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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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태, 쾌락의 발견 예술의 발견, 생각의 나무 2006
- 첫인상
인터넷 서점에서 책이 도착하면, 우선 선을 본다. 책을 쓰다듬으면서 종이의 질감이나 표지디자인을 느끼고, 서문도 읽어보고, 출판연도와 발행부수를 보면서, 어떤 책부터 먼저 읽을까를 결정한다. 이번에 배송된 책 다섯 권은 전부 마음에 든다. 특히 이 책의 표지디자인이 아주 마음에 든다. 추상적인 무늬가 여러색깔로 나뉘어진 구성인데, 난해하면서도 묵직한 중량감을 준다. 책의 내용과도 잘 어울린다. 이성욱의 평론집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도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분위기는 딴판인데도 역시 눈에 꼭 든다.
가벼운 마음으로 도종환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부터 읽었다. 이 책은 두 번 째로 선택된 셈이다. 서문을 읽는데, 분명하고 경쾌한 어투가 딱 내 스타일이다. 문학과 예술, 문화, 철학, 자연, 과학을 함께 버무린 장르 불명의 글이라고 했다. 비평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글, 교수나 평론가로서 정체불명의 이런 글을 왜 쓰느냐고 묻는다면, ‘허전해서 쓴다’고 대답하겠단다. 저자는 중앙대 문창과 교수이며, 73년에 문학평론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으로 보아, 50대 후반으로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책 날개에 저자의 연령이 소개되지 않게 되었다. 오직 글의 내용으로만 판단해달라는 얘기겠지. 좋은 변화이다.
이 책은 저자의 잡식성 관심에서 비롯된 퓨전 상차림이다. 재즈와 해금같은 음악에 대한 애정, 고갱과 고흐에 대한 분석, 성욕에 대한 고찰, 행복론에 대한 탐구, 낚시에 대한 총체적 접근... 등이 다루어져 있다. 이 책의 부제 ‘사유의 미식가가 발견한 문화의 즐거움’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셈이다. 문자를 다루고 음악을 들으며, 무언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있는대로 자료를 뒤져 글 한 편 써놓는 지식인의 놀이터인 셈이다.
- 책을 읽고
앞부분에 배치된 다섯 편의 에세이를 배꼽을 잡으며 읽었다. 음악에 대한 애정과 고갱에 대한 비아냥을 자신있는 어조로 피력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웃기는 것이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앎’이라고 했단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한다. 저자는 이것을 이렇게 푼다. “지지는 지지하고 부지지는 부지지 해야 하느니라 <소변은 소변이고 대변은 대변이다>” 즉 앎과 모름의 분별이 곧 참지식이라는 것이다. 마치 공부하기 싫어서 훈장놀려먹을 궁리만 하는 서당의 악동같다.
외국에 놀러가면서 아내를 동반하는 것은 ‘약수터에 환타’를 갖고 가는 격이요, ‘잔치집에 도시락’ 가지고 가는 것이라는 등, 익살이 끊이질 않는다.
뒤에 실린 글들은 그다지 유머러스하지는 않다. 인용이 너무 많고 현학적이며, 분량도 길어서 조금 딱딱하다. 서운한 일이다.
그대신 이 책은 내게 ‘지식인이 사유하는 방식’, 혹은 ‘지식인이 노는 방식’을 엿보게 해주었다. 어느날 문득 저자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생각이 미쳤다. 다른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 어떻게 말했을까, 그는 문헌을 뒤지기 시작한다. 51쪽짜리 에세이 한 편을 쓰기위해 얼마나 많은 문헌을 뒤졌을까. 동서양의 행복관과, 불교 기독교의 행복관을 논하고, 그리이스 키니코스학파를 언급하고 천상병의 시를 인용하려면 말이다. 하지만 결국 그가 도달한 결론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그 결론조차, 저자는 J. S 밀의 말을 빌려서 말한다.
“행복하게 되는 유일한 삶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행복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어찌보면 일반인이 삶의 지혜로도 체득할 수 있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그토록 잡다한 이론을 설파한 것이다. 이는 성욕이나 유아고착적 현상에 대해 다룬 글들도 마찬가지이다. 동화와 애니메이션과 소설을 인용하고, 심지어 오페라 아리아의 가사까지 옮겨놓는다. 에너지가 넘치는 저자의 잡식성 기호가 놀랍기도 하지만, 정작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저자의 생각이 빠져있는 것이다. 그 분야에 대해 저자는 어떤 체험을 거쳐, 어떤 욕구불만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아, 낚시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저자의 체험이 노출된다. 무난하고 말하기 쉬운 분야이므로?
따라서 ‘악마의 사전’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지식인이란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하지 않고는, 단 한 줄도 자기견해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 혹은 ‘직접 몸을 움직여 사는 것보다, 문자로 접하는 것에 더 큰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저자의 박식하고 다양한 식도락에 기가 죽어서 조금 비아냥거려 보았다. 아들까지 3대가 대동강 낚시꾼이라고 희희낙락하는 그에게서, 팔방미인의 풍류를 본다. 정작 자신의 전공인 문학을 제외하고도, 그림과 음악과 낚시에 쏟아지는 그의 애정행각이 대단하다. ‘직접 몸을 움직여 사는 것보다, 문자로 접하는 것에 더 큰 쾌락을 느끼는 부류’의 말석에서, 나의 무미건조한 일상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 책에서 인용한 부분
- 재즈
31 나는 재즈에 관한 한 역인종차별주의자이다.
“백인은 죽었다 깨면 모를까, 목소리로는 흑인을 능가할 수 없어.”
32 ‘루시’라는 원인 화석은 약 3백만년 전에 생존했던 여성으로, 그 화석이 발견될 당시 발견 현장에서 비틀스의 노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와 그 같은 애칭이 붙었다.
35 흑인가수들의 무게가 깔리면서도 호소력 있는 저음과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답고 침투력있는 고음은 선조들의 생활의 필요 때문에 취해진 적응 행동에서 유래되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음악은 언어가 생긴 다음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말과 더불어 같이 생겨난 예술이다.
- 음악의 마력
46 점잔을 강조하는 사대부의 시각에서 활과 현의 마찰적 접촉이라는 관능적 욕망의 이미지를 해금이 강하게 지녀서 그 마찰적 접촉을 무시할 수 있게 입으로 부는 관악기 쪽으로 해금을 밀어붙인 것이다.
60 음악의 세계에서는 음악의 참뜻을 이해하는 지음知音, 즉 판소리 용어로 노래 잘하는 명창보다 노래 잘 듣는 ‘귀 명창’의 역할이 중요하다.
67 다른 예술은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음악은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쇼펜하우어
죽음이란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듣지 못하는 것 - 아인슈타인
69 철학자 딜타이 식으로 표현하면 음악은 우리에게 ‘보다 많은 삶’을 선사한다. 음악은 우리의 모든 감각을 활성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음악을 들으면 우리의 모든 감각이 일제히 소리치며 일어나 팔딱거리면서 우리가 활기차게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 고갱, 비속한 문명인
77 고갱이 프랑스 독자를 위해 쓴 그의 타히티 체류기 ‘노아 노아’는 이러한 허위와 가식과 식민지 지배국 국민으로서의 교만함, 그의 타고난 거짓말 꾸미기로 점철된 책이다. ‘노아 노아’는 ‘향기’, 또는 ‘향기로운’이라는 뜻의 타히티 말인데, 그 향기에는 오만과 편견이라는 프랑스제 인공 합성 향료의 냄새가 가득하다. 그는 자신이 소설가라도 된 듯이 이 책을 통해서 허구적 사실을 진실로 위장했다.
82-고갱은 타히티의 현실을 무시하고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이상적 현실로 대체시켜 타히티에 대한 인공낙원적인 미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서구 미술의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이국적 정서의 충격을 준다.
- 예술/ 어린이사랑
125 제의와 공연예술은 그 형식과 기능에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선사시대의 예술은 제의라는 형식에 숨어 실제의 삶에서 느껴진 강렬한 욕망과 정서를 표출한다. 그것을 재생산하고 재연한다는 점에서 예술과 제의는 일치하고 있다.
167 유태성숙 neoteny이란 어린이의 모습이나 유생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뜻하는 말이다.
173 남성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은 자아실현, 경제적 부의 축적, 명예와 관련되어 있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세월과 더불어 무엇을 하든 아름다움을 잃어갈 뿐이다.
178 남자, 여자, 젊은이, 늙은이, 이 모든 인간들은 죽을 때까지 자라고,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어리다고 주장하는 기이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
181 남녀간의 간지럼은 대화를 통해 시작된다. 날씨, 건강, 취미, 좋아하는 음식 따위의 언어적 쓰다듬기를 통해 언어적 간지럼의 첫 단계를 밟는다. 우리는 친한 사람일수록 쓸데없는 말의 교환, 즉 언어적 쓰다듬기를 많이 한다. 그 쓸데없는 말을 통해서 상대방의 기분을 약간이나마 들뜨게 한다.
184 한 생물학자가 참으로 절묘하게도, 소들을 괴롭히는 ‘등에’를 가리키는 그리스어를 빌려와 ‘발정 estrus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이 거대 곤충은 소의 두꺼운 가죽 속에 아주 작은 알들을 낳는다. 등에 알이 유충으로 자라면, 그 꿈틀거림 때문에 숙주 동물은 가려움으로 미칠 지경이 된다. 성욕에 대한 가장 적절한 메타포는 ’긁어줘야만 하는 가려움‘일 것이다. - L.쉴레인 ’지나 사피엔스‘에서
193 사랑은 시각에서 시작되지만 최종적으로 미각으로 정리된다는 이야기이다.
203 여성이 자신의 성적 편력을 , 그것도 스스로 창녀가 되어 5년의 세월 동안 겪은 일들을 소설로 써서 충격을 준 여자가 있다. ‘창녀’를 쓴 캐나다의 넬리 이르캉이 그 장본인이다. ‘남자 예술가의 여자 쪽 쌍둥이는 창녀’라는 말처럼 남성 예술가들은 창녀와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그림으로, 음악으로, 문학으로 샅샅이 밝혀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예술의 시각은 남성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그것을 이 여자가 여성의 관점에서 까발려놓은 것이다.
205 여자들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달라지고 있다.
미국의 많은 ‘일하는 소녀들’은 창녀라는 직업을 스스로 택했다고 말한다. 이 행복한 매춘부들은 매춘의 해금을 옹호하는 조직을 구축하기 위해서 이국적인 무희와, 성인용 영화의 여배우, 전화 섹스 근로자들, 색정적인 안마사 등, 다양한 섹스 산업에 합류한다. 그들은 자신의 연합체를 ‘그대들의 낡아빠진 윤리를 집어치워라 Call Off Your Old Tired Ethics’는 문자의 머리글자만을 따서 코요테COYOTE라고 부른다. - 헬렌 피셔 ‘제1의 성’
217 이 강화된 킬러인 성난 여성의 형상은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남자들이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진 또 하나의 정복 대상인 관능적 여인상이 추가된 것이다.
- 낚시꾼의 은유와 상징
259 “오늘 꽝쳤어. 내일도 그럴 것 같아. 내가 여태까지 잡은 물고기 길이를 모두 합해도 1미터도 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하는 낚시꾼에게 기대할 것은 삶에도 낚시에도 그 아무 것에도 없다.
267 인간은 물고기에게 조그마한 미끼를 주지만 물고기는 그의 몸뚱이 전체를 인간에게 바쳐야 한다.
269 물고기의 시원한 입질을 유도하는 미끼에 대해 알아보려면 그 미끼를 인간이 직접 먹어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내 친구 B군은 참갯지렁이가 쇠고기 값보다 비싼 이유가 무엇이고 물고기들이 왜 그 지렁이를 좋아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내 앞에서 직접 한 마리 먹어보겠다는 것이었다. 설마 농담이겠지 하면서 말리지도 않았는데, 어느 틈엔가 한 자는 되어 보이는 갯지렁이 한 마리를 입에 넣고는 우물우물 씹는 것이 아닌가.
270 아버지가 묻는다
“너 혼자서 이 고기를 모두 잡았어?”
아들이 대답한다.
“아니요, 지렁이가 도와줬어요.”
277 “다정다감해서 일찍 흰머리가 된 우리를 세상 사람은 비웃겠죠?”
“세상 사람이 무슨 상관입니까. 인간 세상은 꿈같은 겁니다.”
282 낚시는 예술이다.
283 낚시란 우리가 알 수 없는 물 속 세계에 숨어있는 은유와 상징체계를 끌어올려 그 뜻을 마음속에 아로새기는, 세계에 대한 해석의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이다.
- 행복의 땅을 찾기 위한 지형도
289 19세기 미국인 비어스의 ‘악마의 사전’에는 행복이 ‘타인의 불행을 바라볼 때 생기는 일종의 안도감’으로 정리된다.
불운 - 결코 실수없이 찾아드는 종류의 운
291 우리 두 사람은 같은 영혼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오.
296 장자의 ‘지극한 즐거움은 즐거움이 없는 것’
노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항상 즐거움을 누린다.’
300 매화 곁의 바위는 예스러워야 제 격이다. 소나무 아래 바위는 보잘것없는 듯해야 어울린다. 대나무 곁에 놓인 바위는 비쩍 마른 것이어야 한다. 화분 안에 얹는 돌은 어여쁜 것이 좋다.
독서를 잘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책 아닌 것이 없다. 산수도 책이고 바둑과 술, 꽃과 달도 또한 책이다. 산수에 잘 노니는 자는 어디를 가도 산수 아님이 없다. 책도 또한 산수이고, 시와 술도 또한 산수이며, 꽃과 달 또한 산수가 된다.
張潮, ‘유몽영’에서
303 플라톤에게는 이데아에 도달하는 길이고, 니체에게는 디오니소스의 부활과 위버멘쉬의 등정이며, 마스크스에게는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이다. 이들은 오히려 목표가 그렇게 심원, 유장, 장대한 것에 만족했다. 쉽게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 목표를 세웠다면 그들의 불타는 정열이 그 목표를 태워버렸을 것이다.
309 ‘상냥’은 ‘아첨’과 ‘적의’사이의 중용.
310 모든 사념적인 것은 간단히 설명해야 한다는 오캄의 면도날 Occam's razor.
320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 나의 진정한 욕망은 타인의 사랑을 욕망하는 것이라고 헤겔도 인정했다.
334 행복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행복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IP *.81.17.137
- 첫인상
인터넷 서점에서 책이 도착하면, 우선 선을 본다. 책을 쓰다듬으면서 종이의 질감이나 표지디자인을 느끼고, 서문도 읽어보고, 출판연도와 발행부수를 보면서, 어떤 책부터 먼저 읽을까를 결정한다. 이번에 배송된 책 다섯 권은 전부 마음에 든다. 특히 이 책의 표지디자인이 아주 마음에 든다. 추상적인 무늬가 여러색깔로 나뉘어진 구성인데, 난해하면서도 묵직한 중량감을 준다. 책의 내용과도 잘 어울린다. 이성욱의 평론집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도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분위기는 딴판인데도 역시 눈에 꼭 든다.
가벼운 마음으로 도종환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부터 읽었다. 이 책은 두 번 째로 선택된 셈이다. 서문을 읽는데, 분명하고 경쾌한 어투가 딱 내 스타일이다. 문학과 예술, 문화, 철학, 자연, 과학을 함께 버무린 장르 불명의 글이라고 했다. 비평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글, 교수나 평론가로서 정체불명의 이런 글을 왜 쓰느냐고 묻는다면, ‘허전해서 쓴다’고 대답하겠단다. 저자는 중앙대 문창과 교수이며, 73년에 문학평론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으로 보아, 50대 후반으로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책 날개에 저자의 연령이 소개되지 않게 되었다. 오직 글의 내용으로만 판단해달라는 얘기겠지. 좋은 변화이다.
이 책은 저자의 잡식성 관심에서 비롯된 퓨전 상차림이다. 재즈와 해금같은 음악에 대한 애정, 고갱과 고흐에 대한 분석, 성욕에 대한 고찰, 행복론에 대한 탐구, 낚시에 대한 총체적 접근... 등이 다루어져 있다. 이 책의 부제 ‘사유의 미식가가 발견한 문화의 즐거움’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셈이다. 문자를 다루고 음악을 들으며, 무언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있는대로 자료를 뒤져 글 한 편 써놓는 지식인의 놀이터인 셈이다.
- 책을 읽고
앞부분에 배치된 다섯 편의 에세이를 배꼽을 잡으며 읽었다. 음악에 대한 애정과 고갱에 대한 비아냥을 자신있는 어조로 피력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웃기는 것이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앎’이라고 했단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한다. 저자는 이것을 이렇게 푼다. “지지는 지지하고 부지지는 부지지 해야 하느니라 <소변은 소변이고 대변은 대변이다>” 즉 앎과 모름의 분별이 곧 참지식이라는 것이다. 마치 공부하기 싫어서 훈장놀려먹을 궁리만 하는 서당의 악동같다.
외국에 놀러가면서 아내를 동반하는 것은 ‘약수터에 환타’를 갖고 가는 격이요, ‘잔치집에 도시락’ 가지고 가는 것이라는 등, 익살이 끊이질 않는다.
뒤에 실린 글들은 그다지 유머러스하지는 않다. 인용이 너무 많고 현학적이며, 분량도 길어서 조금 딱딱하다. 서운한 일이다.
그대신 이 책은 내게 ‘지식인이 사유하는 방식’, 혹은 ‘지식인이 노는 방식’을 엿보게 해주었다. 어느날 문득 저자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생각이 미쳤다. 다른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 어떻게 말했을까, 그는 문헌을 뒤지기 시작한다. 51쪽짜리 에세이 한 편을 쓰기위해 얼마나 많은 문헌을 뒤졌을까. 동서양의 행복관과, 불교 기독교의 행복관을 논하고, 그리이스 키니코스학파를 언급하고 천상병의 시를 인용하려면 말이다. 하지만 결국 그가 도달한 결론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그 결론조차, 저자는 J. S 밀의 말을 빌려서 말한다.
“행복하게 되는 유일한 삶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행복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어찌보면 일반인이 삶의 지혜로도 체득할 수 있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그토록 잡다한 이론을 설파한 것이다. 이는 성욕이나 유아고착적 현상에 대해 다룬 글들도 마찬가지이다. 동화와 애니메이션과 소설을 인용하고, 심지어 오페라 아리아의 가사까지 옮겨놓는다. 에너지가 넘치는 저자의 잡식성 기호가 놀랍기도 하지만, 정작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저자의 생각이 빠져있는 것이다. 그 분야에 대해 저자는 어떤 체험을 거쳐, 어떤 욕구불만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아, 낚시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저자의 체험이 노출된다. 무난하고 말하기 쉬운 분야이므로?
따라서 ‘악마의 사전’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지식인이란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하지 않고는, 단 한 줄도 자기견해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 혹은 ‘직접 몸을 움직여 사는 것보다, 문자로 접하는 것에 더 큰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저자의 박식하고 다양한 식도락에 기가 죽어서 조금 비아냥거려 보았다. 아들까지 3대가 대동강 낚시꾼이라고 희희낙락하는 그에게서, 팔방미인의 풍류를 본다. 정작 자신의 전공인 문학을 제외하고도, 그림과 음악과 낚시에 쏟아지는 그의 애정행각이 대단하다. ‘직접 몸을 움직여 사는 것보다, 문자로 접하는 것에 더 큰 쾌락을 느끼는 부류’의 말석에서, 나의 무미건조한 일상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 책에서 인용한 부분
- 재즈
31 나는 재즈에 관한 한 역인종차별주의자이다.
“백인은 죽었다 깨면 모를까, 목소리로는 흑인을 능가할 수 없어.”
32 ‘루시’라는 원인 화석은 약 3백만년 전에 생존했던 여성으로, 그 화석이 발견될 당시 발견 현장에서 비틀스의 노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와 그 같은 애칭이 붙었다.
35 흑인가수들의 무게가 깔리면서도 호소력 있는 저음과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답고 침투력있는 고음은 선조들의 생활의 필요 때문에 취해진 적응 행동에서 유래되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음악은 언어가 생긴 다음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말과 더불어 같이 생겨난 예술이다.
- 음악의 마력
46 점잔을 강조하는 사대부의 시각에서 활과 현의 마찰적 접촉이라는 관능적 욕망의 이미지를 해금이 강하게 지녀서 그 마찰적 접촉을 무시할 수 있게 입으로 부는 관악기 쪽으로 해금을 밀어붙인 것이다.
60 음악의 세계에서는 음악의 참뜻을 이해하는 지음知音, 즉 판소리 용어로 노래 잘하는 명창보다 노래 잘 듣는 ‘귀 명창’의 역할이 중요하다.
67 다른 예술은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음악은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쇼펜하우어
죽음이란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듣지 못하는 것 - 아인슈타인
69 철학자 딜타이 식으로 표현하면 음악은 우리에게 ‘보다 많은 삶’을 선사한다. 음악은 우리의 모든 감각을 활성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음악을 들으면 우리의 모든 감각이 일제히 소리치며 일어나 팔딱거리면서 우리가 활기차게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 고갱, 비속한 문명인
77 고갱이 프랑스 독자를 위해 쓴 그의 타히티 체류기 ‘노아 노아’는 이러한 허위와 가식과 식민지 지배국 국민으로서의 교만함, 그의 타고난 거짓말 꾸미기로 점철된 책이다. ‘노아 노아’는 ‘향기’, 또는 ‘향기로운’이라는 뜻의 타히티 말인데, 그 향기에는 오만과 편견이라는 프랑스제 인공 합성 향료의 냄새가 가득하다. 그는 자신이 소설가라도 된 듯이 이 책을 통해서 허구적 사실을 진실로 위장했다.
82-고갱은 타히티의 현실을 무시하고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이상적 현실로 대체시켜 타히티에 대한 인공낙원적인 미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서구 미술의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이국적 정서의 충격을 준다.
- 예술/ 어린이사랑
125 제의와 공연예술은 그 형식과 기능에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선사시대의 예술은 제의라는 형식에 숨어 실제의 삶에서 느껴진 강렬한 욕망과 정서를 표출한다. 그것을 재생산하고 재연한다는 점에서 예술과 제의는 일치하고 있다.
167 유태성숙 neoteny이란 어린이의 모습이나 유생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뜻하는 말이다.
173 남성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은 자아실현, 경제적 부의 축적, 명예와 관련되어 있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세월과 더불어 무엇을 하든 아름다움을 잃어갈 뿐이다.
178 남자, 여자, 젊은이, 늙은이, 이 모든 인간들은 죽을 때까지 자라고,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어리다고 주장하는 기이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
181 남녀간의 간지럼은 대화를 통해 시작된다. 날씨, 건강, 취미, 좋아하는 음식 따위의 언어적 쓰다듬기를 통해 언어적 간지럼의 첫 단계를 밟는다. 우리는 친한 사람일수록 쓸데없는 말의 교환, 즉 언어적 쓰다듬기를 많이 한다. 그 쓸데없는 말을 통해서 상대방의 기분을 약간이나마 들뜨게 한다.
184 한 생물학자가 참으로 절묘하게도, 소들을 괴롭히는 ‘등에’를 가리키는 그리스어를 빌려와 ‘발정 estrus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이 거대 곤충은 소의 두꺼운 가죽 속에 아주 작은 알들을 낳는다. 등에 알이 유충으로 자라면, 그 꿈틀거림 때문에 숙주 동물은 가려움으로 미칠 지경이 된다. 성욕에 대한 가장 적절한 메타포는 ’긁어줘야만 하는 가려움‘일 것이다. - L.쉴레인 ’지나 사피엔스‘에서
193 사랑은 시각에서 시작되지만 최종적으로 미각으로 정리된다는 이야기이다.
203 여성이 자신의 성적 편력을 , 그것도 스스로 창녀가 되어 5년의 세월 동안 겪은 일들을 소설로 써서 충격을 준 여자가 있다. ‘창녀’를 쓴 캐나다의 넬리 이르캉이 그 장본인이다. ‘남자 예술가의 여자 쪽 쌍둥이는 창녀’라는 말처럼 남성 예술가들은 창녀와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그림으로, 음악으로, 문학으로 샅샅이 밝혀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예술의 시각은 남성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그것을 이 여자가 여성의 관점에서 까발려놓은 것이다.
205 여자들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달라지고 있다.
미국의 많은 ‘일하는 소녀들’은 창녀라는 직업을 스스로 택했다고 말한다. 이 행복한 매춘부들은 매춘의 해금을 옹호하는 조직을 구축하기 위해서 이국적인 무희와, 성인용 영화의 여배우, 전화 섹스 근로자들, 색정적인 안마사 등, 다양한 섹스 산업에 합류한다. 그들은 자신의 연합체를 ‘그대들의 낡아빠진 윤리를 집어치워라 Call Off Your Old Tired Ethics’는 문자의 머리글자만을 따서 코요테COYOTE라고 부른다. - 헬렌 피셔 ‘제1의 성’
217 이 강화된 킬러인 성난 여성의 형상은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남자들이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진 또 하나의 정복 대상인 관능적 여인상이 추가된 것이다.
- 낚시꾼의 은유와 상징
259 “오늘 꽝쳤어. 내일도 그럴 것 같아. 내가 여태까지 잡은 물고기 길이를 모두 합해도 1미터도 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하는 낚시꾼에게 기대할 것은 삶에도 낚시에도 그 아무 것에도 없다.
267 인간은 물고기에게 조그마한 미끼를 주지만 물고기는 그의 몸뚱이 전체를 인간에게 바쳐야 한다.
269 물고기의 시원한 입질을 유도하는 미끼에 대해 알아보려면 그 미끼를 인간이 직접 먹어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내 친구 B군은 참갯지렁이가 쇠고기 값보다 비싼 이유가 무엇이고 물고기들이 왜 그 지렁이를 좋아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내 앞에서 직접 한 마리 먹어보겠다는 것이었다. 설마 농담이겠지 하면서 말리지도 않았는데, 어느 틈엔가 한 자는 되어 보이는 갯지렁이 한 마리를 입에 넣고는 우물우물 씹는 것이 아닌가.
270 아버지가 묻는다
“너 혼자서 이 고기를 모두 잡았어?”
아들이 대답한다.
“아니요, 지렁이가 도와줬어요.”
277 “다정다감해서 일찍 흰머리가 된 우리를 세상 사람은 비웃겠죠?”
“세상 사람이 무슨 상관입니까. 인간 세상은 꿈같은 겁니다.”
282 낚시는 예술이다.
283 낚시란 우리가 알 수 없는 물 속 세계에 숨어있는 은유와 상징체계를 끌어올려 그 뜻을 마음속에 아로새기는, 세계에 대한 해석의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이다.
- 행복의 땅을 찾기 위한 지형도
289 19세기 미국인 비어스의 ‘악마의 사전’에는 행복이 ‘타인의 불행을 바라볼 때 생기는 일종의 안도감’으로 정리된다.
불운 - 결코 실수없이 찾아드는 종류의 운
291 우리 두 사람은 같은 영혼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오.
296 장자의 ‘지극한 즐거움은 즐거움이 없는 것’
노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항상 즐거움을 누린다.’
300 매화 곁의 바위는 예스러워야 제 격이다. 소나무 아래 바위는 보잘것없는 듯해야 어울린다. 대나무 곁에 놓인 바위는 비쩍 마른 것이어야 한다. 화분 안에 얹는 돌은 어여쁜 것이 좋다.
독서를 잘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책 아닌 것이 없다. 산수도 책이고 바둑과 술, 꽃과 달도 또한 책이다. 산수에 잘 노니는 자는 어디를 가도 산수 아님이 없다. 책도 또한 산수이고, 시와 술도 또한 산수이며, 꽃과 달 또한 산수가 된다.
張潮, ‘유몽영’에서
303 플라톤에게는 이데아에 도달하는 길이고, 니체에게는 디오니소스의 부활과 위버멘쉬의 등정이며, 마스크스에게는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이다. 이들은 오히려 목표가 그렇게 심원, 유장, 장대한 것에 만족했다. 쉽게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 목표를 세웠다면 그들의 불타는 정열이 그 목표를 태워버렸을 것이다.
309 ‘상냥’은 ‘아첨’과 ‘적의’사이의 중용.
310 모든 사념적인 것은 간단히 설명해야 한다는 오캄의 면도날 Occam's razor.
320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 나의 진정한 욕망은 타인의 사랑을 욕망하는 것이라고 헤겔도 인정했다.
334 행복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행복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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