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7년 10월 16일 09시 14분 등록
모든 것에 즐기고, 모든 것에서 떠나라.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소명출판/2001.08


1. 저자에 대하여
고병권
서울대 화학과 졸업, 서울대 사회과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수유연구소+연구공간 '너머'>의 회원
주요논문
- 니체 사앙의 정치사회적학 함의에 대한 연구
- 니체-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
- 들뢰즈의 니체-헤겔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
- 노동거부의 정치학-새로운 구성을 향산 투쟁
-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번역서
한권으로 읽는 니체(푸른숲,2001)
테모트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그린비,2001)

주요저서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래의 내용은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책 표지에 저자가 니체와의 만남에 대해서 쓴 글이다.


고병권과 니체
니체, 사람들은 중고들하굑 시절 폼으로라도 그의 글을 한번쯤 읽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느 대학원 진학할 때까지 그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화학과를 마치고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에도, 그 사건은 오지 않는 시간 속에 철저히 감추어져 있었다. 학부시절 나는 전공과는 무관하게 이미 사회학도였다. 분자구조보다는 사회구조에 관심이 많았고 책꽂이엔 화학책보다 사회과학책이 많았다. 그러니 사회학과 대학원으로 진학한 3월은 운명이 비약하는 시점이 아니었다. 내 운명은 평온한 한 달을 더 기다렸다.

니체 난 그가 찾아온 때를 뚜렷이 기억한다. 사회학과 대학원에 들어가고 서울사회과학연구소라는 곳에 고개를 내밀 때까지만 해도 내 관심은 온통 맑스에게 있었다.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이 한풀 꺾이고,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맑스를 그 근본에서 새롭게 살펴보자는 흐름에 나도 끼어들고 싶었던 때였다. 때마침 대학원 동기들 사이에 맑스 원전을 읽는 모임이 만들어졌는데, [경철초고]를 읽은 직후였을 것이다. 누군가 머리 좀 식히자며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소개했다. 하나의 휴식으로서. 그렇다. 니체는 해게 하나의 휴식으로 찾아왔다.

강력한 감전, 원인은 모른다. 다만 맑스 원전을 통해 좀더 깊어지고 있었던 내 믿음은 그때 박살이 났다. 나는 깊이 내려가고 있었던 게 아니라 더 무거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게와 깊이의 혼동! 표정만 심각했지 난 켤고 급진적이지 않았다. 급직적인 것은 외히려 니체의 말들이었다. 그 말들은 가벼웠으나 단단했다. 말들이 부딪히면 깨지는 건 내쪽이었다. 하지만 말들의 패배는 내게 흥분을 가져다 주었다.

니체, 마는 맑스를 찾아가는 길에 그를 감두어 둔 내 운명을 사랑한다. 그는 꼭 알맞은 때에 나를 찾아왔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나느 그의 말들을 퉁겨냈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때 원전을 '새롭게' 읽으려 하고 있었고, 그런 태고다 나를 과거의 오랜 습속과 신념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운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가 때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

지금도 나는 니체를 사랑한다. 내게는 그를 객관적으로 기술 할 수 있는 거리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내 책들에서 그는 검토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말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 우정이 썩을 때까지 그대로 눌러 앉을 생각은 없다. 최근 들어 그 길이 다시 걷고 싶어졌다. 니체로 인해 시간도 바뀌고 내 건강도 바뀌었다. 맑스. 내가 그를 알맞은 때에 만날 수 있들 까. 그의 얼굴이 너무 긍금해서 다시 길을 떠날 참이다.



2. 책에 밑은 그은 부분들 (인용)
서장

[18] 천개의 길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삼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19] 천 개의 젖가슴
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는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 오르는지”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21] 천 개의 이야기
요리사 니체가 소개하는 우연을 냄비에 끓이는 법 - 나는 우연이든 나의 냄비로 끓인다. 낚시꾼 니체의 독자 낚는 법-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바늘이다. 우주 비행사 니체의 타임머신 타지 않고 시간 넘나드는 법-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다이버 니체가 말하는 인간이 가보지 못한 심연으로 잠수하는 법-길게 숨을 쉬고 나서 잠수하라. 그래야만 깊은 바닥까지 볼 수 있으리라. 아직도 니체에 관한 천 일 밤낮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제1부

제1장
[34] 그것이 인간들의 세계임이 드러나자 그는 서글프게 말한다. “모든 것이 작아졌구나. 도처에서 나는 더 낮아진 무들을 본다. 나 같은 사람은 아직 저 문을 지나다닐 수 없다.” 짜라투스트라의 말이 이어진다. “내가 (문을 지나다니기 위해 )몸을 굽히지 않아도 도는 곳, 소인들 앞에서 내가 더 이상 몸을 굽히지 않아도 되는 나의 고향으로 나는 언제 돌아갈 것인가?” 그는 한숨을 쉬며 먼 곳을 바라 보았다.

[38]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40] 디오니소스는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충동을 나타내며 아폴론은 항상 절도와 자기 인식을 잃지 않는 이성을 나타낸다.

[45] 차라투스트라는 동굴 속에서 깨달은 풍요로운 지혜들을 나누기 위해 동굴 바깥으로 나간다. 플라톤의 동굴이 무지의 장소이고 철학자의 눈을 멀게 한 장소라면, 차라투스투라의 동굴은 개달음의 상소이고, 치료와 회복의 장소이며, 초인으로의 변신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47]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선 극장에 있어선 안된다. 극장에서 사람은 집단으로만 정직하다. ... 극자엥 갈 때 사람들은 그 자신들을 집데 놓고 간다. 스스로의 발언권과 선택권을 방기하다. 자기의 취미도 버린다.... 가장 개별적인 양심도 최대다수로 평등화하는 마력에 굴복한다.”

[51] 철학이 하나의 통지 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52]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그러한 구속을)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신이야말로 광기의 즐거움이 생겨나는 장소”, ‘탈주자’의 장소다. 아픈 광인은 병원에 갇힌 환자지만 건강한 광인은 자유 정신을 지닌 전사로 등장한다. 보편적 가치를 위해 길들여진 두뇌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진 것이 신앙이라면 명령하는 자, 새로운 가치의 발명자가 가지고 잇는 것은 자유의 정신이다.

[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디.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unzeit)‘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54]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는 갖는다.” 미래의 철학자는 그 자신의 권한으로 과거의 모든 가치들을 재평가한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의 보고이다. 그는 과거를 재현하려고도, 기념하려고도,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긍정한다.

[56]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57] 창조하려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59]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63]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71] 불화조차도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도덕적 감각은 얼마나 다양한가.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는 휴식이나 안정, 충족이나 화합조차도 특정한 형태의 행복관이다. 니체는 이것을 “진정제적 사고”라고 부른다.

[76] ‘좋음’이라는 규정에는 귀족적 인간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가 들어 잇다. 이들은 ‘좋음’을 우월한 자, 명령하는 자, 지배하는 자인 자신들에게 부여했다.

[76] ‘우리’와 ‘그들’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구별은 “‘우리’를 좋은 인간, 예의 바른, 고상한, 잘 생긴,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들로, ‘그들’을 악당, 겁쟁이, 쓸모없는 인간들”로 나누는 것이다.

[77] “선한 자들은 모두 약하다. 악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 자들인 것이다.”

[7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pathos of distance0"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84]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빼앗는다.”

[84]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강자는 “능동성 개념을 박탈당하고...... 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89]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굳이 ‘악’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것은 내 신체에 해로운 존재-나쁜 음식이나 나를 슬프게 만드는 사람 따위-와의 마주침에 적합한 말일 것이다.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애 대한 해석학)

[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Du sollst)”는 것은 다양한 시선에 특정한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107]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07]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108]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대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109] 해석이 진리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을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하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111]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114]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읻.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잇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115] 니체를 계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등 뒤에 올라타고 있던 것이 바로 니체였다는 것이다. 니체는 들뢰즈를 상대로 사생아를 낳은 셈이다.

[120]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23]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123] 정치란 ‘행위(프락시스 parxis)’의 영역인데, 행위란 항상 어떤 것을 ‘시작하는 것’, ‘주도하는 것’이며, 타자와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126] 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 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127]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아내지 못한다.”

[142] 니체는 ‘훈련’의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선 “사회나 국가 같은 개체가 개개인을 굴복케 하여 고립에서 끌어내고 하나의 단체에 정렬시킬 때,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기초가 정비”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하여 그것이 본능이 되도록 한다.”

[143]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144]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니체는 학교보다 군대가 열등한 수단이라고 보았으며, 학교의 도움으로 정부는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148] 경쟁이 없는 진리는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자연학 + 윤리학)

[154] 세계가 ‘무’에서 시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또한 ‘무’로 돌아갈 수도 없다. 세계(우주)에는 구성 요소들이 빠져나갈 어떤 외부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에 외부가 없다는 사고방식은 세계를 창조할 창조주가 서 있을 공간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59]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차제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 하나의 힘이 정의되기 위해서도 복수의 힘이 전제되어야 한다. 힘은 차이와 거리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159] 힘의 두 번째 속성은 ‘표현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159] “어떤 양의 힘이란 사실 그것과 같은 양의 충동, 의지,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충동 작용, 의지 작용, 활동 작용에 불과하다.”

[161] 힘의 세 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힘은 ‘정지’나 ‘불변’과 항쟁하고 있으며, 그 양이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 본질은 유동적인 것이다.”

[167] 반동적인 힘의 작동방식에 들어난 의지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능동적인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능력)’을 박탈하는 것이다. 능동적 힘을 무력화 시키는 것, 그것이 반동적 힘의 내적의지이다.

[173]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 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173]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그 차제는 권력의지이다.”

[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 아멘.

[178]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 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아보다도 큰 자기 자신이며, “제압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그것은 힘센 명령자이다.” 같은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육체에 대해 느끼는 육체가 뛰어나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는 능력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 능력으로 지배한다.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두 가지 반복과 두 번의 긍정)

[182] “장례식의 비가 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189] 학자들은 주사위를 600번 정도 던지면 1의 눈금이 나오는 일이 100번 정도 반복될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도박사들은 1의 눈금이 여러번 반복되었어도 동일한 상황은 단 한번도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도박사들은 동전의 두 면 만으로도 충분하도 말한다. 영원회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도박사들이다.

[191] 긍정의 권력의지는 회복기의 차라투스트라처럼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한번 더!”라고 말한다. 그것은 반복하기를 원한다.

[192] 삶은 죽음의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196]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이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런 좋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200]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deion)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praxis)이다.

[208] 우연이란 차이기 모든 것 속에 분포된 상황이다. 필연적인 법칙으로부터 일탈하는 흐름이 우발적 사건을 만들어 낸다. 우연은 창조적 힘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


7장 인간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215]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과(und)’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응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 났기 때문이다.

[222]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니체는 신이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ㄹ에 깜짝 놀란다. 신은 시체로도 살 수 있다! 신앙의 대상이 죽으면 신앙이 소멸할 것이라는 기대는 완전한 오판이었다. 왜냐하면 신앙으로 존재하는 자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231] “무릇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231]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랄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237] 오해와 착각이란 다른 이름을 쓰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신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이름을 쓰는 데서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237] 나와 내 작품은 별개의 문제다. ..... 나를 다른 사람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나를 나 자신과 혼동해서도 안된다.

[238] “우산을 잃어버리듯” 쉽게 이름을 잃어버렸다. 그는 하나의 정체성을 쉽게 내던져 버렸다. “사람은 불멸하기 위해서 여러 번 죽어야 한다.”

[246] [차라투스트라]에는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부정과 창조는 과거를 구제하는 긍정의 정신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 책의 끝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알아차린다. “디오니소의 신호를 듣는 아리아드네” “망치를 든 파괴자”이자 “춤추는 무희”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

[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은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프리드리히 니체”

[253]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도니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인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잇다. Nitmmur in vetitum!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 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3. 내가 저자라면

니체를 연구하고 니체를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를 계간鷄奸하려다가 오리려 니체가 자기를 계간한다고 표현한 대목이 나온다. 니체는 그의 사상을 통해서 많은 사생아를 낳았다. 저자도 니체와 그런 관계를 맺은 사람 중 의 하나이길 바래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니체를 전하는 전령자이길 바래야 하는 걸까.

책의 내용은 어느 것이 니체의 말이고, 어느 것이 저자의 말인지 큰 따옴표와 작은 따움표 인용구를 표현한 글을 구분해서 나타내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교묘하게 섞여있다.

그러니 저자는 니체의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왔는지, 니체가 고병권이라는 이름을 내새워 내게 다가왔는지는 구분하기 어렵다.

왜 사부님은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라고 하지 않고, 이 책을 추천하셨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 한때 유행했던 것 같다. 내 아스라한 기억 속에는 친구를 통해 그 생소한 이름을 들었다. 저자 고병권이 다른 책에서 자신과 니체의 만남이 좀 특별하다고 말할때, 당시의 사회상처럼 누구나 폼으로 한번쯤 읽어봤을 거라는 그 책말이다. 오래전에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냥 읽었다. 철학책인지 소설책인지 헛갈리면서 말이다.

이번에 다시 읽으라고 했다면 나는 그 안에서 니체가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무척이나 복잡하다. 다행이 이 책은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니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행적을 통해서 그를 설명하고, 그가 한 말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전달한다. 저자를 통하지 않고,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니체'를 만났다면 수많은 상징들로 이루어진 그의 행동에서 나는 그를 못 볼 수도 있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장에서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천 개의 젖가슴'이라는 것으로 다양하게 세계를 보는 것에 대한 운을 띄워준 것이 마음을 열게했다. 1부로 바로 들어갔다면 다른 철학책들처럼 딱딱해서 내게 마구 졸음공격을 해댔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졸음이 싹 가시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대목에서는 무수히 졸음을 보낸다.

다양성에 대한 이해, 차이를 만들어 내는 유희, 놀이를 전제로 사생아를 낳는다는 그 뻔뻔함으로 접하게 한다.

이 책은 니체와의 만남이 어떤 형태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건강상태에 따라 그를 얼마나 잘 따라다니는지 그리고서는 그를 차버릴 능력이 되는지가 달라질 것이라는 니체의 생각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니체는 자신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철학)을 알게 하지만, 자신을 통해서 보는 것은 또 하나의 꽉 막힌 길이 될 수 있다는 유쾌한 장난을 걸고 있다. 저자는 이를 책 속에 녹여서 펼쳤다.


IP *.72.153.12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12 호모루덴스 : J. 호이징하 소현 2007.10.22 2132
1111 (28) 호모 루덴스 - J. 호이징하 [2] 時田 김도윤 2007.10.22 3003
1110 호모 루덴스 / 요한 호이징하 호정 2007.10.22 2655
1109 혼자 힘으로 백만장가 된 사람들.. 흐르는 강물처럼... 2007.10.21 2185
1108 놀이와 문화에 관한 연구 -호모루덴스(호이징하) 우제 2007.10.21 3490
1107 호모 루덴스 / 요한 호이징하 [2] 香仁 이은남 2007.10.21 2295
1106 [호모 루덴스] 놀고 있어도 놀 줄을 모른다. [2] 여해 송창용 2007.10.20 2186
1105 내 잔이 넘치나이다 두디스 2007.10.18 2584
1104 바라는대로 이루어진다 [11] 한명석 2007.10.18 3800
1103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고병권 [7] 海瀞 오윤 2007.10.16 2557
1102 [독서28]②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素田 최영훈 2007.10.16 2354
1101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을 읽고 [3] [1] 현운 이희석 2007.10.16 2746
1100 [독서28]①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素田 최영훈 2007.10.16 2222
1099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 고병권 [1] 素賢소현 2007.10.16 2311
1098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고병권 [3] 우제 2007.10.16 2316
1097 [리뷰025] 니체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4] 香山 신종윤 2007.10.16 2283
1096 (27)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4] 時田 김도윤 2007.10.16 2368
» [28]모든 것에서 즐기고, 모든 것에서 떠나라-[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교정 한정화 2007.10.16 2370
1094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2] 香仁 이은남 2007.10.16 2412
1093 [28]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2] 써니 2007.10.16 2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