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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6일 15시 59분 등록
“운명애(Amor fati),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운명애(Amor fati), 이것이 나의 내적인 본성이다.” p25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 -소포스(Philo-sophos).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p56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있다. Nitimur in vetitum!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p253


1. 저자에 대하여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0.15~1900.8.25]
독일의 시인·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주저는 《반시대적 고찰》(1873~1876)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1883∼1885) 등이 있다.

레켄 출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어머니·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 전임하는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 있을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또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18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1872)을 간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悲劇)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해명하고, 이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主知主義)에 의거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이미 그 몰락을 보았으며, 다시 그 재흥(再興)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기대 ·확인하는 이 저서는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것이다.

1873~1876년에 간행된 4개의 《반시대적 고찰 Unzeitgemässe Betrachtungen》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天才)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이상은 1876년《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1878∼1880)에서 더욱 명확해져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偶像)이라 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의도하였다. 이미 고독에 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1879년 이래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주로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작에 전념하였다.

《여명(黎明) Morgenröte》(1881) 《환희의 지혜 Die fröhiliche Wissenschaft》(1882)의 뒤를 이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1883∼1885)로 그의 성숙기(成熟期)가 시작된다. 신의 죽음으로 지상(地上)의 의의를 설파하였고, 영겁회귀(永劫回歸)에 의해 삶의 긍정(肯定)의 최고 형식을 밝혔으며 초인(超人)의 이상을 가르쳤다. 《선악의 피안(彼岸) Jenseits von Gut und Böse》(1886)에서는 위의 사상에 부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생긍정(生肯定)의 새로운 가치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도덕의 계보학(系譜學) Zur Genealogie der Moral》(1887)에서는 약자(弱者)의 도덕에 대하여 삶의 통일을 부여하는 강자(强者)의 도덕 수립을 시도하였으며, 미완의 역작 《권력에의 의지(意志) Wille zur Macht》(1884∼1888)에서는 삶의 원리, 즉 존재의 근본적 본질을 해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하였다. 그 이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니체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극복이다. 그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 문명의 몰락과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득하였다.

사람들은 지고(至高)의 가치나 목표를 잃어 이미 세계의 통일을 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소화(矮小化)되고 노예화하여 대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근대의 극복을 위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彼岸的)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此岸的)·지상적인 것을, 즉 권력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니힐리즘의 철저화에 의해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 하였다. ‘초인·영겁회귀·군주도덕’ 등의 여러 사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이 책의 저자를 통해 본 니체
저자 고병권은 말한다.『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찾아낸 미세한 조각들을 집어넣고 보면 사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라고 의문을 제시하며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편다.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위대한 철학자는 하나의 비명 속에서도 여러 개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이다. 시대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대의 목소리가 가리고 있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숭고한 현미경을 가진 신”처럼 “선분이나 미세한 조각들”을 찾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또한 “얼음 덮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하는” 사람으로, “괴이하고 의심스러우며 금지되어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어” 자신의 생존을 위한 식량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p4

연구원 소라가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어때? 나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큰일 났다.’ “어려워... . 하지만 언니에게는 잘 맞을 것 같아.” ‘야아, 다들 어렵다는 데 내가 무슨... . 나 한 번도 안 읽어봤어.’ 이렇게 말하기도 솔직히 좀 창피하였다.

대 철학자, 니체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이, 이 나이를 살아온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어딘가 캥기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철학서적 하나 변변히 읽지 않고 살아온 내가 무슨 철학이 있었겠냐. 한심한 인간 같으니라고. 그나저나 어쩌지 그렇게 어려우면 하고 내심 걱정이 태산 같다. “진짜야, 언니하고 잘 맞을 것 같아.” 그 말에 용기를 가지고 책을 읽어보려 하지만, 너무 늦게 시작한 책읽기라 여간 긴장이 되지 않는다. 언제 읽고 리뷰를 올린다지? 종종 그래왔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좀 벅찰 듯싶다. 보나마나 줄칠게 많을 것이 빤하고, 내 책읽기는 느려 터졌으니 이 일을 어찌한다? 자도 마음이 편하지 않는데 수업 후 옹기종기 마지막까지 남은 뒤풀이(?) 탓인지 자고 또 자도 종일 졸음은 밀려들고, 저무는 일요일저녁부터 눈앞이 캄캄해 진다. 아아~ 어떻게 해. ㅠㅠ


2. 내 마음속에 들어온 글귀

책머리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말했다.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 언젠가 헤겔(Hegel)은 “밤에 모든 암소의 색깔은 검다”고 말했지만 장님이 된 철학자는 밝은 대낮에도 암소들의 색깔을 구별하지 못한다. 사실 세상에 “엄마소와 똑같은 송아지는 단 한 마리도 없다.” p3
써니: 왜 하필 암소를 거론했을까? 그 자신이 수컷이라서?

북리뷰팀에서 좋은 리뷰의 선정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사부님께서는 물으셨다.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느냐?” 팀원 가운데 한 사람이 말했다. “팀원 간에 여러 의견들이 있고 기준을 정하는 일이 어려우며, 형평성 등을 따지다보니 진척이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며, 저마다 앞뒤가 잘 어울리지 않는 등의 문제로 인해, 어느 팀원은 다시 재구성하여 쓰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상당히 놀라운 언조로 말씀하셨다. “다시 쓴다고? 무엇을 근거로 그 많은 글을 다시 쓰겠다는 것이며, 다시 쓴 글이 원래의 글보다 좋다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더군다나 저자의 의도를 그르쳐 새로이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고 하는 것은 저자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니 다시 재고토록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송아지인 것이다. 이 차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아마도 쉽지 않아 보인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 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P7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도 실천이 필요하다. 니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대로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써니: 사부님은 철학은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안에서 내 식으로 어루만져 나만의 삶을 구가할 수 없다면 참다운 철학의 사명을 다 한 것이 아니다. 나의 오장육부와 소화를 마치고 사라지는 똥에서 조차 절절하게 녹아 흐른 향기를 뿜어내야 하는 것이다.

진리란 머리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반박될 수 있다. 불쾌한 음악은 발걸음만으로도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 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색맹이 되고 마는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P8

써니: 스승님은 내게 창자를 비워 남해 푸른 물로 가득 채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가장 빛나는 사람가운데 한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는 다 그러하다. 저마다 가장 빛나는 사람가운데 한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스승의 말씀을 믿고 싶다. 증거는 내 몫이다. 내 부족함을 안다. 그러기에 나는 다만 이 과정을 빠뜨리지 않고 행하고 싶다. 그거라도 해나가고 싶다. 우선은 그렇게 연구원과정 1년을 살아보고 싶다.

모든 책들은 동료를 구하는 몸짓이다. p9

써니: 김춘수님의 시「꽃」이 떠오르는 구절이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서장
1. 천 개의 눈
눈처럼 쉽게 길들여지는 게 또 있을까?
진리를 묻는 자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 p17

2. 천 개의 길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p18

4. 천 개의 젖가슴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 오르는지”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p19
써니: 바다를 좋아하시는 사부님이 떠오른다. 태양을 향해 혹은 달빛을 향해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 오르기 때문이실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5. 천 개의 주사위
자유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또 한 번의 주사위를 던져라. 세계는 너희를 위해 천 개의 섬을 준비해두었다. p19

6. 천 개의 화살
모든 책들이 “망치”가 되거나 “다이너마이트”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저기 니체라는 화살통에 천 개의 화살이 들어 있다! 저기 니체라는 이름의 다이너마이트들이 널려 있다!

7. 천 개의 가면
“호기심이 많으신 분이시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주시려거든 부디........ 또 하나의 가면! 제2의 가면을 주시오” 허락하신다면 제3의 가면도....... 진정한 니체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요? 여기 니체의 가면이나 하나 받으시오. p20

8. 천 개의 이야기
아직도 천 개의 이야기가 남았다. 요리사 니체가 소개하는 우연을 냄비에 끓이는 법- 나는 어떤 우연이든 나의 냄비로 끓인다, p21

제1부
제1장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운명애(Amor fati),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운명애(Amor fati), 이것이 나의 가장 내적인 본성이다.”

써니: 연구원 레이스 때 초아선생님의 신청곡 아모르 신청곡이 생각난다.

1.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功過
철학이라는 영토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니체의 철학’을 만나는 것은 가능하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니체의 철학은 철학의 영토에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철학, 혹은 철학 외부에 위치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 철학은 얼마나 가치 있는 학문인지, 삶에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니체는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를 묻는다. p26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그렇다면 니체의 철학은 어떻게 철학의 외부에 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체를 보려는 철학적 의지의 특수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삼는다. p27

확실히 니체는 자신과 철학의 관계를 철학 외부에서 맺었다. 니체의 철학이 생리학이나 병리학ㆍ징후학ㆍ자연학 등의 모습을 띠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니체는 온도나 습도 같은 기후 조건, 차나 포도주와 같은 음식물을 대하듯 철학하는 일이 건강에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평가한다. 그는 ‘영양철학’이라는 이상한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써니: 영양 보신탕이 떠오른다. 한때 유행어로 영양가가 없다는 말이 회자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었을까?

니체는 철학자로 살기보다는 철학을 진단하는 의사로 살고 싶어 한다. 철학에 “청진기(소리굽쇠)를 대는 일.” 그는 철학적 의사이며, 철학에 대한 의사이다. 철학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말을 내뱉은 철학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진단이 끝나자 니체는 이렇게 처방한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힘, 생명 같은 것을.......” p28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진단하는 철학. 그래서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벼아ㅣ 대결 구도 속에 놓여 있다.

니체가 철학자들을 죽음의 설교자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이 세계 속에서의 삶을 평가절하하고, 어떤 생성도 없는 영원불멸의 세계를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this world)’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역동성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단순한 ‘현상’이나 ‘가상’으로 치부한다. 그리고는 ‘실재계(real world)’, 다시 말해 암된 세계가 따로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 ‘물 자에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p29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한다. 삶이 그토록 추악한 것이라면 삶을 살지 않으면 도니다. 그러나 이들은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조롱한다. “그들 역시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음을 비웃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소망한다. 그렇게 죽음이 좋은 것이라면 제발 빨리 그들이 원하는 세계, 천국의 세계로 살라져 버리기를........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한 니체의 입장은 저 유명한『에티카』의 저자의 입장과도 같은 것이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그러나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을 반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글은 반박되어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치료받아야 할 존재다. 죽음의 설교, ‘몰락에의 의지’, 삶을 경멸하고 영원한 부정의 무게 아래 두는 것은 “삶에 있어 가장 깊이 든 질병일 뿐이다.”

생철학으로 니체 철학이 부딪힌 과제: 철학을 치료하는 철학, 삶으로부터 나쁜 기운을 덜어주는 철학, 삶으로부터 죄의식을 걷어내는 철학,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삶을 긍정하는 철학,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가능할까?

니체의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p31

2.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이제 상상된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평가한다. 진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상상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진리는 무엇보다도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충분히 멀어진다. 진리는 고딕의 첨탑보다도 더 높이 올라갔고 진리를 잃어버린 개별적 존재들은 한없이 낮아졌다. ‘너 자신의 초라함을 알라!’

써니: 사부님께서는 철학은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신학자들이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눈부셔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矮小症을 걱정한다. 신이 위대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왜소해진 것은 아닌가? 진리가 밝아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아닌가?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p33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삶’ 때문이 아니다. 고통은 오히려 ‘삶으로부터의 이탈’, 즉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나쁜 것은 곧 죽는 것이고, 다음으로 나쁜 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가장 위대한 영웅일지라도 더 살아남기를 바라는ㄴ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삶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 고통은 그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리스인들은 고통이 극대화되는 순간에도, 가장 무서운 파괴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삶은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p37

3. 세 개의 죽음-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 소크라테스의 경우
그리스 비극은 삶의 비극성을 극복하려는 그리스인들의 명랑성을 드러낸다. p39

니체는 주신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변증법적으로 분석했다.

주신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의 구속을 넘어서기 위해 일종의 혼수상태에 빠져든다. 일상의 한계와 구속을 넘어서는 혼수상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과도함을 막고 절제를 요구한 것이 아폴론적인 것이다. 니체의 분석에 따르면 주신 찬가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화해와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우리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 주신제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인들의 삶에 대한 긍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p40

하나의 파괴는 다른 생성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의 건너뜀은 다른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뛰는 이유는 차이들에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정력, 건강, 과도한 풍요” 때문이었다. 차이들 때문에 고통받는 것은 변증법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디오니소스 대 그리스도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자, 삶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을 제공한 자, 이 반기독교적 스승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p41

차이는 죄의식과 관계된다. 디오니소스의 갈기갈기 찢겨진 죽음에는 어떤 죄도 수반되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즉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p42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와 인생은 아무런 참된 만족도 줄 수 없다. 따라서 세계와 인생은 우리가 집착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인식이 획득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극적 정신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비극적 정신은 체념으로 향한다.” 니체는「자기비판의 시도」라는 새로운 서문을 덧붙여 그리스 비극과 디오니소스의 죽음에 들어 있는 긍정성이 쇼펜하우어식의 염세주의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p43

4. 비극이 상연되는 극장과 심판의 법정

극장은 삶을 연극으로 만드는 장소이고, 법원은 삶의 죄를 추궁하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니체에 따르면 원래 비극은 “합창이었지, 연극이 아니었다.” 조잡하고 흉측한 가면을 쓴 디오니소스가 등장한다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연극으로 보지 않았다. 열광적인 합창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사람들이 본 것은 가면을 쓴 배우가 아니라 자신들 앞에 나타난 거대한 환영으로서의 디오니소스였다. 오늘날 극장에 앉아 있는 ‘관객으로서의 대중’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참여하는 자들이었고, 모두가 변신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비극은 연극으로 전락했고 사람들은 관객으로 전락했다. p44

철학자들이 삶을 개념으로 포착할 때 그것 역시 일종의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참된 세계가 동굴밖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극장을 끌어들였지만, 그가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극장을 끌어들였지만, 그가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자신의 극장 속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플라톤 철학의 연극적 성격을 간파했던 사상가는 에피쿠로스(Epicuros)였다. 에피쿠로스는 니체보다도 훨씬 이전에 삶과 건강을 위해 철학을 활용할 줄 알았던, 다시 말해 철학의 공과를 물었던 사상가이다. p45

삶을 통해 “충분히 비극과 희극을 발견하는 자라면 극장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p46

극장은 사람들의 감각을 평등화하고 보편화하는 마력을 지녔다.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은 연극의 반대편에 자리한다. “네가 이해하는 것처럼 나는 본질적으로 반연극적이다. p47

소크라테스가 법정을 통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도 그가 법정에 대한 치고의 옹호자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인류 전체를 법정에 올린 그리스도의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메시아가 온다는 기대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적을 심판하러 온다는 무시무시한 소식으로 바뀌었다. 신은 왜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죄 지은 자들을 위해서 죄 없는 자가 희생을 당한 것이다. 이로써 복음이 끝장나 버렸다. p48

심판은 삶으로부터 사랑의 요소를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신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이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고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p49

5. 미래의 철학자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지배적 사상은 지배적 삶의 방식과 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다. p49

존 웨슬리는 그의 스승 피터 뵐러(P.Bӧler)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그대가 신앙을 가질 때까지 신앙을 설교하라. 그 다음부터 그대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설교할 것이다.”신앙이 삶을 생산하면 이제는 삶이 신앙을 생산할 것이다. 따라서 삶을 실천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신앙은 극복되지 않는다. p50

철학자는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사상가여서는 안 된다. 항상 사상가를 뒤쫓는 사상가, 다른 사람에 관한 사상가, 그들이 바로 철학자들이다.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p51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p53

니체가 미래의 철학자와 대비시키는 사람들은 철학적 노동자들이다. 미래의 철학자 대 철학적 노동자!

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이다.
써니: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말 같다. 또한 변.경.연의 꿈벗들이 왜 창조적 부적응자들 이었는지 알겠다. 우리는 미래의 철학자 이니까.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미래의 철학자는 그 자신의 권한으로 과거의 모든 가치들을 재평가한다. p54

6. ‘사랑’의 의미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 소포스(Philo-sophos).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p56

진리와 사랑에 빠진 철학자, 그는 ‘현인’이기보다는 ‘지혜의 친구’여야만 한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어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p57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p59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 니체 계보학
1. 게보학 1 - 비판

도덕학자나 도덕철학자에 대한 니체의 불만은 그들이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 p61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의 도덕학이 결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도덕 그 자체의 문제"이다. p62

하나의 가치 판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민족이 생존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 민족은 어떤 민족도 살 수가 없다. p62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p63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도 있다."

도덕에는 소심함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 p63

2. 계보학 2 - 탐사
다른 지층을 탐험하는 탐사자는 자신의 시대를 떠날 수 있는 대단한 자유정신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탐사자는 용기 있는 것 못지 않게 박식해야 한다. 파편 하나도 세심하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쉽게 지나치는 것을 그는 꼼꼼하게 보아야 한다. p64

계보학은 무엇보다도 보편화에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 p65

쟁기는 '갈아엎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또한 주름을 만드는 도구이기도 하다. p66

4. 강한 자와 선한 자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parthos of distance)"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어제의 나' 와 '오늘의 나' 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노예들은 개별적인 차이를 부정해서 모호한 보편성에 도달한다. p78

5.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자비야말로 법을 넘어서는 강자의 특권이다.

"형벌은 오히려 양심의 가책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준다. 감옥에 들어온 자가 깨닫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지'하는 조심성이다." 그러나 '원죄'는 채무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원죄의 채무를 지게 되면 그 누구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는 빚쟁이가 되고 만다.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p83

강자는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강자의 운동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능동적(작용적, active)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운동은 부정에서 시작하며 반동적(반작용적, reactive)이다.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빼앗는다." p84

6. 도덕이라는 동물원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분석했던 바대로 니체는 노동이야말로 충동을 억누르는 훌륭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p86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 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 밝힌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 p87

7. 선악을 넘어서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다." p91

제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2. 진리의 해석학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르는 문화적 종교적 차이.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보다'차이(거리)'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단적으로 말해 다른 해석학과 니체의 구분선은 제우스의 의중에 있기보다는 헤르메스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해석학자들은 헤르메스를 제우스를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로 여긴다. p95

그러나 이들과 달리 니체는 '거리의 열정(pathos of distance)'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 p96

지평 융합이라는 개념은 분명히 변증법적이다. p98

헤겔은 경험적 한계를 뛰어넘어 더 이상의 변화도 없는 인식 상태인 절대지로 나아가려 했으나, 가다머가 변증법을 통해 배운 것은 어떤 인식도 완전하지 못하며,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상호주관성은 과학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주관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다. p99

가다머에게는 진정한 '반성'은 비판에서가 아니라 과거의 권위에 기초한 이해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p101

하버마스도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차이는 합의를 향한 출발점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는 객관적 진리를 가장한 초월적 가치의 침투를 막기 위해 '상호주관성'을 택했다. 상호주관성에 기초한 의사소통은 변증법적 운동이며, 모든 변증법이 그렇듯 차이를 해소하는 운동이다. 하버마스는 본인이 헤겔의 계승자임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p102

차이의 문제에 있어 허버마스의 입장에 대한 라이언(Ryan)의 비판은 설득력이 있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퍼스펙티브의 단일성이며, 그 방법은 통합과 안정화이다. p103

3. 스핑크스의 눈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투시주의(perspektivismus)다.
니체는 스핑크스의 눈을 빌어 또 다른 수수께끼를 내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음으로 해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진리에게 있어 넘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은 왜 동일한가? 니체는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우선 니체는 객관성을 믿지 않고 있다.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베티에게서도 보았듯이 대상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중시 한다. 주체로부터 독립된 대상으로서의 '사실들'.

니체는 주관(주체)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p105

"어떤 신앙이 삶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이 그 신앙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없애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p106

진리란 하나의 신앙이며 가치 평가이다. "너는 이러이러 해야만 한다(Du sollst)"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Wille zu einer Optik)'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공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사고와 판단, 지각의 활동은 "동등의 것으로 조작하는 활동"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다. 모든 새로운 것들, 모든 차이적 존재들을 하나의 틀에 끼워넣는 동일화의 의지. 그 동일화의 의지는 "모든 사건의 근본적 위조"가 행해지고, 시선에 대한 광학적 훈련이 수행된 뒤에 목표를 달성한다. p107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이 때문에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을 인식하는 명법(Imperativ)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 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p108

4. 가치의 발명
사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히믜 련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지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p110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p111

콘웨이는 니체가 독단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진리는 해석의 문제'라는 투시주의를 성공적으로 제시했다고 본다. p111

니체는 진리성을 경쟁하기 위해 하나의 견해를 제출한 것이 아니다.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이 문제다. 해석 행위는 모든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 p112

개인은 무언가 전혀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이다. ....... 개개인은 전통적 용어도 역시 개인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식을 개인이 창조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이다. 즉 해석자로서 개인은 한결같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써니: 이 책에서 가장 값진 아름다운 문장이다. 개인의 존재, 절대 가치, 창조성...
니체가 절대주의나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p112

지나치게 많이 배운 자들의 해석은 너무나 노쇠하다. "많이 배운 자들은 모든 격렬한 욕망을 잊어버렸다. p113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해석의 비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성된다. p114

5. 니체에 대한 해석학 - 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해석된 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해석!

"니체의 스타일은 결정할 수 없다. 만약 니체에게 스타일이 있다면 그것은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p117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내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드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다. p119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 작은 정치의 시대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즈의 정치 체제가 어떤 안정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 안정성을 해칠 힘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승리에 대한 증명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실패에 대한 예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의 실패는 혁명 때문이 아니라 노쇠함 때문이겠지만....... .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nihilism)'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p123

2.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1 - 근대 국가와 전쟁
확실히 근대 정치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국가를 향하고 있다. "국가가 끝나는 곳, 거기서 비로소 없어서는 안될 사람의 노래, 유일한, 그리고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가락이 시작된다." 그리고 고대국가에서 근대국가로의 전환, 새로운 우상의 출현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수단은 전쟁, 그리고 또 전쟁뿐이다." 이른바 니체의 "전쟁 찬가." p132


3. 내가 저자라면


하나, 신이 낳은 애물단지, 살아있는 사상, 아직도 니체는 죽지 않았다.

늘 우리와 함께 있으나 존재감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영원한 미래의 아들 니체, 아니 천의 얼굴 니체, 그가 곧 신 자신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존재감을 들어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존재감을 들어낼 수 없는 시대의 사람이었다.
신이 자신을 복재하여 자신을 하나쯤 더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투명인간으로. 그러다 가만 보니 안 될 것 같으니까 불노초를 나누어 주지 않은 것은 아닌가. 아니면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사흗날에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의 이름이 니체였을까?

태생적으로 의문을 달고 나온 천재였다.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신앙의 고통을 달아준 것은 신 자신이 아니었던가. 신이 빚은 자신의 창조물에 의한 반격, 니체역시 신의 아들이 아니던가. 그가 미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미래는 반드시 부조리를 까부숴야 함을 역설한다. 신이 미처 생각지 못한 오류를 찾아내라는 미션이었던 것은 아닐까?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 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가 ‘미쳤던’ 것은 아파서가 아니라 보편적 신념이나 시대정신의 구속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p4

갑자기 나의 글, <코리아니티 옛날이야기>에서 사부님을 도발적이고 발칙한 여인으로 표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미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미쳤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병들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절박함 자체가 이성적이지는 않은가?) 나는 단지 놀랐다. 그 야심만만한 꿈에 놀랐고, 자신을 생체실험대에 눕혀 메스를 가하듯 마루타와도 같은 실체의 본보기를 이루어 낸 점에 감탄했다.
현존하는 한 소시민적 개인이 감히 중년의 나이에 자신을 완전히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우리와 함께 길을 만들어 어깨를 나란히 걸어가는 것에 감동했다. 아니 놀라고 싶었다.
제발!!!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신과 같은, 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인 신, 내가 만지고ㆍ보고ㆍ 들을 수 있는 신을 오매불망 만나고 싶었다. 내 무지를 씻겨줄, 내 가슴의 피멍을 풀어줄, 내 의문을 밝혀줄 한분의 스승을 나는 꼭 만나고 싶었다. 나는 사기당하기 싫었다. 더는 아프고 싶지 않았다. (-그랬네. 아팠네.) 저 사람이 누구야? 당신께서 내가 찾는 신/스승님이 맞나요? 나는 물어보고 싶었다. 느끼고 싶었다. 표현하고 싶었다.
믿기지 않았다. 왜? 소설이 아니었다. 허구가 아니었다. 어제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스승은 만질 수 없는 신/니체가 아니다. 나는 지금 생명의 실체와 함께 공부하며 밥 먹고 논다.

『아마도 니체는 “모든 개인은 자기 시대의 아들"이라는 헤겔의 고상한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예외자’, ‘탈주자’, ‘위험한 인물’, 무엇보다 ‘미래의 아들’로 간주한다. 모든 철학자들이 ‘시대의 아들’로 규정된다면 그 어떤 사상도 시간의 감옥을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시대와 맞지 않은 ‘때 아닌 것(Unzeit)’이며 미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감각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은 시간이다.』 p5

두울, 세월 속에서 시간을 거꾸로 사는 반역의 철학자 니체, 시공을 초월하듯 무한 창공을 나부끼며 거친 물살을 헤치고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같은 역사의 반항아.

천의 얼굴, 천의 악마, 천의 광기, 천의 사유, 천의 고독, 천의 도전, 천의 승리, 천의 신.
사유하라,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유하라. 단정하지 마라, 규정하지 마라, 나는 자유인이다.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다. 죽음만도 못하게 삶을 낭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변화를 통해서 계속 성장할 수 있다. 어제보다 아름다워지고 더 행복한 일상을 쟁취해 낼 수 있다. 체념하지 마라. 속박당하지 마라. 의심하라. 그리고 찾아내라. 삶이 살만 하다는 것과, 얼마든지 즐거운 인생을 살다 기꺼이 사라질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라고 니체는 말하는 듯하다.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p5

『니체를 하나의 체계 안에 가두려는 사람들은 항상 체계 바깥에서 웃고 있는 또 다른 니체를 목격하게 된다.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은 니체의 허물이나 가면들뿐이다. 문장들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 것은 모호함 때문도 아니고 진정성의 ‘결핍’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과잉’과 ‘넘침’ 때문이다. 그는 “단 여섯 줄의 문장”에도 천 개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천 개의 의미를 하나의 의미 아래, 그 천 개의 니체를 하나의 니체 아래 묶어두려는 사람들이 문제다.』 p6

세엣, 니체를 통해 본 내 스승의 철학과 일상

사부님은 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20년간 자신을 헌신하며 키워갈 수 있었던 IBM이라는 회사의 직장생활을 통해 많은 꿀을 모은 꿀벌 혹은 일벌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꿈벌이 되기를 원했고, 그의 끊임없는 계획과 실천을 통한 지속적인 발전으로 꿀벌의 허물을 벗고, 마침내 이 시대의 요청과도 같은 새로운 꿈벌로 거듭 탄생하였던 것이다. 꿈벌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아낌없이 끌어내어 모으는, 자신을 통해 스스로의 꿀을 먼저 따낼 줄 아는 벌이다. 스스로의 헌신과 희생적인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가치 있는 사람이 되며, 거듭 탈피를 즐길 줄 아는 새로운 벌이다. 열망하는 신비한 새 친구를 자기 안에서 모색하여 사귀느라, 일상이 동경과 새로운 경이로 채워져 시간가는 줄 모르게 즐거운 비명을 내지를 수 있는 흥미로운 벌이다. 그래서 내 스승님의 몸짓엔 미소 가득한 평온한 기꺼움이 감돈다.

『그래서 철학자는 먼저 “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p7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p7

네엣, 나의 똥고집, 나의 희망사항

나는 종교의 선택과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내 신앙은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부족함을 깨닫고 개선하며, 기쁨의 일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장 행복한 시기에 성당에 가고 싶었다. 나는 울면서 기도하다 체념하고 타협하여 그 속에 갇히는 것이 해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공간과 대열에 끼이기 위한 구속이 아니라, 나다운 삶과 나다운 의문과 나다운 진실과 나다운 자유와 더불어 즐거운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앙생활이 개인의 의지에 앞선 순종과 극기만을 목적으로 한 일상을 최우선의 길로 여긴다고 생각지 않는다. 각자 나름의 생활방식을 즐겁게 찾아가기 위한 모색과 동참을 통해, 더 나은 참된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갈구하며 행복해 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신이 정말 우리에게 획일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내가 나일 수 있고, 내가 나 맞는다면 말이다.

『진리의 식물은 토양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그 토양이 희소성과 결핍, 적대와 착취를 생산하고 있다면 철학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

『사람들이 본성과 자연과 대결하는 곳이라면 그 “세계는 빈곤화되고 그들은 더 이상 나누어주지 않을 것이다.” 』
이게 무슨 뜻인가??? 더 이상 나눌게 없다는 얘기? *****
몽골에서처럼, 그 사내들의 초원에서의 한바탕 주먹다짐처럼 별반 먹을 게 없다는 거.
하늘과 초원과 말과 가느다란 강줄기와 지평선이 전부인 곳의 사람들의 생활...

『병든 토양에서 자라는 진리는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상처 입히는 데 사용될 것이다. 한 인간이 병들고 우울했을 때 생각해 낸 모든 진리들이 그 질병의 표현이듯이, 병든 시대가 자랑하는 진리들 역시 그 시대가 지닌 질병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맞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나 질병이 꼭 썩어 문드러져 폐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이건 아픈 게 아니다.) 지독한 병, 지독한 일류병, 잘못된 지식인, 잘못된 종교적 악행과 착취는 폐악이 아니라 처형시켜야 한다.

다섯, 이 책은 어렵다. 해석도 헛갈린다.

니체의 주장은 어렵고, 니체를 해석한 것도 뭔지 모르게 이물감이 돌듯 짜증스럽기도 하다. 쉬우면서 어렵다. 니체의 언어는 어렵고 니체의 사상은 재미있다. (반대인가?)
마치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여하튼 이렇게 내 마음을 긁어준 철학은 없었다.(읽은 책도 부족하지만...)

늦은 독서로 하루 만에 읽기는 했지만 정리하기는 무리다. 시간 날 때 다시 읽어야 할 책이다.
IP *.70.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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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10.16 17:03:49 *.114.56.245
써니는 천상 글쟁이가 되어야 하겠다. 하루 만에 읽고 이 장문의 글을 적었다니! 토해 냈구나. 길러냈구나 .긴 두레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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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2007.10.17 01:44:53 *.70.72.121
늘 열심히 하시는 언니께 부끄러워요. 저가 잠도 많이 자고 놀기도 많이 하느라 ... 아직 인용문도 다 넣지 못했네요.

니체 아저씨는 엉뚱해요. 그리고 재미있어요.
언니의 부지런함을 배워야 하는데... 노력해 볼께요.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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