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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6일 09시 49분 등록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 고병권 (소명출판사)

1. 저자에 관하여

저자가 쓴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저자를 더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저자를 잘 알아야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습관처럼 작품들 밑에 있는 동일한 저자를 떠올리거나 저자의 생애에서 작품들의 근거를 찾아보곤 한다. 그러나 활동의 순간마다 표현되는 자아를 항상 동일한 이름 아래 가두어 둠으로써 그 변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단일 주체에 대한 환상’처럼 다양한 여러 작품들을 단일한 저자의 이름아래 위치시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236]

저자는 니체의 힘을 빌려 자기를 살핌에 있어서도 이 표현이 적용되기를 원했다. 나도 그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책의 표지에 나타난 그의 사진에 넘어가지 않기로 약속했고 그의 숨길 수 없는 니체 사랑에 그의 전체 모습을 보지 않기로 했다. 말하자면 그를 직접 대면하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현재의 그를 엿보기로 했다. 그가 머무른다는 <수유연구소 +공간너머>도 기웃거려보고 그가 강의하는 Art and Study에서 그의 청년 같은 모습도 만나보았다. 그러나 종합해 보건데 10개의 눈도 가지지 못한 나의 눈으로 본 그는 니체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그의 창조성으로 나타난다.

-- 저자 고병권의 니체 사랑 훑어보기--

“비둘기 걸음으로도 폭풍을 불러올 줄 아는 사람. 혁명에 웃음을 선사한 사람. 이름은 너무 익숙하지만, 그 사유는 여전히 낯선 사람. 니체, 그의 전복적 사유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그(고병권)는 니체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친구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더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친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친구를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힘들다.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전쟁을 불사하는 것이다. 최면을 걸어서 아름답게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그 대상을 뜯어고치는 일이다. 친구가 된 뒤에도 친구에게는 푹신한 침대가 되지 말고 딱딱한 야전 침대가 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미 니체라는 친구를 창조해 놓았다. 그가 강의하는 Art and Study에서는 니체라는 친구를 사정없이 해부하고 있다. 니체가 루 살로메를 사랑한 것 이상으로 저자는 니체를 사랑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니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온전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힘을 가지자고 했지만 역설적으로는 그가 창조해 낸 그의 친구 니체는 필요이상으로 저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랑은 철학적 사유의 시작이라고 했다. 하기야 사랑 없이 무슨 힘으로 이렇게 끝없이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겠는가! - 니체를 만나서 그 의 사유의 전복을 온전히 즐겨보라고.

저자 고병권을 통해서 니체를 다시 만나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저자가 던진 주사위는 니체를 자기 자신으로 귀환하게 했다. 또한 니체가 만들어 낸 사유의 즐거운 전복에 앞서 저자가 재탄생시킨 니체는 삶을 새로운 실천방식으로 끌어안는다. 보듬고 쓰다듬는다. 삶은 니체 안에서 희열에 휩싸인다.

-- 저자 그는 누구인가. --

서울대 화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사회학과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주요 논문으로는 「니체 사상의 정치 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 「틀뢰즈의 니체: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 「투시주의와 차이의 정치」 「노동 거부의 정치학: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이 등이 있다. 현재 학문자율공동체 ‘수유 +너머' 대표.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주로 니체를 동반하고 나타난다.

저서
-『화폐, 마법의 사중주』그린비, 2005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린비, 2003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세종서적, 2001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소명출판, 2001

2. 가슴에 들어온 글귀

[표지 글]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과잉이 문제인가 결핍이 원인인가?” 당신이 지금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인가 생의 빈곤 때문인가?” 당신은 지금 “어떤 사막도 옥토로 바꿀 수 있을 만큼”풍성한가. 아니면 “어떤 옥토도 사막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 메말라 있는가?

[18]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개의 건강과 천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27]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 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은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27]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 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31]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 쓰일게 아니라 발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한 니체의 입장은 저 유명한 ‘에데카’의 저자의 입지과도 같은 것이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그러나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을 반박하려 들지 않는다. 이들은 반박 받아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치료받아야 할 존재들이다.

[33]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내었다.

[37] 가장 위대한 영웅일지라도 더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삶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 고통은 그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41]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신과 대비시킨다. 디오니소스 대 그리스도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자, 삶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을 제공한 자, 이 반 기독교적 스승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부른다.

[45] 철학자들이 삶을 개념으로 포착할 때 그것 역시 일종의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사유의 공간이 극장이며 그들이 세운 체게는 무대이고 개념들은 장치이다. 니체가“체계를 세우려는 자들의 연극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일차적으로 겨낭하고 있는 것은 이론적인 인간, 즉 철학자들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극장이 전형이다.

[49]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 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 받아야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52] 광인으로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그러한 구속을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신이야말로 광기의 즐거움이 생겨나는 장소“‘탈주자’의 장소이다.

[52] 보편적 가치를 위해서 길들진 두뇌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지누 것이 신앙이라면 명령하는 자, 새로운 가치의 발명자기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의 정신이다.

[53]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하는 시대이며 ,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55] 니체가 기독교에 대한 심리를 마치고 심판하는 장면을 보자. 심판은 죄를 추궁하는 장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가치 평가이다. 그가 “기독교는 유죄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심판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이다. 그가 비판한 jt은 ‘부패’이며 ‘타락’이다. 죄에 대한 심판이기보다는 병에 대한 진단, 판결문에 대한 마지막 문장은 무엇인가? 바로 가치 평가이다.

[57] 그는 철학에 토너먼트식 칼싸움을 도입했다. 진리를 가리기 위한 칼싸움.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다. 아테네에서 그의 변증법이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쥐다 까발리는 점잖지 못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변증법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품성을 잃어버린 자가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움켜지는 마지막 필사의 무기다.”

[59]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 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63] 니체는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즉 “ 일반화 할 수 없는 것 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64]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한 탐사 작업을 계보학이라고 불렀다. 게보학자는 돋보기나 현미경을 들고 있는 탐사자다. 도덕은 전체를 보고 싶어 하지만 계보학자는 전체로 환원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을 본다. 도덕의 과도한 일반화 형식 속에서 난폭하게 처넣어진 날카로운 선의 일치를 위해 깎여나가고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들의 일이다.

[66] 짜라투스트라의 말처럼 “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 겹이다.”가치들도, 가치를 판단했던 인간들도 더 이상 동질적이지 않다. 출신과 혈통, 건강 상태에 따라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존재 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가지 판단들이 존재했는가?

[77]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자야 말로 약한 자이다.

[78]내가 만고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되어 있다.

[85] 금욕주의적 성직자들은 먼저 병든 자들의 방어자, 의사, 구원자로서 다가온다. 그러나 그들이 병든 자를 지켜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환자들이 병에서 회복되는 것을 막는 것, 다시 말해서 성직자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킨다.

[86] 모든 고통을 죄에 대한 벌로 이해함으로써 환자들이 고통에 더 이상 항거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오히려 죄수가 된 환자들은 고통을 갈구한다. 수많은 비도덕적 장치들이 이들의 승리를 증명한다.

[88] 니체는 자신이 인정한 덕은“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이라고 말한다. 르네상스 적 덕 이란 도덕과 확실히 구분된다. 그것은 하나의 힘이다.

[90] 알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96]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104]우리의 습관화된 관찰은 여러 현상들을 단일화 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사실들(factum)이라고 부른다. 또 이 사실들과 다른 사실들 아시에는 텅 빈 공간이 있다고 생각해서 각각의 시실들을 고립시킨다. 그러나 현상에 머물러서 ‘있는 것은 오직 사실 뿐’을 외치는 실증주의자들에 반대해서, 나는 말 하리라. 사실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해석뿐이라고 ( wm :303 )

[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 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멸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09] 세계는 무한이 해석 가능하다. 세계는 “배후에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도리어 무수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09]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끝없는 길이 미로가 아니겠는가? 세계의 카오스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몰락의 징후이다. 통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성의 욕구이며, 다수성이야말로 힘의 징후이다. 세계의 불안정하고 혼미한 성격을 부인하고 싶어 해서는 안 된다.

[118] 니체의 텍스트들은 파시스트적인 것, 부르조아적인 것, 혁명적인 것으로 규정짓기 보다는 그런 힘이 만나는 하나의 장으로서 이해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122]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 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3] 한 k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이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라고 명명 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127]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lf들이기’와 ‘길러내기’ 가 개입한다. 니체가 저작의 이곳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쓰고 있는‘길들이기’와 개입하기‘라는 표현은 가치의 습속화를 통한 근대적 정치 주체의 생산을 분석함에 있어 매우 유용하다.

[159]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존재하는 독단적인 표상이란 없으며 부분이나 사건들은 깊은 연관성들을 지니고 있고, 이들 특성은 관계를 통해서 결정된다.

[176]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해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179]권력의지는 새로운 힘들과 마주칠 때마다 항상 촉수를 내민다. 그것을 느끼고 평가하는 것, 육체는 감각과 평가를 통해 권력의지를 경험한다. 사회든 개인이든 나쁜 권력의지는 이러한 감각 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강자들이 창피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것을 약자들은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낀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전에 하나의 감각방식인 것이다. ]

[182] 니체가 영원회귀를 설명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손실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라는 말처럼 원자론자들의 세계관을 압축할 수 있는 표현도 없을 것이다. 니체에게 세계란 “어떤 손실도 없이 정말 긴 세월을 거듭 회귀하는 힘의 대양이었다.

[185]니체는 헤겔조차도 보지 못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놀라운 생각을 소개한다. 그것은 세계를 놀이로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물리적으로 표현하자면 불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유희이다.

[186]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다수이다.” 오, 위대한 세계의 어린아이 제우스! 오! 위대한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

[186]니체의 영원회귀를 ‘동일한 사건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어사전에는 그런 뜻풀이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한 사상가의 사전에는 들어있기 힘든 해석이다. 왜냐하면 현시에서조차 단 한 번도 구경할 수 없는 사건들의 동일한 반복을 어떤 사상가가 주장했다고 말한다면, 그는 사상가보다는 시나리오 작가를 하는 편이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191]긍정의 권력의지는 회복기의 짜라투스트라처럼 “그게 삶이든가, 그럼 좋다. 한 번 더!” 라고 말한다. 그것은 반복하기를 원한다. 생성의 반복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기는 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의 표현이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최고 권력의지다. 존재하는 넋은 생성뿐이다. 그리고 생성만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생성의 반복을 의지하는 것이다.

[197]계보학자들이 과거의 지층에 숨겨져 있던 복수의 힘들을 찾아내는 이유는 그 힘들이 미래를 건설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축복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과거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미래를, 그리고 미래의 건축물로 변형된 과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니체의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많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니체는 반대적인 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때에 맞지 않은’ 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살았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198] 두 가지의 반복, 두 가지의 영원성. 생성의 반복인가, 존재의 영원성인가? 병에서 나온 것인가, 건강에서 나온 것인가? 난쟁이여, 세상이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고? 너는 병들었다! 하지만 나의 “파괴, 변화, 생성의 욕망은 미래를 잉태한 넘치는 힘의 표현이다. 이것은 나의 용어로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200]맑스의 말을 빌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해석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동안 차라투스트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이다.

[204]막연한 파괴와 긍정 안에 들어있는 파괴를 부정하면서 우리는 단 하나의 긍정이 정립되기 위해서라도 긍정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첫 번째 긍정은“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206]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던지는 주사위는 던질수록 더 많이 던지게 되는 주사위다. 그것은 창조적인 힘의 표현이다. 던져진 주사위가 땅에 떨어질 때 힘은 훨씬 증가한다. 이제 강화된 힘은 주사위를 더 높이 던진다. “우연의 이론, 그것은 끊임없이 창조적인 행동, 선택하여 스스로를 기르는 행동을 갖는 존재이다. 나는 우연적인 한 가운데서도 능동적인 힘을, 창조 작용을 영위하는 것을 인식하였다. 사람들은 춤을 추면서 더 잘 추는 법을 배우게 되고, 주사위를 던지면서 더 잘 던지는 법을 배우게 된다. 분명 주사위는 내게로 돌아오지만 나의 신체는 다른 건강 상태로서 그것을 맞이하고 있다.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 그것은 신체로의 귀환이다.

[211]니체는 모든 것을, 심지어 이 혹성 전체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믿는 인간들의 오만과 허여심을 꼬집는다. 그에게 인간 중심주의는 한 편의 코미디에 가깝다. 자신을 세계의 모든 존재들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개미나 모기와 다를 바 없다.

[222]그런데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ㅇ르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의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 더 이상 이 세계를 검열하는 심판이 사라졌으며, 저 세계에서 죄를 묻는 일이 없다는 것. 천국이란 믿음의 문제이기는 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

[231]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초인과 인간이 갈라진다.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는 것은 보존하는 것인가? 극복하는 것인가? 자기 보존과 자기 극복보다 높은 인간들은 모든 가치 파괴가 일어나는 점에서 두려워한다. 그들은 미래를 가는 여행을 멈추고 싶어 한다. 그들은 과거를 되살리고 싶어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탄식을 들어보자.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기를 바라겠는가?

[238] 사람은 불멸하기 위해 여러 번 죽어야 한다. 니체의 여러 이름들은 다음과 같은 영원회귀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서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이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개의 주름을 본다.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찾아낸 미세한 조각들을 집어넣고 보면 사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 책머리에]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3개의 질문을 가지고 출발했다.
첫째는 저자 고병권은 몇 개의 눈을, 몇 개의 길을 볼 수 있는 사람인가? 이는 달리 말하면 저자가 니체의 등 뒤에 숨어서 줄 곧 니체의 대변자 역할을 하지나 않는가에 대한 감시인 셈이다.

둘째는 ‘나는 니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즉 저자의 유혹에 이끌려 무작정 니체를 좋아하지 않기로 한 나와의 약속이다. 그는 그의 열린 강좌에서 ‘좋은 친구를 원하면 좋은 친구를 창조하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니체와 친구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우리를 유혹했다. 책의 제목에서부터 --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

마지막으로는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에게 던질 질문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니체와 저자 고병권에게 객관적일 수 있는가?’

먼저 첫째 질문부터 풀어나가 보도록 하겠다.
그가 말했듯이 질문 뒤에 답은 숨어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가 붙인 책의 제목에서부터 니체와 그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발견했다. 그를 편애하지 않고는 감히 어떻게 니체에게 천 개의 눈을 부여할 수 있을까? 책을 읽어가는 도중 그는 니체 해설자가 되기 전에 니체를 지극히 사랑하는 친구가 먼저 되어있었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186]니체의 영원회귀를 ‘동일한 사건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어사전에는 그런 뜻풀이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한 사상가의 사전에는 들어있기 힘든 해석이다. 왜냐하면 현시에서조차 단 한 번도 구경할 수 없는 사건들의 동일한 반복을 어떤 사상가가 주장했다고 말한다면, 그는 사상가보다는 시나리오 작가를 하는 편이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그는 끝임 없이 니체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에 대해 거부의 몸짓을 보낸다. 그는 니체에 대한 편견 된 시각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그가 니체를 찾아낸 것은 10개 이상의 눈을 가진 것에서 출발했지만 니체를 만나면 그의 눈은 한 개의 외눈박이로 변한다.

다음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니체를 몰랐다는 편이 시원한 답이다. 고병권이 니체를 소개해 주기 전까지다. 비록 내가 대학시절에 ‘철학’이라는 것에 빠져있었지만 그것은 편협된 시각의 철학이었다. 나에게 울타리를 치기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나에게 니체를 소개해 주고 고 난 2-3일 후 나는 그를 정말 놓치기 싫은 좋은 친구라고 판단했다. 그를 재창조할 필요도 없었다. 저자가 이미 그를 매혹적으로 창조해 놓았고 그가 설명한 것이 사실이라면 의심의 여지없이 니체는
나에게 10개 이상의 눈을 주고 20개 이상의 길을 보여 주었음이다. 그러나 나는 경계한다. 저자처럼 니체의 등 뒤에 숨어 외눈박이가 되지 않기를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차례다.
저자는 그의 미소로 먼저 나를 끌어당겼다. 인터넷 강좌에서의 그는 천진무구했고 단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그가, 동생 같은 그가 발견한 니체다. 니체가 처음 나를 매혹시킨 말은 “ 삶을 환한 미소로 맞이하라. 그리고 마음껏 즐기고 새로운 나를 창조하라”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이 고병권이 풀어낸 니체의 말이다.
나는 니체를 비롯해서 고병권을 좋아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무덤덤해질 것인가를 결정짓기 위해서 문화의 거리를 산책하기로 했다. 내가 그들을 통해서 몇 개의 눈을 가졌나? 아니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및 개의 길을 새로이 볼 수 있나? 하는 나의 점검인 셈이다.
우선 미술관을 돌았다. 추상과 구상이 혼합된 그림 앞에 섰다. 그림 뒤에 숨어있는 작가의 사유의 세계를 넘보고자 했다. 그의 춤추는 세계를 탐색했다. 내 생각의 세계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로의 발견의 시도였다. 추상, 구상을 뛰어넘은 재료의 색다름도 맛보았다. 그리고 창 넘어 세상을 바라보았다. 무수한 건물 뒤에 숨어있는 숨어 있는 길들을 보고자 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따뜻한 응시였다. 니체의 말들이 그리웠다. 인트넷 사이트에서 니체의 ‘사유의 전복을 즐겨보라’고 말한 그(고병권)의 환한 미소가 그리웠다. 저자는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했다. 그는 나를 철저히 유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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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0.16 09:58:38 *.128.229.81
이 책을 읽고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아가 그림앞에 섰다는 것은 독서의 연장이다. 좋은 독서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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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10.16 13:02:17 *.114.56.245
니체와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사부님과 함께함 같은것이었지요.( 그러나 따듯함은 어찌 사부님을 따르겠습니까?) 그의 파편적 시각을 좀 더 엿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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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0.17 07:50:31 *.72.153.12
질문을 가지고 책을 보는 것도 저자와 책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 같습니다. 질문에 답을 하다가 더 잘 이해하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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