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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2일 01시 2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하위징아 [Johan Huizinga, 1872.12.7~1945.2.1]

네덜란드 역사가. 1872년 12월 7일 흐로닝언에서의 평범한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대학의 생리학 교수였다. 흐로닝헨 대학에 입학한 호이징하는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특히 동양의 언어인 히브리 어, 아라비아 어, 산스크리스트 어의 연구에 심취하였고 점차 비교 언어학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그가 비교 언어학에만 대학 생활을 전적으로 바쳤던 것은 아니었다. [호모 루덴스]가 그 좋은 증거가 되겠지만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조예는 그가 이러한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1897년에 학위를 받은 뒤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하를렘(Haarlem)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서 생계를 꾸렸다. 그 뒤 그로닝겐 대학에서 고대 인도 문화사와 종교사 연구로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그리고 역사학으로 기울어져서 연구 무대를 서구 중세사로 옮기게 되었다. 1905년에는 은사이며 역사학자인 블로크(P. J. Blok)의 도움으로 흐로닝헨 대학의 네덜란드 역사 교수가 되었다. 1915년에는 라이덴 대학의 일반 역사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40년 독일군의 점령으로 그 대학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독일 점령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함으로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 석방되어 가족의 면허조차 금지된 채 겔데른(Geldern)의 작은 시골집에서 1945년 2월 1일에 72세로 영면했다.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중세의 가을》(1919)은 14~15세기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생활과 사상을 밝힌 것으로 한국에서도 1988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최홍숙의 번역으로 간행되었다. 그 밖에 16세기 지식인의 모습을 그린 《에라스무스》(1924), 《내일의 그림자》(1935), 《호모 루덴스》(1938)가 있다. 《호모 루덴스》는 1981년 김윤수 번역으로 까치에서 간행되었다.

2.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9-놀이는 하나의 의미 기능이다. 즉 놀이에는 뜻이 있다는 말이다. 놀이 속에는 생활의 직접적인 욕구를 초월하고 동시에 생활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놀고 있는 어떤 것이 있다. 놀이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역동적인 원칙을 단지 ’본능‘이라고 말해 버린다면, 아무런 설명도 되지 못한다. 반면 이것을 정신이나 의지라고 하는 것 역시 지나친 일이 된다. 하여간 놀이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곧, 놀이가 그 자체의 본질 속에 어떤 비물질적인 성질을 가졌음을 함축하는 것이다.

12-자연은 긴장과 쾌락과 재미를 함께할 놀이를 주었다./ 재미라는 요소가 놀이의 본질을 구성한다.

14-인간 사회의 중요한 원형적 행위에는 처음부터 전부 놀이가 스며들어 있다. 행위의 독특한 형식으로서의 놀이, “의미 있는 형식”으로서의 놀이, 사회적 기능으로서의 놀이,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주제이다.

23-놀이는 아름다워 지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미적 요소는 질서 잡힌 형식을 창조하고자 하는 충동과 어쩌면 동일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 질서 잡힌 형식이야 말로 놀이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기 때문이다.

24-사실상 놀이의 규칙이 위반되면 그 순간 놀이의 세계는 무너진다. 그리고 놀이는 다 망쳐지게 된다. 심판의 호각소리는 마력을 깨뜨리고 단 한 순간에 “일상적 세계”를 다시 진행시킬 것이다

29-성스러운 행사는 “드로메논(dromenon)”이다. 드로메논이란 “행위 된 어떤 것”이다. 표현으로서 연기된 것은 “드라마(drama)”인데 그것은 연기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든 경기라는 형식으로 이루어 진 것이든 어쨌든 하나의 행위이다.

35- “신만이 가장 진지함을 누릴 수 있고, 인간은 신의 노리개로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인간에게 속한 가장 최선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남녀는 이에 따서, 가장 고상하게 놀이하는 삶을 살면서 지금과는 정반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 왜냐하면 전쟁에는 우리가 가장 진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은 평화롭게 살아야만 한다. 그러면 무엇이 바로 사는 방법인가? 삶을 놀이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즉, 어떤 경기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노래하고 춤추거나 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은 신을 달랠 수 있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으며, 경쟁에 이길 수 있다.”

70-우리는 아주 당연하게 음악은 놀이의 영역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발단부터가 놀이 고유의 형식적 특징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음악활동은 시간과 공간의 엄격한 한계 내에서 시작되고 끝나며 반복할 수 있고 그것의 본질은 질서, 율동, 변화로 구성 되어 있으며, 청중과 연주자를 동시에 “일상적인”생활을 벗어난 기쁨과 편안의 세계에 데려다 주고 따라서 그런 점 때문에 슬픈 음악 까지도 고상한 즐거움으로 바뀌게 된다.

72-사랑 놀이라고 할 때의 “놀이”라는 용어는 특히, 아니 오로지 사회적 규범 밖에서 행해지는 성적 관계에만 사용한다.

74-놀이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이다. 놀이 개념 그 자체는 진지함보다 한층 더 높은 질서에 속한다. 왜냐하면 진지함은 놀이를 전혀 허용하지 않지만 반면 놀이는 진지함을 아주 적절히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78-개인이나 집단의 생활의 강도를 높일수록 더욱 손쉽게 그 놀이는 문명 그 자체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문명이 놀이로서 또 놀이 속에서 성장하면서 취하는 두 개의 영원한 반복적인 형태는 신성한 행사와 축제적 경기이다.

81-경쟁 ”본능”은 우선 권력욕이라든가 지배의지가 아니며 제 1 차적인 것은 다른 사람을 능가하여 첫째가 되고 그 덕분으로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101-고귀한 사람의 미덕은 그로 하여금 싸우고, 멸령하기에 적합하도록 하는 일단의 자질 속에 있다. 이러한 자질들 속에는 관대함, 지혜, 정의감이 높은 위치에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자질들 속에는 관대함, 지혜 정의감이 높은 위치에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많으 sals족에게는 미덕이라는 말이 “사나이다움”이라는 개념에서 발생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107-자신의 우월성을 자화자찬할 때 그 상대방의 적수가 욕설과 조롱을 격렬히 퍼 붓는 것을 풍자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아주 지당한 말이다.

115-그리스 경기는 그것이 존재했던 기간 내내 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고, 후기에 가서 얼핏 보기에는 그 경기들이 순수하고 단순한 국민적인 경기의 외양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때에도 경기는 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121-법과 놀이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법의 이념적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그 법의 실제 집행, 다시 말해서 소송이 경기와 얼마나 꼭 그대로 닮았는가를 관찰해보면 금방 확실하게 나타난다.

122-재판이 행해지는 곳은 어디든 하나의 성스러운 장소이며, 그것은 일상적인 세계와는 울타리 쳐진 격리된 장소이다.

123-영국사회 특유의, 전통에 대한 경외감을 통해 법속에 간직되어 있는 예T 특색은 바로 그것뿐만 아니다. 즉 영구구법의 집행에서 그렇게도 뚜렷이 나타나는 경기적 요소와 유머는 고대 사회의 법이 가진 근본적인 특색의 하나인 것이다.

125-고대인의 정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옳음과 그름의 추상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이김과 짐의 구체적인 문제다. 우리가 고대인의 법의식에 더욱 가까이 갈수록, 그러한 승리의 기대라는 요소가 점점 전면으로 나타난다.

130-좀 더 진실하게 말하자면 판결의 선포와 신의 심판 즉, 시죄법에 의한 재판은 그 둘이 모두 투기적인 결정, 제비뽑기나 운수에 의한 경기든 혹은 힘이나 인내심 같은 종류의 시험에 의한 경기든 그 경기의 결과가 최후의 지시를 내리는 그러한 경쟁의 결정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말해야 되지 않을까? 승리를 위한 투쟁은 그 자체로써 성스럽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이 일단 옳고 그름이라는 명확한 개념에 의해 활력을 얻게 되면 그 투쟁은 법의 단계로 올라간다.

132-재판과정의 내기 요소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소송의 당사자가 자기의 권리를 내기에 거는데, 다시 말하면 당사자가“담보”를 걸어 놓음으로써 자기의 권리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싸우자고 상대방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둘째는 소송 그 자체가 가진 내기적인 요소와는 상관없이 특별히 영국에서는 방청객들이나. 일반 대중들이 똑같이 한 소송 사건의 결과에 대해서 내기를 거는 것이 통상적인 관습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36-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문화적 관습은 투기의 형태를 통해 재판의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면서 동시에 본래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놀이 그 자체로서 아직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폭소와 즐거움으로 끝나게 된다. 왜냐하면 구경꾼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133-둘째는 소송 그 자체가 가진 내기적인 요소와는 상관없이 특별히 영국에서는 방청객들이나 일반대중들이 똑같이 한 소송의 사건의 결과에 대해서 내기를 거는 것이 통상적이 s관습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136-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문화적 관습은 투기적 형태를 통해 재판의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면서 동시에 본래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놀이 그 자체로서 아직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폭소와 즐거움으로 끝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경꾼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138-정치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은 대개 다른 사람을 중상모략하기위해 고소하는 일로써 정치적 경력의 첫발을 내딛곤 하였다. 로마에서도 역시 오랫동안, 소송에서 상대방을 꺽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합법적인 일로 여겨졌다.

141-우리가 전쟁을 문화적 기능으로서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전쟁의 양편이 서로를 똑같은 권리를 가진 동등자 혹은 경쟁자로의 문화적 기능은 그것의 놀이적 성격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 동등한 경쟁자끼리의 범위 밖에서 행해질 때, 예를 들면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따라서 인간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집단- 야만인, 악마, 이교도, 이단자, “법도 갖지 못한 열등한 종자들”-에 대적하여 수행될 때, 그러한 상태는 곧 변하게 된다. 그 경우 전쟁은 그 놀이 특성을 완전히 잃게 되고, 그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스스로의 명예를 위하여 어떠한 제한을 받아들일 때뿐이다.

142-애석하게도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대의 폭발적 전쟁예찬은 전쟁을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 다른 민족을 섬멸시키라는 신의 명령으로 파악했던 바빌로니아 사람과 앗시리아 사람의 전쟁관을 상기시켜 준다.

143-결론적으로 말해서, 모든 결정에는 이러한 종교적 의미가 덧붙여진 까닭에, 우리는 전쟁그 자체를 점 혹은 예언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144-전투는 운명의 시합이다. 첫 조우는 전투의 성패를 예견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편 단신 결투가 전투 그 자체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148-일반인들의 사사로운 결투가 재판을 위한 결투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 못된다. 본질적으로 이 둘은 똑 같은 것이다. 즉 이것들은 위신을 위한 계속되는 투쟁이다. 위신이란 정의와 힘을 동시에 포함하는 근본적인가치다. 복수란 명예감의 충족이며 명예는 그것이 아무리 사악하고 범죄적이고 또 병적인 것일지라도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150-전쟁 속에 내포된 투기적 또는 놀이적 요소는 각 문명 및 시대에서 무작위로 택한 여러 예에서 잘 예시될 수 있다.

155- 중세의 군사 관습에는 전투의 시간과 장소를 제의하는 것과 같은 레벨의 다른 관습들이 있다. 전열에서의 ‘명예의 자리’에 대한 요구와 승자는 전쟁터에 사흘 동안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요구 등이 그러한 예이다.

156-세계 도처의 전설에 나타나는 이 모든 제의적 ,의식적 관행에서 우리는 전쟁놀이, 전투, 법률, 운명, 우연이 서로 밀접하게 뒤엉킨 그 지속적이고 열렬한 시합의 원초적 영역에서 유래하였음을 똑똑히 볼 수가 있다. / 자기 찬미에 근거한 명예와 고결이라는 원시적 이상은 문명의 보다 진전된 단계에서는 정의(justice)라는 이상에 의해 대체된다.

163-첫째가 되려는 충동은 사회가 그 충동에 대해서 기회를 제공하는 만큼 많은 형태로 표현된다. / 모든 문화에서 투기적 관습으로 특징지어지는 놀라운 유사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바로 인간 정신의 영역, 즉 지식과 지혜의 분야이다. 고대인에게는 행동과 용기가 바로 힘이었다. 그러나 지식(안다는 것)은 마술적 힘이었다.

168-수수께끼는 비밀스러운 힘으로 충만된 성스러운 것이며 따라서 위험한 것이다. 신화적이고 제의적인 문맥에서 볼 때 그것은 거의예외 없이 독일의 언어학자들이 모가지 수수께끼로서 알고 있는 것에 해당된다. 이 수수께끼는 풀든가 아니면 머리를 내놓아야 하는 중대한 것이다.

171-수수께끼는 원초적으로 성스러운 게임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따라서 수수께끼는 가장 성스러운 중요성을 지닌 의식의 요소이면서 동시에 본질적인 놀이였다. 따라서 수수께끼는 놀이와 진지함 사이에 어떤 가능한 경계선이라도 무너뜨리고 만다. 수수께끼는 한꺼번에 그 둘을 겸하고 있었다. 즉 수수께끼는 가장 성스러운 중요성을 지닌 의식의 요소이면서 동시에 본질적으로 놀이였다.

173-수수께끼의 문학적 파생물 중 하나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성스러운 것과 놀이적인 것 사이의 연관성을 매우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철학 또는 신학적 내용의 문답론이다.

176-사물의 기원에 관한 성스러운 수수께끼 시합은 서서히 변해서 명예, 소유물 , 심지어는 귀중한 생명까지 걸고 하는 함정이 있는 질문 시합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논쟁으로 발전했다.

183-시를 짓는 것은 사실상 놀이 기능이다. 그것은 정신의 놀이터 즉 정신이 그것을 위해 창조해 주는 그 독자의 세계 속에서 진행된다. 이 속에서 사물은 “일상의 생활”에서 갖는 외관과는 다른 유대로 상호 연관된다. 만약 진지한 말을 생활을 일깨우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정의한다면 시는 결코 진지함의 수준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시는 진지함 너머에, 즉 어린이, 동물, 미개인, 예언자가 속하는 보다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수준, 꿈, 매혹, 엑스터시, 웃음의 영역에 존재한다.

184-“시는 철학적 사랑의 꿈과 같다”고 사상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자연의 아이들인 미개인들의 존재의 기원에 관한 신화적 상상 속에는 흔히, 후대에는 논리적이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지혜의 씨앗이 포함되어 있다.

191-미적 의도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사교적 놀이로써의 시는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며 그 형식도 매우 다양하다. 대개의 경우 거기에는 투기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요소는 교창, 노쟁적인 시, 노래 시합 등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며 마법을 풀기위한 목적의 주문 같은 즉흥적인 시에도 은연중에 함축되어 있다.

194-세계 어디서나 시사 산문에 선행한다. 진지한 것, 성스러운 것을 표현하는 적절한 수단은 시 뿐이다. 찬송, 기도문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의 종교적 교서인 ‘수트라’ 나 ‘샤스트라. 나 그리이스 철학의 초기 저작 같은 긴 논문까지도 시의 형식을 취한다.

213-성자와 신비주의의 놀이터는 보통 사람들의 영역을 멀리 벗어나 있었으며 또한 논리에 얽매이는 이성적 사고로부터 훨씬 더 멀리 벗어나 있다. 신성함과 놀이는 언제나 하나로 겹친다. 시적 상상과 믿음도 마찬가지다.

216-신화의 요소뿐만 아니라 시의 요소들 역시 놀이 기능으로서 가장 잘 이해된다. 왜 사람들은 언어를 운율, 억양과 리듬에 종속시키는가? 아름다움이나 심원한 감정 때문이라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놀이의 요구를 느끼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를 쓴다면 좀 더 이해가 간다.

230-철학은 아득한 옛날 수수께끼 놀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수수께끼 놀이는 제의나 축제에 따르는 여흥이었다.

243-요즈음 대개 의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해서 음악을 즐기지만 옛사람들은 음악을 교육을 위해서도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자연은 우리가 일을 잘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빈둥거리기도 잘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50-무용은 순수한 놀이다. 놀이와 무용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인 참여의 관계이며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춤은 특수한 형식의 놀이이며, 특별히 완벽한 형식의 놀이인 것이다.

260-예술사와 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이 플로랜스의 탑들이 진지한 방위 목적의 건조물이라기보다는 “자랑하기 위한 탑”이었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이 중세의 도시는 놀이의 개념을 장엄한 경관으로 보여 준 것이다.

261-놀이적 경쟁적의 정신은 문화 그 자체보다도 더 오래된 사회적 충동이며 마치 효소처럼 모든 생활에 스며있다. 의식은 봉헌 놀이에서 자라났으며 시 역시 놀이 속에서 탄생해서 놀이에서 자양을 얻으면서 자랐다. 음악과 춤은 순수한 놀이었다. 지혜와 철학은 종교적인 시합에서 유래된 언어와 형식에서 그 표현을 찾았다. 전쟁의 규칙, 귀족 생활의 관습은 놀이 패턴 위에서 구축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문명은 애초에는 “놀이 되어진 것”이라는 결론이 이른다. 문명은 아기가 자궁에서 떨어져 나오듯이 놀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생기며 떠나는 법이 전혀 없다.

281-음악은 놀이기능의 가장 높고 순수한 표현이다. 18세기 음악의 중요성은 그 놀이 내용과 심미적인 내용의 완전한 조화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순수한 청각적 현상으로서 음악은 이미 여러 면에서 세련되고 풍요로웠다.

298-일부 대기업에서는 생산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놀이 정신을 주입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되면 사정이 뒤바뀌어 놀이가 일이 된다.

301-사람들은 과거에 예술 그 자체의 높은 목적과 그것이 창조하는 아름다움을 대체로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예술이 스스로를 의식할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장점을 의식할 때 예술은 그 영원한 어린애 같은 무구성의 일부를 상실하기도 한다.

307-오늘날의 문명은 이미 놀이를 잃었다. 놀이가 나아 있는 듯한 부분에서도 그것은 거짓된 놀이일 뿐이다. 내가 대충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문명은 거짓되게 놀기 때문에 어디서 놀이가 끝나고 어디서 놀이가 아닌 것이 시작되는 지 말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특히 정치의 경우에 그렇다.

313-어떤 행동을 진지하게 만드는 것은 그 행동의 “도덕적 내용”이다. 전투가 윤리적 가치를 가질 때 그것은 이미 놀이가 아니다. 윤리적 기준의 객관적 가치와 그 타당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만 전쟁이 놀이인가 아닌가 하는 이 괴로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이 닫혀있을 것이다.

316-우리의 행동이 지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데는 한 방울의 동정이면 족하다. 우리의 행동이 정의와 고상한 자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하더라도 도덕적 인식인 양심은 항상 끝까지 우리를 미망시키는 의문, 그 행동이 놀이적인 것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압도하여 영원히 침묵시킬 것이다.

318-목표를 안 두는 사람들의 놀이 동기는 목표에 가까워졌건 도달 했건 또는 실패했건 그런 것에는 전혀 관계없는 기쁨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런 경우의 놀이는 창작적이고 예술적인 것과 가깝다. 실러는 이러한 유사성을 가지고 예술의 문화적 의미를 규정했으며 “인간이란 놀이를 하는 곳에서만 인간이다”라고 했다.

325-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 생겨나며 놀이를 떠나는 법이 없다. 곧 인간은 놀이를 통하여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놀이정신이 없을 때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3. 내가 저자라면

어린 시절, 나는 18세대가 함께 사는 단독주택에 살았다. 나와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세대마다 한 두 명은 있었고, 하교 후에 마당에 모여 갖가지 놀이를 했다. 놀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오락게임부터 시작하여 어린 시절 떠 올려 볼 수 있는 소꿉장난, 다방구, 오리발, 술래잡기, 돈까스, 땅따먹기, 전쟁놀이 등등. 떠올리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추억들이 가득한 놀이다.

그 놀이들은 휴식이나 즐거움의 분위기를 가져다 주었다. 격렬한 움직임과 경쟁이 살아 숨쉬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쉬게 하고 즐겁게 해주었다. 구속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생활에 영향력이 없는 활동이었다. 그것은 현실 생활의 진지함과 반대되었다.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잘 활용된 시간과는 반대된 낭비된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어린시절의 추억으로 품고 있던 ‘놀이’이 대해 “무엇이 놀이일까?”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해준다. 그리고 현실속에, 특히 내가 부정적인 한계를 덮어놓은 여러 가지 사안들에 대해서 확대된 시각을 제시해 주었다. 법률, 전쟁, 지식, 시, 신화, 철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문화 현상으로서의 놀이의 본질과 다양한 의미를 열거하고 있는 이 책은, 한 학자의 평생의 연구 결과를 자연스럽게 결산하는 학문적 소산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행위양식의 본질 규명에 새롭게 도전하는 기념비적 저서임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문화는 원초부터 유희(놀이)되는 것이며 유희(놀이) 속에서 유희(놀이)로서 발달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문화는 놀이에서 나왔고 놀이를 통해 지탱되며, 법률 · 철학 · 예술 · 학문 · 정치 등 모든 것이 서로 다투고 경쟁하는 놀이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저자의 탁월한 통찰력을 보면서 나에게 가장 신선하게 다가온 놀이는 바로 법률과 놀이였다. 니체는 법원은 삶의 죄를 추궁하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하였다. 나 또한 이와 같은 생각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에 상담소 활동에서 정책이나 법적지원 활동에 한계성을 부여하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사회에 질서를 잡아주는 제도들이나 그것들의 영광에 공헌하는 학문들의 근원을 놀이정신에서 찾았다. 법률도 당연히 이 범주에 들어간다. 법전은 사회적 놀이의 규칙을 명문화 한 것이며, 법해석은 놀이의 규칙을 소송사건으로까지 확대한 것이다. 소송절차는 놀이행위의 연속성과 규칙성을 명확히 한 것이다. 모든 것이 놀이의 명료성, 정확성, 순수성, 공평성을 갖고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정의의 성벽 안에서 불변의 의례에 따라 변론이 진행되고 판결이 내려지는 것은, 놀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다른 공간과 떼어놓는 절대적인 격리, 그리고 현행규칙의 엄격하면서도 특히 명확한 질서를 생각나게 한다. 그 공간과 질서를 놀이로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법정책 운동과 법적 지원을 ‘얼마나 잘 놀 것인가’로 초점을 옮겨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으로의 전환은 좀 더 창의적이고 풍부한 아이디어를 생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놀이와의 연관성을 상실하지 않은 법정책 운동”의 화두를 품게 된다.

이 법률 놀이 안에서 나는 하나의 질문을 다시 품는다. 그렇다면 운동가들은 놀이의 주체가 아니라 놀이의 파괴자로서의 주체인가? 급변하는 사회에서 가장 더디게 변화는 하는 것이 법과 의식이라는 현실을 볼 때, 보수적인 틀로 견고하게 포장된 법의 틀을 깨는 것은 여성인권운동이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였다. 늘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되어지는 것에 도전했고, 상당부분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았다.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해체하는 역할을 도맡아 해왔다. 그것은 더 이상 놀이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의 파괴에 기여하는 것이다. ‘놀이의 파괴자’가 된다. 그렇지만 규칙을 부정하는 것은 동시에 새로운 탁월성을 지닌 미래의 기준을 창조한다. 새로운 놀이의 기준을 준비한다. 널리 통용되고 있는 금기를 깨뜨리는 모든 파괴는, 이전과 똑같이 엄격하고 자의적인 하나의 체계의 윤곽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생각을 늘어놓다보니 참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졌다. 나는 일부 사회제도 안에서 놀이의 주체로서 존재 하며, 제약이 희미해지고 규칙이 소멸되는 경계에서는 놀이의 파괴자의 주체로서 존재했다. 또 다른 사회제도 안에서는 놀이의 사기꾼의 주체로 존재한다. 또 하나의 놀이안에서도 여러 가지 반응에 따라 다양한 주체로 변화한다. 놀이라는 말은 이러한 다양한 극이 존속하며, 그 극 사이에 어떤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카오스 현상자체가 놀이인가? 그 안에서 무엇이 놀이인지, 무엇이 진지한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없는가? 이에 저자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생각들이 머리를 어리럽힐 때 마다, 논리에서 얻지 못했던 움직이지 않는 논거점을 윤리의 영역에서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될 것이다. 놀이는 도덕적 규범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의지가 우리에게 명하는 어떤 행동이 진지한 의무인가 또는 놀이로서 적법한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즉각 그 시금석을 제공할 것이다. 그렇기에 내 자신에게 깨어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내가 어느 공간과 어떤 규칙 안에서 놀이하고 있는지, 또한 놀이의 주체로 혹은 다른 주체로 살아가고 있는지, 직시하고 성찰 할 수 있는 다각화된 눈을 가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번 책은 번역의 문제때문인지 굉장히 읽기 힘들었다. 중간 중간 이해가 잘 안되어 연결 짓는데 어려움을 느낀 책이다. 저자의 철학과 내용을 있는 그대로 흡수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저자의 평생의 연구가 실린 만큼 처음과 끝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었다면 좋았을거란 아쉬움이 남는다.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서론과 결론의 핵심이 함께 실렸다면 이 책을 한번에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서론 부분은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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