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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2일 08시 38분 등록
#1. 프롤로그

이 책의 표지를 펼치며 나는 이런 떨리는 마음을 고백했다.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 이제 그 원전 속으로 들어간다. 새로운 놀이를 시작하듯, 떨리고 흥분된다." 그러나 그 떨림과 흥분은 곧 지루함과 졸림으로 연결되었다. 부끄럽지만, '놀이하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재미있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읽어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책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도 두, 세 번이나 꾸벅꾸벅 졸곤 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책을 읽는 내내 고민하다, 이 책의 끝머리 쯤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제를 다루면서 일반적으로 인정된 실증적인 놀이 특성에서 출발한 놀이 개념에 충실 하려고 노력해왔다. 우리는 그 일상의 의미대로 놀이를 파악하고 모든 인간 행동을 놀이라고 돌려 버릴 수도 있을 철학적 지름길을 회피하려고 애썼다. (p. 314)"

아마 이 때문이리라. 나는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놀이는 우리 삶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는 저자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국경을 오가며, 시대를 오가며, 여러 언어와 학문의 경계를 오가며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증거들을 따라가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던 그 지루하고 꼼꼼한 여정은 끝이 났고, 이제 나는 리뷰를 써야 한다.


#2. 저자에 대하여



요한 호이징하에 대한 소개는 '호모 루덴스'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기에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다.

부르크하르트와 함께 현대 문화사의 기초를 확립한 네델란드의 역사학자, J. 호이징하는 1872년 12월 17일 네델란드의 흐로닝헨(Grinongen)에서 태어났다.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흐로닝헨 대학에 입학해 비교 언어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점점 역사 쪽으로 기울어 이후 중세와 르네상스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1897년에 인도 연극에서 어릿광대의 역할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그는 하를렘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를 가르치다, 1905년 흐로닝헨 대학의 네델란드 역사 교수가 되었다. 1915년에 라이덴(Leiden) 대학의 일반 역사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40년 나치의 점령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그 곳에서 강의를 계속했다.

독일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함으로써 강제 수용소에 갇혔던 그는 1942년에 석방되었지만, 가족의 면회가 금지된 채 억류되어 1945년 2월 1일, 겔데른(Geldern)의 작은 시골집에서 72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강단 생활을 하면서 문화 잡지 'De Gids"의 편집을 담당했으며, 네델란드 왕립 학술원의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19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중세의 가을(The Waning of the Middle Ages)을 발표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로서 문화사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이 책에서 호이징하는 르네상스의 대가, 부르크하르트가 중세와 르네상스를 확연히 구분한 것과는 달리, 르네상스를 중세와 연결되는 일종의 수확기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중세야말로 현대에서 꿈꾸고, 자신의 이론과 저술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유럽 공동 사회'가 실현되었던 시기로 생각했다.


*The Waning of the Middle Ages (1919)

그리고 1938년, 그가 65세가 되던 해에 현대의 고전이 된 '호모 루덴스'를 출판한다. 이 책은 그가 했던 평생의 연구 결과를 총결산한 학문적 소산으로서 인간의 존재와 문화 양식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Homo Ludens (1938)

이 책을 통해 그는 '유럽 문화에 있어서 놀이의 역할'에 대해 인류학, 언어학, 역사, 철학, 미학, 종교학 등을 자유롭게 오가며 고찰하고 있으며,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어떤 학파나 연구 서클도 형성하지 않았으며, 세계와 학문에 대해서 늘 자유롭고 개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그의 또 다른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1924 / 에라스무스
1933 / 17세기 네델란드의 문화 - 사회적 토대와 국가적 특성
1935 / 내일의 그늘에서 - 우리 시대의 문화적 고민에 대한 진단
1945 / 더렵혀진 세계 - 우리 문화의 치유 가망에 대한 고찰

* 참고 자료 : 호모 루덴스(p. 321~326), 위키피디아, NLPVF 홈페이지(www.nlpvf.nl)


#3. 내 마음 속에 들어온 글


머리말

(7) 인간이나 동물에게 다 같이 적용할 수 있으면서도, 생각하는 것이나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제3의 기능이 있으니, 이것이 "놀이하는 것"이다. "만드는 인간"과 이웃하는, 그러나 "생각하는 인간"가는 같은 차원에 속하는 술어로서 취급해야 할 것이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Man the Player)"이라고 생각된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살아 가는 행위에서 "놀이"라는 개념을 분명하고 중요한 요소로 다루지 않을 이유는 없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나는 수년 동안이나 문명이 놀이로서, 또 놀이 속에서 발생하고 전개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8) 독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말 하나하나에 대하여 상세한 증거 문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문화의 일반적인 문제를 다룰 때에는, 공격자 자신이 충분히 탐사해 보지 않은 부분이라도 항상 과감하게 공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1. 문화 현상으로서의 놀이의 본질과 의미


(9) 놀이 속에는 생활의 직접적인 욕구를 초월하고 동시에 생활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놀고 있는(at play)" 어떤 것이 있다. … 하여간 놀이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곧, 놀이가 그 자체의 본질 속에 어떤 비물질적인 성질을 가졌음을 함축하는 것이다.

(11) 놀이에 이렇게 열광하거나 물두하는 것, 즉 미치게 만드는 힘 속에 놀이의 본질, 원초적인 성질이 깃들어 있다.

(13) 세계가 맹목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놀이는 말 뜻 그대로 하나의 과잉(superabundance)이다. 우주의 절대적 결정론을 부수었던 정신이 부서진 그 자리에 들어설 때, 비로소 놀이는 가능해질 수 있고 생각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다. 인간에게 놀이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계속 우주 속에서 인간이 점유한 위치의 초논리적 특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13) 동물은 논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동물은 기계적인 물체 이상이다. 인간은 놀며, 논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분명 인간은 이성적 존재 이상이다. 왜냐하면 놀이란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4) 우리가 놀이를 어떠한 이미지 조작, 즉 현실을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형상화 작용에 근거하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의 주된 관심은 이러한 이미지들의 가치와 의의, 그리고 현실을 그 이미지로 형상화시키는 작용 즉 "상상력(imagination)"의 가치와 의의를 파악하는 데 기울여져야 할 것이다.

(14) 인간 사회의 중요한 원형적 행위에는 처음부터 전부 놀이가 스며들어 있다.

(14) 언어에 힘입어 인간은 사물을 구별하고, 입증하고, 진술한다. 간단히 말하면, 사물을 이름 지어 주며 이름 지음으로써 다시 그 사물을 정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말과 글을 사용함으로써 정신은 물질과 마음 사이에서 계속 "방전(sparking)"을 일으키는데, 말하자면 이것은 정신이 그 훌륭한 명명 능력과 더불어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여러 추상적인 표현의 뒷면에는 항상 가장 대담한 은유들이 있게 마련인데, 은유는 모두 낱말에 기초한 놀이이다. 결국 인간은 삶을 표현함으로써 자연 세계 바깥에 시적(詩的)인 제2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15) 이 글의 목적은 문화를 "놀이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 수사학적인 비유 이상의 것임을 입증하는 데 있다.

(17) 놀이는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립이 아닐 뿐 아니라 참과 거짓, 선과 악의 대립도 아니다. 놀이는 비물리적인 행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인 기능도 아니다. 따라서 덕이냐 악이냐 하는 식의 vudrkss 여기에 적용될 수가 없다.

(19)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이 놀이는 자연의 진행 과정과 구분된다. …. 아이와 동물은 놀이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논다. 그리고 거기에 바로 그들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 놀이는 자유스러운 것, 바로 자유이다.

(20) 두번째 특징은 놀이가 "일상적인" 혹은 "실제의"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실제의" 삶을 벗어나서 아주 자유스러운 일시적인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20) 놀이와 진지함의 대립 관계는 언제나 유동적이다. 놀이의 열등성은 그것에 대응하는 놀이의 진지함에 의하여 점차로 상쇄된다.

놀이가 진지함이 되고, 또 진지함이 놀이가 된다. 놀이가 진지함을 낮은 차원에 남겨두고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높이로 발전할 수도 있다.

(21) 놀이는 간주곡으로 또는 막간극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에 나타난다. 그러나 정규적으로 반복되는 휴식 행위로서의 놀이는 우리의 삶의 반려자이자 보완자가 되어 사실상 삶 전체의 불가결한 한 요소가 된다. 놀이는 삶을 가꾸어 주고 또 삶을 확대시킨다. 그런 한에서 놀이는 생의 기능으로서 개인에게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놀이가 포함가호 있는 의미, 놀이의 의의와 놀이와 표현적인 가치, 놀이의 정신적 사회적 결합, 즉 한마디로 문화적 기능의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도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21) 놀이는 장소와 지속성에 의해 "일상적인" 삶과는 구분된다. 이것이 놀이의 적극적인 제3의 특징이다. 그것은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이다. 놀이는 제한된 시간과 장소 속에서만 "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는 놀이 고유의 과정과 의미가 있다.

(23) 놀이는 질서를 창조하며 질서 그 자체이다. 놀이는 불완전한 세계 속으로, 혼돈된 삶 속으로 일시적이고 제한된 완벽성을 가져다 준다. 놀이는 절대적이며 최고인 질서를 요구한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경기를 망치게 된다." 그리고 놀이의 특성은 사라지고 놀이는 무가치해진다.

(23) 놀이는 아름다워지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미적 요소는 질서 잡힌 형식을 창조하고자 하는 충동과 어쩌면 동일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 질서 잡힌 형식이야말로 놀이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놀이의 요소를 나타내는 데 쓰이는 말들은 거의가 다 미적 효과를 기술하기 위해 쓰이는 미학 개념들이다. 즉 긴장, 평형, 안정, 전환, 대조, 변주, 결합과 해체, 그리고 해결이다. 놀이는 사물을 결합하고 해체한다. 놀이는 우리를 매혹시킨다. 놀이는 우리를 사로잡는다. 즉 놀이는 우리에게 마법을 거는 것이다. 놀이는, 우리가 사물 속에서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두 가지 성질, 즉 율동과 조화롤 충만해 있다.

(23) 긴장은 불확실함이며 위태로움이다. 따라서 놀이란 그러한 긴장을 해소시키려는 노력이다. 무엇인가 긴장 상태에 있는 것은 성취되어야만 한다. 아기기 장난감을 잡으려고 할 때, 고양이가 실패를 가지고 놀 때, 소녀가 공놀이를 할 때, 거기에는 이미 어떤 어려운 것을 성취하려고 하며, 성공하려고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긴장을 해소하려는 요소가 들어 있다.

(24) 놀이하는 사람에게는 꼭 이겨야겠다는 욕망에도 불구하고 경기의 법칙만은 따라야 하기 때문에 용기, 끈기, 역량과 함께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인 "공정성"의 정신력이 요구된다.

(24) "놀이에 관한 한 어떠한 의혹도 불가능하다. 그 규칙이 근거하고 있는 토대는 확고하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폴 발레리

(26) 놀이는 "우리"를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28) 아이가 표현하는 것은, 외견상으로 현실화시킴, 즉 하나의 형상화이며, 그것은 다시 말해서 어떤 형상 속에서 연기하고 표현한다는 뜻이다.

(29) 성스러운 의식의 효과는 표상화되어 보이는 데 있다기보다는 실제로 재생되는데 있다. 따라서 의식의 기능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의식은 그 신봉자들에게 그 성스러운 사건 자체에 참여하도록 한다.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의식이란 모방적(mimetic)이라기보다는 방편적(methectic)이다." 그러한 방편이 "의식 행위를 도와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32) 문제의 정신적 과정에 대한 프로베니우스의 개념은 대강 다름과 같다. 고대인들에게는 아직 표현되지 않은 삶과 자연의 경험은 사로잡히고, 전율하며, 황홀경에 빠지는 "사로잡힘(seizure)"의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창조적 인간이나 아이의 경우에서와 같이 인간의 창조적 능력은 이 사로잡힘의 상태로부터 나온다." "사람은 운명의 계시에 사로잡혀 있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의 리듬의 현실은 인간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고, 따라서 이것은 필연적으로 또 자율적인 작용에 의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 감정을 행위 속에서 표현하도록 만든다." 결국 그의 말에 따르면 이것이 정신의 필연적인 변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삶과 자연의 현상에 의한 전율 즉 "사로잡혀 있음"은 반사적인 행위에 의해 시적 표현과 예술 형식으로 압축된다.

(35) "삶을 놀이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즉, 어떤 경기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노래하고 춤추거나 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은 신을 달래 수 있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으며, 경쟁에 이길 수 있다." - 플라톤

(38) 놀이하는 사람은 그의 심신을 다 바쳐 그 놀이에 빠질 수 있고, 그것이 "단지" 놀이라는 생각도 뒤편으로 물리칠 수 있다. 놀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즐거움은 긴장으로 변할 뿐 아니라 정신의 고양으로 변한다. 놀이는 자유 분방함과 무아경의 두 극단 사이에서 움직인다.

(39) 축제와 놀이의 관계는 그 근본 성질상 매우 가깝다. 둘 다 일상 생활이 정지를 요구한다. 둘 다 유쾌함과 즐거움이 절대적이다. … 둘 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둘 다 엄한 법칙과 진정한 자유를 융합시킨다.

(41) "미개인들은 마치 아이들이 놀 때처럼, 자기 역할에 매우 몰두하는 좋은 연기자이고, 또한 어린이처럼 '진짜' 사자가 아닌 줄 알면서도 그것이 포효하면 마치 죽을 듯이 놀랄 수 있는 좋은 관람자이다."

(43) 어떤 형태의 한 종교가 서로 다른 질서 속에 있는 두 사물 사이의, 이를테면 인간과 동물 사이의 성스러운 동일성을 인정한다고 할 때, 그러한 관계를 우리가 생각하듯이 "상징적인 대응"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당한 표현이다. 이 동일성, 즉 둘이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하는 것은 한 물체와 그것이 상징하는 형상 사이의 대응 이상의 더 깊은 곳에 이른다. 이것은 신비로운 일치이다. 하나가 다른 것이 "된" 것이다.

(45) 이런 성스러운 놀이의 영역에서 어린이와 시인은 미개인과 함께 산다.

(45) 가면을 쓴 모습을 본다는 순수한 미적 체험만으로도 우리는 "일상 생활"을 넘어서, 일광(日光)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이 지배하는 세계로 이끌려 간다. 우리는 미개인과 어린이와 그리고 시인의 세계, 즉 놀이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2. 놀이 개념의 언어에서의 표현

(47) "놀이는 어떤 고정된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수행되는, 그리고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그러나 절대적 구속력을 갖는 규칙에 따라 수행되는 자발적인 행위 또는 일로서, 그 자체의 목적이 있으며, 또 거기에는 어떤 긴장감과 즐거움이 따르며, '일상 생활'과는 '다른' 것이라는 의식이 따른다."

(51) "이러한 것은 모두 '놀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그리스 사람들에게 삶 전체가 모두 놀이였다는 주장이 아닌 바에야…"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 이러한 것이 이 책의 내용이 될 것이다. …. 나는 놀이와 경기의 근원적인 동일성을 굳게 확신한다.

(70) 음악 활동은 시간과 공간의 엄격한 한계 내에서 시작되고 끝나며 반복할 수 있고, 그것의 본질은 질서, 율동, 변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중과 연주자를 동시에 "일상적인" 생활을 벗어난 기쁨과 평안의 세계로 데려다 주고 따라서 그런 점 때문에 슬픈 음악까지도 고상한 즐거움으로 바뀌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음악은 청중과 연주자를 "매료하고" "사로잡는다."

(74) 놀이는 적극적 가치이고 진지함은 소극적 가치이다. "진지함"의 의미는 "놀이"의 부정에 의해 정의되고 그 뜻을 다할 수 있다. 반면에 "놀이"의 의미는 "진지하지 않은 것," "진지하지 않음"이란 말로는 결코 정의될 수 없으며 그 뜻을 다할 수도 없다. 놀이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이다. 놀이 개면 그 자체는 진지함보다 한층 더 높은 질서에 속한다. 왜냐하면 진진함은 놀이를 전혀 허용하지 않지만, 반면 놀이는 진지함을 아주 적절히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문화를 창조하는 기능으로서의 놀이와 경기

(75) 놀이와 문화라는 복합체에서는 놀이가 일차적이다. 놀이가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고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잇는 사실인 데 반하여, 문화는 우리의 역사적 판단이 특정한 사례에 붙이는 명칭일 뿐이다.

(76) 일반적으로 놀이 요소는 대개의 경우 종교 의식의 영역으로 흡수되어 버리면서 점차로 그 세력을 잃는다. 그중 잔류한 놀이 요소는 민속, 시, 철학, 그리고 법적, 사회적 생활의 다양한 형태 속에서 지식으로 결정(結晶)된다. 그래서 본래의 놀이 요소는 문화 현상 뒤에 거의 완전히 감추어진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 고도로 발전된 문명에서까지도, 놀이의 "본능"은 매우 강력한 힘으로 되살아나서 개인이나 대중을 거대한 놀이의 황홀경 속에 빠져들게 할 수 있다.

(77) 긴장과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러 집단들 사이의 놀이에서 대립적 요소가 실제로 경쟁이 될 때 최고도에 이르게 된다. 이겨야 한다는 열정은 놀이 특유의 가벼운 기분을 말살해 버린다.

(78) 문명이 놀이로서 또 놀이 속에서 성장하면서 취하는 두 개의 영원한 반복적인 형태는 신성한 행사와 축제적 경기이다.

(81) 이긴다는 것은 놀이의 결과에서 한 사람의 우월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런 면에서 승리자는 놀이 그 이상의 무엇을 얻게 된다. 이로써 이긴 자는 존경을 받게 되고 명예를 얻게 되고, 이러한 명예와 존경은 그 이긴 자가 속한 집단에도 어떤 이익을 가져 온다. … 즉 성공적인 승리는 손쉽게 개인으로부터 집단으로 확대된다는 사실이다. … 경쟁 "본능"은 우선 권력욕이라든가 지배 의지가 아니며, 제1차적인 것은 다른 사람을 능가하여 첫째가 되고 그 덕분으로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 가장 중요한 일은 "이겼다"는 점이다.

(83) 우리는 임금을 위해서는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해야 한다.

(83) 순전한 탐욕만으로는 무역도 놀이도 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기가 되질 못한다. 감행, 모험, 불확실성에 대한 감수, 긴장에 대한 인내 등이 놀이 정신의 본질이다. 긴장은 놀이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의식을 규정해 주며, 긴장이 고조되면 놀이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해준다.

(101) 모든 것은 그것 자체에 독특한, 그리고 그 종에 고유한 아레테를 가지고 있다. 말이나 개, 눈, 도끼, 활 등은 그것의 고유한 미덕을 가지고 있다. 힘과 건강은 육체의 미덕이고, 지혜와 총명은 정신의 미덕이다. 어원론적으로 아레테는 가장 좋은 것, 가장 뛰어난 것, 즉 아리스토스라는 말과 관련되어 있다.

(119) 문화란 놀이로서 시작되는 것도, 놀이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놀이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문화의 대립적이고 투기적인 기반은 처음부터 놀이 안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놀이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19) 투기의 기능과 구조는 모든 문화의 성장 과정 중 그 문화의 고대 세대에 이미 가장 뚜렷하고 또한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절정에 이른다. 즉 그 뒤로 문화가 더욱 복잡다단해지고 찬란해지고 번잡해짐에 따라, 그리고 생산 기술과 사회 생활 자체가 세밀하게 조직화됨에 따라, 놀이와의 관계를 읽게 된 모든 것, 즉 이념, 사고, 지식 체계, 강령, 규칙, 규범, 도덕, 인습 등이 무성하게 쌓인 밑에서 옛 문화의 토양은 점점 질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문명이 더욱 진지하게 성장했다고 말한다. 그 문화는 놀이에 단지 부차적인 역할만을 부여한다. 영웅적인 시대는 끝났고 이제 투기의 단계 역시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4. 놀이와 법률

5. 놀이와 전쟁

(143) 우리가 "정의(正義)"라고 하는 것은 고대인 식으로 말하자면 "우세한 힘" - "신들의 뜻" 또는 명백히 드러난 우월성"이라는 점에서의 - 를 의미했다. 따라서 무력 투쟁은 길흉 판단, 점괘 혹은 법적인 소송과 마찬가지로 판결의 한 형태이다.

(145) 승리란 신들이 승리자의 대의(大儀)를 지지했음을, 따라서 그것이 "올바른" 대의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157) 이와 같은 모든 사실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놀이 정신이 없을 때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률적 유대가 무너져 완전히 분해된 사회에서조차도 투기적 충동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 내재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첫째가 되려는 내재적 욕망이 여전히 권력 단체들을 서로 충돌하게 할 것이며 이들 단체들을 극도의 집착과 광적인 과대망상증으로 이끌어 갈는지도 모른다. … 밑바닥에는 언제나 승리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런 형태의 "승리"가 아무런 이득도 가져 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61) "하나는 일꾼의 부류이고 또 하나는 놀이꾼들의 부류이다. 한쪽은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며 집을 짓는 등 여러 가지 생활의 필수품들을 조달한다. 또 다른 부류는 거만하고 게으른 자들로서 끊임없이 레크리에이션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생산적이고 부지런한 부류의 인간들을 가축으로서, 또는 죽음의 놀이에 등장하는 그들의 꼭두각시 또는 장기알로 사용한다." - 러스킨

6. 놀이와 지식

(166) 실험 아동 심리학은 6세 아동이 던지는 질문의 대부분이 사실 우주 기원론적 성격의 질문임을 보여 주었다. 아동의 질문은 예를 들면 무엇이 물을 흐르게 하는가? 바람은 어디서 오는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이다.

(170) 수수께기의 해답은 숙고나 논리적 추론에 의해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급작스러운 해결로서 나타난다. 해결이란 질문자가 당신을 얽매고 있는 매듭을 풀어 버리는 것이다.

(171) 수수께끼는 놀이와 진지함 사이의 어떤 가능한 경계선이라도 무너뜨리고 만다. 수수께끼는 한꺼번에 그 둘을 겸하고 있었다. 즉 수수께끼는 가장 성스러운 중요성을 지닌 의식의 요소이면서 동시에 본질적으로 놀이였다.

(172) 그러나 놀이와 진지함이라는 두 형태의 정신 생활은 원래 끊임없는 하나의 정신적 매체를 형성하였고 그리고 그 매체 안에서 문명이 발생했던 것이다.

(173) 상대방은 "잡도록" 계산된 질문을 딜레마라고 부른다. 이에 대한 대답은 상대방(대답하는 쪽)으로 하여금 원래의 제안이 포괄되지 않은 어떤 다른 것을 인정하게 강요함으로써 그를 불리한 입장에 빠뜨린다.

(179) "문제"라는 말 - 글자 그대로는 "당신 앞에 던져지는 것"

(179) 최초의 철학자들은 예언 또는 환희의 어조로 이야기한다. 그들의 확신은 봉헌 의식을 주재하는 사제나 비교(秘敎) 전도사의 자기 확신이다. 그들은 사물의 근원, 발생, 생성 등을 문제로 다루며 그들의 해답은 숙고나 논술에 의해서가 아니고 번뜩이는 통찰력에 의해서 얻어진다.

7. 놀이와 시

(183) 이 문제(시적 창조의 본질을 규명해 봄)는 어떤 의미에서는 놀이와 문화 사이의 관계를 토론하는 데 중심 과제가 된다. 왜냐하면 보다 고도로 조직된 형태의 사회에서는 종교, 과학, 법률, 전쟁, 정치 등이 문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그렇게도 분명했던 놀이와의 연관성을 서서히 잃어 버리는 반면, 시인의 기능만은 여전히 그 기능이 태어난 곳인 놀이 영역 속에 굳건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를 짓는 것(poiesis)"은 사실상 놀이 기능이다. 그것은 정신의 놀이터 즉 정신이 그것을 위해 창조해 주는 그 독자의 세계 속에서 진행된다. 이 속에서 사물은 "일상 생활"에서 갖는 외관과는 매우 다른 외관을 갖는다. 또 논리와 인과라는 유대와는 다른 유대로 상호 연관된다.

(183) 시는 진지함 너머에, 즉 어린이, 동물, 미개인, 예언자가 속하는 보다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수준, 꿈, 매혹, 엑스터시, 웃음의 영역에 존재한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법의 망토 같은 어린이의 영혼을 지닐 수 있어야 하며 어른의 지혜를 버리고 어린이의 지혜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184) 시는 철학적 사람의 꿈과 같다. - 프란시스 베이컨

(197) 모든 시는 놀이에서 태어난다. 신앙에 기초한 성스러운 놀이, 구애라는 축제적 놀이, 경기라는 투기적 놀이, 자랑, 조롱, 욕설에 기초한 논쟁적 놀이, 임기응변과 재치의 날랜 놀이… 이런 놀이들이 시가 태어나는 모태이다.

(203) 대다수의 경우에 시와 문학의 중심 주제는 대개 투쟁이다. 곧 영웅(hero)이 수행해야 하는 과업, 겪어야 하는 시련,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 등을 다룬다.

(204) 이 시어(詩語)라는 전문어는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것이 아닌 특수한 용어, 이미지, 비유 등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보통의 언어와 다르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이해인 관념 사이의 영원한 간극은 상상의 무지개로써만 연결할 수 있다. 언어에 얽매인 개념은 항상 생활의 분류를 표현하는 데는 적절치 못하다. 따라서 사물을 표현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을 표현한 개념들로 감쌀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이미지를 창조하는 형상적(形象的) 언어 뿐이다. 관념과 사물이 이미지 속에서 결합되는 것이다.

(204) 시적 언어가 이미지를 다룬다는 것은 이미지를 가지고 노는 일이다. 즉 이미지에 스타일을 주고 그 속에 그 속에 신비성을 주입함으로써 모든 이미지가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이다.

8. 신화적 시의 요소

(213) 신성함과 놀이는 언제나 하나로 겹쳐진다. 시적 상상과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221) "진실한 시인이란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극적이어야하며 인간의 삶 전체는 비극과 희극이 혼합된 것으로 느껴져야만 한다. " - 소크라테스

9. 철학에서의 놀이 형식

(223) 간단히 말해서 소피스트라는 직업은 스포츠와 맞먹는 직업이었다. 구경꾼들은 그의 재주에 갈채와 웃음을 보냈다. 그의 행위는 상대방을 논쟁의 올가미 속에 잡아넣거나 상대에게 넉아웃 펀치를 먹이는 순수한 놀이였다. 어떤 대답도 올바른 대답이 될 수 없는 비꼬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 그야말로 명예가 다린 문제였던 것이다.

(225) 그리스 인들에게 정신의 보물은 여가(스콜레)의 산물이며, 자유민에게 국가를 위한 봉사, 전쟁 또는 의식을 위한 시간 이외의 시간은 자유 시간으로 간주되었으므로 그들은 충분한 여가를 가질 수 있었다.

(229) '고리기아스'에서 칼리클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지나치며 동시에 부족하다. 당신이 철학을 내던지고 더욱 큰 일에 주의를 돌린다면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젊은 시절에 적당하게 추구하면 괜찮은 것이지만 지나치게 오랫동안 그것에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232) 니체의 전기 작가들 중 일부는 니체가 과거에 있었던 철학의 투기적 태도를 다시 채택했다고 그를 비난하고 잇다. 만약 니체가 진실로 그랬다면 그는 철학을 그 옛 기원으로 다시 이끌어 갔다고 할 수 있겠다.

(235) "생명은 무엇인가?" - "행복한 자의 기쁨, 슬픈 자의 독(毒), 죽음의 노예, 한 장소의 손님, 지나가는 나그네."

10. 예술에서의 놀이 형식

(240) 모든 진정한 제의는 노래와 춤과 놀이로 이루어진다. 우리 현대인들은 제의와 신성한 놀이에 대한 감각을 잃어 버렸다. 우리의 문명은 노쇠해서 너무 복잡해졌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이 잃어 버린 감각을 되찾게끔 도와 주는 데는 음악적 감성이 으뜸이다. 음악을 느끼는 가운데 우리는 제의를 느낀다. 음악이 종교적 개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음악을 즐기는 가운데서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과 성스러움에 대한 감각이 하나로 합치며 이 합치 속에 놀이와 진지함의 구분이 삼켜져 버린다.

(243) "요즘 대개의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해서 음악을 즐기지만 옛사람들은 음악을 교육을 위해서도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자연은 우리가 일을 잘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빈둥거리기도 잘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 빈둥거림(idleness) 또는 여가(leisure)가 우주의 원리였던 것이다. 이 빈둥거림은 일보다 우선한다. 사실 그것은 모든 것의 목적(텔로스)이다.

(244) 노는 데 자유 시간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럴 경우 놀이가 삶의 목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놀이는 일에서 잠시 쉰다는 의미에서, 정신에 휴식을 주는 일종의 강장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가는 그 자체 안에 삶의 모든 기쁨과 쾌락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행복, 즉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노력을 정지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 또 그것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최상의 인간들이고 그들의 취미가 가장 고상할 때에 최상의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디아고게(휴식, 여가)를 보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교육시키고 또 어떤 일들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어떤 일들을 배워야 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필요 때문에 일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배운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떤 일 자체를 위해서 그 일을 배운다는 점이다.

(244)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이들에게는 아직 디아고게의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디아고게는 최종 목적, 하나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246) 여기서 우리가 취해야 할 논점은 플라톤이 창조를 놀이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251) 춤은 음악적이면서 동시에 조형적이다. 리듬과 동작이 주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음악적이며, 불가피하게 물질에 매이기 때문에 조형적이다. 춤의 실행은 제한적 능력을 가지는 인간의 육체에 의존하며 춤의 아름다움은 바로 움직이는 육체 자체의 아름다움이다. 춤은 조각과 마찬가지로 조형적 창조이지만 순간적으로만 그럴 뿐이다. 춤과 동반하고 도 춤의 필요 조건인 음악과 마찬가지로 춤은 그 반복 능력을 통해 생명을 가진다.

(254) 사물을 장식하려는 거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가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욕구를 놀이 기능이라고 부르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이런 욕구는 연필을 손에 든 채 지루한 회의에 참석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거의 의식하지 않은 채 우리는 선, 평면, 곡선, 입체를 그리며 그것들과 함께 놀게도 되는데 이 추상적인 낙서로부터 환상적인 아라베스크, 이상한 짐승, 인간의 형태가 생겨난다.

11. 놀이의 아종(亞種)으로서의 서구 문명

(261) 우리는 어렵지 않게, 놀이 요소가 문화적 과정 전반을 통해서 대단히 활발하게 작용하였고 또 그것은 많은 기본적 형태의 사회 생활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고찰할 수 있었다. 놀이적 경쟁의 정신은 문화 그 자체보다도 더 오래된 사회적 충동이며 마치 효소처럼 모든 생활에 스며들어 있다. 의식은 봉헌 놀이 속에서 탄생해서 놀이에서 자양을 얻으며 자랐다. 음악과 춤은 순수한 놀이였다. 지혜와 철학은 종교적인 시합에서 유래된 언어와 형식에서 그 표현을 찾았다. 전쟁의 규칙, 귀족 생활의 관습은 놀이 패턴 위에 구축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문명은 애초에는 "놀이되어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문명은 아기가 자궁에서 떨어져 나오듯이 놀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생기며 놀이를 떠나는 법이 전혀 없다.

(262)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이와 같이 가까운 과거와의 정신적 유사성을 모두 잃어버려야만 했을까?

(264) 국가는 결코 순순하고 단순한 공리적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창문에 핀 성에꽃(frost-flower)처럼 예측할 수 없고 덧없으며 갖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다. 가장 다양한 기원에서 나온 서로 다른 세력들에 의해 이리저리 밀리면 생겨난 문화의 충동이 소위 "국가"라는 힘의 집합체로 형상화되는데 이렇게 생겨난 국가는 그 존재 이유를 어떤 특별한 가문의 영광, 어떤 특별한 민족의 우월성 속에서 찾는다.

(271) 우리는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정신보다 더 진지한 정신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전반적인 정신적 태도는 놀이의 태도였다. 아름답고 고상한 형식을 추구하는, 세련되었으면서도 신선하고 그리고 힘찬 노력이야말로 문화가 "놀이되고 있는" 것을 보여 주는 예였다. 르네상스의 영광은 이상화된 과거의 차림을 한 화려하고 엄숙한 가장행렬일 뿐이다.

(281) 로코코에서처럼 예술이 놀이와 진지성의 균형을 우아하게 유지한 시대는 드물며 또 조형과 음악이 그렇게 아름답게 조화된 시대도 찾기 힘들다.

(283) 그들의 음악이 완벽의 단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고상한 천진난만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286)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문화적 충동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의 관심이나 흥미를 우리는 놀이 속에서 추구하느냐 아니면 진지함 속에서 추구하느냐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의심이 일어나며, 이 의심과 함께, 마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는 체하는 것(make believe) 밖에 없는 듯한 거북한 위선의 감정이 생겨난다. 그러나 우리는 진지함과 가장 사이의 이 불안한 균형이 분명히 문화의 불가결한 구성 요소라는 사실, 놀이 요소가 무든 제의 및 종교의 한가운데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불변의 모호함에 항상 의지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유독 진지함이 없는 비(非)제의적 문화 현상 속에서는 이 모호함은 정말 곤란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289) 그의 위엄에 알맞은 화려한 복장을 과시하던 전시대의 우아한 신사들이 이제 진지한 시민이 되었다.

12. 현대 문명에서의 놀이 요소

(291) 우리가 얘기하는 어떤 시간도 이미 역사에서 과거가 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과거는 우리가 그것에서 멀리 물러나면 물러날수록 그만큼 더 멀리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젊은 세대가 "옛날"로 돌려 버리는 현상들이 연장자들에게는 "우리 자신의 시대"의 일부가 된다. 이 이유는 연장자들이 그 현상을 개인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가 아직도 그 현상 속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서로 다른 시간 감각(time-sense)은 어떤 사람이 속하게 된 세대에 으해 좌우된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옛것과 새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에 의해 좌우된다.

(294) 프로페셔널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과 내키는 대로 하는 태평스러움을 상실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또한 아마추어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아마추어들은 열등 콤플렉스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297) 진정으로 놀이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어린애처럼 놀아야 한다.

(298) 일부 대기업에서는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놀이 정신을 주입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되면 사정이 뒤바뀌어 놀이가 일이 된다.

(299)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생산하는" 과정에도 어떤 장난스러움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강한 놀이 요소가 기본적 본질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뮤즈의 예술 또는 "뮤즈적" 예술에서는 아주 분명히 드러난다. 조형 예술에서는 놀이 감각이 여러 가지 각종 형식의 장식과 연관되어 있음을, 다시 말해서 장신과 손이 가장 자유롭게 움직이는 분야에서 특히 놀이 기능이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 냈다.

(301) 예술이 스스로를 의식할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장점을 의식할 때, 예술은 그 영원한 어린애 같은 무구성(無垢性)의 일부를 상실하기 쉽다.

(302) 만약 우리가 공간, 시간, 목적의 특정한 한계 내에서 고정된 규칙에 따라 일어나는 활동이 바로 놀이라는 우리의 정의를 과학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모든 과학과 학문이 여러 가지 형태의 놀이에 불과하다는 놀랍고 무서운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303) 과학의 규칙은 놀이의 규칙과는 달리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규칙은 끊임없이 경험에 의해서 거짓임이 드러나며 따라서 수시로 수정된다. 반면에 게임의 규칙은 게임 그 자체를 망치지 않고는 변경될 수 없다.

(304) 첫째, 어떤 놀이 형식이 어떤 사회적 또는 정치적 계획을 감추기 위해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는 우리가 이 책의 주제로 취급해 온 영속적인 놀이 요소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거짓된 놀이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 어떤 형상들은 언뜻 보기에는 놀이의 모습을 갖추고 있고 영구적인 놀이 경향으로 오인될 가능성이 많으면서도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놀이와 어느 정도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는 특질, 또는 고도로 발전된 놀이 요소라고 오인될 수 있는 특질에 의해서 현대 생활은 점점 지배되고 있다. 이 특질을 나는 미숙성(Puerilism)이라는 말로 불러 왔다.

(307) 우리는 점차 문화 속의 놀이 요소가 한창 만개하였던 18세기 이래로 계속 쇠퇴해 왔다는 슬픈 결론에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된다. 오늘날의 문명은 이미 놀이를 잃었다. 놀이가 아직 남아 있는 듯한 부분에서도 그것은 거짓된 놀이일 뿐이다. 내가 대충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문명은 거짓되게 놀기 때문에 어디서 놀이가 끝나고 어디서 놀이가 아닌 것이 시작되는지를 말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310) 어느 한편이 이 암묵적 합의로부터 물러서는 순간, 남은 무리가 이 "놀이의 훼방꾼"을 제재하지 못하는 한에서는 국제법의 전체계는 비록 일시적이지만 무너질 것이 뻔하다.

(312) 현대의 전쟁이, 그 겉모습으로만 볼 때, 놀이와의 연관성을 모두 상실했다는 점이다. 최고 문화를 표방하는 국가들이 국제 의례를 무시하고 후안무치하게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국제법 체계 속에 내재한 놀이 규칙을 파괴한다. 위엄을 위해서 그들이 벌이는 전쟁 놀이는 진정한 놀이가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전쟁이라는 놀이 개념을 배반한다.

(313) 진정한 문명은 어떤 놀이 요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명은 자제와 극기를 전제로 하며, 또한 그 자신의 경향을 궁극적 최고 목표와 혼동하지 않는 능력, 그리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어떤 일정한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어떤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놀이일 것이며, 진정한 문명은 항상 페어플레이를 요구할 것이다. 페어플레이란 놀이의 용어들로 표현된 훌륭한 믿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속임수나 놀이를 망치는 훼방은 분명히 문명 자체를 파괴한다. 건전한 문명 창조의 힘이 되려면 이 놀이 요소는 수수해야 한다. 그것은 이성, 믿음, 또는 인간성에 의해 설정된 기준을 은폐하거나 격하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겉모양만 그럴 듯하게 꾸민 가짜, 진정한 놀이 형식이라는 환상 뒤에 숨은 정치적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놀이는 선전을 알지 못한다. 그 목적은 그 자체 안에 있으며 일반적 놀이 정신은 행복감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다.

(315) "용서하게.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내 눈이 신을 바라보고 있고 또 신에 의해 감동되었기 때문이라네. 자네 말마따나 인간은 아주 하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라네. 얼마간의 고려의 대상은 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지."

(315) 인간의 정신은 궁극적인 것으로 주의를 돌림으로써만이 놀이의 마술적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 논리적인 사고는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정신의 모든 보물과 정신이 성취한 모든 영광을 훑어볼 때에 우리는 아직 모든 진지한 판단의 밑바닥에 어떤 문제가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모든 선언이 절대적 결론이 아님을 알고 있다. 우리의 판단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바로 거기에서 세상은 진지한 것이라는 우리의 느낌도 결국 함께 흔들리게 된다. "모든 만사가 헛되다"라는 옛 속담 대신에 "모든 것은 놀이이다"라는 보다 적극적인 결론이 우리에게 강요된다.

(316)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의지가 우리에게 명하는 어떤 행동이 진지한 의무인가 또는 놀이로서 적법한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즉각 그 시금석을 제공할 것이다. 행동하려는 우리의 결심 속에 진실, 정의, 동정, 용서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행동이 놀이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우리의 걱정스러운 의문은 곧 무의미해지고 만다. 우리의 행동이 지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데에는 한 방울의 동정이면 족하다. 우리의 행동이 정의와 고상한 자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인식인 양심은 항상 끝까지 우리를 미망시키는 의문, 그 행동이 놀이적인 것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압도하여 영원히 침묵시킬 것이다.


#4. 내가 저자라면

책을 덮고 나자 휴, 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인간의 모든 활동의 근원에 놀이가 있다."는 결론을 위해 저자가 들인 방대한 노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그는 국경을 오가고, 수많은 자료들을 오가고, 여러 언어를 오가며 인류와 문화의 근원을 파고 든다. 인터넷도 없던 시기인 70년 전에…

이 책을 통해 나는 하나의 새로운 개념을 정립한다는 것이 이렇게 지난하고 고된 작업임을 깨달았다. 이런 꼼꼼한 작업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도약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고마움도 느꼈다. 이 책은 바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튼튼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구나!"

우리는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잘 알게 된다. 이 책의 저자, 호이징하는 내게 그런 기회를 주었다. '호모 루덴스'을 읽는 내내 이렇게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 필요한 저술은 결코 내 영역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니체가 문헌학에서 철학 쪽으로 관심이 기울어진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하는 주제넘은 생각까지도 해보았다.

나는 생각 사이의 빈 공간이 많은 사람이다. 얼핏 꼼꼼한 듯 보이지만 여기서 저기로 뛰어가는 그 생각의 길 위에는 무수히 많은 여백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내가 어떤 생각을 말할 때, 나와 다른 사고 방식의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게 아마 내가 일을 하거나,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눌 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비논리적인 사람으로 비춰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글이 좋다.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책, 글과 글 사이를 비상하듯 마구 달려가는 보폭이 넓은 책이 좋다. 읽다가 숨이 가빠서 잠시 책을 내려놓고 숨을 골라야만 하는 그런 책이 책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와는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놀이하는 인간'에 대해 말하는 책치고는 조금 지루한 것 만은 사실이지만,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세가지 메세지를 내게 던져주었다.

첫째, 우리는 '놀이하는 인간'이다. 근엄한 척하는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즐거운 '놀이'는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다.

둘째, 우리는 '놀이'를 통해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한 문명에는 건강한 '놀이 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결국 잘 놀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셋째,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과연 제대로 놀고 있는가? 온전한 자기 자신을 살아내고 있는가? 무엇 무엇인척 하는 거짓된 삶이 아닌, 기쁨으로 가득하고 가슴이 벅차 오르는 진정한 삶을 살고 있는가?

번역본의 끝 부분에 인용된 실러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부족함이 활동의 본능 동기일때는 동물은 일을 하고, 힘의 품족함이 본능 동기일 때는 놀이를 한다. 과잉된 생명은 스스로 활동을 충동한다." (p. 318)


#5. 에필로그

이 책은 내게 약간의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역사, 철학, 종교학, 심리학, 언어학, 미학, 인류학을 종횡무진 오가는 저자의 방대한 지식의 그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과연 내가 무언가를 알고 있기는 한건가? 하는 기초 교양 수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 때 책장 한 구석에서 '교양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란 두꺼운 책이 눈에 띄었다. 어떻게 이 책이 내 책장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호기심에 이끌려 일단 펼쳐 들었다.

그런데 딱딱하게 생긴 겉모습과는 달리 제법 재미있다. '지식'에 대해 말하는 1부는 훌쩍 뛰어 넘고, '능력'에 대해 말하는 2부를 살펴보다 저자의 재치 있는 글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그 중 "억지로 읽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장편 소설을 읽어야만 한다는 그의 제안이 눈에 띄어 여기에 인용해본다.

"여기에서 하나의 합리적인 제안을 특히 남성들에게 하고 싶다(여성들은 어차피 책을 읽는다). 과거 시민사회에서는 마음 속의 심리적인 망설임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소년에게 ... 화류계의 권위 있는 여성으로 하여금 레슨비를 받고 그를 조심스럽게 교육하도록 했던 것처럼, 그렇게 처음에는 어느 정도 의무감을 갖고 고전적인 장편소설을 읽어야만 한다. 그래야 나중에 스스로 읽고 싶은 충동이 생겨나거나, "다시는 안 읽는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 예컨데 그가 읽은 소설이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라고 하자. 이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소설은 억지로 읽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뒤적이면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단지 더 많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남들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난 거룩한 사람으로 되기 위해서도 아닐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서이다. 다른 사람들과 더욱 즐겁게 소통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사람의 지식과 영혼에 자신을 비춰보기 위해서이다.

더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작은 언덕을 올라야 한다. 작은 언덕을 올라야 더 큰 산을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쉼 없이 산을 오르다 보면 지칠 때도 있다. 그러나 힘들다고 해서 그 언덕에 안주하면 자신의 깜냥이라는 작은 그릇 안에 갇히게 된다.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산을 오르자. 오르다 보면 땀이 흐르고, 나도 모르는 새에 근육이 붙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느새 탁 트인 곳에 이르러 주변의 멋진 풍광에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여유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리히텐베르크의 다음과 같은 말이 내게 힘을 준다.

"나는 내가 어저께 무엇을 먹었는지 잊어버리듯이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를 곧 잊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정신과 내 육체를 유지하는데 기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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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혼자 힘으로 백만장가 된 사람들.. 흐르는 강물처럼... 2007.10.21 2185
1108 놀이와 문화에 관한 연구 -호모루덴스(호이징하) 우제 2007.10.21 3490
1107 호모 루덴스 / 요한 호이징하 [2] 香仁 이은남 2007.10.21 2295
1106 [호모 루덴스] 놀고 있어도 놀 줄을 모른다. [2] 여해 송창용 2007.10.20 2186
1105 내 잔이 넘치나이다 두디스 2007.10.18 2584
1104 바라는대로 이루어진다 [11] 한명석 2007.10.18 3800
1103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고병권 [7] 海瀞 오윤 2007.10.16 2557
1102 [독서28]②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素田 최영훈 2007.10.16 2354
1101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을 읽고 [3] [1] 현운 이희석 2007.10.16 2746
1100 [독서28]①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素田 최영훈 2007.10.16 2222
1099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 고병권 [1] 素賢소현 2007.10.16 2311
1098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고병권 [3] 우제 2007.10.16 2316
1097 [리뷰025] 니체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4] 香山 신종윤 2007.10.16 2283
1096 (27)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4] 時田 김도윤 2007.10.16 2368
1095 [28]모든 것에서 즐기고, 모든 것에서 떠나라-[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교정 한정화 2007.10.16 2370
1094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2] 香仁 이은남 2007.10.16 2412
1093 [28]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2] 써니 2007.10.16 2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