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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6일 09시 54분 등록
#1. 조금 긴 프롤로그

일요일 낮, 회사 근처에서 직장 동료의 결혼식이 있어 다녀오는 길, 가을 햇살이 너무 따뜻하여 잠시 걷고 싶어졌다. 한번도 지나가본 적 없는 낯선 주택가와 골목길 사이를 지나 집으로 향했다.

낯선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딘가를 향해 가지만, 어떻게 그곳으로 갈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새로운 가능성의 실험이자 하나의 작은 모험이다. 따뜻한 햇살을 즐기며, 골목길에서 만난 학교 앞 문방구에서 어릴 때 먹던 불량식품들이 아직도 그대로 있음에 즐거워하고, 새로운 공원을 발견하고는 양복과 구두를 신은 차림새로 잠시 흙 길을 걷기도 했다.

우리는 교육과 문화와 체제로 인해, 남이 시키는 대로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자신 만의 생각이라는 것, 내면의 확고한 의지라고 하는 것, 사적이고 내밀한 욕망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사실은, 다른 누군가의 의지와 명령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 남이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된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거리, 그 차이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신 안의 넘쳐나는 것, 그 풍요로움에서 시작해야 한다. 일상의 낯선 새로움과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낯선 길을 헤매는 묘한 흥분과 등을 적시는 약간의 땀방울과 함께 니체의 경쾌한 발걸음을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고병권의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니체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느껴보려 한다. 그 수천 개의 눈 속에 담긴, 수천 개의 길에서 만난, 수천 개의 살결들을 어루만지려 한다.

니체는 하나의 고정된 관념이나 핏기 잃은 초라한 철학이 아니다. 이 세상이 늘 그러하듯, 변화, 그 자체이다. 지금 내 얼굴을 스치는 한 줄기 바람과 같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니체를 읽는 자여, 부디 즐거운 춤을 출 지어다. 그 수천 개의 가능성에 전율할지어다.


#2. 저자에 대하여

1) 니체



니체의 삶은 그가 남긴 또 다른 한 편의 작품과 같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라이프치히 근처의 농촌 마을 뢰켄의 목사관에서 루터교 목사인 카를 루티비히 니체와 역시 목사 집안의 프란치스카 욀러 사이에서 첫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니체는 여린 마음에 감상적 기질을 지닌 인물로 음악을 좋아했으며 피아노를 즐겨쳤다. 어머니 니체는 건강하며 상냥한 여인이었지만, 당시의 여느 목사 집안 딸들이 그러했듯, 교육을 많이 받지는 못했다. 니체가 두 살이 되던 1846년에 여동생 엘리자베트가 태어났고, 두 해 뒤에 남동생 요제프가 태어났다.

1850년 니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시골 목사관에 연이어 불행이 닥쳤는데, 겨우 서른여섯 살이었던 니체의 아버지가 뇌일혈로 죽었고, 몇 달 뒤에 남동생 요제프가 죽었다. 이 때 니체는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한다.

"교회에서 장례식 때나 울리는 오르간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일까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덤이 열리더니 수의를 걸친 아버지가 튀어나왔다. 그는 성큼성큼 교회로 오더니 곧바로 어린아이를 팔에 안고 돌아섰다. 무덤이 다시 열리고 아버지가 그 안으로 내려가자 묘석이 닫혔다. 그런 밤이 지난 다음 날, 어린 동생 요제프가 갑자기 병에 걸려 경련을 일으키더니 몇 시간 만에 죽었다. 우리의 슬픔은 끔찍했다. 나의 꿈은 완전히 실현되었다."

더 이상 뢰켄에 머물 형편이 되지 않는 가족들은 할머니를 따라 나움부르크로 이사를 갔고, 어린 니체는 어머니, 할머니, 젊은 두 고모, 그리고 누이 엘리자베트와 함께 살아야 했다. 그는 이 조그만 여인 사회의 유일한 남성이었다. 모두 니체를 애지중지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 짐이 되었던 것 같다. 이후 평생동안 그가 지녔던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이런 집안 환경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으리라.

니체는 어려서부터 영민했다. 그의 할머니는 그를 평범하게 키울 생각에 소년 시민학교에 보냈지만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돔 김나지움 입학을 위한 예비학교에 들어갔다. 음악에 소질이 있어서 1852년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1854년에 니체는 돔 김나지움에 들어갔다. 공부에 열의를 보였고, 시도 썼고, 피아노 솜씨도 좋아졌다.

1855년에 또 한 차례의 불행이 닥쳤다. 고모 아우구스테가, 그리고 1856년에 할머니가 죽었다. 니체는 두통과 눈병으로 학교를 잠시 쉬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몇 해 뒤에는 류머티즘에 카타르(catarrh)까지 와 병치레가 잦아지게 되었다. 1858년 그는 나움부르크 어귀에 자리한 슐포르타에 입학했다. 철학자 피히테와 역사가 랑케 등을 배출한 이름 있는 인문계 중등학교였다.

이 때부터 새로운 사상과 평생의 친구들을 사귐으로써 니체의 사상적 개화는 시작되었다. 마키아벨리와 그리스 철학자들을 공부하고,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을 접했다. 고대 인도 사상을 접했고, 불교를 만났다. 1860년 친구 핀더, 크루그와 함께 만든 게르마니아(Germania)란 동아리를 만들어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갔다.

1864년에 슐포르타를 마친 니체는 본 대학에 진학해 문헌학 수업을 시작했다. 신학 공부도 함께 했으나 이는 교회에 대한 그의 불안정한 관계를 더욱 흔들어 놓아, 그는 교회를 비판하고, 성찬식 참여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에서의 생활은 친구도 없이 우울한 것이었다. 마침 은사 리츨 교수가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니체도 더 이상 본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긴 니체는 리츨의 지도 아래 문헌학 공부를 계속했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 동안 실랑이를 벌이게 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접하고, 바그너와의 교류를 시작했다. 쇼펜하우어를 알게 된 것은 1865년 어느 고서점에서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으면서부터였고, 바그너를 가까이서 알게 된 것은 1868년 가을, 리츨 교수 부인을 통해 바그너의 여동생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이후, 이 둘과의 관계는 평생 동안 그가 극복해야 하는 주제가 되었다.

1869년, 그는 스물네살의 나이에 바젤 대학의 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1870년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했지만 병을 얻어 한 해도 못되어 바젤로 다시 돌아왔다. 이 때부터 철학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던 그는 1971년에 철학 교수로 지원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와 더불어 1872년 출판한 그의 첫번째 책 '비극의 탄생'이 격한 논쟁에 휩싸이면서, 그의 문헌학자로서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좌절과 명예 실추와 같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의 강의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씩 주류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이후 그의 병치레는 더욱 잦아졌고, 1870년대 중반이 이르자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다. 더 이상 강의를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니체는 1876년에 1년 동안의 병가를 내어 이탈리아 등지에서 요양을 하며 저작 활동을 계속했다.

니체의 건강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에 1879년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10년 동안 니체는 유럽의 경치 좋은 곳에서 방랑 생활을 하며 고독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이 때 그의 고독한 삶은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서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을 넘어서' 등 그의 대표적인 저작들이 이 기간 동안 쏟아져 나온다.

니체는 평생 동안 결혼한 적이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 극심한 고통과 만성적 불면증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질병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글쓰기를 계속했다. 이는 니체가 기절하여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 1889년 1월의 어느 날까지 계속된다. 니체의 전기를 쓴 쿠르트 파울 얀츠는 이렇게 말한다.

"니체는 비극적 인물이란 느낌을 준다. 우선 평생 그를 따라다녔던 끔찍한 병과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끊임없이 싸우며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기후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나은 곳을 끝없이 찾아 헤맸다. 그의 삶은 유난히 고통스러웠다. 그의 철학은 열정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철학은 두뇌의 철학, 오성의 철학, 세상을 초탈하고 탈육된 지식의 철학이 아니다. 니체의 모든 것은 체험과 감동에서 온 것이다. 그의 철학은 자신과, 기독교와, 기독교의 해석자들과의 토론이다. 나는 이런 삶을 대단히 존경한다. 니체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고 생각했으며-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다-, 그것을 위해 완전히 헌신했다."

그가 저술가로서의 경력을 끝맺게 되는 어느 날의 사건은 보통 이렇게 묘사된다. 1888년 12월 그의 마지막 작품인 '니체 대 바그너'를 완성한 니체는 아직 이탈리아의 토리노에 머물고 있었고, 1889년 1월 초, 그는 머물던 호텔에서 나와 알베르토 광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말에게 모질게 채찍질을 하는 마부를 목격하게 되고,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어 그만둘 것을 간청하며, 말을 목의 껴안고 눈물을 흘리다 졸도하고 만다.

이는 그의 첫번째 발병이었고, 그 이후로도 발작은 계속되었다. 그는 그 후로 10년을 더 살았다. 잠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처음엔 어머니의 간호를 받았고, 나중엔 선구적인 나치주의자인 누이동생 엘리자베트의 관리를 받았다. 영악했던 엘리자베트는 점차 명성을 얻어가던 니체의 인기를 이용해 니체 문서 보관실을 세웠고, 저술을 일부 수정하기도 하고, 그의 판본을 판매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니체는 서서히 죽어갔고, 1900년 8월, 20세기의 첫 번째 여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강력하고 열정적인 작품들과 그의 병약하고 고독한 삶과의 간격이 나를 잠시 침묵하게 만들었다. 생의 철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철학자의 삶은 참 가슴 아픈 비극이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편집자의 의도가 의심스러운 저술인 '권력 의지'가 엘리자베트에 의해 출판되었고, 결국 오해는 풀렸지만 니체의 철학은 히틀러의 나치즘을 상징하는 철학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만일 어떤 작가의 저술이 그의 삶과의 연관성을 통해서 읽혀져야 하는 것이라면, 그의 저술은 과연 평가절하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고독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미쳐서 죽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의 가치 또한 의심받아야 하는 것일까?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나와 내 작품은 별개의 문제다. … 나를 다른 사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나를 나 자신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EH; 235)

나는 여기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주장에 잠시 귀 기울여 본다. '공간의 시학'에서 바슐라르는 말한다.

"시인이 제공하는 말의 행복, - 시인의 생애의 드라마마저 뛰어넘는 그 말의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 시인의 괴로움들을 살아 보아야 할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반향은 세계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여러 상이한 측면으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 반향 속에서 우리들이 시를 듣는다면, 울림 속에서는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시를 말한다. 그때에 시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어쩌면 시인이자, 음악가이자, 철학자였던 니체를 읽는 것은 '변화의 문학'인 시를 읽는 것과 비슷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니 이제 니체에 삶에 대한 의구심은 한쪽에 치워두고, 아니, 그의 삶 또한 그가 남긴 또 하나의 작품으로 생각하며, 가을 하늘처럼 청량한 텅 빈 마음으로 그의 글을 읽어보자.

니체의 강력한 시구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흔드는 '울림'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리고 그 울림을 통해 '존재의 전환'을 이룰 수 있다면, 더 나은 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니체가 자신의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이루고자 했던 바로 그 소중한 사명이 아닐까.

여기 니체를 읽은 뒤의 강렬한 '울림'을 표현해 낸 그림을 끝으로 니체에 대한 저자 소개를 마무리하려 한다. 화가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가 보기에 니체는 '가장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작품을 읽은 뒤 나는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상하고 알 수 없고 외로운 수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오랫동안 숙고했다. 이제 첫번째 영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나는 니체의 작품에서 발견한 신비롭고 강렬한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다. 청명한 가을 오후 이탈리아 도시의 우울을… 이상하고 심오하며 신비롭고 무한히 외로운 시, 오로지 분위기에 의존하는 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해가 점점 짧아져서 여름보다 훨씬 길어진 그림자가 있는 청명한 가을 오후의 분위기…."





* 대낮의 수수께끼,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 19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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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정동호 외 / 거대한 고독, 프레데릭 파작 / 한 권으로 읽는 니체, 로버트 솔로몬, 캐슬린 히긴스 / 공간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등



2) 고병권



고병권은 '연구공간 수유+너머'(www.transs.pe.kr)의 대표이다. 아니, 그는 이런 직함을 싫어한다고 하니, 그가 원하듯 '추장'이라고 불러주자. 그는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니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화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친구의 소개를 잠시 빌려보자.

"일상에서 그는 항상 웃고 있다. 니체가 말한 ‘긍정의 힘’이 그의 신체에 각인되어 있는 것일까. 웬만한 일로는 화나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가 시도하는 유머는 대개 썰렁하지만, 다른 이의 썰렁한 유머에도 그는 크게 웃는다.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으며, 친구들과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게 그의 ‘행복론’이다.

현실에서 그는 자주 분노한다. 그의 분노의 대상은 주로 국가, 권력, 자본, 무기력 같은 것들이다. 친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게 하고, 친구들을 ‘삶’에서 내모는 그것들에 그는 눈 감거나 고개를 돌린 적이 없다. 삶에서 그것들을 ‘추방’시키기 위해 그는 오늘도 친구들과 함께 웃고, 공부하고, 투쟁한다."

이처럼 그는 마음이 맞는 친구와는 행복하지만, 부조리한 사회에는 자주 분노하는 사람이다. 그는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부한다. 그리고 책을 쓴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최근의 운동 속에서 혁명이나 코뮨주의를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이다.

그가 쓴 책으로는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2007)', '화폐, 마법의 사중주(2005),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2003)',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2001)' 등이 있다. 그리고 번역서로는 'How to read 마르크스(2007)', '한 권으로 읽는 니체(2003)',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2001)'등이 있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가 어떻게 니체를 만나게 되었을까? 그는 니체를 만났던 그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우연찮게 휴식을 취하다 그의 책 '도덕의 계보'를 읽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거부감이 드는데 반박이 안됐다. 싫은데 논박할 수 없고, 가벼운데 너무 단단해서 깨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집 근처 대학 도서관에서 두세 달 동안 니체 전집을 읽고, 공부하며, 석사 논문까지 쓰게 되었다. "책에는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한가', '난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의 글귀가 나타난다. 어이가 없어 한 번 크게 웃고 나니까 이 사람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 시절, 상황을 무겁게 보는 것이 깊이 있게 보는 것이라 생각했다. … 그러나 깊이 들어간 건 내 신념의 문제였다.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이라는 것'을 '도덕적 계보'를 통해 처음 알았다."

이후 그는 유쾌한 니체주의자가 되었다.



#3.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책머리에
 
(3)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4)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5) 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시대와 맞지 않는 ‘때 아닌 것(Unzeit)’이며 미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감각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은 시간이다.
 
(5)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6)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과잉이 원인인가 결핍이 원인인가?” 당신이 천 개의 손을 내밀 때, 그것은 베푸는 것인가 구걸하는 것인가? 당신이 지금 고통 받고 있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인가 생의 빈곤 때문인가?” 당신은 지금 “어떤 사막도 옥토로 바꿀 수 있을 만큼” 풍성한가, 아니면 “어떤 옥토도 사막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 메말라 있는가?
 
(7) 철학자는 먼저 “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된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 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80)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도 실천이 필요하다. 니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대로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서장.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8)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19)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가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오르는지” 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19) 자유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또 한 번의 주사위를 던져라. 세계는 너희를 위해 천 개의 섬을 준비해 두었다.
 
(20)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한다.” 가면 뒤의 얼굴?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1부
 
제1장 아모르 파타: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29)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29) 철학자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this world)’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역동성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단순한 ‘현상’이나 ‘가상’으로 치부한다. 그리고는 ‘실재계(real world)’, 다시 말해 참된 세계가 따로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 ‘물 자체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31) 죽음의 설교, ‘몰락에의 의지’, 삶을 경멸하고 영원한 부정의 무게 아래 두는 것은 “삶에 있어 가장 깊이 든 질병일 뿐이다.”
 
(34) “우연이 갖는 귀족성”은 필연의 힘 아래에 예속된 노예로 전락한다. 모든 순진무구한(innocent) 삶, 모든 우연의 세계는 하나의 필연적인 해석 아래서 전체화된 체계, 거대한 질서로 굳어진다.
 
(37)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삶’ 때문이 아니다. 고통은 오히려 ‘삶으로부터의 이탈’, 즉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나쁜 것은 곧 죽는 것이고, 다음으로 나쁜 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가장 위대한 영웅일지라도 더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삶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 고통은 그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41)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변증법적 운동을 빌지 않아도 디오니소스는 개별성의 한계를 쉽게 넘어설 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저기로 뛰어다니고 춤추는 존재였다. 파괴와 혼돈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 그의 “높이 뛰기와 넓이 뛰기”, “훌륭한 무용수”로서 추는 춤이었다. 하나의 파괴는 다른 생성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의 건너뜀은 다른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뛰는 이유는 차이들에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정력, 건강, 과도한 풍요”때문이었다.
 
(48-49) 심판은 삶으로부터 사랑의 요소를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신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이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고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51)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새롭고 위험한 생각은 안된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52)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따’,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라는 말고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그러한 구속을)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신이야말로 광기의 즐거움이 생겨나는 장소”, ‘탈주자’의 장소다.
 
(52) “너희는 너희의 사상을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 ‘인식의 전사’, 그는 철학을 하나의 전쟁터로 만들며, 세계를 내적으로 찢어버린다.
 
(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unzeit)’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54)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미래의 철학자는 그 자신의 권한으로 과거의 모든 가치들을 재평가한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의 보고이다. 그는 과거를 재현하려고도, 기념하려고도,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긍정한다.
 
(55) 니체에게 심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세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
 
(56)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57)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시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짐승의 무리나 신도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58)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59) ‘삶을 바꿔 보라!-철학을 떠난 철학자들이 철학의 목표로 제시하는 것.
 
(59)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 니체의 계보학
 
(63)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63)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
 
(64)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
 
(64) 다른 지층을 탐험하는 탐사자는 자신의 시대를 떠날 수 있는 대단한 자유 정신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탐사자는 용기 있는 것 못지 않게 박식해야 한다. 파편 하나도 세심하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쉽게 지나치는 것을 그는 꼼꼼하게 보아야 한다.
 
(67) 평면에 주름을 만드는 계보학자의 연구는 하나의 실천이다. 계보학자는 덮여 있던 이질성을 확인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그것을 같은 표면 위에 올려놓은 사람이다. 동일성의 평면 위에 나타난 이질성의 차이! 새로운 것들이 나타날 때, 사건이 일어나는 평면이 조용할 리가 없다.
 
(68) 계보학자의 현미경은 미래 철학자의 망치만큼이나 강력한 전쟁 무기이다. 그 작은 렌즈는 동일자의 세계에 거대한 지진을 만들어 내는 “다이너마이트”가 될지도 모른다.
 
(72)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77)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아먈로 약한 자이다.

‘선한 자들은 모두 약하다. 악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 자들인 것이다.’
 
(78) “(pathos of distance)”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하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82) 아무도 보지 않아도 신이 보고 있다. 신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고 있다. 더구나 이제 죄는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닌가. 인간은 이미 ‘원죄’를 타고났으므로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형벌도 이처럼 잔혹하지는 않을 것이다.
 
(84) 강자는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강자의 운동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능동적(작용적, active)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운동은 부정에서 시작하며 반동적(반작용적, reaction)이다.
 
(84) 이제 약자는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강자는 “능동성 개념을 박탈당하고…… 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86) 어떤 야성도 잃어버리고 오로지 창살에 몸을 비비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 도덕의 가장 이상적인 장소는 동물원이다.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 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성직자들은 인간들이 ‘개선’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과연 ‘개선’된 것인가? 짐승은 단지 덜 위험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공포감과 고통, 상처, 굶주림이 야수를 병약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90)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91)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96) 니체는 ‘거리의 열정(pathos of distance)’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103)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음으로 해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107) 니체는 해석의 문제에 있어 차이에 대한 “동등화의 의지”(혹은 동일화의 의지)를 발견한다. 진리라고 불리는 것은 본래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은 이렇다고 나는 믿는다.” 즉 진리란 하나의 신앙이며 가치 평가이다. 그들의 문제는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종족이든 국가이든, 교회이든 문화이든 간에 보존을 위한 하나의 투시법이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바로 차이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특정 방향으로 모으려고만 하는 것이 그들의 병이다.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Du sollst)”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Wille zu einer Optik)’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regime)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08)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이 때문에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을 인식하려는 명법(Imperativ)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109-110) “세계는 무한히 해석 가능하다.” 세계는 “배후에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바로 그 점에서 –필자) 도리어 무수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세계에는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다. 따라서 세계에는 아무런 진리도 없다.”
……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침과 과잉이다.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겐 즐거움의 대상이다.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끝없는 길이 아니겠는가. 세계의 카오스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몰락의 징후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해석이 생장의 징후이거나 몰락의 징후이다.통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성의 욕구이며, 다수성이야말로 힘의 징후이다. 세계의 불안정하고 혼미한 성격을 부인하고 싶어해서는 안된다.”
 
(111)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라를 경계하라. ……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112) 개인은 무언가 전혀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이다. …… 개개인은 전통적 용어도 역시 개인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식을 개인이 창조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이다. 즉 해석자로서 개인은 한결같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113) “ ‘창조하는 자’를 그들은 가장 증오한다. 표들과 낡은 가치들을 부셔 버리는 자, 파괴자를 그들은 범법자라고 부른다. 선한 자들은 말하자면 창조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114)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해석의 비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성된다. 생성된 차이는 괴로운 것이기는커녕 하나의 멜로디다. 니체가 가장 자유로운 작가라고 칭찬해마지 않았던 로렌스 스턴(Laurence Sterne)의 작품이 그렇다. “그가 정말로 칭찬 받아야 할 점은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데 있다. 결정된 형식은 쉼 없이 깨지고 밀려나며 미결정적인 형식의 의미를 갖는다. …… 그의 주제이탈은 동시에 그 이야기의 연속이고 전개이다.”
 
(115) “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 위를 내리 쪼이지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 질서도 천천히 녹아 내린다”고 말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118) 들뢰즈는 니체 사상의 특징이 방법에 있다고 말한다. 즉 니체의 텍스트들을 파시스트적인 것, 부르주아적인 것, 혁명적인 것으록 규정짓기보다 그런 힘이 만나는 하나의 장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내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드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다.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22)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2-123)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승리에 대한 증명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실패에 대한 예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의 실패는 혁명 때문이 아니라 노쇠함 때문이겠지만…….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131) “너희는 전쟁에서 지쳤고 이제 너희의 피곤함이 이 새로운 거짓 신에게 봉사한다. …… 너희가 국가, 그 새로운 거짓 신을 숭배할 때 국가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하리라. 그렇게 해서 국가는 두 눈의 심안을 매수하는 것이다. ……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가 음독자가 되는 곳,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131-132) “국가가 끝나는 곳, 거기서 비로소 없어서는 안될 사람의 노래, 유일한, 그리고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가락이 시작된다.” 그리고 고대국가에서 근대국가로의 전환, 새로운 우상의 출현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수단은 전쟁, 그리고 또 전쟁뿐이다.” 이른바 니체의 “전쟁 찬가”
 
(133)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은 볼 수가 없으며, 볼 수 잇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성적이고 보편적인 인간(Universal-Mensch)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움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란 특이성(singularity)을 갖추지 못하고 보편성 아래서 단지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개별자들인 셈이다.
 
(135) 자유주의 그것은 쉽게 말하면 가축으로의 몰락이다.
 
(136)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세우는 데 어떤 영감을 주는 진정성(authenticity)이나 자연적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면 아름다운 인간성의 자랑스런 신전이 솟을 것”이라는 ‘위험스런 꿈’은 적대적 변증법을 통해 유토피아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에 다름 아니다. 니체는 이것을 ‘선량한 원시인의 권리 찾기 운동’이라고 말하고 형이상학적인 운동이 그렇듯이 이 운동도 종국에는 ‘기진맥진한’ 사회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137) 니체는 사회주의 운동이 “과거 전제주의만이 소유했던 것과 같은 커다란 권력을 갈망할 뿐 아니라 개인의 명백한 근절을 기도함으로써 과거를 뛰어넘는다”고 말하고, 사회주의를 “전제주의의 공상적 동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사회주의는 “전례가 없을 정도의 예속을 필요로 한다.”
 
(138) 니체는 “서구 전체가 그 제도(민주주의)를 낳고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서 존재하는 다양성은 어떤 힘으로도 작동하지 못하고 모래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가축 떼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139) ‘체제(體制)’라는 말은 한자풀이 그대로 ‘신체를 통제한다’라는 뜻이다.
 
(142)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144)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147) 그리스인들은 인간들을 서로 적대적인 파멸의 전쟁 속으로 몰아넣는 여신은 악하다고 보았지만, 질투와 증오와 시기의 여신이라고 해도 인간들로 하여금 파괴적 투쟁이 아니라 경쟁의 행동(아곤적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신은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동시대인들과 경쟁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죽은 사람, 즉 자신의 선조들과도 경쟁했다. 특이하게도 아곤적 문화에서는 자신이 지나치게 성공하는 것을,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발전하지 못하고 자신과 경쟁할 만한 존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공이 신의 시기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148) “목표는 항상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은 제논의 비유에서 발빠른 아킬레스처럼 무한성의 장애에 부딪힌다. 그는 무한성의 방해를 받아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150) 위계 질서, 능력간의 거리, 서로 서로를 독립시키면서도 적대적으로 만들지 않는 기술, 어떤 것도 혼합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화해하지 않는 것, 그럼에도 혼돈과는 반대되는 저 거대한 변화는 비밀스런 과업이자 예술적 수완이다.
 
(152)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리를 초월적 기구에 양도하면 양도할수록, 가장 평균적인 자들의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대 다수자들의 지배에 만족하게 된다.” 우리는 권리를 양도하는 만큼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니체가 법과 관습, 문화에 대한 적대를 요구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전쟁이란 내가 주권적 능력을 그대로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생성적 힘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니체가 자주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쟁은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

격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일하면서 어떻게 스스로를 격변의 일부로 구성할 수 있는가, 전체성이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를 전체로 구성할 수 있는가, 동형론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국가적 전체성과 싸울 수 있도록 우리를 구성할 수 있는가.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 자연학+윤리학
 
(153) “나는 이 통찰을 길 위에서 얻었다. 그것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황급히 손을 뻗어 서투른 말(언어)을 사용해서 잡았다. 그러자 통찰력은 말라비틀어져 말에 매달리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응시하명서 내가 이 새를 잡았을 때 왜 행복한 느낌이 들었는지를 이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156)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들의 영속성과 통일성을 비판했던 인물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사물들이 변화한다는 것, 변화야말로 세계의 본질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161) ‘변화’는 힘의 앞지를 수 없는 본질”
 
(161) 이제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이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의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바로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이다.
 
(166)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167) 들뢰즈는 ‘능동적인 것(active)’ ‘반동적인 것(reactive)’이야말로 힘의 질적인 구분이라고 말한다. 능동적인 힘은 ‘시작하는 힘’이며 ‘공격하는 힘’이다. 반동적인 힘은 ‘비난하는 힘’이며 ‘상쇄시키고 흡수하는 힘’이다.
 
(167) 반동적 힘의 작동방식에 드러난 의지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능동적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잇는 것(능력)’을 박탈하는 것이다. 능동적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 그것이 반동적 힘의 내적 의지이다. 우리는 힘의 질적인 차이가 그 내면의 의지, 즉 권력의지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8) 능동적 힘은 “정면에서 공격한다.” 이때의 능동적 힘 역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다. 더 많은 것들을 생성시키는 것, 더 많은 거리들을 생산하는 것, 하나의 생성을 다음의 또 다른 생성의 디딤돌로 삼는 것. 그것은 반동적 힘의 내면에 있는 의지를 바꾼다.
 
(172-173)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욕망에 대한 또 다른 정의가 있는데, 그것은 욕망을 ‘생산’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때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이다. 욕망을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결핍된 자의 초조함과 넘치는 자의 즐거움은 너무도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 “나는 개개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
 
(173) 권력의지가 아닌 존재라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Ohnemacht)’, 다시 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176) 긍정의 권력의지는 “증오나 반감도 없이 오늘은 이것이, 내일은 저것이, 마치 공기의 가벼운 흔들림으로도 떨어지는 노란 나뭇잎들처럼 자신에게 이별을 고해간다. 어쩌면 그것은 이별을 고하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 우리의 행하는 바를 행하고, 우리가 방기할 것을 결정하자. ……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나의 신조이다.
 
(176-177) 긍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나는 약화시키는 것, 초췌하게 만드는 것 모두에 대해 아니오(de Nein)을 가르친다. 나는 강화하는 것, 힘을 저축하는 것, 힘의 감정을 긍정하는 것 모두에 대해 예(das Ja)를 가르친다.”
 
(178) 선(좋음)이란 무엇인가? 권력 느낌, 권력의지, 권력 자체를 인간 안에서 강화시키는 모든 것, 악(나쁨)이란 무엇인가? 허약함에서 비롯하는 모든 것. 행복이란 무엇인가? 권력이 증가하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
 
(178-179)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아보다도 큰 자기 자신(Selbst)이며, “제압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 그것은 힘센 명령자이다.” 같은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육체에 대해 느끼는 육체가 뛰어나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는 능력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 능력으로 지배한다.
 
 
제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 두 가지 반복과 두 번의 긍정
 
(182) “장례식의 비가(悲歌) 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 아닌가.” 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원자들의 해체가 죽음을 의미했다면 그것들의 조성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원자들의 놀이가 “하늘과 바다, 땅과 강, 그리고 나무와 동물들을 생성시켰다.” 그러면서도 반복은 “또 다른 것들로, 그리고 그 다른 것들은 또 다른 것들로 끊임없이 계속된다.”
 
(184) 니체는 생성의 세계를 도덕적 해석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한다. 생성의 세계는 무구(innocence)하다! 생성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헤라클레이토스( Heraclitus)!
 
(185) “나는 생성된 것의 처벌이 아니라 생성의 정당화를 보았다. …… 나는 생성 외에는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착각하지 말라! 너희가 생성과 소멸의 바다 한가운데 어디선가 확고한 육지를 본다면 그것은 너희의 짧은 시선 때문이다.”
 
(185)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물리적으로 표현하자면 불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유희이다.”
 
(185) 생성과 소멸, 건축과 파괴는 아무런 도덕적 책임도 없이 영원히 동일한 무구의 상태에 있으며, 이 세계에는 오직 예술가와 어린아이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다. 어린아이와 예술가가 놀이를 하듯 영원히 생동하는 불은 놀이를 하며, 무구하게 세웠다가 부순다. 영겁의 시간 에온(Aeon)은 자신과 놀이를 한다. 마치 아이가 바닷가 모래성을 쌓았다가 부수듯이 …… 이따금 그는 놀이를 새롭게 싲가한다.
 
(186)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다수이다.” 오, 위대한 세계의 어린아이 제우스 오, 위대한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
 
(188) 세계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이며,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고, 전체로서는 그 크기를 바꾸는 일이 없는 청동처럼 확고한 양이면서도 계속해서 변화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허한 게 아니라 힘으로서 편재하고, 힘과 힘의 파랑이 벌이는 유희로서 하나이면서도 다수이고, 여기서 모이면 저기서 감소하고, 광포하게 밀려들고 넘쳐드는 힘의 대양이다. 영원히 방황하면서 영원히 달음질쳐 돌아오는 회기의 세월을 거듭하여, …… 영원히 회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어떤 포만이나 권태, 피로도 모르는 생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 잇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189)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이다. 니체는 이것을 ‘주사위 놀이를 하는 세계’로 그리기도 한다. 주사위 놀이는 차라투스라가 영원회귀의 의미를 이해할 때도 등장하는 놀이다. 항상 자기로 귀환하는 놀이 주사위 던지기! 우리는 학자들에게 영원회귀가 왜 어려운 개념인지를 안다. 그들은 주사위는 잘 알고 있지만 ‘놀이’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91) 긍정의 권력의지는 회복기의 차라투스라처럼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한번 더!”라고 말한다. 그것은 반복하기를 원한다. 생성의 반복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기는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의 표현이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권력의지다.” 존재하는 것은 생성뿐이다. 그리고 생성만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생성의 반복을 의지하는(will) 것이다.
 
(192) 이제 ‘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긍정의 의지 편에서 서서 부정의 의지와 대결한다. 그것은 피로를 조장하는 의지, 무(無)를 의지하게 하는 의지와 대결한다. 따라서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부정의 권력의지로부터 그것을 구분해 주는 시금석 같은 것이다.
 
(194) “모든 노고는 무익하게 되었고, 포도주는 독이 되었고, 사악한 눈이 우리의 밭과 심장을 누렇게 태웠다. …… 우리는 재처럼 흩날리리라. 그렇다. 우리는 불 자체까지 지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샘들이 말라붙었고, 바다도 물러났다.” “진실로 우린 이미 너무 지쳐 죽지도 못한다. 이제 우리는 여전히 깨어 있는 채로 살아나간다. 바로 무덤 속에서.” 차라투스라가 제자에게 말한다. “이제 예언 속의 긴 황혼이 찾아오리라. …… 나의 빛이 이러한 슬픔 속에서 질식하지 않기를!”
 
(195) 생성 즉 시간을 긍정하기 위해서 차라투스라는 무엇보다도 과거와 대면해야 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의욕하고 있다면 그는 먼저 이미 지나간 시간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과거는 의지하는(will) 자들에겐 가장 큰 난관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지는 이미 행해진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력하다.
 
(195) “차라투스라여, 너는 정말로 멀리 돌을 던졌지만 그 돌은 네 위로 다시 떨어지리라!”
 
(196)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다. 공격하는 요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196-197) 차라투스라는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 과거를 생성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 개의 길이 만나는 출입구”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순간(Augenblick)’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순간이라는 입구에서 하나의 기나긴 길은 뒤로 달리고,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개의 시간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인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
 
(197) 순간들을 통해 볼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 속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며 경쟁하고 있는 시간이다.
……
“사유는 스스로의 역사를 생각하지만(과거), 그것은 사유가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현재), 마침내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기 위해서(미래)이다.”
......
차라투스라는 과거를 축복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과거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미래를, 그리고 미래의 건축물로 변형된 과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197) 니체는 순간들 속에서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197) “너무도 멀리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그리하여 내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다.”
 
(198) “고정되고 불멸하고자 하는 욕망,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 원인인가, 아니면 파괴, 변화, 새롭고 기묘함, 미래, 생성의 욕망이 원인인가? …… 영원화의 의지도 이중의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감사와 사랑으로 추진될 수도 있고, …… 깊은 병으로부터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두 가지의 반복, 두 가지의 영원성. 생성의 영원성인가, 존재의 영원성인가? 병에서 나온 것인가, 건강에서 나온 것인가? 난쟁이여, 세상이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고? 너는 병들었다! 하지만 나의 “파괴, 변화, 생성의 욕망은 미래를 잉태한 넘치는 힘의 표현이다. 이것은 나의 용어로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199) 나는 나의 늙은 악마이며 불구대천의 원수인 중력의 영도, 그리고 그가 창조한 것들, 즉 강제와 규정, 필요와 귀결, 목적과 의지, 선과 악을 재발견했다. 왜냐하면 춤춰 넘어야 할, 춤춰 건너야 할 대상이 존재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가벼운 자, 가장 가벼운 자를 위해서 두더지와 무거운 난쟁이들이 존재해야 되지 않겠는가?
 
(200)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deion)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praxis)이다.
 
(202) 나는 병에서 나의 더 높은 건강을 얻었다. 이 건강이란 병이 말살시켜 버리지 못한 것들에 의하여 오히려 더 강해지는 건강을 말한다. 나는 병에서 하나의 철학도 얻었다.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후의 해방자다. …… 그런 고통이 우리를 개선시키는지에 대해 의심스러울 때도 있으나 나는 고통이 우리를 심오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203) “부정과 파괴야말로 긍정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디오니소스의 사명에 대한 전제 조건은 망치의 단단함, 파괴에서 느끼는 기쁨이다.”
 
(204) 새로운 사원을 지으려는 자는 기존의 사원을 부수고자 한다. 새로운 가치표를 써넣으려는 자는 낡은 가치표를 지워야 한다.
 
(204)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205)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208) 주체란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이다. 주체 역시 건강 상태만큼이나 많이 존재한다. 대상들이 복수로 존재하는 것처럼 주체도 복수로 존재한다. 니체가 운명애(amor fati)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생성이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라!
 
(208) 우연은 창조적 힘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
 
(209) “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서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볼룹타스, voluptas)의 비밀의 세계.” 영원회귀의 유혹 – 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209) 나는 그들에게 지금은 소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바로 즐거움(Vita femina)이라는 것을.
 
 
제7장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215-216) ‘세계 대 인간’의 모든 태도……, 사물의 가치 척도로서의 인간, 마침내는 존재 자체를 자기의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는 그것을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는 심판자로서의 인간 – 이러한 태도의 정상을 벗어난 어처구니 없음은 그 정체를 드러내어 우리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인간과 세계’가 서로 병립되어 잇고, 따라서 ‘과’라는 귀여운 단어의 숭고한 뻔뻔함에 의해 분리되어져 있음을 발견할 때 웃지 않을 수 없다.
 
(216)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 “저 쪽으로 건너가기도 위험하고, 가는 중에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다.”
 
(218) 너희는 벌레로부터 인간으로 이르는 길을 걸어 왔으되 아직도 너희 내부의 많은 것들이 여전히 벌레다. 예전에 너희는 원숭이였고, 지금도 너희는 여전히 어느 원숭이보다도 더 원숭이인 것이다.
 
(220) 인간이 진화를 통해서라면 초인은 변신을 통해서 태어난다.
 
(220)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그가 바로 그 번개이며, 그가 바로 그 광기이다.”
 
(223)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나 강함이 초인간적인 것으로서, 밖에서 온 것으로 포착되고 있는 한 인간은 스스로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극히 가련하고 약한 면과 극히 강하고 놀라운 두 가지 면을, 두 가지 영역 가운데로 분열시키고, 전자를 ‘인간’, 후자를 ‘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225)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롰꺼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신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
 
(231)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232-233) “차라투스라는 춤추는 자이고 가벼운 자이다.” 보다 높은 인간들은 춤출 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은 중력의 정신에 대한 승리의 표시이다. 그것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높이 뛰기와 넓이 뛰기, 그리고 옆으로 뛰기이다.
 
(233) 디오니소스는 가벼움과 기쁨 자체이다. 그의 춤은 생성과 생성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고, 웃음은 다수성과 다수성의 단일성에 대한 긍정이며, 주사위 놀이는 우연과 우연의 필연에 대한 긍정이다.
 
(234) 초인은 신체의 변신이며 “새로운 느낌 방식”이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 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235) 나는 첫 번째 말고도 두 번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니 아마 세 번째 얼굴도 있는지 모른다.
 
(237) 나와 내 작품은 별개의 문제다. …… 나를 다른 사람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나를 나 자신과 혼동해서도 안된다.
 
(239)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240) 완벽한 독자를 상상해 보면 그 완벽한 독자란 항상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로 변하곤 한다. 게다가 그는 순종적이면서도 교활하고 조심스럽다. 그는 또한 하나의 타고난 모험가요 발견자이다.
 
(244) “새로 쟁취한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낡은 것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배를 불태워 버렸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용감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247)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듣는 아리아드네.” “망치를 든 파괴자”이자 “춤추는 무희”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자, 차라투스라!
 
(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 프리드리히 니체”
 
(252)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nomad thought)’이다. 유목민이란 여행자이며 외부자이다. 그러나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253)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Nitimur in vetitum!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253)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2부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4. 내가 저자라면

고병권의 이 책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 마음 속에 모호하게 떠다니던 것들, 그 흔적과 자취들이 하나의 형상이 되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이해하지도 못하는 '차라투스트라…'를 읽던 어느 밤이 떠올랐다. 그 잠 못 이루는 새벽, 캄캄한 밤하늘과 밤바다가 떠올랐다. 그 시절의 나는 무엇 때문에 그리 심각했던 것일까? 그 시절의 나, 아니, 지금의 나도 혹시 심각한 것이 심오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의 모든 고민을 껴안은 듯 인상을 찌푸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대학교 1학년, '철학 개론'을 듣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이것을 넘어, 바로 이 순간 너머, 이 세상 저 편, 구름 저 너머에 바로 그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우리가 다가갈수록 또 그만큼 먼 곳에 있기에, 그러나 아무리 헛된 노릇이라 할지라도, 구름 저 편을 항해 가려는 그 노력은 아름답지 않는가.'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며 니체가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구름 저편에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는 그 어리석은 생각이 우습기 짝이 없구나. 넌 참 인간적이구나!' 니체가 말하는 철학이란 '단 하나의 진리'를 찾아가는 여행이 아니다.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다. '결코 변하지 않는 그것'이 아닌, 그 무수하고 늘 변화하는 생의 열매들을 찾아나서는 모험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천 개의 새로운 시선과 천 개의 새로운 길을 향한 모험의 출발점을 제공해준다. 여행의 시작이 되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고병권이 번역했던 '한 권으로 읽는 니체'의 저자들이 이야기하듯이 "프리드리히 니체는 역사상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가장 잘 이해되고 있는 철학자의 한 사람은 아니다." 이 책은 바로 그 거대한 니체라는 문을 여는 열쇠를 우리의 손에 쥐어준다.

자신이 번역했던 책(한 권으로 읽는 니체)의 끝에서 고병권은 이런 아쉬움을 표시한다. "이 책은 소극적이다. 이 책은 니체의 괴물 같은 이미지를 순화시키려고만 했지, 니체를 우리 시대의 진정한 괴물로 만들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저서인 이 책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어느 정도 그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듯 하다. 니체가 다뤘던 다양한 주제들을 통해 니체의 다양한 'N개의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 내 수준에서 이 책의 내용을 평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의 뒤엔 가볍고도 단단한 니체가 웃으며 서 있기 때문이다. 니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섣불리 이 책을 비판하려 들지 말자. 그리고 나와 같이 니체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니체라는 유쾌한 거인이 전해주는 가슴의 떨림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그리고 만일 이 책을 읽으면서 니체를 읽는 '괴물'같은 독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면, 자신의 타고난 '모험가'나 '발견자'로서의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리라.

이 책은 또한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글쓰기가 아닌, 기존의 세상을 해석하는 글쓰기, 심오한 사상의 구축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닌 유희로서의 글쓰기. 가령 고병권의 이 책이나 들뢰즈의 글쓰기와 같은 것. '일종의 계간을 통해 사생아를 만들어 내는' 글쓰기, '해석된 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해석'으로서의 글쓰기. 이리 저리 날아다니며 꿀을 모으는 나비처럼 달콤하고 행복한 글쓰기.

고병권은 자신의 책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에서 세상의 책들을 상대로 4가지 등급을 매긴다. 첫번째는 '세계를 변혁하는 책'이다. 마르크스나 니체의 책이 여기에 속할 듯 하다. 두번째는 '세계를 해석하는 책'이다. 그는 '모든 해석은 창조'라는 니체의 말을 통해, 해석 또한 세계를 바꾸는 변혁에 한 발을 들여 놓은 것이라 평가한다. 세번째는 '세상을 반영하는 책'인데, 이런 책들은 '세계의 건강상태를 알게 해준다. 네번째는 세계를 낭비하는 책이다. 이런 책들은 이 세계에 치명적이다.

나는 과연 어떤 책을 쓸 것인가? 물론 시대를 관통하는 위대한 책, '세계를 변혁하는 책'을 쓰고 싶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주사위를 던지는 수 밖에 없다. 아마 당분간은 '세계를 낭비'하거나, '세상을 반영'하는 책을 쓰는 것에 머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 높이, 더 높이 주사위를 던져 올릴수록 위대함의 가능성에 가까워지리라. 떨어져 내리는 주사위는 나약한 나를 부술 것이고, 무너진 나는 또다시 자신을 일으키리라.

자신만의 칼을 갈아라. '차이에의 열정'으로 그 칼을 담금질하라. 언제나 칼을 뽑아 싸울 수 있도록 준비하라. 아곤적 경쟁 속에서 살아 남아라. '화약 냄새를 풍기지 않는' 치열한 전쟁을 치러라. 단단한 망치로 낡은 것들을 부숴버리고 끊임없이 창조하라. 다시 한번 부딪혀라.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

니체의 말처럼 우리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초인) 사이의 밧줄'이다.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 위대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다리라는 점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위버멘쉬를 향해간다. 그러나 위버멘쉬는 진화의 최종단계가 아니다. 인간적인 것의 몰락을 통한 끊임없는 변신일 뿐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과정이고,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즐거운 어린 아이로 변신해가는 여정이다. '정체성을 극복하는 정체성', 그것이 바로 위버멘쉬의 정체성이다.

"그렇다, 창조하는 자들이여, 너희의 삶에는 쓰디쓴 죽음이 무수히 많아야 한다."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익지 못하는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자,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 죽을 준비가 되었는가?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5. 아주 짧은 에필로그

때 아닌 미래는 불현듯 다가와 현재가 된다. 텅 빈 하늘, 하얀 자작나무들, 천 개의 눈을 뜨고, 천 개의 귀를 연다. 천 개의 입을 벌리고, 천 개의 노래를 부른다. 내쉬는 하얀 호흡마다 천 개의 새로운 미래가 돋아난다. 천 개의 하늘과 천 개의 계절이, 따스한 한 줌 햇살처럼 잠시 머물다 스쳐간다.


IP *.249.16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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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0.16 09:55:15 *.128.229.81
도윤이가 이 책을 좋아하는구나.
프로필 이미지
도윤
2007.10.16 10:33:12 *.249.162.56
예, 일요일 하루종일 뒹굴거리며 즐겁게 읽었습니다.^^ 청량한 가을 하늘과 어딘가 설레는 가을 바람에 어울리는 책이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alice
2007.10.16 10:35:59 *.60.237.51
어제 잠시 훑어 보면서, 예전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들이 드문드문 떠올랐습니다.
먼가 마음이 동하는데, 쉽게 발을 담가지지가 않았던 느낌.
대꾸를 하고싶은데 말이 떨어지지 않던 기분.

'니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섣불리 이 책을 비판하려 들지 말자. 그리고 나와 같이 니체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니체라는 유쾌한 거인이 전해주는 가슴의 떨림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참 어울리는 때에 좋은 글 읽으셨네요. 저도 잠깐 느껴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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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0.16 17:45:50 *.249.162.56
앨리스님, 그러네요...

머리로 명쾌하게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무언가 심연의 지평 너머를 본 듯 가슴 떨리는 느낌, 그게 제가 느꼈던 니체의 매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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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 호모 루덴스 / 요한 호이징하 호정 2007.10.22 2655
1109 혼자 힘으로 백만장가 된 사람들.. 흐르는 강물처럼... 2007.10.21 2185
1108 놀이와 문화에 관한 연구 -호모루덴스(호이징하) 우제 2007.10.21 3489
1107 호모 루덴스 / 요한 호이징하 [2] 香仁 이은남 2007.10.21 2295
1106 [호모 루덴스] 놀고 있어도 놀 줄을 모른다. [2] 여해 송창용 2007.10.20 2186
1105 내 잔이 넘치나이다 두디스 2007.10.18 2583
1104 바라는대로 이루어진다 [11] 한명석 2007.10.18 3799
1103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고병권 [7] 海瀞 오윤 2007.10.16 2557
1102 [독서28]②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素田 최영훈 2007.10.16 2353
1101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을 읽고 [3] [1] 현운 이희석 2007.10.16 2745
1100 [독서28]①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素田 최영훈 2007.10.16 2221
1099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 고병권 [1] 素賢소현 2007.10.16 2310
1098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고병권 [3] 우제 2007.10.16 2316
1097 [리뷰025] 니체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4] 香山 신종윤 2007.10.16 2283
» (27)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4] 時田 김도윤 2007.10.16 2367
1095 [28]모든 것에서 즐기고, 모든 것에서 떠나라-[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교정 한정화 2007.10.16 2370
1094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2] 香仁 이은남 2007.10.16 2412
1093 [28]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2] 써니 2007.10.16 2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