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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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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2일 13시 31분 등록
1. 저자 ‘에릭 홉스봄’에 대하여

1936년 새해 벽두, 열여덟 살의 에릭 홈스봄은 자신에 대해서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에릭 존 어니스트 홈스바움. 호리호리하고 젓가락 같고 구부정하고 못생기고 머리는 금발인 열여덟 살 반 먹은 녀석. 이해력이 빠르고 피상적이지만 일반 상식이 대단히 많고 이론적이고 보편적인 영역에서 남다른 아이디어도 풍부하다. 거드름을 피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데 문제는 본인도 이것을 믿기 때문에 그만큼 더 위험하고 때로는 먹혀들 때가 있다는 것. 사랑에 빠지는 적은 없고 욕정을 승화하는 데 상당한 재주가 있어 보이는데, 자주 그런 건 아니지만 자연이나 예술을 감상하면서 맛보는 희열로 표현되기도 함. 도덕심은 전혀 없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쳤음. 어떤 사람은 그를 몹시 역겨워하고 어떤 사람은 좋아하지만 다수는 그냥 우습게 봄. 혁명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아직까지는 신통한 지도력을 보이지 못했음. 작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자료를 주무를 수 있는 역량과 끈기가 모자람. 태산을 옮겼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만 하지 신념은 없음. 허영과 자만에 빠져 있음. 겁이 많음. 자연을 정말로 사랑함. 독일어를 까먹고 있음.

자신에 대해 솔직해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무엇보다 이처럼 스물살이 되기전에 자신의 장단점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그 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처럼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인생에서 선택한 길에 대한 첫마음을 잃지 않고 책임지는 것.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주위에 한 눈 팔지 않고 꿋꿋이 걸어간다는 것.

들뜬 사춘기가 지나고, 꿈에 부푼 대학 생활도 끝내고, 하루하루 겨우겨우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일상에 지쳐 버텨나가기 급급하다 보면 자신의 길은 커녕, 자신의 마음조차 알기 힘들 때가 많다는 것도, ‘사람이 이렇게 약한 존재구나!’, 그렇게 자위하면서 슬며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조류에 몸을 맡기고 쉽게 살아가고 싶은게 인지상정임을 아는 나이가 되었으니, 굳이 그가 격었던 격랑의 파도를 경험해보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힘든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그는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20세기라는 격변의 시기를 ‘역사학자’와 ‘공산주의자’라는 2가지 벅찬 화두를 짊어지고 헤쳐나왔다. 일찍이 자신의 길을 결정했고, 또 그의 말처럼 ‘자존심’ 때문이었던, 혹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희망’ 때문이었던 그는 이제는 망해버린 혁명인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십자가를 짊어졌고, 남들처럼 도망가지 않고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공산주의의 실험실을 묵묵히 정리하며 20세기의 문을 닫았다.

에릭 홉스봄이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어딘가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 거리를 둘 줄 아는 진정한 역사학자이자 보헤미안인 동시에, 힘들게 살아가는 인민들의 갈라진 손과 축 쳐진 어깨 위에 놓인 팍팍한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을 가졌기 때문이리라.

그는 말한다. “역사에 필요한 것은 기동성과 넓은 영토를 내려다보고 살필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서 자기의 뿌리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다. (중략) 우리의 이상은 아무리 늠름하다 하더라도 참나무나 삼나무가 아니라 지구의 절반을 누비고 다니면서 극지방에서도 열대지방에서도 잘사는 철새라야 한다.”.

“파스칼이 말한 머리가 모르는 가슴의 사연”,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인연이 깊거나 자기가 선택한 집단에 느끼는 정서적 일체감에 내가 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체감은 다른 누구인가와 맞서서 정의되는 것임으로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와는 이질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것은 참극으로 이어진다.”

또한 그는 네루다가 노래한 “위치코차의 돌 깨는 아들이여 / 푸른 별의 식은 음식을 먹던 아들이여 / 파란 보석의 맨발로 다니던 손자”들과 같이 고달픈 인생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혁명가였으며, “사회주의 세상이 왔다고 해서 모든 걱정과 슬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실연과 상심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나 해결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무리 생각이 트인 사람도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던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치열하고 자신에게 부끄럼없는 삶을 살았던 떳떳한 어른으로서, 자신의 직업에서 재미와 보람을 찾았던 전문 직업인으로서, 극단의 시대와 혁명의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고 경험한 역사가로서, 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서, 후배를 사랑하는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조언한다. “시대착오와 지방색 이 둘은 참으로 무서운 역사의 죄악”이라고, 이는 “다른 곳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무지에서 생겨난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시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고 나지막하지만 묵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감사합니다. 홉스봄 할아버지.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더 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현명하고 맑은 눈으로 욕심많고 혼탁한 세상에 바른 말씀 많이 부탁드립니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인용문’

다시 찾은 공동의 유년 시절, 노년에 이루어지는 상봉은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모습을 극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부조리하기도 하고 얄궂기도 하고 초현실적이기도 하고 소름끼치는 일이기도 하다. (p. 26)

이 사진은 20세기라는 험준한 지형을 뚫었던 한 길을 되밟으려는 한 역사가의 노력에서 출발점 노릇을 한다. 80년 전 빈의 한 테라스에서 어른들이 든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섰던 다섯 아이는 자기들이 패전의 파편과 허물어진 제국과 경제 파탄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부모와는 달리)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혁명과 대량 살상이 일어나는 시대를 살아가게 되리라는 사실을 (부모들처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p. 27)

이제 나는 서른여섯의 나이로 죽은 여자의 할아버지가 되기에도 충분할 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만일 저승의 문턱에 가로놓인 강 어딘가에서 우리가 재회한다 하더라도 내가 그 여인을 나보다 젊게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분은 여전히 나에게는 어머니일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살면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당연히 물을 것이고 나는 어머니의 소원 중에서 적어도 몇 가지는 그런 대로 이루었고 어머니가 기뻐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상징하는 몇 가지 직위도 받아들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p. 78)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이다. 내 경우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한 세기의 4분의 3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쌓인 지질학적 퇴적물을 벗겨내 그 속에 묻혀 있던 낯선 사람을 드러내거나 찾아내서 다시 뜯어 맞추는 것을 뜻한다. (p. 103)

육체적 경험과 맹렬한 격정이 가장 깊이 맞물린 할동은 누가 뭐래도 섹스이겠지만 그 다음 가는 것은 바로 뜨겁게 달아오른 분위기에서 대중 시위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결국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섹스와는 달리 대중 시위는 집단적 성격을 가지며 적어도 남자의 경우에는 순간으로 끝나는 섹스의 절정과는 달리 대중 시위에서 맛보는 희열은 몇시간이나 이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섹스와 마찬가지로 시위에 나선 사람은 걷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육체 활동을 해야한다. 그런 과정에서 개인은 집단 안에서 일체감을 느끼고 집단과 하나가 된다. (p. 128)

꼭 서부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우리는 기병대가 아니라 인디언이었지만, 위험을 감수하는 데서 느끼는 짜릿한 희열도 있었지만 정말로 두려움을 느낄 만큼 위험한 일어었던 것도 사실어었다. 1년쯤 지나서 나는 일기장에다가 이때의 경험을 “나를 때리려고 하는 사람 앞에서 서서 주먹이 날아오기를 기다릴 때처럼 몸이 오그라들면서도 가볍게 말라붙는 듯한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p. 131)

미미 이모는 영국 남부의 브라이튼이라는 해안 도시에서 버스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한적한 자연 보호 지역 안에서 정말로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하면서 영국에 남기로 결심했다. 이모는 그곳에서 평생의 꿈을 이루었다. 헛간과 광을 개조하여 ‘올드 비엔나 카페’라는 자기만의 성을 만든 것이다. (p. 138)

첫사랑을 느낄 만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살 무렵에 나는 이렇게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외모가 워낙 자신이 없다 보니 나는 보나 마나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육체적 관능과 성욕을 억눌렀다.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점령당한 나의 삶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절대적 감성을 심어준 것은 바로 재즈였다. (p. 140)

자유로워지는 데 빠져서는 안될 조건이 기동성이라고 한다면, 자전거야말로 구텐베르크 이후로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의 가능성을 온전히 구현한 최대의 발명품, 그것도 단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발명품인지도 모른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인간의 반사 속도에 맞게 움직이고 자동차처럼 판대기에 둘러싸여 자연의 빛과 공기와 소리와 냄새로부터 격리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자동차가 도로를 가득 메우지 않았던 1930년대에 놀라우리만큼 아름답고 다채로운 풍광을 가진 아담한 크기의 나라를 돌아보는 데 자전거만큼 좋은 이동 수단이 없었다. (p. 153)

그런데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책을 열심히 읽은 것일까? 간단하게 답하자면, 마르크스의 시각으로,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역사적 시각으로 세상을 풀이하고 싶었다. 가슴은 뜨거웠지만 조직에 속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소극적으로 움직이던 10대의 공산주의 지식인에게는 그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사실 없었다. (p. 165)

마르크스주의가 마약처럼 뿌리치기 어려웠던 까닭은 사상이 워낙 총체적이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삼라만상의 이론”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삼라만상을 보는 틀”은 제공했다. 무기체와 유기체의 본성을 인간 세계와 연결하고 집단과 개인을 연결하고 끝없이 유동하는 세계에서 모든 상호 작용의 기본 이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었다. (p. 166)

내가 관심을 가졌던 문제는 사회 안에서 예술가와 예술(사실은 문학)이 차지하는 역할과 성격, 마르크스주의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부 구조는 어떻게 토대와 연관되는가?”하는 주제였다. 1934년 가을 즈음부터 나는 이것을 ‘문제거리’로 여기고, 너무나 큰 뼈다귀를 물고 주체하지 못하는 강아지처럼 산만하게 읽어들인 심리학과 인류학 지식과 코스모스 자연동호회에서 어렸을 때 주워들은 생물학, 생태학, 진화론의 도움을 얻어 나름대로 고민했다. (p. 167)

1930년대의 유럽 정세를 최대한 간단히 요약한 신문의 머리기사 제목만 훑어보아도 좌파의 관점에서는 사실상 좌절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춘 찬가”란 노래도 있지만 학창 시절을 절망의 나락에서 보낼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절박한 위기감에 휩싸여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중략) 우리는 한 경기 한 경기에 전력을 쏟아 붓는 축구선수들처럼 똘똘 뭉쳐서 위기를 하나하나 돌파해 나갔다. (p. 200)

우리가 활기를 잃지 않았던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우리의 적은 오직 하나, 그러니까 파시즘과 영국 정부처럼 파시즘을 막으려 하지 않는 세력이었다. 둘째, 우리는 스페인이라는 전쟁터에서 실제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중략) 마지막으로, 우리는 낡은 세상이 무너지고 나서 펼쳐질 새로운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안다고 생각했다. 그 점에서는 우리는 다른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판단 착오를 한 셈이었다. (p. 202)

우리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 골고루 감정과 열의를 쏟아 부었다.” 아니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굳이 나누려고 애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우리도 이런 노래를 불렀다.

사랑일랑 집어치우자 / 그리고 말하자 / 우리의 애정을 오직 / 노동자에게 바치겠다고 // 사랑일랑 집어치우자 / 혁명이 올 때까지 / 그때까지는 사랑은 / 반혁명이다. (p. 203)

그렇지만 공산주의가 우리 세대의 가장 똑똑한 남녀를 왜 그렇게 많이 빨아들였는가 하는 물음과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우리한테 어떤 뜻이 있었느나 하는 물음은 20세게의 역사에서 핵심 주제가 되어야 한다. 내 친구 안토니오 폴리토는 “20세기에 가장 위력을 떨친 악마의 하나는 정치적 열정”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처럼 20세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은 없다. 그리고 그런 열정의 핵심을 꿰찬 것이 공산주의였다. (p. 215)

공산주의는 이제 죽었다.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소련을 전범으로 하여 만들어진 대부분의 체제와 사회는 1917년 10월 혁명의 유산이었고 우리한테 꿈을 심어주었지만 이제는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삭막한 폐허만을 남기고 깡그리 허물어져서 공산주의라는 구상 자체에 처음부터 허물이 있었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내기 어렵다. 그렇지만 공산주의라는 신념에서 자극을 받았던 사람들이 이루고 간 업적과 “공산주의자가 정복하지 못할 요새는 없다.”는 믿음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p. 216)

한 번은 라도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젊었을 때 라코시가 나한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지. ‘산도르, 자넨 왜 직업 혁명가로 나서지 않는 건가?’ 지금 그 양반과 나를 보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버리지 않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공산당은 낭만과는 거리가 먼 세계였다. (p. 224)

내 다리, 프레디가 비명을 질렀어, 내 다리가 타 들어가. 난 대들보에 도끼질을 했지만 꿈쩍도 안 하더라고. 가엾은 프레디...... 안 되는구나, 울고 있더라고, 이제는 글렀구나. 나도 너무 안타깝기도 하고 매운 연기 때문에 눈물이 나왔어. 너무 지쳐서 도끼를 들어 올릴 기력도 없었어. 그때 느닷없이 프레디가 외치는 거야. 공산당 만세, 스탈린 만세...... 스탈린 만세, 그녀는 외쳤어, 남학생들 잘 있어라, 테디도 안녕.

프레디는 목숨은 건졌지만 무릎 아래로 두 다리를 모두 자르고 평생을 살았다. 죽어가는 당원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 당과 스탈린과 동지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중략) 우리는 당에 인생을 걸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당에 바쳤다. 그 대가로 우리는 당으로부터 승리한다는 확신과 형제애를 경험할 수 있었다. (p. 226)

하지만 브레히트가 쓴 <후손들에게>라는 훌륭한 시에 나오는 코민테른 요원이 아무하고나 잠을 잤다는 것(“나는 깊은 생각 없이 사랑을 했고”)은 그 어떤 개인사보다도 당의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나도 고백하자면 당에 들어올 가능성이 별로 없는 사람과 한 번 진지하게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을 때가 바로 나도 더 이상 젊었을 때처럼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아니구나 하는 자각을 했을 때였다. (p. 229)

나는 가장 치밀한 혁명가도 “그런 이상주의 내지는 ‘실현 불가능한 기대’를 품고 있으므로 사회주의 세상이 왔다고 해서 모든 걱정과 슬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실연과 상심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나 해결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무리 생각이 트인 사람도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고 썼다.

자유, 평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애는 위대한 사회 혁명의 단계를 맞이한 순간에는 현실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을 체험한 혁명가는 사람들이 흔히 낭만적 사랑을 그릴 때 쓰는 말로 그 감격을 묘사한다. 혁명가는 성자를 빼놓고는 어느 누구보다도 높은 윤리의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밀며 그런 순간이 닥쳤을 때는 정말로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 그때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회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안에서 형제가 되고 자신의 개별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점에서 이상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을 하는 동안에는 이럴 수가 있는데 왜 나머지 경우에는 그러지 못하는 것일까? (p. 230)

뉴욕에 살며 나와 잘 아는 철학자 아그네스 헬러는 헝가리의 시온주의 진영에서 일하다가 1947년 공산주의로 돌아섰을 때의 심경을 냉소주의를 가장한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담아낸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살았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 있었다.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돈도 재산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나는 부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암거래 상인, 달러 투기꾼, 그악스럽고 탐욕스러운 사람을 혐오했다. 걱정이 없었다! 평생을 가난한 사람 편에 서리라 다짐했으니까. 그렇게 철딱서니가 없다 보니까 가난한 사람과 같이 하려고 공산당에 들어간 것이다. (p. 232)

나는 싸우는 틈틈이 끼니를 때웠고 / 살인마 사이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굳세진다는 것은 군인의 덕목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쓰던 정치 용어에까지 스며들었다. (“비타협”, “불굴”, “강철같이 단단한”, “일심동체”) 혁명 이전에도 혁명 기간에도 혁명 이후에도 일단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을 굳세게, 아니 무자비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공산주의자의 본질이었다. 그것은 시대 앞에서 나온 불가피한 반응이었다. 브레히트는 말한다.

우리가 스러져가면서 뿌린 피 / 속에서 나온 그대들은 / 우리의 허물을 말할 때는 / 아무쪼록 기억하라 / 우리가 헤치고 나온 / 그 캄캄한 시대를

하지만 나 같은 세대의 공산주의자들 마음을 파고 드는 브레히트의 시가 말하려던 것은 결국 그런 굳센 정신이 혁명가들에게 강요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부드러움의 바탕을 마련하고 싶었지만 / 정작 우리 자신은 부드러울 수 없었다. (p. 234)

기독교에는 “크레도 키아 압수르둠” (부조리하기 때문에 믿는다.)이라는 말이 있지만 앤드루 같은 사람은 끝없는 도전에서 믿음의 근거를 찾지 않았나 싶다. “더 눌러보시지. 볼셰비키는 결코 쭈그러들지 않으니까.” (p. 236)

1980년대 말, 그러니까 체제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동독의 한 극작가는 <원탁의 기사들>이라는 희곡을 썼다. 우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기사 랜슬롯은 묻는다. “세상 사람들은 성배와 원탁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우리의 정의와 우리의 꿈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 사람들에게 원탁의 기사는 바보, 멍충이, 범죄자일 뿐이다.” 나는 아직도 성배를 믿는 걸까, 하고 그는 자문한다. “모르겠다.” 랜슬롯은 말한다. “그런 물음에는 답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 우리는 성배를 영영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배가 아니라 성배를 찾아 나서는 것이라는 아서 왕의 말은 옳지 않은가? “성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어디 포기하는 것이 우리뿐이겠는가?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 없이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20세기에 실제로 그렇게 살다간 사람들을 기억조차 해주지 않고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p. 254)

2차 세계대전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맛본 경험은 전쟁이 내 인생에서 6년 반을 앗아가버렸다는 말로 가장 잘 요약된다. 나는 영국 군대에서 6년을 보냈다. 나한테는 “좋은 전쟁”도 “나쁜 전쟁”도 아니었고 그저 허망한 전쟁이었다. (p. 258)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모름지기 공산주의자라면 프롤레타리아의 미덕을 철썩같이 믿어야 했지만 그것을 이론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확인하고 보니 참으로 마음이 놓였다. (p. 266)

그곳은 재앙의 자리였다. 그렇지만 그 피의 자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여전히 죽음이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그곳은 비극의 자리라기보다는 희망의 자리였다. 그때 나는 이런 글을 썼다.

얼굴이 절반만 남은 사람과 불타는 전차에서 구출된 사람을 보고 어쩔 줄 모르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가끔은 잘려 나간 부위가 조금 더 끔찍한 사람도 들어오는데 우리의 얼굴에서 경악과 혐오감이 혹시라도 드러날까 봐 그 사람을 쳐다볼 때마다 심호흡을 해야 한다. 아폴론이 악기를 잘 다루는 마르시아스를 질투하여 그의 살가죽을 벗겨냈을 때 마르시아스의 모습이 저렇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을 할 만큼, 그래도 요즘은 여유가 생겼다. 아래턱이 사라져서 텅 비어버리면 사람 몸의 균형미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느긋한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중략) 그들은 얼룩말처럼 줄무늬가 간 얼굴을 하고 소시지 같은 살점이 뺨에서 늘어진 얼굴을 하고 병동을 걸어다닌다. 희망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이런 병원에 와서 보아야 비로소 실감이 간다. (p. 285)

미국에서 처음 초청을 받고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동료 교수이자 친구에게 나의 학문적 입장을 뒷받침해주는 편지 한 통 써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여부가 있겠는가.” 했다. 그 다음에 그 친구가 덧붙인 말에서 순간적으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일하고 아무 상관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말해 줄 수 있는가 모르겠네,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건 잘 알지만, 자네 아직도 공산당원인가?” (p. 304)

결국 우리가 모스크바에 여전히 충성을 바친 것은 세계 사회주의의 대의는 아무리 영웅적이고 존경할 만한 나라라도 소국의 지원 없이도 추구할 수 있지만 소련 같은 강대국의 지원 없이는 이룰 수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p. 317)

러시아와 러시아 사람의 생활에 대해서는 전쟁 미망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들이 한겨울 거리에서 돌을 나르고 잔해를 치우는 모습 말고는 제대로 본 것이 없었다. 거기다가 지식인한테는 “뒤적거릴 것”이 무엇보다도 요긴한데 그런 것들을 구할 도리가 없었다. 전화번호부도 없었고 지도도 없었고 대중 교통 시간표도 없었다. 일상생활에서 써먹을 수 있는 기본적 참고 자료가 하나도 없었다. 간첩이라면 경기를 일으킬 만큼 두려워하다 보니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정보마저도 국가 기밀이 되어버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사회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p. 328)

20세기의 세계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존 리드가 같은 제목을 단 책에서 묘사한 10월 혁명의 열흘이고 또 하나는 1956년 2월 14일부터 25일까지 열린 소련 공산당 제 20차 대회다. 두 열흘 모두 시대를 그 “전”과 “후”로 확실하게 가른다. 굵직굵직한 이념 운동이나 정치 운동에서 이것에 필적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 또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10월 혁명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만들었고 제 20차 대회는 그것을 무너뜨렸다. (p. 331)

작은 위기가 잇따라 닥치다가 소련 군대의 헝가리 재점령이라는 끔찍한 사태로 절정에 이르렀고 다시 몇 달 동안 뜨거웠지만 결말은 뻔했던 논쟁을 거치면서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패배로 곤두박질친 그 악몽 같은 해의 분위기도, 기억도 이제 와서는 아련하기만 하다. 영국 극작가 아널드 웨스커가 쓴 <보리 닭고기 스프>는 공산주의 신념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유대인 노동자 집안의 이야기인데 이 희곡을 보면 “이념을 잃어버리는 아픔과 이념에 매달리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다. (p. 337)

“흐루시초프가 하는 말이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건가? 아무것도 몰라도 그냥 정책을 따라오기만 하라는 건데 역사가는 증거 없이는 못 살아요.” 처음 반란을 일으킨 날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항변은 모두에게 절절이 와 닿았다. (p. 341)

하지만 그때도 그랬고 나중에도 그랬지만 나는 한때 공산주의였다가 광신적인 반공주의자로 돌아선 무리와 한 패가 된다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그들은 공산주의라는 “실패한 신”을 섬기는 데서 해방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들이 해방되기 위해 그 신을 사탄으로 몰아붙였다. 냉전 시대에는 그런 사람이 수두룩했다. (p. 356)

하지만 역사가가 아니라 자서전을 쓰는 사람으로 돌아와서 말한다면 개인적 감정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자존심이었다. 공산당원이라는 멍에를 벗어 던진다면 적어도 미국에서는 더 잘 나갈 것이다. 은근슬쩍 빠져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냉전의 한복판에서 그런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공산주의자로서 성공함으로써 자신에게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자부심이 잘났다는 것은 아니지만 못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았다. (p. 357)

지진이라든가 화산 폭발처럼 한눈에 재앙처럼 보이는 순간이 역사에도 있다. 가령 두 번의 세계대전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한 사람의 인생살이에도 그와 비슷한 순간이 있다. 앞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내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지리적 비유를 좀 더 쓰자면 분수령이라는 말이 참으로 적절해 보이는 순간도 있다. 눈에 확 들어오는 사건도 없었고 극적인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별 볼일 없는 고개를 넘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역사에서건 삶에서건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을 체험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들 때가 있다. (p. 359)

클러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클러프는 나무, 담, 조망, 농장으로 난 길, 오두막과 물 같은 것이 없는 건물은 건물이 아니라고 본 사람이다. 그가 만들거나 매만지려고 했던 것은 건물이 아니라 석공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과 손길이 닿은 자연, 전망, 상징과 기념물이 하나로 어우러진 공간에서 살아가고 일하는 사람들의 소우주였다. 방문자들은 이런 조화로운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 마련이었다. (p. 387)

나 같은 중년의 좌파에게 1968년 5월과 나아가 1960년대 전반은 한편으로는 굉장히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쓴 것 같았지만 도무지 같은 언어를 쓰는 것 같지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사건을 접해도 자식뻘 되는 투쟁적인 젊은이들과 우리는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이 아무래도 다른 것 같았다. (p. 411)

1933년 이후의 파란만장한 사태 변화를 몸으로 겪은 기성 세대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의욕이 넘치더라도 혁명은 정치적 목표가 있어야 했다. 혁명가들은 국내가 되었든 해외가 되었든 낡은 정치 체제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정치 체제로 바구어서 새롭고 더 나은 사회를 세우거나 그 밑바탕을 깔아놓고 싶어 했다. 하지만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을 움직인 것은 대부분 그런 목표가 아니었다. 학생 혁명에 동조하지 않고 방관하는 입장에 섰던 레이몽 아롱은 시위대에게는 아무런 목표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1968년 운동은 “억눌린 감정을 왕창 토해낸 것”에 불과하므로 가두에서 벌어진 집단극, “사이코드라마” 또는 “언어 치매”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p. 412)

하지만 “금지하는 것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구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규범이라면 덮어놓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식에서 유토피아를 읽어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정부에 대해서든 교사에 대해서든 부모에 대해서든 우주에 대해서든 젊은 반항자들의 심리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은 누구한테서도 간섭받고 싶지 안다는 그런 구호였다. 자아나 초자아가 하고 싶은 것을 알량한 권위나 완력을 앞세워 못하게 막는 것을 무조건 쓸어버리고 싶다는 개인적 이상은 있었을지 몰라도 이 젊은이들은 공산주의가 되었건 그 무엇이 되었건 사회적 이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p. 413)

명색이 역사가로서 나는 모든 혁명에는 누구나 마음껏 행동하는 자유 지상주의의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문화적 저항과 문화적 항거는 어디까지나 징후이지 그 자체가 혁명의 원동력은 아니”었다. 미국에서처럼 “그런 일이 두드러져 보이면 보일 수록” “정말로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다. “ 하지만 그 “큰 일”이 자본주의라든가 억압적이거나 부패한 정치 체제를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 안에서 사람들과 개인의 행동 안에 고착된 인습적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1960년대의 반란 세력이 좌파의 또 다른 양상이나 변형이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그것은 혁명을 꾀하다가 불발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혁명을 효과적으로 수용한 셈이 되어버린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구호 아래 종래의 정치판을 갈아엎고 종국적으로는 전통 좌파의 정치 행태에도 마침표를 찍으려는 시도가 된다. 30년도 넘어서 되돌아보면 내가 1960년대의 역사적 의미를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p. 415)

1950년대 후반에 하루 일과를 끝내고 내가 살았던 세상은 1960년대의 정신을 이미 앞질러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달라도 한참 달랐다. 1960년대를 상징하는 것이 있다면 누가 뭐래도 록 음악이다. 록은 1950년대 후반부터 세계 정복의 시동을 걸더니 얼마 안 가서 1955년을 전후로 록을 아는 세대와 록을 모르는 세대의 골이 깊게 패버렸다. (p. 415)

그렇지만 몇 년도 못가서 록은 재즈를 거의 죽였다. 롤링스톤스를 신처럼 떠받드는 사람들과 롤링스톤스는 흑인 블루스 음악을 괜찮게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들 사이의 세대 격차는 정말이지 극복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가끔은 재능 있는 음악인으로 양쪽에서 모두 인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비틀스는 꽤 괜찮게 생각했고 봅 딜런도 시인으로서 잠재력이 컸지만 너무 게으르거나 자아 도취에 빠져서 시신(詩神)의 관심을 두세 줄밖에 못 끌어서 그렇지 몇몇 곡에서는 천재성을 보였다고 인정한다.) 겉모습은 달라도 우리 세대는 모두 1960년대에는 국외자로 머물렀다. (p. 416)

국제사회를 열광시킨 두 주역은 쿠바와 베트남이었다. 혁명이 성공한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마치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하듯이 약자가 최강자를 상대로 따낸 승리라는 데 더 큰 뜻이 있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게릴라”라는 말은 세계 변혁의 열쇠로 인식되었다. (p. 419)

1960년대 말에는 한동안 젊은이들이, 적어도 대대로 중산층으로 살았던 집안의 자식들이나 전후 고등교육의 폭발적 확대로 새롭게 중산층으로 올라선 수많은 대중의 자녀들은 권력과 부모와 과거에서 그냥 한꺼번에 우르르 저마다 빠져나오는 방식이 되었건, 아니면 정치적인 것처럼 보이는 활동이 주는 짜릿한 희열이 끝없이 쌓이는 방식이 되었건에 자기들이 혁명의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p. 426)

여기서 그때 상황을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묘사한 실러 로보덤의 글을 인용하고 싶다.

사사로운 감정은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육체 관계도 집회와 집회 사이에 후딱 해치웠다. 자연스러운 감정이 깃들 여지가 없었다. (중략) 국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누구도 가보지 않았던 세상의 바로 코앞까지 떠밀려 간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거창한 표현과 우주적 기대로 가득 찬 먹구름이 일상의 비로 돌변하는 순간 환희와 정치, 진짜 힘과 꽃의 힘, 말과 행동의 차이는 다시금 확연해졌다. 여호수아가 나팔을 힘차게 불어서 예리코 성을 무너뜨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약의 기록일 뿐이고 현실은 그랬을 리 만무하다. 젊은이들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지 구체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p. 427)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 역사의 일부분이 아니다. 리바이스 청바지는 록 음악처럼 젊음의 상징으로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더 이상 젊지 않았다. 피터 팬처럼 어른이면서도 영원히 소년으로 살아가고 싶어 했던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나는 공감하는 바가 별로 없었고, 그렇다고 내가 가장 나이 많은 소년의 역할을 현장에서 해낼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까지나 원칙의 문제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젊은 옷을 안 입기로 결심했고 또 실제로 안 입었다. 1960년대를 산 역사가에게 그것은 불리한 조건이었다. 국외자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p. 432)

당시에 내가 한 말이지만 “대처의 승리는 노동당 패배의 부산물이었다.” 사태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역시 내가 한 말이지만 “달갑지 않은 사실을 한사코 직시하지 않으려는 일부 좌파들의 외면”이었다. (p. 439)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처럼 뻔한 일도 없었다. 대처 시대는 20세기에서 정치, 사회, 문화의 차원에서 한꺼번에 이루어진 혁명에 제일 가까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물론 좋은 쪽으로 이루어진 혁명은 아니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어느 나라 정부도 누릴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고, 대처는 영리를 무한정 추구하는 데만 눈이 먼 민간 기업과 애국주의라는 과히 바람직하지 못한 쌍두마차가 질주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영국에서 무조건 쓸어버렸다. 탐욕과 호전성이 판을 친 것이다. (p. 448)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망가진 체제보다 어느 모로 보나 효율적이고 풍요한 서방 자본주의라는 미지의 체제에 도리어 희망을 걸고 심지어 그것을 낙원으로 그리는 경향으로 기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p. 452)

다시 말해서 사회를 효율적으로 꾸려가는 것은 기업인처럼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사고 방식이 문제였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더더욱 필요했다. 신자유주의는 기업인에게도 먹혀들었고 노동당에 대한 기존의 불신을 없애고 중산층의 “부동표”를 묶어둘 필요가 있는 정부에게도 요긴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비판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거의 사반세기 동안 노벨 경제학상이라는 엄청난 후광으로 화려하게 꾸몄지만 실은 세계 자본주의와 날이 갈수록 죽이 잘 맞는 경제학이라는 “과학”의 권위에 편승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이다. (p. 454)

그렇지만 1985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했을 때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고 조금은 들뜨기까지 했다. 다른 건 다 접어두고라도 고르바초프는, 소련에서 거의 사라져버렸다고 믿었던 우리가 생각한 사회주의, 그러니까 초기의 고르바초프 발언으로 판단하자면 이탈리아 쪽에서 발전시킨 공산주의 내지는 프라하의 봄 때 나온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였다. 소련에서 고르바초프는 거의 완전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고르바초프에 대한 우리의 경외감은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p. 457)

“자본주의와 부자는 당분간은 겁먹을 일이 없다.”고 나는 1990년에 썼다.
이 나라처럼 불의와 불평등 속에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데서 부자들이 자기들 말고 남한테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뭐란 말인가? 복지를 잠식하고 복지가 필요한 사람들을 보호하던 장치가 퇴화하게 방치를 해도 정치적 불이익을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나빴다고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사회주의권이 사라지고 나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p. 458)

하지만 사회민주주의의 조직력이 약해지고 공산주의가 해체된 지금 위협은 이성의 적에서 생겨나고 있다. 바로 종교나 민족/부족 근본주의자, 외국인 혐오주의자, 지금 인도, 이스라엘, 이탈리아의 정권을 쥔 세력처럼 파시즘의 후예거나 파시즘에 고무받은 정달들이 그들이다. 반세기 동안 반공주의로 냉전을 이어왔는데 미국 영토 안에서 미국 국민을 살상한 미국의 유일한 적이 한 때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자유 세계”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돈을 대준 수니 이슬람 근본주의 투사들과 미국의 극우 과인도들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수많은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사회주의자냐 야만주의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사회주의에서 등을 돌린 것을 세계는 다시금 후회할 것이다. (p. 459)

게다가 실력 있는 역사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역사가는 아무리 먼 과거를 다룬다 하더라도 과거를 탐구하다 보면 결국 현재의 눈 앞의 사안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또 현재와 눈앞의 사안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전문가에게만이 아니라 시민에게도 중요하다. (p. 462)

포스탄과 네이미어의 대조적 모습은 1890년부터 1970년까지 역사학을 양분시키면서 꾸준히 세력을 키워온 중요한 갈등의 흐름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역사는 개별 국민국가의 차원에서든 아니면 국민국가들의 상호 관계 차원에서든 “흘러간 정치의 역사”라야 한다는 보수적 입장과 역사는 사회와 문화의 구조라든가 변화를 규명해야 한다는 입장의 싸움, 역사는 서술이어야 한다는 입장과 역사는 분석과 종합이어야 한다는 입장의 싸움, 과거에 벌어진 일을 일반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과 그것이야말로 역사학의 본질이라는 입장의 싸움이었다. (p. 466)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양극화된 냉전과 이념 대립에도 불구하고 역사 연구 방법론의 쇄신을 부르짖은 다양한 학파의 개혁파들은 같은 길을 가면서 똑같은 적과 싸우고 있었으며 본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주적은 “사실”을 제대로 모으면 결론은 사실이 알아서 내린다고 보는 “실증주의”였고 왕과 고관, 전투와 조약, 다시 말해서 정치와 군사 방면에서 꼭대기에서 내려진 결정을 선호하는 주류 역사가들의 편견이었다. 그들은 방법적으로도 세련되었을 뿐 아니라 훨씬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역사학을 만들고 싶었다. 그들은 역사에다 사회과학이라는 거름을 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p. 470)

역사적 모델을 세우거나 “왜라는 굵직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시들해지고 “분석에서 묘사로”, 경제 구조와 사회 구조에서 문화로, 사실을 되찾는 것에서 감정을 되찾는 것으로, 망원경에서 현미경으로 역사 연구의 기본틀이 바뀌었다. (p. 479)

이런 사람들에게 역사는 세상을 해석하는 길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아 발견의 수단 아니면 기껏해야 집단적으로 승인을 얻어내는 수단이었다.

이런 입장이 예나 지금이나 위험한 까닭은 비센샤프트(과학)라고 해서 독일어에서 말하는 넓은 의미에서건 영어에서 말하는 좁은 의미에서건 역사라는 지적 학문적 활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담론 세계의 보편성을 좀먹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개혁파와 보수파가 공유했던 믿음, 다시 말해서 역사가의 탐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논리와 증거의 규칙에 따라서 사실과 허구를 가려내고 확고한 사실과 그렇지 않은 사실을 가려내고 정말로 그런 것과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것을 가려낸다는 믿음을 좀먹는다. 그런 위험성은 점점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중략) 진짜로 있었던 과거가 아니라 자기 목적에 부합되는 과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수정되고 날조되는 역사가 늘어나고 있다. 현대는 위대한 역사신화학의 시대다. 역사 전문가들이 정치에 흔들리지 않고 역사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p. 482)

그런가 하면 우리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진정한 지구사의 틀을 갖게 되었다. 올바르게 중심의 자리를 되찾은 지구사는 인문학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런 지구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에서 모두 필수적 역할을 하며 그 안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따로 놀지 않는다. 내가 다시 젊어져서 그런 지구사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p. 483)

무엇보다도 즐거웠다. 지적 성숙이라는 주제로 담소를 나누면서 지금은 작고했지만 피에를 부리디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가 보기에 지식인의 삶은 판에 박힌 강단보다는 예술가의 삶에 더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 지적 활동의 형식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안겨준 활동은 사회학자라는 직업이었습니다.
사회학자 자리에 “역사가”만 집어넣으면 나는 이 말에 백 번 동의한다. (p. 483)

배우도 교수도 관객과 청중을 위해 공연하는 연기자다. 듣는 사람들이 슬슬 딴전을 피울 때야말로 강의를 하면서 뼈아프게 배우는 순간이다. 교수는 배우보다 더 힘든 일을 한다. 공연을 보면서 정서적 만족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새겨듣고 써먹어야 할 구체적 정보와 사상을 청중에게 듬뿍 안겨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느끼기 때문이다. (p. 488)

내가 “정교수”라는 직함을 달게 된 것도 다른 교수들 같으면 갈 때가지 다 가서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다고 세상에서 생각하는 50대 중반에 가서였다. 그 정도 나이를 먹으면 영광은 앞날이 아니라 옛날에서 찾게 되고 과거에 이루어놓은 업적에서 보람을 찾는다. (중략) 나는 세계대전과 냉전 덕분에 그런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새옹지마라는 옛말도 있지만 그 덕에 나는 중년까지 청년처럼 앞날을 바라보면서 살 수 있었다. (p. 491)

그리스, 스페인, 터키가 되었건 라틴아메리카의 단골 국가들이 되었건 한국 같은 나라가 되었건 지식인과 무엇보다도 학생은 때로는 공포에 짓눌려 침묵을 지키기도 했지만 군사 독재에 강하게 저항했다. 군사 정부가 조금이라도 물러서는 틈새를 보였을 때 저항 서적을 보급하고 읽는 것은 정치적 민주화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었다. (p. 500)

나는 정말이지 즐겁고 편안하게 살았다. 여행도 많이 다녔고 아내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같이 다닐 때가 많았는데 우리의 여행은 일과 발견과 휴가와 색다른 경험과 오랜 우정이 하나로 녹아든 것이었다. (중략) 영웅적인 행동이나 시련은 없었고 위험도 공포도 없는 전문직 종사자의 삶이었다. 나처럼 혜택을 누리고 산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바겠지만 나는 “내가 겪은 삶과 ...... 20세기의 현실 ...... 인류가 겪어야 했던 그 끔찍한 사건들 사이의 명백한 모순”에 놀란다. (p. 507)

나는 어릴 때부터 꿈꾸던 삶을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삶이 풀려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부질없고 어리석기조차 하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속삭이는 작은 유령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세상에서 마음 편히 지내서는 안 되지.” 젊었을 때 내가 그 글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 (p. 508)

하지만 이 대작과의 첫 만남을 내가 도저히 잊지 못하는 까닭은 관능미가 아니라 이 뛰어난 화가가 일시적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진실”을 겨누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속되 말로 “까놓고 말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파리에 갔을 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은 올랭피아다. 누군가가 나를 프랑스로 개종시켜야 한다면 그 적임자는 바로 마네였다. (p. 512)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몸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보기 드문 경험을 그날 했다. 나는 그저 느끼고 겪었다. 그날 밤 우리는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파리의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한바탕 잔치가 끝나고 나서 나는 길모퉁이에서마다 벌어지던 춤판에 기어들어서 춤도 추고 술도 마시면서 마치 구름 위에 두둥실 뜬 것처럼 파리 시내를 느릿느릿 걸었다.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먼동이 트고 있었다. (p. 525)

나도 르 로이 라뒤리처럼 노르망디 지방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보수주의로 우직하게 돌아선 사람보다는 유능하고 신망이 있었으면서도 1980년대에 냉전 논리와 시장 경제를 부르짖는 자유주의자로 돌아선 사람들의 더 역겨웠다. (p. 543)

우리 세대한테 프랑스는 남다르다. 이재에 밝았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언어가 세계를 정복하면서 교양있는 볼테르의 언어가 패배한데서 프랑스인이 느끼는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나는 공감한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가 바뀐데 그치지 않고 문화가 바뀐 것을 뜻한다. (p. 545)

프랑스 언어와 문화가 세계에서 맡았던 역할을 지키려는 수호 노력은 좌절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복수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인류를 동질화시키려는 세계화 조류에 맞서서 모든 언어를 지키고 민족과 문화의 특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고 또 어차피 질 수 밖에 없다고 처음부터 접고 들어가서는 안되는 싸움이다. (p. 546)

반혁명분자를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툭하면 방아쇠를 당기는 아마추어한테서 취조를 당하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날 밤 늦게 무장 민병대원의 총구를 등 뒤로 느끼면서 캄캄한 길을 따라서 다시 프랑스 국경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좀 떨렸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 내전과의 짧은 만남은 스페인 공화국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났다. (p. 551)

이탈리아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1990년대는 고약한 기존의 체제를 무너뜨릴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꼭 더 나은 체제가 들어설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p. 578)

청춘을 넘기면 보통 사람은 웬만해서는 살아 있다는 데서 순수한 희열을 맛보기가 힘들지만 이탈리아는 그 드문 기쁨의 순간을 열어주었다. (p. 578)

그러니까 결국 이탈리아는 즐기기는 쉬워도 이해하기는 어려운 나라였던 셈이다. 역설이라면 역설이지만 공화국이 위기에 처한 시기가 즐기기에는 사실 더 좋았다. (중략) 점심을 먹고나서 발도르치아 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서 친구들과 함께 드러누워서 2층의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마리아 칼라스의 성악곡을 듣고 있노라면 별세계가 따로 없었다. (p. 581)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탈리아인이 쓴 책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보이는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 시각에서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이것은 마르코 폴로가 여행하다가 보고 들었던 실제 도시나 상상의 도시에 대해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여기서는 오직 밖에서만 볼 수 있는 이레네라는 도시도 나온다. (중략)

폴로: 생지옥은 미래형이 아닙니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이미 여기 있습니다. 같이 살아 있는데서 만들어지는 우리의 일상생활이 지옥입니다. 그것을 견디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 길을 사람들은 쉽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을 받아들이고 지옥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요. 지옥이 거기 있다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을 때까지요. 두번째 길은 위험한데 늘 깨어 있어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지옥의 한복판에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고 알아보고 그것이 이어질 수 있도록 숨통을 터주는 것입니다. (p. 584)

그 때 현지 신문에서 내가 오려둔 기사가 누렇게 변색이 된 채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다. 나는 ‘genocidio(몰살)’이라는 스페인어를 지겹도록 보았다. 콜롬비아의 언론인들은 농촌 부락이나 버스를 타고 가던 사람들이 여기서 열여섯 명, 저기서 열여덟명, 또 다른데서 스물네 명씩 죽어 나가는 작은 학살극을 묘사하는데 그런 단어를 썼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였을까? (p. 602)

중남미는 인습적 진리를 허물기 위해 만들어진 대륙이었다. 중남미에서 역사 발전은 총알처럼 빠르게 진행되었다. 굵직굵직한 변화들의 모두 한 사람의 반생 동안에 벌어졌다. (중략)

‘선진’세계와 ‘제3’세계를 가르는 장벽, 현재와 역사적 과거를 가르는 장벽이 남미에 와서 허물어지다 보니 내가 비남미 지역 전체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자연히 달라졌다. 마르케스의 걸작 <백년의 고독>에는 콜롬비아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그 마법과 현실이 공존하지만 마치 그 소설처럼 중남미는 처음에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어 보이는 일도 말이 되게금 만들어주었다. (p. 609)

어쨌던 그들은 40년 전에 내가 찾았고 발견한 중남미였고 파블로 네루다가 <모두의 노래>라는 서사시의 “마추피추 고원”이라는 부분에서 장중한 시로 노래하면서 생각했던 중남미 대륙이었다. 이 시는 그 죽어버린 푸르른 잉카 도시를 세운 이름 모를 사람들의 넋을 부르는 것으로 끝난다. 시인은 그들의 죽은 입을 통해서 말하고 싶어한다.

위라코차의 돌 깨는 아들이여 / 푸른 별의 식은 음식을 먹던 아들이여 / 파란 보석의 맨 발로 다니던 손자여

“남미를 이해하고픈 마음이 있으면 맞추피추에 가서 그 시를 읽어야 합니다.” (p. 621)

역사가로서 중남미를 이해하는 데 그 시가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시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안다. 시인이 염두에 두었던 가슴이 두껍고 코카를 씹는 갈색의 조용한 사람들은 남극과 북극 사이의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사람이 살기 힘든 안데스 고지대의 희박한 공기를 마시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중남미 하면 나는 이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시인만이 아니라 역사가도 그들에게 정당한 몫을 찾아주어야 마땅하리라. (p. 622)

내 또래의 지식인에게 두개의 조국, 그러니까 하나는 자기가 태어난 나라, 또 하나는 프랑스가 있었다면, 20세기에 서양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 아니 궁극적으로는 세계 어디든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정신적으로 자기가 태어난 나라와 미국이라는 두 개의 조국이 있었다. (p. 623)

그렇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미국은 이런 평판을 털어냈을 뿐 아니라 미국을 왼쪽으로 성큼 끌고 갔다. 미국 정부는 눈에 띄게 서민과 노조를 두둔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게대가 루스벨트는 우리 눈에는 자본주의의 악폐를 누구보다도 잘 대변하는 것으로 보였던 미국의 대기업한테서 지독하게 미움을 받았고 욕을 얻어먹었다. (중략)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스탈린 동지는 분명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약 우리가 미국인이었다면 우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다. (p. 627)

거기다가 몽크의 남다른 독창성에 빨려들고 정말로 훌륭한 마일스 데이비스의 <마일스톤스>와 <카인드 오브 블루>같은 곡을 듣고 있으면 1950년대 후반이야말로 재즈의 황금시대라는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런 황금시대는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 40대의 역사학자가 청춘 남녀처럼 젊음을 만끽하기에는 너무 늦었을 테지만 그래도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 밤에 재즈를 듣다보면 살아 있음이 무한한 기쁨이었다. (p. 637)

자기도취, 미국적인 것의 의미를 자꾸 따지는 버릇, 지적으로 무게를 잡는 것은 미국 문화의 세가지 고질병이었는데 랠프는 그래도 그런 데는 전혀 물들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미국적 가치”라든가 “아메리칸 드림”이라든가 하는 한심한 말은 그의 사전에는 없었다. (p. 644)

“영국에서 교수로 있으면 내가 외국인이라는 생각을 아마 늘 할 겁니다. 여기서는 그런 생각이 안들어요.” 대체로 잠시 거쳤다 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항구적 공동체에서는 그 자리에서 어울리고 친해지고 작은 일이라도 서로 돕는 문화가 발전하지만 그 울타리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오히려 관심을 안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p. 649)

미국은 유일무이한 패권을 휘두르는 세계 제국으로 20세기를 마감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미국은 20세기가 낳은 최선의 가치를 상징한다.” 여론 조사가 아니라 이주의 방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면 십중팔구 미국은 영어를 조금은 할 줄 알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뜰 수 밖에 없거나 뜨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가장 가서 살고 싶은 나라로 떠오를 것이다. (p. 651)

돈에 끌린 것만도 아니었다. 미국은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재능과 열정과 새로움에 개방되어 있다. 미국은 또 점점 시들어가고는 있지만 지적 탐구의 기회를 누구에게나 무료로 평등하게 제공하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p. 652)
그렇지만 다른 나라와는 달리 미국의 국가 이념에서 미국은 그저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다. 미국은 줄기차게 이루어내는 나라라야 한다. 다른 모든 나라를 합친 것보다 우월하고 전세계가 인정하는 모범으로 자리잡은 최구의 나라, 가장 위대한 나라로만 미국은 스스로를 인식한다. 한 축구감독의 말대로 “승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부다.” (p. 653)

미국의 현실을 통조림 깡통과 코카콜라 병에서 미국적 삶의 신화와 꿈과 악몽과 남녀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야심만만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주제들로 담아낸 앤디 워홀의 작품이 미국 말고 또 어디서 나올 수 있겠는가? (p. 655)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 미국은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초강대국 노릇을 조용히 준비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례가 없다는 것이다. (중략) 그리고 아무리 군사력과 경제력이 막강하다 하더라도 초강대국 하나가 얼마 동안이라도 군림하기에는 이 세계는 너무나 크고 복잡하다. 공포심으로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세계의 승자는 과대망상이라는 직업병에 걸린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미국에 제동을 걸지 못한다. 이 글을 쓰는 2002년 4월 현재 미국의 막강한 힘이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고 또 명백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다. (p. 659)

우리의 문제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 혹은 자신의 한계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미국은 자기 편에 서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몰아붙인다. “미국의 세기”가 정점에 이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고충이다. 올해로 여든 다섯인 나는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것 같다. (p. 660)

이제 미국은 세계 질서의 하나밖에 없는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누가 세계를 위협하는지도 자기 혼자서 정의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력은 누구든지 잠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적으로 여겨졌다. (중략) 그렇지만 9.11은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나라가 단기적으로 자신의 힘은 무한하며 그 힘을 무제한 써먹기로 마음먹은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증명했다. 하지만 우위를 과시하는 것 말고 그 힘을 쓰는 목적은 대단히 불투명하다. 21세기는 어둑한 땅거미와 함께 시작되었다. (p. 662)

20세기를 80년이 넘게 살다 보면 정치 권력과 제국, 제도가 얼마나 가변적인가를 저절로 배운다. 나는 식민지를 거느린 유럽의 제국들이,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내가 어렸을 때 영토가 가장 넓었던 영국, 쿠르디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공중 폭격으로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 막강한 대영제국이 졸지에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세계의 강대국들이 마이너 리그로 강등당하는 것을, 천년은 갈 것처럼 보였던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혁명 정권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미국의 세기”가 끝나는 것을 내 눈으로 보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을 읽은 독자 중에는 그것을 볼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히 빗나간 예상은 아니라라. (p. 665)

게다가 나이 든 사람은 이런 유행 저런 유행이 오고 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중략) 당시만 하더라도 “자본주의”라는 말은 지금의 “공산주의”라는 말처럼 별로 점수를 못 얻었다. 양식있는 관찰자는 생산력에서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앞지를 것이라고 보았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 된다고 믿지는 않으면서도 자본주의를 불신하는 세대와 함께 내가 또다시 살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는다. (p. 666)

나만큼 오랜 산 사람은 20세기를 겪으면서 역사의 힘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0년 동안 세계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느낌은 똑같은 기간으로 따졌을 때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급격하게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중략)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을 가정, 공동체, 사회 안에 묶어두었던 규치과 관습이 제 구실을 못하는 역사적 시기를 살아본 첫 세대다. 되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 우리는 말해줄 수 있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라고. (p. 666)

그렇지만 역사는 우리 식의 종교 전쟁에서 비롯되는 격정, 감정, 이념, 공포에서만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위험한 “일체감”이라는 유혹도 멀리해야 한다. 역사에 필요한 것은 기동성과 넓은 영토를 내려다보고 살필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서 자기의 뿌리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가 태어난 흙과 서식지를 떠나지 못하는 식물이 못 되는 것은 그래서다. (p. 667)

시대착오와 지방색 이 둘은 참으로 무서운 역사의 죄악이다. 둘 다 다른 곳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무지에서 생겨난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더라도 그런 무지는 잘 극복이 안된다. 과거는 여전히 다른 나라다. 과거라는 나라에 그어진 국경선은 여행자만이 넘나들 수 있다. 하지만 (유목민을 제외하고는) 여행자는 정의상으로 자신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이다. (p. 667)

나처럼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영국 국적을 갖고 있어서 어린 때 영국에서 살았고 영어를 잘해던 그리스 시안 C. P. 카바피에 대해서 “우주 쪽으로 슬며시 비껴서 있다.”고 E. M. 포스터가 한 말은 나한테도 해당된다. 사진가에게도 역사가에게도 그것은 바람직한 자세다. (p. 668)

파스칼이 말한 “머리가 모르는 가슴의 사연”,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인연이 깊거나 자기가 선택한 집단한테 느끼는 정서적 일체감에 내가 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체감은 다른 누구인가에 맞서서 정의되는 것이므로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와는 이질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것은 참극으로 이어진다. (중략) 아무리 덩치가 크다 하더라도 일체감을 느끼는 집단은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그 집단의 입맛에만 맞도록 달라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과거 역시 그런 식으로 달라질 수 없는 법이다. (p. 669)

한 사람이 역사가로서 제대로 살았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은 그 자신과 이 세상에 각별한 의미가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 마치 기자가 아득히 먼 과거사에 대해 보도하듯이, 그러면서도 국외자가 아니라 깊이 결부된 사람으로서, 특히 “만약에”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지 또 거기에 답변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진짜 역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은 진짜 역사에 대한 질문은 아니고,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쩌면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은 일에 대한 물음이다. (p. 671)

나는 시험에서 몇 점이나 받았을까? 점수가 너무 낮으면 이 책은 저자보다 대부분 더 오래 살게 될 독자들이 새로운 세기를 헤쳐 나가는 데 별다른 도움을 못 줄 것이다.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p. 672)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일테지만, 우선의 책의 두께에 압도당했고, 두번째는 책 제목처럼 흥미로운 20세기의 파노라마에 매료되었고, 마지막으로 에릭 홉스봄의 흔들리지 않는 뜨거운 열정과 시대를 관통하는 해박한 역사 지식에 감탄했다. 이 책은 아마 홉스봄처럼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이성으로 격동의 시대를 꿋꿋이 헤쳐나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인생의 선물이리라.

자서전은 말 그대로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이 쓰는 것이다. 그 어떤 공식적인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자신의 기억과 자료에 의존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을 미화시키고 싶은 유혹을 많이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역사학자답게 끊임없이 자신의 삶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담담히 기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나 약점에 대해서도, 또 시대의 흐름에 참여하지 못하고 관조할 수 밖에 없었던 2차 세계대전이나 60년대의 경험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들려준다.

그러나 그는 비록 자신이 역사학자이지만, 자신이 평생을 몸담아온 공산주의에 대한 애정은 쉽게 포기할 수 없음을 또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고백한다. “하지만 국가사회주의의 패배는 5000만명의 사망자와 2차 세계대전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참상과 맞먹을 만한 값어치가 없었다는 주장을 가벼운 마음으로 따져보라고 하면 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에릭 홉스봄이 평생을 함께 했던 직업인 ‘역사학자’와 그가 추구했던 이념인 ‘공산주의’라는 2가지 화두 사이의 긴장에 있다. 역사학자라는 직업은 그에게 나무가 아닌 ‘철새처럼’ 그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고 냉철한 이성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지만, ‘공산주의’라는 그의 이념은 인민의 해방을 위해 그 어떤 개인적 가치보다도 당에 충성할 것을 명령한다. 그의 삶과 이 책에 내재된 약간의 모순 또한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한다. 정작 그는 공산당원이었지만 그의 책은 공산권의 중심에서는 번역되지 못했고,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제3자가 되어야 했지만 사상에 있어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싸우는 틈틈이 끼니를 때”우고 “살인마 사이에 누워서 잠을 청”하는 차디찬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비록 성배를 찾지 못할지라도 “성배를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은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 재즈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여러나라를 여행하며 여유도 즐겼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우리가 사는 이런 세상에서 마음 편히 지내서는 안되지.”하고 반성하곤 했던 보통 사람이었다. 또한 “우주의 쪽으로 살짝 비껴서 있는” 역사학사이자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휴머니스트였다. 이 책에는 그런 그의 인간적인 면모 또한 잘 담겨있다.

아마 내가 그가 되어 다시 자서전을 쓴다 해도 ‘역사학자’로서, ‘공산주의자’로서,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 이보다 효과적인 방식으로 책을 구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분량이 많아 중간중간 흐름이 끊기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긴 하지만, 그가 살아온 흥미로운 시대를 담기에는 700페이지도 그리 많은 분량은 아닌 듯 하다.

끝으로 그의 자서전에 등장했던 많은 사람들이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개인의 인생이 이렇게 한 마디로 요약될 수도 있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생각만은 아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내 인생에서 어떤 한 마디를 남겨야 하나?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부족하다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그 한마디를 위해선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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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2007.03.12 21:41:51 *.60.237.51
과제에 너무 깊이 빠졌던 모양입니다. 오늘 새벽까지 글을 쓰고, 오전에야 겨우 올렸는데 지금 다시 보니 인용문이 너무 길어 읽기 어렵네요^^ 과유불급(過猶不及)! 다음 과제부터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정제해야겠습니다.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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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13 00:06:52 *.140.145.63
김도윤님께서 댓글을 달아주셨지만 인용문 긴 분들 많습니다..^^

리뷰중에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이 책의 미덕을 설명한 부분입니다.

평생을 함께 했던 직업인 ‘역사학자’와 그가 추구했던 이념인 ‘공산주의’라는 2가지 화두 사이의 긴장에 있다. 과연 두 화두사이의 긴장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요? 알고 싶다면 직접 읽어보는게 필요할듯..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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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3.13 01:30:54 *.72.153.12
리뷰 감사합니다.
김도윤님의 리뷰를 보고.....저도 자신의 삶을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주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삶의 방향 하나를 제시해 준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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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2007.03.13 08:51:23 *.249.167.156
댓글 감사합니다^^ 이기찬 님 말씀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저의 부족한 역사 의식과 지식에 대해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특히 "시대착오와 지방색 이 둘은 참으로 무서운 역사의 죄악"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돌아 다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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