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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6일 11시 34분 등록
■ 고병권에 대하여

● 순천에서의 만남

지난 여름, 순천에서 강연이 있었다. 순천시립도서관에서 매년 진행하는 어린이 독서캠프에서의 강연이었다. 초등학생 앞에서 강연을 해 본 적은 딱 한 번이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참석하는 시간관리 세미나였고, 부모들의 반응은 좋았으나 어린이들의 반응은 아예 없었다. 그 이후로 초등학생 강연은 절대 마다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번 강연은 절친한 동료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고객 측에서 이미 한국리더십센터 강연 순서를 넣어서 홍보했다는 것이었고, 동료는 방학 때면 다른 강연으로 지방 강연을 갈 겨를이 없다. 동료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응한 강연이지만, 걱정이 된 건 사실이다.

걱정이 된 것과는 별도로 반가운 일이 있었다. 독서캠프 일정을 보니 나는 셋째날 강연이고, 둘째날에는 고병권 님(이하 고추장)의 강연이 있었던 것이다. 같은 날이 아니긴 했지만 어떤가? 내가 하루 일찍 내려가면 되는 일이었다. 캠프 둘째날 일정을 확인해 보니 회사에서 시간관리 강연이 있어서 동료에게 부탁하여 날짜를 바꾸었다. 그리고는 기차표를 예약했다. 순천으로 가는 열차는 시간대별로 한 대 꼴이었다. 나는 예약한 시간을 알려달라는 담당자의 메일에 회신을 했다.

한 달 후, 순천 출발 하루 전날이다.
순천시립도서관 독서캠프 진행자가 문자를 보내왔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내려오실 때 심심하실 테니, 고병권 선생님이랑 얘기나 나누세요.
전화번호 알려드릴께요. 016-9XXX-9XXX”
운이 좋았다. 고추장님과 같은 열차를 타게 된 것이다.
나는 고추장님의 책 두 권을 가방에 넣어 순천으로 출발했다.

순천행 새마을호 안에서 보냈다.
셋째 날, 강연자라는 자기 소개를 하고 강연 준비가 끝나시면 잠깐 대화라도 나누고 싶다는 문자였다. 이 문자를 보내는 데도 4시간이 걸렸다. 도착하기 한 시간 전이 되어서야 겨우 용기를 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추장님과 나는 새마을호 좌석에 나란히 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강연 시작 3시간 전에 만나서 2시간 정도는 줄곧 대화를 했다.

나는 이런 질문들을 하려고 준비했었다.
- 영성, 자기성찰, 철학의 비교
-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진리와 정답은 있다”라고 믿는 것에 대하여
- 상대주의의 폐단(도덕의 붕괴 등)에 대하여
- 삶의 긍정성 창조에 도움이 안 되는 철학자가 있다면? (쇼펜하우어 등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 인생에 도움을 주는 철학자는? (니체처럼 행복과 건강 개념을 추구하는 철학자로 어떤 분이 있는지 궁금했다.)
- 대상이 초등학생이신데? (강사로서 궁금했다.)
- 사회학 전공이신데, 어쩌다가 니체에 걸리셨는지?
([출판저널]은 고추장님을 사회학도의 길을 성실히 걸어다가다가 니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표현했다. 이에 대한 고추장님의 생각과 걸려넘어진 배경이 궁금했다.)

이런 수준 낮은 질문들은 고추장님의 수준 높은 답변들과 어울려 무색해져 버린 것도 있고, 지식이 일천해서 답변을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내가 이해했던 것들 중 기억나는 답변들을 적어본다. 아마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 이해했던 전부인 것 같다.

- 사회학 전공이신데, 어쩌다가 니체에 걸리셨는지?
니체와의 만남은 25살 때 『도덕의 계보』를 읽으며 시작되었다. 그리고, 29살 때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을 썼다. 화학 → 사회학 → 철학의 길을 걸어오면서 좋아하는 일을 발견했던 것 뿐이다. (걸려 넘어졌다는 표현에는 웃으며) 계획을 세웠지만 그것대로 잘 안 되는 게 인생이더라. 그저 나의 관심을 따라왔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죠.”라고 [출판저널]의 표현에 동의했다. 하지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개미처럼 철학해서는 안 된다. (아직도 이 말은 이해가 안 된다. 맞게 적은 것 같긴 한데...)

- 대상이 초등학생이신데?
걱정을 많이 했다. (정말 많이 걱정하신 눈치다.)
메시지를 묽힌다고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자극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강도 약화는 안 된다.
(메시지의 강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극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이 중요성에 동감했다. 강연 호응은 좋았다. 아주 가끔 어려운 용어가 살짝 섞이기도 했지만, 어린이들 앞에 설 때의 특유의 유치원 교사적 말투를 잘 구사하셨고, 쉬운 사례로 인해 충분히 가려질 수 있는 실수였다. 담당자도 고추장님의 강연에 만족해했다.)

- 삶의 긍정성 창조에 도움이 안 되는 철학자가 있다면?
- 인생에 도움을 주는 철학자는?
(이 두 가지 질문은 우문이었나 보다. 조금 다른 내용의 답변을 들려주셨다. 나의 수준에 맞추어, 나에게 필요한 말씀을 해 주셨으리라)

헤겔, 소크라테스, 칸트 등은 주류 철학자들이다. 소크라테스는 개인이 아닌 보편주의 철학을 추구했다. (스토아 학파가 지배한 기간이 500년이다.) 철학사 전개상 아구가 안 맞는 애들은 주류 철학에서 빠지게 된다. 빠진 철학자들 중에는 중요한 인물도 더러 있다. 스피노자는 비주류였다. 이 말은 철학 전공에서 깊이 배우지 않는다는 말이다. 철학사가들은 극작가다.
(우리가 배웠던 사실과 역사의 관계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가는 자신의 역사관에 맞는 과거 사실을 끄집어와서 역사를 서술한다. 이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동의하시며 더욱 잘 설명해 주셨다.) 삶을 바라보지 않고 철학한 사상가들도 있다. 나의 관심은 거인들간의 대화다. 주류 철학에 편입하지 못한 거인들은 특이성을 가졌다. 특이성간의 연결이 관심사다. 별들의 우정이라 표현하고 싶다. 연속적이지 않고 밝게 빛나는 별 말이다.

경영학 담론과 철학 담론이 함께 공유하는 영역을 발견했을 때에는 서로 생각을 대등하게 주고 받으며 대화하기도 했다.
플라톤 철학은 결핍을 보지만, 그렇지 않은 철학도 있다.
약점을 강점의 대립 항목이 아니라, 강점의 한계로 보는 것이다. 빛과 어두움이라는 이원론이 아니라, 빛과 빛의 미도착이라는 일원론으로 보자. 그렇다면 빛이 스스로 빛과 어두움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마커스 버킹엄의 강점론이 생각하는 대목이다. (마커스 버킹엄은 약점을 묘사하는 표현은 많으나 강점을 표현하는 언어는 빈약하다고 지적했다.)
스피노자는 특이성(singularity )의 철학을 강조했단다. 두드러지게 다른 성질이 특이성이다. 마커스 버킹엄의 개인화 테마가 떠올랐다.

대화는 열차에서 내려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를 타고 캠프 장소로 이동할 때에도 열렬히 진행되었다. 더 깊은 철학적 대화가 많았으나 생략한다. (이해부족으로 서술할 능력이 안 되기에.)

고추장님이 좋아하는 사람 얘기로 마무리해야겠다.
한나 아렌트를 좋아한단다. 악의 평범성 개념 말이다.
“악마는 옆집 아저씨처럼 평범하더라. 악마는 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생각을 안 하면 악마가 된다.” 말을 했다.

강연이 끝나고 순천역 앞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헤어지기 전에 책에다 사인을 받기도 했다. 당신이 좋아한다는 짧은 경구를 써 주셨다.
계속 곱씹어 보게 되는 말이다.
“Nitimur in Vetitum" (맞나?)
‘금단의 땅에서 삶의 양식을 구하라’는 말이다. 이것 역시 맞는 말인지 지금도 생각해보고 있다.

[고추장?] 연구실(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고병권 님은 고추장이라 불린다. 연구실에서의 직책이 ‘추장(酋長)’이다 보니 고추장이 된 것이다. ‘대표’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 만든 직책이다.

■ 내 마음에 들어온 글 귀

[4]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에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읻.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5] 니체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7] 니체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7]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이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7]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8]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도 실천이 필요하다. 니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대로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21] 길게 숨을 쉬고 나서 잠수하라. 그래야만 깊은 바닥까지 볼 수 있으리라.

[25]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 철학은 얼마나 가치 있는 학문인지, 삶에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니체는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를 묻는다.

[27]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27]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 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를 삼았다.

[31] 생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이 부딪힌 과제 : 철학을 치료하는 철학, 삶으로부터 나쁜 기운을 덜어주는 철학, 삶으로부터 죄의식을 걷어 내는 철학,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삶을 긍정하는 철학,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가능할까? 불행히도 서구 사유의 기원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라는 두 스승의 죽음.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33] 신학자들의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눈부셔 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을 걱정한다.

[33]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42]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삶의 염세성을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49]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49] 지배적 사상은 지배적 삶의 방식과 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다.

[52] 우리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을 부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니체는 우리의 문명을 ‘아픈 것’으로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 ‘미쳤다’고 본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 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에 문제가 있다는 그것은 철학의 사랑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59]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니 신앙이 아니다.”

[62] 도덕학자들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의식이다.

[63]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

[65] 계보학은 무엇보다도 보편화에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 니체는 도덕학자들에게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지만, 그들에게 역사학이 없는 아니다. 문제는 역사학이 뿌리나 열매를 신성화하기 위해서 차이들을 난폭하게 처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65]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푸코는 게보학자의 탐사 작업을 ‘잃어버린 사건들의 해방’이라고 불렀다.

[72] 니체는 서로 다른 도덕적 가치들이 역사에 존재했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가치의 가치를 묻는 계보학자는 그러한 도덕적 판단들이 어떠한 토양에서, 어떠한 건강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를 진단한다. 유래와 혈통을 밝혀주는 것, 고급과 저급, 강함과 약함, 거인과 소인의 위계를 세워주는 것이 계보학이다. 의사가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다른 건강 상태’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처럼, 계보학자는 도덕의 유형학을 세움에 있어 ‘다른 도덕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87]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 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 밝힌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

[90]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96] 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109] 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110] 사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 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112] 해석 행위는 모든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

[112]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114]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122]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3]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128]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 “패자의 것은 부인, 자식, 재산과 핏줄을 포함하여 모두 승자에게 속한다. 폭력은 최초의 권리를 제공한다.”

[131] 고대의 국가가 전쟁에서 기원한다면 근대의 국가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에서 등장한다. 모두가 지쳐 더 이상의 전쟁을 포기할 때, 새로운 우상인 국가가 등장한다.

[166]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167] 니체는 강함과 약함이 능동과 반동을 고유함으로 갖고 있다고 보았다. “본성의 강함은 반동을 대기시키고 연기시키는 일에서 나타난다. 어떤 종류의 무관심이 강함에는 고유하다. 마치 약함에는 반동의 부자유함이 고유한 것과 같다.”

[167] 능동적인 힘은 ‘시작하는 힘’이며 ‘공격하는 힘’이다. 반동적인 힘은 ‘비난하는 힘’이며 ‘상쇄시키고 흡수하는 힘’이다. 모든 방향(가치)은 능동적인 힘이 결정한다. 우리는 반동적 힘의 작동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용수철을 누를 때를 생각해보자.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이 작동했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 방향은 능동적 힘의 작동을 상쇄시키는 방향이다.

[169]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면의지가 바로 권력의지라고 말하고 있다.

[171] 의지는 욕구나 갈망, (무엇보다도) 결핍과는 다른 것이다. 의지는 명령하는 것이다. 힘이 다른 힘에 자신의 영향을 강제할 때 표현되는 것이 의지이다.

[197] “너무도 멀리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그리하여 내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다.”

[199)]나는 나의 늙은 악마이며 불구대천의 원수인 중력의 영도, 그리고 그가 창조한 것들, 즉 강제와 규정, 필요와 귀결, 목적과 의지, 선과 악을 재발견했다. 왜냐하면 춤춰 넘어야 할, 춤춰 건너야 할 대상이 존재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가벼운 자, 가장 가벼운 자를 위해서 두더지와 무거운 난쟁이들이 존재해야 되지 않겠는가?

[200]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deion)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praxis)이다.

[204]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205]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208] 주체란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이다. 주체 역시 건강 상태만큼이나 많이 존재한다. 대상들이 복수로 존재하는 것처럼 주체도 복수로 존재한다. 니체가 운명애(amor fati)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생성이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라!

[208] 우연은 창조적 힘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

[209] “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서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계.” 영원회귀의 유혹 – 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223]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나 강함이 초인간적인 것으로서, 밖에서 온 것으로 포착되고 있는 한 인간은 스스로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극히 가련하고 약한 면과 극히 강하고 놀라운 두 가지 면을, 두 가지 영역 가운데로 분열시키고, 전자를 ‘인간’, 후자를 ‘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231]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233] 디오니소스는 가벼움과 기쁨 자체이다. 그의 춤은 생성과 생성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고, 웃음은 다수성과 다수성의 단일성에 대한 긍정이며, 주사위 놀이는 우연과 우연의 필연에 대한 긍정이다.

[239]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240] 완벽한 독자를 상상해 보면 그 완벽한 독자란 항상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로 변하곤 한다. 게다가 그는 순종적이면서도 교활하고 조심스럽다. 그는 또한 하나의 타고난 모험가요 발견자이다.

[244] “새로 쟁취한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낡은 것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배를 불태워 버렸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용감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259] 제 아무리 숭고한 가치라 해도 합리성을 갖지 못한다면 공공의 무대에서 물러나야 했다.

[260] 확실히 베버는 자본주의를 자본이나 기술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베버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인간(근대인)은 전혀 새로운 종의 인간이다.

[265] 동양의 승려들은 도를 닦으면서 시간 의식을 갖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서양의 수도원에서는 도를 닦는데 방해가 되는 충동이나 잡념을 억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시간표가 이용되었다.

[266] 자신들의 의지로 행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중요한 전환이다. 합리적인 시스템이 개인들의 일상생활의 수준을 넘어서 조직이나 제도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 관료제다. 베버는 관료제를 기계라고 불렀다. 관료제란 개인적 수준에서는 책상 앞에 붙여놓은 게획표일 것이고, 사회적 수준에서는 거대한 행정체계 및 사회제도들을 의미한다.

[268]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271] ‘과학적 경영’이라고 불리는 것이 수도원과 군대의 합리적 훈육이 발전된 형태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279] 베버는 소명 의식과 거리 두기 능력, 책임감 등을 가진 정치인에게서 관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발견한다. 이러한 정치인이야말로 그가 보기엔 관료제 기계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280]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과 관료제적 정치인의 차이는 진리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학자와 단순한 효율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술자의 차이와 같다.

[294] 답은 대개 질문들 뒤에 숨어 있다. 그것은 질문들과 동떨어진 채 답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그 답의 형식과 내용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309] 생산 공간으로서의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왈쩌나 테일러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단순히 인간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공동체, 바로 문화적이고 언어적이며 종교적인 공동체 등에 의해 규정된다고 지적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숙고해서 선택하는 연합체란 일종의 '악성 유토피아'일 뿐이다. 우리는 항상 미리 존재했던 '비자발적 공동체'에 들어가 있다.

■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을 읽고 & 내가 저자라면

와우팀원 한 명을 만났다. 원고마감일이었지만 만나자는 요청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만났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며 그의 고민을 들었다. 두 시간여 동안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고, 그는 나의 의견을 궁금해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했다. 100%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서 문제의 터널 끝에 해결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실제로 만났기에 마음과 우정을 나누었다. 만남은 전화 통화보다 강력하고 이메일보다 진하다.

서울 시내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을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다. 가는데 한 시간, 만나는데 두 시간, 다시 돌아오는 데 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래도 만날 일이 있으면 만나야 한다. 시간이 걸려도 만나야 한다. 사람들과의 만남의 영역까지 효율성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시간 관리는 업무를 위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시간 투자를 해야 한다. 사랑의 표현이 곧 시간이다. 사람에게 아낌없이 시간을 줘야 한다. 홀로 있을 때에는 철저할지라도, 함께 있을 때에는 느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이 쫓기지 않은 채 나와의 시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나는 효율적인 시간관리 세미나를 진행하는 강사다. 나의 느긋함이 그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요즘 일이 없으신가 봐요. 무척 느긋해 보이세요."라는 것이다. 반면, 제일로 부끄러울 때에는 "바빠 보이세요."라는 말을 들을 때이다. 바빠 보이는 이들에게 부탁하기는 쉽지 않다. 미안하기 때문이다. “저 요즘 바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폰과 마음을 열어 둘 때에는 일이 주지 못하는 행복감이 찾아 든다.

'자기 경영'이라는 구호 아래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이야기들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도움을 주는 인간들을 ‘관리’한다. 자기 경영 담론이 효율성과 경쟁력 등의 얘기들로만 이뤄질 때 세상은 점점 삭막해져 갈 것이다. 존경받는 자기경영자는 세상에 따뜻함과 희망을 심으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지금으로서는 알지 못할지라도 더욱 소중한 것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더 큰 의미가 있고, 더 따뜻한 세상이 있다고 믿는다. 세상은 더욱 아름다울 여지가 남아 있다.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관계를 최우선의 가치로 두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장 소중하고 만남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다.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되 추구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자기만의 스타일과 타고난 기질의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탁월한 리더는 비전을 제시하되 일하는 방식을 획일화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 경영의 담론 중에 분명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메시지를 자기 경영 담론 속에 교묘히 섞어 놓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최고의 자기 경영 비법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가 결여되어 있다.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성을 놓치고 있다. 동료 한 명이 회사 전체 행사에 대한 공헌과 봉사가 몇 년 전에 비하여 눈에 띄게 약해졌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점점 개인의 성과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만약 그의 진단이 맞다면 우리는 소중한 것 한 가지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 사는 삶의 기쁨 말이다. 냉혹한 사회생활에서는 맛보지 못하는 아름다운 감정들 말이다.

역사의식을 놓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이 가장 행복한 길인지를 물어보기 위해서 통시적인 관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 요즘이다. 통시적이라 함은 당대의 사유 흐름을 다른 시대의 생각들로 점검해 보는 것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 모두가 잘못된 길을 걸어가며 ‘우리는 잘 해내고 있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복과 성공을 돕겠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보다 넓은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고, 개인의 삶은 그 한 사람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자기계발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리키는 방향이 정말 사람을 행복과 건강으로 인도하는 길인지를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한다. 올바른 방향 제시는 자신의 길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길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이다. 그들이 NO.1 의 길이 아니라, Only 1 의 길을 걷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자기계발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성공 요인을 다른 이들이 가진 재능과 기질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최고의 비법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선한 의도만으로는 부족하다. 각 개인의 고유성을 계발시키는 보다 섬세하고 민감한 방향 제시를 해야 한다. 의사들의 시술이 선한 의도만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치료 결과까지 좋아야 하듯이 자기계발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그들의 처방이 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좋은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자신들이 자주 사용하는 도구들의 효과와 유익, 그리고 한계를 잘 알아야 한다. 심리학이라는 도구의 특성에 대하여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심리학은 과학이 되기 힘든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동기부여의 수단으로 좋으나 그들의 실천지침을 제시할 때에는 심리학적 기법의 한계를 잘 알아야 한다. 폭넓은 실험을 거치지 않은 몇 가지 사례의 성급한 일반화는 그럴 듯한 설득력을 갖지만 몇 사람들만 효용이 있는 병약한 주장이다. 그런 주장은 강연장에서만 힘을 갖는다.

자기계발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좋음’의 대상을 인류가 아닌 개인에 둔다. 여기에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만을 주장하면 우리 모두는 잘 살 수 있지만, 분명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개인주의적인 사회를 맞이하게 된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빈곤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주의의 취약점이 분배의 불평등이었음을 생각할 때 당연한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문제로 보인다. 영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강력한 재분배 정책을 주장했지만 그것은 자유주의의 주된 담론은 아니었다. 자유주의의 태동은 절대군주제라는 구체제를 타파할 수 있는 새로운 계층, 부르주아의 등장으로 인해 가능했다. 자유주의는 부르주아적 사상이었고, 그것에 대하여 불만은 없다. 다만, 사상의 태동이 어느 계층에서 일어났던지 사상의 수혜자는 모든 계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고, 지금의 신자유주의를 보면 사상의 수혜자가 모든 계층이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나의 진단이다. 자기계발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보다 영속적인 영향을 갖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자신의 주된 생각이 어떤 사상에서 연유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육자이기 때문에. 교육자들은 흔히 높은 기준에 의해 잣대질 당한다. 억울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합리적이다.

교육자가 될 사람들은 대학에서 (너무 피상적이긴 하지만) 교육 철학을 공부한다. 공학자가 될 사람이 공학 철학을 공부하지 않는다. (하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지만 현재로서는 하지 않는다.) 많은 교사 지망생들이 대학교에서 교육 철학을 배울 때 보다 그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면 교육 현실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이상적인 생각이라고 치부당할지 모르겠지만, 현실은 교육 철학 보다는 자기 과목의 세부 지식이 더욱 중요하게 간주된다. 우리에게는 박식한 교사도 필요하지만 지혜와 행복을 전해주는 교사도 필요하다. 그런 교사가 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이 철학을 가진 교육자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계발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교육자적 사명을 가져야 한다. 기업이 이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개인이 성공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산업교육 강사들도 수입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눈물이 난다. 세상이 점점 살기 힘들어져 가는 것 같아서.
나는 잘 살고 있다. 일도 재밌고 조금씩 역량을 쌓아가고 있는 것도 뿌듯하다. 하지만 내가 잘 살아가고 있는 것만큼 세상 사람들도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선릉역에는 늦은 시간인데도 할머니가 계단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펼쳐놓은 시커먼 수건 위에는 동전 몇 개가 널려 있었다. 이런 분들이 점점 줄어드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잠들려고 누웠다. 야구 소식을 듣고자 TV를 켰다. 채널을 돌리다가 <해바라기>라는 영화를 잠깐 봤다. 이렇게 하여 영화를 보는 거의 없는데, 이상하게도 영화에 끌렸다. 나쁜 사람들이 나온다. 정의를 모르고 편법을 일삼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이 오태식의 누이와 어머니를 헤쳤다.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저들은 무슨 생각으로 벽돌을 가지고 저 소녀의 머리를 내리칠 수 있을까? 인간의 마음은 참 깊은 수렁이다. 소녀도 불쌍했고, 내리친 깡패도 불쌍했다. 깡패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저런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군대에 들어가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일만 한다. 하워드 진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전쟁터에서 잔인한 짓을 할 수 있게 되는지 이해한다고 했다. 일반의 남자들도 전쟁터에 가서 폭탄을 떨어뜨리고 여자와 아이들을 죽일 수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것이다. 전쟁에 참여하는 이들은 자신은 정당한 편에 서 있다는 한 가지 판단을 내린다고 한다. 우리는 선하고 저들은 나쁜 자들이다, 라고 생각하면 더는 판단할 필요도 없고, 재검토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나쁜 깡패는 성품이 나빠서가 아니라, 어떤 생각에 세뇌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은 멋지고 저들은 고리타분하다. 그들의 세계를 몰라 더 이상의 사유가 힘들다.
문득, 악이 도덕적 미성숙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무지에서 올 수도 있다는 한나 아렌트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이 세상을 떠받드는 체제는 정의로운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세상에 맞서리라.

해바라기 엄마는 아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가족'이라 했다.
정약용 선생님은 나의 가족이 소중하다는 것을 헤아려 다른 이의 가족의 소중함까지 지켜내려 했다. 가족을 중요시하지 않는 자기 경영은 진리도, 지혜도 아니다. 부모님 어깨 주물러드릴 시간을 아까워하는 시간관리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기술이다. <해바라기>에 등장하는 나쁜 사장님은 오태식 더러 "쓰레기는 쓰레기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어, 쓰레기도 재활용 기술을 거쳐 새로운 상품으로 재탄생하는 세상이 되었다.

세상은 스스로를 정화하고 쓰레기를 재활용할 수 있을까? 자기계발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 시대를 떠도는 사유들 중에 쓰레기 같은 사상을 집어내고 정화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상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을까? 이제 자기 경영은 사회의 필요들과 비전들을 품어야 한다.
누구나 공헌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누구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자신의 가족을 섬김으로써. 한 사람에게 사랑을 전함으로써. 한 번에 한 사람씩만 하면 된다. 이천년전 예수님이 행하셨던 고전적인 방식은 어떨까? 그 분은 한 사람씩 만나셨다. 짧은 생애였지만 조급하지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듣고 나누었다. 우리 모두가 이 소박한 방식을 실천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이 방식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회복해야 할 방식이다.

인터넷은 학창시절의 친구들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만남의 형태를 가능케 했다. 우리는 일대 삼십의 만남까지도 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만남이 아니다. 새로운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전과는 다른 프랜드십으로 관계 맺으려는 새로운 생각과 마음이 필요하다. 사랑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대상으로의 교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더 깊은 파트너십으로 이전보다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쁜 생각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행복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좋은 생각은 켜서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이들의 행복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장 환영할 만한 생각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다고 믿고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을 고민해야 나의 영혼도 성장할 것이고, 세상은 어제보다 살맛나는 곳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더욱 확장하여 우리 시대에 발생한 작은 오류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해 보고 싶다. 작은 오류에 안심하다가 더 커질까봐 염려가 되기 때문이다. 작은 문제에 왜 그리 호들갑이냐고 말하는 자들이 있더라도 용기를 잃고 싶지 않다. 한 권의 책이 될 만한 분량이라면 책으로 내고 싶다.

숙고해야 할 몇 가지 질문들

- 선량한 양들의 정신 세계는 정말 잔혹한가?
(내가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지옥과 천국로 구분되는 사후의 길을 복수로 생각하거나 지옥 대비 천국으로 생각하여 큰 축복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믿으면서도 냉랭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생각한다.)

- 니체와 쇼펜하우어가 갈라선 그 지점에서 20세기 전반 유럽을 뒤흔든 허무주의가(혹은 무실론적 실존주의까지) 탄생하게 된 것은 아닐까?
(왠지 맞는 것 같다. 사실 여기서 번갯불같은 생각이 일어나서 기뻤다.)

- 니체는 자연주의, 허무주의 등이 가져오는 인간의 상실, 의미의 상실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이번 책에서는 알 수 없다. 모든 무신론은 인생의 의미, 존재의 의미 상실로 인해 괴로워했던 것 같다. 니체는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하고 위대한 철학자로 서게 되었을까?)

고민해 볼 일이다. 해답을 줄 것 같은 책을 주문해 두었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
IP *.135.20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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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0.16 12:55:00 *.249.162.56
고추장님과의 인터뷰가 재밌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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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10.16 13:22:12 *.227.22.57
오~ 인터뷰~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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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0.17 15:04:02 *.132.71.8
고추장님과의 만남 부럽다.
희석 왜 그렇게 말이 없었니? 여기에 쏟아 놓은 내 생각들을 보고 놀랬다. 할때는 하고 들을때는 듣는다고 하는 행동패턴이 이런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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