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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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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17일 12시 48분 등록
나는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평소 사진은 현실 이미지의 화석일 뿐이며, 좋은 풍경은 가슴에 담아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선배가 사진책을 한권 선물했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제주도에는 자신을 울리는 3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해녀의 물결, 또 다른 하나가 바람, 나머지가 김영갑과 그의 사진이란 설명과 함께.

별 기대 않고 책장을 한 두장 넘기다 나는 한나절 내내 그 책만 붙잡고 있었다.
거기엔 사진에 미쳐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걸고도 모자란 한 사내가 있었다. 그의 사진에는 그의 삶과 그가 보고자 한 세상이 담겼다. 나는 '사진'에 대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에겐 아무 의미도 되지 않는 것이 누군가에겐 삶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았기에.


옛날 옛날 도깨비에 홀린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해 한밤 중 비틀거리며 집을 가던 중, 깊은 산중에서 도깨비를 만나게 되었다. 도깨비에 홀려 온 산을 옷이 찢어지도록 헤매다 새벽녁에서야 쓰러져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김영갑은 도깨비대신 사진에 홀렸고, 제주도에 홀린 사내다. 서울에 살다가 아예 제주도로 옮겨와 눈만뜨면 사진기를 들고 20여 년간 제주도를 헤맸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밥도 제대로 못먹으면서 사진에 모든 걸 걸었던 어느날, 그는 사진을 찍을 때면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허리에 통증이 온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6년간 루게릭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김영갑의 사진 이야기

루게릭 판정을 받고 조금씩 퇴화하는 근육을 놀리지 않으려고, 자신의 사진을 보관하기 위해 그는 갤러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 제정신이냐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폐교된 초등학교를 빌려 갤러리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 전생애동안 찍은 사진을 전시하고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라고 이름붙이고, 이곳에서 그 자신도 잠들었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이름이다.)


"그때는 몰랐었다. 파랑새를 품안에 끌어안고도 나는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떠돌았다."

김영갑은 세상의 이치가 궁금해 사진 작가가 되었단다. 제주도에 반해 제주도에 살면서 사진에만 몰입했다. 그가 제주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섬에서 그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누구에게도 인정받기를 포기했다. 스스로 예술가로 살면 그만이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부도 없었고, 살아 생전 명예도 없었다. 사진 찍는데 방해가 되어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외로운 섬에서 그보다 더 외롭게 지냈다. 사람들의 오해를 사고, 손가락질 받고, 끼니를 걱정하면서도 그는 사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건, 그의 몸뚱아리, 사진뿐이었는데, 몸뚱아리가 죽어가는 것을 느끼자, 사진이나마 남기고자 했다.

"요란스럽게 떠벌리지 않더라도 말없이 감동을 전해줄 수 있다면 한 사람 두 사람 사진을 보러 찾아올 것이다."



그의 글에서는 바람냄새가 났고,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묻어났다. 사진 작가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아는 그에게 질투가 일었다. 나는 그의 책을 보면서 가슴을 울리는 구절마다 밑줄을 그어갔다. 사진작가든, 시인이든, 요리사든 무엇엔가 자신을 온전히 마친 사람에게선 비슷한 냄새가 난다.


사람들은 대개 노을 사진을 찍을 때 해가 수평선 너머로 잠기면 카메라를 챙겨 돌아온다. 그러나 십오 분쯤 후의 노을은 더욱 장관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그 황홀한 아름다움은 단 이삼 분 안에 사라진다. 해가 솟기 이삼십 분 전의 청잣빛 하늘은 한겨울이 으뜸이다.
바람이 심하고 구름이 짙은 날은 사진가들이 피하지만 흐린 날이라도 일 이분 동안 햇빛을 볼 수 있다. 그 일이 분을 위해 사나흘 동안의 기다림을 감수하다보면 가슴뛰게 하는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사진도 자꾸 찍어야 는다. 나는 인턴기자를 하면서 사진이 그나마 좀 늘었다. 현장에 사진기자가 동행하지 않을 땐 내가 직접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을 배웠다.
좋은 사진을 찍기위해선 무엇보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그림을 찍기 위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루종일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라고 배웠다. 김영갑은 일상의 풍경에서 보통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오랜시간 기다리며 사진 찍는다.


"제 사진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제가 '뭍의 것'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눈에 익숙해진 풍경들을 대하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죠."

그는 이미 익숙해진 풍경을 새롭게 찍어낸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사람조차 그 사진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인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장비가 특별한게 아니라, 자신의 사진 찍는 동기가 특별하다고 말한다.


사진사들은 미리 상상하고 있단 사진을 찍기위해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밥을 굶으며 기다린다. 유채꽃과 일출봉, 파란하늘, 그러나 이삼 일 기다려도 원하는 상황이 연출되지 않으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파란하늘을 찍을 수 있었던 사진가의 행운을 부러워하며, 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린다.
(...) 파란하늘을 찍을 수 있었던 사진가의 접근 방식을 터득하려고 고민하지 않고,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또 다른 소재를 찾아 나선다.


진인사 대천명이란 말이 있다.
사람으로서 할일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다는 의미이다. 이 말을 좋아하지만, 내가 얼만큼이나 그 말을 제대로 했는지는 모르겠다.

사시사철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카메라, 동일한 방법, 동일한 목적으로 촬영해도 사진가마다 사진이 다르다. 운이 좋아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행운은 사진가 스스로 준비해서 맞는 것이라고 김영갑은 말하고 있다.
열성도 없으면서 최소한의 열의조차 보이지 않는 사진가들이 있다. 그들은 자연의 원리조차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애쓴다.



김영갑씨는 살아있는 제주의 역사를 담고 싶어 아예 제주에 살았다. 그는 노인들과 함께 지내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면서 카메라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가 눈앞에 펼쳐지면서 마음이 달아올랐다고 했다.

나는 어땠는가? 나는 삶이 무엇인지 고뇌하면서 정작 그 삶을 말없이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갔다.

제주의 노인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자기 몫의 삶에 치열하다. 내가 만난 노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크든 작든 한 덩어리의 한을 간직하고 있지만, 묵묵하게 자기 몫의 삶에 열중한다. 온갖 두려움과 불안, 유혹 따위를 극복하고 삶에 열중하는 섬의 노인들은 나의 이정표였다.

사진을 찍는 하나의 행위에도 영혼이 깃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김영갑.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찾아 해외로 나간다고 아우성이지만, 그는 어디에서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 다음 제주도에 가게 되면, 꼭 그의 갤러리를 찾아가봐야 겠다.
나도 내 삶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IP *.102.1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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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8.17 05:43:34 *.253.249.88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는 건 구선생님을 만나고 난후의 나의 버릇으로 변모 했다. 글을 쓰다 나의 흥분을 식히려고 선생님 홈에 들어 왔다 귀자의 글을 읽었다. 아름다움을 넘어서 감명의 글이다. 점점 성숙해가는 귀자의 모습이 보인다. 짧은 기자생활에서 더욱 칼라있는 여인으로 변모한 모양이다.

"履錯然 敬之 无咎"
<혼돈의 세월속에 살아도 자신을 낮추어 만상을 공경하면 허물이 없다.>

난 귀자의 나아가는 인생의 역정을 얼마나 볼수 있을 까?
그가 가진 크나 큰 사상을 피력할 때는 언재일까?
그렇게 강한 그녀도 사랑에 못이겨 나약한 애정의 포로가 되는 모습을 보일 때는 언재일까?

짧은 인생이지만 그대같이 만상에 도전하는 이를 보면 너무나 행복하다. 열심히 사는 귀자가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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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
2007.08.17 12:50:14 *.102.141.213
앗~초아선생님!!!!!!!!
초아선생님 답글을 대하니 너무너무 반갑고,
고맙습니다.^^
ㅋㅋㅋ
언젠가 보실거에요~

그나저나 다음주에 고향에서 뵈올수 있겠지요?
기대 잔뜩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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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7.08.17 17:16:25 *.46.151.24
귀자 답다!
저녁 때 시간 나면 오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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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
2007.08.17 20:34:56 *.132.113.205
ㅋ 저 짐 양평에 워크샵왔어요~
설 있었다면 갔을텐데...
여기 달과 별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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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7.08.17 23:02:42 *.131.127.64
좋겠다.!
그럼 거그서 잘 놀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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