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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2일 11시 57분 등록
● 요한 호이징하 (Johan Huizinga)에 대하여

그는 놀이의 주인이다. 주인으로서 그가 주장하는 바는 간단하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라기보다는 오히려 호모 루덴스, 즉 놀이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은 곳곳에 원용된다. 정치 자체를 비유하기도 하고, 설날 윷놀이 판에서도 사용된다. 또 2002년 월드컴 기사에서도 그의 말을 빌어 쓰여지기도 했다.

그가 놀이의 주인이 된 데에는 어떤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는 것일까.

1. 배움
대학 졸업 후 경제적인 이유로 하를렘 고등학교의 역사 과목을 담당한 교사를 지냈다. 그 뒤 그로닝겐 대학에서 고대 인도 문화사와 종교사 연구로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교사를 지내기 전, 그는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동양어(히브리어, 아라비아 어, 산스크리스트 어)에 심취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관심은 점차 비교 언어학으로 기울어졌다. 또한 문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그의 경력으로 미루어 “교사”로 만 소개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듯 하다.

고등학교 교사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던 그는 역사 공부에 매진한다. 하여 그로닝겐 대학에
서 고대 인도 문화사와 종교사 연구로 교수 자격을 획득한다. 그리고 역사학으로 기울어져
서 연구 무대를 서구 중세사로 옮기게 되었다.

나는 이전에 그이 관심사였던 동양 언어학과 서구 중세사의 연구 분야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를 담고 있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알아가는 것은 또
다른 문화를 접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이런 이유로, 요한 호이징하는 동양과 서양의 날개
로 배움의 장을 힘차게 날았던 좌우 양진의 균등한 시각을 갖지는 않았을까?

이런 그는 1905년에는 은사이며 역사학자인 블로크(P. J. Blok)의 도움으로 흐로닝헨 대학의 네덜란드 역사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15년에는 라이덴 대학의 일반 역사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40년 독일군의 점령으로 그 대학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강의를 하였다.

2. 목소리

그는 독일 점령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사회에 비추어보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그러나 시대의 퇴폐적 상황에 순응치 않은 양심의 역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양심의 목소리는 결국 그를 수용소로 이끈다. 수용소의 생활은 그의 목소리가 그저 역사를 가르치고, 역사를 교육하는 이의 역할 뿐 아니라, 역사를 아는 그의 용기와 결단이 만들어낸 양심적 지식인으로써의 역할까지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그는 나치 독일에 저항한 양심적 지식인으로도 평가 받는다.

그의 이런 목소리는 또 있다. 실증주의와 과학적 역사학을 지향하던 당대의 지적 흐름을 거슬러 인문과학의 독립적 위상과 가치를 옹호했다. 당시 사회의 흐름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올바른 길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데 망설임이 없어 보였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와 함께 최고의 문화사가로 손꼽히며,. 네덜란드 왕립과학아카데미 역사문학부 위원장과 국제연맹 지식협조위원회 부의장으로 활약했다.

- Johan Huizinga의 저서

요한 호이징하를 저자로서 세상에 알린 계기는 바로 『중세의 가을』이다. 그는 이 책으로 유럽 인문 과학자 중에서 발군의 존재가 되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부르크하르트를 잇는 문화사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오늘 날, 서양 중세과 르네상스에 대한 명저로 평가 받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저자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와 중세를 명확하게 대비시킨 데에 대해서「중세의 가을」의 저자 호이징하는 저서의 제목 그대로 르네상스를 중세와 연결되는 곧 중세의 수확기로서 파악하였다. 물론 두 사람의 중세와 르네상스에 대한 이러한 해석 차이는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50년의 시간적 거리에 의한 학문적 성과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호이징하는 중세야말로 그가 현대에서 꿈꾸고, 자신의 이론과 저술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유럽 공동 사회가 실현되었던 시대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드디어 현대의 고전이라고 하는「호모 루덴스」가 그의 문화사 연구의 자연적인 귀결로서 집필되었다. “(『호모 루덴스』p 323)

(조사에 의하면) 그는 총 8권의 책을 썼다. 현재 한국에 번역 된 책으로는 『호모 루덴스』『문화사의 과제』『중세의 가을』 3권이다.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
『문화사의 과제』
『17세기 네델란드의 문화 - 사회적 토대와 국가적 특성』
『내일의 그늘에서 - 우리 시대의 문화적 고민에 대한 진단』
『호모 루덴스-놀이와 문화에 관한 연구』
『더렵혀진 세계 - 우리 문화의 치유 가망에 대한 고찰 』


■ 내 마음에 들어온 글 귀

[8] 나의 논점을 밝히자면, 인류학과 그 관련 학문들은 여태껏 놀이의 개념과 문명 속에서 놀이가 지니는 지대한 중요성을 전혀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9] 우리의 인간 문명은 놀이라는 일반 개념에 어떤 본질적인 특징을 전혀 더하지 못했다고까지 말해도 틀림이 없으리라. 동물들도 꼭 사람들처럼 놀고 있다.

[12] 놀이의 마지막 요소로 든 “재미”라는 요소는 어떠한 분석이나 논리적인 해석도 거부한다. 하나의 개념으로서의 “재미”는 다른 어떤 정신적 범주로도 환원시킬 수 없다.

[13] 놀이를 단지 동물이나 어린이의 생활에 나타나는 현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문화의 한 기능으로 다룸으로써, 우리는 생물학이나 심리학에서 손대지 못한 부분을 다룰 수가 있다.

[14] 인간 사회의 중요한 원형적 행위에는 처음부터 전부 놀이가 스며들어 있다.

[15] 우리에게 중요한 관점은 진정한 의미의 순수한 놀이가 문명의 주된 기초 중의 하나라는 것을 보이고자 하는 것뿐이다.

[17] 놀이는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립이 아닐 뿐 아니라 참과 거짓, 선과 악의 대립도 아니다.

[19]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이 놀이는 자연의 진행 과정과 구분된다.

[20] 몰두와 헌신과 진지함은 곧 황홀경으로 변하면서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그 고통스러운 “단지”라는 느낌을 완전히 깨드려 버린다. 어떠한 경기든 그 경기자들을 언제라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다. 그래서 놀이와 진지함의 대립 관계는 언제나 유동적이다. 놀이의 열등성은 그것에 대응되는 놀이의 진지함에 의하여 점차로 상쇄된다.
놀이가 진지함이 되고, 또 진지함이 놀이가 된다. 놀이가 진지함을 낮은 차원에 남겨 두고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높이로 발전할 수 도 있다.

[21] 놀이는 간주곡으로 또는 막간극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에 나타난다. 그러니 정규적으로 반복되는 휴식 행위로서의 놀이는 우리의 삶의 반려자이자 보완자가 되어 사실상 삶 전체의 불가결한 한 요소가 된다. 놀이는 삶을 가꾸어주고 또 삶을 확대시킨다.

[21] 봉헌 행위로서의 놀이는 그 집단의 안녕에 이바지할 수 있다.

[23] 놀이는 절대적이며 최고인 질서를 요구한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경기를 망치게 된다.

[23] 놀이는 아름다워지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미적 요소는 질서 잡힌 형식을 창조하고자 하는 충동과 어쩌면 동일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 질서 잡힌 형식이야말로 놀이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놀이의 요소를 나타내는 데 쓰이는 말들은 거의가 다 미적 효과를 기술하기 위해 쓰이는 미학 개념들이다. 즉 긴장, 평형, 안정, 전환, 대조, 변주, 결합과 해체, 그리고 해결이다. 놀이는 사물을 결합하고 해체한다. 놀이는 우리를 매혹시킨다. 놀이는 우리를 사로잡는다. 즉 놀이는 우리에게 마법을 거는 것이다. 놀이는, 우리가 사물 속에서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두 가지 성질, 즉 율동과 조화로 충만해 있다.

[24] 놀이하는 사람에게는 꼭 이겨야겠다는 욕망에도 불구하고 경기의 법칙만은 따라야 하기 때문에 용기, 끈기, 역량과 함께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인 "공정성"의 정신력이 요구된다.

[26] 놀이는 "우리"를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32] 문제의 정신적 과정에 대한 프로베니우스의 개념은 대강 다름과 같다. 고대인들에게는 아직 표현되지 않은 삶과 자연의 경험은 사로잡히고, 전율하며, 황홀경에 빠지는 "사로잡힘(seizure)"의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창조적 인간이나 아이의 경우에서와 같이 인간의 창조적 능력은 이 사로잡힘의 상태로부터 나온다." "사람은 운명의 계시에 사로잡혀 있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의 리듬의 현실은 인간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고, 따라서 이것은 필연적으로 또 자율적인 작용에 의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 감정을 행위 속에서 표현하도록 만든다." 결국 그의 말에 따르면 이것이 정신의 필연적인 변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삶과 자연의 현상에 의한 전율 즉 "사로잡혀 있음"은 반사적인 행위에 의해 시적 표현과 예술 형식으로 압축된다.

[35] 플라톤
"무엇이 바로 사는 방법인가? 삶을 놀이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즉, 어떤 경기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노래하고 춤추거나 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은 신을 달래 수 있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으며, 경쟁에 이길 수 있다."

[38] 놀이하는 사람은 그의 심신을 다 바쳐 그 놀이에 빠질 수 있고, 그것이 "단지" 놀이라는 생각도 뒤편으로 물리칠 수 있다. 놀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즐거움은 긴장으로 변할 뿐 아니라 정신의 고양으로 변한다. 놀이는 자유 분방함과 무아경의 두 극단 사이에서 움직인다.

[39] 축제와 놀이의 관계는 그 근본 성질상 매우 가깝다. 둘 다 일상 생활이 정지를 요구한다. 둘 다 유쾌함과 즐거움이 절대적이다. … 둘 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둘 다 엄한 법칙과 진정한 자유를 융합시킨다.

[41] "미개인들은 마치 아이들이 놀 때처럼, 자기 역할에 매우 몰두하는 좋은 연기자이고, 또한 어린이처럼 '진짜' 사자가 아닌 줄 알면서도 그것이 포효하면 마치 죽을 듯이 놀랄 수 있는 좋은 관람자이다."

[43] 어떤 형태의 한 종교가 서로 다른 질서 속에 있는 두 사물 사이의, 이를테면 인간과 동물 사이의 성스러운 동일성을 인정한다고 할 때, 그러한 관계를 우리가 생각하듯이 "상징적인 대응"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당한 표현이다. 이 동일성, 즉 둘이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하는 것은 한 물체와 그것이 상징하는 형상 사이의 대응 이상의 더 깊은 곳에 이른다. 이것은 신비로운 일치이다. 하나가 다른 것이 "된" 것이다.

[45] 이런 성스러운 놀이의 영역에서 어린이와 시인은 미개인과 함께 산다.

[45] 가면을 쓴 모습을 본다는 순수한 미적 체험만으로도 우리는 "일상 생활"을 넘어서, 일광(日光)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이 지배하는 세계로 이끌려 간다. 우리는 미개인과 어린이와 그리고 시인의 세계, 즉 놀이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47] "놀이는 어떤 고정된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수행되는, 그리고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그러나 절대적 구속력을 갖는 규칙에 따라 수행되는 자발적인 행위 또는 일로서, 그 자체의 목적이 있으며, 또 거기에는 어떤 긴장감과 즐거움이 따르며, '일상 생활'과는 '다른' 것이라는 의식이 따른다."

[70] 음악 활동은 시간과 공간의 엄격한 한계 내에서 시작되고 끝나며 반복할 수 있고, 그것의 본질은 질서, 율동, 변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중과 연주자를 동시에 "일상적인" 생활을 벗어난 기쁨과 평안의 세계로 데려다 주고 따라서 그런 점 때문에 슬픈 음악까지도 고상한 즐거움으로 바뀌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음악은 청중과 연주자를 "매료하고" "사로잡는다."

[74] 놀이는 적극적 가치이고 진지함은 소극적 가치이다. "진지함"의 의미는 "놀이"의 부정에 의해 정의되고 그 뜻을 다할 수 있다. 반면에 "놀이"의 의미는 "진지하지 않은 것," "진지하지 않음"이란 말로는 결코 정의될 수 없으며 그 뜻을 다할 수도 없다. 놀이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이다. 놀이 개면 그 자체는 진지함보다 한층 더 높은 질서에 속한다. 왜냐하면 진진함은 놀이를 전혀 허용하지 않지만, 반면 놀이는 진지함을 아주 적절히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75] 놀이와 문화라는 복합체에서는 놀이가 일차적이다. 놀이가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고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사실인 데 반하여, 문화는 우리의 역사적 판단이 특정한 사례에 붙이는 명칭일 뿐이다.

[76] 일반적으로 놀이 요소는 대개의 경우 종교 의식의 영역으로 흡수되어 버리면서 점차로 그 세력을 잃는다. 그중 잔류한 놀이 요소는 민속, 시, 철학, 그리고 법적, 사회적 생활의 다양한 형태 속에서 지식으로 결정[結晶]된다. 그래서 본래의 놀이 요소는 문화 현상 뒤에 거의 완전히 감추어진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 고도로 발전된 문명에서까지도, 놀이의 "본능"은 매우 강력한 힘으로 되살아나서 개인이나 대중을 거대한 놀이의 황홀경 속에 빠져들게 할 수 있다.

[77] 긴장과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러 집단들 사이의 놀이에서 대립적 요소가 실제로 경쟁이 될 때 최고도에 이르게 된다. 이겨야 한다는 열정은 놀이 특유의 가벼운 기분을 말살해 버린다.

[78] 문명이 놀이로서 또 놀이 속에서 성장하면서 취하는 두 개의 영원한 반복적인 형태는 신성한 행사와 축제적 경기이다.

[81] 이긴다는 것은 놀이의 결과에서 한 사람의 우월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런 면에서 승리자는 놀이 그 이상의 무엇을 얻게 된다. 이로써 이긴 자는 존경을 받게 되고 명예를 얻게 되고, 이러한 명예와 존경은 그 이긴 자가 속한 집단에도 어떤 이익을 가져 온다. … 즉 성공적인 승리는 손쉽게 개인으로부터 집단으로 확대된다는 사실이다. … 경쟁 "본능"은 우선 권력욕이라든가 지배 의지가 아니며, 제1차적인 것은 다른 사람을 능가하여 첫째가 되고 그 덕분으로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 가장 중요한 일은 "이겼다"는 점이다.

[83] 우리는 임금을 위해서는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해야 한다.

[83] 순전한 탐욕만으로는 무역도 놀이도 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기가 되질 못한다. 감행, 모험, 불확실성에 대한 감수, 긴장에 대한 인내 등이 놀이 정신의 본질이다. 긴장은 놀이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의식을 규정해 주며, 긴장이 고조되면 놀이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해준다.

[101] 모든 것은 그것 자체에 독특한, 그리고 그 종에 고유한 아레테를 가지고 있다. 말이나 개, 눈, 도끼, 활 등은 그것의 고유한 미덕을 가지고 있다. 힘과 건강은 육체의 미덕이고, 지혜와 총명은 정신의 미덕이다. 어원론적으로 아레테는 가장 좋은 것, 가장 뛰어난 것, 즉 아리스토스라는 말과 관련되어 있다.

[119] 문화란 놀이로서 시작되는 것도, 놀이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놀이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문화의 대립적이고 투기적인 기반은 처음부터 놀이 안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놀이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19] 투기의 기능과 구조는 모든 문화의 성장 과정 중 그 문화의 고대 세대에 이미 가장 뚜렷하고 또한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절정에 이른다. 즉 그 뒤로 문화가 더욱 복잡다단해지고 찬란해지고 번잡해짐에 따라, 그리고 생산 기술과 사회 생활 자체가 세밀하게 조직화됨에 따라, 놀이와의 관계를 읽게 된 모든 것, 즉 이념, 사고, 지식 체계, 강령, 규칙, 규범, 도덕, 인습 등이 무성하게 쌓인 밑에서 옛 문화의 토양은 점점 질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문명이 더욱 진지하게 성장했다고 말한다. 그 문화는 놀이에 단지 부차적인 역할만을 부여한다. 영웅적인 시대는 끝났고 이제 투기의 단계 역시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143] 우리가 "정의[正義]"라고 하는 것은 고대인 식으로 말하자면 "우세한 힘" - "신들의 뜻" 또는 명백히 드러난 우월성"이라는 점에서의 - 를 의미했다. 따라서 무력 투쟁은 길흉 판단, 점괘 혹은 법적인 소송과 마찬가지로 판결의 한 형태이다.

[145] 승리란 신들이 승리자의 대의[大儀]를 지지했음을, 따라서 그것이 "올바른" 대의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157] 이와 같은 모든 사실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놀이 정신이 없을 때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률적 유대가 무너져 완전히 분해된 사회에서조차도 투기적 충동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 내재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첫째가 되려는 내재적 욕망이 여전히 권력 단체들을 서로 충돌하게 할 것이며 이들 단체들을 극도의 집착과 광적인 과대망상증으로 이끌어 갈는지도 모른다. … 밑바닥에는 언제나 승리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런 형태의 "승리"가 아무런 이득도 가져 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61] "하나는 일꾼의 부류이고 또 하나는 놀이꾼들의 부류이다. 한쪽은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며 집을 짓는 등 여러 가지 생활의 필수품들을 조달한다. 또 다른 부류는 거만하고 게으른 자들로서 끊임없이 레크리에이션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생산적이고 부지런한 부류의 인간들을 가축으로서, 또는 죽음의 놀이에 등장하는 그들의 꼭두각시 또는 장기알로 사용한다." - 러스킨

[166] 실험 아동 심리학은 6세 아동이 던지는 질문의 대부분이 사실 우주 기원론적 성격의 질문임을 보여 주었다. 아동의 질문은 예를 들면 무엇이 물을 흐르게 하는가? 바람은 어디서 오는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이다.

[170] 수수께기의 해답은 숙고나 논리적 추론에 의해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급작스러운 해결로서 나타난다. 해결이란 질문자가 당신을 얽매고 있는 매듭을 풀어 버리는 것이다.

[171] 수수께끼는 놀이와 진지함 사이의 어떤 가능한 경계선이라도 무너뜨리고 만다. 수수께끼는 한꺼번에 그 둘을 겸하고 있었다. 즉 수수께끼는 가장 성스러운 중요성을 지닌 의식의 요소이면서 동시에 본질적으로 놀이였다.

[172] 그러나 놀이와 진지함이라는 두 형태의 정신 생활은 원래 끊임없는 하나의 정신적 매체를 형성하였고 그리고 그 매체 안에서 문명이 발생했던 것이다.

[173] 상대방은 "잡도록" 계산된 질문을 딜레마라고 부른다. 이에 대한 대답은 상대방[대답하는 쪽]으로 하여금 원래의 제안이 포괄되지 않은 어떤 다른 것을 인정하게 강요함으로써 그를 불리한 입장에 빠뜨린다.

[179] "문제"라는 말 - 글자 그대로는 "당신 앞에 던져지는 것"

[179] 최초의 철학자들은 예언 또는 환희의 어조로 이야기한다. 그들의 확신은 봉헌 의식을 주재하는 사제나 비교[秘敎] 전도사의 자기 확신이다. 그들은 사물의 근원, 발생, 생성 등을 문제로 다루며 그들의 해답은 숙고나 논술에 의해서가 아니고 번뜩이는 통찰력에 의해서 얻어진다.

[183] 이 문제[시적 창조의 본질을 규명해 봄]는 어떤 의미에서는 놀이와 문화 사이의 관계를 토론하는 데 중심 과제가 된다. 왜냐하면 보다 고도로 조직된 형태의 사회에서는 종교, 과학, 법률, 전쟁, 정치 등이 문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그렇게도 분명했던 놀이와의 연관성을 서서히 잃어 버리는 반면, 시인의 기능만은 여전히 그 기능이 태어난 곳인 놀이 영역 속에 굳건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를 짓는 것[poiesis]"은 사실상 놀이 기능이다. 그것은 정신의 놀이터 즉 정신이 그것을 위해 창조해 주는 그 독자의 세계 속에서 진행된다. 이 속에서 사물은 "일상 생활"에서 갖는 외관과는 매우 다른 외관을 갖는다. 또 논리와 인과라는 유대와는 다른 유대로 상호 연관된다.

[183] 시는 진지함 너머에, 즉 어린이, 동물, 미개인, 예언자가 속하는 보다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수준, 꿈, 매혹, 엑스터시, 웃음의 영역에 존재한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법의 망토 같은 어린이의 영혼을 지닐 수 있어야 하며 어른의 지혜를 버리고 어린이의 지혜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184] 시는 철학적 사람의 꿈과 같다. - 프란시스 베이컨

[197] 모든 시는 놀이에서 태어난다. 신앙에 기초한 성스러운 놀이, 구애라는 축제적 놀이, 경기라는 투기적 놀이, 자랑, 조롱, 욕설에 기초한 논쟁적 놀이, 임기응변과 재치의 날랜 놀이… 이런 놀이들이 시가 태어나는 모태이다.

[206]보통 사람들이 근접할 수 없는 영역에서 노닐며 그 의미를 수수께끼 같은 단어로 감싸기를 즐기는 현대 서정시들은 그들의 예술의 정수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서정시들의 특별한 언어를 d해하거나 또는 최소한 그 언어에 낯익은 제한된 범위의 독자들과 더불어서, 그들은 아주 유래깊은 폐쇄된 문화 글부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귿르을 둘러싸고 있는 문명이 그들의 목적을 충분히 이해하여 오늘날 까지 중요한 기능의 수행을 그 존재 이유로 하고 있는 한 예술을 양육시킬 수 있을까는 의심스럽다.

[213]성자와 신비주의의 놀이터는 보통 사람들의 영역을 멀리 벗어나 있었으며 또한 논리에 얽매이는 이성적 사고로부터 훨씬 더 멀리 벗어나 있다. 신성함과 놀이는 언제나 하나로겹친다. 시적 상상과 믿음도 마찬가지다.

[216]신화의 요소뿐만 아니라 시의 요소들 역시 놀이 기능으로서 가장 잘 이해된다. 왜 사람들은 언어를 운율, 억양과 리듬에 종속시키는가? 아름다움이나 심원한 감정 때문이라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놀이의 요구를 느끼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를 쓴다면 좀 더 이해가 간다.

[222]소피스트는 보다 고대적 형태의 문화적 교사들과 같이,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그의 업무는 그의 놀라운 지식과 신비한 기술을 공개하고 또 동시에 공개 시합에서 경쟁자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사회에서의 사회적 놀이의 두 중요한 요소가 그에게 존재한다.

[230]철학은 아득한 옛날 수수께끼 놀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수수께끼 놀이는 제의나 축제에 따르는 여흥이었다.

[243]요즈음 대개 의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해서 음악을 즐기지만 옛사람들은 음악을 교육을 위해서도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자연은 우리가 일을 잘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빈둥거리기도 잘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50]무용은 순수한 놀이다. 놀이와 무용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인 참여의 관계이며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춤은 특수한 형식의 놀이이며, 특별히 완벽한 형식의 놀이인 것이다.

[260]예술사와 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이 플로랜스의 탑들이 진지한 방위 목적의 건조물이라기보다는 “자랑하기 위한 탑”이었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이 중세의 도시는 놀이의 개념을 장엄한 경관으로 보여 준 것이다.

[261]놀이적 경쟁적의 정신은 문화 그 자체보다도 더 오래된 사회적 충동이며 마치 효소처럼 모든 생활에 스며있다. 의식은 봉헌 놀이에서 자라났으며 시 역시 놀이 속에서 탄생해서 놀이에서 자양을 얻으면서 자랐다. 음악과 춤은 순수한 놀이었다. 지혜와 철학은 종교적인 시합에서 유래된 언어와 형식에서 그 표현을 찾았다. 전쟁의 규칙, 귀족 생활의 관습은 놀이 패턴 위에서 구축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문명은 애초에는 “놀이 되어진 것”이라는 결론이 이른다. 문명은 아기가 자궁에서 떨어져 나오듯이 놀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생기며 떠나는 법이 전혀 없다.

[271]르네상스의 정신은 장난과는 거리가 전혀 거리가 멀었다. 우리는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정신보다 더 진지한 정신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전반적인 정신적 태도는 놀이였다.

[281]음악은 놀이기능의 가장 높고 순수한 표현이다. 18세기 음악의 중요성은 그 놀이 내용과 심미적인 내용의 완전한 조화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순수한 청각적 현상으로서 음악은 이미 여러 면에서 세련되고 풍요로웠다.

[294]경기가 더 이상 놀이가 아닌 그들을 분리시켜 그들에게 경기 능력으로는 우수하지만 그 지위로는 진정한 놀이꾼보다. 낮은 등급을 매기는 것이다. 프로패셔널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과 내키는 대로 하는 태평스러움을 상실하고 있다.

[298]일부 대기업에서는 생산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놀이 정신을 주입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되면 사정이 뒤바뀌어 놀이가 일이 된다.

[301] 예술이 스스로를 의식할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장점을 의식할 때, 예술은 그 영원한 어린애 같은 무구성(無垢性)의 일부를 상실하기 쉽다.

[302] 만약 우리가 공간, 시간, 목적의 특정한 한계 내에서 고정된 규칙에 따라 일어나는 활동이 바로 놀이라는 우리의 정의를 과학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모든 과학과 학문이 여러 가지 형태의 놀이에 불과하다는 놀랍고 무서운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303] 과학의 규칙은 놀이의 규칙과는 달리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규칙은 끊임없이 경험에 의해서 거짓임이 드러나며 따라서 수시로 수정된다. 반면에 게임의 규칙은 게임 그 자체를 망치지 않고는 변경될 수 없다.

[304] 첫째, 어떤 놀이 형식이 어떤 사회적 또는 정치적 계획을 감추기 위해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는 우리가 이 책의 주제로 취급해 온 영속적인 놀이 요소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거짓된 놀이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 어떤 형상들은 언뜻 보기에는 놀이의 모습을 갖추고 있고 영구적인 놀이 경향으로 오인될 가능성이 많으면서도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놀이와 어느 정도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는 특질, 또는 고도로 발전된 놀이 요소라고 오인될 수 있는 특질에 의해서 현대 생활은 점점 지배되고 있다. 이 특질을 나는 미숙성[Puerilism]이라는 말로 불러 왔다.

[307] 우리는 점차 문화 속의 놀이 요소가 한창 만개하였던 18세기 이래로 계속 쇠퇴해 왔다는 슬픈 결론에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된다. 오늘날의 문명은 이미 놀이를 잃었다. 놀이가 아직 남아 있는 듯한 부분에서도 그것은 거짓된 놀이일 뿐이다. 내가 대충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문명은 거짓되게 놀기 때문에 어디서 놀이가 끝나고 어디서 놀이가 아닌 것이 시작되는지를 말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310] 어느 한편이 이 암묵적 합의로부터 물러서는 순간, 남은 무리가 이 "놀이의 훼방꾼"을 제재하지 못하는 한에서는 국제법의 전체계는 비록 일시적이지만 무너질 것이 뻔하다.

[312] 현대의 전쟁이, 그 겉모습으로만 볼 때, 놀이와의 연관성을 모두 상실했다는 점이다. 최고 문화를 표방하는 국가들이 국제 의례를 무시하고 후안무치하게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국제법 체계 속에 내재한 놀이 규칙을 파괴한다. 위엄을 위해서 그들이 벌이는 전쟁 놀이는 진정한 놀이가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전쟁이라는 놀이 개념을 배반한다.

[313] 진정한 문명은 어떤 놀이 요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명은 자제와 극기를 전제로 하며, 또한 그 자신의 경향을 궁극적 최고 목표와 혼동하지 않는 능력, 그리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어떤 일정한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어떤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놀이일 것이며, 진정한 문명은 항상 페어플레이를 요구할 것이다. 페어플레이란 놀이의 용어들로 표현된 훌륭한 믿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속임수나 놀이를 망치는 훼방은 분명히 문명 자체를 파괴한다. 건전한 문명 창조의 힘이 되려면 이 놀이 요소는 수수해야 한다. 그것은 이성, 믿음, 또는 인간성에 의해 설정된 기준을 은폐하거나 격하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겉모양만 그럴 듯하게 꾸민 가짜, 진정한 놀이 형식이라는 환상 뒤에 숨은 정치적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놀이는 선전을 알지 못한다. 그 목적은 그 자체 안에 있으며 일반적 놀이 정신은 행복감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다.

[315] "용서하게.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내 눈이 신을 바라보고 있고 또 신에 의해 감동되었기 때문이라네. 자네 말마따나 인간은 아주 하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라네. 얼마간의 고려의 대상은 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지."

[315] 인간의 정신은 궁극적인 것으로 주의를 돌림으로써만이 놀이의 마술적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 논리적인 사고는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정신의 모든 보물과 정신이 성취한 모든 영광을 훑어볼 때에 우리는 아직 모든 진지한 판단의 밑바닥에 어떤 문제가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모든 선언이 절대적 결론이 아님을 알고 있다. 우리의 판단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바로 거기에서 세상은 진지한 것이라는 우리의 느낌도 결국 함께 흔들리게 된다. "모든 만사가 헛되다"라는 옛 속담 대신에 "모든 것은 놀이이다"라는 보다 적극적인 결론이 우리에게 강요된다.

■ 『호모 루덴스』를 읽고 & 내가 저자라면

니체의 철학을 다룬 고병권님의 책은 좀 어려웠지만 간간이 머리를 치는 문장들이 있어서 읽는 맛이 있었다. 니체의 심오한 문장을 어렴풋이 이해가 될 때에는 깨달음의 즐거움에 빠지기도 했다. 『미완의 시대』는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하고 20세기를 알아가는 지적 즐거움 때문에 다소 무지한 분야의 챕터를 읽을 때에도 근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호모 루덴스』는 깨달음의 즐거움을 주지도 못했고, 나의 근성이 뛰어나지 않음을 증명하려고 마음먹은 듯이 지난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은 기존에 알고 있던 놀이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 책이다. 기존에는 놀이를 놀이 자체가 아닌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놀이로 정의 내렸다고 진단한다. 저자가 시도한 것은 놀이의 일차원적 의미를 다루는 것이다. 문화가 놀이의 한 형태임을 설득하고, ‘진정한 의미의 순수한 놀이가 문명의 주된 기초 중의 하나’임을 보이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쓴 의도다.

이 책은 새로운 주장이 계속 등장하지 않는다. 책의 전반에 걸쳐서 저자의 의도를 설득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참으로 방대한 근거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철학과 종교, 언어학을 넘나들며 주장을 강화한다. 역사 속에, 문헌 속에, 설화 속에 숨어 있던 엄청난 자료들이 등장하여 하나같이 외쳐댄다. “요한 호이징하의 주장이 이래서 맞아요. 그죠? 설득력이 있죠?”라고.

예절 시합에 대한 관습을 찾아보기 위해 중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를 찾고(p.105),

그는 “가발 하나 만으로도 의상사 뿐 아니라 문명사의 한 장을 구성할 수 있다”(p.276)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은 단번에 믿어진다. 놀이 하나 만으로도 언어를 통하여 어원과 다른 언어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한 챕터를 쓰고, 철학에서 놀이가 어떤 형식을 띠는지에 대하여 한 챕터를 쓰는 역량을 이미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하나의 주장에 대하여 이렇게 광범위한 데이터 조사와 오랜 기간의 연구를 통하여 그 타당성을 제시하는 저자의 학문적 성실함에 놀랐다. 그리고, 나는 과연 이런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를 고민해 보았다. 탐구심의 강점 테마를 가진 나라면 시도해 볼만 일이긴 하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저자만큼 탐구심이 강한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는 어떤 것인가를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된 독서였다. 나는 구본형 선생님처럼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벌써 오래 전이다. 가능하다면 위대한 철학자들이 보여준 깊은 사유의 힘을 나의 글에도 담고 싶다.

선생님은 왜 이 책을 선정하셨을까? 자신의 주장을 엉성한 논리나 빈약한 논거로 제시하는 연구원들에게 공부하는 자의 성실함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일을 놀이처럼 하라는 제안을 아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IP *.135.20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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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10.22 12:44:05 *.227.22.57
아~ 희석아. 네가 말한 '사부님이 이 책을 선정하신 이유'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가슴을 한 대 쳤다. 이번 주는 다들 좀 어려웠나보다. 다음 주엔 조금 더 열심히 해야겠다. 잘 읽고 간다.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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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2007.10.23 08:37:49 *.128.229.81
희석아 , 어렵게 말하지 마라.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너희를 골탕먹이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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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0.23 09:17:27 *.249.162.56
^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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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10.23 15:29:33 *.232.147.231
사부님, 미워요!!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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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0.24 06:48:29 *.72.153.12
이 책 어려워서 3기 연구원 시험에 들어 있었다면 난 어쩌면 포기했을지도 몰라. 알고는 못 보겠더라. [일의발견]도 모르고 읽었으니까 읽었지. 난 알면 물러설 수도 있었겠다 했다.
그래서 드는 생각. 4기 시험에 이 책 [호모 루덴스]가 들어간다면...크크큭.
누구한테는 이 책은 3기들만 보기엔 아까운 책이라고 거짓으로 꾸며서 4기 시험에 넣어야 한다고 했더니 그말 들은 사람이 웃었어. 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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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
2007.10.27 00:09:06 *.135.205.84
하하. 사부님~ 이 책을 고른 목적을 달성하신 것 같으시네요. (역시 사부님은 고수입니다. 은근히 약이 오르는걸요~ 호호호.)

종윤, 도윤형. 잘 지내죠~ 저도 잘 있어요. 오늘은 강릉에 다녀왔는데, 일정이 너무 촉박하여 강릉 공기 한 번 들이쉬지도 못하고 돌아온 느낌이네요. 넉넉했으면 경포대도 가고 그러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지요. ^^ 주말, 잘들 보내세요. 신동엽 선생님과 함께 말이죠~

누나. 어제 강연은 잘 듣고 돌아가셨어요? 다음 주중 점심 한 번 같이 먹는 것 어때요? ^^ 제가 월요일쯤 전화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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