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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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꽃에게 길을 묻다, 생각의 나무, 2006
소설가의 풍류는 꽃구경으로 시작하나보다. 소설가이자 세계일보의 문화전문기자인 조용호는 광양시 청매실 농장의 매화를 시작으로, 구례 산수유, 유달산 개나리, 남해 치자꽃을 거쳐 백두산 야생화로도 부족하여 히말라야까지 꽃기린을 찾아가고, 서천 동백으로 꽃달력을 마무리한다.
그는 꽃을 여인과 동일시한다. 백령도 해당화는 순정을 바쳤지만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여인이다. 작약은 터질 듯한 정열을 꼭꼭 눌러 붉을대로 붉어진 숫처녀이다. 동백은 최소한 삼십대 후반의 성숙한 관능을 지닌 여인이다. 그는 수많은 꽃들을 아예 ‘그녀들’이라고 지칭하며, 여인에 대한 그리움을 맘껏 꽃에 투사하고 있다.
하긴 조용호만 그랬으랴. 숱한 시인들이 꽃을 두고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했다. 꽃은 詩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 한용운, 해당화 -
한번은 보았던 듯도 해라
황홀하게 자지라드는
저 현기증과 아우성 소리
- 김사인, 개나리 -
잃어버린 옛날이야기가
모두 여기 와 꽃으로 피었을 줄이야
- 나태주, 자운영 -
나도 꽃을 좋아한다. 꽃집을 지나칠 때면 꼭 발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린다. 내 안에 갇혀 이만큼의 평정도 갖지 못했던 시절, 내 작은 뜰의 꽃들이 위로가 되어주었다. 꽃은, 앉은뱅이 제비꽃부터 신비한 나팔꽃, 다홍치마 석류꽃, 섹시한 리션시스까지 저마다 완성이다. 그리움이다. 그리도 고운 것이 그리도 완벽하다니, 그리도 완벽한 것이 그리도 부질없다니, 꽃이 있어 우리는 살아있는 날의 호사를 한 가지 더 보탤 수 있다. 生의 짧은 평화를 맘껏 누릴 수 있다.
올가을에 할 일이 하나 생겼다. 이 책 덕분에, 늘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실행에 옮기지 못한 선운사 꽃무릇 구경을 다짐했다. 꽃은 붉어야 제 맛인가. 나는 흐드러지게 붉은 꽃이 좋다. 꽃무릇을 사진으로만 접하며, 언젠가는... 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올가을에 기어이... 마음먹게 된 것이다.
꽃무릇을 아는지? 통통한 부추같은 이파리가 여름이 오면 모두 떨어지고, 가을에 불쑥 꽃대 하나를 내민다. 그 꽃대에 붉은 꽃을 매다는데, 꽃과 이파리가 영 만날 길이 없이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해서 ‘상사화’라고도 하나, 상사화와는 엄연히 다른 꽃이다. 영광 불갑사와 고창 선운사가 자생지로 유명하다.
갈대와 국화처럼 모든 것이 점잖고 의연해지거나 서걱거리는 가을에, 아직 붉은 마음 어쩌면 좋으냐고, 꽃무릇은 지천으로 피어난다. 붉은 화관처럼 빛나는 것이 무더기무더기 모여있는 모습은 그대로 그리움의 절정이요, 아찔한 유혹이다. 꽃 앞에서 나는 미당이 한탄한 독백을 빌려올 수 밖에 없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 서정주, 꽃밭의 독백
나는 매화의 품격이나 새초롬한 구절초보다 붉은 꽃이 좋다. 붉은 마음이 좋다. 올가을에 나는 선운사 꽃무릇을 보고야 말 것이다. 계곡에 불질러댄 꽃무릇의 잔치판 앞에서 한 가지 배우고 올 것이다. 치열함 없이는, 피 터지는 사랑 없이는 아무도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 한 가지를 단단히 마음에 새기고 올 것이다.
IP *.209.107.112
소설가의 풍류는 꽃구경으로 시작하나보다. 소설가이자 세계일보의 문화전문기자인 조용호는 광양시 청매실 농장의 매화를 시작으로, 구례 산수유, 유달산 개나리, 남해 치자꽃을 거쳐 백두산 야생화로도 부족하여 히말라야까지 꽃기린을 찾아가고, 서천 동백으로 꽃달력을 마무리한다.
그는 꽃을 여인과 동일시한다. 백령도 해당화는 순정을 바쳤지만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여인이다. 작약은 터질 듯한 정열을 꼭꼭 눌러 붉을대로 붉어진 숫처녀이다. 동백은 최소한 삼십대 후반의 성숙한 관능을 지닌 여인이다. 그는 수많은 꽃들을 아예 ‘그녀들’이라고 지칭하며, 여인에 대한 그리움을 맘껏 꽃에 투사하고 있다.
하긴 조용호만 그랬으랴. 숱한 시인들이 꽃을 두고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했다. 꽃은 詩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 한용운, 해당화 -
한번은 보았던 듯도 해라
황홀하게 자지라드는
저 현기증과 아우성 소리
- 김사인, 개나리 -
잃어버린 옛날이야기가
모두 여기 와 꽃으로 피었을 줄이야
- 나태주, 자운영 -
나도 꽃을 좋아한다. 꽃집을 지나칠 때면 꼭 발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린다. 내 안에 갇혀 이만큼의 평정도 갖지 못했던 시절, 내 작은 뜰의 꽃들이 위로가 되어주었다. 꽃은, 앉은뱅이 제비꽃부터 신비한 나팔꽃, 다홍치마 석류꽃, 섹시한 리션시스까지 저마다 완성이다. 그리움이다. 그리도 고운 것이 그리도 완벽하다니, 그리도 완벽한 것이 그리도 부질없다니, 꽃이 있어 우리는 살아있는 날의 호사를 한 가지 더 보탤 수 있다. 生의 짧은 평화를 맘껏 누릴 수 있다.
올가을에 할 일이 하나 생겼다. 이 책 덕분에, 늘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실행에 옮기지 못한 선운사 꽃무릇 구경을 다짐했다. 꽃은 붉어야 제 맛인가. 나는 흐드러지게 붉은 꽃이 좋다. 꽃무릇을 사진으로만 접하며, 언젠가는... 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올가을에 기어이... 마음먹게 된 것이다.
꽃무릇을 아는지? 통통한 부추같은 이파리가 여름이 오면 모두 떨어지고, 가을에 불쑥 꽃대 하나를 내민다. 그 꽃대에 붉은 꽃을 매다는데, 꽃과 이파리가 영 만날 길이 없이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해서 ‘상사화’라고도 하나, 상사화와는 엄연히 다른 꽃이다. 영광 불갑사와 고창 선운사가 자생지로 유명하다.
갈대와 국화처럼 모든 것이 점잖고 의연해지거나 서걱거리는 가을에, 아직 붉은 마음 어쩌면 좋으냐고, 꽃무릇은 지천으로 피어난다. 붉은 화관처럼 빛나는 것이 무더기무더기 모여있는 모습은 그대로 그리움의 절정이요, 아찔한 유혹이다. 꽃 앞에서 나는 미당이 한탄한 독백을 빌려올 수 밖에 없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 서정주, 꽃밭의 독백
나는 매화의 품격이나 새초롬한 구절초보다 붉은 꽃이 좋다. 붉은 마음이 좋다. 올가을에 나는 선운사 꽃무릇을 보고야 말 것이다. 계곡에 불질러댄 꽃무릇의 잔치판 앞에서 한 가지 배우고 올 것이다. 치열함 없이는, 피 터지는 사랑 없이는 아무도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 한 가지를 단단히 마음에 새기고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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