어두운 이 밤.

말은 방울을 딸랑이며 묻고 있네.
혹시 무언가 잘못된 게 없느냐고.
그 밖에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고운 눈송이 흩날리는 가벼운 바람.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그윽한데
네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으니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구나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구나.
IP *.81.24.39

프로필 이미지
도명수
2006.10.05 07:51:49 *.18.196.43
저도 지금 로버트 프로스트의 자연시를 읽고 있는데
시적 감각이 없어서인지 페이지 줄이기가 여간어렵네요

그리고 이 책에는 그렇게 잘 알려진 가지 않은 길이 없어요
얼마전 프로스트의 새로운 시가 발견됐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이 때 그가 가지 않은 길을 지은 시인
이라는 것을 알았지 뭐예요

시는 일상의 일탈을 통해 얻어진다는 데
아직 일탈을 하지 못해봤으니

여전히 시는 어려움으로 다가올 것같아요.

즐거운 명절 잘 보내시고
좋은 결실 이루기를 바래요

참 걷지 않은 길이 맞아요, 가지 않은 길이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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