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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13일 08시 41분 등록
1. 나에게 다가온 책

올해가 시작되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교수님과 만나는 독서회에서 세종대왕의 책을 읽다가 논어를 보게 되었고, 그것이 다시 조선의 유학자로 건너뛰게 되었다. 조광조에 이은 두번째 유학자이다. 유교를 국교로 정한 조선에서 지식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과 그 시대를 살았던 지성인의 살아있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07.7.1~.7.27 동안 읽고 07.7.25~9.13 정리)

2. 저자 이덕일 소개

1961년 충남 아산 출생, 숭실대 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 사회주의계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해서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사단법인 한가람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있다.

자료를 조사하던 중 한겨레신문에서의 저자에 대한 소개가 눈길을 끌었다.

역사 전문 저술가 이덕일(45)씨는 가장 성공한 글쟁이로 꼽힌다. 책 이름에 ‘이덕일의~’라고 붙일 수 있을 정도로 개인브랜드를 만들어낸 것이다. 현재 역사 쪽에서 대중들과 직접 호흡하는 저술가, 특히 ‘대학교수’란 배경도 없이 책만으로 승부하는 저술가는 그가 유일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이 늦었던 ‘늦깎이 사학자’ 이씨는 1997년 서른일곱살이란 나이에 첫 책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을 쓰면서 저술가로 데뷔한 뒤 꼭 10년 동안 30여권의 책을 쓰면서 역사 쪽에서 최고의 인기저자로 자리 잡았다.


그가 역사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커다란 오기였다. 특정당파와 특정사관이 뿌리 깊게 존재하는 학계에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비주류가 되는 현실에서 철저하게 비주류가 되어서 대중과 소통을 시도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피터 드러커가 남긴 미래사회에는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전문가가 중심이 된다는 말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늘 2% 부족한 답답한 현실을 느끼게 된다. 절반은 암기식 역사로 생명력이 없는 건조한 역사를 공부했다는 사실과 우리의 올바른 역사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데 있다. 친일사학에 의한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아직도 풀어나가야 할 난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역사평론가에 의하여 재구성된 역사를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 시대의 시대정신을 추구하다 불행하게 돌아가신 분들에게 애정이 많이 가는 편이고 책으로 그런 분들의 한을 풀어주는데 가장 많은 소명을 느낀다는 저자의 말처럼 역사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 유성룡의 모습이 새롭기만 하다. 역사 철학이 아니 역사 평론에서 오로지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개인의 평전에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평론의 차이를 굳이 따진다는 것은 해석에서 길을 읽는 우려도 들지만, 무뚝뚝한 현실에서 한번쯤은 도전해 볼만한 일이라고 본다.


3. 유성룡의 일생

본관 풍산(豊山). 자 이현(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의성 출생. 이황(李滉)의 문인.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교리 ·응교(應敎)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建儲)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저서에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편서에 《황화집(皇華集)》 《정충록(精忠錄)》 등이 있다.

4. 가슴을 치는 구절

<저자의 글>

(6) 그의 행적을 꼼꼼히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난다. 대동법이 그 하나이다. 광해군 즉위년(1608)경기도에 시범실시 했다가 100년 후인 숙종 34년(1708)에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 대동법은 임란 때 유성룡이 작미법(作米法)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시행한 제도이다. 고종 9년(1871) 대원군이 강행한 호포법도 마찬가지이다. 호포법 실시 이후에야 양반들도 비로소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성룡은 임란 때 속오군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지웠다. 그 뿐만 아니라 천민들도 종군(從軍)을 조건으로 면천(免賤)해주고 나아가 공을 세우면 벼슬까지 주는 신분 타파책을 실시했다.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을 침해하는 이런 정책들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7) 유성룡이 실각한 선조 31년(1598)11월 19일은 공교롭게도 그가 천거한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다.

(8) 전란 극복을 위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까지 타파했고, 결국 그 때문에 불행한 종말을 맞이한 유성룡, 그의 인생을 기존 당파나 양반 사대부들의 시각이 아니라 역사의 보편적 시각으로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인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또한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제1부 전란의 시대 칼끝에 서다

<1. 도주길에 오른 선조>

(20) 이때 만일 선조와 대신들이 압록강을 건넜다면 조선을 이래저래 망했을 것이다. 일본이 차지하거나 명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일본과 명나라가 반씩 나누어 가졌을지도 모른다. 유성룡이 두 번씩이나 강력하게 만류했기에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려는 계획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2. 당쟁의 시대>

(27) 유성룡은 조선에서 양명학을 최초로 접하지만 그의 주변 환경은 영명학과 앙숙인 성리학 일색이었다.

(30) 양명학과 주자학의 가장 큰 차이는 사민(四民)(사·농·공·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주자학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의 신분차이를 하늘이 정해준 천경지의로 생각하는 반면, 양명학은 사민평등을 주장한다. 왕양명은 사대부 계급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고 사민을 평등하게 바라보았다.

(34) 이때 정 9품 성균관 전직 유성룡이 상소를 올려 인종도 문소전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돌한 젊은 관료의 주장은 예상을 뒤엎고 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받아 공론(公論)이 되어갔다. 그러자 영의정 이준경도 종전 주장을 버리고 유성룡의 견해를 따르면서 인종의 신주를 비로소 문소전으로 옮겨 모신 것이다.

(38) 유성룡이 동인 쪽에서 당파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면 서인 쪽에서는 이이가 그랬다. 아이는 이준경의 예언대로 사림이 동·서로 나뉜 것을 크게 반성하고 두 당파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서인이란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동인들에게서 집중적으로 비판받았고, 끝내 두 당파를 화해시키지 못한 채 선조 17년(1584)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당파는 서로 대립하다가 선조 22년(1589)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사건에 말려든다. 기축옥사(己丑獄死)라고 부르는 정여립 사건이 그것이다.

(40) 유성룡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목청만 높은 명분론보다는 가장 시급한 현안 해결에 매달렸지만, 주요 보직을 역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동인의 영수가 되어갔기 때문에 서인들의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 무렵 당쟁은 조정에 있는 이상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다.

(46)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은 이해하지만 유성룡은 지금이 당파를 나누어 싸울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쪽일본에서는 풍신수길이 열도를 통일하고 대륙진출을 꾀하고 있었으며, 북쪽에서는 여진족 통합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림이 동서로 갈리고, 집권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린 상황에서 운영의 해 임진년이 밝아오고 있었다.

<3. 전란의 그림자>

(69) 오억령이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고 아뢰자 도리어 그를 교체시킨 것이다. 오억령은 교체되었지만 일본이 임진년에 침략하리라는 내용은 조정은 물론 민간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현실을 외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다.’ 전쟁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고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4. 유성룡과 이순신>

(74) 조정이 군사태세를 점검하라고 보낸 대장 신립은 자신의 위엄을 세우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징비록은 “신립은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고 전한다. 수령들은 방어태세가 허술한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신립에 대한 대우가 후하지 못해 화를 낼까 더 우려했다.

(86) 그러나 유성룡은 이순신을 계속 정읍 현감으로 놔둘 수 없었다. 빨리 군문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전운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선조 24년(1591) 2월 이순신은 진도군수(종4품)로 승진했다가 곧바로 종3품 가리포(전남완도) 첨사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다시 전라좌수사로 승진했다. 전라좌수사는 정3품 당상관이다. 그야말로 눈부신 승진이니 대간에서 논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87) 미수 허옥이 쓴 서애유사는 “선조께서 비변사와 각 대신에게 명해서 재능 있는 장수를 추천토록 하니 선생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했다. 그 당시 권율과 이순신은 모두 하급 무관이어서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라고 전하고 있다. 유성룡이 추천한 두 장수가 임란 3대첩 중 행주대첩과 한산도 대첩을 승전으로 이끈 것이다.

<5. 전란대비>

(91) 이이가 주장한 십만양병설을 유성룡이 반대해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는 한때 교과서도 실려 있었다. 서애의 십만양병설 반대가 전 국민적 상식이 된 데는 역사학자 이병도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그가 『조선대사관(1955)』『한국대사관(1983)』에 거듭 이 사실을 실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이는 선조에게 군사 10만 명을 양성하여 완급에 대비하자는 것을 건의하여 만일 그렇게 아니하면 10년을 넘지 못하여 토붕(土崩, 흙이 무너짐)의 화를 당하리라 하였다.

(97) 유성룡이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반대해서 임란을 참화를 초래했다는 이야기는 김창생의 창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김장생이 만든 말은 이것뿐만 아니다. 김장생은 ‘기축옥사 때 유성룡이 위관이 되어 이발의 팔십 노모와 어린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만들었다.

(99) 이처럼 반대 당파의 인물들에 대한 악의적 창작을 일삼은 김장생은 서인의 종주가 되어 성균관 문묘에까지 종사되고, 서인과 그 후예인 노론이 계속집권하면서 그의 글에 대한 진위를 검증하는 것은 성역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노론 계열의 역사학자들이 현재까지도 이를 사실인 것처럼 인용하면서 국민적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6. 임진왜란 발발>

(109) 조선 개국 200년인 선조25년(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대거 침략해왔으나, 조선은 전면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종 때의 삼포왜란이나 명종 때의 을묘왜란처럼 국지전이라고 생각했다.

(123) 그러나 조선군은 병력과 무기에서 열세인데다가 탄금대가 저습지인 것이 악재로 작용되었다. 말발굽이 수렁에 빠져 기병 특유의 기동력이 저하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네 차례나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나, 결국 전세는 기울고 말았다. 신립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 병력에게 최후의 공격을 명령했으나, 끝내 패전하자 남한강에 투신하고 말았다.

(131) 개국 이래 최초의 파천은 이처럼 무질서 했다. 선조 일행이 도성을 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궁에 난입해 불을 질렀다. 평소에 백성들 위에 군림하다가 막상 왜적이 침입하니까 도성을 버리고 도주한 작태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불태운 기관이 형조와 장예원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장예원은 노비문서를 관할하는 곳이고, 형조는 백성들을 형벌로 다스리는 곳이다. 백성들은 조선 사대부 지배체제에 불을 지른 것이다. 유성룡은 ‘꿈에 나타난 징조’라는 글에서 대궐이 불타는 것을 미리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134) 선조는 도성을 떠나 파천하면서 거의 실성한 사람이 되어갔다.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 “이모야, 유모야! 일이 이렇게 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라고 울부짖는 상황이었다. 선조는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141)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유성룡을 파직하라” (선조실록 25년 5월 2일) 선조의 억지였다. 그러나 임금의 입에서 ‘파직’ 이라는 말이 나온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영의정뿐만 아니라 겸임하던 도체찰사 직에서도 파직된 것이다. 『연보』는 “선생은 비록 면직되었으나, 어가를 모심에 감히 뒤처지지 않았다”라고 전하는데, 도체찰사로 어가를 수행하는 것과 벼슬 없는 백두로 수행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는 임란 초기의 중요한 전기였다. 군무에 능한 유성룡이 도체찰사로 전쟁을 총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도주하기 바쁜 선조가 전쟁을 총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7. 풍전등화>

(145) 도성 수비책임자들은 도성을 버리고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흥인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보고도 선뜻 들어오지 못했다. 유인작전으로 생각한 것이다. 먼저 십여 명의 군사를 입성시킨 뒤에도 수십 번을 탐지했다. 도성을 이렇게 버리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을 수십 번 탐지한 끝에 군병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서울에 무혈 입성했다.

(149) 유성룡이 도체찰사였다면 방지할 수 있는 비극이었다. 조선 장수들의 고질병인 적군을 두려워해 떨면서도 아군의 목숨은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것이었다. 김명원의 잘못된 보고 때문에 부원수 신각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김명원의 지휘권 일부를 박탈했다.

(150) 이일이나 신립, 김명원, 한응인 모두 휘하 군사 목 베는 데는 천부의 맹장이었다. 장수의 칼은 적을 베라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모르는 용장들이기도 했다.

(151) 유성룡이 만나보니 임세록이 알고자 하는 진짜 정보는 따로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앞잡이가 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일본군이 이렇게 빨리 북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62) 소란에 잠시 잠을 깬 일본군이 다시 반격에 나서자 조선군은 강 쪽으로 퇴각했는데, 후송을 맡은 뱃사람들이 적군이 쫓아오는 것을 보고 강가에 배를 대지 않았다. 많은 군사들이 강물에 빠져 죽었고, 이 지역 지리를 아는 토병들은 물이 얕은 왕성탄으로 건넜다. 그런데 이를 본 일본군은 왕성탄은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깊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저녁 일본군 본대는 드디어 대동강을 건넜다.

(162) 이튿날 일본군은 모란봉에 올라 성이 텅 빈 것을 확인하고 무혈입성했다. 6월 15일 이었다. 평양성을 빼앗긴 것도 문제지만 평양성 결전에 대비해 여러 고을에서 모아다 놓은 10만석의 곡식이 일본군 수중으로 들어간 것도 큰 문제였다. 보급품 부족에 허덕이던 일본군으로서는 망외소득이었다.

(166) 『선조실록』 25년 6월 18일 조에는 “이 때에 도로에 떠도는 말에, 왜적들이 반드시 대가(大駕임금의 수레)를 뒤 쫓고야 말 것이라고 하니, 대가가 지나간 여러 고을이 일제히 비고 난민들이 창고를 불사르며 약탈해 갔다. 라고 적고 있다. 국난 극복의 가장 큰 장애요소는 다름 아닌 선조 자신이었다. 도망가는 선조와 약탈자로 변한 백성사이에서 유성룡은 울 수밖에 없었다.

<제2부 통한의 시대, 나라를 다시 세우다>

<8.반격>

(182) 도체찰사는 사실상 전선 총사령관이다. 평안도 도체찰사에 제수된 유성룡은 곧 군사방면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중 하나가 일본군의 첨자 김순량을 사로잡은 것이다. 조선군의 많은 정보가 일본군에 속속 넘어가고 있었다.

(187) 1593년 1월 9일 평양성은 일본군에 점령된 지 7개월 만에 수복되었다. 소서행장은 패잔병을 이끌고 봉산-용천-배천을 경유해 서울로 철수했는데, 당초 1만8,700명의 병력은 6,600명으로 줄었다. 3분의 1토막 나고 만 것이다. 평양성 탈환을 계기로 전국의 주도권은 조명연합군으로 넘어갔다.

(188) 유성룡의 예견대로 패전한 소서행장과 평의지,현소,평조신등은 패잔병을 거느리고 도주했다. 굶주려 걷지도 못하는 형편이었으나 아무도 추격하지 않았다. 다만 이시언 만이 뒤를 쫒았으나 가까이 접전은 못하고 낙오병60여명만 베어 죽였다. 유성룡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했다.

(191) 미국 사학자 힐버트는 한국의 4대 발명품으로 금속활자, 거북선, 한글, 적교를 꼽았는데, 적교가 바로 유성룡이 만든 임진강 조교인 부교다.

(198) 재주머니 전법은 유성룡이 선조 28년(1595) 겸사도 도체찰사 자격으로 선조에게 올린 장계 중에도 등장한다. “남북변성위에 반드시 고운모래와 보드라운 재를 두게 한 것을 이를 뿌려 적의 눈을 못 뜨게 하여 감히 성에 오르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계책은 장난에 가까우나 실로 유익하니 또한 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9) 행주대첩은 일본군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평양성 전투는 조명연합군의 공동작전이지만 행주대첩은 조선군 단독전투이다. 정예 병력 3만으로 목책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했으니 사기가 대폭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조선군은 용기백배했다. 조선군만의 힘으로도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9. 소강상태>

(206) 명나라의 요구와 풍신수길의 요구 사이의 접점은 ‘두 왕자의 반환’뿐이었다. 이런 국서를 가지고 돌아가면 크게 곤욕을 치를 것으로 생각한 명나라 심유경은 풍신수길의 국서를 변조했다. 그래서 풍신수길의 국서는 자신의 일본 국왕 책봉을 요청하는 국서로 바뀌게 된다. 명의 요구사항은 다 들어준다는 내용이었다.

(211) 선조는 유성룡에게 군권이 집중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선조에게 유성룡은 여전히 정적이었다. 파천과 요동내부에 반대한 주전론자인 데다 군사전략에도 능한 유성룡을 백성들은 물론 비변사 까지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엉뚱한 일을 꼬투리 잡아 유성룡을 공격했다.

(212) 선조 26년(1593년) 유성룡은 유격 왕필적에게 답하는 글에서 이렇게 건의했다. “적은서울에 웅거한 뒤에 험한 것만 믿고 그 뒤를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강 이남부터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연로에 왕래하고 있는 좌우의 고을에 우리 군대가 있으니 만일 중국 군사가 강호로 해서 남쪽으로 나와 불시를 틈타 단번에 공격해 적의 머리와 꼬리를 단절하면 서울에 있는 적은 비록 쇠붙이로 성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형세가 무너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4) 비변사의 체직 반대는 문제의 본질을 잘 말해준다. 백성들은 이미 선조를 버린 지 오래였다. 백성들이 믿는 사람은 선조가 아니라, 유성룡이고, 권율이고, 이순신이다. 비변사에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판국에 유성룡을 체직시킬 수는 없었다. 선조의 계획은 비변사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219) 송응창은 ‘적을 죽이면 참형에 처한다.’ 는 자신의 패문도 ‘깊은 뜻’에서 나온 것이라며 조선을 배제한 채 진행하는 모든 강화회담을 합리화했다. 선조는 한마디 따지지 못하고 그저 사례를 표하고 나왔다.

(221) 황해도 순찰사 유영경은 명군의 횡포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중국 군사가 두려움이나 거리낌 없이 행패를 부리며 작란하는 작태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 말을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도 쇄마(관용말 이용비)를 요구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겁을 줍니다. 수령 이하 사람들은 목을 매어 끌고 다니기 까지 하는데 주포를 바치지 않으면 그들의 그 노여움을 풀 수가 없으며, 군량도 외람되어 받아다가 매매 비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뜻을 조금만 거역하면 몽둥이와 돌멩이로 무수히 난타 당하는데, 요즘 맞아죽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그 밖에 상처를 입고 신음하는 형상은 하도 비참하여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224) 유성룡은 조선은 조선인이 지키는 자주 국방체제를 이룩하기 위한 근본대책으로 훈련도감 창설을 고안한 것이다. 싸우지 않고 식량만 축내는 명군에 대한 근본대책도 훈련도감을 통한 조선의 군사력 강화밖에 없었다. 명군을 선용하는 길은 그들을 교관으로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228) 유성룡은 선조 28년(1595)의 한 계사에 훈련도감 훈련규칙을 기록하기도 했다. 훈련도감의 유사당상은 매일 한 두 부대를 대상으로 검열을 실시하고, 검열이 끝나면 전 부대를 대상으로 합격자의 다과를 기준으로 상벌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군관들은 다른 부대에 지지 않게 밤낮으로 훈련에 열중하였고, 정예군사가 된 것이다. 훈련도감이 강화되는 만큼 명군에 대한 조선의 예속은 약화될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자주국방의 근본방책이기도 했다.

<10- 유성룡의 영의정 복귀>
(231) 임진년 7월에 왜구가 안동에 들어와 옛집과 원지정사를 불사르니 집에 간직해 둔 서적은 모두 없어져 버렸는데, 오직 몇 권만이 수풀사이에 온전하였다. 내가 그것을 다시 보니 불각 중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슬펐다. 행장과 함께 가지고 제천에 도착하여 사실의 대강을 적어 자제로 하여금 잘 보존하여 다시는 유실되지 않도록 하라고 일렀다. 계사년 9월 9일 하루 전에 쓰다.

(233) 대인(大人)은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삼는 자다. 그는 천하를 일가(一家) 같이 여긴다. 대인이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삼은 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인(仁)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천지만물과 더불어 하나가 됨은 어찌 대인만이 그러하겠는가? 비록 소인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그러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소인은 스스로 그 마음을 작게 할 뿐이다.

(236) 임진왜란으로 이미 과거의 조선은 멸망했다. 양반 사대부만이 특권을 독점하던 조선은 백성들이 경복궁을 불태울 때 이미 불타버린 것이다. 궁궐을 불태운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 불러 모으지 않으면 조선이란 나라는 재건될 수 없었다. 조선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백성을 주인으로 섬기는 개국정신으로 돌아가야 했다.


(246) 선조나이 마흔 둘, 물러나서 상왕으로 지내기에는 너무 젊었다. 게다가 재위한지도 26년이나 되는 임금이었다. 성왕 선조를 두고 광해군이 왕노릇 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명나라에서 선조를 내쫒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려는 것은 파병을 핑계로 왕위계승권까지 장악하겠다는 의도였다.

(11- 국방정책)

(257) 그러나 임진왜란 같은 전면전에는 큰 결함이 있는 군사체제다. 유성룡은 “중세 이후 좋은 법과 제도가 모두 폐지되고 떨어져서, 사대부는 다만 문장의 화려함만 다듬고 헛된 말만 꾸미이게 힘쓸 뿐 세상을 다스릴 생각에는 조금도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라며 “ 도에 명하여 진관제도를 더 닦게 하소서.” 라고 진관제도의 부활을 주청했다. 선조실록 27년(1594) 3월 29일조는 유성룡의 계사를 받은 선조가 “지극한 말이다.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진관체제가 늦게 복귀된 것이다.


(258) 양반과 천인이 한 부대 내에 섞여 있다는 것은 혁명적 변화였다. 양반은 신분상의 이유로 천인은 양반들의 사유물이란 이유로 모두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나 있었다. 전혀 다른 이유지만 본질은 하나였다. 양반 사대부의 특권이었다. 유성룡은 양반에게도 병역의무를 지우려 했다. 반발이 거셀 것은 불문가지였다. 선조 28년(1595) 11월 26일 유성룡은 「함경감사와 병사에게 지시하는 공문」을 보내 양반과 천인을 막론하고 모두 속오군에 편입시키라고 지시했다.

(263) 선조가 동의하자 유성룡은 노비들에게 과거를 실시해 합격하면 양인으로 승격시켜 우림위에 예속시키는 방안을 비롯한 노비 충군 방안을 밀어 붙였다. 그러자 노비주인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노비는 군사가 될 수 없다는 사대부들의 극단적 계급이기주의였다.

(267) 유성룡의 천인(賤人) 충군론(充軍論)은 당연히 사대부들의 격심한 반발을 샀다. 유성룡이 임란을 극복한 가장 큰 공신인데도 훗날 반대당파의 집요한 공격으로 쫒겨난 배경에는 바로 노비 충군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유성룡이 노비충군론으로 사대부들의 계급적 이익에 정면도전했기 때문이다.

(270)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이 ‘전지와 노비를 제한하려고 한 선현’들이다. 중종 14년(1519) 사형당한 조광조가 76년 만에 살아 돌아온 셈이었다. 평소 타인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던 유성룡답지 않게 이 문제에는 목소리를 높였다.

(273) 일반 양민은 적군을 한명만 죽이면 과거합격으로 인정하고, 서얼은 두명, 공사천인은 세명 이상을 죽이며 과거합격으로 인정해 홍패 같은 공명첩을 주자는 것이다. 공명첩을 받는다는 것은 과거에 합격한 양반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유성룡의 이런 방안은 군공을 세운 자들을 포상하는 군공청에 의해서 법제화되기도 했다.

(274) 유성룡이 민정과 군정을 총괄하면서 신분제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천인들이 적극적으로 싸움에 나서면서 전세는 바뀌고 있었다. 일본군이 수세에 몰리게 된 것이다. 신분의 한을 풀기 위해 싸우는 군사들이 용감하게 싸우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의병 중에 농민,천인들이 대거 가담한 것은 유성룡의 이런 정책 때문이다.

(278) 후술 하겠지만, 신충원은 유성룡이 실각하면서 숱한 고초를 겪게 된다. 천류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은 양반들,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은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사대부들은 유성룡을 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임란으로 이미 양반 사대부 지배체제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284) 김덕령은 이몽학 군을 토벌하라는 권율의 명에 따라 경상도 진주에서 전라도 운봉까지 왔을 때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틈에 광주에 다녀오려고 권율에게 휴가를 신청했으나, 도리어 체포되어 진주옥에 갇혔다. 서울로 압송된 김덕령은 8월 초 선조의 친국을 받게 된다.

(287) 김덕령을 죽여 버린 이 사건은 전쟁영웅 죽이기의 서막에 불과했다. 김덕령을 죽인 선조의 칼끝은 이제 다른 먹이를 찾아 헤메고 있었다.

<12- 민생정책>

(296) 백성이 살아야 나라도 소생할 수 있다.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편한 정사를 해야 했다. 이때도 선조도 국망의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에 유성룡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임란 와중에 최초로 대동법이 시행되는데, 시행 당시에는 작미법이라고 불렀다. 대동법, 작미법, 대공수미법은 모두 같은 것으로 잡다한 공납을 폐하고 쌀로 통일해 내는 법을 뜻한다. 백성들은 이제 수많은 가짓수의 공납대신 쌀로 납부하면 되었다.

(300) 심지어 지방 수령들이나 아전들은 반대를 넘어 대동법에 대한 조세저항에 나서기도했다. 조세부담자가 아니라 조세징수자가 조세에 저항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감사, 병사, 수령, 아전들과 힘있는 백성들이 모두 대동법에 저항했다. 나라에서 힘깨나 쓰는 인물들은 모두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유성룡은 물러서지 않았다. 유성룡은 대동법 징수시기를 법제화하는 것으로 이들에게 맞섰다.

(303) 대동법이 유성룡 실각과 함께 폐지되지 않고 계속 시행되었다면 조선 후기사는 여러 면에서 달라졌을 것이다. 대동법은 비단 세제개혁에 머문 것이 아니라 공업과 상업의 발전도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유성룡이 대동법 시행을 강력하게 주장한 배경에는 상업에 대한 남다른 견해가 있었다.

(304) 조선은 ‘농업은 근본이고 상업은 끄트머리라는 농본상말(農本商末) 정책 때문에 상업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장시가 확대되면 농민들이 농업 대신 상업으로 몰릴 것이고, 도적도 많아질 것이라는 이유로 상업을 억제했다.

(309) 유성룡은 국가에서 돈 한푼 안 들이고 수많은 백성을 살릴 수 있는 것이 소금사업이라고 생각했ㅅ다. 황해도 소금 굽는 사람들을 모을 때 생산물의 반을 준다고 하면 서로 모일 것이며, 나머지 반은 풍년이 든 곡창지대로 가져가 곡식과 바꾸어 서울과 충청도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머지는 소금을 생산한 개성부의 종자로 주자는 것이다.

(310) 조선의 사대부들은 상업에 대해 말하는 것을 선비답지 못하다며 꺼렸다. 속으로는 거대한 농지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을 계산하면서도 겉으로는 이익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으로 선비연하고 있던 것이다.

(310) 유성룡은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였으며, 그 대책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전체를 조망하는 거시적 안목과 부분에 대한 해박한 미시적 시각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 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 경제에 해박한 학자였다. 또 전란 극복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실학자였다. 이런 유성룡이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면서 조선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13-정유재란 전야>
(323) “ 또 신이 생각나는 것이 있어 아울러 언급합니다. 금년 봄에 방어하고 수비할 계책을 시급히 조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임진년에 왜적이 또한 멀리서 헛된 말로 우리를 해이하게 하여 세견선이 곧 이를 것이라고 말하더니, 대적이 갑자기 이르렀습니다. 금년 일 또한 그렇지 않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기타의 모든 일은 비변사와 함께 주야를 가리지 않고 적절히 조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선조실록 29년 1월 3일)


(324) 풍신수길은 명나라 책봉사와 조선 근수사의 퇴거를 요구했고, 가등청정 등 강경파들은 재 출병을 주창하고 나섰다. 선조 29년(1596) 9월 9일 귀국길에 오른 근수사신 황신은 수행군관을 먼저 보내 일본이 재침략 할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다시 전운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년에 그런 것처럼 조선은 또 다시 당쟁에 빠져들었다.

<14- 정유재란 발발>

(328) 유성룡에 대한 공격은 우익을 자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순신을 공격한 것이었다. 일본은 재출병의 선결조건이 이순신 제거라고 생각했다. 이순신이 건재하면 수송로가 단절되어 임진년의 비극이 되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서행장은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이중 간첩 요시라를 이용했다.

(329) 요시라가 준 정보는 ‘가등청정이 건너올 때를 가르쳐 줄테니 제거하라. 소서행장도 이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요시라의 술책임을 단번에 파악했다. 자신을 유도해 제거하려는 소서행장의 술책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요시라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337) 신영은 『제조번방지』에서 “당시 서인은 원균편을 들고 동인은 이순신 편을 들어 서로 공격하느라 다른 국사는 치외도지 했으니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문제는 서인만이 아니라 동인에게 갈라진 북인까지 공격에 가담한데 있다.

(341) 남인 유성룡과 정탁 등을 빼고는 이순신 제거에 온 당파가 단결했다. 길을 막고 호소하는 군사와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선조가 이순신을 증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은 백성들의 조롱을 받는데 이순신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은 것이다. ‘임금께서 이 일이 모두 사실은 아닐 것이라’의심했다는 말은 유성룡의 의례적 수사에 불과하다. 선조는 이순신 제거가 추락한 국왕의 권위 회복에 필수하고 여기고 있었다.


(341) 비망기로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전교하였다.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무군지죄(無君之罪-역적죄)이며,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부국지죄(負國之罪-국가반역죄)이며, 남의 공을 가로챈 것은 함인지죄(陷人之罪-남을 함정에 빠트린 죄)이며,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지죄(忌憚之罪-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용서할 수 없는 법이여서 마땅히 율에 따라 죽어야 할 것이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선조실록 30년 3월 13일)

(344)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군사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했는데, 비록 지위가 낮은 군졸일지라도 전사에 관한 일을 말하고 싶은 사람은 운주당에 찾아와 말하게 함으로써 군중의 사정에 통달하였다. 이순신은 작전을 개시할 때마다 부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후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패전하는 일이 없었다. 원균을 애첩을 데리고 와 운주당에 함께 살았으며, 울타리를 쳐 당의 안팎을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또 술을 즐겼는데 날마다 주정을 부렸으며 형벌을 쓰는데 법도가 없으니 군중에서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일 적병을 만나면 우리는 다만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라고 했으며, 여러 장수들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군사 일을 아뢰지 않아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못하였다.(징비록)

(347) 이런 상황에서 일본 수군이 습격했다. 조선 수군은 전열도 채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원균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도진의홍 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했고, 전라좌수사 이억기도 전사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배를 이끌고 한산도로 퇴각하는데 성공했다.

(349) “임진년으로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남과 충청에 돌입하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적의 진격로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지금 만일 수군을 전폐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적에게는 다행한 일로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설령 전선수가 적다 도 미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행록)

(350) 정유재란 발발 직전 조선 남부에는 약 2만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 본토에서 12만 명이 더 증원되어 일본군은 모두 14만 명이 되었다. 이순신을 제거하고 원균을 패퇴시킨 일본군의 사기는 충천했다. 조선 수군이 궤멸함에 따라 일본군은 숙원인 호남지역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352) 선조 30년(1597) 8월 29일 소서행장이 이끄는 일본 우군은 전주를 출발해 충청도로 진격해 왔다.9월 3일에 공주를 무혈점령한 일본군은 연기와 청주를 거쳐 천안으로 북상했다. 일본군이 충청도까지 북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는 경악했고, 도성 사람들은 짐을 싸느라 분주했다.

(358) 이순신이 자리를 비운 다섯 달 사이에 조선수군은 쑥대밭이 되었다. 저선의 상황만 변한 것이 아니라 이순신의 심경도 변했다. 선조가 보낸 통제사 임명장을 받고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서장을 써 봉하고, 곧 떠나’ 라는 건조한 표현이 이를 말해준다. 이순신은 고문을 받아 사경을 헤매는 동안 선조가 충성을 바칠 군주가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65)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적선이 불에 나 여러 배가 연소했는데,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 차 넘쳤다.”라고 전한다. 일본 수군에게는 통한의 불꽃이지만, 조선수군에게는 환희의 불꽃이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라면서 “전선수가 적다해도 미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한 이순신의 장담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15-유성룡의 실각>

(375) 임란 이듬해인 1593년부터 유성룡은 영의정이자 도체찰사로 행정과 군무를 총괄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었다. 이제 그 오랜 전란이 끝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유성룡에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전란의 시작이었다. 그를 끌어내리는 당쟁이 시작된 것이다.

(385) 결국 북인이 총대를 멘 유성룡에 대한 공격은 유성룡의 전란 극복정책에 대한 양반 사대부들의 불만은 대변한 것이다. 이들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서얼이나 천인들을 등용하거나 면천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백성들이 다 굶어죽고 유리하는 한이 있어도 대동법 같은 것을 만들어 전주들에게 땅을 많이 가진 만큼 세금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양반들은 병역의무를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357) 유성룡이 파직된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은 공교롭게도 이순신이 노량해전을 치른 날이다. 『연보』는 “통제사 이순신은 고금도에서 선생이 논핵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실성해서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는가.’ 라고 탄식했다” 고 전한다. 후견인 유성룡이 공격당하는 것을 보면서 이순신은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392)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이 전파되자 호남일도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 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선조29년)과 정유년(선조 30년) 사이에 통제사를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도다! (선조실록 31년 11월 27일)

(394)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의 공덕입니다. 우리나라의 일은 대인께서 익히 아시니 우리나라의 일을 주선하는 문제는 대인만 믿을 뿐입니다. (선조실록 32년 2월 2일)
선조의 논리는 ‘승전은 명나라 덕분’이라는 것이다. 유성룡을 비롯한 수많은 문신과 이순신, 권율을 비롯한 수많은 무장덕분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 지원군 때문에 승리했다는 것이다. 유정은 왜교성 전투에서 진린과 이순신의 수군이 지원하는데도 약속을 어기지 않고 나오지 않아서 왜교성 함락을 무산시킨 용장이다. 이런 용장에게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의 공덕’이라고 말한 사람이 선조다.
<16-두문분출>

(397) 1598년 11월 19일 파직당한 유성룡은 이튿날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22일에는 경기도 양근의 대탄에서 유숙했다. 용진과 합류하는 여강하류였다. 유성룡은 용진 하류의 북쪽언덕인 도미천에서 하마해 삼각산을 바라보고 네 번 절했다. 이 언덕을 넘으면 다시는 서울의 산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이곳에서 시를 한수 지었다.


전원으로 돌아가는 3천리길
유악의 깊은 은혜 40년
도미천에 말 멈추고 뒤돌아 보니
종남산 산색은 여전히 의연하구나

(400) 유성룡은 세상사를 잊기로 했다. 나라를 전란에서 구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준겸이 경상감사가 되었고, 찾아오려고 하자 글을 보내 사양하였으며, 고향 근처 군읍의 사대부들이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하자 사람을 보내 말렸다. 선소 33년 1월 25일에는 옥연정사에 나아가 보허대에 소나무를 심었다.

(401) 내가 근년에 와서 마음이 답답하고 쓸쓸한 병이 있어 강촌에서 문을 닫고 종일토록 묵묵히 앉아 있으면서 심성을 수양하는 공부에 종사하고 있지만, 솥과 그릇은 닳아 이지러지고 평생의 업적은 수은처럼 녹아 흩어져 다시 갈라진 틈을 보충해 막기를 바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심성을 수양하는 이 일이 아니면 시일을 보낼 수가 없기 때문에 비록 고생을 하고서 성공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감히 그만둘 수가 없으니, 그래도 공부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장 싫은 것은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지나가면서 나의 조용한 심경을 부딪쳐 와서 헐어버리는 일이다. 매양 이웃에게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이 찾아와 무엇을 물으면 마지못해 대답은 하지만 마음이 매우 즐겁지 않다. 이런 일이 마음속에 쌓인 지가 오래되어 나쁜 버릇이 새여서 남의 발소리만 듣게 되어도 곧바로 가슴이 두근거리며 두려워하게 되었다.(『잡저』 「두문분출」

(406) “편안하게 조용하게 조화로 돌아가련다.” 도인의 경지에 접어든 듯한 말이다. 평소에도 그는 “도를 배울 뜻이 있으면서도 이루지 못한 것이 한이다.” 라고 말했다. 그 스스로 인생의 목적을 도의 완성에 둔 것이다. 그해 5월 6일 유성룡은 숨을 거두었다. 향년 66세, 조선조 500년 최고의 재상이라 평가받는 유성룡은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5. 내가 저자라면

가. 다시 보게 되는 임진왜란

임진왜란의 대부분 전사가 충무공 이순신의 해전과 관련하여 보다보니 육지에서의 전쟁이 무척 궁금하였다. 한 달 만에 한양이 무너졌다는 사실로부터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을 가는 과정, 그리고 한양탈환과 협상, 그리고 정유재란까지의 일이 한 사람의 흔적을 따라가 보니 많은 이해가 되었다. 왜 나는 한사람에 치우친 일방적인 임진왜란의 전사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무인들은 모두 호기를 부리다가 연전연패를 당하고, 임금은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피난 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도움을 주러 온 명나라 군사는 일본군 보다 더 큰 적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절대 절명의 순간에 설득과 포용, 그리고 배려하는 마음과 정책으로 전란을 끝내게 된다. 비변사와 대동법의 시행, 전공에 따른 신분제도의 차별등으로 나라를 구했건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냉대와 당파싸움의 결과로 죄를 묻게 되고 파직을 당한다. 조광조와 더불어 늘 아쉬운 것이 리더의 자질이다. 나라의 국왕으로서의 처신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자신의 소명을 잊은 채 허둥대는 꼴이 무척이나 아쉽게만 느껴졌다. 특히 징비록을 써서 후대에 교훈으로 남겨두었지만 결과는 다시 또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참담한 현실만 있을 뿐이다.

나. 칼의 노래와 임진왜란

공교롭게도 이 책을 보면서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보게 되었다. 인물에 대한 평전과 역사 소설에 대한 차이점이 있지만, 조선은 임진왜란에서와 마찬가지로 청의 공격에 그렇게 무력하게 당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진왜란 발발하기 전에 김성일과 황윤길 두 사람의 통신사의 왜적침입에 대한 정보전부터 당리당략에 의하여 일그러지다가 끝내는 삼천리 강산이 철저하게 유린되었다. 조일전쟁이 끝이 나고 50년이 채 되지 않은 1627년에 다시 우리나라는 청의 말발굽 아래에 놓이게 된다. 조일 전쟁 때는 의병이 사방에서 기병을 해서 백성과 혼연일체가 되어서 왜적과 싸웠다. 병자호란 때는 성안에서 외로이 말로만 싸우다가 끝내 항복을 하고 만다. 임진왜란 때 온 국민과 함께 싸워서 일본군을 호탕하게 물리친 행주대첩과 병자호란의 행주산성은 과연 어떠한 차이가 있었을까

다. 유성룡과 이순신

지난 연구원 과제로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게 되었다. 화려한 전장의 기록이 아닌 매일 아픈 몸을 끌고 나라와 어머님을 생각하는 충무공의 인간적인 모습에 넘 가슴이 아팠다. 충무공 이순신과 유성룡을 비교해 볼 때 왜란에서 노력한 부분과 공을 비교하기가 어렵지만, 충무공 이순신은 왜적과 하나의 전선에서 싸웠다면, 유성룡은 왜적과 명나라 군사, 조정의 대신, 선조 등 4개의 전선과 싸워야만 했다. 쓰러진 군사들을 다시 모으고, 명나라 군량을 대어야 했고 민심을 바로 잡아야 했고, 조정의 대신들과 싸워야 했다. 전쟁수행의 대장으로 이러한 안목과 실행력이 돋보였다.

라. 선조와 유성룡

역사는 그 당시의 상황이 있지만, 같이 읽었던 중종과 조광조, 그리고 선조와 유성룡의 대비도 눈여겨 볼만하였다. 그 당시 군신간의 관계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가 아니었을 것이다. 지엄하고 추상같은 관계였을 것이다. 과연 군신관계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질을 갖추지 못한 군왕이 군림하였을 때는 어떠하였을까? 조광조의 경우처럼 기반이 약한 중종의 개혁 주축 세력으로 등용되었다가 실제 개혁다운 개혁을 해보지도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선조와 유성룡의 관계도 그러했을 것이다. 다만 유성룡은 설득하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는 대의를 따랐다. 흡사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놓았더니 봇 짐 내놓으라는 형편과도 같았다. 선조와 중종의 행동으로 볼 때 그 이상의 비참한 상황으로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유성룡의 진가에 대하여 정조대왕의 이런 말씀이 있었다.

“저 헐뜯는 사람들을 유성룡이 처한 시대에 처하게 하고, 그가 맡았던 일을 행하게 한다면 그런 무리 백명이 있어도 어찌 유성룡이 했던 일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하겠는가?” 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마.맺음말

과거나 지금이나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지식인이다. 유성룡은 깨달은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사대부들의 반발이 거세었던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라가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은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 했다. 이에 유성룡은 강력하게 정책을 추진하였다. 앞서 설득하는 부드러움을 가졌다면 소신을 갖고 정책을 추진하는 단호함까지 지녔던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돌아보면 양극화, FTA등 정책에 우리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많은 정책이 시도되고 있다. 해야만 하는 것과 한번 해볼 수 있는 일, 미래는 현재를 준비를 해야 하고 미래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도 그러했고, 병자호란도 그러했다.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편함을 추구하였다. 이것이 바로 역사이다. 역사는 대충 지나가는 법이 없다. 약자의 삶은 늘 괴롭다.

올해는 서애 선생이 돌아가신지 4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 추모제에서는 서애와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들이 같이 지냈다고 한다. 임진왜란 중에 지리한 협상이 오고간다. 조선의 분단론이 나오고 다시 협상이 깨어져서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아직 도 끝나지 않은 전쟁을 하고 있다. 같은 동족이기는 하지만 이미 큰 아픔을 겪었고, 아직까지도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서애 선생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IP *.99.24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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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9.13 10:32:16 *.75.15.205
한 주 동안에 북 리뷰를 두 개나 올릴 수 있는 성실함이 돋보입니다.

소전은 우리 가운데 가장 묵묵히 좋은 결실을 이루리라 생각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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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7.09.14 09:10:54 *.152.82.31
좋은 책이군요.
허회장님께 선물로 드렸는데 정작 나는 읽어 볼 생각을 못했어요.
조만간 읽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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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수
2007.09.17 00:00:15 *.132.188.244
덕분에 유성룡과 이덕일씨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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