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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0일 21시 25분 등록
『 “글이란 무엇인가?”하고 스승이 묻자,
한 제자가 대답한다. “지식의 보관자”라고.
“말은 무엇인가?” - “생각의 배반자.”
“누가 말을 낳았는가?” - “혀가.”
“혀란 무엇인가?” - “공기의 채찍.”
“공기란 무엇인가?” - “생명의 보호자.”
“생명은 무엇인가?” - “행복한 자의 기쁨, 슬픈 자의 독, 죽음의 노래, 한 장소의 손님, 지나가는 나그네.”

지나가는 나그네가 중얼거린다. “놀고 있네.”』

호이징하의 주장에 의하면 맞는 말이다. 그들은 제대로 놀고 있다. 그 옛날의 철학도 문답놀이에서 시작되었다고 요한 호이징하는 <호모 루덴스>에서 주장한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 책을 읽고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의 문화 또는 생활 속에는 놀이로부터 파생된 것들이 혼재되어있음을 은연중에 알고 있다. 예를 들어, 회의가 지루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바로 낙서이다. 이런 욕구를 ‘실러’는 ‘놀이기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놀고 있어도 놀 줄은 모른다. 왜 그럴까?

우리가 언제부터 놀기 시작했고, 그 놀이로부터 어떤 것들이 영향을 받았는지, 그리고 왜 우리는 놀이조차 점점 일이 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하다면, <호모 루덴스>에 빠져보기 바란다.


1. 저자에 대하여

저자에 대해서는 책 속에 매우 상세히 기술되어 있어 이것으로 대신한다.

20세기 부르크하르트라고 일컬어지는 호이징하는 1872년 12월 17일 네덜란드의 북쪽 대학 도시인 흐로닝헨의 평범한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대학의 생리학 교수였다. 호로닝헨 대학에 입학한 호이징하는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특히 동양의 언어인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산스크리스트어의 연구에 심취하였고 점차 비교 언어학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1895-96년의 겨울 학기에는 라이프치히에 유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비교 언어학에만 대학 생활을 전적으로 바쳤던 것은 아니었다. <호모 루덴스>가 그 좋은 증거가 되겠지만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조예는 그가 이러한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그는 1897년에 학위를 받은 뒤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하를렘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서 생계를 꾸렸다. 그 뒤 그로닝겐 대학에서 고대 인도 문화사와 종교사 연구로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그리고 역사학으로 기울어져서 연구 무대를 서구 중세사로 옮기게 되었다. 1905년에는 은사이며 역사학자인 블로크의 도움으로 흐로닝헨 대학의 네덜란드 역사 교수가 되었다. 1915년에는 라이덴 대학의 일반 역사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40년 독일군의 점령으로 그 대학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독일 점령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함으로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 석방되어 가족의 면회조차 금지된 채 겔레론의 작은 시골집에서 1945년 2월 1일에 72세로 영면했다.

그는 강단 생활을 하며 1916년부터 32년까지 한 문화잡지의 편집을 맡았고 네덜란드 왕립 학술원의 회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라이덴 대학에서 1919년 그 유명한 <중세의 가을>을 발표하여 유럽 인문 과학자 중에서 발군의 존재가 되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부르크하르트를 잇는 문화사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들은 공통적인 역사 감각을 가지고 문화사가를 지향했던 것이다. 호이징하는 인류의 문화 발전을 하나의 보편적인 개념으로써 분석, 설명하고, 도식화, 유형화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며 한 시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이런 역사학 방법을 문화사라고 하는데 호이징하는 그 자신은 몰론 부르크하르트를 문화사가의 범주에 넣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저자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와 중세를 명확하게 대비시킨 데에 대해서 <중세의 가을>의 저자 호이징하는 저서의 제목 그대로 르네상스를 중세와 연결되는 곧 중세의 수확기로서 파악하였다. 물론 두 사람의 중세와 르네상스에 대한 이러한 해석 차이는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50년의 시간적 거리에 의한 학문적 성과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호이징하는 중세야말로 그가 현대에서 꿈꾸고, 자신의 이론과 저술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유럽 공동 사회가 실현되었던 시대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드디어 현대의 고전이라고 하는 <호모 루덴스>가 그의 문화사 연구의 자연적인 귀결로서 집필되었다.

그는 그의 선배 부르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정치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극히 필요하고 가치가 있을 때만 조금씩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강한 예술가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 역시 부르크하르트를 연상시킨다. 이런 요소와 예술에 대한 연구는 그의 문화사에서 종합되어 그림 같은 언어와 환상적인 표현에 의해 그의 글들을 문학적인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의 학파도, 연구 서클도 형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세계와 학문에 대해서 자유롭고 개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그의 저작은 다음과 같다.

1919년 - <중세의 가을 - 네덜란드의 14세기와 15세기의 생활양식과 정신형태에 관한 연구>
1924년 - <에라스무스>
1933년 - <17세기 네덜란드의 문화 - 사회적 토대와 국가적 특성>
1935년 - <내일의 그늘에서 - 우리 시대의 문화적 고민에 대한 진단>
1938년 - <호모 루덴스 - 문화의 놀이 요소의 규정에 대한 시도>
1945년 - <더럽혀진 세계 - 우리 문화의 치유 가망에 대한 고찰>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7] 우리 인간 행위의 내용을 인식의 저 밑바닥까지 캐어 들어가면, 모든 인간 행동이 단순한 놀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생길지도 모른다.

[7] 나는 수년 동안이나 문명이 놀이로서, 또 놀이 속에서 발생하고 전개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8] 런던에서는 “문화적 놀이적 요소(The Play Element of Culture)”라는 제목으로 강의하였다. 매번 주최 측에서는 문화 “속에서의(in)” 놀이적 요소라고 고쳐 주기를 원하였으나 그때마다 나는 소유격 조사(의, of)를 고집했다. 그 이유는 나의 목적이 모든 문화 현상들 중에서 놀이의 위치를 정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얼마나 놀이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8] 즉 놀이를 생리 현상이 아닌 문화 현상으로서 이해하려고 한다. 이것은 과학적인 방식이 아닌 역사적인 접근 방식이다.

[8] 독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말 하나하나에 대해서 상세한 증거 문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문화의 일반적인 문제를 다룰 때에는, 공격자 자신이 충분히 탐사해 보지 않은 부분이라도 항상 과감하게 공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미리 내 지식의 미흡한 점을 보충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지금 쓰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쓰지를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쓰기로 결정하였다.

[9] 놀이(play, Spiel)는 문화보다 오래된 것이다.

[12] 자연은 긴장과 쾌락과 재미를 함께한 놀이를 우리에게 주었다.

[14] 인간 사회의 중요한 원형적 행위에는 처음부터 전부 놀이가 스며들어 있다.

[14] 말과 글을 사용함으로써 정신은 물질과 마음 사이에서 계속 “방전(sparking)”을 일으키는데, 말하자면 이것은 정신이 그 훌륭한 명명 능력과 더불어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19]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이 놀이는 자연의 진행 과정과 구분된다.

[19] 아이와 동물은 놀이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논다. 그리고 거기에 바로 그들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19] 놀이의 첫 번째 중요한 특징을 파악하게 되었다. 놀이는 자유스러운 것, 바로 자유이다. 두 번째 특징은 놀이가 “일상적인 것” 혹은 “실제의”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실제의” 삶을 벗어나서 아주 자유스러운 일시적인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21] 인간의 놀이의 가장 높은 형식은 항상 축제나 의식, 즉 성스러운 경지에 속한다.

[21] 놀이는 장소와 지속성에 의해 “일상적인” 삶과는 구분된다. 이것이 놀이의 적극적인 제3의 특징이다. 그것은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이다. 놀이는 제한된 시간과 장소의 속에서만 “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3] 긴장은 불확실함이며 위태로움이다. 따라서 놀이란 그러한 긴장을 해소시키려는 노력이다.

[34] 우리가 놀이 개념을 부당하게 확대시킨다면 우리는 단순히 말장난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35] “신만이 가장 진지함을 누릴 수 있고, 인간은 신의 노리개로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인간에게 속한 가장 최선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남녀는 이에 따서, 가장 고상하게 놀이하는 삶을 살면서 지금과는 정반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 왜냐하면 전쟁에는 우리가 가장 진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은 평화롭게 살아야만 한다. 그러면 무엇이 바로 사는 방법인가? 삶을 놀이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즉, 어떤 경기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노래하고 춤추거나 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은 신을 달랠 수 있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으며, 경쟁에 이길 수 있다.”

[38] 놀이는 자유분방함과 무아경의 두 극단 사이에서 움직인다.

[63] 놀이 관념을 놀이 행위 자체의 개념이 아닌 다른 개념으로 의식적으로 전이시켰기 때문이 아니고, 그 놀이 관념 스스로가 무의식적인 아이러니로 용해되었기 때문이다.

[67] 우리는 이제 고대의 사고 영역을 더듬어 나가야 하는데, 거기에는 무기를 사용하는 엄숙한 전투와 하찮은 놀이에서부터 목숨을 건 유혈 투쟁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시합이 모두 놀이 그 자체이며 또한 포함된 어떤 규칙에 의해 제한되는 운명과의 싸움이라는 근본적으로 단일한 생각이 들어 있다.

[75] 놀이로서의 문화 - 놀이가 변하여 문화가 된 것은 아니다.

[75] 우리가 다음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견해는 문화가 놀이의 형식에서 발생하며 문화는 애당초부터 놀아지는 것이라는 경해이다.

[76] 오락으로서의 경쟁이나 전시는 문화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앞서는 것이다.

[81] 놀이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이긴다”는 개념이다. 이긴다는 것은 놀이의 결과에서 한 사람의 우월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81] 경쟁 “본능”은 우선 권력욕이라든가 지배 의지가 아니며, 제1차적인 것은 다른 사람을 능가하여 첫째가 되고 그 덕분으로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결국 개인이나 집단의 힘이 확대되는가, 안되는가의 문제는 제2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97] 포틀래치와 관련된 이 모든 이상야릇한 관습의 중요한 원리는, 나의 의견으로는, 순수하고 단순한 투기의 “본능”이다. 그 관습은 우선 맨 먼저 싸우고자 하는 인간 욕구의 강력한 표현으로 간주해야 한다. 일단 이것만 인정되면 우리는 그것을 엄격히 “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즉 그것은 진지한 놀이, 숙명적이고 치명적인 놀이, 잔인한 놀이, 성스러운 놀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놀이는 고대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한 개인이나 집단의 인격을 좀 더 높은 권력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100] 아이들의 생활에서부터 최고의 문화 활동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사회적 완성을 위한 가장 강한 충동 중의 하나가 자신의 우월성을 찬양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119] 문화란 놀이로서 시작되는 것도, 놀이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놀이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문화의 대립적이고 투기적인 기반은 처음부터 놀이 안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놀이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21] 법과 놀이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법의 이념적 근거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법의 실제 집행, 다시 말해서 소송이 경기와 얼마나 꼭 그대로 닮았는가를 관찰해 보면 금방 확실하게 나타난다.

[125] 고대인의 정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옳음과 그름의 추상적 문제라기보다는 이김과 짐의 구체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고대인의 법의식에 더욱 가까이 갈수록, 그러한 승리의 기대라는 요소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또한 놀이 요소가 점점 전면으로 나타난다.

[130] 승리를 위한 투쟁은 그 자체로서 성스럽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이 일단 옳고 그름이라는 명확한 개념에 의해 활력을 얻게 되면 그 투쟁은 법의 단계로 올라간다. 또한 그 투쟁을 신의 힘과 관련된 적극적인 개념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신앙의 단계로 올라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에 중에서 가장 1차적인 것은 놀이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념을 성장시킨 씨앗이 바로 놀이이기 때문이다.

[140] 고대인의 마음속에서 이 두 개념은 흔히 뒤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규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싸움은 바로 그 제한성 때문에 놀이라는 형식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146] 결투 재판이 앵글로 색슨의 법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노르만 족에 의해 처음 도입됐다는 사실은 이것이 시죄법과는 다소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150] 기사도는 특히 중세 문명의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기사도의 이상은 비록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기만당했을지라도 그것이 인류 공동체를 위한 불가결한 안전판의 하나인 국제법의 기초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153] 전쟁을 고상한 명예의 게임으로 보는 관념에서 유래되어 오늘날의 비인간화된 전쟁에서까지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관습은 적과 인사를 교환하는 관습이다. 풍자의 요소가 흔히 담기기 마련인 이 인사 교환은 전쟁의 놀이적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156] 세계 도처의 전설에 나타나는 이 모든 제의적, 의식적 관행에서 우리는 전쟁이 놀이, 전투, 법률, 운명, 우연이 서로 밀접하게 뒤엉킨 그 지속적이고 열렬한 시합의 원초적 영역에서 유래하였음을 똑똑히 볼 수가 있다.

[157] 우리가 게임이야말로 모든 문명의 산 원리라는 점에 유의한다면 순전한 형식의 면에서는 모든 사회를 하나의 게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157] 모든 사실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놀이 정신이 없을 때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률적 유대가 무너져 완전히 분해된 사회에서조차도 투기적 충동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 내재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첫째가 되려는 내재적 욕망이 여전히 권력 단체들을 서로 충돌하게 할 것이며 이들 단체들을 극도의 집착과 광적인 과대망상증으로 이끌어 갈는지도 모른다.

[158] 놀이란 개념은 오로지 사회적이고 미학적인 픽션으로서만 충분히 경험되고 향락될 수 있다.

[159] 일본의 사무라이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진지한 일이 용사에게는 한낱 놀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61] 러스킨은 인간은 애초부터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고 보았다. “하나는 일꾼의 부류이고 또 하나는 놀이꾼들의 부류이다. 한쪽은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며 집을 짓는 등 여러 가지 생활의 필수품들을 조달한다. 또 다른 부류는 거만하고 게으른 자들로서 끊임없이 레크리에이션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생산적이고 부지런한 부류의 인간들을 가축으로서, 또는 죽음의 놀이에 등장하는 그들의 꼭두각시 또는 장기 알로 사용한다.”

[161] 충성이란 자신을 어떤 사람, 대의 또는 사상에 바치면서 그 바치는 이유를 따지거나 그 바침의 지속성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덕성은 - 순수한 형태로는 지극히 이롭지만 그것이 왜곡될 때는 지극히 악마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 이 놀이 영역에서 곧바로 유래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162] 역사, 예술, 문학에서 우리가 아름답고 고상한 놀이로서 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한때는 성스러운 놀이였다.

[163] 첫째가 되려는 충동은 사회가 그 충동에 대해서 기회를 제공하는 만큼 많은 형태로 표현된다.

[163] 모든 문화에서 투기적 관습으로 특징지어지는 놀라운 유사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바로 인간 정신의 영역, 즉 지식과 지혜의 분야이다. 고대인에게는 행동과 용기가 바로 힘이었다. 그러나 지식은 마술적 힘이었다. 고대인에게는 모든 특수한 지식은 성스러운 지식이었고 비교적이고 경이로운 지혜였다. 왜냐하면 어떠한 지식이든 우주의 질서 그 자체와 직접 관계되기 때문이었다.

[166] 실험 아동 심리학은 6세 아동이 던지는 질문의 대부분 사실 우주 기원론의 성격의 질문임을 보여주었다. 아동의 질문은 예를 들면 무엇이 물을 흐르게 하는가? 바람은 어디서 오는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이다.

[171] 수수께끼는 원초적으로 성스러운 게임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따라서 수수께끼는 놀이와 진지함 사이의 어떤 가능한 경계선이라도 무너뜨리고 만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수수께끼는 두 방향으로 가지를 친다. 한쪽은 신비주의적 철학이며 또 다른 방향은 레크리에이션이다.

[181] 인간은 오래전부터 만물이 상반되는 요소로 갈라져 있고 투쟁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 왔던 것이다.

[183] “시를 짓는 것”은 사실상 놀이 기능이다. 그것은 정신의 놀이터 즉 정신이 그것을 위해 창조해 주는 그 독자의 세계 속에서 진행된다. 이 속에서 사물은 “일상생활”에서 갖는 외관과는 매우 다른 외관을 갖는다. 또 논리와 인과라는 유대와는 다른 유대로 상호 연관된다.

[183]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법의 망토 같은 어린이의 영혼을 지닐 수 있어야 하며 어른의 지혜를 버리고 어린이의 지혜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194] 세계 어디서나 시가 산문에 선행한다. 진지한 것, 성스러운 것을 표현하는 적절한 수간은 시뿐이다.

[195] 책이 없던 사회에서는 시 형식을 취해야만 그 본문을 암기하기가 더 쉬웠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보다 깊은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고대 사회 자체가 사실상 그 구조에서 운율적이고 시적이었다는 점이다.

[197] 모든 시는 놀이에서 태어난다. 신앙에 기초한 성스러운 놀이, 구애하는 축제적 놀이, 경기라는 투기적 놀이, 자랑, 조롱, 욕설에 기초한 논쟁적 놀이, 임기응변과 재치의 날랜 놀이 … 이런 놀이들이 시가 태어나는 모태이다. 그러나 문명이 보다 복잡해질 때 시의 놀이적 특질은 어느 정도나 보존되는가?

[202] 모든 시대의 인류 사회에서 시적 양식에 그 놀라운 균일성과 한계를 주는 이 공통분모는 아마 우리가 시라고 부르는 창조 기능이 문화 그 자체보다도 더욱 원초적인 기능, 즉 놀이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한다.
놀이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우리가 판단을 내렸던 특징들을 다시 한 번 열거해 보기로 하자. 그것은 일정한 시간과 공간의 한계 내에서 뚜렷한 질서에 따라, 또 자유롭게 공인된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활동으로서 필요 또는 물질적 효용의 영역 밖에 있는 활동이다. 놀이 무드는 환희와 열정의 무드이며, 그 놀이가 봉헌 행사인 단순한 오락인가에 따라 성스러운 분위기나 또는 축제적인 분위기가 된다. 고양감과 긴장감이 이 활동에 수반되며 환희와 긴장의 완화가 뒤따른다.

[202] 신화에서든 서정시에서든, 또 시극에서든 서사시에서든, 오랜 옛날의 전설에서든 또 현대 소설에서든, 저자의 목적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독자를 “매혹시키고” 홀리게 할 긴장을 창조하는 데 있다. 모든 창조적 글의 밑바닥에는 이 긴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인간적 또는 정서적 상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이 바로 문제이다. 광범하게 말해서 그런 상황은 투쟁과 사랑 혹은 이 둘을 겸한 것으로부터 생겨난다.

[204]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이해인 관념사이의 영원한 간극은 상상의 무지개로써만 연결할 수 있다.

[204] 즉 이미지에 스타일을 주고 그 속에 신비성을 주입함으로써 모든 이미지가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이다.

[207] 형체도 생명도 없는 어떤 것을 한 인격체로서 묘사한다는 일은 모든 신화 형성의, 그리고 대부분 모든 시 짓기의 정수이다.

[207] 의인화 과정이란, 자신이 지각하는 대상을 타인에게 전달하려는 욕구를 느낌과 동시에 발생한다. 개념은 그리하여 형상화의 작용으로서 태어나는 것이다.

[215] 놀이 태도는 인류의 문화와 언어가 존재하기 이전에 있었음에 틀림없고, 따라서 의인화하여 형상화하는 작업이 행해지는 근거는 오랜 옛날부터 이미 알려진 기지의 사항이다.

[219] 그리스 사회는 놀이 정신에 너무 깊이 물들어 있어서, 그것이 그 자체로서 특별한 것으로 생각된 적이 없었다.

[219] 아테네의 희극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의 방탕한 축제 행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222] 소피스트는 보다 고대적 형태의 문화적 교사들과 같이,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그의 업무는 그의 놀라운 지식과 신비한 기술을 공개하고 또 동시에 공개 시합에서 경쟁자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225] 그리스 인들에게 정신의 보물은 여가(스콜레)의 산물이며, 자유민에게 국가를 위한 봉사, 전쟁 또는 의식을 위한 시간이외의 시간은 자유 시간으로 간주되었으므로 그들은 충분한 여가를 가질 수 있었다. “학교(school)"라는 말은 그 배후에 기묘한 역사가 있다. 원래 "여가"라는 의미를 가졌던 이 말이, 문명이 젊은이들의 자유 시간을 점점 더 제한하고 또 점점 더 많은 수의 젊은이들을 유년기 이후에는 엄격한 생활로 몰아넣음에 따라 현재에 와서는 체계적 작업과 훈련이라는 정반대의 뜻을 지니게 되었다.

[226] “어디에서나 똑같으면서 어디에서도 똑같지 않은 것은 무엇이냐?” 대답 : “시간.” “나는 당신과 다르다.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인간이 아니다.” 디오게네스가 그리포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그것이 진실이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229] 플라톤의 <대화편> 중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몰두를 유쾌한 오락으로 여기고 있다. 젊은이들은 논쟁하기를 좋아하고 늙은이들은 존중받기를 좋아한다. <고르기아스>에서 칼리클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지나치며 동시에 부족하다. 당신이 철학을 내던지고 더욱 큰일에 주의를 돌린다면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젊은 시절에 적당하게 추구하면 괜찮은 것이지만 지나치게 오랫동안 그것에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230] 철학은 아득한 옛날 신성한 수수께끼 놀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수수께끼 놀이는 제의나 축제에 따르는 여흥이었다. 수수께끼 놀이가 가진 종교적인 측면으로부터 우파니샤드의 심오한 철학과 신지학, 직관적 섬광들을 가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이 발생했다. 수수께끼 놀이의 놀이적인 측면으로부터는 소피스트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두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철학을 진리의 추구로서 그만이 도달할 수 있는 독자적인 경지까지 끌어 올렸지만, 과거나 현재나 철학 특유의 요소인 가벼운 형식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낮은 수준에서는 궤변적인 엉터리 요법, 지적인 약삭빠름 등으로 발전하였다. 그리스에서는 투기적인 요소가 강했기 때문에, 순수 철학을 희생해 가며 수사학이 발전하게 되었고, 따라서 순수 철학은 일반인의 교양으로서 기세를 떨친 궤변의 그늘 속에 가려졌다. 고르기아스는 이와 같은 왜곡된 교양의 전형적 인물이었다. 그는 진지한 철학에서 벗어나서 현란한 언어와 거짓된 재치를 찬양하고 남용하는데 그의 정신을 낭비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적 사고의 수준이 떨어졌다. 경쟁이 극단적으로 되었고 편협한 교조주의가 판을 쳤다. 비슷한 타락이 중세 후기에도 반복되었다. 즉 사물의 가장 내재적인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시대에 이어 언어와 공식만 있으면 충분한 시대가 왔던 것이다.

[235] 11세기 말쯤 새로 생겨난 국가들에는 생명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에 대한 갈증이 충만했다. 이와 같은 지식욕은 머지않아 대학이라는 제도적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대학이야말로 중세 문명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욕은 또한 스콜라 철학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났다.

[240] 사실 리듬과 하모니는 완전히 똑같은 의미에서 세 가지 - 시, 음악, 놀이 -에 모두 해당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시에는 언어라는 요소가 있어서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순수한 놀이에서 관념과 판단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반면에 음악은 절대로 놀이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240] 우리의 문명은 노쇠해서 너무 복잡해졌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이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게끔 도와주는 데는 음악적 감성이 으뜸이다.

[242] 플라톤의 말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유용성도, 진실성도, 유사성도 없으면서 더구나 그 효과는 해롭지 않은 어떤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매력의 기준에 따라, 그것이 줄 수 있는 쾌락에 따라 가장 잘 판단될 수 있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좋고 나쁨을 수반하지 않는 그런 쾌락이 바로 놀이이다.”

[244] 그리스의 자유민들은 생계를 위해 일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교육적 성격의 고상한 직종에서 자기 삶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여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수긍이 간다. 자유민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그의 자유 시간(스콜레)을 사용하느냐는 문제였다.

[244] 우리는 옛사람들의 놀이와 진지함의 구분이 우리의 구분과는 매우 달랐다는 사실, 그들의 평가 기준이 우리의 기준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디아고게라는 말에는 은연중에 자유민들에게 어울리는 지적이고 심미적인 몰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247] 인간의 행위 중에서 음악처럼 경쟁의 요소가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은 극히 드물다.

[249] 야만인들의 성스러운 춤, 마술적인 춤, 그리스의 제의적 춤, 계약의 궤(모세의 십계를 새긴 두 개의 납작한 돌을 넣어준 궤) 앞에서 춘 다윗 왕의 춤, 또 그저 축제의 일부로 추는 춤 등 그 어느 춤이 나를 막론하고 춤은 어느 시대에나 또 누구에게나 순수한 놀이였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전한 형태의 놀이인 것이다.

[249] 현대의 춤은 발레를 뺀 나머지 분야에서는 놀이적 특질이 모호해져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50] 놀이를 이루는 데에 절대 필요한 하나의 구성 요소가 춤이라는 말이다. 춤은 특수한 형식의 놀이이며, 특별히 완벽한 형식의 놀이인 것이다.

[254] 내재된 “놀이 본능”이란 개념으로 조형 예술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이론이 일찍이 실러(1759-1805)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사물을 장식하려는 거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가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욕구를 놀이 기능이라고 부르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이런 욕구는 연필을 손에 든 채 지루한 회의에 참석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거의 의식하지 않은 채 우리는 선, 평면, 곡선, 입체를 그리며 그것들과 함께 놀게도 되는데 이 추상적인 낙서로부터 환상적인 아라베스크, 이상한 짐승, 인간의 형태가 생겨난다.

[258] 신화와 전설에는 끊임없이 기술의 경쟁이 소재로 등장하거니와 실제로 이런 경쟁은 예술과 기술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259] 세계 어디에서나 진행된 오랜 옛날부터의 경쟁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오늘날 남아있는 여러 형태의 작품들이 오로지 효용과 능률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려 할지 모른다. 시청을 짓기 위한 설계도를 현상 모집하거나 예술 학교의 가장 우수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줄 때 그 목적은 오로지 발명심을 자극하고 재능을 찾아내서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들 실용적 목적의 배후에는 항상 시합의 원초적인 놀이 기능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261] 문명은 아기가 자궁에서 떨어져 나오듯이 놀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생기며 놀이를 떠나는 법이 전혀 없다.

[267] 문제는 항상 전쟁 도발의 첫 번째 충동이 주로 투기적인 충동이 아니냐 하는 것에 있다. 즉 배고픔이나 방어가 아니라 힘과 영광에 대한 시기와 탐욕이 전쟁을 일으키는 충동으로 작용하지 않았느냐가 문제가 된다.

[267] 로마 사회는 투기 없이는 살 수 없는 사회였다. 투기는 빵처럼 그 사회의 존속에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투기는 신성한 투기였고 투기에 대한 인민의 권리는 신성한 권리였기 때문이다.

[268]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능가하고 제압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쓰는 행위, 바로 이런 정신이 위에 열거한 모든 행위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바로 여기에서 로마 문명의 유서 깊은 제의적 투기의 배경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269] 로마 문화에 놀이 요소가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는 흥미 있는 증거로 하나 더 지적할 수 것은 비잔티움 경기장에 놀이 원리가 잔존했다는 사실이다.

[271] 르네상스의 전반적인 정신적 태도는 놀이의 태도였다. 아름답고 고상한 형식을 추구하는, 세련되었으면서도 신선하고 그리고 힘찬 노력이야말로 문화가 “놀이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예였다.

[271] 르네상스는 두 개의 놀이의 이미지를 최고도로 구체화시켰다. 전원생활과 기사 생활이다. “놀이의 황금시대”였다.

[279] 양식의 탄생이 바로 새로운 형식을 찾는 정신의 놀이가 아닐까? 어떤 양식은 놀이나 마찬가지로 리듬, 하모니, 규칙적 변화와 반복, 강조와 박자에서 생겨난다.

[279] 예술과 놀이가 로코코에서처럼 그렇게 밀접하게 뒤섞인 예는 아마 일본 문화를 제외하고는 차지 어려울 것이다.

[283] 한 양식과 한 시대정신이 놀이에서 탄생한 시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18세기 중반이었다.

[288] 놀이 요소 쇠퇴의 가장 뚜렷한 징후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 이후 남성들의 복장에서 상상적, 환상적 요소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294] 프로페셔널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의 정신이 아니다.

[295] 스포츠는 모든 면에서 비속한 것, 성스럽지 않은 것이 되었으며 사회 구조와의 유기적 연관성을 모두 상실해 버렸다.

[297] 진정으로 놀이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어린애처럼 놀아야 한다.

[298] 세계를 놀이의 방향으로 되돌리고 있는 듯한 이 투기적 원리에 가해지는 추진력은 주로 문화 자체와는 별개인 외부적 요인으로부터 기원하는데 그 외부적 요인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인류 전체에게 온갖 종류의 교류를 지극히 용이하게 해 준 커뮤니케이션(교통+통신)이다.

[298] 일부 대기업에서는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놀이 정신을 주입하기까지 한다.

[308] 오늘날의 문명은 거짓되게 놀기 때문에 어디서 놀이가 끝나고 어디서 놀이가 아닌 것이 시작되는지를 말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것은 특히 정치의 경우에 그렇다.

[308] 정치적 기계 장치의 기초가 되는 인간관계의 탄력성이 “놀이”를 허용함으로써 참을 수 없게 또는 위험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긴장을 완화시켜 준다.

[314] 신만이 최고의 진지함을 가지고 대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인간의 가장 좋은 부분이다. 따라서 모든 남녀 인간은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들은 고상한 게임을 해야 하며 현재의 그들과는 다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전쟁을 진지한 일로 생각하지만 전쟁 속에는 놀이도 문화도 들어있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을 가장 진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가능한 한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삶의 올바른 방법인가? 삶은 놀이로서 살아야 한다. 어떤 게임을 하면서, 봉헌식을 해하면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살아야 한다.

[315] “용서하게.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내 눈이 신을 바라보고 있고 또 신에 의해 감동되었기 때문이라네. 자네 말마따나 인간은 아주 하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라네. 얼마간의 고려의 대상은 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지.”

[316] 구약성서의 “잠언” 속에서 특이한 이미지를 통해 다시 나타나는데, 거기서 지혜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기뻐하였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놀았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놀며)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느니라.”

[316] 놀이는 도덕적 규범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319] “부족함이 활동의 본능 동기일 때는 동물은 일을 하고, 힘의 풍족함이 본능 동기일 때는 놀이를 한다. 과잉된 생명은 스스로 활동을 충동한다.”


3. 내가 저자라면


<호모 루덴스>

이 말을 풀어보면,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호이징하는 사람이 하는 행위의 근원을 ‘모든 행위는 놀이이다’는 다소 무리한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한 호이징하의 확고한 생각을 들여다보자.

『 런던에서는 “문화적 놀이적 요소(The Play Element of Culture)”라는 제목으로 강의하였다. 매번 주최 측에서는 문화 “속에서의(in)” 놀이적 요소라고 고쳐 주기를 원하였으나 그때마다 나는 소유격 조사(의, of)를 고집했다. 그 이유는 나의 목적이 모든 문화 현상들 중에서 놀이의 위치를 정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얼마나 놀이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p 8)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시대별, 나라별 그리고 분야별로 고찰한 풍부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전혀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놀이와 법률’, ‘놀이와 지식’ 등의 소주제를 보아도 저자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놀이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의 한계 내에서 자유롭게 공인된 규칙에 따라 진행되며, 필요 또는 물질적 효용의 영역밖에 있는 활동을 말한다. 단순히 우리가 놀이라고 지칭하는 대회나 스포츠만을 한정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나 과학까지도 포함한다.

그럼 ‘일’은 무엇이며, 여가는 놀이와 무엇이 다른가? 라는 의문점이 생긴다. 그래서 조안 B. 시울라의 <일의 발견> 책을 다시 펼쳐보았다. 일, 놀이, 여가, 세 가지 개념에 대해 나름대로 구분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버나드 수츠는 <베짱이의 놀이, 삶, 유토피아>에서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일할 필요가 없는 유토피아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결국 일과 유사한 놀이를 발명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목수는 ‘집짓기 놀이’를 발명했을 것이고, 과학자는 ‘발견 놀이’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집을 지을 필요가 없고, 모든 발견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라 해도 말이다. 수츠는 그들의 유토피아에서는 일하는 활동이 놀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른 외부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할 일’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놀면서 일하는 대신, 일하면서 놀 것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거나 일을 재미있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일이 ‘놀이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놀면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수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신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일하면서 놀 수가 아니다. 첫째, 당신은 일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둘째,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p 36)

이 내용을 읽으면서 ‘실러’의 말로 복잡했던 개념이 정리가 된다.

“부족함이 활동의 본능 동기일 때는 동물은 일을 하고, 힘의 풍족함이 본능 동기일 때는 놀이를 한다. 과잉된 생명은 스스로 활동을 충동한다.” (p 319)

단순화된 개념을 통해 처음에는 다소 무리한 주장이라고 여겨지던 내용들이 많은 언어자료와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한 저자의 설득력에 조금씩 수긍하게 되었다.

인류학, 언어학, 철학, 심리학, 종교학 등 광범위하고 다채롭게 고찰한 내용을 총 12장의 책속에 담고 있다. 1장은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고 지칭하는 이유를 문화 현상에서 찾고 있고. 2장은 놀이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를 각기 다른 언어 속에서 찾고 있다. 3장은 문화를 창조하는 기능으로서 놀이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4장에서 10장까지 법률, 전쟁, 지식, 시, 철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와 놀이와 관련성을 분석하고 있다. 11장은 문화의 변천과정을 놀이와 관련시켜 파악하고, 12장은 현대 문화에서 놀이 요소를 검토한다.

결론적으로 호이징하는 현대인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놀 줄 아는가?’ 하고 자문한다. 표면적으로는 ‘놀이하는 인간’을 논하면서, 내면적으로는 ‘놀지 않는 인간’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경쟁에서 결과인 승부와 성취에만 집착하고 놀이적 요소인 페어 플레이를 경시하면서 ‘놀이 그 자체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라며 경고를 한다. 요즈음의 스포츠를 보면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책을 보다보면 긴 문장과 낯선 단어로 호흡이 끊어지고 되돌이표를 반복하는 경향이 자주 발생한다. 책의 번역시기를 보니 81년도 초판이 발생되어 지금까지 13쇄가 발행되었다. 긴 시간동안 꾸준히 읽힌 점은 인정하나, 번역된 지 너무 오래된 점 때문에 책의 진가가 반감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한, 동양 자료 속에 중국과 일본에 대한 자료는 많이 인용된 반면에 우리나라 자료는 언급된 부분이 없어 한국문헌 자료의 빈약한 현실에 대해서도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놀이에 대한 정의를 글쓰기에 적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부족함이 본능 동기일 때 글쓰기는 일이 되고, 풍족함이 본능 동기일 때 글쓰기는 놀이가 된다.”

아직은 글쓰기가 일인 것을 보니 채워야 할 것이 많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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