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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6일 11시 36분 등록
1. 작가에 대하여

저자 고병권을 철학자이다. 그것도 니체에 정통한 철학자이다. 그가 철학자에 대한 정의가 이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연이 인간세계에 박아둔 화살’로 묘사한 니체의 비유를 들려주며 철학자들의 사상을 받아쓰는 ‘철학적 노동자’가 되지 말고 그 철학자를 화살로 삼아 진리를 향해 쏘는 ‘미래의 철학자’가 되라고 말한다.


그의 니체에 대한 연구 외에도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적용하는 삶의 방식에서도 철학이 응용되고 있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과거의 철학자가 남겨놓은 책속에서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었다. 철학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상식과 보편적인 진리로 뒤덮인 것 같지만,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내가 아닌 조직에 물려있고, 더 큰 사회적 관계 속에 맞물려 있는 조그만 나사에 불과한 자신을 찾을 수 있다.

또 그의 인터뷰 중에 들어오는 것 중의 하나가 현대 직장인에 대한 단상이었다. 그런 책을 많이 보아온 나도 뜨끔했다. 소위 직장인 계발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한다.


시중에 나돌고 있는 처세술 책들은 한마디로 노예적 적응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만 되풀이한다”고 잘라 말했다. 세상을 디자인(Design)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적응하는 것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풀이다.


읽었던 자기 계발서를 다시 한번 더듬어 보니, 회사에 대한 이야기, 타인에 대한 이야기, 조직의 논리에 대한 이야기, 혁신에 대한 이야기등 좋은 이야기는 다 들어있다. 정작 나에 대한이야기는 없다. 승진이나 경제적 성공 모두 화려한 미사여구를 담은 독버섯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책을 보고 있었다는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쉽게 적용하기 위하여 쉽게 읽은 책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가 대표로 맡고 있는 수유연구소+ 연구공간(이하 수유공간연구소)이라는 특이한 이름도 저자의 새로운 면모를 알 수 있었다. ‘수유 + 너머’는 지식 공동체의 새로운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출신 학교, 전공 등의 제약 없이 누구든지 소속될 수 있고, 연구부터 생활까지 자급자족적 운영을 지향한다. 400여평 규모의 공간엔 멋진 카페와 청소년을 위한 ‘공간 플러스’도 들어 있다. 현재 ‘수유 + 너머’에 정식 회원으로 소속돼 있는 연구자들은 60여명. 이들은 그야말로 ‘앎과 삶’을 함께 하는 집단이다. 한 계절에 7, 8개 강좌가 열리며, 직장인을 대상으로 연 44주에 걸쳐 진행되는 ‘대중지성’ 코스는 철학을 비롯, 문화예술, 동양고전, 글 쓰기 등 4과목을 집중적으로 강의한다. 책 속의 지식과 책상 위의 지식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지식의 형태가 특이하다. 책을 읽는 행사도 이채롭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동일한 주제로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교환해 보면,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다를지라도 시민들끼리 지적으로 소통한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 단 한 번이어도 좋습니다. 함께 책을 읽어 봅시다. 함께 토론해봅시다. 함께 공부해봅시다. 혼자서 책을 읽으면 머릿속 지식에 그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으면 ‘사건’이 됩니다."


수유연구소+연구공간 연구소의 형태를 바라보고 있다니 우리 변화경영연구소의 방향도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아직 초창기이지만 변경연은 더 다양한 분야의 사람과 경험이 있다.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소통한다는 점에 대하여 그 발전 모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추장이라는 직함이다. 대표라는 직함보다 추장의 직책을 졸하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성과 직함이 결합된 고추장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매운 맛을 주면서 한 부족의 추장처럼 고민하고 통섭하는 그이 모습이 아름답다.

2. 나에게 다가온 책

가. 마흔살에 다가온 니체

나는 니체를 잘 알지 못한다. 그냥 교과서적인 암기과목의 하나로 실존주의 철학자와 “신은 죽었다.” 라는 명언을 남긴 사람. 고등학교 때 옆방 대학생 형님의 책꽃이에 꽃여있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제목의 책, 한번 열어서 보니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어느 정도 직장 생활도 몸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것을 찾는 지금에 다시 만난 니체는 다시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는 두근거림이 있었다. 살면서 매번 부딪히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 거대한 사회체제, 관료 체제하에 서서히 몸이 묶여 가고 세뇌를 당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 순간에 마음속에서는 이것이 아니라 어딘가 탈출구가 있었을 것 같은데, 하는 아쉬운 마음, 한번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고 다짐을 하고도 바쁜 일상 속에 묻혀 지나가 버린 많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가족이 생기고 다시 성장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더 나이에 맞게 고착 되어버린 삶속에서 니체는 뭔가 새로운 단초를 주었다.

책 한권이 전체의 이해를 돕는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다양한 사유와 천개의 길 중에서 하나를 잡고 따라 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옛날에 바쁘고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미룬 질문들이 하나씩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마음에 드는 인용구절을 적다보니 25페이지가 훌쩍 넘어갔다. 니체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냥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도록 노력했다. 이해하지 않는 단어들을 다시 검색을 해보았고 몇 번이고 읽어보았다. 이제 바쁘다는 핑계로 나를 알고 점검하는 질문들을 미루지 않을 것이다. 늘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할 것이다.

나. 나의 걸음걸이는?

니체의 말중에서 가장 깊게 다가온 구절은 걸음걸이라는 단어였다.

“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서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은 중력의 정신에 대한 승리의 표시이다. 그 것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높이뛰기와 넓이뛰기, 그리고 옆으로 뛰기이다. (233p)

아직 나는 나의 걸음걸이를 살펴본 적이 없다. 늘 걸어가기도 바빴고 뒤를 돌아다 볼 여유도 없는 마당에 걸음걸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바쁜 삶을 살았지만 중요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나의 걸음걸이를 생각해보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조그마한 성공에는 걸음걸이보다는 기쁜 마음만 보았다. 결과적으로 나의 전체 인생의 길과 조화되는 성공을 아직 거둔 적이 없었다. 나만이 신나게 걸을 수 있는 그런 걸음을 걸을 것이다.


3. 가슴을 치는 구절

<책머리에>

(3)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어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 그런 시도에 대해 삶은 “존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라고 답할 것이다.

(3)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개의 주름을 본다.

(4)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들으려 한다.”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5) 이 미래의 철학자가 오해되었던 것은 신비함이나 모호함 때문이 아니다.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6) 그는 “단여섯줄의 문장”에도 천 개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천개의 의미를 하나의 의미아래 그 천개의 니체를 하나의 니체 아래 묶어두려는 사람들이 문제다.

(7) 그래서 철학자는 먼저 “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악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7)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추다 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8)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며 안 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라도 실천이 필요하다.
(8)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지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서장>
1. 천개의 눈

(17) 눈처럼 쉽게 길러지는 께 또 있을까? 광학의지 혹은 시각체계-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훈련, 큰 것을 작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들이 있다. 진리를 묻는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

<2. 천개의 길>

(18)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제 1부>

(25)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이다. 철학은 얼마나 가치 있는 학문인지, 삶에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니체는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를 묻는다.

(26) 누구도 자시의 머리카락을 잡고 제 무게를 달아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철학의 가치, 철학의 공과를 달아보고자 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야 한다.

(27)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를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진리를 찾는 철학자들과 황금을 찾는 모험가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목표의 실존을 남들보다 크게 확신한다는 점이다.

(27)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 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29)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을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건강과 생명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력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 진단하는 철학, 그래서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있다.

(30) 서구사상의 또 다른 뿌리인 기독교도 ‘죽음의 설교’ 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계’는 죄로 가득한 세계이며 천국은 ‘저 세계’ 안에만 있다. 기독교인들은 삶을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 괴로운 이유를 우리의 ‘죄’와 연관시킨다. 삶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클수록 우리가 지은 죄는 커진다. ‘불행의 크기’에 맞추어 죄의 크기는 역산된다. 이 세계는 죄로 출발한 세계이며, 그 죄가 번성하는 세계이고, 그 죄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세계이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죽음이후에 버러질 처벌을 환기한다. 이들 역시 삶을 ‘죽음을 위한 준비’에 쓰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한다. 삶이 그토록 추악한 것이라며 삶을 살지 않으면 된다.

(31)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그러나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을 반박하려 하지 않는ㄴ다. 이들은 반박되어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치료받아야 할 존재다. 죽음의 설교, ‘몰락에의 의지’, 삶을 경멸하고 영원한 부정의 무게 아래 두는 것은 “삶에 있어 가장 깊이 든 질병일 뿐이다.”

(31) 불행이도 서규 사유의 기원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놓여있다.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1-2.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32) 소크라테스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 이라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을 때, 부풀어 있던 사유의 공간 역시 단 하나뿐인 진리를 향해 급속히 얼어붙었다. 빅뱅을 상쇄할 만한 거대한 냉각으로 진리에 관한 사유는 완전히 가라앉았다.

(32) 이로써 극단적인 두 세계가 생겨난다. 초라함과 부족함의 세계, 그리고 아름다움과 완전함의 세계, “존재안의 피안에서 하나의 세계가 날조되었고, 그것이 참된 세계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참된 세계는 마침내 하나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 이제 상상된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평가한다. 진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상상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33) 신학자들이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눈부셔 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을 걱정한다. 신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왜소해진 것은 아닌가? 진리가 밝아진 것이 아ㅣ라, 그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아닌가? 더 이상 신과 진리의 공과를 묻지 못하고 신과 진리에 대한 자신의 공과를 묻는 인간의 왜소증, 진리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의 완전성을 찬미하기 위하여 자신의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 이다. 이 세계와 자신의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36) 그것은 비극성의 크기가 아니라, 그 비극성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거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소인처럼 고통과 죄의 크기를 연계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소인들의 삶에 대한 ‘부정’을 삶에 대한 ‘긍정’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38) 오디오프스가 수동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프로메테우스는 능동적으로 죄를 범한다. 불을 훔친 범죄자 프로메테우스 영웅으로 받들어진다. ‘누가 오디오푸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라고 무든 그리스인들은 이제 프로메테우스야말로 우리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1-3> 세 개의 죽음>

(41)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디오니소스 대 그리스도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자, 삶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을 제공한 자, 이 반 기독교적 스승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디오니소스가 가장 혹독한 고뇌도 웃음으로 긍정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삶을 저주하고 삶으로부터 구제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낸다. “십자가에 달린 신이 삶의 저주라면, 디오니소스는 토막토막 잘리어 있으면서도 삶을 약속하고, 영원히 다시 살아나며 파괴로 부터도 돌아온다.”

(42) 디오니소스적 죽음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다. 니체는 이 철학자의 죽음에 대해 흥미로운 소절을 하나 남겨놓았다.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라는 제목이 붙은 소절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갖는 염세성을 그의 유언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만큼 비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삶의 염세성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1-4> 비극이 상연되는 극정과 심판의 법정

(44) 니체의 저서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 비국의 타락이 일어난 두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극장과 법원이다. 극장은 삶을 연극으로 만드는 장소이고, 법원은 삶의 죄를 추궁하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44) 그러나 언제부턴가 비극은 연극으로 전락했고, 사람들은 관객으로 전락했다. “근대인들은 환희의 힘도 모르는 비평가가 되었으며, 결국은 도서관원이나 인쇄교정자 정도로 되고 말았다.

(45) 플라톤의 동굴은 극장의 전형이다. 관객을 쇠사슬에 묶여 스크린만을 보도록 강제된다. 벽은 어둡고 사람들은 뒤에서 날아온 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들의 운동을 보게 된다. 플라톤은 참된 세계가 동굴밖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극장을 끌어 들였지만, 그가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자신의 극장 속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47) 이 때문에 니체의 철학처럼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은 연극의 반대편에 자리한다. “네가 이해하는 것처럼 나는 본질적으로 반연 극적이다.” 그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 가령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어릿광대에 불과하며, 바그너 역시 배우일 뿐이다. 관객들은 배우들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러나 아직 세계를 회전시킬 수 있는 가치들의 발명자들은 나타나고 않고 있다.

(48) 심판은 삶을 완전히 암울한 것으로 만들었다. 심판만큼 삶에 적대적인 것은 없다. “나는 법을 죽였습니다. 시체가 생명 있는 자를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법은 언제나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심판은 삶으로부터 사라의 요소를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신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1-5> 미래의 철학자>

(49)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더구나 순수한 사유의 체계가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수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50) 니체는 감리교의 원조로 알려진 존 웨슬리의 예를 통해 사상이 어떻게 물질적 힘으로 전화하는지 훌륭하게 설명했다. 웨슬리는 그의 스승 피터 뵐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그대가 신앙을 가질 때 까지 신앙을 설교하라. 그 다음부터 그대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설교한 것이다. 신앙이 삶을 생산하면 이제는 삶이 신앙을 생산할 것이다. 따라서 삶을 실천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신앙은 극복되지 않는다.

(50) 불행히도 지금까지 철학은 이 과정에서 동원되어 왔다. 철학은 군대가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고 난 뒤에 사람들의 정신을 길들이고 길러내는 작업을 수행해 왔다. 니체가 철학자를 “국가가 신하를 기르기 위해 베풀어주는 관직”이라고 비꼬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어용철학자로 존재하는 것을 감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리위에 더 높은 단계, 즉 국가가 있다는 것을 승인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국가를 통치하는 철학자의 꿈이지만, 현실에서 철학은 국가의 시녀였다.

(51) 철학이 하나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할 때에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습속의 윤리의 압력에 굴복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나 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류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이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52) 분명히 광인은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니체는 우리의 문명을 ‘아픈 것’으로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 ‘미쳤다’고 본다. 니체는 ‘미친 것’의 반대가 ‘건강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 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 는 말과 다르지 않다.

(52) 아픈 광인은 정신병원에 갇힌 환자지만, 건강한 광인은 자유정신을 지닌 전사로 등장한다.

(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의 불일치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가령 ‘왕후장상이 어디 씨가 따로 있는가?’ 라고 외쳤던 만적의 외침을 두고 1198년의 고려인들은 ‘미친 놈’ 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왕후장상과 천한 노예가 어떻게 동등한 출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적이 ‘미친놈’ 이었던 것은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였다. 그의 시간은 자유와 평등을 내세웠던 1789년 이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건 미래는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

(54)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미래의 철학자는 그 자신으 권한으로 과거의 모든 가치들을 재평가한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들의 보고이다. 그는 과거를 재현하려고도, 기념하려고도,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긍정한다.

(55) 니체의 법정은 질서나 평화를 선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전쟁을 예고한다. 비판은 법정에 세우는 것이지만 재판을 받는 것은 기존의 가치들이다. 니체에게 심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세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

(56) 그가 비판하는 것은 ‘부패’이며 ‘타락’이다. 죄에 대한 심판이라기보다는 병에 대한 진단, 판ㄷ결문의 마지막 문장은 무엇인가? 바로 가치 평가이다. “우리는 그 숙명적 불행이 시작된 재수 없는 날을 기점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다. 왜 기독교 최후의 날로부터 계산하지 않는가? 오늘부터, 모든 가치의 재평가가 이루어진 오늘부터 따져서 말이다.”

<1-6 사랑의 의미>

(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57) 니체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우려하는 까닭은 그가 가진 폭군적 본능 때문이다. 그는 “아고는 이루어지고 있는 장에 칼을 들고 나타난 검술선생이었다.” 그는 철학에 토너먼트씩 칼싸움을 도입했다. 진리를 가리기 위한 칼싸움.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다.

(57) “변증법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품성을 잃어버린 자가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움켜쥐는 마지막 필사의 무기다.”

(57) 이런 식의 진리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추하다. ‘진리와 사랑에 빠진 철학자’, 그는 ‘현인’이기보다는 ‘지혜의 친구’여야만 한다.

(57)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58) ‘삶’을 ‘사랑’하는 것. ‘운명애’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중략)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시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59) 하나 첨언하자면 놀랍게도 말년의 니체는 그리스도에게서 그러한 신호를 발견했다. (중략)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 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제2장 - 강한 자와 선 한자 - 니체의 계보학)

<2-1 계보학1 - 비판)

(61) 도덕학자나 도덕 철학자에 대한 니체의 불만은 그들이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도덕에 합리적 기초를 제공하기를 원했고, 이제까지 모든 학자들은 자신이 그러한 일에 성공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도덕 그 자체를 ‘고정불변의 것’으로 생각해왔다.” (중략) 도덕 학자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의식이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이 도덕학이 결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도덕 그 자체의 문제’이다.

(63)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 - 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가까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리라’ 라든지, ‘모든 사람을 도우라’ 혹은 ‘거짓을 자행하지 말라.’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가하지 말라’ 등등 모든 가르침은 어떤 인간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즉, “일반화 할 수 없는 것 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64)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고 불렀다.

<2-2 계보학2- 탐사>

(65)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과거로부터 신성화되거나 현재로부터 정당화된 가치들은 계보학자들이 찾아낸 간극들이나 이질적 층들, 파편들과 마주하게 된다.

(68) 계보학자의 현미경은 미래 철학자의 망치만큼이나 강력한 전쟁무기이다. 그 작은 렌즈는 동일자의 세계에 거대한 지진을 만들어 내는 “다이너마이트”가 될 지도 모른다.

<2-3 도덕의 자연사>

(69) 화폐의 위조란 가치를 조작하는 행위다. 가치의 위계를 역전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에서의 화폐위조행위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화폐 자체의 위조물이자 마법이며 ‘철저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치의 보편적 기준을 찾아 나선 도덕학자들의 노력은 곧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지만, 경제학자들이 떠받드는 화폐는 하나도 가치 척도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사물이나 활동이 성공적으로 교환되도록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법이며 뛰어난 위조행위인 것이다.

(69) 우리가 도덕을 인위적인 것으로 본다면 자연은 분명히 도덕의 외부에 위치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자연 안에도 가치를 심어놓았고, 결국 우리는 자연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본다.

(70) 니체가 ‘도덕의 자연사’를 이야기 할 때 그는 ‘자연의 도덕사’가 꿈꾸는 선한 자연(루소의 자연)을 인정하지 않는다. 19세가가 18세기보다 조촐하나마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이 있다면 자연의 비도덕성을 승인한 것이다. “자연에의 복귀는 아니다……. 결코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자연이란 바꿔 말하면 자연처럼 감히 비도덕적인 것이다.

(72)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의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 한 이웃은 다른 이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이웃의 영혼은 언제나 다른 이웃의 광기와 악의를 괴이하게 생각했다.”

(72) 그러나 니체는 서로 다른 도덕적 가치들이 역사에 존재했다고 말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가치의 가치를 묻는 계보학자는 그러한 도덕적 판단들이 어떠한 토양에서, 어떠한 건강상태에서 나온 것인지를 진단한다. 유래와 혈통을 밝혀주는 것. 고급과 저급, 강함과 약함, 거인과 소인의 위계를 세워주는 것이 계보학이다. 의사가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다른 건강상태’ 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처럼, 계보학자는 도덕의 유형을 세움에 있어 ‘다른 도덕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2-4 강한 자와 선 한자>

(77) 여기서 평가 양식상의 중요한차이가 나타난다.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강한 자는 선 한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 한자는 “억압하지 않는지,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7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고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중략)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2-5)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80) 양에게 독수리의 힘을 요구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면, 똑같이 독수리에게 양처럼 약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양은자신이 독수리보다 강하다고 위로한다. 그것은 바로 강함을 억제하는 힘, 즉 유혹에 견디는 힘이며, 독수리는 이 힘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약자는 자신의 약함을 하나의 공적이자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82) 이제 매 맞고 있는 것은 약자나 귀족이 아니라 바로 약자 자신이다. 인간을 인간 자신을 질병처럼 학대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관리한다.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사악한 것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을 체크하는 청교도가 근대인의 얼굴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이제 죄는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닌가. 이미 인간은 ‘원죄’를 타고 났으므로 살아있는 한,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형벌도 이처럼 잔혹하지는 않을 것이다.

(83)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84) 이제 약자는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강자는 “능동성 개념을 박탈하고.... 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2-6 도덕이라는 동물원>

(85) 성직자라는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 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 시킨다.

(86)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 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 지도 모르다 는 생각…….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성직자들은 인간들이 ‘개선’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과연 ‘개선’된 것인가? 짐승은 단지 덜 위험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공포감과 고통, 상처, 굶주림이 야수를 병악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87) 정리해보자 먼저 ㄴ저 세계를 설정하고 그것의 고차적 가치를 통해 이 세계에 대한 평가절하가 일어났다. 그 다음 고차적 가치들 자체에 대한 평가절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결국 평가하는 것 자체를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칸트에서 헤겔로, 그리고 쇼펜하우어에 이르기 까지, 또한 초기 기독교적 원한의 정신에서 불교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부정의 운동은 무를 행해서만 나아간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 쇠우리에 갇힌 동물들은 죽어가고 동물원을 폐쇄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2-7 선악을 넘어서>

(88) 선악이라는 도덕적 가치판단을 넘어서도 여전히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평가는 남는다.

(89) 중력이나 전자기력처럼 덕도 사람을 당기고 밀치면서 행사되는 실재적인 힘인 것이다. 덕을 하나의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니체의 도덕학에 대한 비판이 자연학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학자들은 사람들이 종교나 미신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예속을 원할 수도 있음을 경고해 왔다. 자신의 신체 상태를 잘 아는 일, 그리고 그것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90) 니체는 『에티카』의 저자처럼 인류의 건강에 대해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을 넘어선 영역에서도 여전히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존재한다.” 그의 철학이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가치평가를 포기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귀족과 노예, 거인과 난쟁이, 덕과 도덕, 건강과 질병,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가치 평가한다.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3-1 헤르메스가 전하는 메시지>

(93)그러나 이는 결국 해석학자가 신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헤르메스의 해석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중의 해석’을 거쳐야 한다는 것 의미한다. 이 이중의 해석은 참뜻을 알고 싶어 하는 해석자들에게 부여된 가장 가혹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94)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의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그와 거래를 해야 한다. 해석학자들은 어 떤 거래의 기술을 가지고 있을까?

<3-2> 진리의 해석학

(95)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르는 문화적, 종교적 차이, 해석학자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 없다면 해석학자들은 우선 차이를 넘나들고 있는 헤르메스를 이해해야 한다.

(95)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해석학자들은 헤르메스를 제우스를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로 여긴다.

(96) 그러나 이들과 달리 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

(96) 그는(베티)은 해석에 있어 주관적 계기들의 역할을 최대한으로 축소하고자 했으며, 대상을 대상 자체로 바라보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해석만이 합리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97) 베티가 볼 때, 가다머의 입장은 객관적인 규범을 포기함으로써 ‘해석’에 ‘과학적 기초’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 그러나 가다머가 볼 때 베티는 과학주의의 오류에 빠져있다. 베티는 인간이 근본적인 제약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98) 가다머는 ‘객관적 이해’를 위해 제거하고자 했던 선입견이야말로 우리의 소중한 출발점을 극복하는 것도 말이 되진 않지만 이러한 제한적 상황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전제나 출발점도 갖지 않는 이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99) 하버마스가 주목한 것은 바로 상호주관성이다. 상호 주관성을 과학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주관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설 수 있는 방법이다. 행위자들은 의사소통 행위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수정해가고 결국에는 하나의 합의를 향해 점차 접근해 간다. 그는 ‘이상적 조건의 담화 상황’에서는 서로를 접근하도록 마드는 힘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물론 가다머는 이러한 ‘이상적 담화상황’ 이라는 가정을 “충격적일 만큼 비현실적”이라고 비꼬았다.

<3-3> 스핑크스의 눈

(103)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다. 개인이나 집단은 모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크게 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작게 보기도 한다. 마치 풍경화의 원근법처럼 하나의 소실점을 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거기에 맞추어 사물의 크기를 다르게 본다.

(105) 니체의 해석학은 대상이나 해석자 어느 쪽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니체는 필연성을 갖는 사실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알게 되고, ‘주체’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연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 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 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체계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08) 이것은 일종의 ‘항변할 수 없다는 식의 주관적 강요’다고할 수 있다.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 때는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이 때문에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을 인식하라는 명법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3-4> 가치의 발명

(109) 해석이 진리위에서 논의 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위에서 논의 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109)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겐 즐거움의 대상이다.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끝없는 길이 미로가 아니겠는가.

(110)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112)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이다. 해석행위는 모드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

(112) 사람들이 사실들을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 받아들일 때, 그것은 매우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 그들은 해석을 통해 하나의 가치를 창조하고 생성한다. 니체가 절대주의나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113) 니체의 해석은 지배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기도 하다.

(114) 해석의 비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성된다. 생성된 차이는 괴로운 것이기는 커녕 하나의 멜로디다. 니체가 가장 자유로운 작가라고 칭찬해마지 않았던 로렌스 스턴은 작품이 그렇다. “그가 정말로 칭찬 받아야 할 점은 완결한 멜로디를 구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하는데 있다.

(115) 니체는 “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 위를 내리 쪼이자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질서도 천천히 녹아내린다.”고 말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3-5> 니체에 대한 해석학 -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116) 그녀는 니체의 스타일, 특히 경구나 은유가 ‘저속한 무리를 내쫒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보면 니체는 자신의 이야기를 포착할 수 있는 독자를 선택하기 위해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경구나 은유는 단일하고 결정적인 해석을 쉽게 무너뜨린다. 해석은 항상 무한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118) 들뢰즈는 더 이상 니체의 텍스트를 분석 수준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니체 사상의특징이 방법에 있다고 말한다. 즉 니체의 텍스트들을 파시스트적인 것, 부르주아적인 것, 혁명적인 것으로 규정짓기보다 그런 힘이 만나는 하나의 장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누가 니체주의장니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가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들어 가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이다.

<3-6 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120)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제4장 -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4-1 작은 정치의 시대>

(122) 아마도 니체는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귿대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해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2)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승리에 대한 증명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실패에 대한 예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의 실패는 혁명 때문이 아니라 노쇠함 때문이겠지만.

(123)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한다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여이다.

(125) 니체는 근대의 정치를 ‘작은 정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시대가 끝나간다고 말한다.“이제 작은 정치의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세기의 도래와 더불어 지상의 지배를 위한 투쟁이 막을 열 것이고, 필연적으로 위대한 정치가 도래할 것이다.”

<4-2>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1 - 근대국가와 전쟁

(126) 근대정치는 이러한 창조와 평가, 세력들 및 권력에 대한 물음을 봉쇄하려 한다. 그러한 물음이 커다란 혼란을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유주의자들에게서 이러한 봉쇄가 두드러진다.

(127)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 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인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 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128)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 “패자의 것은 부인, 자식, 재산과 핏줄을 포함하여 모두 승자에게 속한다. 폭력은 최조의 권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국가의 원형은 전쟁을 통해, 그리고 군사계급 속에서 제시되고 있다. 전쟁은 혼돈 상태의 대중들을 군사적 카스트 계급들로 분리시켜 전사적 사회 구조를 만들어 내는 효과가 있다.

(128) 홉스 역시 국가의 기원이 전쟁에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사회상태 외에는 항상 모든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람의 전쟁이 존재한다. 인간은 그들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공통의 힘이 없을 때는 전쟁이라고 불리는 상태에 있게 되며, 그러한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될 것이다.” “국가는 바로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공통의 힘”으로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실체다

(131) 근대 시민사회에서 주권은 전체에게 있지만, 어느 시민도 그 주권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다만 자신이 복종해야할 법을 만드는데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추상화 되고 균질 화된 사회에서 전쟁의 힘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칼을 든 군주는 전쟁을 막으면서도 그 흔적을 지니고 있지만, 일반의지는 칼 없이도 전쟁을 막아낸다. 모두에게 주어진 한 표가 전쟁의 힘을 흡수해 버렸다. 민주주의는 가장 효과적인 전쟁 억제 수단이다.

<4-3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2-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132) 니체는 우선 자유주의자들이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하는 기본원리에 대해 비판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하나의 형이상학적 실체일 따름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선험적인 개별화된 자아라는 개념에 동의하며, 사회적 관계에 우선한 완전한 인간을 단위로 삼는다. (중략) 더구나 ‘자유로운 개인’은 떠드는 자유주의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을 볼 수 가 없으며, 분수 있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옴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고 말한다.

(136) “사회주의자들은 소유물의 분배가 과다한 불공정과 폭력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부당한 기반위의 구축물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데, 이 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개개의 것만을 보고 있다.”

(137) 결국 이 외침은 사회주의의 실패, 정치의 쇠태와 연결되고 민주주의라고 하는 수동적 허무주의의 승리로 연결된다. 니체는 “사회주의가 원하는 국가가 달성된다면 생성의 강한 에너지는 파괴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 때 국가는 새로운 생성적 힘을 상실하고 허무주의적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니체는 현대 민주주의를 ‘국가의 몰락에서 나온 역사적 형태’라고 말한 것이다.

<4-4> 길들이기와 길러내기

(140)다이어트라는 말과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을 주목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비율이라는 단어와 합리성이라는 단어 사이에 존재하는 친화성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성’의 중시이다.

(142)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143) 니체는 이 작업을 ‘기억할 수 있는 동물 기르기’라고 명명한다.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144)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재갈 물린 이들을 매개로 하여 그 나라의 모든 청년층은 국가에 유익한 것을 교육받는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의해 승인되고 인정된 생활 진로만이 사회적 영예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그러한 성향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전염된다.

<4-5 아곤의 정치>

(146) 아곤은 오히려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사회의 항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체제이다.

(150) 주변 국가들과 함께 경쟁 않고 발전할 수 없게 되자마 밖을 향했던 에너지는 안을 향하게 되고, 아곤은 무어지고 안타곤의 사회가 된 것이다. 니체는 이때부터 그리스국가가 초월적으로 군림하기 시작하여 잔인해졌고, 그리스인들과 함께 타락했다고 주장한다.

(152) 전쟁이란 내가 주권적 능력을 그대로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생성적 힘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쟁을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의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

<제 5장 권력의지와 영원 회귀(1) 자연학 + 윤리학>

<5-1> 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내재적 우주론 - 원자론의 경우

(155) 니체는 원자론을 이렇게 비꼬았다. “저울에 달아보아 차이를 확인할 수 없게 되자” “다이아몬드와 흑연과 석탄이 동일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동일한 어떤 것, 불변의 어떤 것을 공상해야 했던 것 아닌가?

(158) 데모크리토스가 필연성을 중시했다면 에피쿠로스는 우발적인 사건들과 그것들의 복수의 원인들을 생각했다. 데모크리토스가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성의 세계만 보았다면, 에피쿠르소에게 세계는 ‘사건들의 사건’, ‘변화로서의 변화’가 구성하는 시간이 흐르는 생성의 영역이었다.

<5-2> 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159) 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 (중략) 힘의 두 번째 특성은 ‘표현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힘 사용의 극대경제”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자신의 능력을 남겨두지 않는 힘의 속성을 절묘하게 드러냈다.

(159) “어떤 양의 힘이란 사실 그것과 같은 양의 충동, 의지,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충동작용, 의지 작용, 활동 작용에 불과하다.”

(161) 이제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은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이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 이다.

<5-3> 힘의 질 - 능동과 반동

(162) 클리나멘이란 직선으로 날아가던 원자가 그로부터 이탈해서 편위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편위는 원자들의 새로운 충돌과 거기서 기인하는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 낸다. 에피쿠로스는 편위야말로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차적 원리라고 생각했다.

(164) 힘을 사유했던 니체 역시 자연과학적 법칙화에 반대했다. 니체에게 중력은 항상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등장한다. ‘무거운 정신’은 중력의 상징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힘들의 모든 우발적 운동을 잠재우는 족쇄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드높은 하늘”에 던져진 “주사위”를 “영원한 이성의 거미줄”로 묶어 버린다. 던져진 모든 주사위들은 지구의 중심을 행해서만 떨어지고, 모든 반응들은 평형상태를 향해서만 돌진한다.

(165) ‘힘의 양이 얼마나 되는가?’ 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질을 가지고 행사되는가?’ 는 물리학자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다. 양적인 차이에서도 우리는 힘의 내적 의지를 확인할 수 있지만, 니체가 힘을 분석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질적인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이지이다. 니체에게 강약의 문제는 양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167) 니체는 강함과 약함이 능동과 반동을 고유함으로 갖고 있다고 보았다. “본성의 강함은 반동을 대기시키고 연기시키는 일에서 나타난다. 어떤 종류의 무관심이 강함에는 고유하다. 마치 약함에는 반동의 부자유함이 고유한 것과 같다.

(168) 그러나 능동적 힘 역시 반동적 힘의 질을 변화시킨다. 능동은 “반동을 뒤로 밀거나” 그것에 “무관심한 듯” 자기 능력의 한계까지 나아간다. 능동적 힘은 “정면에서 공격한다.”: 이때의 능동적 힘 역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다.

<5-4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171) 권력의지는 사실상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자, 능력을 실현하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권력의지’가 개념들의 조합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권력의지’는 ‘권력’과 ‘의지’의 결합한 개념이 아니다. 니체는 힘의 내면의지를 ‘권력의지’라’ 말로 바꾸었는데, 그때 ‘의지’란 사실상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173)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모든 것을 권력의지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권력의지가 아닌 존재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 다시 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이다.”

(174) 허무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무의 의미’, 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허무주의가 모든 것이 헛되다 고 말할 때, 그때의 권력의지는 모두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힘들의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시킨다.

<5-5 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175)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은 ‘긍정’과 ‘부정’이다. 긍정은 디오니소스적 정신이며, 그리스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하다. 반대로 부정은 삶을 비난하는 노예의 것이고, 심판을 불러오는 사제의 것이며,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포섭하려는 변증법의 것이다.

(176) 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다루는가’ 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177) 마주침의 순간에 작동하는 권력의지가 어떤 것이냐의 문제는 ‘강하게 되느냐(강자의 생성)’, ‘약하게 되느냐(약자의 생성)’을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곧바로 윤리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인가 선악이라는 도덕의 문제를 넘어서 ‘좋음’과 ‘나쁨’이라는 윤리의 문제로 한 힘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힘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177) 좋은 해석이나 가치 평가란 긍정의 권력의지이다. 긍정의 권력의지야말로 좋은 지배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 까? 우리 육체는 긍정의 권력의지를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 니체는 그것이 권력느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179) 권력의지는 새로운 힘들과 마주칠 때마다 항상 촉수를 내민다. 그것을 느끼고 평가하는 것, 육체는 감각과 평가를 통해 권력의지를 경험한다. 사회든 개인이든 나쁜 권력의지는 이러한 감각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강자들이 창피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것을 약자는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낀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방식인 것이다.

(인용구절이 많아서 부득이 나누어서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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