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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8일 14시 19분 등록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수전 스워츠, 쥬시 토마토, 시그마북스, 2007


얼마전에 딸애와 대학로의 소극장에서 개그공연을 본 적이 있다. 워낙 작은 공간이라 앞줄에 앉은 내가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출연자 하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머니, 왜 안 웃으세요? 이해를 못하셨어요?”
그 개그는 이해를 하고 못하고 여부를 따질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내가 젊은 사람이었다면 웃지않는 이유를 개그가 썰렁해서라고 생각했을 것인데, 내가 나이든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해를 못했냐고 말한 것이다. 살짝 놀라서 “통과!” 하고 말았지만 은근히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의 연령차별주의는 세상에 널려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서른 넘어 공부를 계속하려고 대학원 사무과에 갔을 때, 직원에게서 따님대신 오셨냐는 질문을 들었단다. 그 일로 해서 한동안 분노를 금치못했던 정희진은, 이렇게 생각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누구나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은 체험과 억압을 속속들이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나이듦의 차별을 겪어본 뒤에야, 왜 그토록 남자들이 여성운동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한지를 비로소 이해했다는 것이다. 자기자신도 20대에는 나이듦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정희진은 연령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면에서 한국사회는 계엄령이 필요없는 사회다. 사회구성원들의 상상력, 용기, 소망은 나이에 따라 철저히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대단히 자발적으로 나이듦에 대한 지배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있으며, 나이든 자, 나이든 여성을 혐오한다.
일상의 아주 감정적인 차원에서부터 나이듦에 대해 동일한 해석 틀을 지니고 있으며, 미세한 검열과 규율에 예속되어 있다. 나이에 따라 삶의 가능성이 체계적으로 억압된 사회, 이것은 고도로 조직화된 조용한 폭력이다. 나이든 사람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시선을 다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반 연령주의 정치를 시작해야 할 것같다.”


나이에 따른 역할을 조금만 벗어나도, 낙오자 혹은 수용불가로 낙인이 찍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기성세대의 모습이 모두 똑같다. 수명연장시대에 사람들의 자의식은 이전과 비교할수없이 젊어지고 섬세해졌는데도, 연령주의의 편견은 철옹성처럼 우리를 옥죄고 있다. 가족관계에서는 ‘개인’이 사라지고 오직 의무만이 남아있다. ‘모성’만 가진 존재로 기대되는 어머니, ‘책임’만 살아있는 ‘가장, 대중매체에서 주책맞거나 탐욕스럽게 그려지는 나이든 사람의 이미지, 철저하게 차단되는 사회적 기회... 아직 창창한 나이에 조직 밖으로 내몰린 ‘사오정’과 ‘오륙도’들이 어떻게 연령차별주의의 폭력을 견디어내는지 궁금하다.


나역시 연령주의에 민감한 나이가 되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젊었을 때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관점이며, 아직도 스스로 빠져있는 함정이기도 한다. 친정어머니께서 얼굴의 점을 빼신 것을 보고 속으로 흉보는 식이다. 변화하는 시대와 걸맞지 않은 고정관념으로서의 연령주의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깨나가야 할 과제이다. 더욱이 신문지상이나 통계로 보는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가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어떻게 나이들어갈 것인가. 어떻게 기존의 편견에 맞서 활기차고 재미있으며, 품위있게 나다움을 유지할 것인가.


“흔히 말하는 의식은 바뀌었는데 몸이 바뀌지 않았다라는 개탄은 일상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일상을 넘거나 일상을 극복하는 정치가 아니라, 모든 정치와 운동은 일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머리가 변하는 것이 의식화라면 몸이 변하는 것은 변태다. 그래서 언제나 혁명보다 개혁이 어려운거다. 혁명은 이름과 의식을 바꾸는 것이지만 개혁은 몸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개혁은 글자그대로 살갗을 벗기는 것, 피가 쏟아질수밖에 없다.
모든 변화는 새로운 인식을 의미하는데, 이는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발생한다. 변태는 기존의 나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며, 미래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어 두려운 것이다. 모든 변태는 의미를 생산한다. 의식화는 변절이나 전향이 가능하지만 변태는 형태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의식화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변절이 불가능하다.”


정희진이 명료하게 분석하듯, 의식은 몸을 따라오지 못한다. 머리가 아닌 몸이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내 전부를 걸어야 한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대우를 받으며, 끝까지 내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생존을 건 사활의 문제이다. 여기에 연령차별주의를 뚫고 자기식대로 날아오른 역할모델이 있다. “쥬시 토마토”란 저자가 만든 용어로, 한창 무르익어 더욱 향긋해진 중년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책에는 나이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불평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나이에 비례하여 힘이 생긴 것을 자각한 여자들의 사례가 그들먹하다. 그들은 혼자서 세계를 여행하며 글을 쓰기도 하고, 은퇴후 일을 찾는 여성들에게 토론의 장을 제공하기도 하고, 정부생활보조금으로 4자녀를 혼자 키운 여성이 정치에 눈떠 55세에 미하원에 입성하기도 하며, 요트를 운전하며 트레일러에 살면서 전선배선과 단열처리를 직접 시공하기도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맛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는 더 보기좋은 몸매를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대해 기분좋게 느끼게 되면 더 자유로운 기분이 들어 몸과 마음이 해방된다. 체력이 강해지면 정신적으로도 독립이 된다. 바로 이것,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질지 걱정스러워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긴장하고 이완하는 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운동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은 아주 새로운 세상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남아도는 시간과 남아도는 정열을 활용하여, 스스로 ‘시간의 주인’이 된 여자들은 열정적으로 ‘변태’를 선택했다. 자기혁신을 계속함으로써, '천천히 죽어가는 것'대신, 시대의 변종으로 다시 태어났다. 인생의 전반부에서 어지간한 고난을 다 겪어온 체험과,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가는 담대함은 “슬픈 때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을 긍정하게 만들었다. 나 혼자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책에서 발견하는 기분은 최고다. 외롭지 않다.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자유, 열정, 창조... 내 안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라면 할머니 히피인들 되지 못하랴 ^^



--- 얼마나 책을 많이 읽으면 이렇게 논리정연한 글을 쓸 수 있을까. 대단한 논리, 대단한 글빨, 정희진은 대단한 필자이다. 그녀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에서는 연령주의 이외에도 페미니즘의 이론과 현실에 대해 명쾌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강추! ---
IP *.209.10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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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보이
2007.08.08 15:38:49 *.143.152.23
엥???? 변태를 위하여...????

나를 위해 명석님이 특별히 글을 올리셨나...?
내눈을 의심하며 잽싸게 열어본 글....ㅎㅎㅎ

할머니 히피..ㅋㅋㅋ 재밌는 표현...

글에 있는것 처럼,
"막연히 생각하던 개념을 정리된 글로 책속에서 발견하는 기쁨"이란...

암튼...
누가 뭐래도 내 방식대로 살아오면서 수없이 들었던 말...변태...
나는... 아마도 자발적 마이너리티 계열...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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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8.08 17:14:00 *.209.109.114
하하, 눈길을 끄는 타이틀이 떠오르면 그걸 쓰고싶은 유혹을 저버리기가 힘들어요. 읽는 사람을 지루하게 만들지 말라~~ 는 충심이니 이해해 주시구요. ^^

그런데 요즘 님의 덧글이야말로, 읽는 사람을 크게 소리내어 웃게 만드네요. 좋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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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2007.08.09 08:25:12 *.248.16.2
언제부터인가 변경연 사이트를 들어오면 늘 명석님 글이 올랐을까 먼저 찾아보게 되네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다소 눈길을 끄는 제목을 봤는데 다름 아닌 명석님 글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제목에는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열어봤지요. 역시나...정말 어서 읽고 싶은 책입니다. 우리 사회는 '나이'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중년분들의 모습은 제가 해외에서 만난 분들과 사뭇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여성에 대해 그것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 현실이지만요... 사무엘 존슨이 말한 대로 age is the state of mind라는 말을 저는 늘 가슴에 새기며 살려고 노력합니다. 아마도 여기 오시는 모든 분들이 다 그러실거라 생각됩니다. 물론 구본형 선생님께서 실제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시는 선도자이시구요. 또한 명석님도 그렇구요 ^^ 덕분에 또 신나게 하루 시작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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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8.09 10:40:13 *.209.98.251
늘 한결같은 앨리스님의 추임새 고마워요. ^^

해외출장을 자주 가나봐요. 업무로 가야하면 그것도 피곤하려나~~
나는 어디 좀 가고 싶어서 슬슬 몸살나네요. 여행밖에 할 것이 없을 때는 그것도 시들하기 짝이 없을테니, 무리를 해서라도 좀 돌아다녀야 할까봐요.

하긴 생활이 단조로워지고, 어지간히 글로 풀어놓다보니, 소재가 딸려서라도 여행을 가야해요. ^^
누가 말했듯,
"여행가기 위해 쓰고, 쓰기 위해 여행간다"

나는 산책가네요. 더위에 지치지 않는 하루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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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보이
2007.08.09 11:18:02 *.143.152.23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 뛰는 말이다...
얼마전, 뮤지컬 [오디션]의 홍보 문안에 인용된 청춘예찬의 도입부.

청춘...
그것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이야 무슨 두말이 필요하리오...

단, 나이라는 숫자로 그 개념을 재단하려는 것이 문제.
또 너무 외모적인 것에 치중하는 것이 문제.

나이들어서도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원하는 것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 사람들... 하루 하루 설레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청춘이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나이가 늘어나는 것보다...
더 이상 가슴뛰지 않는 것...
더 이상 설레이지 않는 것...

나는,
영~~~~원히 철없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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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2007.08.09 23:02:34 *.212.182.120
늘 좋은 책과 글귀들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요. 한명석 선생님 덕분에 비오는 우울한 날마다(장마철엔 많이 기분이 가라앉는 편이거든요) 김선우의 '내 입에 들어온 설탕같은 키스들'을 보면서 몽게몽게 사랑의 기억들을 되살려보고,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의 시 한수 엽서에 옮겨적어 친구에게 보내고.. '자기보살핌'의 뱃살명상법도 자기 전에 해본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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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8.10 11:35:18 *.209.98.251
할리님, 완전동감입니다. '철들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소모임이라도 하나 만들까요? ^^
인생의 전반부는 후반부를 위한 리허설이었다, 중년에 더욱 멋있어진 그녀들의 이야기 "쥬시 토마토"를 읽어보시고, 같은 컨셉의 남성판 책을 써보시는건 어때요? 잘하면 새롭고도 열정적인 2막을 열어주는, 멋진 팡파레가 되어줄 것같은데요. ^^

사무엘님, 도움이 되었다니 내가 더 신나네요. 출퇴근길은 적응이 되었거나, 개선이 되었는지요. ^^
사무엘님도 "쥬시 토마토" 읽고 '언니들' 처럼 살기 시작한다면, 그들보다 훨씬 멋진 세상에 접속할 수 있을 거에요. 그들보다 훨씬 시간이 많으니까요. ㅎㅎ 내가 꼭 영업사원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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