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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11일 09시 36분 등록

“문제는 왜 생기는 것일까?”

“이 문제를 좋게 만들 수는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싶다면 피터 드러커의 <위대한 혁신>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혁신, 피터 드러커, 한국경제신문>


1. 저자에 대하여(http://www.jklee.com/data2.htm 사이트 참조)


제1차 세계대전과 부모의 영향

피터 페르디난드 드러커(Peter F. Drucker)는 1909년 11월 19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부친 아돌프는 오스트리아의 재무성 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으로 이주한 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교수로 봉직했다.

그의 모친 캐롤라인은 오스트리아에서 최초로 의학을 공부한 여성으로서, 특히 프로이트의 제자였다고 한다. 드러커의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방관자의 모험》(1979)에서, 그는 자신의 집안 형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확실히 1920년대 중엽의 빈의 기준에 비추어서 말하면, 우리 집은 아주 부유했다."

10세가 되던 1919년,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해, 드러커는 빈 김나지엄(Vienna Gymnasium) 에 입학했다. 드러커가 5세가 되던 해인 1914년 7월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게 선전 포고하자 전 유럽이 전쟁에 휘말려 들었고, 나중에 일본과 터키마저 참전함에 따라 세계대전으로 확대된 제1차 세계대전은 드러커가 9세가 되던 해인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종전을 맞는다. 그 결과 당시 인구 6천만 명 규모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고 오스트리아는 지금과 같이 스위스 산록의 소규모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대학 진학을 강조한 부친

대체적으로 당시의 유럽에서는, 특히 함부르크, 암스테르담, 바젤 같은 상업도시에서는, 그러나 그 정도가 그다지 심하진 않았지만 빈에서도 양가집의 가장 뛰어난 자식은 대학에 진학시키지 않는다는 전통이 남아 있었다.

도대체 진학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14세쯤에 일하러 나갔다. 예를 들면 회계사무소나 가게에서 견습생으로 근무했던 것이다. 그러나 드러커의 부친은 드러커가 대학에 진학하기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드러커의 집안은 관리와 변호사와 의사의 가계였다. 또한 부친은 드러커가 상인으로서의 기지와 재능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점에서 부친은 정확했다.

드러커는 "요컨대 내게는 대학의 교수가 되라는 압력이 가해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실, 드러커의 주위에는 대학교수가 많이 있었다. 아저씨나 사촌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친척들이 빈이나 프라하의 대학 그리고 스위스나 독일의 대학,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법률·경제·의학·화학·식물학·미술사·음악을 강의하고 있었다.

따라서 드러커에게, 교수생활은 충분한 여름휴가가 있고 임무로서 부과되는 일이 적어 편한 생활로 보였다. 게다가 특히 사회적 지위에 관한 한 다른 어떤 직업도 [교수]와는 비교가 안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그 사회적 지위는 융커(Junker, 지방귀족)라는 경쟁상대가 있는 독일에서보다도 한 단계 더 높았다.

함브르크와 프랑크푸르트 시절: 기업과 사회에 대한 관찰

드러커는 1927년 빈 김나지엄을 졸업하고, 그 해에 독일 함부르크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으며, 재학중 소규모 무역회사에서 3개월간 견습생으로 근무했다. 1927년이 다 저물어 갈 무렵, 견습서기로 취직한 지 4개월 만에 드러커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휴가를 얻어 빈에 돌아왔다. 그런 드러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주간지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Austria Economist)의 신년 특집호의 편집회의에 나오라는 초대장이었다. 드러커는 열 네댓살 무렵부터 그 잡지를 애독하고 있었으나 편집자와는 만난 일은 없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에서도 이름있는 잡지였다.

창간 당초는 [런던 이코노미스트](London Economist)를 모델로 하고 있었으나 차츰 경제, 비즈니스 뿐 아니라 국제정치, 과학, 기술의 각 분야까지 활기찬 이색적인 잡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지의 창업자인 칼 폴라니(Karl Polani, 1886∼1964) 가문의 선조는 유럽의 [철도왕]이었다. 나중에는 미국과 유럽의 [철도왕]이 거의 예외없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가 괴멸적 타격을 입고 1900년 경 파산의 비운 속에서 타계했다.

폴라니 가문은 (조상도 그리고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의 소유주도) 각각 자기가 목표 삼았던 위업을 달성할 수가 없었다. 그들 누구나 [사회에 의한 구원](salvation by the society)이란 것을 믿었다. 그러나 이윽고 사회를 단념하고 사회에 절망했다.

[방관자의 모험]에서 드러커는 당시의 관찰을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 자체가 경우에 따라서는 부차적인 것이 될지도 모르며, 나아가서는 사회의 조직이 궁극적으로는 중요치 않은 것이 되거나 문제가 안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소멸되어 가고 있는 [사회의 시대]에서 [오류없는 종교]가 부차적인 것으로 된 것처럼, 마르크스의 추종자들에 의한 [오류없는 사회]라는 개념이 여전히 폭을 넓히고, 그것을 탐구하려는 시도가 세계를 비관용, 자유의 완전한 상실, 자기파괴적 전쟁이라는 큰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고 있다.

따라서 [사회의 시대]의 소멸은 아직 먼 장래의 일처럼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카톨리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새로운 통합을 목표로 한 훌륭한 종교사상가들이 그로부터 50년 후에 좌절을 맛보게 되면서 [오류없는 종교시대]의 종언의 전주곡이었던 것을 생각할 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초월하는 제 3의 사회를 목표로 한 폴라니 집안의 좌절이 [오류없는 사회의 시대]의 종언의 전주곡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드러커의 관찰은 나중에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사회가 지식사회가 되면서 개인의 자유와 창의 그리고 책임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탕이 된다.

신문기자와 편집인 그리고 강사 시절

1929년 드러커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이적했다. 재학중 독일의 오래된 어느 머천트 뱅크의 증권 애널리스트로 취업했다. 이 머천트 뱅크는 나중에 미국 월 스트리트의 주식중개업자의 유럽지점이 되었다. 증권 애널리스트로서의 드러커의 일은 1929년 가을의 뉴욕 주식시장의 붕괴와 더불어 짧게 끝났지만, 드러커는 프랑크푸르트 제일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프랑크푸르트 게네랄 안짜이거》(Frankfurt General Anzeiger)의 금융기자로 채용되었다.

드러커는 1931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드러커는 신문 편집자로서의 일 외에도 또 한 몫의 일이 더 있었다. 드러커는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법학부에 시간강사의 적을 두고 있었다. 1931년에는 국제공법의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 무렵에는 이미 친한 사이가 되어 있던 국제법 담당의 병약한 노교수 대역으로 법학부 강단에도 섰던 것이다.

런던시절

1933년 드러커는 영국의 런던으로 건너가 런던의 보험회사 및 은행에 근무했다. 1934년 드러커는 베링턴 아케이드(Barrington Arcade)에서 개최된 일본회화전을 감상했는데, 그것은 드러커가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런던에서 근무하던 중 도리스 슈미트(Doris Schmidt) 여사와 만나 1937년 초 결혼했는데, 드러커 부부는 그후 4명의 자녀와 6명의 손자녀를 두었다. 당시 영국의 분위기는 러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이 말했듯이 [후퇴]의 시대였다. 영국의 국력이 쇠퇴하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모든 외국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영국 자신이 비로소 깨달은 시대였다.

영국은 하루바삐 인도로부터 독립하여 그것을 축하할 수 있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드러커는 생각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주인이 노예에게 의존하는 정도는, 노예가 주인에게 의존하는 정도보다 훨씬 높게 마련이다."

드러커가 런던에서 1934년경 한동안 근무했던 프리드버그회사는 머천트 뱅크(어음 인수를 주로 하는 개인 경영 금융업자)였다. 드러커는 당시 프리드버그회사를 간혹 방문왔던, 창업주 프리드버그의 친구이자 미국 베른하임 백화점의 주인이었던 헨리와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소매에는 두 가지 원칙밖에 없지. 단 2센트라도 싸게 팔면 틀림없이 이웃 가게에서 손님을 끌어올 수 있다. 이것이 첫째 원칙이다. 진열장에 진열하지 않으면 상품은 팔리지 않는다. 이것이 둘째 원칙이다. 다음은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지.

손님은 합리적이 아니라는 것은 어림없는 소리다. 상인이 태만한거야. 손님이 이쪽 희망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손님은 합리적이 아니다'라는 얘기 따위를 해선 안돼. 그런 건 상인의 할 일이 아니거든.

상인이 할 일은 손님을 만족시키는 것이고, 이 가게에서 또다시 사고 싶다는 생각을 손님에게 심어주는 거지." 이렇게 보면 헨리는 소매업계의 일대 혁신자였고, 진정코 고객만족 중심 경영을 펴고 있었으므로, 드러커는 그와의 만남에서 많은 것을 배웠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드러커는 "기업이란 고객을 창조하는 것이다"라는 고객지향적 경영철학을 확립한다. 헨리는 "저희 회사는 손님께서 만족할 수 있음을 보증합니다. 불만이 있으실 때는 언제고 돈을 돌려드립니다."라는 방침을 채택한 최초의 소매상이었다.

이것은 시어스 로벅이나 월마트 그리고 노드스트롬 등 미국의 유통업자들이 그런 정책을 채택하기 훨씬 전이었다. 드러커가 "하지만 헨리 아저씨, 손님이 일단 입은 드레스를 세탁해서 가지고 와도 반품에 응합니까?" 라고 질문하자, 헨리는 "물론"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만 손님의 입장이 상인의 입장과 다를 뿐일세."

드러커는 학문적인 일을 원했지만 단순한 학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학문과 실무라는 두 개의 희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영국에서는 불가능한 데 반하여 미국에서는 용이하다고 생각하여 1937년 말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그는 일단(一團)의 유럽은행 및 신탁회사의 주미 이코노미스트 및 영국 신문사의 주미 경제 주필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교육자로서의 출발, 그리고 교육관

드러커는 1939년 뉴욕교외 브롱크스 빌에 있는 사라 로렌스 여자대학(Sara Lawrence Women College)에서 시간강사 자격으로 1주일에 하루씩 경제학과 통계학을 가르치는 것 뿐이었으나, 드러커는 교수생활이 즐거워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대학으로부터도 강의 권유가 왔다. 당시 드러커에게 있어서는 흑인이란 불황 이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 영속적인 실존적 사실이었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이 "공정한 신(神)의 존재를 상기할 적마다 미국의 장래를 생각하면 전율을 느낀다."고 한 말을 드러커가 접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지만, 드러커는 뉴욕에 도착한 지 한 달만에 흑인들의 삶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

스스로 겁쟁이 - 필자의 관찰로서는 드러커는 자신의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쓰는 자애주의자이다 - 라고 생각했던 드러커는 도저히 남부에서는 살 수 없음을 통감했다.

그때까지 얘기가 있었던 교육계에서의 일자리로 가장 매력적이었던 것은 애틀랜타의 에머리대학의 학부장직이었다. "이 직무를 제의 받은 것은 1940년 말로서, 그 당시는 아직 남부에서는 완전한 흑백분리가 실시되고 있었다. 나는 부득이 이 요청을 거절했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드러커는 "이제 미국의 흑인이 해방되느냐 어떠냐는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이미 흑인은 해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문제는 단 하나, 백인이 그 사실을 인식하는 데 얼마나 걸리느냐 하는 것뿐이다."라고 생각했다. 결국 드러커는 1942년 버몬트에 있는 소규모 대학인 베닝턴대학(Bennington College)의 전임교수가 되었다.

드러커는 주로 철학, 정치, 그리고 종교를 강의하는 한편 자문위원으로서 정부의 일을 맡기도 했다. 드러커는 1949년까지 7년 동안 이 대학에 근무했는데, 그 동안에 자문위원으로서 주로 다룬 문제는 산업과 기업의 문제였으나, 나중에는 금융문제에서부터 조직문제와 경영방침에 관한 문제에까지 확대되었으며, 연구상의 관심도 이에 집중되었다.

드러커는 1950년 뉴욕대학교 경영대학원(Graduate School of Business, New Youk University)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이후 드러커는 교수로서 그리고 컨설턴트로서 산업과 기업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컨설턴트로서의 일의 영역은 점차 국제적으로 넓어졌고, 그와 함께 드러커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으로 되어 갔다. 드러커는 "참다운 교사. 참다운 교육학자에게는 됨됨이가 나쁜 학생도 없거니와 됨됨이가 미련한 학생도 없고 게으른 학생도 없다. 있는 것은 오로지 좋은 교사냐 엉터리 교사냐 하는 것뿐이다."라고 쓰고 있는데, 이런 교육관은 미국의 여러 대학을 거치면서 검증한 것이겠지만, 어릴 때 빈의 교사들로부터의 배움과 추억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기업을 사회적 제도로 인식

드러커가 GM으로부터 GM의 조직을 연구하기 위해 초빙된 것은 1943년이었는데, 또한 이 해에 드러커는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가 진정한 의미의 경영학자로서 역량을 발휘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이었지만 그것은 나로서는 무척이나 바라던 초청이었다.

1942년 《산업인의 미래》속에서, 나는 [기업]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제도]가 되었으며, 이 제도 안에서 통치자 즉 경영자는 통치(즉 경영)의 원리를 확립하고 아울러 개개의 성원(成員)에게 신분과 기능을 갖게 해야 된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그 당연한 귀결로서, 나는 대기업의 내부를 조사해야 할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 대기업은 고사하고 어떤 대조직에서도 일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조사를 할 수 있는 대기업을 사방으로 알아봤으나 결국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었다."

드러커는 대기업에 관한 이런 부적절한 과제를 떠맡는 것이 그 당시 고루한 학계 (특히 정치학계와 경제학계)의 눈밖에 날 수도 있음을 알았지만, 드러커는 그 일을 하고 싶은 정도가 아니었다. 가히 열광적이었다. 그는 대기업이 산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institutions)이 되었다는 것을 이미 결론 내리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이해하고 싶었던 터였다.

GM 부회장인 도널드슨 브라운(Donaldson Brown)은 드러커를 만나자 "당신의 《산업인의 미래》를 읽어보았습니다."라고 말을 꺼냈다. "우리 회사에서도 당신이 말한 문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대조직의 관리와 구조, 사회에 있어서의 거대 기업의 지위, 산업질서의 원리와 같은 문제를 말입니다.

당신이 자동차 산업에 대해선 물론이고, 기업경영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책을 읽고서 어쩌면 정치·사회학자의 눈으로 GM이라는 회사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으신지? 그리고 우리 회사의 구조와 경영방침, 회사내외의 관계를 조사하여 그 결과를 우리들 톱 매니지먼트, 특히 2, 3년 후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대로 우리 뒤를 이을 유능한 젊은이들에게 보고해 줄 수 없을까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GM의 실정을 모르는 드러커에게 이런 설명은 당연했지만, 브라운의 다음과 같은 조언은 드러커에게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은 중역들 가운데 하나인 브래들리는 대학출신이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미시건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는 사실이오. 아니, 그보다 더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 회사의 최초의 통계전문가로서 그는 대학에서 2, 3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답니다.

GM의 경영진에는 미국 산업계의 평균에 비하여 대학출신이 많습니다. 최소한 중년층에는 말이오. 알프레드 슬론은 MIT의 공학사이며, 나는 버지니아 폴리테크닉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사장인 윌슨은 카네기 출신입니다.
그렇지만 이 회사는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 훌륭하게 된 사람이 많은 것을 가장 큰 특색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들로서는 가능하면 그가 박사학위 소지자임을 비밀로 해두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40년 전에는 기업체의 종업원 또는 임원이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경력은 재산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부채(負債)였던 것이다.
달리 말해 그때는 산업사회의 가장 중심 시대였기 때문에, 지식사회의 문턱을 넘고 있는 지금 그 당시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지금은 노동은 부채이고 지식이 자산이다.

마샬플랜 참가와 컨설팅 활동의 확대

마샬플랜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경제 부흥을 위한 미국의 원조계획으로서, 1947년 6월 미국의 국무장관 조지 마샬(George C. Marshall, 1880∼1959)에 의해 입안되어 1948년부터 1952년까지 4년동안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마샬 플랜을 추진하는 과정에 드러커는 마샬 장관의 특별고문(special adviser) 역할을 했다. 드러커는 1947년 민간인 신분으로 마샬 플랜의 지도를 위해 프랑스·영국·이태리·벨기에·서독을 순방했다.

당시 마샬의 지도력에 대한 관찰을 근거로 드러커는 다음과 같이 리더십에 있어 [카리스마]의 허구를 지적하고 팀경영의 중요성에 대해 신뢰를 하게 된다.
"참다운 지도자는 [카리스마]로 지도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것이 비록 선전하는 자가 날조한 것이 아니더라도 카리스마 따위는 매우 수상쩍은 것이다. 참으로 역량있는 지도자는 근면과 헌신으로 지도한다. 그는 모든 것을 장악하려고 하지 않고 팀을 만든다. 그는 능숙한 책략으로 다스리지 않고 성실로 다스린다. 참다운 지도자는 영리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성실하다."

1943년 드러커는 처음으로 GM에서 경영컨설팅 활동을 시작한 뒤 여러 회사에 대한 크고 작은 컨설팅을 했고, 1951년에는 GE에 대해서도 컨설팅을 했다.

그 뒤 그는 여러 나라 예를 들면, 영국, 유럽, 남미 그리고 아시아 특히 일본을 상대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컨설팅 대상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부기관, 그리고 비영리단체가 포함되었다. 비영리단체에 대한 컨설팅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1990년에는 《비영리단체의 경영》을 펴냈다. 현재 드러커는 [드러커 비영리 재단](Peter F. Drucker Foundation for Non Profit Management)의 명예 이사장이다.

정치학자: 경제인의 종말과 산업인의 미래

베닝턴대학에서 드러커는 자신이 연구하고 싶은 과목을 자유로이 선택하여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었다. 강의과목으로는 정치이론·미국정치·미국사·경제사·철학·종교 등이었다. 미국정치학협회가 드러커의 처녀작 《경제인의 종말》(1939)의 가치를 인정하여 얼마 후 드러커를 그 협회의 정치이론 연구위원으로 선출해 주었다. 그런 탓으로 드러커의 학자로서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드러커는 최초의 본격적인 저서 《경제인의 종말》에서 나찌즘의 근원과 유럽의 리버럴리즘과 휴머니즘의 전통이 쇠퇴하는 근원, 이 양자의 분석을 시도해 보았다.

이 저작의 구상이 싹튼 것은 그보다도 몇 년 전, 정확히 말하면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장악한 직후였다. 그는 또 이 일이 있기 수년 전부터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저서, 궁극적으로는 히틀러는 패배한다는 전제하에서 전후에 있어서의 정치적·사회적 통합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저작을 구상하여 1940년에는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드디어 그 집필에 착수할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이 저서는 2년 뒤인 1942년 《산업인의 미래》라는 표제로 출판되었는데, 드러커는 그 책 속에서 사회가 바야흐로 조직사회 (드러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조직사회]를 [피고용자사회]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로 명명했다)라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그러한 조직내부에 있어서 개인의 신분과 기능 그리고 시민권의 문제가 등장할 것이고, 그러한 조직의 통치문제가 중심적인 문제가 된다는 것을 남보다 앞서 지적했다.

《산업인의 미래》는 오늘날에는 거의 상식화 되어있는 생각, 즉 기업조직은 (기업조직뿐만 아니라 어떠한 조직이나) 경제적 조직이자 사회적 조직이라는 것, 즉 공동체이자 사회라는 생각을 주장한 최초의 저서였다.

이 저서는 또한 여러 가지 조직체의 경영에 대해 드러커가 관심을 갖도록 한 밑바탕이 된 저작이며 경영연구에의 착수를 가능케 한 저작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 저작은 수년 뒤 GM의 초청으로 그 톱 매니지먼트의 구조와 기업방침의 분석에 종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이 분석에서 경영에 대한 드러커의 최초의 저서 《기업의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기업의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하여 1946년에 (영국에서는 [빅 비즈니스]라는 표제로) 발간되었는데, 그 이후 드러커는 사회와 정치의 통합에 대한 저서와 경영에 대한 저서를 번갈아 출판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0년경 경영에 대한 개념은 없었다.

경영(management)은 오늘날 이미 친숙한 단어로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연구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직업의 대상으로서는 그 연구의 역사가 짧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 1943년 드러커가 당시 미국 최대의 자동차 회사인 GM의 경영정책과 조직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지금 우리가 경영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것과 관련된 책이나 논문 또는 그 외의 것들이 아쉽게도 너무나 없었다"고 말했다. 겨우 있는 것이라곤 대개가 공장의 운영방법이나 판매원관리 그리고 재무관리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뿐이었다. 개념으로서 경영은 그때까지도 정의되고 있지도 않았다.

"진정코 당시 거의 모든 경영자들은 자기 자신이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체스터 버나드(Chester. I. Barnard, 1886∼1961)의 1938년의 저서 《경영자의 기능》(The Function of Executive)과 같이 강연의 재록(再錄)으로서 혹은 메리 파커 포레트(Mary Parker Follett, 1868∼1933) 여사의 리더십과 갈등해결에 관한 선구적인 논문과 같이 소수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연구논문 뿐이었다.

당시는 매니지먼트에 관한 저서의 독자층, 즉 매니저층이라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대부분의 매니저가 자기가 매니지먼트를 실천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반대중도 부자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었으나 [매니지먼트] 따위의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조직이나 구조, 경영자의 육성, 직공의 우두머리나 중간관리직의 역할 등에 대해 어느 정도 깊고 까다로운 테마로 책을 내어본들 읽힐 것 (또는 팔릴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상황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경영에 관한 서적들이 서점과 도서관을 가득 메우고 있다. 경영대학과 MBA과정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최고경영자 교육은 경영컨설팅과 마찬가지로 수지맞는 학교사업이 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 경영은 지금 원칙이 잘 수립된 분야가 되었다. 그리고 그 원칙을 수립하는 데 기초를 놓은 책이 《기업의 개념》인데 이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드러커가 GM을 연구한 결과를 출판한 것이다.

드러커 자신은 《기업의 개념》이 출판된 시점을 하나의 행운이었다고 회고한다. "우연히도 내가 그곳에 있게 된 최초의 사람이었지" 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분야의 개척자들이 늘 그렇듯이, 드러커가 최초로 그 자리에 있게 된 데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행운 이상의 것이 있었다.

사이비 경제학자로 매도된 드러커

《회사의 개념》은 발간과 동시에 크게 히트하여 몇 번이나 판을 거듭해도 지금까지 여전히 많은 사람에 의해 읽혀지고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드러커의 여러 친구 학자들은 책을 내는 편이 좋겠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체로 "자네는 경제학자 내지는 정치학자로서 장래가 유망시되고 있네. 그런데 기업을 정치나 사회의 한 제도로서 다루는 책을 쓴다면 경제학자나 정치학자로서도 자네에게 플러스가 될 건 없지 않은가."하고 드러커에게 충고했다.

친구들이 예상했던 대로 《기업의 개념》에 대한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American Economic Review)의 서평은 "[미시 경제학]이 아닌 비즈니스 방면의 책에 당혹할 뿐만 아니라, 가격의 이론이나 희소자원의 배분문제에 대한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아메리칸 폴리티컬 사이언스 리뷰》(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의 매우 동정적인 서평마저 "이 유망한 젊은 학자는 그가 지닌 재능을 더욱 진지한 과제에 경주하길 바란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1950년경, 드러커가 뉴욕대학에 봉직하고 있을 때, 이미 노경에 접어들어 이름을 떨치고 있던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 1881∼1973)도 뉴욕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자주 만나고 있지는 않았지만. 미제스는 드러커를 배교도(背敎徒), 즉 진짜 경제학에 등을 돌린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그는 드러커를 돌아보고 힐책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저작은 확실히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가르쳐지지도 않았던 하나의 주제(主題), 즉 [매니지먼트]라고 하는 학문분야의 확립에 기여했다. 《기업의 개념》은 좋든 나쁘든 간에 그후 30년간의 [경영학 붐]에 점화(點火)하는 역할을 했다.

찰스 월슨과 알프레드 슬론과의 만남

GM에서 일하는 동안에 드러커는 수십 명의 중역들을 만났는데,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별종(別種)의 인간이었다. 무엇보다도 강하게 인상에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이 똑같은 줄무늬 회색 양복을 입은 [조직인](organization man)이라는 신화(神話)와는 대조적으로 다양한 개성과 성격과 체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드러커가 만난 사람 가운데 매우 특색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GM의 사장으로 최고업무집행자(CEO)인 찰즈 E. 윌슨(Charles E. Wilson)이었다. 그는 드러커가 조사를 끝낸 후에도 접촉해 준 유일한 GM의 간부였다.

윌슨은 알프레드 슬론(Alfred Sloan)의 뒤를 이어 GM의 최고경영집행자가 되었다(그후에도 슬론은 여전히 GM의 회장직에 머물러 있었다). 윌슨과의 접촉은, 그가 아이젠하워 정권의 국방장관을 지낸 4년간에도 회수는 줄었으나 여전히 계속되었다.
[매니지먼트]와 [산업 질서의 가치]라는 두 가지 과제에 대한 드러커의 연구 중에서 [자치적인 공장공동체](autonomous factory community)와 "종업원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가장 중요하며 또한 독창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경영자측에서 보면 이런 생각은 [경영자의 대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여겨져 배척받았다. 한편 노동조합 측에서도 그런 생각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 까닭은 노동자들에겐 적으로 싸울 상대로서 분명히 눈에 보이는 [보스] 또는 경영주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윌슨은 "앞으로 20년이 지나면 노조의 지도부에 유능한 인물은 없어져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능한 인물은 모두 대학으로 가서 공인회계사가 되든가 매니지먼트 분야로 나가고, 신통치 않은 자만이 노동조합의 일을 보게 될 것이다."고 앞일을 걱정했는데, 불행히도 윌슨의 이 예언은 완전히 적중했다. 미국의 노조조직율은 제2차 세계대전직후 35% 수준에서 지금은 15% 미만으로 떨어지고 있다. 드러커는 20세기에 들어와 가장 성공한 조직도, 또한 가장 쇠퇴하는 조직도 노동조합과 은행이라고 지적했다.

드러커는 어느 날 "이런 말단직 종업원 한명 선발에 자그마치 4시간이나 걸립니까?"라고 슬론에게 말했다. 그러자 슬론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들이 인사 결정에 4시간 걸렸다면, 과오를 범한 뒤의 처리에는 4백시간이 걸릴 것이오. 그런데 내겐 도저히 그럴 시간은 없소." 라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드러커는 그후의 여러 저서에서, 특히 최근의 《21세기 지식경영》에서 유능한 인재의 중요성, 특히 지식근로자의 생산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보수 자원봉사자마저도 효율적이어야 하고 성과 중심으로 채용·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그 당시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한다. 슬론은 옛날부터 지켜온 중요한 룰을 한 가지 강조하였다.
"[자기의 후계자]는 결코 자기가 선택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뒤를 잇게 되고 결국 그런 후계자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라는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관심: 리커트와 허쯔버그

윌슨은 종업원의 직무와 공장공동체 문제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육체노동자의 생산성을 끌어올려 임금을 높여줌으로써 그들을 중산계급이 되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당신은 말하지만, 이번에는 그 육체노동자를 생산 담당자로서 뿐만 아니라 유능한 시민으로도 육성해야 되오.
그 의미를 생각해 보지 않겠소?"라고 윌슨은 드러커에게 말했다. 윌슨의 이런 제안에 대해 드러커는 여러 학자들로부터 연구 제안을 받았는데 그 결과, 윌슨과 드러커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그후에도 산업심리학에서 규명하게 된 문제, 예를 들면, 미시건 대학의 랜시스 리커트(Rensis Lickert)의 시스템 IV이론, 혹은 프레드릭 허쯔버그(Frederick Herzberg)의 "인간은 왜 노동하는가?" 등의 분석 결과가 모두 윌슨과 드러커의 연구제안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노동에 대한 외면적인 보수, 예를 들면 임금이나 승진은 나중에 하츠버그가 [위생요인](hygiene factor)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임금이 적거나 좀체로 승진이 안되어 불만이 있는 노동자는 일에 대한 의욕과 열의를 잃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면에서 만족시키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일에 대한 열의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다.
그것보다는 무언가를 수행했다는 기분, 무엇엔가 공헌하고 있다는 자각과 책임감 등이야말로 일에 대한 의욕과 열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드러커가 나중에 지식근로자의 무보수 자원봉사 활동을 강조하면서, 인간은 성과를 향상한다는 것 자체가 삶의 보람이자 존재의의를 느끼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무렵의 경험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노조와 회사에 대한 이중몰입

종업원들은 자기들이 일하고 있는 회사가 존경받을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또한 그들 회사의 경영자나 감독자가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들의 거짓없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것은 드러커 자신의 주장으로, 윌슨은 몹시 의문을 품고 있었던 듯하나, 노동조합에 대한 종업원의 충성심과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서로 상반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종업원들은 조합과 회사의 양편에 소속해 있기를 원하고,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며, 목적은 다르지만, 조합과 회사 양편을 다 존중하고 싶어한다고 드러커는 분석했다.
불황시 경영자와 노동자의 상부상조정신은 사실 불황에 대한 미국식 대응방식이었다.
그것은 진정 미국 특유의 불황에 대한 대응이었다. 유럽에는 그에 비길 만한 것은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불황이 유럽에서 낳게 한 것은 시기심과 적의와 공포와 선망뿐이었던 것이다.

매슬로우와 맥그리거

비록 대부분은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사람 그 자체에 대한 가정, 그리고 인적자원관리만큼 전통적인 기본적 가정을 충실하게 따르는 경영분야도 없다. 그리고 이 분야만큼 가정과 현실이 그토록 서로 다르고 완전히 비생산적인 분야도 없다.
"세상에는 사람을 다루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법이 있다. 혹은 적어도 있어야만 한다." 라는 가정은 인적자원관리에 관한 모든 저서나 논문에 사실상 밑바탕이 되고 있다.
이것에 관해 가장 자주 인용되는 저서는 더글러스 맥그리거(Douglas McGregor)의 《기업의 인간적 측면》(The Human Side of Enterprise, 1960)이다. 이 책은, 경영자들은 사람을 다루는 데는 X이론과 Y이론 두 가지 가운데, 다시 강조하여, 단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채택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서도 Y이론만이 건전한 방법이라고 단언했다.

이 책보다 조금 앞서 1954년도에 출판된 《경영의 실제》(The Practice of Management)에서 드러커 또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했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자, 아브라함 H. 매슬로우(Abraham H. Maslow, 1908∼1970)는 그의 저서 《에웁시치언 경영》(Eupsychian Management, 1962) - 1995년도 《매슬로우 온 매니지먼트》(Maslow on Management)로 재간행 - 에서 매슬로우는 "맥그리거와 드러커는 오류를 범했다"고 공박했다.
매슬로우는 서로 다른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했다.
드러커는 즉각 매슬로우의 비판을 받아들이고 매슬로우 이론으로의 전향자가 되고 말았다.
매슬로우가 제시한 증거가 너무나 압도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러커는 오늘날까지도 몇 안되는 사람들만이 매슬로우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

드러커는 한국동란이 끝난 후 (1954년 경으로 추측됨),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한국의 교육문제를 점검하기 위해 처음으로 우리 나라를 방문했고, 1977년 두 번째로 방문하여 세계중소기업대회에서 주제를 발표했다.
필자는 드러커를 개인적으로 1992년, 1993년, 1997년, 그리고 1998년 말 네 번 만났다. 3번은 미국 클레어몬트 자택에서 그리고 한번은 일본(1993)에서 만났다.
드러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의 한국인을 위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에 기록된 것 가운데 한국전쟁 이후 40년 동안 한국이 이룩한 경제성장에 필적할 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성과에 내가 한몫(물론 조금이지만)을 했다는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뉴욕대학의 대학원(그리고 1970년대 이후에는 클레어몬트 대학)에 있을 때, 나는 해마다 뛰어난 많은 한국의 학생들을 나의 클라스에서 가르쳤습니다.
졸업 후 그들은 대부분 귀국해서 우수한 교육자가 되었고, 유능한 경영자가 되었으며, 그리고 훌륭한 정부관료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어떤 나라도 나라 바깥(특히 미국으로부터)에서 얻을 수 있는 교육자원을 이렇게 현명하게 이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교육에 대한 투자로부터 그렇게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던 나라는 한국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어느 나라든지 국가가 생산을 주도하고, 애국심을 동원하는 것은 곧 한계에 부딪친다.
나라 사랑만으로는 금방 지친다는 뜻이다.
애국적 사회주의 쿠바처럼 하나의 신화(神話)이다.
뿐만 아니라 드러커는 첨단경쟁시대에는 성실만으로는 곤란하다고 지적한다.
자본과 노동의 역할이 끝나고 지식이 주요한 생산요소가 되는 지식사회 그리고 지식경제학에 있어서 경제정책은 케인지안의 소비(유효수요정책)나 오스트리아학파의 투자가 아니라 지식의 적용이 가장 우선되는 정책 즉, 경영자에 의한 지식의 응용정책이어야 한다. 이것이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 나라에 주는 시사점은 매우 크다.

예측과 예언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미래학자

20세기 초엽부터 말엽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드러커는 20세기를 (제1차 세계대전,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일본의 부흥,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락사태, 인종분쟁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드러커가 접촉한 (이 글에서 일부 언급한) 인물들은 20세기의 여러 측면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며 20세기의 의미를 체험했던 인물들이므로 그들을 통해서 드러커는 20세기를 관찰해 온 셈이다.
드러커 박사는 1989년 《새로운 현실》에서 소련방의 해체를 예언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이후, 사실은 그전부터 여러 매스콤에서는 그를 마치 [미래학자]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드러커 자신은 예측(forecast)이나 예언(predict)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드러커는 "단지, 이미 일어난 현실을 바탕으로 미래를 남보다 앞서 갈 수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지금 결정해 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드러커 박사야 말로 다가올 미래사회에 대한 책들(《단절의 시대》(1969)·《새로운 현실》(1989)·《자본주의 이후의 사회》(1993)·《미래의 결단》(1995)·《21세기 지식경영》(1999) 등)을 쓰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Built to Last》의 저자 짐 콜린스(Jim Collins)는 "피터 드러커의 수많은 논문들과 심원한 통찰력은 1930년대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기원에 관한 선견력 있는 논문부터 시작하는데, 그는 현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일관성 있는 관점을 제공하는 기고가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스며든 [효과적인 경영]은 자유세계를 지탱케 하고, 독재자와 전체주의가 다시 등장하지 못하게 하는 단 하나의 대안인데, [효과적인 경영]의 확산이라는 점에서 피터 드러커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고 평하고 있다.
비록 예언이라는 단어를 싫어하지만 드러커는, 미래의 세계의 모습에 대해 범세계주의(globalism)·지역주의(regionalism)·종족주의(tribalism)는 급속하게 새로운 국제정치체제, 즉 새롭고도 복잡하고 그리고 전례가 없는 정치구조와 정치체제를 창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일명 [지식사회], [피고용자사회], [연금기금 사회주의], [노동자 없는 공산주의], [개인자본가가 없는 자본주의] 등)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세 가지 벡터(vector)를 갖는다.
세 가지 벡터를 갖는 벡터 방정식은 불안정하며 예측할 수 없으며 그리고 하나의 해답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클레어몬트대학

드러커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경영학 교수로서 장기간 뛰어난 경력을 쌓았는데, 처음에는 뉴욕 대학의 경영대학원(New York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Business, 1950∼1970)에서, 1971년부터는 지금까지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 대학원(Claremont Graduate School)에 계속 봉직하고 있다. 1987년 클레어몬트 대학은 경영대학원의 명칭에 드러커의 이름을 붙여 경영대학원의 명칭을 Peter F. Drucker Graduate School of Management로 바꾸었다.
드러커는 최고경영자들에 대한 컨설턴트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지난 50여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최우수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드러커에게 조언을 구하고 또한 받아들이고 있다. 그 점은 정부의 정책입안가들이나 비영리부문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드러커는 미국, 벨지움, 체코, 일본, 스페인, 스위스, 그리고 영국의 많은 대학들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92년말 필자가 드러커를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정치학자·경제학자·철학자·사회학자·경영학자·저널리스트·경영컨설턴트·소설가·미술평론가·미래학자 등 다양한 호칭 가운데 박사님께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드러커는 "그야 물론 사회과학자 겸 경영학 교수이지" 라고 답했다.

최후의 경영르네상스인

190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한 드러커는 정치, 사회, 예술, 그리고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남녀 명사들에 둘러싸여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예술과 고전문학 그리고 법학교육을 받았지만, 사실상 그의 학문적 수업은 그가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가 수행한 업무들로 이루어졌다.
처음에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신문기자와 편집인으로 일했고, 그후에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상업은행의 행원으로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미국에 정착한 뒤에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드러커는 1950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경영자는 경영을 해야 한다"(Management Must Manage)를 기고한 이래 오늘날까지도 계속 좋은 논문을 게제하고 있다.
지금 그는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클레어먼트대학원 사회과학부 교수로 있으며,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저명한 경제학자 케네드 볼딩(Kenneth Boulding)은 드러커를 평하여 [미국 사회의 제1급의 철학자]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대로 드러커는 철학자로서의 평가도 대단하다.
또 드러커 비영리재단의 최고경영자 겸 이사회장인 프랜시스 헤셀바인(Frances Hesselbein)은 "피터 드러커는 저널리스트로서의 명쾌한 감각, 경제학자로서의 예리한 분석능력, 그리고 폭넓은 역사적 안목을 지닌 할아버지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유용하고도 통찰력 있는 그의 논문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드러커가 우리 사회에 끼친 공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20세기는 혁명과 전쟁 그리고 데땅뜨의 세기였고, 이데올로기와 냉전,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과 탈냉전의 세기였으며, 또한 산업화와 과학화 그리고 공해와 환경파괴의 1백년이었다. 20세기를 [파란만장과 질풍노도의 세기]라고 규정한다면, 1909년에 태어나 지금도 활동 중인 드러커는 이 한 세기를 경험한 현자(賢者)이다.
드러커 박사의 관심의 영역은 이미 논의한 것처럼 경제학·경영학·정치학·사회학·철학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대상을 학문이라는 차원에서 논할 때는 그러하지만, 드러커의 지적 영역은 체르니(Karl Czerny, 1791∼1857)의 음악기법에서부터 에도(江戶)시대의 일본화(日本畵)까지, 마크 트웨인의 소설에서부터 유럽의 교육제도와 사회보장제도에까지 이른다.
그의 학문적 업적 즉 논문이나 저서는 그 깊이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수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1999년 8월 현재) 35회나 기고하였고, 경영학·경제학 관련 저서 또한 30여권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일본화에 대한 평론집과 소설을 두권이나 썼다. 따라서 드러커를 20세기의 마지막 경영르네상스적 인물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11] 서양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수백 년마다 한번씩 급격한 전환이 일어난다. 나는 이런 전환의 시기를 나의 책 <새로운 현실(The New Realities)>에서 ‘역사의 경계’라고 불렀다.

[13] 우리는 이제 이 ‘경영의 시대’를 지나, 다시 기업가정신을 강조하는 ‘기업가의 시대’에 살고 있다.

[13] 역사는 나선형으로 진행한다. 한 시대가 그 전 시대로, 또는 그 전의 문제로 되돌아가곤 한다는 뜻이다. 포도주병의 코르크 마개가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역사도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 듯하지만 사실은 수준이 점점 올라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주 낮은 수준의 개인 기업가에게 탈피해 경영자로, 거기서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기업가 정신으로 올라가는 중이다.

[14] 혁신은 목적과 초점을 갖고 조직의 경제적, 사회적 잠재력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노력이다.

[20] 혁신은 기존의 자원이 부를 창출하도록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는 활동이다.

[20] 인간이 자연 그대로의 자원에서 새로운 용도를 찾아내고 그것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기 전까지는 ‘자원’이라고 불릴만한 것은 없다.

[25] 혁신을 하기 위한 기본은 진단을 잘하는 것이다.

[25] 첫 번째로는 예상치 못한 것들-예상치 못한 성공, 예상치 못한 실패, 그리고 예상치 못한 외부 사건들이 혁신의 원천이다.

[26] 두 번째 부류는 기업 또는 산업 외부에서 일어난 변화와 관련된 것들이다. 인구 변화와 같은 통계상의 변화, 사람들의 인식이나 의미의 변화 등도 혁신의 기회를 제공한다.

[29] 예상치 못한 성공은 그 어떤 분야보다 더 풍부한 혁신의 기회를 제공하는 디딤돌이다. 이상한 것은 이런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경영자들이 거의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32] 경영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다. 우리는 어떤 현상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그것이 ‘정상적’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간주해온 것과 모순되는 것이 나타나면 그것이 무엇이든 불합리하고 건전하지 않은 것, 비정상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32]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외면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사용하는 기존의 보고 시스템이 그런 사실에 대해 경영자가 주의를 기울이도록 경종을 울리기는커녕 그런 징후나 현상을 잘 알아차리기 어렵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33] 예상하지 못한 성공은 하나의 징후이다. 즉 변화의 실마리가 숨어있는 어떤 움직임이다.

[35] 예상하지 못한 성공은 기회이지만, 진지하게 다루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그 기회를 제대로 잡으려면 조직에서 필요없는 무능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우수한 사람을 배치해야 한다.

[36] 치밀하게 계획했는데도 예상과 달리 실패했다는 것은 제품이나 서비스 또는 설계나 마케팅 전략의 기초로 삼았던 가정들이 더 이상 현실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고객들의 가치관과 인식이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36] 예상하지 못한 실패는 직접 밖으로 나가서 살펴보고 들어봐야 그 원인을 제대로 알 수 있다.

[39] 그들은 전혀 다른 새로운 시장, 즉 요즘 우리가 말하는 ‘라이프 스타일’의 분류에 따라 시장이 빠르게 대체되고 있거나, 또는 적어도 이것과 병행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냈다.

[40] 이상한 변화, 그것이 기회다.

[43] 예상하지 못한 외부의 사건은 큰 기회이고 자주 나타난다.

[44] 분명한 것은 어떤 불일치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은 혁신의 기회가 왔음을 알리는 징후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일치는 경영자들이 관심을 갖고 보는 통계 숫자나 보고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각종 불일치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48] 만약 연구를 더 많이 해야 되고 새로운 지식이 계속 필요하다면, 그것은 기업가가 나서기에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53] 이 마음의 평화야말로 ‘현명한 투자자’들이 얻고자 하는 소중한 ‘가치’이다.

[54] 실제 현실과 현실에 대한 인식 사이의 불일치가 존재하는 이면에는 항상 지적 오만과 엄숙주의 그리고 독단이 도사리고 있다.

[54] 생산자와 공급업체들은 고객이 실제로 구매하는 것이 무엇인지 거의 잘못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치’있는 것이면 고객에게도 마찬가지로 ‘가치’있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56] 프로세스 내부의 리듬이나 논리상 불일치는 그다지 모호한 것이 아니다. 사용자는 항상 그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56] 제품이나 서비스의 목적은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이런 자명한 이치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기초해 행동하면 불일치를 혁신의 기회로 이용하기란 매우 쉽고 효과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중대한 한계가 있다. 그런 불일치는 일반적으로 해당 산업 또는 서비스 분야 내부에는 종사하는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61] ‘프로세스의 필요성’에서 성공적인 혁신을 이끌어내려면 다섯 가지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독립적인 프로세스여야 한다.
둘째, ‘약한’ 또는 ‘잃어버린’ 연결고리가 존재해야 한다.
셋째,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더 좋은 해결책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지지를 보내야 한다.

[62] 세가지 제약 조건에 따라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첫째,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가?
둘째, 그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지식은 이용 가능한가, 또는 현재의 최신 기술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는가?
셋째, 그로 인한 해결책이 목표시장 소비자들의 도덕관과 가치관에 부합하는가, 또는 위배되는가?

[63] 산업구조의 변화는 그 산업과 관계가 없는 외부 사람, 즉 다른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뚜렷이 보이고, 매우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65] 산업구조의 변화가 임박했음을 확실하게 인식시켜주는 명확한 지표들
1. 모든 지표 가운데 가장 신뢰할 수 있고 찾기 쉬운 것은 산업이 빠르게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2. 빠르게 성장하는 한 산업이 매출면에서 두 배로 커질 무렵이 되면, 이 산업이 해당 시장에 대해 인식하고 서비스하는 방식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은 것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3. 지금까지는 분명 다른 것으로 보이던 기술들이 통합되는 현상이다.
4. 한 산업 내에서 사업하는 방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면, 그 산업은 구조 변화가 시급할 정도로 성숙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67] 산업구조의 변화를 활용한 혁신은, 산업 및 시장규모가 매우 크거나 일부 소수 업체들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성공하기 쉽다.

[69] 매우 단순하고 구체적인 전략만이 성공 가능성을 높여준다.

[70] 외부에서 일어나는 변화 가운데 인구구조의 변화가 가장 뚜렷하다. 총인구, 연령구조, 성별구조, 고용 통계, 교육수준 그리고 소득구조 등 인구구조의 변화가 불러올 결과들을 예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72] 인구 변화는 본질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드타임을 통해 변화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74] 총인구수는 중요성이 가장 떨어지는 수치다. 연령분포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연령 분포에 있어 특히 중요한 것은 인구의 중심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75] 교육수준에 따른 인구구조의 세분화 역시 중요하다. 특히 어떤 특정한 목적이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예컨대 백과사전을 판다거나 휴가여행을 위한 시장분석 등의 목적이라면 말이다). 그 다음 노동력과 직업별 분류도 유용할 것이고 소득 분포, 특히 가처분소득과 재량소득의 분포 등도 쓸모 있을 것이다.

[77] 본질은 그대로, 의미가 변한다.

[77] 일반적인 인식 또는 지각이 물이 반쯤 담긴 컵을 ‘절반이 찬 것’으로 보는 것에서 ‘절반이 빈 것’으로 보는 것으로 변하면, 여기에는 중요한 혁신의 기회가 존재한다.

[80] 지각상의 변화에 기초한 혁신이 직면할 수 있는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타이밍이다.

[80]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지각상의 변화가 일시적 유행으로 그칠지 아니면 지속적인 추세가 될지 불확실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지각상의 변화에 기초한 혁신은 처음부터 소규모로 출발해야 하고 구체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83] 토머스 쿤은 그의 획기적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새로운 과학이론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즉, 여러 과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또 자신들의 연구에 활용하는 새로운 학설로 자리잡기까지는 대략 30년이 걸린다고 주장했다.
지식에 기초한 혁신의 두 번째 특성(진정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지식에 기초한 혁신들이 과학적, 기술적 지식만이 아닌 여러 다른 종류의 지식들이 축적되고 난 다음에야 진행된다는 점이다.

[86] 지식에 기초한 위대한 혁신의 아버지는 대부분 과학자 또는 기술자가 아니라 이 산업 분야에 전혀 문외한들이다.

[86] 지식을 기초로 한 혁신에 필요한 두 번째 요건은 먼저 전략적 위치에 분명하게 초점을 맞추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87] 기본적으로 지식에 기초한 혁신에는 집중해야 할 세 가지 핵심사항이 있다.
첫째, 나중에 해당 분야를 지배할 완전한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둘째, 자신이 개발한 제품을 판매할 시장 창출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셋째, 핵심 기능에 집중하면서 전략적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

[90] 품질이란 사용자에게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91] 지식에 기초한 혁신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때가 되어야 한다.

[94] 혁신 기회를 못 보고 놓치는 것은 다른 이유라기보다는 우리의 관행이고 습관 탓이다.

[100] 변화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변화 추구의 목적이 근본적인 변혁이었다고 해도, 그 결과가 단순한 기존 조직의 재편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01] 변화 노력을 약화시키는 두 번째 요인은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 사용된 프로세스가 구성원들 사이에 불신이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오히려 변혁되어야 할 조직의 과거 관행이 강화된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우선 뛰어난 경영자 한 명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조직 모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실질적인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103] 혁신은 ‘번뜩이는 천재성’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고된 작업이다.

[106] ‘빛나는 아이디어들’의 실패율은 개구리 알의 폐사율만큼이나 높다.

[106] 생존 가능한 최종 결과를 얻으려면, 천 개의 아이디어를 품어야 한다.

[107] 이 나무를 따라
저 아래 뿌리에서부터 최고층의 왕자까지
아이디어들이 넘쳐 올라가지만
내려오는 것은 “안 된다”는 소리뿐

[107] 혁신적 조직이 허용해서는 안되는 위험은 ‘목표를 너무 낮게 잡는 것’이다.

[108] 아주 생산적인 과학자는 자신들의 지식, 지능, 노력을 커다란 가치가 있는 목표에 집중하는 사람이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

[108] 나는 수년동안 노벨상 수상자들의 수상 기념 연설을 읽어 왔다. 그들이 주로 하는 말은 대개 이런 내용이다. “이렇듯 영광스러운 상을 받게 해준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아주 우연한 것이었습니다. 학창시절 한 선생님이 제게 해준 말 때문이었지요. 그 선생님은 ‘세상을 바꿀만한 중요한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니?’라고 말씀하셨지요.”

[109] 혁신의 5원칙
1. 기회 분석부터 시작하라.
2. 밖으로 나가서 고객을 만나라.
3. 오직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춰라.
4. 작게 시작하라.
5. 목표는 주도권 잡기

[113] 잊지 말아야 할 전제들
1. 혁신은 노력이다.
2. 혁신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강점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3. 혁신은 사회와 경제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116] 세 가지 금기 사항
1. 어렵게 만들지 말라.
2. 너무 많은 것을 시도하지 마라.
3. 미래를 위해 혁신하려고 하지 마라.

[121] 고객 창조 전략
1. 효용을 창조하라.
2. 가치에 맞는 가격을 매겨라.
3. 고객의 현실에 맞춰라.
4. 가치를 팔아라.

[122] “우편서비스가 고객에게 진정한 의미의 서비스가 되기 위해서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127] 가격은 공급업체의 ‘원가’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인정하는 ‘가치’에 따라 설정되어야 한다.

[129] 제조업자들은 ‘비합리적인 고객’에 대해 항상 불평이 많다. 그러나 세상에 ‘비합리적인 고객’이라는 것은 없다. 있다면 오직 게으른 제조업자뿐이다. 고객의 행동은 항상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고객의 현실이 제조업자의 생각과는 다른 것일 뿐이다.

[132] 이론 경제학의 아버지 데이비드 리카드는 “이윤은 남다른 현명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다른 어리석음에서 나온다”라고 말했다.

[132] 전략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전략 자체가 우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공급업체들이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132] “고객이 정말로 구입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사람이면 누구나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데도 말이다.

[134] 고객의 효용부터 먼저 검토하는 것, 즉 고객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객이 처해 있는 현실과 고객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살펴보는 것, 이것이 바로 마케팅이 고려해야 할 전부다.

[138] 총력 선점 전략은 목표를 정확하게 공략해야 한다. 이 전략은 달을 향해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궤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미사일이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147] 창조적 모방가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발명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사람이 발명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완성시키고 제자리를 잡아준다.

[148] 창조적 모방은 제품이 아니라 시장으로부터, 생산자가 아니라 고객으로부터 출발한다.

[153] 기존 기업에는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다섯 가지 나쁜 습관이 있다.
1. ‘여기서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라고 하는 ‘NIH 신드롬’이다.
2. 시장에서 수지맞는 부분만 차지하겠다는, 다시 말해 시장에서 높은 이익을 제공하는 세그먼트만 취하려는 경향이다.
3. 품질에 대한 착각은 한층 더 쉽게 몰락시킨다. 어떤 제품 또는 서비스에서 ‘품질’이라는 것은 공급업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객이 느끼는 것이다.
4. ‘개발자의 초과이익을 보장하는 가격’이라는 환상에 빠져드는 경우이다.

[165] 이런 톨게이트는 지위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정산적인 경우 그것은 오직 불일치 상황에서만 나타난다.

[170] 전문기술 틈새시장은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어떤 경우든 간에, 그것은 혁신의 기회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나서야 찾을 수 있다.

[173] 전문시장 틈새전략은 시장에 관한 전문지식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175] 전문시장 틈새전략으로 성공하려면, 첫째 새로운 추세, 산업 또는 시장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해야 한다. 둘째로는 거기에 아주 구체적인 혁신이 더해져야 한다. 셋째, 제품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한 번 획득한 주도권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176] 가장 큰 위험은 전문시장이 대중시장으로 성장해버리는 것이다.

[181] 기업가 정신과 혁신에 대한 장애물은 ‘규모’가 아니다. 장애물은 기존 경영방식 그 자체다.

[184] 기업은 3년에 한 번씩은 내부 스태프의 세세한 활동들과 제품, 프로세스, 기술, 시장, 유통채널 등 모든 것의 존재 이유를 검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188]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만을 보고, 보이지 않은 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영자들 눈앞에 제시되는 것은 ‘문제들’이고, 특히 실적이 기대이하인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는 경영자들이 기회를 눈여겨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0] 기업이 기업가정신을 수용하려면 기업의 성과 측정 기준에 혁신 성과를 포함시켜야만 한다. 사람들은 남들이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93] 어떤 일을 추진하더라도 기존의 조직은 주로 이미 하고 있는 일을 확대하고, 수정하고, 적응하는 것만 잘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새로운 것은 별도의 조직에 맡겨야 한다.

[195] 새로운 혁신 노력이 별도의 조직으로 출발해야 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새로운 혁신 프로젝트가 떠맡을 수 없는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서이다.

[207] 벤처기업이 혁신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우선 재무 예측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219]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공공서비스 기관이 혁신에 저항하는 것은 ‘소심한 사람들’, ‘월급값을 못하고 시간만 때우는 사람들’, ‘권력에 굶주린 정치꾼들’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이미 마키아벨리 시절부터 불렀던 한물간 노래다. 곡조는 똑같은데 가수만 바뀌었을 뿐이다.

[219] 공공서비스 기관이 기업보다 혁신하기 어려운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공공서비스 기관은 실적에 따라서가 아니라 ‘예산’을 기초로 보상을 받는다.
둘째, 공공서비스 기관은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에 의존하고 있다.
셋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인데, 공공서비스 기관 자체가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221] 자신들이 하는 일은 경제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도덕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223] 공공서비스 기관의 혁신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공공서비스 기관이 이제 너무 중요하고 규모가 커졌기 때문이다.

[224] 앞으로 20~30년 동안 선진사회의 중심적인 경제 문제는 자본 형성 문제가 될 것이 분명하다.

[226] 사회적 기업가 정신은 경제적 기업가 정신만큼이나 중요하다.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상당히 튼튼한 경제를 갖고 있지만, 사회는 병들어 있다.

[226] 혁신을 제대로 하기 위해 공공서비스 기관이 해야 할 일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공공서비스 기관은 우선, 사명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공공서비스 기관은 목표를 현실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목표 달성에 실패하게 되면 목표가 잘못되었거나, 목표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다음 전제는 목표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당연히 경제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228] 300년 전부터 수학자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성공의 확률은 매번 뒤이어 시도할 때마다 떨어진다. 사실 뒤이은 시도가 성공할 확률은 앞서 시도한 것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한 것은 목표의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던져야 할 명백한 이유가 된다.

[234] 정부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정부가 성과를 산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난 30~40년간의 성적표를 보면 비참하기 짝이 없다. 정부는 두 가지 분야에서는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정부는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또 정부는 통화를 증발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분야들에 대해서 정부는 약속은 하지만 성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238] 어떤 기관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기업이든, 노동조합이든, 대학이든, 병원이든 또는 정부이든 간에 언제나 다음과 같은 3단계를 거쳐야 한다.
1. 효과가 없는 것들, 효과를 낸 적이 없는 것들, 유용성과 공헌 능력이 소멸된 것들을 폐기해야 한다.
2. 효과가 있는 것들, 성과들 내고 있는 것들, 조직의 수행능력을 증진시키는 것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조직은 성과가 있다고 입증된 것들을 더 많이 회복시켜야 한다.
3. 반쯤 성공하고, 반쯤 실패한 것에 대한 분석이 중요하다. 수행되지 않은 분야는 폐기하고, 효과가 있는 부분은 더 많이 수행해야 한다.

[239] 경영이론을 실천적으로 적용한 최초의 예는 기업이 아니라 비영리단체와 정부기관이었다.

[242] 사명 뒤에는 결실이 있어야 한다. 만족할 만한 결실을 보고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243] 어떤 새로운 일을 할 때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실수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전면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생각을 테스트하는 사소한 시험 과정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다음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는 독선적인 오만이다.
누구나 쉽게 범할 수 있는 또 다른 실수는 모든 일을 새로이 시작하지 않고 지금까지 해오던 옛 것으로 땜질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246]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을 한꺼번에 묶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장기적 안목에서 함께 이루어보겠다는 사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248] 폐기없이 건설만 하는 조직은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초래하게 되고, 결국 결실도 맺지 못하며 낭비만 하게 된다.

[248] 전략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는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다. 바로 최적의 순간을 잡는 것이다.

[256] 기업가적 사회가 사회적 혁신을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분야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잉여노동력을 해결하는 정책이다.
둘째는 효력이 다한 사회 정책과 진부한 공공서비스 기관을 체계적으로 폐기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차이로부터 발생한다. 나는 이 차이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한 가지는 시간의 차이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의 차이이다. 전자는 ‘변화’라고 부르는 것이고, 후자는 ‘다양성’이라고 말한다.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여전히 문제로 남기도 하고 새로운 기회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역사는 나선형의 형태로 반복된다고 한다. 변화가 빠르고 경쟁이 치열해진 지금의 시대를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기업가의 시대’라고 한다. 기업가 정신의 핵심은 ‘혁신’이다. 저자는 앞에서 말한 ‘차이’를 혁신의 기회로 생각한다. 그리고 혁신은 반드시 천재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이룰 수 있으며, 체계적인 방식으로 기회를 찾고 실천해야만 성공에 도달한다고 강조한다.

더 이상 긴 말이 필요가 없다.
저자의 말을 빌려 이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해보자.

“혁신은 ‘번뜩이는 천재성’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고된 작업이다.” (p 103)

혁신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실천을 강조한다.


저자의 오랜 경험과 통찰력에서 묻어나오는 전달력에서 딱딱한 내용이 부드럽게 다가온다.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마지막까지 정리하여 후세에 남기려는 석학의 열정이 문장 속에서 그리고 한 시대를 넘나드는 사례 속에서 느낄 수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씩 머릿속에 담겨있는 내용을 단순히 열거했다는 느낌보다는 산증인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성을 문장 속에 심어놓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어려울 것 같은 ‘혁신’이 저자의 말대로 하나하나 실천하다보면 어렵지 않게 이루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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