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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2일 00시 46분 등록
호모 루덴스
요하 호이징하 / 김윤수 옮김 / 까치


1. 저자 소개

요한 호이징하 (Johan Huizinga)

1872년 네덜란드 흐로닝헨에서 출생.

흐로닝헨 대학에 입학한 호이징하는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특히 동양의 언어인 히브리 어, 아라비아 어, 산스크리스트 어의 연구에 심취하였고 점차 비교 언어학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1895­96년의 겨울 학기에는 라이프치히(Leipzig)에 유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비교 언어학에만 대학 생활을 전적으로 바쳤던 것은 아니었다. [호모 루덴스]가 그 좋은 증거가 되겠지만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조예는 그가 이러한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1897년에 학위를 받은 뒤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하를렘(Haarlem)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서 생계를 꾸렸다. 그 뒤 그로닝겐 대학에서 고대 인도 문화사와 종교사 연구로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그리고 역사학으로 기울어져서 연구 무대를 서구 중세사로 옮기게 되었다. 1905년에는 은사이며 역사학자인 블로크(P. J. Blok)의 도움으로 흐로닝헨 대학의 네덜란드 역사 교수가 되었다. 1915년에는 라이덴 대학의 일반 역사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40년 독일군의 점령으로 그 대학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독일 점령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함으로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 석방되어 가족의 면허조차 금지된 채 겔데른(Geldern)의 작은 시골집에서 1945년 2월 1일에 72세로 영면했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와 함께 최고의 문화사가로 손꼽히며, 실증주의와 과학적 역사학을 지향하던 당대의 지적 흐름을 거슬러 인문과학의 독립적 위상과 가치를 옹호했다. 네덜란드 왕립과학아카데미 역사문학부 위원장과 국제연맹 지식협조위원회 부의장으로 활약했으며, 나치 독일에 저항한 양심적 지식인으로도 평가받는다.

서양 중세와 르네상스에 대한 명저 《중세의 가을》(1919),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1924), 《호모 루덴스》(1938) 등을 남겼다. 《문화사의 과제》(1929)는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 사이에 위치하는 역작으로서 문화사의 대상과 방법, 학문적 특성 등을 명쾌하게 정리한 역사에세이이다.


2. 가슴으로 들어온 글귀

13 인간은 놀며, 논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분명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 왜냐하면 놀이란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20 우리는 놀이의 첫 번째의 중요한 특성을 파악하게 되었다. 놀이는 자유스러운 것, 바로 자유이다. 또 이것에 깊이 연관 지어져 있는 두 번째 특징은 놀이가 “일상적인” 혹은 “실제의”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21 놀이는 생의 기능으로서 개인에게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놀이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 놀이의 의의화 놀이의 표현적인 가치, 놀이의 정신적 사회적 결합, 즉 한마디로 문화적 기능의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도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21 놀이는 장소와 지속성에 의해 “일상적인” 삶과는 구분된다. 이것이 놀이의 제3의 특징이다. 그것은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이다.

23 놀이는 아름다워 지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미적 요소는 질서 잡힌 형식을 창조하고자 하는 충동과 어쩌면 동일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 질서 잡힌 형식이야 말로 놀이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기 때문이다.

24 사실상 놀이의 규칙이 위반되면 그 순간 놀이의 세계는 무너진다. 그리고 놀이는 다 망쳐지게 된다.

25 특수 상황 속에 함께 있다는 감정,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공유한다는 감정, 일상 세계의 규범을 함께 배격한다는 감정은 개개의 놀이가 계속된 시간을 넘어서까지 그 놀이의 마력을 간직하고 있다.

38 놀이 분위기는 그것의 기본 성질상 “가변적이다” 놀이를 방해하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혹은 법칙을 어김으로써 그리고 내부로부터 놀이의 정신이 무너져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냉정함을 되찾게 된다면 “일상 생활”은 언제라도 다시 자기 권리를 주장할지 모른다. 3

72 사랑 놀이라고 할 때의 “놀이”라는 용어는 특히, 아니 오로지 사회적 규범 밖에서 행해지는 성적 관계에만 사용한다.

74 놀이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이다. 놀이 개념 그 자체는 진지함보다 한층 더 높은 질서에 속한다. 왜냐하면 진지함은 놀이를 전혀 허용하지 않지만 반면 놀이는 진지함을 아주 적절히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75 문화가 놀이의 형식에서 발생하며 문화는 애당초부터 놀아지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76 오락으로서의 경쟁이나 전시는 문화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앞서는 것이다.

78 놀이가 개인이나 집단의 생활의 강도를 높일수록 더욱 손쉽게 그 놀이는 문명 그 자체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문명이 놀이로서 또 놀이 속에서 성장하면서 취하는 두 개의 영원한 반복적인 형태는 신성한 행사와 축제적 경기이다.

83 감행, 모험, 불확실성에 대한 감수, 긴장에 대한 인내 등이 놀이정신의 본질이다.

100 우리는 아름다움 속에 살고자 하는 인간의 영원한 욕구를 틀림없이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오직 놀이밖에 없다.

119 문화란 놀이로서 시작되는 것도, 놀이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놀이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문화의 대립적이고 투기적인 기반은 처음부터 놀이 안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놀이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21 법과 놀이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법의 이념적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그 법의 실제 집행, 다시 말해서 소송이 경기와 얼마나 꼭 그대로 닮았는가를 관찰해보면 금방 확실하게 나타난다.

130 승리를 위한 투쟁은 그 자체로 성스럽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이 일단 옳고 그름이라는 명확한 개념에 의해 활력을 얻게 되면 그 투쟁은 법의 단계로 올라간다. 또한 그 투쟁을 신의 힘과 관련된 적극적인 개념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신앙의 단계로 올라 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1차적인 것은 놀이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념을 성장시킨 씨앗이 바로 놀이이기 때문이다.

134 문화적 기능으로서의 싸움은 언제나 제한하는 규칙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규칙은 어느 정도까지는 싸움의 놀이적 성격을 인정하게끔 요구한다. 우리가 전쟁을 문화적 기능으로서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전쟁의 양편이 서로를 똑 같은 권리를 가진 동등자 혹은 경쟁자로 여기는 범위 안에서 그 전쟁이 수행될 때뿐이다. 다시 말하면 전쟁의 문화적 기능은 그것의 놀이적 성격에 의존하는 것이다.

149 우리는 결투를 제의적 유혈놀이의 후기 형태, 즉 분노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질서 있는 규제라고 부를 수 있다. 결투가 행해지는 장소는 놀이 장소의 모든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가 있고 발사될 탄환의 수도 지정된다. 피가 흐르면 명예는 옹호되고 회복된다.

157 놀이 정신이 없을 때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176 사물의 기원에 관한 성스러운 수수께끼 시합은 서서히 변해서 명예, 소유물, 심지어는 귀중한 생명까지 걸고 하는 함정이 있는 질문 시합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논쟁으로 발전했다.

183 '시를 짓는 것'은 사실상 놀이 기능이다. 그것은 정신의 놀이터 즉 정신이 그것을 위해 창조해 주는 그 독자의 세계 속에서 진행된다. 이 속에서 사물은 “일상 생활”에서 갖는 외관과는 매우 다른 외관을 갖는다. 또 논리와 인과라는 유대와는 다른 유대로 상호 연관된다.

202 발레리가 표현했듯이 시를 단어와 언어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한 것은 암유(暗喩)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을 낱말 뜻 그대로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213성자와 신비주의자의 놀이터는 보통 사람들의 영역을 멀리 벗어나 있었으며 또한 논리에 얽매인 이성적 사고로부터도 훨씬 더 멀리 벗어나 있었다. 신성함과 놀이는 언제나 하나로 겹쳐진다. 시적 상상과 믿음도 마찬가지다.

242 우리 인간들에게만은 우리에게 춤 동무로 주어진 바로 그 신들이 리듬과 하모니의 인식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243 “요즘 대개의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해서 음악을 즐기지만 옛사람들은 음악을 교육을 위해서도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자연은 우리가 일을 잘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빈둥거리기도 잘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 빈둥거림 또는 여가가 우주의 원리였던 것이다. 이 빈둥거림이 일보다 우선한다.

250 하나의 예술 작품은 그것이 이미 앞서 작곡해놓은 예술 작품이든 연습해놓은 것이든 혹은 써 놓은 것이든 상관없이 그것을 실행(연주)함으로써, 즉 생산되어 공중 앞에 제시됨으로써 생명을 가지게 된다. 음악예술은 행동이며 그 행동이 연주를 통해 반복될 때마다 그 자체로서 즐겨지는 것이다.

251 조형예술에서는 경우가 아주 다르다. 조형예술이 질료의 구속을 받으며 또한 그 질료가 허용해 주는 형태의 한계에 매인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조형 예술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놀이가 될 수 없으며 음악과 시에는 열려진 천상의 공간으로 날아 오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춤은 변칙적인 위치에 있다. 춤은 음악적이면서 동시에 조형적이다.

255 예술 창조의 전반적 과정의 면에서 볼 때 조형 예술에서는 이른바 음악예술 즉 뮤즈의 예술에서보다 놀이요소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예술 작품의 제작으로부터 그것이 사회 환경 속에 수용되는 모습을 시야를 돌릴 때 사태는 급작스레 달라진다. 이 분야에서 우리는 곧 경쟁의 주체로서는 조형적 기술이 인간의 어떤 기능 못지않게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261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생기며 놀이를 떠나는 법이 전혀 없다.

264 국가는 결코 순수하고 단순한 공리적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창문에 핀 성에 꽃처럼 시대의 표면에서 응결되며 또 성에 꽃처럼 예측할 수 없고 덧없으며 갖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다.

271 르네상스 정신은 장난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대를 모방한 삶의 게임은 진지하고 엄숙하게 추구되었다. 조형적 창조와 지적 발견과 관련된 과거의 이상에 대한 추구는 격렬하고 깊이가 있었으며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전반적인 정신적 태도는 놀이의 태도였다. 아름답고 소상한 형식을 추구하는 세련되었으면서도 신선하고 그리고 힘찬 노력이야말로 문화가 놀이 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예였다. 르네상스의 영광은 이상화된 과거의 차림을 한 화려하고 엄숙한 가장 행렬일 뿐이다.

274 바로크의 특성인 과장의 일반적 경향은 창조적 충동이 가지고 있는 놀이 내용이라는 말로 가장 쉽사리 설명될 수 있다.

291 젊은 세대가 옛날로 돌려 버리는 현상들이 연장자들에게는 “우리 자신의 시대”의 일부가 된다.

291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은 어느 정도까지 놀이 형식을 유지하고 있는가? 놀이 정신이 그 문명을 함께 누리는 사람들의 생활을 어느 정도나 지배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미 관찰한 바와 같이 19세기는 그 이전 시대의 특성이었던 놀이 요소의 상당 부분을 상실한 바 있었다. 이러한 놀이 요소의 상실은 메워졌는가? 아니면 더욱 커졌는가?

294 프로페셔널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과 내키는 대로 하는 태평스러움을 상실하고 있다.

297 진정으로 놀이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애처럼 놀아야 한다.

297 스포츠의 경우 명목상으로는 놀이로 알려진 활동이지만 그 기술적 조직과 과학적 완전성이 극도에 달해서 진정한 놀이정신은 말살의 위협 하에 놓여있다.

301 예술이 스스로를 의식할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장점을 의식할 때, 예술은 그 영원한 어린애 같은 무구성(無垢性)의 일부를 상실하기 쉽다.

307 우리는 점차 문화 속의 놀이 요소가 한창 만개하였던 18세기 이래로 계속 쇠퇴해 왔다는 슬픈 결론에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된다. 오늘날의 문명은 이미 놀이를 잃었다. 놀이가 나아 있는 듯한 부분에서도 그것은 거짓된 놀이일 뿐이다. 내가 대충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문명은 거짓되게 놀기 때문에 어디서 놀이가 끝나고 어디서 놀이가 아닌 것이 시작되는 지 말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특히 정치의 경우에 그렇다.

313 어떤 행동을 진지하게 만드는 것은 그 행동의 “도덕적 내용”이다. 전투가 윤리적 가치를 가질 때 그것은 이미 놀이가 아니다. 윤리적 기준의 객관적 가치와 그 타당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만 전쟁이 놀이인가 아닌가 하는 이 괴로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이 닫혀있을 것이다.

313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어떤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놀이일 것이며 진정한 문명은 항상 페어플레이를 요구할 것이다. 페어플레이란 놀이의 용어들로 표현된 훌륭한 믿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속임수나 놀이를 망치는 훼방은 분명이 문명 자체를 파괴한다.......건전한 문명 창조의 힘이 되려면 이 놀이 요소는 순수해야 한다. 그것은 이성, 믿음 또는 인간성에 의해 설정된 기준을 은폐하거나 격하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꾸민 가짜, 진정한 놀이 형식이라는 환상 뒤에 숨은 정치적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314 진정한 놀이는 선전을 알지 못한다. 그 목적은 그 자체에 있으며 일반적 놀이 정신은 행복감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다.

316 우리가 초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놀이는 도덕적 규범의 영역 바깥에 놓여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의지가 우리에게 명하는 어떤 행동이 진지한 의무인가 또는 놀이로서 적법한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즉각 그 시금석을 제공할 것이다. 행동하려는 우리의 결심 속에 진실, 정의, 동정, 용서가 포함되어있다면 그 행동이 놀이인가 진지할 것인가 하는 우리의 걱정스러운 의문은 곧 무의미해지고 만다. 우리의 행동이 지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데는 한 방울의 동정이면 족하다. 우리의 행동이 정의와 고상한 자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하더라도 도덕적 인식인 양심은 항상 끝까지 우리를 미망시키는 의문, 그 행동이 놀이적인 것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압도하여 영원히 침묵시킬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놀이’라는 주제로 철학, 심리학, 종교학, 인류학, 언어학 등의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분석하여 다채로운 견해를 펼친 저자의 박식함은 존경의 지경이다.

‘놀이’ 이 단어만 놓고 보면 무엇이 떠오를까. 즐거움, 재미, 자유, 웃음, 여가, 태평, 매혹, 일하지 않고 있는 상태. 그렇다면 호이징하가 말하는 놀이는 어떤 것일까.

“놀이는 간접적임 실제적인 목적을 추구하지 않으며, 움직임의 유일한 동기가 놀이 자체의 기쁨에 있는 정신적 또는 육체적 활동”

“놀이란 모든 참여자에 의해 인정받는 어떤 일정한 원칙과 규칙, 즉 ‘놀이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활동이며, 거기에는 성취와 실패,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이 있다.”

“놀이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으며 일반적 놀이 정신은 행복감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다.”

“감행, 모험, 불확실성에 대한 감수, 긴장에 대한 인내 등이 놀이정신의 본질이다.”

“우리는 아름다움 속에 살고자 하는 인간의 영원한 욕구를 틀림없이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오직 놀이밖에 없다.”

“놀이는 도덕적 규범의 영역 바깥에 놓여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본인은 이 책과 잘 놀았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연구원 활동의 동기 중 하나가 이 자체의 기쁨과 즐거움에 있다는 점에서 놀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책을 읽고 있는 것 자체가 즐겁고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럼 잘 놀았다고 할 수가 없겠다. ‘놀이’가 주제인 책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단 솔직히 지루함을 감출 수가 없다. 내용 자체에 관심이 가지 않았던 이유도 있지만, 문장 자체가 간결 명료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던 이유도 없지 않다. 원문 번역에 충실하려 해서 그랬는지, 번역자 문장 스타일이 그래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둘 다 해당되는 것으로 짐작되지만) 내내 숨은 그림 찾기 하는 느낌이었다. 조금 더 명확하게 써도 되었을 텐데. 이리저리 꼬아 놓은 문장 속에서 저자의 뜻을 파악하려 하고 쫓아가느라 멀미나게 끌려다닌 기분이다. 무관심한 분야의 대학 전공서적이나 논문 같은 인상이랄까. 읽을 사람만 읽으라는 식의.

니체의 책은 텍스트 자체가 어려워서 고전했다면, 이번에는 흥미 유발이 안 되고 지루해서 힘에 부쳤다. 차라리 어려운 것이 낫겠다. 힘은 들어도 계속적인 인풋이 있고 그 내용에서 재미와 감동과 희열을 느끼기도 하니까. 니체의 책은 다 읽고 나서도 오랜 여운을 주고 언젠가 다시 펴보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반면, 이번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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