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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6일 11시 36분 등록
(앞에서 이어집니다)

<제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두 가지 반복과 두 번의 긍정>

<6-1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 - 그리스적 사유로부터>

(182) 모든 불멸하는 존재의 죽음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오히려 기쁜 일이다. “장례식의 비가 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 아닌가” 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원자들의 해체가 죽음을 의미했다면 그것들의 조상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원자들의 놀이가 “하늘과 바다, 땅과 강, 그리고 나무와 동물들을 생성시켰다.” 그러면서도 반복은 “또 다른 것들로, 그리고 그 다른 것들은 또 다른 것들로 끊임없이 계속된다.”

(184) 니체는 생성의 세계를 도덕적 해석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한다. 생성의 세계는 무구하다. 생성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헤라클레이토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어떤 철학자들의 무리와도 뒤섞을 수 없는 고귀한 인물로 생각했다.

(185) 헤라클레이토스는 규규정자이든 이데아든 별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생서의 세게만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186)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이 다수다.” 오, 위대한 세계의 어린아이ㅇ;ㅣ 제우스, 오! 위대한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

<6-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익숙한 오해>


(188) 니체는 아주 일찍부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를 하나의 ‘놀이’로서 이해해 왔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생성의 세계를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학자들처럼 동일한 것이 언제 출현할지 계산하고 있을게 아니다.

(189)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터다. 니체는 이것을 ‘주사위 놀이를 하는 세계’로 그리기도 한다. 주사위 놀이란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의 의미를 이해할 때고 등장하는 놀이이다. 항상 자기로 귀환하는 놀이 주사위 던지기! 우리는 학자들에게 영원회구가 왜 어려운 개념인지를 안다. 그들은 주사위는 잘 알고 있지만, ‘놀이’가 대해선 잘 알기 못하기 때문이다.

(192) 영원회귀란 존재의 세계를 생성의 세계로 만드는, 혹은 “그것들을 근접시켜” 이해하는 표현이다.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것인 생성의 세계이며, 존재의 세계에 대한 극한적 근접이다.” 이로부터 니체의 독특한 존재론, 즉 생성의 존재론이 나온다.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 하지 않는 것’이다.

<6-3 반복의 경우 -병에 걸린 차라투스트라와 회복된 차라투스트라>

(196)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 과거를 생성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개의 길이 만나는 출입구”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순간’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가지가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인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

(199) 영원회귀는 두 개의 권력의지를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긍정의 권력의지와 부정의 권력의지, 더 할 것인가, 그만할 것인가?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이해해 가는 속도와 긍정의 권력의지에 다가가는 속도가 일치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영원회귀를 이해한 뒤의 차라투스트라는 완전히 긍정적으로 돌변했다. “나는 어느 심연으로라도 축복하는 예라는 말을 가져갈 것이다. 나는 축복하는 자, 예라고 말하는 자가 되었고, 그러기 위하여 오랫동안 씨름을 했고 씨름꾼이 되었다.” 중력의 영? 그것은 전혀 무겁지 않다. 두더지와 난쟁이? 그것들은 장난감이다.

<6-4 긍정을 부르는 긍정>

(201)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작은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된다. 권력의지가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느낌방식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4) “부정은 긍정에 대립되지만 긍정은 부정과는 다르다. 우리는 긍정을 부정에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긍정 그 자체 내에 부정을 위치시키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은 긍정을 부정하지만, 긍정은 부정을 긍정하므로, 부정에는 긍정이 포함되지 않고,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된다. 긍정은 부정얼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새로운 사원을 지으려는 자는 기존의 사원을 부수고자 한다. 새로운 가치 표를 써넣으려는 자는 낡은 가치 표를 지워야 한다.

(204) 막연한 파괴와 긍정 안에 들어 있는 파괴를 구분하면서 우리는 단 하나의 긍정이 정립되기 위해서라도 긍정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이 첫 번 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

<5-5 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207) 떨어지는 주사위는 새로운 느낌을 만들고 던져지는 주사위는 새로운 힘을 표출한다. 결국 주사위 놀이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놀이이다. 차이를 만들어 내는 놀이! 놀이가 만들어 내는 차이! 긍정은 차이의 생성을 멈추려하지 않는다. 차이를 해소하고 싶어 하는 것은 부정이다. 변증법이 그렇듯이 부정은 차이를 적대로 발전시킨다. 차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대립감을 느끼는 것은 부정의 권력의지다. 그래서 부정은 생성의 놀이, 차이의 놀이를 멈추고 싶어 한다.

(209) 모든 즐거움들은 계속 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써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게, 영원회귀의 유혹 - 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제 7장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있는 밧줄>

<7-1> ‘과(…….and…….)'

(211) 오히려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야말로 지구 위에 난 뾰루지 따위가 아닐까? 아니면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잘 해야 대지의 살갗에 생긴 피부병” 이거나 “작은 구더기가 아닐까?” “인간은 우주의 눈들이 자기 방에서 망원경을 통해 자신의 행위와 사유를 보고 있다.” 생각하지만, “우리가 모기들과 의사소통한다면 그들도 동일한 파토스를 가지고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12)비록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을 했다고 해도, 인간이 진정한 만물의 척도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213) 인간이 자연에서 분리되어 자연에 자기 잣대를 들이댄 것은 17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나 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끌어냈을 때, 데카르트가 드러낸 것은 존재의 확실성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분리와 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이점에서 니체는 17세기를 “인간을 발견하고 질서를 세우고 발굴하려 노력한 세기”라고 발한다.

(215) 사실 인간은 자연을 잘못 이해함으로 자기 자신도 잘못 이해한다. ‘인간과 자연’ ‘자연과 인간’ ‘인간과 세계’ 하지만 모든 것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 해도 남아 있는 게 하나 있다. 니체는 ‘인간’과 ‘자연’,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과’ 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 났기 때문이다.

<7-2 진화와 변신>

(216)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저 쪽으로 건너가기도 위험하고, 가는 중에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다.

(217) 니체가 보기에 인간의 역사는 약자들이 승리한 역사이며, 따라서 진화라고 말할 게 아니라 퇴화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인간은 진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의 목적임을 증명하려고 한다. 인간은모든 생물의 시간을 인간을 향한 ‘양의 축적’과 ‘질의 변화’로서 이해한다.

(221) 니체에게 초인과 동일한 종족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는 것은 지인, 강자, 귀족, 주인, 어린아이다. 어떻게 거인과 어린아이는 같은 종족이 될 수 있을까? ‘같은’것은 힘과 권력의지의 종류이고 존재방식으로서의 영원회귀다. 만약 초인이 생성의 힘이라면 그것은 긍정의 권력의지를 내면적 질로 가지고 있으며, 영원회귀를 통해서 존재한다.

<7-3 신의 죽음과 인간의 몰락>

(222) 니체는 왜 신이 죽음을 복음리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사실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

(223)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제야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성시킨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광인은 신이 죽은 후에도 새로운 삶을 목격하지 못한다. 그는 신의 죽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에 춤추는 단 한 명의 인간도 만나지 못한다.

(225) 신들의 죽음도 즐겁고 유쾌한 적이 있었다. “한 신이 나타나 신에 대해 가장 무식한 말을 했을 때, 신들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은 하나다 너는 나 말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신들은 비웃었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그들은 웃다가 죽은 것이다.”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신이 살아있든 죽어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

<7-4 보다 높은 인간들>

(230) 나귀제는 모든 인간적인 것의 본질을 폭로해버렸다. 낮은 인간이든 보다 높은 인간이즌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다. 그들은 신의 죽음이 만들어준 생성의 공간에서 반동적으로 뒷걸음질친다. 신앙을 가진 자는 다른 신이라도 찾기를 바라고 여행에서 지친 자는 그만하기를 바라며, 확실성을 찾는 자는 그것을 신으로 생각함에 주저하지 없다. 그들은 모두 신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231)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하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번 더’ 라고 말하는 것이다.

<7-5 놀이와 웃음, 그리고 춤>

(232) ‘정의의 양심가’인 학자의 말대로 과학이 불안과 공포를 본질로 한다면,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하여 부른다.

(233) “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서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은 중력의 정신에 대한 승리의 표시이다. 그 것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높이뛰기와 넓이뛰기, 그리고 옆으로 뛰기이다.

(234) 우리는 차라투스트라가 변신하는 장에서 긍정의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초인의 삼위일체를 보게된다. 차라투스트라에거는 영원회귀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긍정의 권력의지를 획득하는 과정이었으며, 또한 그것을 느끼는 새로운 신체를 생성시키는 과정이었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영원회귀를 요청한다. 영원회귀 하지 못하면 긍정을그 질을 박탈당한다. 그러나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만이 영원회귀한다. 영원회귀하는 긍정으 권력의지는 변화된 신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초인은 신체의 변화이며, “새로운 느낌 방식”이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 시켰는가>

<8-1 가면의 철학>

(238) 니체는 우산을 잃어버리듯 쉽게 이름을 잃어버렸다. 그는 하나의 정체성을 쉽게 내던졌다. “사람을 불멸하기 위해서 여러 번 죽어야 한다.” 니체의 여러 이름들은 다음과 같은 영원회귀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그는 가면을 바꿔쓰며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상형문자를놓고 괴로워하는 이집트의 청년처럼 가면뒤에 있는 진정한 얼굴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239)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벅고 있는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240) 완벽한 독자를 상상해보면 그 완벽하 독자란 항상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로 변하곤 한다. 게다가 그는 순종적이면서도 교활하고 조심스럽다. 그는 또한 하나의 타고난 모험가요. 발견자이다.

<8-2 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242) 비견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생의 즐거움과 명랑성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정신이 숨쉬고 있으며, 공포와 연민을 초월한 생성이라는 테마가 은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244) 니체는 바그너에 몰입했던 자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압박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마약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바그너를 필요로 했다. 바그너는 탁월하다고 하는 모든 독일적인 것에 대한 해독제였다. 나는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도 하나의 독이다.”

<8-3 화약냄새가 사라진 전투>


(245) “전투에서는 더 이상 화약냄새가 나지 않는다. 자시의 후각이 예민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그것과는 다른 훨씬 사랑스런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부정을 행하고 있지만, 그 수단도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8-4 모든 가치의 전환>

(247) 병균속에서도 치료의 백신을 찾아내듯 니체는 상처로부터 치료의 힘을 발견한다. “치료의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위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248)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 나는 전에 아무도 나만큼 거역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거역한다. 그럼에도 나는 부정적 정신의 소유자와는 반대자다. 나는 기쁜 소식을 전달해주는 복음의 사자이다. 모든 것이 허위였으므로 지상에는 미증유의 전쟁이 있게 된다. 나의 출현과 함께 세상은 위대한 정치를 펼치게 된다.

<8-5 다시 떠나는 여행자>

(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 프리드리히 니체” 그의 서명이 붙어 있는 전하는 메시지도 이제 “니체씨로부터 떠나라” 는 것이다. 여행객은 항상 그 사회의 이방인이고 외부자이다. 니체는 그 자신을 독일 안에 있는 이방인이라고 소개한다.

(252) 확실히 유목민의 기질이 니체를 이끌고 있다.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이다. 유목민이란 여행자이며 외부자이다. 그러나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

(253)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이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제2부 베버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1. 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258) 어던 점에서 근대는 제 발로 ‘설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제 발로 ‘서야 하는’ 시대다. 절대적 가치가 붕괴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항상 새것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근대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2. 근대인의 탄생>

(263)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스스로 구원받았음을 믿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화를 벌어들인다면 그것은 신이 돕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전환이 부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뒤집어졌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재화를 쌓는 것이야말로 신을 영광되게 하는것이다.

<3. 관료의 기제>
(267) 우리는 기계로서의 관료제가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 어떤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은 사라진다. 생산하는 것은 관료제로 불리는 기계다. 인간 역시 기계의 생산 작업에 동원되는 부속품일 뿐이다. 소명의식에 불타던 근대인은 언제부턴가 주어진 절차와 규정에 의거해서 수동적으로 일 처리에 동원되고 있는 암울한 근대인으로 돌변하였다.

<4. 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

(270) 베버는 사람들의 생활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분할하고 그것을 계산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을 훈육이라고 개념화했다. “훈육은 모든 계산 가능하도록 그리고 공통의 명분과 합리적으로 의도된 목표에 헌신하도록 대중들의 육체와 전신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5. 베버의 정치학>

(276) 베버의 정치학은 합리적 훈육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고 개인의 도구화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형 창출을 목표로 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소명’을 가진 정치인, 강한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의 출현이었다. 영혼이 사라진 강철 겉옷 속에 다시 영혼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사람, 스스로 강철 감옥보다 더 강한 영혼을 소우하고 있는 사람!

(277) 베버는 바람직한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중의 하나가 이러한 내적거리라는 점을 주장했다. 정치인에게는 소명에 대한 열정과 함께 뛰어난 목측능력이 요구된다. 목측능력이란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고 그것에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내재적 거리를 두는 것이다.

(280) 책임윤리를 강조하는 정치인아린 가치나 신념만을 강조하는 선동적인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효율성을 강조하는 관료제적 정치인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다이몬을 선택하고 자신의 행위가 초래할 결과를 정확히 계산한다. 그리고 관료제 기계를 수단의 기능에 엄격히 한정시킴으로써 합리적 훈육이 초래하는 사회적 삶에 대한 통제를 저지시키는 사람이다.

<6. 베버 전략의 딜레마>

(283) 현대 정당들은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더 많은 규율들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규율들은 더 많은 대중들을 수동적으로 만들것이다. 정치가가 대중들의 의사를 더 잘 대표할 수록 대중들은 더욱 복종한다. 계몽은 계몽 대상의 계몽 필요성을 더욱 증대시킬 뿐이다.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293) 그러나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자유주의에서처럼 약화되지는 않는다. 군사적 지출의 확장이나 경제적 조정비용의 확장은 물론이고 가치와 도덕적 구조물에 대한 위기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현대 국자의 또 다른 중요한 얼굴이며, 헤겔로 대표되는 근대적 국가의 이상이기도 하다.

(298)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국가에 대해서는 서로의 편차 이상으로 그 둘 모두를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어주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가치들의 투쟁, 차이들의 투쟁을 정치 영역으로 보내서 경제적 영역의 자유를 확실히 보장받고자 했던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열망은 동일한 요소를 정치의 영역에서도 배제하고자 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자 열망과 그리 멀지 않다. 자유의 보증자로서의 국가, 국가의 영역, 정치의 영역들의 범위는 계속해서 줄어들지만, 그것은 네그리의 표현대로 ‘핵심으로서의 축소’라고 할 수 있다.

(301) “공허한 이치를 내세우며 반성을 일삼는 오성의 것”이라고 말하며, 완전성은 결코 “진행의 영속적 진행”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수령이 오래된 거목이 계속해서 가지를 뻗는다고 해서 새로운 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4. 내가 작가라면

방대하면서도 난해한 니체를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책이었다. 니체의 평전이라고 해야하나. 우선 니체의 저서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와 책의 요약이 아닌 세부적인 설명이 쉽게 다가왔다. 내용이 쉽게 다가온 것과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니체의 저서별로 흐름을 전반적으로 알 수있었다나 하는 수준이었다.

구성면으로 볼때 1부의 니체가 즐겨썼던 핵심 단어에 대한 흐름이 좋았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에서부터 시작을 하여 강한자와 선한자,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권력의지 등은 거의 잊어버린 기억을 다시 찾아오고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학 되었다. 2부에 나오는 베버의 근대 허무주의 비판과 딜레마와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에서는 그 흐름을 종종 놓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는 니체를 좀더 넓게 아우를 수 있는 마무리 과정을 넣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체의 책이 익히 난해하다는것을 들었지만 역시 힘들었다. 알듯 알듯 하면서도 천개의 길로 빠져버려서 어느 길에서 왔는지도 모르는미로를 헤매는 느낌이 들었다. 한두번 미로에 갇히다 보니 스스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 것 같다. 1년의 과정이 끝이나면 반드시 니체 전집에 도전해보아야 하겠다는 새롭게 해야할 일이 생겼다는 것도 큰 수확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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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28]②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素田 최영훈 2007.10.16 2353
1101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을 읽고 [3] [1] 현운 이희석 2007.10.16 2745
1100 [독서28]①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素田 최영훈 2007.10.16 2221
1099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 고병권 [1] 素賢소현 2007.10.16 2310
1098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고병권 [3] 우제 2007.10.16 2316
1097 [리뷰025] 니체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4] 香山 신종윤 2007.10.16 2283
1096 (27)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4] 時田 김도윤 2007.10.16 2368
1095 [28]모든 것에서 즐기고, 모든 것에서 떠나라-[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교정 한정화 2007.10.16 2370
1094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2] 香仁 이은남 2007.10.16 2412
1093 [28]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2] 써니 2007.10.16 2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