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7년 7월 2일 10시 37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는 1972년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정치과학을 전공하였고, 1977년에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대학에서 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듀크 대학에서 정치과학 과정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습니다. 저자는 볼리비아와 아마존과 같은 장소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각 부족들의 충격과 같은 역사의 분석이 세계역사를 작동시킨다는 원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아메리카 인디언, 몽골의 칭기스 칸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14세기 북아프리카의Ab-ar-Rahman Ibn Khaldun으로 문명과 역사를 이해하는데 특정한 종족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분석을 최초로 하게 되었다. 이의 영향을 받아 부족민 연구를 하던 중 저자는 중국, 중동, 유럽을 연결하는 비단길과 세계 교역의 역사에서 부족민이 차지하는 역할을 연구하였고 칭기스 칸이 동서 문명 교류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 책을 위해 8년 동안 몽골 땅을 답사했고, 베이징의 자금성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스탄불의 토프카피 궁전에 이르는 길을 다니며 고고학적 발굴 현장과 도서관을 찾아보고 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1998년, 서구 학자로는 최초로 칭기스 칸의 고향 부르칸 칼둔을 방문하면서, 그의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800년 동안 방문이 금지되었던 구역에 대한 현지답사를 통해, 그동안 풀지 못한 의문들을 풀 수 있었다. 칭기스 칸의 성장 기반이었던 곳은 예상 외로 초원이 아니라 숲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이를 통해 초기의 몽골족은 유목보다는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그러한 환경은 칭기스 칸의 부족 운영과 전쟁 전술에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800년 전의 칭기스 칸을 좀더 생생히 체험하기 위해 몽골 학자들과 함께 계절을 바꾸어 그의 고향을 방문했으며, 칭기스 칸이 유목민 생활을 했음을 감안하여 그의 이동 경로를 추측해 '이동의 고고학' 탐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워싱턴 포스트」는 필자의 피와 땀이 담긴 이 책이 호머의『일리아드』에 비견된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인류학자로서 발굴과 연구 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인류학 강의에 대하여 학생들에게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다.

가르침에 있어서 저는 항상 배우는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인류학을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나의 강의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센스를 만드는 곳에서 매일 생활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학생들이 하나의 이론이 다른 이론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론이 또 다른 이론을 조명해주기 때문에 다양한 이론들을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이론은 하나의 도구입니다. 그들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가 아니고 특정한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고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망치와 드라이버가 필요합니다. 나는 학생들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생각, 이론들과 같은 다양하고 커다란 도구를 갖기를 기대합니다.


주요 저서로는
ㅇ 1988 Indian Givers: How the Indians of the Americas transformed the World.
ㅇ 1991 Native Roots: How the Indians Enriched America.
ㅇ 1994 Savages and Civilization: Who Will Survive?
ㅇ 1997 The History of Money.
등이 있다.

1983년부터 미국 미네소타 주의 매칼래스터 (Macalester)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 나에게 다가온 책

가. 칭기스칸의 리더십

칭기스 칸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고 유능한 스승을 모신적도 없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가장 큰 대륙을 정복하고 운영을 하였을까? 또한 수백 년 전부터 이어오는 몽골족 스스로의 약탈로 제로섬 게임을 벌이고 있었던 곳에서 영웅이 되었을까?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는 당 시대의 타고난 슈퍼리더였다. 그가 몽골부족을 통일하고 세계를 통일하는데는 몇 가지 원인을 찾아보고자 한다.

우선 칭기즈 칸은‘웅대한 비전’으로 몽골족을 충분히 동기부여 시켰다. 칭기즈 칸 리더십에는 한 가지 공동 목표가 달성되기가 무섭게 곧 다음의 새로운 공동목표를 만들었다. 이는 쉬지 않고 달리는 자전거만이 달릴 수 있는 것처럼 그의 부족을 이끌어 갔다. 칭기즈 칸은 소박하거나 곧 이룩될 만한 작은 목표만으로는 효과가 없으며‘원대한 야망’이라야 사람들이 큰 힘을 낸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비전’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비전은 나라를 만드는 것, 주변 국가들로부터의 위협을 없애는 것, 아예 중원을 경영하는 것, 나아가 천하를 통일하는 것, 그리고 그 천하는 중국 땅을 넘어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땅으로 계속 커져만 갔고 그 꿈들을 하나씩 실현시켰다.

두 번째로 명분과 정당성의 확보, 항상 그들은 옳은 쪽으로 평가 받기를 원했다. 청군 아니면 백군의 상태가 아니라 자신들은 정의(正義)의 편이라는 생각으로 싸우도록 하였다. 같은 전쟁이라도 명분 없는 전쟁은 하지 않았다. 금나라 백만 대군을 칠 때도 그 명분은 ‘나라를 물려받지 못할 불효한 놈이 천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해서는 일종의 해방전쟁의 성격으로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명분 없이 땅을 빼앗거나 약탈하는 행위를 자제하였다.

세 번째로 스피드(Speed)를 중시한 전략을 수행하였다. 마차로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2년 걸리던 것을 측정하면 중원 대륙을 점령하는 2년여 세월은 거의 말을 달리는 속도로 영토를 점령해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의사결정의 스피드를 보면 그들은 철저히 임장주의(臨場主義)를 선택 하였다. 이는 현대적 의미로 현장주의인데 탁상공론과 대비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일단 대원칙을 먼저 세우고 작전행동에 옮기며 상황을 보아가며 세부적인 사항은 그때 가서 결정한다는 방식을 선호했다. 물론 시행착오는 있을 테지만 이러한 방식이 가능했던 것은 기동력에서 탁월했기 때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네 번째로 통합적 패러다임과 거시적 안목으로 일단 전쟁을 벌인 적국이라 할지라도 전쟁이 끝난 뒤 제국의 일원으로 충성을 맹세하기만 하면 이러저러한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재산은 물론, 왕권, 심지어 종교까지도 자율권을 부여 하였다. 각 국가가 가진 고유의 특수성(개체성)을 보존하는 것은 보편성(전체성)을 의미하는 제국에 대한 충성 하나로 허용되었던 것이다.

다섯 번째로 과학기술과 교역의 장려, 대부분의 중세 국가에서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이교도들을 적으로 보는 상황에서 칭기즈 칸은 실사구시정신으로 이교도를 통하여 국익을 증가시켰다. 그 같은 개방정책으로 선진화된 문명과 각종 과학기술이 교류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이 세계인류사의 과학문명의 발전을 3세기 가량 앞당겼다는 평가를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끝으로 칭기즈 칸 리더십의 마지막 비결은 부하들과의 끈끈한 신뢰관계가 아닌가 한다. 요즘 경영학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인재관리인데, 칭기스 칸은 60년 동안 장군 한 사람도 버리지 않았고, 어떤 장군도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나. 혁신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정권이 교체될 때만다 주장한 것이 개혁과 혁신이었다. 정권에 대한 정통성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개혁과 혁신으로 정당성을 얻으려고 하였다. 문민정부에서도 그러하였고, 참여정부도 역시 혁신으로 장식을 하였고 수많은 혁신정책들이 추진되었다. 참여정부 막바지에 이르면서 혁신의 성과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칭기스 칸은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혁신하였다. 하나는 혈연중심의 부족운영을 능력위주로 바꾸었고, 또 다른 하나는 싸우다 죽은 가족들에게 약탈의 일부분을 보장하였다. 절친한 형제와도 같은 자무카와 철전지 원수 돌아선 것도 이러한 부족 운영체제와 관계기 깊을 것이다. 그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특단의 조치였다. 과연 현재의 우리가 이러한 큰 권력구조를 건드릴 수가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혁신은 무늬만 혁신이 아닐까?

다. 호모 노마드에 대하여

자크 아탈리의 호모 노마드에서 제국의 말 이라는 대목으로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유목민에 대하여 상상을 하였는데, 실제 칭기스 칸이 유럽과 인도, 러시아를 정벌하는 대목에서 노마드에 대한 의미가 살아났다.


말의 사육은 인간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말과 바퀴 덕분에 인간은 무거운 짐도 실어 나르고, 수레에서 살 수도 있었으며, 먼데 가서 많은 양의 물건을 교환할 수 도 있었고, 또 말을 타고 사냥이나 전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03, 자크아탈리 호모 노마드>

말, 바퀴, 야금술이 합쳐서 중앙아시아의 노마드들은 말을 수레에 연결하고, 말에 올라탈 수 있었으며, 땅에 있는 병사는 그 누구도 다루지 못할 무기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것들은 성벽을 무너뜨려서 초기 도시들에 축적되어 있는 재화를 정복하게 해줄 역동적인 힘과 지배 권력이 되었다 <105, 자크 아탈리, 호모 노마드>


예전에 교수님 한분으로부터 에너지에 대한 강의가 새롭게 떠올랐다. ‘E=MV2’ 라는 공식으로 에너지(E), 즉 군대 파괴력은 질량(M), 즉 병력 규모에는 정비례하고, 속도(V)에는 그 제곱에 비례한다. M의 값이 작아도, 즉 소수 병력으로써 문명국가의 대병력을 무찌르는 단 하나의 방법은 기동성(V)을 높이는 길이라는 것이다.

라. 열린 마음과 열린 나라

칭기스 칸을 보면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부분이었다.


칭기스 칸은 모든 사람에게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적 자유를 선언했는데, 이런 종류의 법으로는 세계 최초일 것이다. 칭기스 칸 자신은 계속 자신의 고향의 영들을 섬겼지만 그것은 국교를 높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27p)

우리나라에 19세기에 대원군에 의한 신유박해와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 등 암울했던 시기와 비교해 볼 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온 조치라고 본다. 그러한 이면에는 유목민 특유의 열린 마음이 한 몫을 했으리라 본다. 식민지 정책을 수행을 하면서도 이러한 열린 정책은 지속적으로 적용이 된다. 특히 송나라를 정벌할 때 쿠빌라이가 쓴 전략은 우스우면서도 무서운 면이 있었다.

해가 갈수록 송나라를 버리고 몽골 치하의 땅에 가서 살거나 몽골이 자신의 지역을 점령할 때 도움을 주는 병사나 관리나 농민의 숫자가 늘어갔다. 상인들도 몽골인이 있는 곳으로 일터를 옮겼고 사제나 학자도 몽골인에게 가서 보호도 받고 활동의 자유도 얻었다. 결국 장군을 포함하여 육군이나 해군 부대 전체가 몽골 진영으로 넘어가는 일이 생겼다. 송 왕조는 갑자기 무너지거나 정복을 당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침식당하면서 해체되었다. (302p)


우리나라의 역사도 이러한 열린 마음으로 만주를 달렸던 시절이 있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서부터 만주가 잊혀진 땅이 되었고, 다시 발해가 만주의 주인이 되었으나 사라지고 말았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 다시 만주가 독립운동의 본거지였으나, 다시 남북 분단의 대치로 광활한 만주 벌판이 역사에 사라지고 말았다. 반도국가라는 해양의 세력과 대륙의 세계가 합쳐지는 곳에서 더욱 개방성이 필요하겠지만, 현재의 우리는 그렇게 개방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안주하려는 정주성이 있고, 외국에 대한 배타성도 많은 것 같다. 결국 폐쇄성은 고립을 가져오고, 고립은 새로운 노마드에 의하여 정리가 된다.


3. 내 마음에 들어 온 글귀

[머리말 - 사라진 정복자]

(20p) 칭기스 칸이 세운 유일한 항구적 구조물은 다리였다.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그는 성, 요새, 도시, 성벽의 건설은 우습게보았지만 다리는 역사상 그 어느 통치자 보다 많이 놓았을 것이다. 군대와 물자를 더 빠르게 이동시키려면 내와 강을 수백 개나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21p) 칭기스 칸의 제국을 물려받은 몽골인들은 생산품과 상품을 이동시키고 그것을 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생산품과 전례 없는 발명품을 만들어 내는 일을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중국 페르시아, 유럽의 숙련된 기술자들이 중국의화약과 무슬림의 화염방사기를 결합시킨 뒤 유럽의 종주조기술을 응용하자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과학기술 혁신품인 대포가 탄생했다. 각각의 물품에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지만, 몽골인이 과학기술을 골라서 조합하면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합성물이 탄생했다.

(24p) 요즘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학식 높은 사람이 그런 태도를 보인 것에 놀라움을 느낄 수도 있다. 지금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몽골인을 피에 굶주린 전형적인 야만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서나 베이컨이 남긴 몽골인의 초상은 우리가 그 뒤의 책이나 영화에서 알게 된 이미지, 즉 황금, 여자, 피에 굶주린 야망인의 무리라는 이미지와 매우 다르다.

(33p) 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장소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33p) 칭기스 칸은 유목민 생활을 했기 때문에 우리 작업은 순회 프로젝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장소의 고고학이 아니라 이동의 고고학이었던 셈이다.

[1부 초원의 공포정치 (11162-1206)]

<1. 사라진 핏덩어리>

(49p) 전쟁을 수행하는 천재적 능력, 부하들로부터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수완, 세계적안 규모의 조직을 꾸려 나가는 전례 없는 기술 등은 살다가 어느 한순간에 얻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끝없이 되풀이 되는 실용적 학습, 실험적 적용, 꾸준한 수정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그의 독특하게 단련된 정신과 집중력이 돋보이는 의지가 있었다.

(53p)초원문화에서는 냄새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문화에서는 만나거나 헤어질 때 입을 맞추지만 초원의 유목민은 뺨에 입을 맞추는 것과 흡사한 동작으로 서로 냄새를 맡는다.

(56p) 이 세 이름은 모두 테물이라는 동사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어근은 물불 안 가리고 달려가다. 창조적 생각을 하다. 심지어 분방하게 공상을 하다. 등의 뜻을 가진 여러 몽골 단어에 나타난다. 몽골 학생은 나에게 등위에 올라탄 사람의 의사에 관계없이 가고 싶은 데로 질주하는 말의 눈에 나타난 표정을 연상하면 된다고 하였다.

(56p) 몽골족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는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에 가까웠다. 복수도 약탈의 구실이 되곤 했지만, 진짜동기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전투에서 이기면 약탈품을 가지고 와서 가족이나 친구와 나누었고, 나누는 물자의 규모에 따라 승자의 위신이 달라졌다.

(65p) 몽골족의 아이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말을 타고 성장했다. 그들은 아기 때부터 부모나 나이든 형제와 함께 말을 탔으며, 몇 년 만 지나면 혼자서 말을 타고 다니게 되었다. 보통 네 살이면 안장 없이 말을 타는데 익숙해졌으며, 결국은 말에 올라서는 방법도 익혔다

<2. 세 개의 강>

(79p) 부르칸 칼둔의 숲에 숨은 테무진은 그의 평생을 좌우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내의 납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부르테를 다시 빼앗아올 희망을 접을 수도 있었다. 사실 이것이 예상되는 선택이었다. 그의 작은 집단으로는 강력한 메르키트에게 도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부인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84p) 그러나 인생에서 흔히 그렇듯이 어떤 문제의 답은 다른 문제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테무친은 부르테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

(91p) 7은 몽골족에게 불운의 숫자이기 때문에 이 70개의 솥 이야기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꾸며낸 것일 수도 있다.

(96p) 테무진은 주르킨의 지도자들을 모두 없앴다. 초원의 모든 관련된 씨족들에게 그 메시지는 분명했다. 테무진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보답을 해주고 좋은 대접을 해준다. 그러나 그를 공격하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101p) 당시 초원 부족들은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편을 바꾸었고 병사들은 지도자를 버렸지만, 테무진이 전사로서 활동한 60년 동안 장군들 가운데 그를 버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또 테무진 역시 장군을 벌하거나 장군에게 해를 준 적이 없었다.

(103p) 또 한 가지 혁신은 습격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은 몫을 주기로 한 것이다. 타타르에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뒤 어머니가 처했던 곤경을 기억하고,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조치는 큰 영향을 주었다. 테무진은 이 정책을 통해 부족내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지원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충성심도 더 끌어냈다. 이제 병사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테무진이 남은 가족을 돌보아 준다고 믿었다.

<3. 칸들의 전쟁>

(127p) 칭기스 칸은 모든 사람에게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적 자유를 선언했는데, 이런 종류의 법으로는 세계 최초일 것이다. 칭기스 칸 자신은 계속 자신의 고향의 영들을 섬겼지만 그것은 국교를 높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31p) 칭기스 칸은 명령이 의도된 대로 대상에게 신속하게 전달되는 통신체제 확립을 위해 빠른 기병에게 이른바 화살전령 역할을 맡겼다. 군에서는 기병을 제공하고 지역민은역참을 제공했다. 역전 업무는 군사업무와 맞먹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몽골인은 군역을 역전 업무 종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지형에 따라 달랐지만 역참은 대력 30킬로미터 마다 세웠으며, 각 역참은 25가족 정도가 달라붙어 유지와 운영을 담당했다.

2부 몽골세계 대전 (1211-1261)

<4. 황금 칸에게 침을 뱉다.>

(144p) 몽골군은 남쪽 화려한 도시들을 향해 출발을 하였고, 자만심에 찬 주르첸군은 그들을 기다리며 조롱했다. “우리의 제국은 바다와 같다. 너희 나라는 한줌의 모래에 불과하다” 중국의 어 떤 학자는 주르첸의 칸이 칭기스 칸을 가리켜 그렇게 말했다고 기록했다.
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오랫동안 비밀이 유지될 수 없다.

(147p) 몽골인은 장거리 여행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반드시 필요한 것만 지나고 다녔다. 이들은 발목 까지 내려오는 전통적인 양털 겉옷 밑에 바지를 입고, 귀 덮개가 달린 모피 모자를 쓰고 밑창이 두꺼운 승마용 장화를 신었다. 이렇게 각 전사는 악천후에도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옷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불을 피울수 있는 부싯돌, 물과 젖을 담을 수 있는 가죽그릇, 화살촉을 날카롭게 갈 수 있는 줄, 짐승이나 포로를 묶을 수 있는 밧줄, 옷을 수선할 수 있는 바늘, 뭔가를 자르는데 사용하는 칼과 자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가죽부대를 가지고 다녔다.

(151p) 모든 병사들은 늘 법을 암기하고 전달 내용이 담긴 노래 형식을 연습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새로운 명령이 담긴 노래를 쉽게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새로운 명령은 늘 연습하던 노래의 새로운 가사 형태로 전달되었다. 따라서 병사들은 명령을 이행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53p) 칭기스 칸이 군대를 위해 만든 가장 중요한 규칙들은 인명 손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몽골 전사는 전장의 안팎에서 죽음, 부상, 패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생각만 해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54p) 몽골군은 전투에서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명예를 찾았다. 그들의 모든 원정의 목표는 오직 하나, 완전한 승리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 떤 전술을 쓰든 상관없다.

(170p) 칭기스 칸은 카라 키타이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새로운 백성을 얻어 박해받는 종교의 옹호자라는 평판을 얻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이제 중국인과 무슬림 사이의 비단길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제 탕구트, 위구르, 카라 키타이,북쪽 주르첸의 땅에 속국들을 두게 되었다.

<5. 술탄과 칸의 대결>

(184p) 그들이 공포를 자아낸 것은 특별히 잔혹해서가 아니라, 정복이 매우 빠르고 능률적이었으며 부자나 권력자의 목숨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동쪽으로 말을 달리면서 공포를 불러일으켰지만 그들의 원정은 그들이 피에 굶주린 행동을 했거나 사람들 앞에서 잔혹성을 과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막강한 군대와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도시들과 싸워 전례 없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

(194p) 칭기스 칸은 지도력의 첫 번째 열쇠가 자기절제라고 가르친다. 특히 자만심과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데, 자만심을 누르는 것은 들의 사자를 제압하는 것보다도 어려우며, 분노를 이기는 것은 가장 힘센 씨름꾼을 이기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자만심을 삼키지 못하면 남을 지도할 수 없다. 절대 자신이 가장 강하거나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그 산에 사는 짐승들이 있다. 그 짐승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산보다 더 높아진다.

(195p) 칭기스 칸은 자신의 수수하고 소박한 생활방식에 따라 자식들에게도 물질적인 천박함이나 허튼 쾌락을 추구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좋은 옷을 입고 빠른 말을 타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느리면 자신의 전망이나 목표를 잊기 쉽다.” “그런 사람은 노예나 다름없으며, 반드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195p) 그는 자식들에게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군대를 정복하는 것과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꼽힌다. 군대는 전술과 전력만 우월하면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정복할 수 있다.

(202p) 칭기스 칸의 죽음을 가장 훌륭하게 묘사한 사람으로 로마인을 연구하면서 제국과 정복의 역사를 파헤쳤던 18세기 영국의 위대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간결하게 말했다. 칭기스 칸은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몽골인이 칭기스 칸의 바람과 명령을 이루려면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다.

<6. 유럽 원정대>

(205p) 우구데이는 군대를 따라가지 않았다. 정복은 그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우구데이는 자신의 제국을 향유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모든 위대한 군주처럼 영원한 수도를 갖기로 했다. 단지 게르들을 모아 놓은 야영지가 아니라 벽과 지붕, 창문과 문이 있는 진짜 건물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우구데이는 그의 아버지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말을 타고 정복을 할 수는 있지만, 말을 타고 다스릴 수는 없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215p) 몽골 기병들은 슬라브인이 손에 쥔 무기가 닿을 만한 곳에 이르기 직전 말을 멈추었으며 그곳에서 러시아 보병 대오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러시아 병사들은 주위에서 전우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공격범위에 들어 온 사람들이 없어 반격을 할 수가 없었다.

(233p) 몽골군이 불가리아인, 러시아인, 헝가리인, 독일인, 폴란드인에 잇따라 승리를 거두자 극심한 불안이 유럽인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가? 매슈 프리스가 탄식했듯이 유럽인들은 이들의 언어를 몰랐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접근할 방도가 없었으며 그들 역시 우리와 접촉하려 하지 않았다. 양쪽을 다 아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의 관습이나 성격을 알 수도 없었다.

<7. 왕비들의 싸움>

(259p) 우리 몽고인은 하나의 신을 믿소, 우리는 그 신에 의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오, 우리는 그 신에게 정직하게 다가가오. 뭉케 칸은 또 덧붙였다. “신이 손에 여러 손가락을 주셨듯이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길을 주셨소, 신은 당신들에게 경전을 주셨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그 경전을 따르지 않고 있소” 뭉케 칸은 그 증거로 기독교인이 정의보다는 돈을 앞세운다는 점을 들었다.

(272p) 십자군은 몇 개 항구에 발끝만 간신히 디뎠던 반면, 몽골군은 인더스 강으로부터 지중해에 이르기 까지 도든 무슬림왕국과 도시를 정복했다. 아시아의 무슬림 영토 거의 전부를 정복한 셈이었다.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만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281p) 카라코롬은 불과 30년 동안 몽골제국의 수도 역할을 한 뒤, 몽골인 자신의 손에 의해 약탈을 당하고 파괴되어 버렸다. 쿠빌라이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카라코롬은 세계의 중심이고 축이었다. 그 가운데 서 있던 은나무는 카라코롬이 약탈당할 때 해체되어 수레에 실려가 버렸다.

[3부 세계인식의 대전환 (1262-1962)]

<8. 쿠빌라이 칸의 새로운 몽골 제국>

(285p) 쿠빌라이 칸의 천재성은 그의 군대가 아무리 크고 그의 무기가 아무리 세련되었다 해도 단지 힘만으로는 중국 전체를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데서 엿볼 수 있다.

(285p) 그는 중국인보다, 적어도 송나라 사람보다는 더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중국을 통제할 수 있었다.

(287p) 1271년에 이것을 기초로 왕조의 이름을 위대한 기원 또는 위대한 시작 정도의 의미를 가진 대원(大元)으로 정했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몽골 왕조의 정식 명칭이 되었다. 이 새로운 이름은 중국 신민에게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일 뿐 아니라 몽골 신민에게도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였다. 쿠빌라이는 물론 칭기스 칸이 아니었지만, 할아버지 못지않게 대담한 모험을 시작한 셈이었다.

(288p) 쿠빌라이는 강한 군대와 훌륭한 선전(宣傳)이 중요하다고 인정했지만 그의 전략의 세 번째 요소를 꼽으라면 좋은 행정과 정책이었다.

(291p) 중국인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한 몽골 관습은 뭐니 뭐니 해도 몽골여자들이 중요한 행사에서까지 자유롭게 남자들과 섞이며 어울린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294p) 몽골의 절차는 물론 법 집행의 수준을 높였지만, 교육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법을 알고 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몽골의 최우선적 정책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몽골인에게 법은 유죄를 결정하거나 처벌을 하는 수단 이라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고 단결을 이루고 평화를 보존하는 방법이었다.

(302p) 해가 갈수록 송나라를 버리고 몽골 치하의 땅에 가서 살거나 몽골이 자신의 지역을 점령할 때 도움을 주는 병사나 관리나 농민의 숫자가 늘어갔다. 상인들도 몽골인이 있는 곳으로 일터를 옮겼고 사제나 학자도 몽골인에게 가서 보호도 받고 활동의 자유도 얻었다. 결국 장군을 포함하여 육군이나 해군 부대 전체가 몽골 진영으로 넘어가는 일이 생겼다. 송 왕조는 갑자기 무너지거나 정복을 당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침식당하면서 해체되었다.

(303p) 몽골제국이 중국인들에게 물려준 가장 위대한 유산은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다. 몽골은 다양한 중국어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지역을 통일 했을 뿐 아니라, 거기에 티베트, 만주, 위구르 등 인접한 왕국들, 나아가 더 작은 왕국이나 부족국가 수십 개 까지 덧붙였다.

<9. 팍스 몽골리카>

(316p) 랍반 바르 사우마의 여행, 특히 잉글랜드 왕에게 영성체를 주고 교황에게서 직접 영성체를 받은 사건은 처음 유럽을 침공한 이후 50년 동안 몽골이 세상을 얼마나 바꾸어놓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세계의 각 부분을 차지하던 문명들은 이제 통신, 상업, 기술 정치가 서로 연결되는 하나의 대륙간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

(317p)몽골은 말을 탄 전사와 무시무시한 공성무기를 보내는 대신 이제 겸손한 사제, 학자, 사절을 보냈다. 몽골 정복의 시대는 끝났지만 “몽골 평화”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훗날 서구 학자들은 국제적으로 평화와 번영이 확대되어가는 엄청난 변화를 인정하여 14세기를 “팍스 몽골리카” 또는 “팍스 타타리카”라고 명명했다.

(323p) 상인보다 높은 지위는 이제 정부 관리밖에 없었다. 대신 중국 전통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유교학자들은 아홉 번 째 지위로 낮추었다. 거지보다는 높지만 매춘부보다는 하나 낮은 등극이었다.

(325p)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몽골인이 아닌 사람들은 몽골어를 배우는 것을 금지했다. 몽골은 외래 작물의 경작을 강용하지도 않았고, 주민의 집단적인 생활방식을 갑자기 바꾸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333p) 로마 멸망이후 문명의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이제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히고, 새 음악을 들었고, 새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급속하게 높아졌다.

(337p) 종이와 인새술, 화약과 화기, 나침반을 비롯한 해양장비의 광범한 영향을 받아 유럽인은 르네상스를 경험했고, 문자 그대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세계가 아니었다. 다시 태어난 것은 유럽인이 자신의 요구와 문화에 맞게 고르고 옮겨오고 바꾸어 놓은 몽골제국이었다.

<10. 환성제국>

(365p)
르네상스와 몽골제국의 시대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칭기스 칸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까지 격하되었다. 근대 유럽은 새로 발견한 식민지 정복의 힘과 스스로 내세운 세계 지배의 임무 때문에 아시아의 정복자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맺음말 : 영원한 푸른 하늘 칭기스 칸]

(375p) 칭기스 칸은 일을 마친 뒤에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는 승리를 거둘 때마다 이곳에 와서 쉬면서 기운을 되찾고 마음을 새롭게 다졌다. 그는 세상을 바꾸었지만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게 했다. 지금도 칭기스 칸이 살았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봄이면 매가 머리 위로 솟아오르고 여름이면 벌레가 노래를 한다. 가을이면 유목민은 산으로 이동하고 겨울이면 이리가 배회한다. 눈을 감자 중국, 유럽, 인도로 달려가는 칭기스 칸의 말발굽 소리가 멀리서 천둥처럼 들리는 듯 했다.

(378p) 목자건 학자건 각 사람에게 우리 주위의 역사는 추상적인 것도 먼 것도 아니었다. 몽골 역사는 마치 지난주에 일처럼 그들의 삶을 좌우하고 있었다. 필자의 경우 몽골을 가로지르고 시간을 거슬러 탐구하는 일은 거의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에서 시작되어 지적이고 학문적인 탐구로 발전했다. 매일 우리는 그들의 조상이 겪은 곤경과 영웅적 태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점차 과거로 빠져들게 되었다.


4. 내가 저자라면

가. 현장의 힘과 이동의 고고학


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장소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33p)
칭기스 칸은 유목민 생활을 했기 때문에 우리 작업은 순회 프로젝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장소의 고고학이 아니라 이동의 고고학이었던 셈이다.(33p)


책을 보면서 기본적으로 단단한 구성과 칭기스 칸과 몽골족의 이동상황이 쉽게 파악이 되었다. 특별한 지도가 없어도 따라다니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바로 그것이 현장의 힘이 아닌가 한다. 저자 스스로도 장소의 고고학이 아니라 이동의 고고학이라고 하였고, 한 장소를 계절을 달리하여 방문하였던 것을 보면 현장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그대로 독자에게 돌아온 것 같다. 8년에 걸친 대 탐험을 할 수 있는 저자의 열정이 놀랍기도 하고 책에는 이러한 열정과 땀이 그대로 녹아있어야 된다고 본다. 공성전에서 쓰이는 무기가 어떻게 발전되었고, 전쟁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현장의 힘이 돋보였다. 장소와 현장이 결합된 사실로 문체와 단단한 구성이 되는 것이 좋았다.

나. 역사는 끊임없는 대화이다. 기록의 역사

6월에 읽는 책이 모두 개인의 기록이었다. 백범일지, 난중일기, 다산문선도 그렇다. 물론 칭기스칸은 세 사람에 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편찬을 지시하였지만, 고유한 글도 없는 상태에서 글자를 만들어 기록을 남겨놓은 것 자체가 놀랍다. 결국 이러한 기록이 다시 살아있는 역사를 만들게 된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늘 기록은 중요한 작업임을 느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칭기스 칸에 대한 기록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느낌이 들었다. 5장에서 칭기스 칸은 탕구트와 전쟁을 하러 가던 도중에 말에서 쓰러져 죽는다. 나머지 절반은 칭기스칸의 후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칭기스 칸 개인이 아닌 문명의 충돌에 대한 부분과 유럽과의 관계를 조명했다는 부분에서 이해가 가지만 나라의 운영에 대한 기틀을 마련한 부분 등이 아쉬움이 남는다.
IP *.99.241.60

프로필 이미지
도윤
2007.07.03 13:24:46 *.249.167.156
'2. 나에게 다가온 책'으로 따로 묶어놓은 부분, 잘 읽었습니다. 참 많은 것을 동시에 하고 계신 영훈 형님을 보면서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고맙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꿈꾸는간디
2007.07.04 11:59:19 *.180.220.85
작년에 읽었던 책이었는데 요약하신 내용을 통해 다시 한 번 책을 정리한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몽골에 와 있어 더욱 글이 다가 옵니다.
프로필 이미지
꿈꾸는간디
2007.07.04 11:59:23 *.180.220.85
작년에 읽었던 책이었는데 요약하신 내용을 통해 다시 한 번 책을 정리한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몽골에 와 있어 더욱 글이 다가 옵니다.
프로필 이미지
최영훈
2007.07.05 10:02:35 *.99.241.60
도윤 과찬의 말씀.
세상을 살아온 흔적이라고 하는 것이 자주 묻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현재 내가 답답해 하는 부분일수도 있고,
역사에 이름이 남은 사람들은 그들만의 해법찾기에
성공을 했다고 해야하나. 어찌보면 평범한 인생인 그들에게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났을까는 답을 찾는 부분이 참 재미있어.

꿈꾸는 간디님..정말 좋겠네요.
연구원 연수때 몽골에 가서
다른 사람이 쓴 칭기스 칸을 읽을 예정입니다.
좋은 여행 되시길 기원합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32 위대한 나의 발견 * 강점 혁명 [2] 香仁 이은남 2007.07.08 2349
931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혁명] 행복은 내 안에 있다 [2] 余海 송창용 2007.07.08 2072
930 Now, Discover Your Strengths [3] 好瀞 김민선 2007.07.08 2194
929 [독서51]조광조 - 실천적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정두희 지음 [3] 素田 최영훈 2007.07.05 3080
928 [16]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르네 그루쎄 [5] [6] 써니 2007.07.06 4107
927 『칭기즈칸의 생애』를 읽고 [2] 현운 이희석 2007.07.02 2854
926 [리뷰016] 야성의 경영자 칭기즈칸, 르네 그루세 [3] 香山 신종윤 2007.07.02 2812
925 (016) 칭기즈칸 / 르네 그루세 [4] 교정 한정화 2007.07.13 2625
» [독서16]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깨우다/잭 웨더포드 [4] 素田 최영훈 2007.07.02 2432
923 '르네그뤼세' 의 '칭키스칸의 생애' [1] 최정희 2007.07.02 2533
922 [칭기스칸] ‘그 사람’이 된 칭기스칸 [2] 余海 송창용 2007.07.02 5267
921 (16) 칭기즈칸 - 그 광대하고 덧없는 꿈 [2] [2] 時田 김도윤 2007.07.12 2613
920 칭기스칸 천년의 제국,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2] 好瀞 김민선 2007.07.02 3260
919 칭기스칸,잠든 유럽을 깨우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2] 香仁 이은남 2007.07.01 3615
918 칭기즈칸-Rene Grousset file [2] 海瀞 오윤 2007.07.01 2451
917 [리뷰14] 칭기즈 칸 : 라인홀트 노이만 호디츠 [3] 素賢소현 2007.07.01 2416
916 토크쇼 화법을 읽고 (말이 아닌, 뜻을 잘 전달하는 방법) [1] 산골소년 2007.07.06 2578
915 [리뷰015] 다산문선, 정약용 [3] 香山 신종윤 2007.06.25 3171
914 (015) 다산문선 [2] 校瀞 한정화 2007.07.14 2641
913 (15) 다산문선 - 정약용 [3] 박승오 2007.06.25 3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