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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1일 12시 37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저서: 호모 루덴스 까치(1993) 김윤수 옮김
저자: 요한 호이징하

20세기의 부르크하르트라고 일컬어지는 호이징하는 1872년 12월 17일 네덜란드의 북쪽 대학 도시인 흐로닝헨(Groningen)의 평범한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대학의 생리학 교수였다. 흐로닝헨 대학에 입학한 호이징하는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특히 동양의 언어인 히브리 어, 아라비아 어, 산스크리스트 어의 연구에 심취하였고 점차 비교 언어학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1895, ¬96년의 겨울 학기에는 라이프치히(Leipzig)에 유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비교 언어학에만 대학 생활을 전적으로 바쳤던 것은 아니었다. [호모 루덴스]가 그 좋은 증거가 되겠지만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조예는 그가 이러한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1897년에 학위를 받은 뒤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하를렘(Haarlem)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서 생계를 꾸렸다. 그 뒤 그로닝겐 대학에서 고대 인도 문화사와 종교사 연구로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그리고 역사학으로 기울어져서 연구 무대를 서구 중세사로 옮기게 되었다.

1905년에는 은사이며 역사학자인 블로크(P. J. Blok)의 도움으로 흐로닝헨 대학의 네덜란드 역사 교수가 되었다. 1915년에는 라이덴 대학의 일반 역사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40년 독일군의 점령으로 그 대학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독일 점령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함으로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 석방되어 가족의 면허조차 금지된 채 겔데른(Geldern)의 작은 시골집에서 1945년 2월 1일에 72세로 영면했다.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재미라는 요소가 놀이의 본질을 구성한다. 12p

동물은 논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동물은 기계적인 물체 이상이다. 인간은 놀며, 논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분명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 왜냐하면 놀이란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3p

행위의 독특한 형식으로서의 놀이, “의미 있는 형식”으로서의 놀이, 사회적 기능으로서의 놀이,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주제이다. 14p

…우리에게 중요한 관점은 진정한 의미의 순수한 놀이가 문명의 주된 기초 중의 하나라는 것을 보이고자 하는 것뿐이다. 15p

..우리는 놀이의 첫 번째의 중요한 특성을 파악하게 되었다. 놀이는 자유스러운 것, 바로 자유이다. 또 이것에 깊이 연관 지어져 있는 두 번째 특징은 놀이가 “일상적인” 혹은 “실제의”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20p

놀이의 열등성은 그것에 대응되는 놀이의 진지함에 의하여 점차로 상쇄된다. 20p

..놀이는 생의 기능으로서 개인에게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놀이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 놀이의 의의화 놀이의 표현적인 가치, 놀이의 정신적 사회적 결합, 즉 한마디로 문화적 기능의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도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21p

놀이는 장소와 지속성에 의해 “일상적인” 삶과는 구분된다. 이것이 놀이의 제3의 특징이다. 그것은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이다. 21p

놀이는 절대적이며 최고인 질서를 요구한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경기를 망치게 된다” 그리고 놀이의 특성은 사라지고 놀이는 무가치 해진다. 놀이와 질서의 이러한 내적 결합은 어쩌면 우리가 앞에서 대충 살펴 보았듯이 놀이의 상당 부분이 미학 영역에 속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설명해주는 이유가 될 것이다.

놀이는 아름다워 지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미적 요소는 질서 잡힌 형식을 창조하고자 하는 충동과 어쩌면 동일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 질서 잡힌 형식이야 말로 놀이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기 때문이다.
23p

사실상 놀이의 규칙이 위반되면 그 순간 놀이의 세계는 무너진다. 그리고 놀이는 다 망쳐지게 된다. 심판의 호각소리는 마력을 깨뜨리고 단 한 순간에 “일상적 세계”를 다시 진행시킬 것이다. 24p

놀이 공동체는 놀이가 끝난 뒤에도 지속하려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특수 상황 속에 함께 있다는 감정,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공유한다는 감정, 일상 세계의 규범을 함께 배격한다는 감정은 개개의 놀이가 계속된 시간을 넘어서까지 그 놀이의 마력을 간직하고 있다. 25p

성스러운 행사는 “드로메논(dromenon)”이다. 드로메논이란 “행위 된 어떤 것”이다. 표현으로서 연기된 것은 “드라마(drama)”인데 그것은 연기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든 경기라는 형식으로 이루어 진 것이든 어쨌든 하나의 행위이다. 29p

놀이 분위기는 그것의 기본 성질상 “가변적이다” 놀이를 방해하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혹은 법칙을 어김으로써 그리고 내부로부터 놀이의 정신이 무너져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냉정함을 되찾게 된다면 “일상 생활”은 언제라도 다시 자기 권리를 주장할지 모른다. 38p

모든 의식 행위의 근원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믿는 데에 있다. 42p

사랑 놀이라고 할 때의 “놀이”라는 용어는 특히, 아니 오로지 사회적 규범 밖에서 행해지는 성적 관계에만 사용한다. 72p

놀이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이다. 놀이 개념 그 자체는 진지함보다 한층 더 높은 질서에 속한다. 왜냐하면 진지함은 놀이를 전혀 허용하지 않지만 반면 놀이는 진지함을 아주 적절히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74p

우리가 다음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견해는 문화가 놀이의 형식에서 발생하며 문화는 애당초부터 놀아지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75p

따라서 오락으로서의 경쟁이나 전시는 문화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앞서는 것이다. 76p

놀이가 개인이나 집단의 생활의 강도를 높일수록 더욱 손쉽게 그 놀이는 문명 그 자체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문명이 놀이로서 또 놀이 속에서 성장하면서 취하는 두 개의 영원한 반복적인 형태는 신성한 행사와 축제적 경기이다. 78p

많은 그리스의 꽃병에서 우리는 무장한 사람들의 경기에 피리 부는 사람들이 따라 다니는 그림을 볼 수 있는데 그들로써 그 경기가 승부의 놀이임을 특징짓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79p

경쟁”본능”은 우선 권력욕이라든가 지배의지가 아니며 제 1 차적인 것은 다른 사람을 능가하여 첫째가 되고 그 덕분으로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81p

감행, 모험, 불확실성에 대한 감수, 긴장에 대한 인내 등이 놀이정신의 본질이다. 긴장은 놀이의 중요성과 가체에 대한 의식을 규정해 주며 긴장이 고조되면 놀이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고 있다는 사실을 있게 해 준다. 83p

간단히 말해서 포틀래치 정신은 사춘기의 사고나 감정과 흡사하다. 97p

…….우리는 아름다움 속에 살고자 하는 인간의 영원한 욕구를 틀림없이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오직 놀이밖에 없다. 100p

고귀한 사람의 미덕은 그로 하여금 싸우고, 명령하기에 적합하도록 하는 일단의 자질 속에 있다. 이러한 자질들 속에는 관대함, 지혜, 정의감이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01p

…다른 사람에게 정중함을 나타내는 이유에는 그 자신의 명예에 대한 깊은 관심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105p

검투사들이 시합, 맹수들과의 싸움, 전차경주 등은 그것들이 비록 노예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경쟁의 특성은 전혀 잃지 않는다. 118p

문화란 놀이로서 시작되는 것도, 놀이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놀이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문화의 대립적이고 투기적인 기반은 처음부터 놀이 안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놀이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19p

법과 놀이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법의 이념적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그 법의 실제 집행, 다시 말해서 소송이 경기와 얼마나 꼭 그대로 닮았는가를 관찰해보면 금방 확실하게 나타난다. 121p

승리를 위한 투쟁은 그 자체로 성스럽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이 일단 옳고 그름이라는 명확한 개념에 의해 활력을 얻게 되면 그 투쟁은 법의 단계로 올라간다. 또한 그 투쟁을 신의 힘과 관련된 적극적인 개념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신앙의 단계로 올라 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1차적인 것은 놀이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념을 성장시킨 씨앗이 바로 놀이이기 때문이다. 130p

….고대에서의 입씨름에서 승패의 저울을 가름하는 것은 매우 신중하게 심의된 법률적 논고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신랄하고 통렬한 독설이다. 134p

문화적 기능으로서의 싸움은 언제나 제한하는 규칙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규칙은 어느 정도까지는 싸움의 놀이적 성격을 인정하게끔 요구한다. 우리가 전쟁을 문화적 기능으로서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전쟁의 양편이 서로를 똑 같은 권리를 가진 동등자 혹은 경쟁자로 여기는 범위 안에서 그 전쟁이 수행될 때뿐이다. 다시 말하면 전쟁의 문화적 기능은 그것의 놀이적 성격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 동등한 경쟁자끼리의 범위 밖에서 행해질 때, 예를 들면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따라서 인간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집단-야만인, 이교도, 이단자, “법도 갖지 못한 열등한 종자들”-에 대적하여 수행될 때 그러한 상태는 곧 변하게 된다.

그 경우 전쟁은 놀이적 특성을 완전히 잃게 고 그 전쟁이 그나마 가까스로 문명의 범위 에 머물 수 있는 것은 그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스스로의 명예를 위하여 어떠한 제한을 받아들일 때 뿐이다. 141p

애석하게도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대의 폭발적 전쟁예찬은 전쟁을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 다른 민족을 섬멸시키라는 신의 명령으로 파악했던 바빌로니아 사람과 앗시리아 사람의 전쟁관을 상기시켜 준다. 142p

우리가 “정의(正義)”라고 하는 것은 고대인 식으로 말하자면 “우세한 힘”--“신들의 뜻” 또는 “명백히 드러난 우월성”이라는 점에서의 –을 의미했다. 143p

우리는 결투를 제의적 유혈놀이의 후기 형태, 즉 분노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질서 있는 규제라고 부를 수 있다. 결투가 행해지는 장소는 놀이 장소의 모든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가 있고 발사될 탄환의 수도 지정된다. 피가 흐르면 명예는 옹호되고 회복된다. 149p

기사도의 이상은 비록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기만 당했을지라도 그것이 인류 공동체를 위한 불가결한 안전판의 하나인 국제법의 기초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150p

자기 찬미에 근거한 명예와 고결이라는 원시적 이상은 문명의 보다 진전된 단계에서는 정의(justice)라는 이상에 의해 대체된다. 156p

…..모든 사실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놀이 정신이 없을 때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157p

첫째가 되려는 충동은 사회가 그 충동에 대해서 기회를 제공하는 만큼 많은 형태로 표현된다. 163p

모든 문화에서 투기적 관습으로 특징지어지는 놀라운 유사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바로 인간 정신의 영역, 즉 지식과 지혜의 분야이다. 고대인에게는 행동과 용기가 바로 힘이었다. 그러나 지식(안다는 것)은 마술적 힘이었다. 163p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수수께끼는 두 방향으로 가지를 친다. 한 쪽은 신비주의적 철학이며 또 다른 방향은 레크리에이션이다. 171p

사물의 기원에 관한 성스러운 수수께끼 시합은 서서히 변해서 명예, 소유물, 심지어는 귀중한 생명까지 걸고 하는 함정이 있는 질문 시합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논쟁으로 발전했다. 176p

“시를 짓는 것”은 사실상 놀이 기능이다. 그것은 정신의 놀이터 즉 정신이 그것을 위해 창조해 주는 그 독자의 세계 속에서 진행된다. 이 속에서 사물은 “일상 생활”에서 갖는 외관과는 매우 다른 외관을 갖는다. 또 논리와 인과라는 유대와는 다른 유대로 상호 연관된다. 183p
고대 시인의 진정한 명칭은 라틴어로는 바테스(vates), 곧 악마에 홀린 사람, 신들린 사람, 헛소리하는 사람이다. 이런 자격은 동시에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185p

발레리가 표현했듯이 시를 단어와 언어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한 것은 암유(暗喩)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을 낱말 뜻 그대로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202p

….의인화 과정이란 자신이 지각하는 대상을 타인에게 전달하려는 느낌과 동시에 발생한다. 개념은 그리하여 형상화의 작용으로서 태어나는 것이다. 207p

성자와 신비주의자의 놀이터는 보통 사람들의 영역을 멀리 벗어나 있었으며 또한 논리에 얽매인 이성적 사고로부터도 훨씬 더 멀리 벗어나 있었다. 신성함과 놀이는 언제나 하나로 겹쳐진다. 시적 상상과 믿음도 마찬가지다. 213p

신에게 동물의 형체를 부여하는 형상화 작용이 토테미즘의 전체적 구조의 바탕에 깔려있다. 215p

프로타고라스가 소피스트들의 궤변법을 “고대의 기술”이라고 불렀을 때 그는 정곡을 찌른 것이다. 224p

소피스트들은 본질적으로 유목민 종족에 속하며 방랑성과 기생성은 그의 타고난 권리이다. 224p

…모든 다른 창조물들은 리듬과 하모니라고 불리는 질서와 무질서를 구별하지 못하는 반면, 우리 인간들에게만은 우리에게 춤 동무로 주어진 바로 그 신들이 리듬과 하모니의 인식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242p

아리스토텔레스:
“요즘 대개의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해서 음악을 즐기지만 옛사람들은 음악을 교육을 위해서도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자연은 우리가 일을 잘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빈둥거리기도 잘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 빈둥거림 또는 여가가 우주의 원리였던 것이다. 이 빈둥거림이 일보다 우선한다. 243p

하나의 예술 작품은 그것이 이미 앞서 작곡해놓은 예술 작품이든 연습해놓은 것이든 혹은 써 놓은 것이든 상관없이 그것을 실행(연주)함으로써, 즉 “생산되어” 공중 앞에 제시됨으로써 생명을 가지게 된다. “음악”예술은 행동이며 그 행동이 현주를 통해 반복될 때마다 그 자체로서 즐겨지는 것이다. 250p

조형예술에서는 경우가 아주 다르다. 조형예술이 질료의 구속을 받으며 또한 그 질료가 허용해 주는 형태의 한계에 매인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조형 예술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놀이가 될 수 없으며 음악과 시에는 열려진 천상의 공간으로 날아 오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춤은 변칙적인 위치에 있다. 춤은 음악적이면서 동시에 조형적이다. 251p

예술 창조의 전반적 과정의 면에서 볼 때 조형 예술에서는 이른바 “음악”예술 즉 뮤즈의 예술에서보다 놀이요소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예술 작품의 “제작”으로부터 그것이 사회 환경 속에 수용되는 모습을 시야를 돌릴 때 사태는 급작스레 달라진다. 이 분야에서 우리는 곶 경쟁의 주체로서는 조형적 기술이 인간의 어떤 기능 못지 않게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255p

고대인에게 예술과 창조력과 능숙한 손재주는 남보다 뛰어나고 이기려는 영원한 욕망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256p

2세기 전에 플로렌스 시는 그 유명한 “탐의 숲”을 자랑했는데 탑 하나하나가 모두 어떤 귀족 가문의 자부심의 기념물이거나 다른 가문의 탑에 지지 않으려고 세운 것들이었다. 예술사와 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플로렌스의 탑들이 진지한 방위목적의 건조물이라기보다는 “자랑하기 위한 탑”이었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이 중세의 도시는 놀이의 개념을 장엄한 경관으로 보여준 것이다. 260p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생기며 놀이를 떠나는 법이 전혀 없다. 261p

국가는 결코 순수하고 단순한 공리적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창문에 핀 성에 꽃처럼 시대의 표면에서 응결되며 또 성에 꽃처럼 예측할 수 없고 덧없으며 갖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다. 264p

개선행진은 승전의 엄숙한 축하이상의 행사이다. 그것은 국가가 전쟁의 긴장으로부터 벗어나 그 안녕을 다시 체험하는 의식이었다. 266p

….로마 문화에서 놀이 기능이 차지했던 더 큰 중요성은 문자 그대로 모래 위에 건설된 수많은 새 도시들 가운데 단 하나도 원형 극장을 건설하지 않은 도시는 없었으며 이 원형 경기장은 오랜 세월을 견딘 채 남아서 흔히 단명했던 도시의 영화를 말해주는 유일한 자취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267p

중세 문화는 여러 면에서 조잡하고 빈약했지만 원시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기독교나 고대 고전에서 전승되어 온 재료를 가공해서 그것을 새롭게 동화시키는 것이 중세의 일이었다. 270p

르네상스 정신은 장난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대를 모방한 삶의 게임은 진지하고 엄숙하게 추구되었다. 조형적 창조와 지적 발견과 관련된 과거의 이상에 대한 추구는 격렬하고 깊이가 있었으며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했다…………그러나 르네상스의 전반적인 정신적 태도는 놀이의 태도였다. 아름답고 소상한 형식을 추구하는 세련되었으면서도 신선하고 그리고 힘찬 노력이야말로 문화가 “놀이 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예였다.
르네상스의 영광은 이상화된 과거의 차림을 한 화려하고 엄숙한 가장 행렬일 뿐이다. 271p

바로크의 특성인 과장의 일반적 경향은 창조적 충동이 가지고 있는 놀이 내용이라는 말로 가장 쉽사리 설명될 수 있다. 274p

…가발은 바로크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277p

…로코코란 말은 놀이와 너무 않은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놀이가 이 말의 정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279p

고대를 이상의 원칙으로 삼았던 신고전주의의 경우 유럽의 정신은 어느 특수한 때에 닥치면 항상 고전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것만을 추구하고 발견했다. 폼페이는 때 맞추어 그 무덤에서 일어나서 냉정하고 우아함과 대리석 같은 매끄러움으로 편향된 시대에 새로운 모티브를 주었다. 284p

다시 말해서 감상주의는 휴머니스트들이나 바로크 시대의 그들의 후계자들이 취한 키케로적, 또는 플라톤적 포즈보다는 더욱 진지한 모방이었다. 286p

놀이 요소 쇠퇴의 가장 뚜렷한 징후로 둘 수 있는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 이후 남성들의 복장에서 상상적, 환상적 요소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288p

한 때 신사의 복장에 뺄 수 없는 품목이었던 연미복은 재킷에 완전히 밀려나 웨이터들의 복장이 됨으로써 수백 년에 걸쳤던 화려한 생애를 끝마쳐버렸다. 289p

젊은 세대가 “옛날”로 돌려 버리는 현상들이 연장자들에게는 “우리 자신의 시대”의 일부가 된다. 291p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지고자 하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은 어느 정도까지 놀이 형식을 유지하고 있는가? 놀이 정신이 그 문명을 함께 누리는 사람들의 생활을 어느 정도나 지배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미 관찰한 바와 같이 19세기는 그 이전 시대의 특성이었던 놀이 요소의 상당 부분을 상실한 바 있었다. 이러한 놀이 요소의 상실은 메워졌는가? 아니면 더욱 커졌는가? 291p

경기와 신체 단련을 중요한 문화적 가치로서 인정하게 된 것은 18세기말 이후의 일이었다. 292p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우연적인 오락이 조직적인 클럽제도 및 시합제도로 이행해가는 과정이다. 293p

프로페셔널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과 내키는 대로 하는 태평스러움을 상실하고 있다. 294p

진정으로 놀이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애처럼 놀아야 한다. 297p

스포츠의 경우 명목상으로는 놀이로 알려진 활동이지만 그 기술적 조직과 과학적 완전성이 극도에 달해서 진정한 놀이정신은 말살의 위협 하에 놓여있다. 297p

예술이 스스로를 의식할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장점을 의식할 때, 예술은 그 영원한 어린애 같은 무구성(無垢性)의 일부를 상실하기 쉽다. 301p

임시적으로 결론짓자면 현대 과학의 경우에는 그것이 정확성과 진실성이라는 엄격한 요구에 집착하는 한 우리가 정의하는 바의 놀이의 범주에 들 가능성은 고대와 그리고 바로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경우보다 훨씬 적은데 왜냐하면 고대와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경우에는 그나마 그 과학적 사고와 과학적 방법이 분명하게 놀이적 특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304p

클럽은 아주 오래된 기구이다. 그러나 전 국민이 클럽화 하게 되면 그것은 재난이 된다. 306p

놀이에 대한 우리의 정의에 따르면 미숙성은 장난스러움과는 마땅히 구분되어야 한다. 놀고 있는 어린이는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경멸적 의미로 미숙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 시대의 미숙성이 진정한 놀이라면 우리는 의식(儀式), 스타일, 위엄이 완전히 조화된 고대의 위대한 형태의 레크리에이션으로 문명이 되돌아 가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회가 노예제도 속으로 급히 달려가는 이 장려한 광경을 어떤 사람들은 지복 천년 (至福千年)의 새벽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믿는다. 307p

우리는 점차 문화 속의 놀이 요소가 한창 만개하였던 18세기 이래로 계속 쇠퇴해 왔다는 슬픈 결론에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된다. 오늘날의 문명은 이미 놀이를 잃었다. 놀이가 나아 있는 듯한 부분에서도 그것은 거짓된 놀이일 뿐이다. 내가 대충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문명은 거짓되게 놀기 때문에 어디서 놀이가 끝나고 어디서 놀이가 아닌 것이 시작되는 지 말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특히 정치의 경우에 그렇다. 307p

….”신사 협정이 생겼다. 그런 협정을 맺은 어떤 당사자들은 불행하게도 신사라는 말에 함축된 의무를 인식하지 못하기도 했다…………….정치적 기계장치의 기초가 되는 인간 관계의 탄력성이 “놀이”를 허용함으로써 참을 수 없게 또는 위험하게 되었을 지도 모르는 긴장을 완화시켜 준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바로 유머의 쇠퇴이기 때문이다. 308p

국가들간의 국제법은 일정한 원칙을 서로 인정함으로써 유지되는 데 그 원칙들은 그것이 살사 형이상학에 기초된 것이라 하더라도 실상 놀이 규칙과 똑 같이 작용한다. 그렇지 않다면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원칙을 규정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원칙을 규정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체계의 완전성은 놀이 규칙을 준수하려는 보편적 의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한 편이 이 암묵적 합의로부터 물러서는 순간 남은 무리가 이”놀이의 훼방꾼”을 제재하지 못하는 한에서는 국제법의 전체계는 비록 일시적이겠지만 무너질 것이 뻔하다. 310p

“친구—적” 의 원리에 관한 슈미트의 야만적이고 슬픔을 자아내는 망상보다 더 슬프고 심각한 인간 이성의 추락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의 비인간적 사고는 하나의 형식 논리로서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지한 경우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이기 때문이다………..이 가련한 “친구—적의 관계”를 초월함으로써 인류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영역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슈미트의 “진지함”이라는 낙인은 우리를 미개의 단계로 끌어내릴 뿐이다. 312p

어떤 행동을 진지하게 만드는 것은 그 행동의 “도덕적 내용”이다. 전투가 윤리적 가치를 가질 때 그것은 이미 놀이가 아니다. 윤리적 기준의 객관적 가치와 그 타당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만 전쟁이 놀이인가 아닌가 하는 이 괴로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이 닫혀있을 것이다. 따라서 슈미트가 전쟁은 “비상사태의 진지한 전개”라는 공식을 채택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그가 의도했던 바와는 아주 다른 의미에서 옳은 것이다. 그의 견해는 윤리적 고려에 얽매이지 않은 침략자의 견해다. 313p

진정한 문명은 어떤 놀이 요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명은 자제와 극기를 전제로 하며, 또한 그 자신의 경향을 궁극적 최고 목표와 혼동하지 않는 능력, 그리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어떤 일정한 한계 한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어떤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놀이일 것이며 진정한 문명은 항상 페어플레이를 요구할 것이다. 페어플레이란 놀이의 용어들로 표현된 훌륭한 믿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속임수나 놀이를 망치는 훼방은 분명이 문명 자체를 파괴한다.

건전한 문명 창조의 힘이 되려면 이 놀이 요소는 순수해야 한다. 그것은 이성, 믿음 또는 인간성에 의해 설정된 기준을 은폐하거나 격하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꾸민 가짜, 진정한 놀이 형식이라는 환상 뒤에 숨은 정치적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놀이는 선전을 알지 못한다. 그 목적은 그 자체에 있으며 일반적 놀이 정신은 행복감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다.
314p

우리가 “무엇이 놀이인가?” 무엇이 진지한 것인가”를 놓고 머리를 어지럽힐 때 마다, 우리는 논리에서는 얻지 못했던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논거 점을 윤리의 영역에서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초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놀이는 도덕적 규범의 영역 바깥에 놓여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의지가 우리에게 명하는 어떤 행동이 진지한 의무인가 또는 놀이로서 적법한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즉각 그 시금석을 제공할 것이다.

행동하려는 우리의 결심 속에 진실, 정의, 동정, 용서가 포함되어있다면 그 행동이 놀이인가 진지할 것인가 하는 우리의 걱정스러운 의문은 곧 무의미해지고 만다.

우리의 행동이 지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데는 한 방울의 동정이면 족하다. 우리의 행동이 정의와 고상한 자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하더라도 도덕적 인식인 양심은 항상 끝까지 우리를 미망시키는 의문, 그 행동이 놀이적인 것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압도하여 영원히 침묵시킬 것이다.
316p

목표를 안 두는 사람들의 놀이 동기는 목표에 가까워졌건 도달 했건 또는 실패했건 그런 것에는 전혀 관계없는 기쁨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런 경우의 놀이는 창작적이고 예술적인 것과 가깝다. 실러는 이러한 유사성을 가지고 예술의 문화적 의미를 규정했으며 “인간이란 놀이를 하는 곳에서만 인간이다”라고 했다. 318p


[내가 저자라면]

놀이에 관한 책이라는 설명에 놀려고 잡았다가 놀라서 기절하고만 책이다. 지난번 읽은 책과 막상막하로 역시 꽈배기 도너츠다. 그 때 연결된 뇌시냅스가 조금이라도 남아있길 바라며 책장을 넘겼다. 이 “놀자”라는 말, 참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소감은 그저 앞으로는 액면 그대로 믿고 싶어하는 나의 순진함에서 어서 탈피하여 섣불리 촐랑대지 말고 매사에 진지하게 임해야 하겠다는 교훈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 저자가 말하는 “놀이”라는 것. 단순히 지금까지 인식해왔던 플레이 개념이 아니다. 연구원 모집 때도 “10년 동안 놀아보자”라는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재빨리 참가한 한 연구원이 현재 이를 악물고 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또 여전히 이 제목에 혹해 가뿐하게 대하려 했음을 반성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선 번역서라서 그랬겠지만 매끄럽게 읽히지가 않는다. 한 장 한 장이 글로 꽉 채워져 있고 결론인가 싶으면 반론이 이어지고 또 가지 뻗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의 심중을 파악하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또 언어학자인 저자가 피력하는 고대어에서 파생된 언어들, 그리스어 라틴어를 비롯한 여러나라의 언어의 비교는 수준 낮은 독자로서는 안타깝게도 따라가는 게 힘이 들었다. 그저 현재 사용되는 언어의 발생 개념을 추측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 단어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어화 되었을 때 많은 의미 손상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문명의 발생이 인간의 “놀이” 속에서 발생되며 그 “놀이” 속에서 떠난 적이 없다는 저자의 논리는 상당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놀이’라는 정의와 개념을 다시 한번 재정립하고 나서야 다가오겠지만 말이다.
호이징하는 인간은 놀이를 통하여 인생관과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으며 놀이 정신이 없을 때 문명은 존재하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두 번을 읽고 났을 때 비로소 아하 하는 탄식을 자아냈다.

자크 아탈리가 노마드라는 필터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봤다면 호이징하는 “놀이”로 역사를 비춘다. 영웅이라는 필터를 가진 윌 듀란트 역시 그랬다. 아벨라르라는 한 인물에 대해서도 묘사가 아주 다르게 되어있다. 성서의 진보적 해석자였던 아벨라르와 그녀의 엘로이즈의 이야기로 감동을 받았던 내용과는 다르게 이 책에서는 아벨라르가 성서 해석으로 옮겨 간 진정한 이유가 다름아닌 내기의 결과였다고 보고있다. 경쟁이나 내기 또한 놀이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놀이는 미학의 영역에 속한다. 놀이라는 것은 신사 협정과도 같다. 또한 놀려면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무구함을 가지고 놀아야 진짜로 노는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놀이의 속성을 설명하고 있다.
“놀이는 절대적이며 최고인 질서를 요구한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경기를 망치게 된다” 그리고 놀이의 특성은 사라지고 놀이는 무가치 해진다. 놀이와 질서의 이러한 내적 결합은 어쩌면 우리가 앞에서 대충 살펴 보았듯이 놀이의 상당 부분이 미학 영역에 속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설명해주는 이유가 될 것이다.”

저자는 순수한 놀이가 문명의 주된 기초임을 파악했다. 그리고 놀이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문화이며 그 속성중의 대립적이고 투기적인 기반은 처음부터 놀이 안에 주어져있다고 설한다. 왜냐하면 놀이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략전쟁이나 페어플레이를 깨뜨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의 말은 잔잔하게 내뱉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아주 철퇴로 내리치는 듯하다.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어떤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놀이일 것이며 진정한 문명은 항상 페어플레이를 요구할 것이다. 페어플레이란 놀이의 용어들로 표현된 훌륭한 믿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속임수나 놀이를 망치는 훼방은 분명이 문명 자체를 파괴한다.”

물론 전쟁이 놀이의 투기적 속성이 있음은 사실이나 그것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진지한 행위”이다. 놀이는 절대로 진지하지 않다. 12시에 울리는 종소리는 마법을 깨우곤 금방 놀이가 아닌 일상으로 복귀시킨다. 판을 깨는 자들이다. 저자의 책에는 점잖은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그 내용만큼은 머리끝을 쭈뼛하게 세우는 신랄함이 있었다. 무엇이든 다 놀이로 귀결되는가 하는 의문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로 편안함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놀이는 도덕적 규범의 영역 바깥에 놓여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의지가 우리에게 명하는 어떤 행동이 진지한 의무인가 또는 놀이로서 적법한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즉각 그 시금석을 제공할 것이다.”

놀려고 들었다가 놀라 자빠졌는데 마음을 비웠더니 좀 놀아주던 책이었다. 간신히 그의 터널을 나왔지만 길게 여운이 남는 책이다. 호이징하라는 사람을 알게 되어 뿌듯하다. 알면 알수록 깊이 있는 사람이겠다는 느낌이다. 책을 두 번 이상 읽을 것을 권한다. 특히 아침 새벽에 머리가 맑을 때 접한다면 조명아래서는 볼 수 없었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기쁨을 나누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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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0.21 11:14:27 *.128.229.81
"놀이는 도덕적 규범의 영역 바깥에 놓여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러나 만약 놀이로서... 적법한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즉각 그 시금석을 제공할 것이다.”

몽골의 캠프파이어가 생각나는구나.
게임의 룰, 놀이 속의 질서는 무엇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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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10.21 12:38:54 *.48.38.252
(일단 뜨끔..) 당시는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무구성밖에 없었지요. 윤리적 가치를 논하는 진지한 생각은 전혀…
(호이징하는 윤리적 가치를 가질 때는 놀이가 아니라고 하삼)
질서 규범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어쩌면 알코올 섭취량에 따라서도)을 알았던 귀중한 교훈이었네요.

Q: 만약 그 때와 같은 순간이 다시 온다면?

1. 의자는 절대 쳐다도 안 본다. (이젠 징그럽다. 대신 책상을 찾는다)
2. 병곤이 치고 있던 기타를 집어 넣는다.
3. 행동에 앞서 눈치 좀 살살 보다가 “우리 저거 집어 넣을까?” 하고 의견을 구한다.
4. 여전히 의자를 노린다.

본인 답: 3.
(현재 이 답변은 술 한 방울 안 들어간 상태의 논리적인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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