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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2일 11시 41분 등록


이틀 간의 외국 손님 접대, 이틀 간의 지방 출장 그리고 또 이틀 간의 결혼 기념일 축하 부산 여행, 저자 조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구차한 핑계와 변명입니다. 머리를 쥐어박으며 책의 마지막에 포함된 '호이징하에 대하여' 부분을 옮겨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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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부르크하르트라고 일컬어지는 호이징하는 1872년 12월 17일 네덜란드의 북쪽 대학 도시인 흐로닝헨의 평범한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대학의 생리학 교수였다. 호로닝헨 대학에 입학한 호이징하는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특히 동양의 언어인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산스크리스트어의 연구에 심취하였고 점차 비교 언어학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1895-96년의 겨울 학기에는 라이프치히에 유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비교 언어학에만 대학 생활을 전적으로 바쳤던 것은 아니었다. 「호모 루덴스」가 그 좋은 증거가 되겠지만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조예는 그가 이러한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그는 1897년에 학위를 받은 뒤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하를렘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서 생계를 꾸렸다. 그 뒤 그로닝겐 대학에서 고대 인도 문화사와 종교사 연구로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그리고 역사학으로 기울어져서 연구 무대를 서구 중세사로 옮기게 되었다. 1905년에는 은사이며 역사학자인 블로크의 도움으로 흐로닝헨 대학의 네덜란드 역사 교수가 되었다. 1915년에는 라이덴 대학의 일반 역사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40년 독일군의 점령으로 그 대학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독일 점령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함으로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 석방되어 가족의 면회조차 금지된 채 겔레론의 작은 시골집에서 1945년 2월 1일에 72세로 영면했다.

그는 강단 생활을 하며 1916년부터 32년까지 한 문화잡지의 편집을 맡았고 네덜란드 왕립 학술원의 회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라이덴 대학에서 1919년 그 유명한 「중세의 가을」을 발표하여 유럽 인문 과학자 중에서 발군의 존재가 되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부르크하르트를 잇는 문화사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들은 공통적인 역사 감각을 가지고 문화사가를 지향했던 것이다. 호이징하는 인류의 문화 발전을 하나의 보편적인 개념으로써 분석, 설명하고, 도식화, 유형화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며 한 시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이런 역사학 방법을 문화사라고 하는데 호이징하는 그 자신은 몰론 부르크하르트를 문화사가의 범주에 넣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저자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와 중세를 명확하게 대비시킨 데에 대해서 <중세의 가을>의 저자 호이징하는 저서의 제목 그대로 르네상스를 중세와 연결되는 곧 중세의 수확기로서 파악하였다. 물론 두 사람의 중세와 르네상스에 대한 이러한 해석 차이는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50년의 시간적 거리에 의한 학문적 성과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호이징하는 중세야말로 그가 현대에서 꿈꾸고, 자신의 이론과 저술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유럽 공동 사회가 실현되었던 시대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드디어 현대의 고전이라고 하는 「호모 루덴스」가 그의 문화사 연구의 자연적인 귀결로서 집필되었다.

그는 그의 선배 부르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정치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극히 필요하고 가치가 있을 때만 조금씩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강한 예술가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 역시 부르크하르트를 연상시킨다. 이런 요소와 예술에 대한 연구는 그의 문화사에서 종합되어 그림 같은 언어와 환상적인 표현에 의해 그의 글들을 문학적인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의 학파도, 연구 서클도 형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세계와 학문에 대해서 자유롭고 개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그의 저작은 다음과 같다.

1919년 - 「중세의 가을 - 네덜란드의 14세기와 15세기의 생활양식과 정신형태에 관한 연구」
1924년 - 「에라스무스」
1933년 - 「17세기 네덜란드의 문화 - 사회적 토대와 국가적 특성」
1935년 - 「내일의 그늘에서 - 우리 시대의 문화적 고민에 대한 진단」
1938년 - 「호모 루덴스 - 문화의 놀이 요소의 규정에 대한 시도」
1945년 - 「더럽혀진 세계 - 우리 문화의 치유 가망에 대한 고찰」




독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말 하나하나에 대해서 상세한 증거 문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문화의 일반적인 문제를 다룰 때에는, 공격자 자신이 충분히 탐사해 보지 않은 부분이라도 항상 과감하게 공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미리 내 지식의 미흡한 점을 보충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지금 끄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쓰지를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쓰기로 결정하였다. (p. 8)

만약 어느 하나가 결정적 이론이라면 이 이론은 다른 모든 이론을 배격하든가 그들 전부를 통괄하여 설명해 줄 수 있어야만 한다. (p. 11)

세계가 맹목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놀이는 말 뜻 그대로 하나의 과잉(superabundance)이다. 우주의 절대적 결정론을 부수었던 정신이 부서진 그 자리에 들어설 때, 비로소 놀이는 가능해질 수 있고 생각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다. (p. 13)

우리가 유의할 점은 웃음이라는 순수하게 생리적인 행위는 인간에게만 있지만, 놀이라는 의미 있는 기능은 사람과 동물에게 다 같이 공통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웃는 동물(animal redens)"이라는 개념이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이라는 개념보다 인간을 동물로부터 더욱더 완전히 구분시켜 준다. (p. 16)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p. 19)

어른이나 책임이 있는 인간에게 놀이는 도외시하여도 무관한 기능이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놀이로 인한 즐거움이 놀이를 욕구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도리 수 있고 중지될 수 있다. 왜냐하면 결코 물리적 필요나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결코 임무가 아니다. 놀이는 여유가 있을 때, 곧 "자유 시간"에 행해지는 것이다. 단지 놀이가 문화적 기능 - 의식이나 예법 -으로 인정되었을 때에만 과제나 의무라는 개념이 거기에 결부된다. (p. 19)

몰두와 헌신과 진지함은 곧 황홀경으로 변하면서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그 고통스러운 "단지"라는 느낌을 완전히 깨뜨려 버린다. 어떠한 경기든 그 경기자들을 언제라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다. 그래서 놀이와 진지함의 대립 관계는 언제나 유동적이다. 놀이의 열등성은 그것에 대응되는 놀이의 진지함에 의하여 점차로 상쇄된다. (p. 20)

놀이는 삽화처럼 일시적인 행위로서 삽입되는 것이다. (p. 21)

"본능"이란 용어는 "실제의 문제에 당면하여 무력함을 인정하는 미봉책" _프로베니우스 (p. 31)

인간의 노력의 최고의 목표인 신성에 바쳐진 놀이-그것이 플라톤의 종교의 개념이다. (p. 46)

"놀이는 어떤 고정된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수행되는, 그리고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그러나 절대적 구속력을 갖는 규칙에 따라 수행되는 자발적인 행위 또는 일로서, 그 자체의 목적이 있으며, 또 거기에는 어떤 긴장감과 즐거움이 따르며, '일상 생활'과는 '다른' 것이라는 의식이 따른다." (p. 47)

음악 활동은 시간과 공간의 엄격한 한계 내에서 시작되고 끝나며 반복할 수 있고, 그것의 본질은 질서, 율동, 변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중과 연주자를 동시에 "일상적인" 생활을 벗어난 기쁨과 평안의 세계에 데려다 주고 따라서 그런 점 때문에 슬픈 음악까지도 고상한 즐거움으로 바뀌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음악은 청중과 연주자를 "매료하고" "사로잡는다." 그러므로 모든 음악을 놀이라는 항목에 포함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납득 가능한 얘기이다. (p. 70)

문화의 놀이적 요소라는 표현은 문화 생활의 여러 활동들 중에서 놀이라는 활동을 위해 특별히 중요한 위치가 마련되어 있다는 의미로서 하는 말이 아니며, 또한 원래는 놀이였던 것이 놀이 아닌 것이 되고 마침내는 문화라고 불릴 수 있게 된 어떤 전개 과정에 의하여 문화가 놀이에서 생겨났다는 의미로서 하는 말도 아니다. 우리가 다음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견해는 문화가 놀이의 형식에서 발생하며 문화는 애당초부터 놀아지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p. 75)

놀이와 진지함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하다는 것은 "놀이하다"와 "도박하다"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를 보면 잘 설명된다. 즉 사람이 룰렛 도박을 하는 경우와 증권 거래를 하는 경우에, 전자의 경우는 놀이하는 사람 자신이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후자의 경우 증권 투기업자는 값의 상승과 하락에 대한 불확실한 전망 속에서 증권을 사고 파는 일은 생활을 위한 진지한 사업이고 사회의 경제적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두 경우 모두 실제의 요인은 소득을 얻고자 하는 희망이다. 그러나 전자는 순전히 우연한 운수라는 것을 대체로 인정하는 반면에(이길 수 있는 체계가 있음에도), 후자의 경우는 그 당사자가 미래의 주식 시장 동향을 계산해 낼 수 있다는 어떤 환상 속에 빠져 있다. 여하튼 둘 사이의 정신 상태는 거의 다를 것이 없다. (p. 85)

우리는 그라네가 그 후의 중국 전체 위계 질서를 이러한 원시 사회의 풍습에서부터 유도해 내는 것에는 완전히 동조하기 어렵겠지만, 그가 중국 문명의 발전에서 경쟁의 원리가 그리스 세계에서의 투기가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그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그리스의 경우보다 본질적인 "놀이적" 성격이 한층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탁월하게 증명해 보인 점은 인정해야 한다. (p. 88)

포틀래치 (p. 93)

쿨라 (p. 99)

아이들의 생활에서부터 최고의 문화 활동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사회적 완성을 위한 가장 강한 충동 중의 하나가 자신의 우월성을 찬양 받고 존경 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p. 100)

예절 시합은 어느 곳에서도 중국과 같이 공식화되지는 못하였지만, 전세계에서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전도된 자만 시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정중함을 나타내는 이유에는 그 자신의 명예에 대한 깊은 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p. 105)

우리는 다양한 놀이 형태 속에서 현실의 행위로 전환되는, 거의 아이처럼 순수한 놀이 심리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즉 일상 생활로부터 차단되어 일정한 규칙의 구속을 받아 실제 행위로 전환하는, 그리고 리듬, 교대, 질서 정연한 변화, 갈등의 클라이맥스, 하모니를 향한 인간의 천성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실제 행위로 전환하는 놀이 심리로부터 논점을 출발시켜야만 한다. (p. 119)

문화란 놀이로서 시작되는 것도, 놀이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놀이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문화의 대립적이고 투기적인 기반은 처음부터 놀이 안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놀이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출발점, 즉 로마의 놀이(ludi)로 되돌아가서 우리는 라틴 어에서 성스러운 경기가 "놀이"라는 단순한 말로 불렸던 것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말이 이러한 문명화 요소의 특유한 성질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p. 119)

우리 귀에 들리는 아름답게 미화된 고결한 전투 이야기의 대부분은 기록자나 역사가들의 진지한 서술보다는, 서사시나 노래로 나타난 동시대인이나 그 후계자들의 문학적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을 윤리나 미학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그것을 고결하게 만드는 이런 행동을 한낱 "겉치레"에 불과하다거나, 잔인함을 간직하고 있다고 결론 짓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것이 비록 가설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전쟁을 명예와 덕성의 고상한 게임으로 보는 이와 같은 환상들은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기사도의 개념, 또 궁극적으로 국제법의 개념이 바로 그런 환상들에서 생겼기 때문이다. 이들 두 개념 중에서도 기사도는 특히 중세 문명의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기사도의 이상은 비록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기만 당했을지라도 그것이 인류 공동체를 위한 불가결한 안전판의 하나인 국제법의 기초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p. 150)

자유민은 일할 필요가 없는 그런 봉건 사회에서만 기사도는 융성할 수 있고 또 그와 함께 무술 시합도 융성할 수 있는 것이다. 봉건 귀족제 아래에서만 들어 보지도 못한 묘기를 성취하겠다는 지극히 진지한 맹세가 이루어지며, 이런 제도하에서는 깃발, 문장, 표찰 등이 존경의 대상이 되고, 기사도가 꽃피며, 지위와 앞 자리의 문제가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봉건 귀족들만이 그와 같은 일을 할 시간을 갖는다. (p. 159)

이 기사도, 충성심, 용기, 자제라는 이상이 그것을 중시한 문명에 큰 공헌을 해 왔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대부분이 비록 픽션이고 환상이었지만 그것이 공적 생활과 교육에서 중시되었음은 분명하다. (p. 160)

충성이란 자신을 어떤 사람, 대의 또는 사상에 바치면서 그 바치는 이유를 따지거나 그 바침의 지속성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p. 162)

첫째가 되려는 충동은 사회가 그 충동에 대해서 기회를 제공하는 만큼 많은 형태로 표현된다. 사람들이 우월성을 다투는 방식은 걸려있는 상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p. 163)

실험 아동 심리학은 6세 아동이 던지는 질문의 대부분이 사실 우주 기원론적 성격의 질문임을 보여 주었다. 아동의 질문은 예를 들면 무엇이 물을 흐르게 하는가? 바람은 어디서 오는가? 죽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이다. (p. 166)

수수께끼는 비밀스러운 힘으로 충만된 성스러운 것이며 따라서 위험한 것이다. 신화적이고 제의적인 문맥에서 볼 때 그것은 거의 예외 없이 독일의 언어학자들이 모가지 수수께끼(Halsratsel)로서 알고 있는 것에 해당한다. 이 수수께끼는 풀든가 아니면 머리를 내놓아야 하는 중대한 것이다. 경기자의 생명이 걸려 있는 것이다. 그 필연적인 결과, 아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내는 것은 최고의 지혜로 간주된다. (p. 168)

수수께끼의 해답은 숙고나 논리적 추론에 의해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급작스러운 해결로서 나타난다. 해결이란 질문자가 당신을 얽매고 있는 매듭을 풀어 버리는 것이다. 해결이란 질문자가 당신을 얽매고 있는 매듭을 풀어 버리는 것이다. 역으로 올바른 해답을 줌으로써 당신은 질문자를 무력하게 만든다. 원칙적으로 모든 질문에는 단 하나의 해답이 있다. 게임의 규칙을 알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p. 170)

진지한 말을 생활을 일깨우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정의한다면 시는 결코 진지함의 수준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시는 진지함 너머에, 즉 어린이, 동물, 미개인, 예언자가 속하는 보다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수준, 꿈, 매혹, 엑스터시, 웃음의 영역에 존재한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법의 망토 같은 어린이의 영혼을 지닐 수 있어야 하며 어른의 지혜를 버리고 어린이의 지혜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p. 183)

즉석에서 대구할 수 있는 능력은 극동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갖춰야 하는 기능이었다. 안남의 사절이 북경 조정에서 성공하느냐의 여부가 때로는 그 사절단의 대사의 즉흥시 재능에 좌우되기도 했다. 사절단의 모든 사람이 항상 온갖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가지고 있어야 했으며 황제나 그의 신하들이 내는 수천 가지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알고 있어야 했다. 이것은 놀이라는 형식을 통한 외교였다. (p. 194)

모든 시는 놀이에서 태어난다. 신앙에 기초한 성스러운 놀이, 구애라는 축제적 놀이, 경기라는 투기적 놀이, 자랑, 조롱, 욕설에 기초한 논쟁적 놀이, 임기응변과 재치의 날랜 놀이…… 이런 놀이들이 시가 태어나는 모태이다. (p. 197)

현대의 프로파간다로 그 의미가 부패되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신화는 우주에 관한 원시인들의 사상을 표현하는 적절한 도구이다. (p. 198)

한 관념을 되도록이면 엄청나고 거대한 것으로 만들려는 욕구는 유독 서정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형적인 놀이 기능으로서, 어린이 생활이나 어떤 종류의 정신병자들에게 공통되는 것이다. (p. 217)

모든 지식-여기에는 물론 철학도 포함된다-은 그 본질상 논쟁적이며 논쟁은 경쟁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정신의 위대한 보물들이 새로이 발견되던 시대는 대개 격렬한 논쟁의 시대였다. (p. 238)

"요즘 대개의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해서 음악을 즐기지만 옛사람들은 음악을 교육을 위해서도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자연은 우리가 일을 잘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빈둥거리기도 잘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 빈둥거림 또는 여가가 우주의 원리였던 것이다. 이 빈둥거림이 일보다 우선한다. 사실 그것이 모든 일의 목적(텔로스)이다. (p. 243)

놀이는 일에서 잠시 쉰다는 의미에서, 정신에 휴식을 주는 일종의 강장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가는 그 자체 안에 삶의 모든 기쁨과 쾌락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행복, 즉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노력을 정지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것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최상의 인간들이고 그들의 취미가 가장 고상할 때에 최상의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디아고게(휴식, 여가)를 보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교육시키고 또 어떤 일들을 배워야 한다. (p. 244)

국가는 결코 순수하고 단순한 공리적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창문에 핀 성에꽃(frost-flower)처럼 시대의 표면에서 응결되며 또 성에꽃처럼 시대의 표면에서 응결되며 또 성에꽃처럼 예측할 수 없고 덧없으며 갖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다. (p. 264)

젊은 세대가 "옛날"로 돌려 버리는 현상들이 연장자들에게는 "우리 자신의 시대"의 일부가 된다. 이 이유는 연장자들이 그 현상을 개인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가 아직도 그 현상 속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p. 291)

미국 정치가 가진 정서적 특징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기원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즉 미국인들은 계속 거칠고 어지러웠던 개척 생활에 충실해 왔던 것이다. 미국 정치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소박함, 자연스러움 같은 것을 찾을 수 있는데 이런 특질은 어떤 강제나 훈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현대 유럽 정치에서는 더더욱 발견할 수 없는 특질이다. (p. 309)

진정한 문명은 어떤 놀이 요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명은 자제와 극기를 전제로 하며, 또한 그 자신의 경향을 궁극적 최고 목표와 혼동하지 않는 능력, 그리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어떤 일정한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어떤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놀이일 것이며, 진정한 문명은 항상 페어플레이를 요구할 것이다. (p. 313~314)

"인간사는 굉장한 진지함을 필요로 할 만한 가치가 없지만 그래도 진지할 필요는 있다. 행복은 또 다른 문제이다. …… 나는 인간은 진지한 것에 대해서는 진지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까지 진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신만이 최고의 진지함을 가지고 대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인간의 가장 좋은 부분이다. 따라서 모든 남녀 인간은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들은 고상한 게임을 해야 하며 현재의 그들과는 다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전쟁을 진지한 일로 생각하지만 전쟁 속에는 놀이도 문화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을 가장 진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가능한 한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삶의 올바른 방법인가? 삶은 놀이로서 살아야 한다. 어떤 게임을 하면서, 봉헌식을 행하면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인간은 신들을 기쁘게 하고 적에게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으며 또 시합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_플라톤 (p. 315)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의지가 우리에게 명하는 어떤 행동이 진지한 의무인가 또는 놀이로서 적법한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즉각 그 시금석을 제공할 것이다. 행동하려는 우리의 결심 속에 진실, 정의, 동정, 용서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행동이 놀이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우리의 걱정스러운 의문은 곧 무의미해지고 만다. 우리의 행동이 지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데에는 한 방울의 동정이면 족하다. 우리의 행동이 정의와 고상한 자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인식인 양심은 항상 끝까지 우리를 미망시키는 의문, 그 행동이 놀이적인 것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압도하여 영원히 침묵시킬 것이다. (p. 316)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라… 이거 재미있겠는데…'

책을 읽기 전에 내가 갖고 있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호이징하'라는 저자의 이름에서부터 어쩐지 유쾌하고 즐거운 놀이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생각하는 인간'이나 '도구의 인간'이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던 딱딱하고 불편한 거부감 같은 것은 없었다.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에서는 여행전의 묘한 설렘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의 예상이 철저하게 빗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놀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가 생각하던 '놀이'가 아니었다. 방심하고 있던 참에 복부 한가운데로 호이징하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정의와 가설들 그리고 논리적인 개념들은 나로 하여금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들었다. 느슨한 마음으로는 단 한 문장도 읽어 나갈 수가 없었다. '놀이'가 아니라 책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저자의 이야기는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루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언어, 문화, 법률, 전쟁, 지식, 시, 신화, 예술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통찰에 끊임없는 탄성이 터졌다 . 그 중에서도 다양한 언어를 통해 각 민족과 문화에서 나타나는 놀이의 개념에 접근해나가는 방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개념의 발생으로 언어가 확장되기도 하고 또는 그 반대로 언어에 의해 개념이 제한되기도 하는 독특한 역사 속에서 호이징하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따져가며 교묘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쳐냈다.

저자는 대단히 신중하지만 때로는 몹시 공격적이다. 자신의 의견과 대치되는 다른 학자의 주장에 대해서도 그 기본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대신 그 빈틈을 단호하게 비집고 들어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다. 이런 그의 전개 방식은 방대한 분량의 자료에 의해 든든한 지원 사격을 받는다. 신중한 모습으로 이런저런 반박의 가능성을 사전에 예상하고 펼쳐지는 그의 주장은 대단히 견고하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제시한 다양한 민족의 문화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특히 '포틀래치'나 '쿨라'와 같은 이국적인 이야기들은 어렵고 딱딱한 책 읽기에 지친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 밖에도 책의 중간에는 다양하게 즐길만한 요소로 가득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그것들을 온전히 즐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사실 이번 책은 시간에 쫓기는 가운데 꾸역꾸역 읽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 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긴 문장과 어려운 단어들 앞에서 나는 멀미를 느꼈다. 때로는 같은 문장을 열 번이 넘게 읽고도 그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어서 스스로의 독해력을 의심하기도 했다.(이 부분은 번역의 문제도 있었던 것 같다.) 또 정신 없이 쏟아지는 개념의 홍수 속에서 나의 무지를 시리도록 절감했다. 알지 못하니 즐길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책의 내용은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니 안도의 한숨이 새나왔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책의 내용을 되짚어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것이라곤 '인간의 모든 활동이 놀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정도였다. 노년의 역사 철학자가 혼신을 다해 써낸 역작에서 내가 얻은 결론이 고작 이 간단한 사실이라는 것이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고 서른 권에 가까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곧잘 길을 잃었다. 역사의 달을 지나면서도 그랬고, 경영의 달을 지나면서도 그랬다. 책의 내용이 어려워서 그럴 때도 있었고, 익숙한 분야가 아니라서 그럴 때도 있었다. 그렇게 때때로 길을 잃을 때, 나는 하늘에 떠있는 북극성을 바라보았다. 그 북극성은 다름아닌 사부님이었다. 가끔씩 그렇게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마다 난 사부님을 떠올렸다. 연구원 생활 1년 동안 주어진 모든 책들에는 사부님이 내게 주고자 했던 각각의 의미가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짐작해낸 그 의미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번에 길을 잃고 올려다본 하늘에는 북극성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별은 제자리에 있었는데, 내가 그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것이 좀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고민해도 나는 이 책이 내 앞에 던져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제대로 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 모임의 성격에 비추어 생각해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단순한 진리가 내 발목을 잡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줄의 글귀가 책장을 덮은 지금 계속 머리를 맴돈다.

행복, 즉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노력을 정지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놀아라, 멈추고 놀아라. 놀아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야 그것에 나를 퍼부을 수 있다.'

이것이었을까? 혹은 아닐까? 만약에 이것이 아니었다면 또 무엇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과 질문이 머리 속을 떠다녔다. 그러다가 생각이 어느새 저자에게 닿았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잘 놀았을까?' 나는 이 질문에 어렵지 않게 긍정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놀이에 대한 책을 쓰며 '행복'했을 저자의 삶. 어쩌면 그것이 이번 주, 내게 던져진 이 책의 의미였는지도 모르겠다.

성장을 위한 책 읽기는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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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출과 불제출의 기로에서 백 번도 넘게 고민하다가 그냥 눈 딱!감고 올립니다. 시간이 없었다는 구차한 변명은 이번 주가 마지막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IP *.227.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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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0.23 08:00:17 *.72.153.12
나두~.

이 책 어려웠어. 그리고 끝까지 읽은 거 정말 잘했다는 생각. 결론이 뒤에 있어서...역시 끝까지 가봐야 하는 게 있어.

매번 함량이 많이 미달한 과제를 제출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젠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나두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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