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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6일 12시 16분 등록
1, 내가 저자라면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수유연구소+연구공간 '너머'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니체 - 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들뢰즈의 니체 - 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노동거부의 정치학 - 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한 권으로 읽는 니체』『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등이 있다.

2. 온 몸을 열어주는 글귀

4-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어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5-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6-그는 “단 여섯 줄의 문장”에도 천 개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천 개의 의미를 하나의 의미아래, 그 천 개의 니체를 하나의 니체 아래 묶어두려는 사람들이 문제다.
38-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7-“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진다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 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8-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 진리란 머리만 아니라 몸으로도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 불쾌한 음악은 발걸음만으로도 반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 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색맹이 되고 마믐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17-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

18-“아직 밟아 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 길은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19-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는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 오르는지”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26-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세계를 달아보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오늘 한 곶위에 서서..... 저울을 들고 세계를 달고 있었다.”

28-니체가 보기에는 잘못된 사상만큼 건강에 해로운 것도 없다. 청명한 날씨가 어쩌면 철학보다도 휠씬 가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니체는 음식물이 철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영양 철학’이라는 이상은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힘, 생명 같은 것을....”

29-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 있다. / 철학자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역동성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단순한 ‘현상’이나 ‘가상’으로 치부한다. 그리고는 ‘실세계’, 다시 말해 참된 세계가 따로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 ‘물 자체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30-“불행의 크기에 맞추어 죄의 크기는 역산된다.”

31-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한 니체의 입장은 저 유명한 [에티카]의 저자의 입장과도 같은 것이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34-하강의 벡터를 나타내는 중력은 모든 날아오르는 존재들, 모든 춤추는 존재들, 모든 유목하는 존재들을 피로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중력은 인간을 난쟁이로 만든다. / “내가(문을 지나다니기 위해) 몸을 굽히지 않아도 되는 곳, 소인들 앞에서 내가 더 이상 몸을 굽히지 않아도 되는 나의 고향으로 나는 언제 돌아갈 것인가.” -나의 별로 돌아가야 해.
36-그 비극성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거인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소인족 처럼 사람의 고통과 죄의 크기를 연계시키지 않는다.

37-삶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 고통은 그 사람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 과잉에서 나오는 고통과 결핍에서 나오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그리스의 비극을 보고 놀라는 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비극을 활용하는 기술 때문이다. 심지어 고통과 싸우기 위해 꿈과 환영까지도 무기로 이용했다. / 그리스인들은 파괴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삶은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38-오이디푸스가 수동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프로케테우스는 능동적으로 죄를 범한다.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39-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고유한 개별성과 유한성으로 고통 받는다.

40-개별적인 것들은 자신들의 한계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상위의 통일로 나아가면서 그것을 해소한다. 디오니소스는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충동을 나타내며 아폴론은 항상 절도와 자기 인식을 잃지 않는 이성을 나타낸다. / 니체의 분석에 따른다면 주신 찬가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화해와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41-디오니소스는 차이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신이 되어 있었다. 괴로워하기는커녕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수성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 그가 뛰는 이유는 차이들에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정력, 건강, 과도한 풍요.”때문이었다. 차이들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은 변증법이다.

42-차이는 죄의식과 관계된다. /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화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44-극장은 삶을 연극으로 만드는 장소이고, 법원은 삶의 죄를 추궁하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47-노래와 춤들이야 말로 미래 연극에 대한 실천적 모습들이라고 말한다.

49-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51- 철학이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습속의 윤리의 압력에 굴복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새롭고 위험한 생각은 안된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

52-“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 “너희는 너희의 사상을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 ‘인식의 전사’

53-미래란 ‘항상’와 있지만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를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어느 시대건 미래는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 / “미래라는 나무에 우리의 둥지를 튼다.” 그 자신이 이해되고 있지 않다고 느낀 니체는 자신의 독자를 미래의 시간에 둔다. 그리고 스스로를 ‘미래의 철학자’로 부르고 싶어 한다.

54-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이다. / “미래는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55-니체에게 심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세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

56-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진리와 사랑에 빠진 철학자, 그는 현인이기보다 ‘지혜의 친구’여야만 한다.

57-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58-59-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 그리고 건강은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62-도덕학자들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의식이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63-“도덕 교사들의 허영심-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 / “일반화 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도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69-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화폐 자체가 가치의 위조물이자 마법이며 ‘철저한 거짓말 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78-77-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78-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제해 있다.

83-원죄의 채무를 지게 되면 그 누구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는 빚쟁이가 되고 만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불쌍한 동물인 인간은 제 자신을 한탄하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다. / “누가 강자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약자가 자신을 방어했던 수단이 본능이 되고, 인간성이 되고, 제도가 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84-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85-첫번째, 진정제와 마취제의 투여, 두 번째 기계적 활동의 도입. ‘노동의 축복’. 베바가 프로테스탄티즘에대해 분석했던 바대로 니체는 노동이야말로 충동을 억누르는 훌륭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세 번째, 조그만 즐거움의 제공. 선을 행할 때 유용한 보답을 해주는 것. 네 번째 가장 결정적인 수단, 삶에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 성직자들이 마법사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환자를 죄수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모든 고통을 죄에 대한 벌로 이해함으로써 환자들이 고통에 더 이상 항거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 도덕적 가치에 대한 부정 운동은 무(無)를 향해서만 나아간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 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에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 밝힌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

88-니체는 자신이 인정한 덕은 “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이다.

90-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이처럼 스피노자의 선/악의 개념은 좋고 나쁨의 의미만을 가진,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자연학적인 것이다.

95-해석학자들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타자’보다 ‘차이(거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96-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 말한다.

105-니체의 해석학은 해석 대상이나 해석자 어느 쪽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니체는 필연성을 갖는 사실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주체’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연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109-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침과 과잉이다.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겐 즐거움의 대상이다.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끝없는 길이 미로가 아니겠는가.

111-특히 니체의 투시주의는 “나의 해석은 이렇다. 그렇다면 당신의 해석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112-니체가 절대주의나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113-니체의 역사에 대한 세 가지 관점
1. 기념비적 방식 : 과거의 고전적인 것이 다시 한 번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태도다.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시도 그러나 대개의 기념식이 그렇듯이 이러한 시도 속에서 수많은 차이들은 재현을 위해 깎이고 휘어진다.
2. 골동품적 역사관 : 과거를 그대로 보존하려고만 한다. 보수주의자들
3. 비판적 방식 : 인간이 살기 위해서 과거를 파괴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생각. 이들은 과거를 법정에 끌어내 심문하고,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이다. 과거와 대립해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은 곤란한 욕망이다.

114-“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해석의 비밀은 마로 이런 것이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성된다. 생성된 차이는 괴로운 것이기는 커녕 하나의 멜로디다.

122-“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4-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회’이다. ‘사회’는 공통성의 영역이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영역이다.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다원성’이었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은 ‘표준화’다.

126-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가치의 창조와 평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에 대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138-니체는 “서구 전체가 그 제도(민주주의)를 낳고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서 존재하는 다양성은 어떤 힘으로도 작동하지 못하고 모래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가축 떼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이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 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142-노동이 칭찬받고 노동의 축복에 관하여 지치는 일도 없이 이야기 되는 경우…나는 저의를 본다. / 노동을 바라볼 때, 현재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것, 노동은 각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방해할 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사회는 노동을 통해 보다 안전해질 것이다.

166-니체에게 강함은 무엇보다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173-“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생명자체는 권력의지다.”

176-“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186-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201-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한다.

232-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해서 부른다.

23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차라투스트라의 신은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 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 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 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디오니소스는 “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

239-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47-니체의 오랜 좌우명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 된다”

250-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돌아가리니”

253-“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285-신체의 능력은 초월적인 가치를 지도 받거나 내면화시킴으로서 성장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신체는 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함으로써만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해야 함을 여러 번 주장했다.

316-그것이 바로 ‘차이’의 고유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다. 차이는 회피되어야 하거나 해소되어야 하거나, 심지어는 그것이 인정되고 보존될 때조차 ‘문제’다. 그것은 생산되기보다는 관리되어야 한다.

319-차이의 아상블라주에 대해 전망하는 것은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생태계의 어떤 것들도 자신의 특이성을 전개함에 있어 다른 것과 대립하지 않으며,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야말로 생태계의 징표다. 차이의 아상블라주로서의 생태학에 못지않게, 여러 잡다한 것들이 모여 만든 예술품으로서의 아상블라주 또한 같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퀼트처럼 각각의 것은 자신의 이야기들을 전혀 양도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이룬다. 우리가 생태적이고 미적인 패러다임을 말한다면, 그것은 정치에 대한 어떤 생태적 신비화나 심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발견해야 할 정치적 주체들과 그들의 새로운 소통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세상의 모든 짐이 내 어깨 위에 있다고 폼을 잡던 20살, 나는 수업을 뒤로한 채, 햇빛 찬란한 캠퍼스 잔디에서 니체를 처음으로 만났다. 머리 아픈 책을 정말 이해했는지 알 수 없지만, 강렬하게 남아있는 니체의 존재는 나에게 ‘오아시스’였다. 내가 품었던 세상, 사회, 정치, 사람, 사랑, 다양성등이,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막막한 사막 같았던 때에. 니체는 사막 한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어느 책에서도 만나지 못한 것이었다. 니체는 짜라투스투라의 입을 빌어 가히 혁명적인 것으로 가치를 제시하였다. 개인의 생명을 우주적인 삶과 통일 시키고 있는가 하면, 자아를 초인 이상으로까지 끌어올렸다. 위대한 개인을 부각시켜 창조적 천재, 긍정하는 영웅으로 나타내 주었다. 온갖 제도와 질서에도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모든 기성사상과 가치를 인정치 않았다. 온갖 권위로부터 인간의 능력을 무한까지 해방시켜 주었다.

3-1. 천개의 몸의 눈, 천개의 춤의 길

내가 머리로 기억해 내는 니체를 넘어, 그때의 물의 손길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 줌의 물이 내 입술을 적시고, 바짝 마른 입안의 대지를 지나 목구멍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가, 모든 세포가 깨어나고 땀구멍이 확장되는 느낌. 그 생생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한 주였다. 이렇게 몸이 기억하는 니체를 다시 만나는 설레임은 그 때와 다른, 내안에 잠자는 또 다른 천개의 눈을 뜨게 한다. 저자인 고병권과 니체도 서론에서 몸의 눈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4)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진리란 머리만 아니라 몸으로도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 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색맹이 되고 마음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8)”

그들은 말한다. 몸을 열어라. 그러면 모든 땀구멍을 통해 천개, 만개의 눈이 열리고, 춤의 길이 열릴 것이다. 그 길을 따라 춤을 추어라. 모든 획일된 리듬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리듬을 따라 과잉의 케오스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 춤을 추어라.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진다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 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7)”

3-2. 니체, 먼지를 털고 세상속으로

니체의 책은 나의 갈증을 해소 해 주었지만 남들도 그러하듯이, 난해하고 어려웠다. 10년 넘게 나의 책꽂이를 떠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니체의 해설서를 만났다. 아니 해설서가 아니라 니체에게로 가는 천 개의 길, 천 개의 눈 가운데 하나를 제시하는, 매우 친철 하고 쉬운 안내서를 선물 받은 것이다. 명확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니체라는 '천 개의 길'을 지도로 펼쳐 보여준다. 덕분에 나는 미로를 예전만큼 헤매지 않아도 되었다.

"먼저 니체를 충분히 좋아하라. 떠남은 그 뒤에 판단할 일이다." 라는 저자의 말처럼, 그는 니체와의 사랑에 흠뻑 빠져 있다. 그 사랑의 사고력은 그만큼 튼튼하고 치밀하여 니체인지, 저자인지, 저자인지, 니체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매끄러운 문장의 연결들을 보여주고 있다. 니체에서 출발하여, 비슷하지만 동일하다고 말하기 힘든 다른 니체로 옮겨다닌다. 또한 겸손하고 열정적으로 니체를 설명한다. 니체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평가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를 통해 진리와 도덕,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즉 자신의 입으로 니체를 말하면서 사실은 니체의 입으로 '자기'를 말하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서술 방식은 그저 책꽂이에 먼지만 쌓여가던 니체를 다시 세상속으로 드러내는 매력적인 안내지도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

3-3. 카오스의 정치학을 꿈꾸며

그동안 상담소는 여성주의 가치를 지향하며 인간의 ‘차이’를 통한 남성중심주의, 이성애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운동들을 해왔다. 차이의 정치학을 꿈꾸며 걸어온 16년의 역사에서, 우리가 현재 돌아보는 지점은 니체의 어떠한 부분과 맞닿아 있을까.

상담소가 가져온 운동의 초점은 피해자의 ‘고통’과 ‘죄’의 터널을 통한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고통’과 ‘죄’안에서 설명하고자 했던 차이가 오히려 ‘피해자’ 정체성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고통’과 ‘죄’를 중심으로 형성된 응축된 피해자의 상은 다양한 여성의 경험을 설명해 내거나 타인과의 차이를 해석해 내는 길을 가로막게 되었다. 차이의 정치학으로 출발하였지만, 정체성의 정치학으로의 귀결을 맛보게 된 것이다.

이에 몇 년 전부터 상담소에서는 많이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다시 정체된 피해자 상을 해체하는 작업들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현재 상담소는 정체성의 정치학과 차이의 정치학이 함께 동반되고 있는 시점이다. 그 시점을 넘어,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이나 ‘죄’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임을 인식하고, 다수성을 즐기는 디오니소스는 신을 찾아 여정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하나의 물음이 남는다. 그렇다면 여성운동의 ‘여성’은 정체성의 정치학인가 아닌가? 여기서 니체는 다시 한번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차이와 정체성도 아닌, 그 둘이 어쩌면 셋을 넘어 천개의 길이 혼재된 카오스 정치학의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친과 과잉이다.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겐 즐거움의 대상이다.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끝없는 길이 미로가 아니겠는가.(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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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머릿속의 생각을 마구 적다보니 이리 길어져 버렸습니다. 죄송^^ 계속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색은 계속해서..
IP *.231.5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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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0.20 08:14:48 *.72.153.12
너의 저자라면을 읽다보니, 세상을 보는 어떤 눈을 가지고 뭔가를 접한다는 것은 깊어지게 하는 마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키워드에서 출발한 꼬리에 꼬리는 무는 사색 잘 봤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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