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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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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13일 01시 13분 등록

1

흘러가버린 모든 것들은 아름답게 반추된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일직선상의 흐름 속에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있어 과거는 다시 가질 수 없는 시간이다. 가질 수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은 사람들을 자꾸 회상하게 만들고, 회상된 과거를 아련하게 만든다. 시간을 거스르고픈 인간의 욕망. 거기서 출발한 과거로의 회귀는 과거 시간의 일부를 잘라내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현실 속에 끼워 넣는다. 비록 ‘지금, 여기’의 아우라는 사라졌지만 아우라가 남긴 영상들을 사람들은 음미하며 일방통행식으로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다.

포플러 나무들은 시들지만
그 영상들을 남긴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포플러 나무들은 시들지만
우리한테 바람을 남겨놓는다.

태양 아래 모든 것에
바람은 수의를 입힌다.

(얼마나 슬프고 짧은
시간인가!)

허나 그건 우리한테 그 메아리를 남긴다.
강 위에 떠도는 그걸.

반딧불들의 세계가
내 생각에 엄습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그리고 축소심장이
내 손가락들에 꽃핀다.
-「강의 백일몽」

대지 위의 모든 것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살아 있는 건 모두/ 죽음의 문을 지나간다”(「매미」중에서 )는 로르카의 말처럼, 인간의 생은 죽음으로 이르는 문으로 향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태양 아래 모든 것에” “수의를 입히”는 “바람”의 영향으로부터 인간 역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시인이 탄식한 바도 있듯이, 그렇게 “슬프고 짧은 시간” 속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나 인간은 짧고 유한한 시간이라는 운명의 궤도로부터 끊임없이 이탈을 시도한다. 그것은 주로 과거로의 회귀나 미래의 선취라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일찍이 황진이는 시간 엿가락처럼 늘였다 줄였다 하는 일종의 언어적 마법을 선보인바 있다. 동짓날 기나긴 밤의 한 허리를 잘라내어 이불 밑에 간직해 두었다가, 님이 오신 날 밤 굽이굽이 펴겠다는 놀라운 상상력은 시간의 흐름에 무조건 순응해야만 하는 인간들에게 있어 일종의 구원의 빛과 같은 것이다. 이제 시간은 더 이상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따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혼융이 가능하며, 그것은 “슬프고 짧은 시간”을 단번에 “아름다운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과거에 시들어버린 “포플러나무”는 단지 과거의 시간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영상”의 “메아리”로 남음으로써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무한한 울림으로 남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메아리의 울림은 “아름다운 시간” 속에서 잔잔히 퍼져 나간다.

새벽꽃이 벌써
자기를
열었다
(기억하는가
오후의 깊이를?)

달의 감송(甘松)이 내뿜는다
그 찬 냄새를
(기억하는가
팔월의 긴 눈짓을?)

-「메아리」

여기에서도 유폐된 시간으로서의 과거와 현재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린 시간들이 존재한다. 새벽과 오후는 물리적인 시간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메아리로서의 꽃의 울림 때문이다. 새벽에 만개한 꽃의 울림은 오후까지 퍼져간다. 그리고 오후가 깊어질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꽃의 울림 때문이다. 새벽에 만개한 꽃의 메아리는 새벽을 단지 과거의 시간 속에 가두어두지 않는다. 신선한 새벽을 구성하고 있는 시간의 입자들은 메아리를 타고 오후의 시간 속으로 스며든다. 과거는 박제된 주검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 속에 녹아들어 미래의 시간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2

신화 속에서 에코(메아리)는 헤라의 저주를 받고 남이 말한 뒤에는 말할 수 있으나, 남보다 먼저 말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분명 메아리는 저절로 발생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음성에 대한 응답이다. 로르카 시 속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메아리의 울림들 역시 저절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수한 사물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로르카의 말 건네기에 대한 일종의 화답인 것이다.

그들이 나한테 조개 하나 갖다주었네.

그건 속에서
지도 위의 바다를 노래하네.
내 가슴은
물로 가득 차고,
작은 물고기들로,
그림자와 은으로 가득 차고.

그들이 나한테
조개 하나 갖다주었네.

-「조개」

로르카는 조개에게 말을 붙이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의 말은 ‘무언의 언어’라는 역설을 지니고 있다. 로르카에 있어 소통의 수단은 다양하다. 그의 눈, 코, 입, 귀, 그리고 피부를 사용하여 사물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오감의 몸을 열어 로르카는 만물과 이야기를 나눈다. 즉 로르카에 있어 몸 전체가 소통의 도구인 것이다.
「조개」에서 시적 화자 ‘나’는 청각의 언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조개의 입구에 귀를 갖다 대는 것에서 ‘나’와 조개와의 대화는 시작된다. 조개의 속에서부터 귀로 전달되는 울림에는 바다 전체가 녹아들어가 있다. 저 먼 원시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바다의 역사가 조개의 온 몸에 스며들어 있으며, ‘나’가 귀를 갖다 대자 조개는 “바다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조개가 불러주는 노래에 흠뻑 취한 ‘나’의 가슴은 “물로 가득 차고, 작은 물고기로, 그림자와 은으로 가득 차”게 되어 바다와의 합일의 경지에 오른다. 그것은 “우리가 물을 마실 때, 우리의/ 그 상태만큼 완전한 상태가 없”(「아침」중에서 )게 되는 물심일여의 상태이다. 너와 나의 경계가 지워져 자타(自他)의 구분이 없어진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사물들의 속삭임을 비로소 들리게 되는 것이다.

나무꾼이여.
내 그림자를 나한테서 잘라내 줘요.
열매 없는 자신을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켜 줘요.

-「열매 맺지 못하는 오렌지 나무의 노래」중에서
씨앗으로부터 출발한 나무는 잎, 꽃, 그리고 열매의 단계를 거쳐 다시 씨앗으로 돌아간다. 순환적인 생태구조는 삼라만상 모든 것에 적용된다. 그러나 씨앗에서 잎, 잎에서 꽃, 꽃에서 열매, 열매에서 다시 씨앗으로 연결되는 순환구조 어느 한 곳이라도 끊어지면 재생은 불가능하다. 열매 맺지 못하는 오렌지 나무는 그래서 슬프며 삶 자체가 고통스럽다. 열매 없이 덩그라니 놓인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그래서 오렌지 나무는 말한다. “내 그림자를 나한테서 잘라내 줘요.”라고. 고통 속에서 해방을 맛보고자 하는 오렌지 나무의 속삭임을 로르카의 예민한 귀는 듣고 있다. 시인의 오감으로 인해 모든 사물들을 눈을, 입을 그리고 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부여받은 감각기관들을 통해 사물들은 시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코르도바.
멀고 외로운.

검은 조랑말, 큰 달,
그리고 내 안낭(鞍囊)에 올리브.
비록 나 길을 알아도
나는 코르도바에 가지 못하리.

평원 속으로, 바람 속으로,
검은 조랑말, 붉은 달.
죽음이 나를 보고 있네
코르도바의 탑들에서.

아! 멀기도 하여라!
아! 내 장한 조랑말!
아! 그 죽음이 나를 기다리리
내 코르도바에 가기 전에.

코르도바
멀고 외로운.

-「기수의 노래」

이상향으로서의 코르도바까지 가는 길은 “멀고 외로운” 행로이다. 비록 그곳까지 가는 길은 알고 있어도 결코 ‘나’는 “코르도바에 가지 못”한다. “내 코르도바에 가기 전에”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유한자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등장한다. 시드는 ‘포플러나무’들처럼 인간들 역시 시들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가버린 것들은 돌아오지 않”으며 또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걸 알”(「풍향계」중에서 )고 있다. 원대한 꿈을 품고 그 꿈을 현실 속에 여봐란 듯이 내보이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지만 결국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을 인간의 한계는 너무나 뚜렷하다. 그러나 로르카는 그러한 인간의 한계에 반기를 든다. 「작별」은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선언과도 같은 시이다.

내가 죽으면
발코니를 열어놔 둬.
사내아이가 오렌지를 먹고 있군.
(발코니에서 나는 그를 볼 수 있으니)

농부가 밀을 거두고 있군.
(발코니에서 나는 그를 들을 수 있으니)

내가 죽으면
발코니를 열어놔 둬!

-「작별」

제목에서는 ‘작별’을 고하면서도 내용은 결코 ‘작별’이 아니다. 실제로 작품 속의 시적화자 ‘나’는 아직 죽은 상태가 아니다. 현실에서 열린 발코니를 통해 보이는 풍경들을 보면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부탁 형식의 유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의 유언과는 달리「작별」에서의 유언은 다분히 미래지향적이다. 발코니를 열어놓음으로써 죽은 뒤의 ‘나’는 생생한 삶의 현장들을 “볼 수” 그리고 “들을 수” 있다고 단언한다. 오렌지를 먹고 있는 사내아이와 밀을 거두고 있는 농부의 영상은 긴 여운을 남긴 채 죽은 후의, 즉 미래의 시간까지 날아드는 것이다. 시간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새벽꽃의 메아리가 오후의 시간 속으로 스며들어 오후를 깊게 했듯이. 메아리의 울림은 이제 죽음 후 미래의 시간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실제로 영혼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인은 사후 세계 속 영혼의 존재를 확신하고 일종의 유언과도 같은 말들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시간조차 초월하는 시인의 ‘작별의 말’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경계를 지우며 넘나드는 메아리의 울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발코니를 열어 제끼듯’ 온 몸을 열어 둔 시인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5

고대의 연금술사들은 가장 기초적인 물질들을 사용하여 고귀한 물질로 전환시키는 독특한 일들을 행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상의 흔한 싸구려 물질들을 여러 가지의 공정을 거쳐서, 금이나 은으로 만들었다. 20세기의 위대한 화가, 피카소는 자전거의 안장과 핸들이라는 단순한 사물들의 조합으로「황소머리」라는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자전거로부터 떨어져 나와 폐기물로 간주되었던 자전거의 안장과 핸들. 그것들은 피카소의 기발하고 놀라운 상상력에 의해 ‘황소머리’로 재탄생되었다. 온 몸을 열고 일상의 사물을 대했던 피카소를 우리는 일상의 연금술사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오감의 온 몸을 열어 두고 사물들의 수런거림에 귀 기울였던 시인, 로르카. 우리는 그를 언어의 연금술사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들과의 조응으로 빚어낸, 가없는 깊이로 울리던 메아리. 그 언어의 메아리를 지금 우리는 듣고 있다. 그리고 언어의 연금술사가 빚어낸 메아리의 파장 속. 그 속에서 우리는 시간을 초월할 수 있으며,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인간으로 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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