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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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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1일 10시 22분 등록
선생님께서 <미완의 시대> 라는 책을 첫 번째 과제물로 선정한 이유를 고민해 보았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혹시 연구원 생활이 만만치 않음을 주지시키고자 계획한 기선제압용은 아닐까? 처음 책을 받아 보는 순간 책의 두께에 우선 질리고 책을 읽는 동안 내용의 까칠함에 치이고 책을 덮는 순간 나의 텅 빈 머리 속에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여기서 제압당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뚫고 살아나가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절실하지 않은 사람은 지금 그만 두세요. 중간에 포기하면 자신을 모욕하고 다른 사람의 기회도 빼앗은 거예요.”

이내 정신을 차리며 책과 사투를 버렸다. 그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전사의 육성을 하느님과 약속도 잊은 채 독후감에 담아 올린다.


이방인의 눈으로 본 20세기 정치사


1. 저자에 대하여

에릭 홉스봄은 1917년 6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계 영국인 아버지와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빈과 독일에서 나치의 등장과 대공황 을 꺾으면서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역사가가 되기 위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였다. 세상을 참여관찰자의 눈으로 보고 세상이 내는 소리를 몇 권의 명저로 담아냈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대 유럽의 시대적 상황을 담아낸 4권의 책이 번역되면서 신뢰받는 좌파 역사가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은 1789년부터 1848년까지의 유럽의 혁명을 다룬 <혁명의 시대>, 부르주아의 자본이 경제의 주도권을 잡는 시기인 1848년부터 1875년까지를 다룬 <자본의 시대>, 세계적 경제 불황시기인 1875년부터 1914년까지를 다룬 <제국의 시대> 그리고 이념적 대립의 시기인 1914년부터 1991년까지를 다룬 <극단의 시대> 등이다. 나는 <미완의 시대>을 통해 저자와 처음 접하게 되었다.

홉스봄을 역사학자로서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정치활동을 하는 소신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역사가로서 세상을 단지 관찰과 분석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치현장에서 활동하였다. 평생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면서도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는 역사와 일정한 거리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과거를 또 다른 나라로 인식하고 여행자의 입장에서 관찰하였고 국적과 이념을 초월한 관찰자의 눈으로 기록하였다. 역사가 이전에 한 인간이고 한 나라의 국민이면서도 역사에 대해 그토록 오랫동안 보편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정작 본인은 이방인처럼 살아온 인생역정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역사가로서 각별한 자산이라고 오히려 역설한다.

이집트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떠났고 빈과 베를린에서는 잉글랜드인으로, 영국에서는 유럽에서 온 이민자로,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에게 외면당했다. 정치적으로 공산당원이면서 당내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에게는 지식인으로 인식되어 주류 속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항상 주변인으로 삶을 살았다. 어떤 집단에서도 정서적 일체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오히려 역사가로서의 소신 있는 길을 걸을 수 있었고 자신만의 보편 주의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이념을 초월한 긍정적인 평가를 지금까지도 받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홉스봄의 보편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시각은 그의 저서 <만들어진 전통> 속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영국 여왕이 의회 개원 때 마차를 타고 가는 성대한 의식은 마치 천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시대 때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관례였다는 것과 스코틀랜드의 전통 의상으로 알려진 남자 치마 킬트도 사실은 잉글랜드인 기업주가 스코틀랜드 인부들을 더 많이 부려먹기 위해 일하기 편하라고 입힌 옷이 상업화된 것에 불과하다고 것 등은 이제까지의 전통이 보여주는 허구성을 냉철히 파헤치고 있다. 역사가 특정 집단의 입맛대로 바뀌어서는 안 되고 역사가의 정서적 일체감에 의해서도 달라져서는 안 된다고 홉스봄은 강조한다.

또한, 정치와 이념으로 대표되는 20세기에 마르크스 사상가로서 활동했지만 이념을 초월한 유연한 사고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고 놀라운 사람이다. 공산주의가 우월했던 시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인 재즈를 즐겼다는 점과 자본주의 사회가 우월한 지금도 공산당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상과 접속하는 방식과 통로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자신의 이념과 감성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언제든지 마음을 열 수 있는 수용성이 매우 놀랍다.


2. 내 마음에 들어 온 글귀

[11] 지식인의 자서전은 그 사람의 생각, 태도, 행동에 대한 기록도 담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한낱 변호로 끝나서는 안 된다.

[12] 이 책은 개인의 경험으로 그려낸 세계사가 아니라 세계사가 경험의 내용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아니, 카를 마르크스의 말을 약간 고쳐서 써먹자면 “인간이 (자신이 삶을) 만들어 나가되 자기 마음대로 (그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상황 속에서 (그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주어졌거나 물려받았기 때문에 바로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아니, 인간을 둘러싼 세계가 선택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데 발판이 되는, 늘 똑같지는 않지만 늘 제한된 수의 선택항을 내놓는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극단의 시대>의 뒷면이라고 볼 수도 있다.

[13] 역사와 사회과학이라는 경기에서 뛰는 선수에게는, 특히 나처럼 직관과 우연에 힘입어 주제를 선택한 다음 나중에 가서 조리 정연하게 내용을 엮는 역사가의 경우에는 더더욱,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 다시 말해서 자기 몸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바깥에 설 줄 아는 능력이 이성을 신뢰하고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능력 다음으로 중요하다.

[13] “역사는 일어난 일을 밖에서 기록하는 것이고 회고록은 일어난 일을 안에서 기록하는 것이다.”

[27] 자서전을 쓰는 역사가의 임무는 단순히 옛날로 다시 가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지도에 담는 것이다. 지도가 없이 어떻게 그 굴곡 많은 일생의 여정을 쫓아갈 수 있고, 언제 그리고 왜 우리가 머뭇거리고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는지, 또 우리가 기댔고 얽혀들었던 사람들 속에서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은 개개인의 삶에만 빛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에 빛을 던진다.

[30] 그것이 얼마나 격동기였는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는 아이들에게는 정신없이 바뀌는 우표였다.

[31] 우표 말고 또 하나의 직접적 증거는 경제 혼란을 겪던 시기에 여러 번 바뀌었던 동전과 지폐다.

[39] 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학교와 가족이라는 두 개의 관계망 중에서 훨씬 항구적인 쪽을 꼽으라면 단연코 가족이다.

[40] 유대인만의 남다른 면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다와 나라를 넘어도 이어지는 그물망이 가족이라는 믿음, 이 나라 저 나라로 옮겨 다니며 사는 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믿음, 유대인 가정 가운데 상당수가 업으로 삼았던 상업은 특히 1914년 8월 문명이 무너지면서 중유럽을 집어삼킨 파국의 시대에는 앞날이 불투명하여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먹고 살기가 팍팍하다는 인식이었다.

[53] 반유대주의를 몸소 겪은 적이 없었고 사춘기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자신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만큼 전통 유대교의 관습과 믿음과는 동떨어지게 살았던, 아버지는 잉글랜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빈 유대인이었던 1920년대의 똑똑한 소년에게 “유대인다움”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55] 만일 우리가 사고 실험을 통해서 헤르츨의 염원이 이루어져서 모든 유대인이 유대인 어머니한테서 태어난 자식에게만 완전한 시민권을 주는 독립된 영토를 가진 작은 나라 안에 모여 산다면 그것은 인류 전체에게도, 유대인 스스로에게도 안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60] 이쯤 해서 아들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피하지 말고 아버지에 대해서 한마디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여간 어렵지 않은 숙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기억할 수 도 있었을 것을 대부분 내가 일부러 까먹는 쪽을 택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80]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의 시간은 비극과 충격과 상실과 불안의 세월이었고 그것을 감내해야 했던 두 아이의 삶에 깊은 상흔을 틀림없이 남겼다고 보아야 한다. ---------- (중략)----------
그렇지만 그 시절이 아주 고통스러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워낙에 나라는 사람이 불쾌하거나 받아들이기 싫은 데이터는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되살릴지언정 일단은 ‘쓰레기통’에다 던져놓고 보는 컴퓨터 같은 성향이라서 이런 착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왜 그 시절을 썩 행복하지는 않았어도 그렇다고 해서 유난히 고통스럽게 경험하지 않았는지를 착각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려운 상황을 무사히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현실 세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95] 운명은 그처럼 무심코 내린 집안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103]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스스로 생각을 하는 것이다.

[128] 나는 내 공산주의의 바탕이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적이 있는데 이 “집단 황홀경”은 피억압자에 대한 연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완벽하고 총체적인 지적 체계가 주는 미학적 매력, 새로운 예루살렘을 염원하던 시인 블레이크와 비슷한 약간의 소망, 속물근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지적 혐오감과 함께 내가 공산주의에 빨려든 다섯 가지 이유가운데 하나였다.

[140]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점령당한 나의 삶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절대적 감성을 심어준 것은 바로 재즈였다.
[141] 내가 그 다음 몇 년 동안 극단적이리만큼 관념의 세계에서만 살았던 것은 피 끓는 열여섯 살의 소년이 자기의 머릿속을 온통 채운 정치투쟁에 뛰어드는 데 결사반대한 대리 부모와 함께 살아야 했다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165]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책을 열심히 읽은 것일까? 간단하게 답하자면, 마르크스 시각으로,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역사적 시각으로 세상을 풀이하고 싶었다. 가슴은 뜨거웠지만 조직에 속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소극적으로 움직이던 10대의 공산주의 지식인에게는 그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사실 없었다.

[166] 마르크스주의가 마약처럼 뿌리치기 어려웠던 까닭은 사상이 워낙 총체적이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삼라만상의 이론”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삼라만상을 보는 틀”은 제공했다.

[171] 나와 함께 대학을 다닌 학생들은 케임브리지 역사상 가장 빨갛고 급진적이었는데 나는 그 한복판에 있었다. 뉴턴, 다윈, 제임스 클럭 맥스웰 같은 쟁쟁한 역대 졸업생을 감안하더라도, 내가 들어갔을 무렵의 케임브리지는 역사상 가장 화려한 업적을 올리고 있었다.

[202] 우리가 살았던 1930년대는 올바른 가치를 내걸고 악의 무리와 정면 대결을 벌였던 시절이다. 우리는 그것을 즐겼다. 그리고 케임브리지의 급진파 학생들 대부분이 그런 일에 시간을 많이 투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세상일에 대해서 예전의 우리와 똑같은 문제의식을 느끼면서도 우리하고는 달리 자신들의 의분을 행동을 옮기지 모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또 거기서 좌절감을 느끼지만 우리는 불행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215] 공산주의가 우리 세대의 가장 똑똑한 남녀를 왜 그렇게 많이 빨아들였는가 하는 물음과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우리한테 어떤 뜻이 있었는가 하는 물음은 20세기의 역사에서 핵심주제가 되어야 한다. ..... “20세기에 가장 위력을 떨친 악마의 하나는 정치적 열망”...... 그리고 그런 열정의 핵심을 꿰찬 것이 공산주의였다.

[218] 권력은 어김없이 개인을 부패시킨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부패한 권력은 떨치기 어려운 유혹인 것도 사실이다. 특히 전쟁 같은 비상시국에서는 권력은 개인의 자격으로는 결코 받아들이지 못할 일을 우리가 하게 만들고 또 그것이 정당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229]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섣불리 떠들지 않는 지혜를 보여주었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그들이 말한 몇 안 되는 예언도 공산주의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내다보았던 바로 그 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한계를 모르는 엄청난 생산력의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231]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하고 많은 열망 중에서도 공산주의가 그리는 이상 낙원은 세 가지 관점에서 달랐다. 첫째,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기필코 승리한다는 사실을 과학적 방법으로 입증했다. ......... 둘째, 국제주의가 살아 있었다. 우리의 운동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었지 특수한 집단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의 혁명 의지에는 세 번째 요소가 있었다.

[251]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주의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보다 확연히 낙후된 체제이고 도무지 잘 안 굴러간다는 의혹을 공산주의자들이 처음 품었거나 그런 사실을 믿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 결론을 1970년대 후반에 내렸다고 털어놓았다.

[302] 유대인과 아랍인이 친구와 동지로서 어울릴 수 있었던 유일한 조직은 공산당이었다.

[303] 냉전 시대에 자유주의자가 떠들어댄 논리 중에서 정말로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은 공산주의자는 누구나 적국 소련의 첩자이며 따라서 공산주의자는 지식 공동체 일원으로 남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317] 결국 우리가 모스크바에 여전히 충성을 바친 것은 세계 사회주의 대의는 아무리 영웅적이고 존경할 만한 나라라도 소국의 지원 없이도 추구할 수 있지만 소련 같은 강대국의 지원 없이는 이룰 수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331] 20세기의 세계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존 리드가 같은 제목을 단 책에서 묘사한 10월 혁명의 열흘이고 또 하나는 1956년 2월 14일부터 25일가지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다.

[331] 세계 공산주의 운동은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은 유일한 나라에 둥지를 튼 중앙집권적이며 군사조직에 가까운 사령부의 지휘 아래 세계 변혁을 위해 전념하는 일사불란한 조직으로 레닌 노선에 따라 만들어졌다. 세계 공산주의 운동이 세계적 의미를 띤 것은 그것이 소련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355] 친구들도 대부분 떠났고 또 당 안에서 반골 노릇을 한 사람이 도대체 왜 당에 남았는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356] 1956년의 나라는 사람을 자서전 집필가의 눈이 아니라 역사가의 눈으로 되돌아보았을 때 물론 당을 떠날까하고 생각해본 적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당에 남는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잉글랜드에서 영국 젊은이로 공산주의에 입문한 것이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져갈 때 중유럽에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내가 공산당에 들어갔을 때만 하더라도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그저 파시즘하고만 싸운다는 뜻이 아니다. 세계 혁명을 위해 싸운다는 뜻이었다.

[357] 성장한 곳의 풍토와 혁명운동에 투신한 시기가 남들하고 달랐기 때문에 나는 홀가분하게 공산당을 박차고 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공산당에 남은 것은 그래서가 아닌가 싶다. 아무도 내 등을 떠밀지 않았을 뿐더러 나가야 할 피치 못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역사가가아니라 자서전을 쓰는 사람으로 돌아와서 말한다면 개인적 감정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자존심이었다. 공산당원이라는 멍에를 벗어던진다면 적어도 미국에서는 더 잘나갈 것이다. 은근슬쩍 빠져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냉전의 한복판에서 그런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공산주의자로 성공함으로써 자신에게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자부심이 잘났다는 것은 아니지만 못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았다.

[359] 지진이라든가 화산 폭발처럼 한눈에 재앙처럼 보이는 순간이 역사에도 있다. 가령 두 번의 세계 대전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한 사람의 인생살이에도 그와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364] “그저 일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전문직“을 가지는 것이 사내들의 꿈이었던 계급에 우리가 속했다면 우리는 특히 가방 끈이 길수록 부모 세대보다 대체로 잘살고 경우에 따라서는 훨씬 더 잘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같은 세대 안에서도 이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온 다음부터는 상대적으로 낮은 자리에서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던 사람, 그리고 부모가 이미 아이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재산이나 특권, 권력이나 특출한 전문적 기량을 쌓아올린 최상층부에 속한 사람이 그런 경우였다. 정치가 되었든 과학이 되었든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이 되었든 아버지가 눈부신 업적을 쌓은 분야로 진출한 자식은 들러리라는 열등감에 빠질 수 있었다.

[410] 역사가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혁명은 혁명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수히 많은 말을 통해 그 성격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것은 입으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문자가 있는 사회에서는 글을 아는 남녀가 써내는 수많은 글로 나타난다.

[436] 국영 기업체의 비율이 적잖은 몫을 차지하는 혼합 경제에서 노동자 집단은 파업이 고용주에게 끼칠 잠재적 손실을 겨누기보다는 파업으로 국민이 겪을 불편을 노렸다. 다시 말해서 해결사로 나서라고 정부에 압박을 가하는 전략으로 나갔다. 이렇게 되니까 노동자 집단사이에도 잠재적 갈등 요인이 커졌고 노동 운동에 대한 장악력도 전체적으로 낮아질 위험서이 커졌다.

[453] 우리가 블레어의 새로운 노동당을 비판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널리 퍼진 자유시장 경제 신학의 이념적 전제를 너무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민중의 처지를 낫게 만드는 모든 정치 운동의 토대를 망가뜨리면서 자연히 노동당 정부의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전제, 다시 말해서 사회를 효율적으로 꾸려가는 것은 기업인처럼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사고방식이 문제였다.

[459] 사회민주주의의 조직력이 약해지고 공산주의가 해체된 지금 위협은 이성의 적에서 생겨나고 있다. 바로 종교나 민족, 부족 근본주의자, 외국인 혐오주의자, 지금 인도, 이스라엘, 이탈리아의 정권을 쥔 세력처럼 파시즘의 후예거나 파시즘에 고무받은 정당들이 그들이다. 반세기동안 반공주의로 냉전을 이어왔는데 미국 영토 안에서 미국 국민을 살상한 미국의 유일한 적이 한때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돈을 대준 수니 이슬람 근본주의 투사들과 미국의 극우 광신도들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수많은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다.

[462]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전문가에게만이 아니라 시민에게도 중요하다. 다행히 영국은 애덤 스미스, 에드워드 기번, 찰스 다윈, 메이너드 케인스처럼 전문가들이 대중을 위해 진지하면서도 딱딱하지 않은 저술을 하는 훌륭한 전통이 있다. 모름지기 역사가라면 자기와 똑같은 역사가들만 읽는 글을 써서는 안 된다.

[481] 역사가 길고 짧고를 떠나 국가와 체제, 정체성을 추구하는 집단, 냉전이라는 거대한 빙산의 수면 아래 은폐되어 있었던 힘들이 역사에 가하는 정치적 압력은 유례없이 강해지고 있고 현대 언론도 장삿속으로 역사를 전에 없이 키워주고 있다. 진짜로 있었던 과거가 아니라 자기 목적에 부합되는 과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수정되고 날조되는 역사가 늘어나고 있다. 현대는 위대한 역사신화학의 시대다. 역사 전문가들이 정치에 흔들리지 않고 역사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역사가를 여기저기서 부른다.

[488] 가르치기와 글쓰기의 핵은 모두 소통이다. 두 가지를 모두 즐기는 사람은 복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절해고도에서 어디로 갈지 모르고 누가 읽을 지도 모를 글을 책처럼 생긴 병에 담아서 드넓은 바다로 띄워 보내야 하는 막막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르치기와 글쓰기를 같이 하는 사람은 잠재 독자를 앞에 놓고 바로 말을 거는 셈이다.

[488] 교수는 배우보다 더 힘든 일을 한다. 공연을 보면서 정서적 만족을 얻는데 그치지 않고 새겨듣고 써먹어야 할 구체적 정보와 사상을 청중에게 듬뿍 안겨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느끼기 때문이다.

[488] 선생이라는 직업의 만족은 근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서 얻는 것이다.

[489] 자서전을 쓰는 학자의 기억에서 지나간 세월은 언젠가 아메리카의 높은 언덕에서 지켜보았던 짐칸을 끝없이 달고 대지를 가로지르던 화물열차처럼 아득히 뻗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짐칸 하나하나보다는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달라지는 풍광이 인상적이었다.

[492] 옛날에는 역사를 유물론적 시각으로 해석하면 전체주의의 선동이라고 규탄 받았지만 지금의 젊은 역사가는 그 때 못잖게, 아니 하다못해 강단 좌파에서도 유물론적 해석을 백안시하는 요즘 풍토에서는 더더욱 유물론적 해석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508] 나는 어릴 때부터 꿈꾸던 삶을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삶이 풀려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부질없고 어리석기조차 하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속삭이는 작은 유령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세상에서 마음 편히 지내서는 안 되지.” 젊었을 때 내가 그 글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527] 지금도 그렇지만 프랑스인은 굉장히 격식을 따지는 사람들이고 프랑스 사회는 명확하게 미리 정해진 규칙과 절차로 이루어진 극장과도 같다.

[528] 그런 나라에서는 지리 공간으로 들어가기는 아무리 쉬울지 몰라도 사람 공간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은 알음으로 소개를 받지 않으면 어려웠다.

[546] 프랑스 언어와 문화가 세계에서 맡았던 역할을 지키려는 프랑스의 끈질긴 수호 노력은 좌절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복수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동질화시키려는 세계화 조류에 맞서서 모든 언어를 지키고 민족과 문화의 특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고 또 어차피 질 수밖에 없다고 처음부터 접고 들어가서는 안 되는 싸움이다.

[572] 1945년 이후에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문화적 패권을 잃어버리고 사실상 프랑스어가 통용되는 게토 안으로 웅크리는 처지가 되었다면 이탈리아 예술, 과학, 산업, 디자인, 생활 방식의 위세는 나날이 올라갔고 이탈리아의 이미지도 변방에서 서양 문화의 중심부로 자리를 옮겼다.

[587] 이익을 창출하는 생산요소들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게 만들려고 혈안이 된 세상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바라는 세계화의 형태, 곧 잘사는 나라에서 더 나은 일자리를 찾으려는 소망은 어떻게 해서든 봉쇄하려고 한다.

[608] 역사가인 내가 중남미를 통해 개안을 했다면 그것은 보편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국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중남미는 역시 변화의 실험실이었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는 통념과는 다르게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609] 중남미에서는 우익의 수장이 노동운동에 감화를 주었고(아르헨티나, 브라질) 파시즘 창도자가 좌익 탄광 노조와 합세하여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주는 혁명을 일으켰으며(볼리비아) 세계에서 유일하게 군대를 없앤 나라가 있었으며(코스타리카) 대학생 사이에서 조직적으로 혁명성이 뛰어난 당원을 발탁하지만 부패에 찌들대로 찌든 제도혁명당의 일당체제로 굴러가는 나라가 있었다.(멕시코) 제3세계에서 온 이민 1세대가 대통령도 될 수 있고 유대인보다 아랍인(투르코스)이 대체로 더 잘나가는 곳이 바로 중남미였다.

[623] 내 또래의 지식인에게 두 개의 조국, 그러니까 하나는 자기가 태어난 나라, 또 하나는 프랑스가 있었다면, 20세기에 서양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 아니 궁극적으로는 세계 어디든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정신적으로 자기가 태어난 나라와 미국이라는 두 개의 조국이 있었다.

[623]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미국은 정말 미국이 아니라 주로 미국 문화를 통해 전파된 모습이다.

[624] 미국을 무대로 한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식 삶을 다룬 것이 아니라 극장을 찾는 관객의 꿈을 겨누고 만들어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였다. 우리의 미국관이 어디에선가 왔다면 그것은 기술과 음악에서 왔다. 기술은 관념으로, 음악은 경험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간접적으로 기술을 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립 라인을 실제로 본 사람은 드물었지만 포드 자동차착 그런데서 만들어진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반면에 문화는 우리한테 직접 다가왔다. ............. 재즈는 미국을 뜻했고 미국이 상징하는 것 때문에 재즈는 덩달아 현대성을 뜻했고 여자들의 짧게 치 머리와 기계의 시대를 뜻했다,

[627] 대공황이 휩쓴 10년 동안 우리가 미국에서 본 것은 <위대한 개츠비>의 상류층 세계가 아니라 <분노의 포도>에 그려진 밑바닥 삶이었다.

[644] 자기도취, 미국적인 것의 의미를 자꾸만 따지는 버릇, 지적으로 무게를 잡는 것은 미국문화의 세 가지 고질병이었다.

[649] 미국은 사는 곳과 일자리와 배우자를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도 심하게 바꾸는 남녀가 살아가는 나라다.

[649] 대체로 잠시 거쳤다 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항구적 공동체에서는 그 자리에서 어울리고 친해지고 작은 일이라고 서로 돕는 문화가 발전하지만 그 울타리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오히려 관심을 안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652] 미국은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재능과 열정과 새로움에 개방되어 있었다.

[652] 미국은 줄기차게 이루어내는 나라라야 한다.

[653] 미국의 역사가들은 자기 나라 역사에 대해 말할 때 “미국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을 끈질지게 던지지만 내 또래의 유럽의 역사가들은 스스로에 대해 그런 질문을 던진 적이 거의 없다.

[658] 18세기 답답한 헌법 안에 우겨 넣어져서 두 세기동안 법률가라는 공화국의 신학자 집단에 의해서 탈무드가 무색하게 열심히 주석이 달리긴 했지만 미국처럼 제도가 경직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라는 2002년 현재 웬만해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659] 적어도 공적 영역에서 보았을 때 미국이라는 나라는 평범한 사람들이 굴려도 돌아가게 만들어진 나라다. 그럴 수밖에 없었기도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래도 될 만큼 미국이라는 나라가 부유하고 강력했다. 정치에 관심을 두고 살아오는 동안 나는 세 명의 유능한 대통령(루수벨트, 케네디, 닉슨)이 자격도 없고 신망도 없었던 사람에 의해 전격적으로 교체되었으면서도 나라와 세계가 나아가는 진로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나라를 미국 말고는 본 적이 없다.

[660] 우리의 문제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 혹은 자신의 한계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미국은 자기편에 서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몰아붙인다.

[665] 나는 세계의 강대국들이 마이너리그로 강등당하는 것을, 천년은 갈 것처럼 보였던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혁명정권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미국의 세기”가 끝나는 것을 내 눈으로 보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 중에는 그것을 볼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과히 빗나간 예상은 아니리라.

[667] 역사는 우리식의 종교 전쟁에서 비롯되는 격정, 감정, 이념, 공포에서만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위험한 “일체감”이라는 유혹도 멀리해야 한다. 역사에 필요한 것은 기동성과 넓은 영토를 내려다보고 살필 수 있는 능력, 즉 자기의 뿌리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다.

[669]일체감은 다른 누구인가에 맞서서 정의되는 것이므로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은 어는 누군가와는 이질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것은 참극으로 이어진다.

[669] 낡은 체제가 허물어지고 낡은 정치 형태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국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새로운 체제, 국가, 민족, 일체감을 느끼는 집단의 입맛에 맞게 새로운 역사를 생산하는 것은 세계적 산업이 되었다. 과거와 끊임없이 단절하도록 만들어진 시대일수록 과거와의 연속성을 향한 인간적 욕망은 커지기 마련인데 언론은 대중의 구미에 맞춘 국민사, “역사 유산‘, 고대 사회로 꾸민 놀이 공원을 통해 그럴듯하게 역사를 날조하여 더욱 부채질한다.

[670] 한 사람이 역사가로서 제대로 살았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은 그 자신과 이 세상에 각별한 의미가 있었던 문제들에 의해 마치 기자가 아득히 먼 과거사를 보도하듯, 그러면서도 국외자가 아니라 깊이 결부된 사람으로서, 특히 “만약에”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지 또 거기에 답변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671]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3. 내가 저자라면


역사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내가 짧은 기간 동안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낀 점을 몇 자 적을까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시골 촌놈이 서울 대도시에 처음 올라온 것처럼 몹시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역사에 대해 문외한인데다가 정치라면 신물이 나서 멀리하는 내 탓도 있지만 자서전이라고 하기에는 밋밋한 책의 내용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역사를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개인사를 기록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물론 머리말에서 저자는 이 책을 쓰는 이유, 관점, 내용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는 있다.

“이 책은 개인의 경험으로 그려낸 세계사가 아니라 세계사가 경험의 내용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그렸다.”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그것 때문에 억울하게 상처를 받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공인으로서 갖는 부담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겠지만 개인의 역사를 그린 자서전인 만큼 자신의 감정에도 충실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특히, 살면서 힘들었던 부분이나 부모에게 느끼는 감정 등까지도 배제된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역정을 통해 감동과 교훈을 얻고자 기대했던 독자로서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기에는 한계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한 세기를 사는 동안 겪었던 커다란 사건들과 그 속에서 만난 역사적 인물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무진 애를 썼음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이 돼서야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역사 속으로 감정이입을 시키지 않고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은 파란만장한 어린시절의 아픈 기억들을 머리에서 없애버리려는 개인 심리에서 발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현실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자의식이 좌파 역사가이면서도 이념을 초월해 신뢰를 받는 이유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역사가로서 입장도 중요하지만 자신만큼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역사와 개인사 사이의 균형을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즉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더 보편적으로, 개인적 사건에 대해서는 더 주관적으로 서술할 수는 없었을까 라고 재고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을 보편적 사고의 지도에 담을 때, 시기 마다 나타나는 정치적 상황을 건강한 긴장관계를 통해 설명하였다면 저자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도 생각해본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18장부터 22장까지 기술한 나라와 지역에 대한 회상 부분을 확대하여 그 나라 국민성과 문화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였다면 한국성에 관심 있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참고자료가 되었을 것 같다. 저자만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생활해본 이방인이면서 뛰어난 관찰자의 눈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 총리의 위안부 망언 등은 한국사를 연구하는 홉스봄 같은 외국 역사가가 필요함을 더욱 느끼게 한다. 연구원 과제물이 아니었다면 놓쳐버릴 뻔 했던 책이어서 그런지 머릿속에 꼭 새겨두고 싶은 문장이 있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IP *.211.6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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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3.11 16:43:12 *.112.72.159
송창용 교수님, 10기 꿈프로그램, 꿈벗 전체모임에 이어 여기서 또 뵙게되네요.. ^^; '내가 저자라면'부분은 제가 절실하게 느꼈던 부분이에요. 2% 부족한 느낌..

그리고 '기선제압용' ㅋㅋㅋ 저도 몇번이고 그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사부님은 책이 재미있었다고 하셔서 완전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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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3.12 17:21:36 *.72.153.12
같은 책을 읽고, 거기서 서로 다른 키워드와 관점을 찾아내는 것을 보게됩니다. 이래서 리뷰를 올려주는 사람들을 좋아하게 됩니다. 놓친부분을 점검할 수 있어서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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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12 22:22:29 *.140.145.63
송교수님.. 올만이군요.. 리뷰가 참 솔직하고 정갈하고 겸손하군요.
솔직히 이 책은 저한테는 재미없을 가능성이 높군요..^^ 3월말에 남해
에서 꼭 뵐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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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3.13 12:09:35 *.244.218.10
네..솔직하고 담담하신 느낌입니다.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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