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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6일 09시 02분 등록


왜 고병권인가? 어째서 니체가 아니고 그의 헤르메스, 고병권인가?

'서울대학교 화학과 졸업'

책의 날개에 적혀 있는 저자 고병권의 약력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일부 사람들에게는 엘리트 자연과학도에서 맹렬한 사회과학자로 변신한 저자, 고병권에 대한 호기심이 니체를 향한 그것을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작 니체의 책은 잘 읽히지 않고 있는 순간에도 니체의 이야기를 다룬 그의 책은 열심히 팔려나갔는지도 모른다.

니체에게 해석은 지배적 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p. 113)

그렇다면 니체에게 마음을 빼앗긴 자연과학도 출신의 사회과학자는 그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니체의 균열을 파고 들어가겠다는 것일까? 사부님은 그 균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저자에 대한 자료를 찾다 보니 '연구공간, 수유+너머'라는 모임을 피해갈 수 없었다. 어렵지 않게 찾아 들어간 그 공간의 웹사이트(http://www.transs.pe.kr/)에서 발견한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주십시오!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좋은 앎과 좋은 삶을 일치시키는 연구자들의 생활공동체입니다.'라는 간결한 소개글은 이 모임의 성격과 하는 일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 처음 웹사이트에 접속하면서는 '수유+너머'에 대한 거창한 '뜻'과 구체적인 '길'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들을 공간의 전면에 배치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단지 이곳에서 묵묵한 실천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행'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이 곳의 설립자이자 추장인 '고미숙'과 함께 공동 추장을 맡고 있다. 난데 없이 '추장'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하고 찾아보니 그는 그의 책,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웬 고추장? 책 제목의 고추장은 된장과 더불어 한국 음식 맛을 살려온 그런 장(醬)이 아니다. 고추장은 연구실(연구공간 수유+너머)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말이다. 내가 ‘고’(高)씨이고, 연구실 내 직책이 ‘추장’(酋長)이다 보니, 고추장이 된 것이다. …… 우리는 ‘대표’(代表, representative)라는 말을 싫어 한다. 누가 누군가를 대표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표해서도 안 된다는 게 우리 생각이다.

이것 참 기발하다. 처음에 '연구공간, 수유+너머'라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답답하고 고루한 인문학 모임의 이미지가 '고추장'에 대한 설명 하나로 말끔히 일소되어 버렸다. (사람이 이렇게 단순해서야…) 그의 독특한 약력과 그가 현재 몸으로 보여주는 공동체의 실천을 보고 있노라니, 이 책의 선정 이유는 '니체'에 앞서 '고병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체에 홀딱 반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자연과학도. '고병권'이 니체의 헤르메스가 아니라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찾아낸 미세한 조각들을 집어넣고 보면 사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p. 3~4)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p. 4)

하나의 현실이 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다른 현실을 꿈꾸는 자의 사상은 광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p. 4)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p. 5)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p. 6)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p. 7)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p. 7)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p. 7)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도리 것이기 때문이다. (p. 8)

2. 천 개의 길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p. 18)

4. 천 개의 젖가슴
과학적 인식이라고? 가치 중립이라고?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고, 양성 공유자도 아니고, 다만 중성일 뿐인 인간들, 성적 불능자들." 대낮같이 밝은 인식을 떠들면서도 밤만 되면 열린 창을 훔쳐보기 위해 지붕 위를 싸돌아다니는 수고양이들 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는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항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오르는지"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p. 19)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이 있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p. 27)

"철학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말을 내뱉은 철학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진단이 끝나자 니체는 이렇게 처방한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힘, 생명 같은 것을……" (p. 28)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한 니체의 입장은 저 유명한 『에티카』의 저자의 입장과도 같은 것이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그러나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을 반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은 반박되어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치료받아야 할 존재다. (p. 31)

"내가 (문을 지나다니기 위해) 몸을 굽히지 않아도 되는 곳, 소인들 앞에서 내가 더 이상 몸을 굽히지 않아도 되는 나의 고향으로 나는 언제 돌아갈 것인가?" (p. 34~35)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실레노스의 지혜를 과감하게 바꾼다.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삶' 때문이 아니다. 고통은 오히려 '삶으로부터의 이탈', 즉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나쁜 것은 곧 죽는 것이고, 다음으로 나쁜 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가장 위대한 영웅일지라도 더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삶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 고통은 그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p. 37)

오이디푸스가 수동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프로메테우스는 능동적으로 죄를 범한다. 불을 훔친 범죄자 프로메테우스는 영웅으로 받들어진다. '누가 오이디푸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라고 묻는 그리스인들은 이제 프로메테우스야말로 우리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p. 38)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거쳐 니체가 디오니소스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을 때, 디오니소스는 차이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신이 되어 있었다. 괴로워하기는 커녕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수성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p. 41)

"그대가 신앙을 가질 때까지 신앙을 설교하라. 그 다음부터 그대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설교할 것이다. (p. 50)

"도덕적 개념에서는 피와 고문의 냄새가 완전히 씻겨진 적이 없다." (p. 50)

어떤 사상이 자신에 부합하는 삶을 생산해내는 과정은 폭력과 훈련을 동반하고 있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철학은 이 괒어에 동원되어 왔다. 철학은 군대가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고 난 뒤에 사람들의 정신을 길들이고 길러내는 작업을 수행해왔다. 니체가 철학자를 "국가가 신하를 기르기 위해 베풀어주는 관직"이라고 비꼬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어용철학자로 존재하는 것을 감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리 위에 더 높은 단계, 즉 국가가 있다는 것을 승인해야 할 것이다. (p. 50)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p. 52)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p. 54)

"변증법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품성을 잃어버린 자가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움켜쥐는 마지막 필사의 무기다." 이런 식의 진리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추하다. 진리와 사랑에 빠진 철학자, 그는 '현인'이기보다는 '지혜의 친구'여야만 한다. (p. 57)

삶을 변화시키는 예술로서의 철학,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일까? 철학은 철학을 떠난 사람들의 철학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철학의 지반을 떠난 맑스(Marx), 다 쓰고 난 인식의 사다리를 버린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말하고 있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실천'은 철학에게 보내는 어떤 신호가 아닐까? '삶을 바꿔 보라!" - 철학을 떠난 철학자들이 철학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 (p. 59)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도덕에는 소심함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 그래서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고 불렀다. (p. 63~64)

탐사자는 용기 있는 것 못지 않게 박식해야 한다. 파편 하나도 세심하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쉽게 지나치는 것을 그는 꼼꼼하게 보아야 한다. (p. 64)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이 특정한 환경과 계급, 교회, 시대 정신, 풍토에서 나온 도덕적 가치 판단을 일반화하는 무모함을 가져온다. (p. 72)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좋은(Gut/Good)'을 '누가' 판단하느냐이다. 우리는 보통 무언가를 받는 사람이 그것의 '좋음'의 여부를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니체는 '좋음'의 판단은 '좋은 사람들' 자신에게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고귀한 사람들은 비속한 자들과 달리 자신이 창조한 가치에 이름을 붙일 권리를 가진다. (p. 74~75)

'좋은(Gut/Good)'은 '고귀한' 혹은 '귀족적인' 등의 개념을 기본으로 해서 변형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와 병행해서 '평민적인', '비속한', '저급한' 등의 개념이 '나쁨(Bose/Bad)'의 개념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이때의 '나쁨'에는 아무런 비난의 의미도 들어 있지 않았으며, 단지 귀족적인 것과 대비하여 소박한 것, 평민적인 것을 지칭했을 따름이다. (p. 75~76)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야말로 약한 자이다. (p. 77)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pathos of distance)"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p. 78)

자신이 자신의 활동을 억제할 수 있다는 말은 매우 불합리하다. 억제하는 자신과 억제되는 자신이라는 분리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가? 니체는 그 이유들 중의 하나로 언어의 유혹을 든다. '번개가 친다'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주어를 쓰고자 하는 유혹 때문에 '번개'와 '섬광'을 분리하고, '섬광'을 '번개'라는 주체의 행위라고 생각하는 일이 일어난다. (p. 80)

양들의 끔찍한 상상을 보라! 이교도들이 고문 받는 장면을 상상하며 기뻐하는 '착한' 양들의 정신 세계는 온갖 잔악함으로 가득 차 있다. (p. 81)

"형벌은 오히려 양심의 가책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준다. 감옥에 들어온 자가 깨닫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지'하는 조심성이다." (p. 83)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p. 83)

기계적인 활동의 도입, 생각 없는 반복적 활동을 통해 병을 내면화시킨다. 성직자들이 '노동의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분석했던 바대로 니체는 노동이야말로 충동을 억누르는 훌륭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자신의 생활에 사악한 충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생활을 꼼꼼하게 계획하고, 계획표대로만 생활한다. "완전한 자기 망각, 단호히 고정된 생활 양식, 완전히 짜여진 시간, 그리고 그것을 위한 훈련." (p. 86)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 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성직자들은 인간들이 '개선'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과연 '개선'된 것인가? 짐승은 단지 덜 위험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공포감과 고통, 상처, 굶주림이 야수를 병약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p. 87)

니체는 자신이 인정한 덕은 "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Virtus)"이라고 말한다. (p. 88)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p. 103)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p. 111)

니체에게 해석은 지배적 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p. 113)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승리에 대한 증명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실패에 대한 예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의 실패는 혁명 때문이 아니라 노쇠함 때문이겠지만…… . (p. 122)

고대의 국가가 전쟁에서 기원한다면 근대의 국가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에서 등장한다. 모두가 지쳐 더 이상 전쟁을 포기할 때, 새로운 우상인 국가가 등장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어보자. "너희는 전쟁에서 지쳤고 이제 너희의 피곤함이 이 새로운 거짓 신에게 봉사한다. …… 너희가 국가, 그 새로운 거짓 신을 숭배할 때 국가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하리라. 그렇게 해서 국가는 두 눈의 심안을 매수하는 것이다. ……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가 음독자가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p. 131)

이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자들은 법률 속에 있는 폭력, 모든 종류의 속에 있는 냉혹함과 이기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제도는 그것이 이룩되자마자 자유주의적이기를 그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제도보다도 더 철저하게 자유에 해가 되는 것은 없다. …… 자유주의 그것은 쉽게 말하면 가축으로의 몰락이다. (p. 135)

정치에 연관된 말 중에서 신체에 대한 비유가 많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터너(Turner)에 따르면 특히 '다이어트(diet)'라는 단어만큼 좋은 예가 있다. 우리는 다이어트를 체중감량을 위한 식이요법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나, 원래 이 말은 그리스어 'diaita'에서 온 것으로 그 의미는 '삶의 총체적인 양식(total mode of life)'이었다. 그리스 의학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는 크게 네 가지 체액(humours)의 균형 체제인데, 다이어트는 이것들의 균형을 맞추라는 의학적 처방이었다. 네 가지 체액은 각각 운동, 섹스, 수면, 사회적 관계에 관여하는 것으로, 병이 생기는 것은 운동이나 섹스, 수면 사회적 관계가 과도하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이어트의 라틴어 어원은 'dies'인데, 이것은 영어의 'day'에 해당한다. 이는 다이어트가 시간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실제로 '정치적 다이어트(political diet)'라는 말이 생겨났고, 정치와 관련된 행사들은 특정한 날들, 즉 달력(calendar)을 통해서 배치되고 통제되었다. 우리가 체제라고 말하는 'regime'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regere'에서 온 것으로, 의학적으로는 조절된 다이어트(regulated diet)를 포함하는 의료체계를 의미했다. (p. 140)

노동이 칭찬 받고 노동의 축복에 관하여 지치는 일도 없이 이야기되는 경우…… 나는 저의를 본다. …… 노동을 바라볼 때, 현재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것, 노동은 각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방해할 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사회는 노동을 통해 보다 안전해질 것이다. (p. 142)

잔인한 형벌은 '기억술'을 위해 동원된다. 니체가 예로 들고 있는 17세기 독일 형벌의 잔혹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돌로 죄수의 머리를 내리치는 형벌, 수레바퀴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 말뚝으로 꿰뚫는 형벌, 가슴살을 저미어 내는 형벌, 범죄자에게 꿀을 발라 파리 떼가 달려들게 하는 형벌 등. 이 광경을 모든 시민들이 목격하게 함으로써 "나는 그것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하고, 그것을 기억에다 새겼다." 니체는 이 작업을 '기억할 수 있는 동물 기르기'라고 명명한다.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의 행동은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만큼의 '계산 가능성'을 높여준다. (p. 143)

전쟁이란 내가 주권적 능력을 그대로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생성적 힘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니체가 자주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전쟁은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 (p. 152)

"나는 이 통찰을 길 위에서 얻었다. 그것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황급히 손을 뻗어 서투른 말(언어)을 사용해서 잡았다. 그러자 통찰력은 말라비틀어져 말에 매달리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응시하면서 내가 이 새를 잡았을 때 왜 행복한 느낌이 들었는지를 이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p. 153)

우리는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와 레우키포스(Leucippus)의 원자론이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p. 155)

불행히도 '우리'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다.

니체에게 강함은 어떤 것이었는가?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학,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p. 16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p. 176)

선(좋음)이란 무엇인가? 권력 느낌, 권력의지, 권력 자체를 인간 안에서 강화시키는 모든 것, 악(나쁨)이란 무엇인가? 허약함에서 비롯하는 모든 것, 행복이란 무엇인가? 권력이 증가하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 (p. 178)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다수이다." 오, 위대한 세계의 어린아이 제우스 오, 위대한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 (p. 186)

새로운 생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데아의 세계처럼 영원 불멸하는 곳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유는 어떤 생성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p. 187)

"우리는 모든 것이 세계의 중심을 향해 싸운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p. 207)

나는 그들에게 지금은 소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바로 즐거움이라는 것을. (p. 209)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다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p. 222)

"나의 죽음을 나는 너희에게 권장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에게 오는 죽음을."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p. 231)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p. 231)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p. 23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p. 233)

"치료하는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위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increscunt animi, virescir volnere virtus);" (p. 247)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p. 250)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가장 조용한 말이다." (p. 252)

근대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선대업자들이 즐기는 시간은 낭비의 시간이었고 신을 욕되게 하는 시간이었다. 반대로 삶을 즐길 줄 모르고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재화만을 축적하는 근대인들의 태도는 선대업자들이 보기에는 완전히 또라이 짓이었다. (p. 264)

합리성이란 프로테스탄트로 대표되는 근대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가치들을 위해 제 안에 있는 욕망과 능력을 효과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이었다. (p. 287)

답은 대개 질문들 뒤에 숨어 있다. 그것은 질문들과 동떨어진 채 답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그 답의 형식과 내용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p. 294)

주체 생산 공간으로서의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왈쩌(Walzer)나 테일러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단순히 인간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공동체, 바로 문화적이고 언어적이며 종교적인 공동체 등에 의해 규정된다고 지적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숙고해서 선택하는 연합체란 일종의 '악성 유토피아'일 뿐이다. 우리는 항상 미리 존재했던 '비자발적 공동체'에 들어가 있다. (p. 310)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멀리 떨어진 것도 없다. (p. 320)




핑계라면 핑계지만, 나처럼 공학(산업공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인문학, 그 중에서도 철학은 무거운 이름이다. 새로운 기술과 화려한 테크닉으로 단단히 무장한 채 이리저리 잘난 척 달려나가다 보면 항상 '인문학'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철학에 무릎이 깨지기 일쑤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딘지 모르게 속이 텅빈것 같다는 뜻이다.

만약 변화경영연구소를 만나 지금처럼 연구원이 되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인문학과 철학이라는 존재는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몇 개월에 걸친 읽기와 쓰기의 여정에서 내 밑천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기존의 것과 새 것을 연결하고 그 가운데에 변화와 창조를 이끌어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겐 기존의 것이 너무 적었다. 그래서 난 읽고 쓰는 동안 끊임없이 허기를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철학에 대한 허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더해 내 철학에 대한 허기를 부추긴 것은 사부님의 글 한 조각이었다.

철학사를 뒤적여 가장 매력적인 철학자 한 ‘분’을 골라라. 그 ‘분’에 관한 책 두 권을 정독하여 그 ‘놈’으로 만들어라. 철학은 땅으로 내려와야 하고, 좋은 스승은 반드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함께 할 수 있다.

삼십 대에 해야 할 일곱 가지 일 중에 첫 번째로 사부님은 철학을 넌지시 권했다. 이래저래 때가 익었다. 더 이상 철학에서 도망갈 곳은 없었다. 아니,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내 인생에 가슴으로 만나야 할 첫 번째 철학자로서 니체는 완벽한 파트너였다. 나의 니체 읽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문에서부터 쏟아지는 니체의 아포리즘에 나는 전율했다. 놀라운 언어의 유희와 날카로운 통찰은 왜 많은 이들이 니체에게 열광하는지 분명히 말해주었다. 날카로우면 차갑기 마련이고, 따뜻하면 무디기 일쑤인데, 그의 언어는 따뜻한 칼로 단번에 가슴을 베고 들어왔다.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그가 나의 늦은 출발을 위로했다. 그는 행복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하라고 속삭였고, 나는 철학을 시작하고 행복해지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는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을 걷도록 나를 떠밀었고, "태양을 향해서 부풀어 오르는 천 개의 젖가슴'에 입맞추고 싶은 열망 속으로 나를 처넣었다. 나는 책의 초입에서 주저 없이 니체에게 빠져들었다. 그것은 니체의 뜻이라기보다는 니체의 헤르메스, 고병권의 의도였다. 니체의 입을 빌어 저자가 말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니체가 고병권의 헤르메스였는지도 모르겠다.

책 도입부의 흥분이 잦아들면서 저자는 니체의 면면을 차근차근 풀어놓는다. 니체는 "철학은 얼마나 건강에 도움이 될까?"라고 묻는다. '가치의 가치'와 '철학의 철학'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철학은 결국 삶을 사랑하는 철학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니체의 앞에서 스크라테스와 그리스도의 죽음은 디오니소스의 그것과는 달리 유죄였다.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는 반대로 니체는 철학이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니체의 계보학과 해석학에 대한 두 개의 장을 건너는 동안 나는 책의 초반과는 조금 달라진 니체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조금 더 날카로웠다. 그는 강한 것과 약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살피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의식의 사각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또 그는 도덕을 동물원에 비유함으로써 나의 야성이 봉인되어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길들여진 나의 야성에 분노했다.

나는 여기까지 진심으로 니체의 이야기를 즐겼다.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연인이라 해도 생활의 문제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악을 쓰며 달려들면 그 순간, 낭만과 교감은 사라진다. 나는 저자가 니체의 입을 빌어 정치를 이야기하는 딱 그 자리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때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스스로의 무지를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건 꼭 나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고 말하는 저자와 '정치'라면 보던 텔레비전 뉴스도 확! 꺼버리는 '나' 사이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정치만큼 멀리 떨어진 것도 없다'라고 뒤이어 말하는 것을 보면 저자도 이 점을 아주 모르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정치에서 놀란 나는 '권력의지'와 '영원회귀'에서도 꽤나 고전했다. 그러다가 니체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은 소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바로 즐거움(Vita Femina)이라는 것을.

니체는 어느새 초반의 따뜻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익숙한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이 익숙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제서야 겨우 찾았다. 어느 새 누군가의 일부가 되어 그 작품 속에 녹아 있던 이 '춤을 춘다'는 아름다운 표현의 원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넓은 바다를 항해하다 길을 잃을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고 북극성을 바라보듯이 나는 책 속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사부님을 떠올렸다. 그리고 책의 곳곳에서 사부님의 흔적을 찾아냈다. 책 속의 '변화'는 때때로 니체의 것이었고, 또 때로는 저자와 사부님의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나의 것이 되었다. 온전히 내 것이 되면 그때 비로소 춤을 추게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춤을 추기 시작하면 결국 내 것이 되기도 한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자신을 찾아 얼마쯤 떠나왔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서 내가 다시 머물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시 훌훌 떠날 채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뛴다. 그 '분'을 그 '놈'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좀더 가까이서 만날 용기가 생겼다. 헤르메스의 해석을 거치지 않은 맨 얼굴의 니체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아~ 이건 정말이지
너무 어렵다. 저자는 "우리는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와 레우키포스(Leucippus)의 원자론이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p. 155)"라고 말하지만 그 '우리'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으리라 전제한 그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당연히 어려울 수 밖에. 거기에 어렵고 복잡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단어의 연속 공격과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는 신묘한 문장들은 나를 완전히 쓰러트렸다. 인용으로 처리된 니체의 글보다 그것을 풀어 설명하겠다는 고병권의 문장이 나에게는 몇 배나 더 어려웠다. 원본보다 어려운 해석이라면 어쩐지 수상하다.

아~ 이건 뭐야?
제 2부라는 이름으로 따라붙은 2개의 장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신)니체주의자라는 표현이 잠시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고, 이 2장에서는 책의 전반부와 별다른 연결점을 찾을 수 없다. 그나마 그 중에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의 엉뚱한 등장이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 2개의 장이 니체에 대한 집중도를 분산시킨다. 차라리 이 부분은 삭제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아~ 도대체 어디까지가
니체야? 대부분 인용의 출처가 표시되어 있고, 따옴표 등으로 분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모호한 경계가 발견된다. 이 모호함으로 인해 니체의 목소리는 저자의 목소리와 불분명하게 섞여버렸다. 덕분에 니체의 원작에 대한 갈증은 증폭되었다.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의 니체를 만나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은 이 책에서 받은 또 하나의 선물이다.

IP *.227.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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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10.16 09:06:04 *.227.22.57
아~ 오늘 회사에 중요한 손님이 오는 관계로 쓰자마자 살펴보지도 못하고 바로 올립니다. 시간내서 다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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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0.16 09:19:11 *.128.229.81
응, 좋아. '내가 저자라면' 좋아. 질문이 있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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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향기
2007.10.16 11:07:39 *.109.100.237
수고많으셨어요...그나저나 이번주가 걱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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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0.16 13:06:34 *.249.162.56
책이 어렵다고 하시더니, 그래도 잘 풀어내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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