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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2일 11시 22분 등록
<부모를 증오하는 그대에게>

내 아버지의 별명은 미친개였다
로 시작되는 중편소설이 있었지.
쑥스럽지만 고백을 해야겠네.
그 소설은 나의 데뷰작이었고
내가 겪은 유년의 비극을 바탕으로 쓰여졌네.
나 역시 어린 시절에는
가정 환경이 개떡 같았어.
아버지는 왜정 때 사범학교를 다니셨고
동란참전 세대였으며
육군 상사로 전역하셨지.
그 때는 모두들 먹고 살기가 여의치 않았네.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생략하고
저녁은 굶는 날이 많았어.
전역을 하시자 아버지는 대번에
무력한 가장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네.
어머니의 바가지도 만만치는 않았어.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는
강원도 어느 깡촌에서 교편을 잡으셨지만
어찌된 까닭인지 가족들은
항시 가난을 덕지덕지 몸에 붙이고 다녀야 했지.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하셨어.
짐작컨대,
아버지는 오랜 군대 생활과 짧은 사회 생활 사이에서
극심한 갈등과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사실 가족들은 아버지에 대한 기대감과 의타심만 가득했고
아버지에 대한 신뢰감이나 존경심은 전혀 없었어.
밖에서 술을 드시고 집에 들어오시는 날은
느닷없이 재털이가 허공을 날아다니고
수시로 밥상 다리가 부러지고
한 줌씩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뽑히는 장면을 보아야 했지.
내 유년은 한 마디로 비명 소리 가득한 공포영화
내게도 무지막지한 주먹폭탄이 가차없이 떨어져 내렸어.
날마다 참혹했어.
가능하다면 부모님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싶었지.
하지만 나는 나약하기 짝이 없었네.
사흘이 멀다 않고 재연되는 공포영화를
고스란히 감수할 만한 인내심도 내게는 없었고
그렇다고 집을 박차고 뛰쳐나갈 과단성도 내게는 없었어.
유년시절이 지났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네.
나는 갈수록 질량이 늘어가는 우울 한 덩어리를
남 몰래 가슴에 품고
사춘기도 없이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지.
나는 날마다 부모님을 잘못 만났다는 자괴감에 빠져있었어.

그대여.
저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지금 나는 슬하에 두 아들을 거느린 아버지가 되어
그대를 만나고 있다.
그대는 어쩌면 내가 유년시절이나 청소년기에 거쳤던
참혹함
그 참혹함보다 몇 배나 더 절실한 참혹함에
몸서리를 치면서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세속의 비루한 글밥이나 먹고 살아가는
이 늙은이의 주절거림을
귀찮고 쓸모없는 잔소리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대여.
나는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그대의 나이를 경험했고
그대는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나의 나이를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현재를 공유하고 있다.
나는 그대보다 젊은 날을 먼저 소멸시켜 버린 늙은이로서
허심탄회하고 솔직담백하게 그대에게 고백하고 싶다.
이제 늙은이들은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
일선에서 물러나 평온한 모습으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이제 우리 세대에게 기대할 희망은 없다.
기력도 쇠잔해 있고
능력도 감퇴해 있다.
당연히 한 사람의 늙은이로서는 그대가 맞이할 미래에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선험자(先驗者)로서는 그대가 맞이할 미래에
조그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대에게 묻고 싶다.
그대도 인륜과 천륜을 저버리고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구제불능의 패륜아로 전락하고 싶은가.
그대는 강력하게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가급적이면 그대 역시
부모님께 한 평생 효도를 다하면서
인간답게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판단하면
부모님은 아직도 그대에게
불효자가 되기만을 강요할지도 모른다.
그대는 부모님으로부터
기쁨이나
사랑이나
희망이나
행복같이
따뜻하고 감미로운 품목들은
한 가지도 물려 받지 못한 극빈자.
물려 받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지독한 애정 결핍,
그리고 끝없는 욕구 불만.
그대는 날이 갈수록 자신에 대한 혐오감만 짙어진다.
때로는 자신이 부모님들과 똑 같은 유전자를 간직하고 있다는 혐오감,
그대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지게 되면
아이도 똑 같은 유전자를 간직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혐오감,
감정과 지각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진저리를 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래, 이해한다 그대여.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고
가급적이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내 말을 한 번 경청해 보시라.
과연 그대가 당면한 불행과 비극들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 모든 책임이 전적으로 그대의 부모님들에게만 있는 것일까.
아니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게 책임이 있는 것일까.
미쳐 돌아가는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일까.
그대여 미안하지만,
정말로 미안하지만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 속에서는
인륜을 저버리게 만든 장본인도
천륜을 저버리게 만든 장본인도
오리무중(五里霧中).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도 책임자는 오리무중.
국가 경제를 말아먹었을 때도 책임자는 오리무중.
세상의 모든 불행과 비극은
인과관계(因果關係)가 헝클어진 실뭉치처럼 복잡해서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명확한 판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대의 부모님들도 젊었던 시절이 있었으며
서로를 사랑할 때의 희열
자식을 낳았을 때의 감격
그리고 자식을 기르면서 가슴에 간직했던
소망과 기쁨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들은
멀고 먼 선사시대의 유물처럼
저 깊은 시간의 지층 속에 매몰되어 버렸다.
안타깝게도
그대의 눈에는 털끝 하나 보이지 않는다.
지금 그대의 부모님들은
아무런 추억도 없고
아무런 낭만도 없고
아무런 패기도 없고
아무런 재능도 없는
패배자,
걸어 다니는 무력감 덩어리.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고
어떤 감정도 통하지 않는
인간 담벼락.
온갖 비극의 초대자로
온갖 고통의 시발자로
청춘이 구만리 같은 그대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다.
그대는 내게 말할지도 모른다.
백과사전에서 잉여인간(剩餘人間)이라는 단어를 찾아 보면
거기 남아 돌아가는 인간에 대해서
학술적이고도 조리분명한 설명이 적혀 있고
그대 부모님들의 사진이 표본으로 첨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특히 그대가 부모님으로부터 빈번한 학대를 받은 기억이 있다면
차마 부모님을 상대로는 내뱉지 못할 욕설까지
몇 번이나 목구멍에 맴돌았을 것이다.
그래,
어처구니 없게도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는
차마 인간으로서는 저지를 수 없는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자식에게 저지르는 부모들도 적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런 부모라면
어찌 정상적인 인간으로 평가하랴.
무릇 자식을 습관적으로 학대하는 부모들은
대부분 심각한 정신적 결함 요소들을 간직한 환자이니
일단 정신과 치료가 우선되어야 한다.
하등한 짐승들도 새끼를 습관적으로 학대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대는 정상인이 아닌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상인이 아닌 부모님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부모님이 정상인으로서의 언행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심하라.
이제 모든 기대를 그대 자신에게로 돌릴 때가 되었다.

그렇다 그대여.
그대의 부모님들은 그대가 모르는 사이
아마 세상으로부터 크나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하는 일마다 제대로 풀리지 않았거나
의지할 곳이 없었거나
자금 부족으로 사업에 실패를 했거나
인간을 너무 믿은 나머지 사기를 당했거나
일확천금을 노리고 노름에 손을 댔거나
가정을 짊어지기가 버겁고 고달픈 처지에서
세상으로부터 매정하게 버림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들을 용서하라.
이제 그대의 부모님들에게는
삶을 바꿀만한 여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어딘가에
깊은 병마(病魔)가 도사리고 있어서
그대가 모르는 정신적 고통에
날마다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대여.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그 마음 한 켠에
자식에 대한 사랑을 묻어두고 있다.
아무리 나쁜 아버지라도 나쁜 자식이 되기를 원치는 않는다.
아무리 자식을 때리고
학대하고
미워하는 부모라 할지라도
그 마음 한 켠의 어딘가에는
반드시,
반드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녹슨 채 매몰되어 있을 것이다.
그대로서는 참으로 믿기 힘든 말이겠지만,
또 그대의 부모 역시
지금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세상은 과거에 비해
너무나 척박하고
살벌하고
냉혹하다.
어른이 되어도
쉽사리 흔들이고
쉽사리 상처를 받고
쉽사리 쓰러져 버리기 일쑤다.
그리고 그대의 부모들은
그런 불쌍한 어른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가 아무리 부모님을 효제(孝悌)로써 공경해도
어쩌면 그대의 부모님은
쉽사리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식을 키우는 일 만큼이나
부모를 섬기는 일 역시
힘들고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여.
진실로 그대가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과감하게 의식을 전환하라.

율곡 선생은
선비의 온갖 행위 중에 효제가 근본이라 하였으며
삼천 가지 죄목 중에 가장 큰 죄목이
불효(不孝)라 하였거늘
시대가 달라졌다고
어찌 부모 자식 간의 인연까지 달라질 리가 있으랴.
금세기 최고의 지성 토인비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만약 지구가 멸망해서 다른 별로 이주할 때
오직 한 가지만을 가져가야 한다면
선생님은 도대체 무엇을 가져가겠느냐고.
토인비는 촌각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한국의 가족 제도를 가지고 가겠노라고.
까마귀는 어미가 늙어서 먹이를 구하지 못하면
새끼가 먹이를 물어다 어미를 공양한다.
구약성서 신명기에도
부모를 업신여기는 자에게 저주를,
이라고 말하면 온 백성이 아멘이라고 소리치라는 구절이 있다.
아멘은 기도의 끝머리에 찬동을 표명하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다.

그대여.
그대가 인간에게 축복을 받고자 한다면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대가 신에게 축복을 받고자 한다면
하늘의 가르침을 따르라.

내 아버지의 별명은 미친개였다
로 시작되는 소설의 주인공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
날마다 열심히 술을 마시고
날마다 열심히 훈장을 닦는다.
훈장은 아버지의 빛나는 과거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어찌하랴.
세월은 무정하고 세파는 매정하거늘
그것을 지각하기에는 아버지의 병마가 너무 깊었다.
나는 훈장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특별한 기쁨도 행복도 없는 소년기를 보내고
어느새 자신이 아버지의 상처를 감싸 안아야 하는
성인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어쩐지 슬프고 몹시 억울한 기분이었지만
아버지가 저 험난한 세상을
그 나이까지 살아오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존경하겠노라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한 번의 의식 전환이
구제불능의 시정잡배로 살아가던 나를
소설가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다.

그대여,
나는 오늘 그대보다 먼저 한 세상을 살아온
한 사람의 선험자로서
그대에게 간곡히 당부하노니,
부모님이 그대에게 어떤 악행을 저질렀다 하여도
지금부터 의식을 과감하게 전환하라.
성현도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가르쳤으며
하늘도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가르쳤나니
그것이 악운을 행운으로 바꾸는 비결이라
공경할 부모가 없는 이들은 얼마나 안타까운가.
만약 그대가 성현과 하늘의 가르침을
진실과 기쁨으로 꾸준히 실천한다면
예언컨대,
언젠가는 그대의 앞날에도
눈부신 축복이 폭포처럼 쏟아지리라.

IP *.152.178.19

프로필 이미지
초아
2007.10.22 13:14:05 *.253.249.123
"살기 번뜩이는 고독한 낭인"
아마 그대를 구원해 줄 분은 하느님밖에, 그대가 신앙 생활자 이기에 순한 말이 되었을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라. 그리고 선교하라, 그리고 봉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대의 글을 읽으니
왜 신앙에 매달리는지
왜 예수님의 구원에 목말라 하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갑시다. 하느님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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