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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2일 09시 36분 등록
「호모 루덴스」에 대하여

『놀이에 대한 욕구는 놀이로 인한 즐거움이 놀이를 욕구하는 한에서만 절실해 진다.』p19

『「호모 루덴스」는 호이징아가 65세 되던 1938년에 간행되었다. 이 책은 한 위대한 학자의 평생의 연구 결과를 자연스럽게 결산하는 학문적 소산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행위 양식의 본질 규명에 새로 도전하는 한 기념비적 저서이다. 그가 이 책에서 내린 결론은 이 책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 나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기 보다 오히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것이다. 그리고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생겨나며 놀이를 떠나는 법이 전혀 없다. 곧 인간은 놀이를 통하여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놀이 정신이 없을 때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에 가까워 올수록 문화가 놀이 성격을 옷 벗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p325


1. 저자에 대하여

이 책의 뒷부분에 저자 호이징하에 대하여 자세히 나와 있다. p321~323

20세기 부르크하르트라고 일컬어지는 호이징하는 1872년 12월 17일 네덜란드의 북쪽 대학 도시인 흐로닝헨(Groningen)의 평범한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대학의 생리학 교수였다. 호로닝헨 대학에 입학한 호이징하는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특히 동양의 언어인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산스크리스트어의 연구에 심취하였고 점차 비교 언어학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1895-96년의 겨울 학기에는 라이프치히(Leipzig)에 유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비교 언어학에만 대학 생활을 전적으로 바쳤던 것은 아니었다.「호모 루덴스」가 그 좋은 증거가 되겠지만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조예는 그가 이러한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그는 1897년에 학위를 받은 뒤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하를렘(Haarlem)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서 생계를 꾸렸다. 그 뒤 그로닝겐 대학에서 고대 인도 문화사와 종교사 연구로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그리고 역사학으로 기울어져서 연구 무대를 서구 중세사로 옮기게 되었다. 1905년에는 은사이며 역사학자인 블로크(P. J. Blok)의 도움으로 흐로닝헨 대학의 네덜란드 역사 교수가 되었다. 1915년에는 라이덴 대학의 일반 역사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40년 독일군의 점령으로 그 대학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독일 점령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함으로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 석방되어 가족의 면회조차 금지된 채 겔데른(Gledern)의 작은 시골집에서 1945년 2월 1일에 72세로 영면했다.

그는 강단 생활을 하며 1916년부터 32년까지 한 문화잡지의 편집을 맡았고 네덜란드 왕립 학술원의 회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라이덴 대학에서 1919년 그 유명한「중세의 가을」을 발표하여 유럽 인문 과학자 중에서 발군의 존재가 되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부르크하르트를 잇는 문화사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들은 공통적인 역사 감각을 가지고 문화사가를 지향했던 것이다. 호이징하는 인류의 문화 발전을 하나의 보편적인 개념으로써 분석, 설명하고, 도식화, 유형화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며 한 시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이런 역사학 방법을 문화사(Kultur-Geschichte)라고 하는데 호이징하는 그 자신은 몰론 부르크하르트를 문화사가의 범주에 넣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저자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와 중세를 명확하게 대비시킨 데에 대해서「중세의 가을」의 저자 호이징하는 저서의 제목 그대로 르네상스를 중세와 연결되는 곧 중세의 수확기로서 파악하였다. 물론 두 사람의 중세와 르네상스에 대한 이러한 해석 차이는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50년의 시간적 거리에 의한 학문적 성과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호이징하는 중세야말로 그가 현대에서 꿈꾸고, 자신의 이론과 저술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유럽 공동 사회가 실현되었던 시대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드디어 현대의 고전이라고 하는「호모 루덴스」가 그의 문화사 연구의 자연적인 귀결로서 집필되었다.

그는 그의 선배 부르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정치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극히 필요하고 가치가 있을 때만 조금씩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강한 예술가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 역시 부르크하르트를 연상시킨다. 이런 요소와 예술에 대한 연구는 그의 문화사에서 종합되어 그림 같은 언어와 환상적인 표현에 의해 그의 글들을 문학적인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의 학파도, 연구 서클도 형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세계와 학문에 대해서 자유롭고 개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그의 저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919년-「중세의 가을-네덜란드의 14세기와 15세기의 생활양식과 정신형태에 관한 연구」
1924년 -「에라스무스」
1933년 -「17세기 네덜란드의 문화 - 사회적 토대와 국가적 특성」
1935년 -「내일의 그늘에서 - 우리 시대의 문화적 고민에 대한 진단」
1938년 -「호모 루덴스 - 문화의 놀이 요소의 규정에 대한 시도」
1945년 -「더럽혀진 세계 - 우리 문화의 치유 가망에 대한 고찰」 p323


2. 내 마음 속에 들어온 글귀

1. 문화 현상으로서의 놀이의 본질과 의미

놀이(play, Spiel)는 문화보다 오래된 것이다. p9

우리의 인간 문명은 놀이라는 일반 개념에 어떤 본질적인 특징을 전혀 더하지 못했다고까지 말해도 틀림이 없으리라. p9

놀이는 순수한 물리적 또는 순수한 생물학적 행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놀이는 하나의 의미 기능이다. 즉 놀이에는 뜻이 있다는 말이다. 놀이 속에는 생활의 직접적인 욕구를 초월하고 동시에 생활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놀고 있는 (at play)” 어떤 것이 있다. p10

놀이에 열광하고 몰두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분석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러나 놀이에 이렇게 열광하거나 몰두하는 것, 즉 미치게 만드는 힘 속에 놀이의 본질, 원초적인 성질이 깃들어 있다. p11

자연은 긴장과 쾌락과 재미를 함께한 놀이를 우리에게 주었다. p12

현대적 의미로 우리는 놀이를 “총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놀이를 하나의 총체성으로서 이해사고 평가하려고 해야만 한다. p12

놀이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정신”을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놀이도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물의 경우에도 놀이는 육체적 존재의 한계를 돌파해 버린다. 세계가 맹목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놀이는 말 뜻 그래도 하나의 과잉(superabundance)이다. 우주의 절대적 결정론을 부수었던 정신이 부서진 그 자리에 들어설 때, 비로소 놀이는 가능해질 수 있고 생각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다. 인간에게 놀이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계속 우주 속에서 인간이 점유한 위치의 초논리적 특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동물은 논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동물은 기계적인 물체 이상이다. 인간은 놀며, 논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분명 인간은 이성적 존재 이상이다. 왜냐하면 놀이란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p13

인간 사회의 중요한 원형적 행위에는 처음부터 전부 놀이가 스며들어 있다. p14

말과 글을 사용함으로써 정신은 물질과 마음 사이에서 계속 “방전(sparking)”을 일으키는데, 말하자면 이것은 정신이 그 훌륭한 명명 능력과 더불어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p14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이 놀이는 자연의 진행 과정과 구분된다.

아이와 동물은 놀이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논다. 그리고 거기에 바로 그들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놀이로 인한 즐거움이 놀이를 욕구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 있고 중지될 수 있다. 왜냐하면 결코 물리적 필요나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결코 임무가 아니다. 놀이는 여우가 있을 때, 곧 “자유 시간”에 행해지는 것이다. 단지 놀이가 문화적 기능- 의식이나 예법-으로 인정되었을 때에만 과제나 의무라는 개념이 거기에 결부된다.


긴장은 불확실함이며 위태로움이다. 따라서 놀이란 그러한 긴장을 해소시키려는 노력이다. p23

투쟁으로서의 놀이와 표현으로서의 놀이
고대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가무의 목적은 천하를 바른 길로 이끌고 자연이 인간을 위해 자비를 베풀도록 하는 데 있다고 했다. p29

문제의 정신적 과정에 대한 프로베니우스의 개념은 대강 다음과 같다. 고대인들에게는 아직 표현되지 않은 삶과 자연의 경험은 사로잡히고, 전율하며, 황홀경에 빠지는 “사로잡힘(seizure)”의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창조적 인간이나 아이의 경우에서와 같이 인간의 창조적 능력은 이 사로잡힘의 상태로부터 나온다.” “사람은 운명의 계시에 의하여 사로잡혀 있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의 리듬의 현실은 인간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고, 따라서 이것은 필연적으로 또 자율적인 작용에 의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 감정을 행위 속에서 표현하도록 만든다.” 결국 그의 말에 따르면 이것이 정신의 필연적인 변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삶과 자연의 현상에 의한 전율 즉 “사로잡혀 있음”은 반사적인 행위에 의해 시적 표현과 예술 형식으로 압축된다. p32

우리가 놀이 개념을 부당하게 확대시킨다면 우리는 단순히 말장난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p34

“신만이 가장 진지함을 누릴 수 있고, 인간은 신의 노리개로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인간에게 속한 가장 최선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남녀는 이에 따서, 가장 고상하게 놀이하는 삶을 살면서 지금과는 정반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 왜냐하면 전쟁에는 우리가 가장 진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은 평화롭게 살아야만 한다. 그러면 무엇이 바로 사는 방법인가? 삶을 놀이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즉, 어떤 경기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노래하고 춤추거나 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은 신을 달랠 수 있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으며, 경쟁에 이길 수 있다.” p35

놀이에서의 성스러운 진지함
무의식적이고 순수한 진짜 놀이도 역시 매우 진지하다. 놀이하는 사람은 그의 심신을 다 바쳐 그 놀이에 빠질 수 있고, 그것이 “단지” 놀이라는 생각도 뒤편으로 물리칠 수 있다. 놀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즐거움은 긴장으로 변할 뿐 아니라 정신의 고양으로 변한다. 놀이는 자유분방함과 무아경의 두 극단 사이에서 움직인다.

놀이의 분위기는 그것의 기본 성질상 “가변적이다.” 놀이를 방해하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혹은 법칙을 어김으로써 그리고 내부로부터 놀이의 정신이 무너져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냉정함을 되찾게 되면 “일상 생활”은 언제라도 다시 자기 권리를 주장할지 모른다. p38

현대인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나 낯선 것에 매우 예민하다. p45

2. 놀이 개념의 언어에서의 표현
“놀이는 어떤 고정된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수행되는, 그리고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그러나 절대적 구속력을 갖는 규칙에 따라 수행되는 자발적인 행위 또는 일로서, 그 자체의 목적이 있으며, 또 거기에는 어떤 긴장감과 즐거움이 따르며, ‘일상의 생활’과는 ‘다른’ 것이라는 의식이 따른다.” p48

놀이 관념을 놀이 행위 자체의 개념이 아닌 다른 개념으로 의식적으로 전이시켰기 때문이 아니고, 그 놀이 관념 스스로가 무의식적인 아이러니로 용해되었기 때문이다. p63

놀이로서의 문화 - 놀이가 변하여 문화가 된 것은 아니다.

오락으로서의 경쟁이나 전시는 문화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앞서는 것이다. p76

놀이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이긴다”는 개념이다. 이긴다는 것은 놀이의 결과에서 한 사람의 우월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의 생활에서부터 최고의 문화 활동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사회적 완성을 위한 가장 강한 충동 중의 하나가 자신의 우월성을 찬양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p100

문화란 놀이로서 시작되는 것도, 놀이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놀이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문화의 대립적이고 투기적인 기반은 처음부터 놀이 안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놀이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p119

모든 것 중에서 가장 1차적인 것은 놀이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념을 성장시킨 씨앗이 바로 놀이이기 때문이다. p130

러스킨은 인간은 애초부터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고 보았다. “하나는 일꾼의 부류이고 또 하나는 놀이꾼들의 부류이다. 한쪽은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며 집을 짓는 등 여러 가지 생활의 필수품들을 조달한다. 또 다른 부류는 거만하고 게으른 자들로서 끊임없이 레크리에이션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생산적이고 부지런한 부류의 인간들을 가축으로서, 또는 죽음의 놀이에 등장하는 그들의 꼭두각시 또는 장기 알로 사용한다.” p161

충성이란 자신을 어떤 사람, 대의 또는 사상에 바치면서 그 바치는 이유를 따지거나 그 바침의 지속성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덕성은 - 순수한 형태로는 지극히 이롭지만 그것이 왜곡될 때는 지극히 악마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 이 놀이 영역에서 곧바로 유래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p161

모든 시는 놀이에서 태어난다. 신앙에 기초한 성스러운 놀이, 구애하는 축제적 놀이, 경기라는 투기적 놀이, 자랑, 조롱, 욕설에 기초한 논쟁적 놀이, 임기응변과 재치의 날랜 놀이 … 이런 놀이들이 시가 태어나는 모태이다. 그러나 문명이 보다 복잡해질 때 시의 놀이적 특질은 어느 정도나 보존되는가? p197

모든 시대의 인류 사회에서 시적 양식에 그 놀라운 균일성과 한계를 주는 이 공통분모는 아마 우리가 시라고 부르는 창조 기능이 문화 그 자체보다도 더욱 원초적인 기능, 즉 놀이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한다.
놀이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우리가 판단을 내렸던 특징들을 다시 한 번 열거해 보기로 하자. 그것은 일정한 시간과 공간의 한계 내에서 뚜렷한 질서에 따라, 또 자유롭게 공인된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활동으로서 필요 또는 물질적 효용의 영역 밖에 있는 활동이다. 놀이 무드는 환희와 열정의 무드이며, 그 놀이가 봉헌 행사인 단순한 오락인가에 따라 성스러운 분위기나 또는 축제적인 분위기가 된다. 고양감과 긴장감이 이 활동에 수반되며 환희와 긴장의 완화가 뒤따른다. p202

신화에서든 서정시에서든, 또 시극에서든 서사시에서든, 오랜 옛날의 전설에서든 또 현대 소설에서든, 저자의 목적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독자를 “매혹시키고” 홀리게 할 긴장을 창조하는 데 있다. 모든 창조적 글의 밑바닥에는 이 긴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인간적 또는 정서적 상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이 바로 문제이다. 광범하게 말해서 그런 상황은 투쟁과 사랑 혹은 이 둘을 겸한 것으로부터 생겨난다. p202

철학은 아득한 옛날 신성한 수수께끼 놀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수수께끼 놀이는 제의나 축제에 따르는 여흥이었다. 수수께끼 놀이가 가진 종교적인 측면으로부터 우파니샤드의 심오한 철학과 신지학, 직관적 섬광들을 가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이 발생했다. 수수께끼 놀이의 놀이적인 측면으로부터는 소피스트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두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철학을 진리의 추구로서 그만이 도달할 수 있는 독자적인 경지까지 끌어 올렸지만, 과거나 현재나 철학 특유의 요소인 가벼운 형식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낮은 수준에서는 궤변적인 엉터리 요법, 지적인 약삭빠름 등으로 발전하였다. 그리스에서는 투기적인 요소가 강했기 때문에, 순수 철학을 희생해 가며 수사학이 발전하게 되었고, 따라서 순수 철학은 일반인의 교양으로서 기세를 떨친 궤변의 그늘 속에 가려졌다. 고르기아스는 이와 같은 왜곡된 교양의 전형적 인물이었다. 그는 진지한 철학에서 벗어나서 현란한 언어와 거짓된 재치를 찬양하고 남용하는데 그의 정신을 낭비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적 사고의 수준이 떨어졌다. 경쟁이 극단적으로 되었고 편협한 교조주의가 판을 쳤다. 비슷한 타락이 중세 후기에도 반복되었다. 즉 사물의 가장 내재적인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시대에 이어 언어와 공식만 있으면 충분한 시대가 왔던 것이다. p230

11세기 말쯤 새로 생겨난 국가들에는 생명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에 대한 갈증이 충만했다. 이와 같은 지식욕은 머지않아 대학이라는 제도적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대학이야말로 중세 문명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욕은 또한 스콜라 철학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났다. p235

사실 리듬과 하모니는 완전히 똑같은 의미에서 세 가지 - 시, 음악, 놀이 -에 모두 해당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시에는 언어라는 요소가 있어서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순수한 놀이에서 관념과 판단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반면에 음악은 절대로 놀이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p240
써니:? 음악을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의식의 차원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되지 싶다. 음악은 또 다른 언어라는 생각이다. 오히려 관념적이지 않은 지극히 순수한 자아, 진실한 언어적 커뮤니티라는 생각.

우리의 문명은 노쇠해서 너무 복잡해졌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이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게끔 도와주는 데는 음악적 감성이 으뜸이다. p240

플라톤의 말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유용성도, 진실성도, 유사성도 없으면서 더구나 그 효과는 해롭지 않은 어떤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매력의 기준에 따라, 그것이 줄 수 있는 쾌락에 따라 가장 잘 판단될 수 있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좋고 나쁨을 수반하지 않는 그런 쾌락이 바로 놀이이다.” p242

놀이를 이루는 데에 절대 필요한 하나의 구성 요소가 춤이라는 말이다. 춤은 특수한 형식의 놀이이며, 특별히 완벽한 형식의 놀이인 것이다. P250

문명은 아기가 자궁에서 떨어져 나오듯이 놀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생기며 놀이를 떠나는 법이 전혀 없다. p261

르네상스의 전반적인 정신적 태도는 놀이의 태도였다. 아름답고 고상한 형식을 추구하는, 세련되었으면서도 신선하고 그리고 힘찬 노력이야말로 문화가 “놀이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예였다. p271

르네상스는 두 개의 놀이의 이미지를 최고도로 구체화시켰다. 전원생활과 기사 생활이다. “놀이의 황금시대”였다. p271

프로페셔널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의 정신이 아니다. p294

진정으로 놀이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어린애처럼 놀아야 한다. p297

오늘날의 문명은 거짓되게 놀기 때문에 어디서 놀이가 끝나고 어디서 놀이가 아닌 것이 시작되는지를 말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것은 특히 정치의 경우에 그렇다. p308

놀이는 도덕적 규범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p316
써니: 놀이와 불륜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놀이라고 합리화 하는 것이다. 아니면 본능이라고 하여 의식이 있음을 잊어버리거나. 호이징아는 책의 앞부분에서 이 부분에 대해 극명하게 논지를 남겼지만 사람들은 이를 혼돈 하는 경향이 있다.

“부족함이 활동의 본능 동기일 때는 동물은 일을 하고, 힘의 풍족함이 본능 동기일 때는 놀이를 한다. 과잉된 생명은 스스로 활동을 충동한다.” p319


3. 내가 저자라면

하나, 이 책의 주장

호이징하는 머리말을 통해 이 책을 쓴 목적은「모든 문화 현상들 중에서 놀이의 위치를 정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얼마나 놀이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역사적인 접근 방식 등의 충분한 연구 작업을 통해 놀이라는 개념을 문화라는 개념에 통합해 보려고 하는 자신의 의지를 신중하게 밝히고 있다. 즉「놀이를 생리 현상이 아닌 문화 현상으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접근이다.
그리하여 저자의 논점은「인류학과 그 관련 학문들은 여태껏 놀이의 개념과 문명 속에서 놀이가 지니는 지대한 중요성을 전혀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에 착안을 둔 고찰을 하였다. 그래서 비록 충분히 탐사해 보지 않은 부분이라도 과감하게 공격적으로 자신의 견해를「쓰기로 결정하였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두울, 읽기에 지루하고 재미없는 책

우선 나는 이렇게 복잡한 글을 쓸 자신이 없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 주엔 개인적인 일로인해 3가지 근심이 우선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적으로 내 탓만은 아닐 성 싶다.

마치 국문학이 아닌 국어학을 배울 때처럼 딱딱하고 흥미롭지 않았으며, 게다가 이 나라 저 나라의 어원과 의미까지 살피니, 언어학인지 언어와 문화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물론 이 책은 언어 속에 묻어나는 놀이문화의 전반적 흐름과 연결성을 찾아 모색하는 한편, 그 범위가 철학, 종교학, 심리학, 인류학, 언어학 등을 거론하며 인간 존재 양식에 스며든 놀이에 대한 본질적 규명을 꾀한 노력은 가상하다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설명들이 쉽게 연결 되려나 하면 여러 곳으로 흩어지는데다가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기 쉽지 않아, 솔직히 재미없게 읽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겨우 책읽기를 마쳤다. 책을 읽는가 하면 딴 생각을 하고 있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몰라 여러 번 찾아 헤맸다. 그래서 줄도 쳐지지 않기는 처음이다.

또한 문장이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메말라서 친근감이 들지 않고 사막을 헤매는 기분이다.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를 적으려고 줄을 쳐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갈라져서 그 복잡함에 단념해 버리게 되고 말았다.

세엣, 이 책의 아쉬움

일과 놀이를 접목하여 새롭고 즐거운 놀이와 같은 일로서 통합하여 설명할 수는 없었는가.

이 책은 저자 호이징하에 의해 쓰여 진지 이미 오래되어 놀이에 대한 고전적이고 원론적이며 심오한 연구를 한 것에서는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일과 놀이를 구분하여 단정하는 한계를 들어 낸 아쉬움을 남긴다. 놀이에 비해 일은 해야만 하는 것, 일은 놀이와 달리 정신과 육체의 노동으로서 즐겁지 못한 것으로 이미 규정하고, 문화에서 일과 놀이를 엄격히 분리하여 놀이라는 것은 일을 더 잘하게 하는 요소이거나 북돋울 수 있는 의식의 하나로 치부함으로서 놀이의 지평을 상당부분 제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저자가 본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놀이에 대한 설명을 함에 있어 놀이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것이나 “일상적인 것” 혹은 “실제의” 생활이 아니라고 주장함에서 비롯된다.

『놀이의 첫 번째 중요한 특징을 파악하게 되었다. 놀이는 자유스러운 것, 바로 자유이다. 두 번째 특징은 놀이가 “일상적인 것” 혹은 “실제의”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실제의” 삶을 벗어나서 아주 자유스러운 일시적인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p19

이 부분은 저자가 놀이에 대한 개념을 너무나 일방적으로 획일화된 관점하에 제한적으로 구분지어 그 영역을 경색되게 이끌어 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놀이처럼 즐기고 놀이감이 되도록 글쓰기를 일상화하고, 이 점을 지속시켜 나가려하니 말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놀이로 인한 즐거움이 놀이를 욕구하는 한에서만 절실해 진다.』p19

『놀이의 열등성은 그것에 대응되는 놀이의 진지함에 의하여 점차로 상쇄된다. 놀이가 진지함이 되고 또 진지함이 놀이가 된다. 놀이가 진지함을 낮은 차원에 남겨두고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높이로 발전할 수도 있다.』 p20

이 예야 말로 놀이와 일이 몰입이라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화와 양식으로 탄생되어 <일상의 황홀>과 <즐거운 일상적 취향의 삶>으로 승화ㆍ발전될 수 있음을 역설하지 않는가.

『인간의 놀이의 가장 높은 형식은 항상 축제나 의식, 즉 성스러운 경지에 속한다. 』p21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놀이를 문화의 한 부분으로 너무나 신성시함으로써 일과 놀이를 극명하게 분리하는 경향으로 귀결되어질 수 있다. 일과 놀이가 일상으로 녹아들어 개인의 생활 속에 젖어들게 하지 못하고 때와 장소 시간을 구분하거나 일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고차원적인 형식이나 의식을 위한 의식으로만 남게 하는 고정관념의 틀 속에 가둘 수 있다. 매일 즐겁고 신나며 축제처럼 흥미로운 놀이 같은 일로 젖어들게 되면 안 되겠는가?

『놀이는 장소와 지속성에 의해 “일상적인” 삶과는 구분된다. 이것이 놀이의 적극적인 제3의 특징이다. 그것은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이다. 놀이는 제한된 시간과 장소의 속에서만 “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21

호이징하는 놀이의 본질과 의미 등을 여러 거시적이고 구체적 관점에서 살펴보며 문화가 얼마나 놀이적 성격을 띠고 있는가를 탐구하고 설파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엄격한 일조차도 놀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착안을 두지 못하고 놀이와 일을 분리시킨 점은, 이 책의 놀이에 대한 많은 고차원적 모색에도 불구하고 옥의 티와도 같은 아쉬움을 남긴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21세기형 생활패턴과 트랜드는 일과 놀이를 따로 구분하기에는 너무나도 가까운 열정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대표하거나 명명하는 노마드로 예상되는 일상 자체가 그러한 예를 반증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이 책을 통해 더욱 놀이문화와 일의 문화가 역동적으로 진지하게 한데 어우러져 일상적 취향으로 녹아들게 할 수 있도록 일과 놀이를 통합하고, 놀이의 유익함을 일에 접목하여 일상화 해 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더욱 관심을 고조시켜나가고자, 나의 일상을 모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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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10.22 07:10:48 *.253.249.123
"良馬逐 利艱貞 日閑輿衛 利有攸往"
<타고난 재질을 가진 글쟁이가 매일 매일 열심히 공부하여 어려운 고비 고비를 넘기고 세상을 나간다. 그의 일이 장차 장대하리라.>

써니의 글을 보고 이제는 글속에서의 여유를 발견하게 된다. 전엔 글을 쓰면 너무 길어서 자신의 강렬한 욕망을 불출시키면서 읽는이는 염두에 두지 않더니만, 이젠 글속에 여백이 있으니 이를 보고 완성이라 한것 같다.

입학 할 때에는 꽁지로 졸업할 때에는 개근과 수석이 눈에 보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달리는 써니의 충실함이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이제 멋진 걸럼을 써 보아라. 일년전의 글과 얼마나 달라 졌는지 본인이 비교해 보아라. 그러나 기교나 수련속에서 오는 글에 예전의 순수성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정말 고마운 스승님이시다. 써니만큼 스승님을 곤란하게 만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의 혜안이 자신을 참게하시고 끝까지 너와 동행하시지 않았느냐. 그에 보답하듯이 훌륭한 책을 써 보아라.

오늘 따라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을 받으면서 써니의 글을 읽으니 왜이렇게 희열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써니는 평상되로 북 리뷰를 했는데 말이다.

수고했다.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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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10.22 13:16:32 *.75.15.205
선생님... 또 걱정하시네요. 히히히

제가 어딘가에 남긴 덧글 보셨죠?

저가 약간의 뻥쟁이 기질이 있나봐요. 맨날 열심히 한다고 해놓고는 제대로 안하고 왜 그리 놀 일은 그리 많은지요. ㅋ

개근상! 그게 저의 목표인 것 아셨어요? 변.경.연에서는 그런 상 않줘요. 선생님께서 나중에 꼭 챙겨 주셔요. 고맙습니다. 꾸벅. 앗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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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써니
2007.10.22 15:34:32 *.70.72.121
리뷰에 덧붙여서

놀이라는 매력적인 유혹을 끌만한 이 책이 재미없었던 이유가 뭘까?

놀이는 연애처럼 아니 소꿉장난이나 고스톱 같이 이유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 그저 맛있는 식사면 되지 그 요리에 대해 요리의 기원, 유래, 요리의 시작, 축제에 쓰이는 요리, 여자들이 좋아 하는 음식, 스테미너에는 무엇이 좋고 왜 좋으며 어떻게 먹어야 하고 어떤 음식과 먹어야 음식궁합이 잘 맛는다 등등... 하면 먹기도 전에 입맛 떨어지고 체하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놀이? 그것이 정말 재미있고 유익하려면 나를 편하게 끌어당기는 것, 내 입가에 미소를 실실 머금게 하고 언제 무엇을 했는지 모르게 시간이 훌쩍 가버리는 그런 놀이, 그런 일과의 융합이면 참 좋겠다는 또 그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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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10.23 02:41:41 *.70.72.121
그리고 저녁무렵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생각난 것을 덧붙이면.

음악도 그렇고 놀이도 그렇고 사랑도 아마 그럴테고 친숙한 것이 놀이에 그만이다. 그러나 늘 친숙한 것만을 찾으면 발전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친숙한 것을 토대로 새로운 모험을 단행하는 참다운 용기가 놀이에도 필요하다는 생각. 선의의 경쟁, 축제, 제사 의식 등은 평소에 잘 느낄 수 없는 특별한 번득임과 사로잡힘 그리고 깨달음 등이 있다.

아, 그리고 나는 아직 잘 놀 줄 모른다. 신명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 잘 노는 것에는 절제와 통제가 자연스레 몸에 베인 적절한 균형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주입하고 싶다. 잘 놀자. 생활 전반에 균형감 있게 말이다. 그것이 바로 벼룩의 포트폴리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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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4 00:09:45 *.70.72.121
놀이, 그것은 희비애락이다. 놀이가 삶의 축소판이 아니었다면, 생활을 담을 수 없었다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속에서 자유롭지 않다면 놀이가 아니다.

놀이, 그것은 시공을 초월한 자유로움 속에서 희비애락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날개, 혹은 무지개와도 같은 욕망이다. 고로 놀이는 꿈이다. 그것은 더 나은 내일을 향한 희망의 속삭임이요, 그리움이요, 현실을 반영한 이상이다. 더불어 통렬한 회한이다.

고로 놀이는 문화를 넘어 당신과 나 ,우리들의 개성과 다양성이 어우러진 자연과 우주의 속삭임이다. 하여 놀이에는 신의 움직임이 있다. 따라서 악마의 유혹이 따른다.

놀이에 지적 사유가 필요한 것은 이중적 시선과 균형감을 확보해 나가기 위함이다. 좋은 그리고 더 나은 혹은 위대함에는 도약이 필요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걸러내기로서 가능하다. 가장 중요하고 신나며 즐거운 '하나', 즉 선택과 집중(을)를 향한 자연발생적 무의식과 무아지경의 몰입과 열정 그리고 소망/꿈에 대한 염원이다.

하여 결국에는 놀이조차 간절한 기도구나. 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랑함이로구나. 다만 지루하지 않은 아니 지루해도 견딜 수 있는 사랑, 기꺼운 헌신이로구나. 희생이 즐겁고 자유로운 것이 놀이구나. 모든 문화에 놀이가 있다는 것은 모든 놀이에 인생이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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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써니
2007.10.26 00:57:17 *.70.72.121
한 시간 전 벗과 헤어져 돌아왔습니다. 좀 더 세부적인 그의 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현장을 탐사하고 돌아왔습니다. 장거리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제법 피곤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냥 잘 수야 없지요. 컴을 켜고 읽지 못한 글을 읽습니다. 한 삼십 분 남짓 읽는데 어느새 피곤함이 사라지고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문득, 놀이에는 놀이를 함께 즐길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놀이에 사람이 빠질 수 없다는 것, 필수 요소라는 것,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러면 더욱 재미있게, 혹은 깨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진하고 즐거운 놀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놀이나 일을 하려면 좋은 위대한 구성원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 우애하고 더욱 신나며 발전이 될 거라는 그리고 넓고 깊어갈 수 있을 거라는. 하여 일과 놀이가 그렇게 상생 관계를 통해 서로에게 나눔과 도움의 일상화가 되면 참 좋겠다는, 우리 변.경.연을 통해 배우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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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놀이
2007.10.27 07:39:09 *.70.72.121
그러나 아무리 시덥잖은 놀이라고 하고 일이라 하더라도 모든 행함에는 자존심이 있다. 비록 웃기는 짜장 같은 삼순이 짓에도...
자존심을 상하는 놀이는 좋은 놀이가 아닐 것이다. 언제든 그만 두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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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7.10.31 18:16:08 *.70.72.121
하지만 그래도 끝장을 보아야 한다. 일이건 놀이건 시작했다면 끝까지 가서 뒈지던지 살든지 끝을 보아야 한다. 끈기!!! 자존심은 바로 찐득이 같은 끈기에서 온다. 부족함을 이겨내는 것, 자신을 아는 것, 그것이 놀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철학이 되어야 하며 행진은 계속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씨앗이니까. 내가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더 많은 열매를 맺으면 그 아니 좋은 삶이겠는가. 그 놀이는 진정한 놀이가 될 것이다. 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놀이, 나만의 놀이, 상표를 붙일 수 있는 놀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놀이, 사명을 완수 할 수 있는 놀이, 기어코 흔적을 남기는 놀이, 명명됨이 부끄럽지 않은 놀이, 편함보다 두려움에 맞설수 있는 놀이가 내겐 지금 절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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