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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6일 03시 28분 등록

나는 말한다. “철학은 행복하기 위해서 청년기의 열정으로 시작해야 한다.”

니체는 말한다.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나는 말한다. “부의 격차가 불행의 시작이다.”

니체는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의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다.”

철학의 노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과 미래의 철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이처럼 간격을 보인다. 그 간경에 대한 원인을 알고 싶다면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소명출판> 책에 빠져 보기 바란다.


1. 저자에 대하여


고병권은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니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화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상에서 그는 항상 웃고 있다. 니체가 말한 ‘긍정의 힘’이 그의 신체에 각인되어 있는 것일까. 웬만한 일로는 화나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가 시도하는 유머는 대개 썰렁하지만, 다른 이의 썰렁한 유머에도 그는 크게 웃는다.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으며, 친구들과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게 그의 ‘행복론’이다.

현실에서 그는 자주 분노한다. 그의 분노의 대상은 주로 국가, 권력, 자본, 무기력 같은 것들이다. 친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게 하고, 친구들을 ‘삶’에서 내모는 그것들에 그는 눈 감거나 고개를 돌린 적이 없다. 삶에서 그것들을 ‘추방’시키기 위해 그는 오늘도 친구들과 함께 웃고, 공부하고, 투쟁한다.

최근의 운동 속에서 혁명이나 코뮨주의를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는, 연구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동안 쓴 책으로 『화폐, 마법의 사중주』(2005),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2003),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2001) 등이 있고, 맑스의 박사 학위 논문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2001)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곧 신자유주의 이후 한국 사회를 분석한 『추방과 탈주』라는 새로운 정치 에세이를 선보일 계획이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4]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4] 위대한 철학자는 하나의 비명 속에서도 여러 개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이다. 시대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대의 목소리가 가리고 있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5] ‘미친 것’과 ‘아픈 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그와 그의 사상을 정신병원으로 보냈지만, 그는 자신의 광기가 건강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두뇌 훈련과 싸우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5]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7]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7]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7]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7]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8]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18]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19]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19]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말라.

[19] 우리는 동전의 앞 뒤 면만 가지고도 무한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21] 요리사 니체가 소개하는 우연을 냄비에 끊이는 법-나는 어떤 우연이든 나의 냄비로 끓인다. 낚시꾼 니체의 독자 낚는 법-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 바늘이다.

[25]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

[26] 플라톤의 저 유명한 언급처럼 “철학은 전체를 본다.”

[27]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27]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 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를 삼았다.

[31]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31]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37]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삶’ 때문이 아니다. 고통은 오히려 ‘삶으로부터의 이탈’, 즉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영웅일지라도 더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삶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 고통은 그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37] 넘쳐나는 삶에 대한 사랑이 언젠가는 삶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40] 일상의 한계와 구속을 넘어서는 혼수상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과도함을 먹고 절제를 요구한 것이 아폴론적인 것이다.

[41]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41] 그가 뛰는 이유는 차이들에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정력, 건강, 과도한 풍요”때문이었다. 차이들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은 변증법이다.

[42] 디오니소스의 갈기갈기 찢겨진 죽음에는 어떤 죄도 수반되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움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49] “신이 사람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고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51] 철학이 하나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51]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새롭고 위험한 생각은 안 된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52] 우리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52]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52] 보편적 가치를 위해 길들여진 두뇌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진 것이 신앙이라면 명령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명령하는 자, 새로운 가치의 발명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의 정신이다.

[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항상’와 있지만 ‘항상’ 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54]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자이며 입법자이다”. 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이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자료들을 정리하는 일이 고작이다. 입법자로서의 철학자들, 진정한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개념들을 해석하고 정리할 뿐 철학적 노동자들은 창조를 모른다.

[54] 사실 시간으로 따져서 가장 늦게 연회에 참석한 사람이 가장 말석에 앉듯이 현재는 과거의 뒷자락에 앉아 마땅하다. 그러나 현재가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 현재가 상석에 앉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현재가 미래를 건축하고자 할 때이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들의 보고이다.

[55] 니체에게 심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세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

[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56] 사랑은 숭배하는 것도 아니고 예속되는 것도 아니다.

[57] “변증법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품성을 잃어버린 자가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움켜쥐는 마지막 필사의 무기다.”

[57]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시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짐승의 무리나 신도를 후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58]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59]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61]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경제활동을 하는 미개인’이 사실상 나뭇잎만을 걸친 채 이익을 위해 교환하는 현대인에 불과하듯이, 도덕학자들이 선의 절대적 기초라고 부르는 것들도 대부분 우리 시대의 가치를 과거에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62]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 민족은 어떤 민족도 살 수가 없다.”

[63] “아무렇게나 임의로 추출해서 제멋대로 정리한 도덕적 사실들”로부터 추론한 결론들은 도덕의 굳건한 기초가 되기보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 도덕에는 소심함 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65]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

[65]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66] 이제 기원은 더 이상 단순화되지 않고 복수화된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겹이다.” 가치들도, 가치를 판단했던 인간들도 더 이상 동질적이지 않다. 출신과 혈통, 건강과 영양 상태에 따라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존재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가치 판단들이 존재했는가.

[67] 기원이라는 심층을 향해 파 내려가서 그들이 확인하는 것은 이질성과 다양성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심층은 표면이 됨으로써만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67] 평면에 주름을 만드는 계보학자의 연구는 하나의 실천이다. 계보학자는 덮여 있던 이질성을 확인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그것을 같은 표면위에 올려놓는 사람이다.

[84] 반동적 힘의 승리는 능동적 힘을 자신에게 가담시킴으로써, 다시 말해서 능동적 힘에서 그 능력을 박탈해 반동적 힘으로 만듦으로써 이루어진다.

[84]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강자는 “능동성 개념을 박탈당하고....... 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85] 금욕주의적 성직자들은 먼저 병든 자들의 방어자, 의사, 구원자로서 다가온다.

[85] 니체는 이 돌팔이 의사의 활동을 좀 더 섬세하게 나눈다.
첫 번째, 진정제와 마취제의 투여.
두 번째, 기계적 활동의 도입.
세 번째, 조그만 즐거움의 제공.
네 번째, 삶의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

[87]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 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 밝힌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

[90]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96] 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103]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109] 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110] 사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 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112] 해석 행위는 모든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

[112]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114]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120]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122]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2] 인과론은 물구나무 서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주의의 실패가 급진적 정치의 퇴조를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 정치의 퇴조가 사회주의의 실패 원인이 아니었을까?

[123]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124]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다원성이었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것은 ‘표준화’다.

[126] 정치의 과제를 가치의 창조와 평가가 아니라 안정성의 유지로서 설정하면, 정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거나 평가하기보다는 기존에 설립되어 있던 가치를 내면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니면 내면화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가치의 발생과 유래에 대한 물음을 철저히 단속하려 할 것이다.

[126]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아내지 못한다.”

[127]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128]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 “패자의 것은 부인, 자식, 재산과 핏줄을 포함하여 모두 승자에게 속한다. 폭력은 최초의 권리를 제공한다.”

[131] 고대의 국가가 전쟁에서 기원한다면 근대의 국가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에서 등장한다. 모두가 지쳐 더 이상의 전쟁을 포기할 때, 새로운 우상인 국가가 등장한다.

[142] “문명(길들임)의 과정은 무시무시한 맹수 같은 본성에 대항하여 철퇴와 고문을 필요로 한다.”

[144]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146] 아곤은 보편화나 전체화에 빠지지 않는 다양성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적대가 아닌 경쟁을 어떤 정치적 기술들이 동원되었는지를 보여준다.

[153] “‘의지’가 무엇인지는 누구나 ‘자신 안에서’ 경험할 수 있고, ‘권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하여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자명한 것 안에 모든 오해들의 뿌리가 존재하며 이러한 오해들은 ‘권력의지’라는 합성어 주위에 끊임없이 쌓이게 된다.”

[153] “나는 이 통찰을 길 위에서 얻었다. 그것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황급히 손을 뻗어 서투른 말(언어)을 사용해서 잡았다. 그러자 통찰력은 말라비틀어져 말에 매달리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응시하면서 내가 이 새를 잡았을 때 왜 행복한 느낌이 들었는지를 이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166]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167] 니체는 강함과 약함이 능동과 반동을 고유함으로 갖고 있다고 보았다. “본성의 강함은 반동을 대기시키고 연기시키는 일에서 나타난다. 어떤 종류의 무관심이 강함에는 고유하다. 마치 약함에는 반동의 부자유함이 고유한 것과 같다.”

[167] 능동적인 힘은 ‘시작하는 힘’이며 ‘공격하는 힘’이다. 반동적인 힘은 ‘비난하는 힘’이며 ‘상쇄시키고 흡수하는 힘’이다. 모든 방향(가치)은 능동적인 힘이 결정한다. 우리는 반동적 힘의 작동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용수철을 누를 때를 생각해보자.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이 작동했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 방향은 능동적 힘의 작동을 상쇄시키는 방향이다.

[169]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면의지가 바로 권력의지라고 말하고 있다.

[171] 의지는 욕구나 갈망, (무엇보다도) 결핍과는 다른 것이다. 의지는 명령하는 것이다. 힘이 다른 힘에 자신의 영향을 강제할 때 표현되는 것이 의지이다.

[173]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

[173]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174] “허무주의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무의 의미’ 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175] 힘이 어떤 권력의지 아래서 다루어지느냐가 그 질을 결정한다.

[175]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은 ‘긍정과 부정’이다. 긍정은 디오니소스의 정신이며, 그리스 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 하다.

[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177] 마주침의 순간에 작동하는 권력의지가 어떤 것이냐의 문제는 ‘강하게 되느냐(강자의 생성)’, ‘약하게 되느냐(약자의 생성)’를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180]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방식-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의 생성방식-이다.

[186]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189]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다. 니체는 이것을 ‘주사위 놀이를 하는 세계’로 그리기도 한다. 주사위놀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의 의미를 이해할 때도 등장하는 놀이다. 항상 자기로 귀환하는 놀이 주사위 던지기. 우리는 학자들에게 영원회귀가 왜 어려운 개념인지를 한다. 그들은 주사위는 잘 알고 있지만 ‘놀이’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주사위 던지기란 경우의 수가 6에 불과하며 그것의 반복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는 지점이란 통계적인 평균치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의 주장은 마치 도박사에게 주사위 눈금은 1과 6사이의 자연수 중 하나가 나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하다. 학자들은 주사위를 600번 정도를 던지면 1이 나오는 일이 100번 정도 반복될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도박사들은 1의 눈금이 여러 번 반복되었어도 동일한 상황은 단 한 번도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도박사들은 동전의 두 면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영원회귀들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도박사들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학자들에 대하여’ ‘가짜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190] 확실히 과학 법칙은 영원회귀를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과학’이기 때문이 아니라 ‘법칙’이기 때문이다. 법칙은 반복되는 것들 속에서 동일성만을, 혹은 동일성의 반복만을 본다.

[191] 생성의 번복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기는 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192]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잇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은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198] 생성이 반복될수록 양산되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204] 부정은 긍정을 부정하지만 긍정은 부정을 긍정하므로, 부정에는 긍정이 포함되지 않고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된다. 긍정은 부정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205]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205] 이로써 긍정에 들어있는 영원회귀의 원리가 나타난다. 긍정은 적극적으로 다음의 긍정을 의지한다. 긍정이 멈추는 순간에 부정은 승리한다.

[209] 영원회귀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209] 영원회귀의 유혹-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이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210] 지구는 자신의 나이에 비하면 ‘방금’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인간이라는 동물의 탄생을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준비해온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혹성이다.

[211] 개미나 모기도 자기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볼 것이다. 인간은 마치 자신들을 위해 세계를 창조한 것처럼 믿고 있지만 “만약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인간은 ‘신의 원숭이’로 창조되었을 것이다. 신은 너무도 지리한 자신의 영원성에 기분전환을 위한 동인이 필요했다. 인간이란 저 권태로운 불멸자(신)의 애완동물인 셈이다.

[212] 어떤 사람이 물건 하나를 덤불 뒤에 숨겨 놓은 다음 그것을 바로 그 자리에서 찾아낸다면, 이것을 칭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소위 이성이라는 것을 통해 벌이고 있는 일이 바로 그와 같다.) 내가 포유동물을 정의하고, 낙타 한 마리를 보고 난 뒤 ‘봐라, 포유동물이다’고 말한다면 이는 매우 제한된 가치만이 있는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본 진리일 뿐이다. 그것은 진리 자체와는 상관없으며, 세계를 인간과 같은 종류의 사물로 이해하고 하는 기껏해야 동화의 감정을 쟁취하는 것일 뿐이다.

[215]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사이에 끼여 있는 ‘과’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216]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

[221]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222]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231] 왜 보다 높은 인간들은 변신에 실패했을까? 그들에게는 초인과 영원회귀가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에게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초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즉 놀이와 웃음과 춤을 몰랐다.

[233]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23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차라투수트라의 신은 디오니소스다. 초인을 ‘의욕하는 자’ 차라투스트라가 영웅의 모델이라면, 초인으로 ‘존재하는 자’ 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디오니소스는 “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

[239]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247]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251] 이주민의 정착은 파멸이다. 여행자가 여행을 멈춘다면 그는 더 이상 여행자로 불릴 수 없다.

[252]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이다. 유목민이란 여행자이며 외부자이다.

[253]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이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259] 제 아무리 숭고한 가치라 해도 합리성을 갖지 못한다면 공공의 무대에서 물러나야 했다.

[260] 확실히 베버는 자본주의를 자본이나 기술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베버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인간(근대인)은 전혀 새로운 종의 인간이다.

[265] 동양의 승려들은 도를 닦으면서 시간 의식을 갖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서양의 수도원에서는 도를 닦는데 방해가 되는 충동이나 잡념을 억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시간표가 이용되었다.

[266] 자신들의 의지로 행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중요한 전환이다. 합리적인 시스템이 개인들의 일상생활의 수준을 넘어서 조직이나 제도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 관료제다. 베버는 관료제를 기계라고 불렀다. 관료제란 개인적 수준에서는 책상 앞에 붙여놓은 게획표일 것이고, 사회적 수준에서는 거대한 행정체계 및 사회제도들을 의미한다.

[268]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271] ‘과학적 경영’이라고 불리는 것이 수도원과 군대의 합리적 훈육이 발전된 형태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279] 베버는 소명 의식과 거리 두기 능력, 책임감 등을 가진 정치인에게서 관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발견한다. 이러한 정치인이야말로 그가 보기엔 관료제 기계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280]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과 관료제적 정치인의 차이는 진리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학자와 단순한 효율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술자의 차이와 같다.

[294] 답은 대개 질문들 뒤에 숨어 있다. 그것은 질문들과 동떨어진 채 답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그 답의 형식과 내용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316] 생명이 ‘차이’로부터 온다는 프리고진의 지적이 맞다면, 정치 영역에서 ‘차이’가 갈등이나 적대, 혹은 정지의 신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올바른 것일까? 오히려 생태학은 다양성과 차이야말로 강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319] 생태계의 어떤 것들도 자신의 특이성을 전개함에 있어 다른 것과 대립하지 않으며,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야말로 생태계 건강의 징표다.

[320]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멀리 떨어진 것도 없다.


3. 내가 저자라면

“우리가 생태적이고 미적 패러다임을 말한다면, 그것은 정치에 대한 생태적 신비화나 심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발견해야 할 정치적 주체들과 그들의 새로운 소통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상식과 보편성을 발견하기보다 차이와 특이성을 발견해내는 것은 결코 정치에 생소한 것이 아니다. 낯선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것에 정치가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멀리 떨어진 것도 없다.”

저자는 2부에서 ‘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차이의 아상블라주’를 제기하고자 니체의 철학을 1부에서 설명하였다. 잰 걸음으로 먼 길을 돌아온 느낌이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했듯이 모든 생태계가 건강하려면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 중요하듯이 정치나 사회체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 말의 준거는 차이로부터 나온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의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다.” (p 41)

차이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니체의 시선이다. 니체는 하나의 사실에도 여러 개의 눈으로 보고, 여러 개의 소리를 듣는다.

책의 앞부분을 읽을 때는 진도가 나아가질 않았다. 철학이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어렵게 철학을 설명한 것이지 모르겠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동안 철학을 너무 어렵게 배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기 시작했다. 철학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렵게 철학을 배웠기 때문에 철학이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지 누구한테 배우냐가 중요한 순간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생각을 좌우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가? 순간 나의 일, 나의 직업에 대해 숭고한 마음보다 공포감이 느껴졌다.

청명한 가을에 삶을 조명하는 책을 읽게 되어 마음이 깊어지지만 행간이 너무 넓어 이마의 주름을 깊어지게 만든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음미해봐야 그 맛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니체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고 한다. 초인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놀이와 웃음과 춤이라고 한다. 초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인간으로 머물 것인가, 이는 본인의 뜻에 달려있다. 니체는 권한다. 긍정의 권력의지를 영원회귀하여 초인의 삼위일체를 맛보라고 말이다. 그것이 곧 자유이고, 천국이다.

IP *.212.167.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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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2007.10.16 08:03:53 *.128.229.81
놀이와 웃음과 춤 - 미친 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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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7.10.21 01:59:21 *.131.127.35
그냥 밧줄로 있으면 안되남?
초인이 되면 원숭이가 한심하고 하챦아 보일 것이고
원숭이가 되면 초인이 미친놈으로 보이지 않것는감...

걸레는 빨아도 걸레가 아닌가?
깨끗하게 빨아서 무엇을 닦는냐가 중요하겠지비,,,
똥같은 욕심을 닦으면 또 빨기전까지 냄새날 것이고
보석같은 선행을 닦으면 광이 나것제...
모르긴 해도 ,
니체,,, 갸가 상당히 심심했을거야...
생각해보게 .. 천개의 눈을 가진 사람이 고작 두 개 달린 사람들하고
놀려니... 밧줄로 원숭이하고 묶여있는 것 같지 않았겠나 ?

그라니게 나는 밧줄 할티여~

'동양의 승려들은 마음을 닦았고
서양의 승려들은 생각을 닦았다."

생각은 말과 글을 배워서 시작된 것이고
마음은 그냥 원래부터 거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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