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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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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2일 16시 15분 등록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요한 호이징하 저, 김윤수 역, 까치


1. 저자에 대하여

저자 호이징하(Johan Huizinga)는 1872년 네덜란드 태생으로 그로닝겐•라이프치히대학에서 공부했다. 하를렘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암스테르담대학교에서 인도문학을 강의했으며 1905~15년 그로닝겐대학에서 역사교수로 일한 뒤 1942년까지 레이덴에서 역사교수로 재직했다. 그해 나치에게 인질로 잡혀 죽을 때까지 투옥과 다름없는 억류상태에서 지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인도의 문학과 문화를 다루고 있지만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저서는 14~15세기 프랑스•네덜란드의 생활과 사상을 검토한 〈중세의 가을〉이었다. 생생하고 잘 짜인 양식을 보여주는 이 저서는 역사서일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16세기의 핵심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공감적으로 연구한 〈에라스무스 Erasmus〉(1924)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인류의 문화발전을 하나의 보편적인 개념으로 분석, 설명하여 도식화하고 유형화하려는 시도에서 탈피하여 한 시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문화사(Kultur-Geschichte)라는 역사학 방법을 택하였다. (호모 루덴스)는 호이징하가 65세 때이던 1938년에 발표되었는데 그의 문화사 연구의 자 연스러운 귀결로서 현대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평범한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대학의 생리학 교수였다. 호로닝헨 대학에 입학한 호이징하는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특히 동양의 언어인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산스크리스트어의 연구에 심취하였고 점차 비교 언어학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1895-96년의 겨울 학기에는 라이프치히에 유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비교 언어학에만 대학 생활을 전적으로 바쳤던 것은 아니었다. 「호모 루덴스」가 그 좋은 증거가 되겠지만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조예는 그가 이러한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그는 1897년에 학위를 받은 뒤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하를렘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서 생계를 꾸렸다. 그 뒤 그로닝겐 대학에서 고대 인도 문화사와 종교사 연구로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그리고 역사학으로 기울어져서 연구 무대를 서구 중세사로 옮기게 되었다. 1905년에는 은사이며 역사학자인 블로크의 도움으로 흐로닝헨 대학의 네덜란드 역사 교수가 되었다. 1915년에는 라이덴 대학의 일반 역사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40년 독일군의 점령으로 그 대학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독일 점령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함으로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 석방되어 가족의 면회조차 금지된 채 겔레론의 작은 시골집에서 1945년 2월 1일에 72세로 영면했다.

그는 강단 생활을 하며 1916년부터 32년까지 한 문화잡지의 편집을 맡았고 네덜란드 왕립 학술원의 회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라이덴 대학에서 1919년 그 유명한 「중세의 가을」을 발표하여 유럽 인문 과학자 중에서 발군의 존재가 되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부르크하르트를 잇는 문화사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들은 공통적인 역사 감각을 가지고 문화사가를 지향했던 것이다. 호이징하는 인류의 문화 발전을 하나의 보편적인 개념으로써 분석, 설명하고, 도식화, 유형화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며 한 시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이런 역사학 방법을 문화사라고 하는데 호이징하는 그 자신은 몰론 부르크하르트를 문화사가의 범주에 넣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저자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와 중세를 명확하게 대비시킨 데에 대해서 <중세의 가을>의 저자 호이징하는 저서의 제목 그대로 르네상스를 중세와 연결되는 곧 중세의 수확기로서 파악하였다. 물론 두 사람의 중세와 르네상스에 대한 이러한 해석 차이는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50년의 시간적 거리에 의한 학문적 성과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호이징하는 중세야말로 그가 현대에서 꿈꾸고, 자신의 이론과 저술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유럽 공동 사회가 실현되었던 시대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드디어 현대의 고전이라고 하는 「호모 루덴스」가 그의 문화사 연구의 자연적인 귀결로서 집필되었다.

그는 그의 선배 부르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정치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극히 필요하고 가치가 있을 때만 조금씩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강한 예술가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 역시 부르크하르트를 연상시킨다. 이런 요소와 예술에 대한 연구는 그의 문화사에서 종합되어 그림 같은 언어와 환상적인 표현에 의해 그의 글들을 문학적인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의 학파도, 연구 서클도 형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세계와 학문에 대해서 자유롭고 개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그의 저작은 다음과 같다.

1919년 - 「중세의 가을 - 네덜란드의 14세기와 15세기의 생활양식과 정신형태에 관한 연구」
1924년 - 「에라스무스」
1933년 - 「17세기 네덜란드의 문화 - 사회적 토대와 국가적 특성」
1935년 - 「내일의 그늘에서 - 우리 시대의 문화적 고민에 대한 진단」
1938년 - 「호모 루덴스 - 문화의 놀이 요소의 규정에 대한 시도」
1945년 - 「더럽혀진 세계 - 우리 문화의 치유 가망에 대한 고찰」



2.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7) 나는 수년 동안이나 문명이 놀이로서, 또 놀이 속에서 발생하고 전개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7) 인간이나 동물에게 다 같이 적용할 수 있으면서도, 생각하는 것이나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제3의 기능이 있으니, 이것이 "놀이하는 것"이다. "만드는 인간"과 이웃하는, 그러나 "생각하는 인간"가는 같은 차원에 속하는 술어로서 취급해야 할 것이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Man the Player)"이라고 생각된다.

(8) 독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말 하나하나에 대하여 상세한 증거 문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문화의 일반적인 문제를 다룰 때에는, 공격자 자신이 충분히 탐사해 보지 않은 부분이라도 항상 과감하게 공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8) 즉 놀이를 생리 현상이 아닌 문화 현상으로서 이해하려고 한다. 이것은 과학적인 방식이 아닌 역사적인 접근 방식이다.
(9) 놀이(play, Spiel)는 문화보다 오래된 것이다.

(11) 놀이에 이렇게 열광하거나 물두하는 것, 즉 미치게 만드는 힘 속에 놀이의 본질, 원초적인 성질이 깃들어 있다.

(13) 동물은 논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동물은 기계적인 물체 이상이다. 인간은 놀며, 논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분명 인간은 이성적 존재 이상이다. 왜냐하면 놀이란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4) 인간 사회의 중요한 원형적 행위에는 처음부터 전부 놀이가 스며들어 있다.

(19) 놀이의 첫 번째 중요한 특징을 파악하게 되었다. 놀이는 자유스러운 것, 바로 자유이다. 두 번째 특징은 놀이가 “일상적인 것” 혹은 “실제의”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실제의” 삶을 벗어나서 아주 자유스러운 일시적인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19)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이 놀이는 자연의 진행 과정과 구분된다.


(21) 놀이는 간주곡으로 또는 막간극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에 나타난다. 그러나 정규적으로 반복되는 휴식 행위로서의 놀이는 우리의 삶의 반려자이자 보완자가 되어 사실상 삶 전체의 불가결한 한 요소가 된다. 놀이는 삶을 가꾸어 주고 또 삶을 확대시킨다. 그런 한에서 놀이는 생의 기능으로서 개인에게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놀이가 포함가호 있는 의미, 놀이의 의의와 놀이와 표현적인 가치, 놀이의 정신적 사회적 결합, 즉 한마디로 문화적 기능의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도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21) 놀이는 장소와 지속성에 의해 “일상적인” 삶과는 구분된다. 이것이 놀이의 적극적인 제3의 특징이다. 그것은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이다. 놀이는 제한된 시간과 장소의 속에서만 “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3) 긴장은 불확실함이며 위태로움이다. 따라서 놀이란 그러한 긴장을 해소시키려는 노력이다. 무엇인가 긴장 상태에 있는 것은 성취되어야만 한다. 아기기 장난감을 잡으려고 할 때, 고양이가 실패를 가지고 놀 때, 소녀가 공놀이를 할 때, 거기에는 이미 어떤 어려운 것을 성취하려고 하며, 성공하려고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긴장을 해소하려는 요소가 들어 있다.

(35) "삶을 놀이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즉, 어떤 경기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노래하고 춤추거나 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은 신을 달래 수 있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으며, 경쟁에 이길 수 있다." - 플라톤

(38) 놀이는 자유분방함과 무아경의 두 극단 사이에서 움직인다.

(45) 가면을 쓴 모습을 본다는 순수한 미적 체험만으로도 우리는 "일상 생활"을 넘어서, 일광(日光)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이 지배하는 세계로 이끌려 간다. 우리는 미개인과 어린이와 그리고 시인의 세계, 즉 놀이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51) "이러한 것은 모두 '놀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그리스 사람들에게 삶 전체가 모두 놀이였다는 주장이 아닌 바에야…"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 이러한 것이 이 책의 내용이 될 것이다. …. 나는 놀이와 경기의 근원적인 동일성을 굳게 확신한다.

(67) 우리는 이제 고대의 사고 영역을 더듬어 나가야 하는데, 거기에는 무기를 사용하는 엄숙한 전투와 하찮은 놀이에서부터 목숨을 건 유혈 투쟁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시합이 모두 놀이 그 자체이며 또한 포함된 어떤 규칙에 의해 제한되는 운명과의 싸움이라는 근본적으로 단일한 생각이 들어 있다.

(74) 놀이는 적극적 가치이고 진지함은 소극적 가치이다. "진지함"의 의미는 "놀이"의 부정에 의해 정의되고 그 뜻을 다할 수 있다. 반면에 "놀이"의 의미는 "진지하지 않은 것," "진지하지 않음"이란 말로는 결코 정의될 수 없으며 그 뜻을 다할 수도 없다. 놀이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이다. 놀이 개면 그 자체는 진지함보다 한층 더 높은 질서에 속한다. 왜냐하면 진진함은 놀이를 전혀 허용하지 않지만, 반면 놀이는 진지함을 아주 적절히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75) 놀이와 문화라는 복합체에서는 놀이가 일차적이다. 놀이가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고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잇는 사실인 데 반하여, 문화는 우리의 역사적 판단이 특정한 사례에 붙이는 명칭일 뿐이다.

(76) 오락으로서의 경쟁이나 전시는 문화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앞서는 것이다.

(77) 긴장과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러 집단들 사이의 놀이에서 대립적 요소가 실제로 경쟁이 될 때 최고도에 이르게 된다. 이겨야 한다는 열정은 놀이 특유의 가벼운 기분을 말살해 버린다.

(81) 경쟁 “본능”은 우선 권력욕이라든가 지배 의지가 아니며, 제1차적인 것은 다른 사람을 능가하여 첫째가 되고 그 덕분으로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결국 개인이나 집단의 힘이 확대되는가, 안되는가의 문제는 제2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83) 순전한 탐욕만으로는 무역도 놀이도 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기가 되질 못한다. 감행, 모험, 불확실성에 대한 감수, 긴장에 대한 인내 등이 놀이 정신의 본질이다. 긴장은 놀이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의식을 규정해 주며, 긴장이 고조되면 놀이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해준다.

(97) 포틀래치와 관련된 이 모든 이상야릇한 관습의 중요한 원리는, 나의 의견으로는, 순수하고 단순한 투기의 “본능”이다. 그 관습은 우선 맨 먼저 싸우고자 하는 인간 욕구의 강력한 표현으로 간주해야 한다. 일단 이것만 인정되면 우리는 그것을 엄격히 “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즉 그것은 진지한 놀이, 숙명적이고 치명적인 놀이, 잔인한 놀이, 성스러운 놀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놀이는 고대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한 개인이나 집단의 인격을 좀 더 높은 권력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100) 아이들의 생활에서부터 최고의 문화 활동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사회적 완성을 위한 가장 강한 충동 중의 하나가 자신의 우월성을 찬양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101) 모든 것은 그것 자체에 독특한, 그리고 그 종에 고유한 아레테를 가지고 있다. 말이나 개, 눈, 도끼, 활 등은 그것의 고유한 미덕을 가지고 있다. 힘과 건강은 육체의 미덕이고, 지혜와 총명은 정신의 미덕이다. 어원론적으로 아레테는 가장 좋은 것, 가장 뛰어난 것, 즉 아리스토스라는 말과 관련되어 있다.

(119) 문화란 놀이로서 시작되는 것도, 놀이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놀이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문화의 대립적이고 투기적인 기반은 처음부터 놀이 안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놀이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25) 고대인의 정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옳음과 그름의 추상적 문제라기보다는 이김과 짐의 구체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고대인의 법의식에 더욱 가까이 갈수록, 그러한 승리의 기대라는 요소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또한 놀이 요소가 점점 전면으로 나타난다.

(140) 고대인의 마음속에서 이 두 개념은 흔히 뒤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규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싸움은 바로 그 제한성 때문에 놀이라는 형식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145) 승리란 신들이 승리자의 대의(大儀)를 지지했음을, 따라서 그것이 "올바른" 대의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150) 기사도는 특히 중세 문명의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기사도의 이상은 비록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기만당했을지라도 그것이 인류 공동체를 위한 불가결한 안전판의 하나인 국제법의 기초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157) 우리가 게임이야말로 모든 문명의 산 원리라는 점에 유의한다면 순전한 형식의 면에서는 모든 사회를 하나의 게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157) 이와 같은 모든 사실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놀이 정신이 없을 때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률적 유대가 무너져 완전히 분해된 사회에서조차도 투기적 충동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 내재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첫째가 되려는 내재적 욕망이 여전히 권력 단체들을 서로 충돌하게 할 것이며 이들 단체들을 극도의 집착과 광적인 과대망상증으로 이끌어 갈는지도 모른다. … 밑바닥에는 언제나 승리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런 형태의 "승리"가 아무런 이득도 가져 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61) "하나는 일꾼의 부류이고 또 하나는 놀이꾼들의 부류이다. 한쪽은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며 집을 짓는 등 여러 가지 생활의 필수품들을 조달한다. 또 다른 부류는 거만하고 게으른 자들로서 끊임없이 레크리에이션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생산적이고 부지런한 부류의 인간들을 가축으로서, 또는 죽음의 놀이에 등장하는 그들의 꼭두각시 또는 장기알로 사용한다." - 러스킨

(163) 모든 문화에서 투기적 관습으로 특징지어지는 놀라운 유사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바로 인간 정신의 영역, 즉 지식과 지혜의 분야이다. 고대인에게는 행동과 용기가 바로 힘이었다. 그러나 지식은 마술적 힘이었다. 고대인에게는 모든 특수한 지식은 성스러운 지식이었고 비교적이고 경이로운 지혜였다. 왜냐하면 어떠한 지식이든 우주의 질서 그 자체와 직접 관계되기 때문이었다.

(166) 실험 아동 심리학은 6세 아동이 던지는 질문의 대부분이 사실 우주 기원론적 성격의 질문임을 보여 주었다. 아동의 질문은 예를 들면 무엇이 물을 흐르게 하는가? 바람은 어디서 오는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이다.

(171) 수수께끼는 원초적으로 성스러운 게임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따라서 수수께끼는 놀이와 진지함 사이의 어떤 가능한 경계선이라도 무너뜨리고 만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수수께끼는 두 방향으로 가지를 친다. 한쪽은 신비주의적 철학이며 또 다른 방향은 레크리에이션이다.

(179) "문제"라는 말 - 글자 그대로는 "당신 앞에 던져지는 것"

(183) “시를 짓는 것”은 사실상 놀이 기능이다. 그것은 정신의 놀이터 즉 정신이 그것을 위해 창조해 주는 그 독자의 세계 속에서 진행된다. 이 속에서 사물은 “일상생활”에서 갖는 외관과는 매우 다른 외관을 갖는다. 또 논리와 인과라는 유대와는 다른 유대로 상호 연관된다.

(183) 시는 진지함 너머에, 즉 어린이, 동물, 미개인, 예언자가 속하는 보다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수준, 꿈, 매혹, 엑스터시, 웃음의 영역에 존재한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법의 망토 같은 어린이의 영혼을 지닐 수 있어야 하며 어른의 지혜를 버리고 어린이의 지혜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195) 책이 없던 사회에서는 시 형식을 취해야만 그 본문을 암기하기가 더 쉬웠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보다 깊은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고대 사회 자체가 사실상 그 구조에서 운율적이고 시적이었다는 점이다.

(197) 모든 시는 놀이에서 태어난다. 신앙에 기초한 성스러운 놀이, 구애라는 축제적 놀이, 경기라는 투기적 놀이, 자랑, 조롱, 욕설에 기초한 논쟁적 놀이, 임기응변과 재치의 날랜 놀이… 이런 놀이들이 시가 태어나는 모태이다.

(204)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이해인 관념사이의 영원한 간극은 상상의 무지개로써만 연결할 수 있다.


(204) 이 시어(詩語)라는 전문어는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것이 아닌 특수한 용어, 이미지, 비유 등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보통의 언어와 다르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이해인 관념 사이의 영원한 간극은 상상의 무지개로써만 연결할 수 있다. 언어에 얽매인 개념은 항상 생활의 분류를 표현하는 데는 적절치 못하다. 따라서 사물을 표현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을 표현한 개념들로 감쌀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이미지를 창조하는 형상적(形象的) 언어 뿐이다. 관념과 사물이 이미지 속에서 결합되는 것이다.

(207) 형체도 생명도 없는 어떤 것을 한 인격체로서 묘사한다는 일은 모든 신화 형성의, 그리고 대부분 모든 시 짓기의 정수이다.

(213) 신성함과 놀이는 언제나 하나로 겹쳐진다. 시적 상상과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219) 아테네의 희극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의 방탕한 축제 행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221) "진실한 시인이란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극적이어야하며 인간의 삶 전체는 비극과 희극이 혼합된 것으로 느껴져야만 한다. " - 소크라테스

(226) “어디에서나 똑같으면서 어디에서도 똑같지 않은 것은 무엇이냐?” 대답 : “시간.” “나는 당신과 다르다.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인간이 아니다.” 디오게네스가 그리포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그것이 진실이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230) 철학은 아득한 옛날 신성한 수수께끼 놀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수수께끼 놀이는 제의나 축제에 따르는 여흥이었다. 수수께끼 놀이가 가진 종교적인 측면으로부터 우파니샤드의 심오한 철학과 신지학, 직관적 섬광들을 가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이 발생했다. 수수께끼 놀이의 놀이적인 측면으로부터는 소피스트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두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철학을 진리의 추구로서 그만이 도달할 수 있는 독자적인 경지까지 끌어 올렸지만, 과거나 현재나 철학 특유의 요소인 가벼운 형식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낮은 수준에서는 궤변적인 엉터리 요법, 지적인 약삭빠름 등으로 발전하였다. 그리스에서는 투기적인 요소가 강했기 때문에, 순수 철학을 희생해 가며 수사학이 발전하게 되었고, 따라서 순수 철학은 일반인의 교양으로서 기세를 떨친 궤변의 그늘 속에 가려졌다. 고르기아스는 이와 같은 왜곡된 교양의 전형적 인물이었다. 그는 진지한 철학에서 벗어나서 현란한 언어와 거짓된 재치를 찬양하고 남용하는데 그의 정신을 낭비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적 사고의 수준이 떨어졌다. 경쟁이 극단적으로 되었고 편협한 교조주의가 판을 쳤다. 비슷한 타락이 중세 후기에도 반복되었다. 즉 사물의 가장 내재적인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시대에 이어 언어와 공식만 있으면 충분한 시대가 왔던 것이다.

(232) 니체의 전기 작가들 중 일부는 니체가 과거에 있었던 철학의 투기적 태도를 다시 채택했다고 그를 비난하고 잇다. 만약 니체가 진실로 그랬다면 그는 철학을 그 옛 기원으로 다시 이끌어 갔다고 할 수 있겠다.

(240) 모든 진정한 제의는 노래와 춤과 놀이로 이루어진다. 우리 현대인들은 제의와 신성한 놀이에 대한 감각을 잃어 버렸다. 우리의 문명은 노쇠해서 너무 복잡해졌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이 잃어 버린 감각을 되찾게끔 도와 주는 데는 음악적 감성이 으뜸이다. 음악을 느끼는 가운데 우리는 제의를 느낀다. 음악이 종교적 개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음악을 즐기는 가운데서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과 성스러움에 대한 감각이 하나로 합치며 이 합치 속에 놀이와 진지함의 구분이 삼켜져 버린다.

(243) "요즘 대개의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해서 음악을 즐기지만 옛사람들은 음악을 교육을 위해서도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자연은 우리가 일을 잘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빈둥거리기도 잘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 빈둥거림(idleness) 또는 여가(leisure)가 우주의 원리였던 것이다. 이 빈둥거림은 일보다 우선한다. 사실 그것은 모든 것의 목적(텔로스)이다.

(244) 우리는 옛사람들의 놀이와 진지함의 구분이 우리의 구분과는 매우 달랐다는 사실, 그들의 평가 기준이 우리의 기준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디아고게라는 말에는 은연중에 자유민들에게 어울리는 지적이고 심미적인 몰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250) 놀이를 이루는 데에 절대 필요한 하나의 구성 요소가 춤이라는 말이다. 춤은 특수한 형식의 놀이이며, 특별히 완벽한 형식의 놀이인 것이다.

(251) 춤은 음악적이면서 동시에 조형적이다. 리듬과 동작이 주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음악적이며, 불가피하게 물질에 매이기 때문에 조형적이다. 춤의 실행은 제한적 능력을 가지는 인간의 육체에 의존하며 춤의 아름다움은 바로 움직이는 육체 자체의 아름다움이다. 춤은 조각과 마찬가지로 조형적 창조이지만 순간적으로만 그럴 뿐이다. 춤과 동반하고 도 춤의 필요 조건인 음악과 마찬가지로 춤은 그 반복 능력을 통해 생명을 가진다.

(261) 문명은 아기가 자궁에서 떨어져 나오듯이 놀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생기며 놀이를 떠나는 법이 전혀 없다.

(264) 국가는 결코 순순하고 단순한 공리적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창문에 핀 성에꽃(frost-flower)처럼 예측할 수 없고 덧없으며 갖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다. 가장 다양한 기원에서 나온 서로 다른 세력들에 의해 이리저리 밀리면 생겨난 문화의 충동이 소위 "국가"라는 힘의 집합체로 형상화되는데 이렇게 생겨난 국가는 그 존재 이유를 어떤 특별한 가문의 영광, 어떤 특별한 민족의 우월성 속에서 찾는다.

(267) 로마 사회는 투기 없이는 살 수 없는 사회였다. 투기는 빵처럼 그 사회의 존속에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투기는 신성한 투기였고 투기에 대한 인민의 권리는 신성한 권리였기 때문이다.

(268)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능가하고 제압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쓰는 행위, 바로 이런 정신이 위에 열거한 모든 행위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바로 여기에서 로마 문명의 유서 깊은 제의적 투기의 배경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271) 르네상스의 전반적인 정신적 태도는 놀이의 태도였다. 아름답고 고상한 형식을 추구하는, 세련되었으면서도 신선하고 그리고 힘찬 노력이야말로 문화가 “놀이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예였다.

(279) 예술과 놀이가 로코코에서처럼 그렇게 밀접하게 뒤섞인 예는 아마 일본 문화를 제외하고는 차지 어려울 것이다.

(283) 그들의 음악이 완벽의 단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고상한 천진난만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286)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문화적 충동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의 관심이나 흥미를 우리는 놀이 속에서 추구하느냐 아니면 진지함 속에서 추구하느냐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의심이 일어나며, 이 의심과 함께, 마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는 체하는 것(make believe) 밖에 없는 듯한 거북한 위선의 감정이 생겨난다. 그러나 우리는 진지함과 가장 사이의 이 불안한 균형이 분명히 문화의 불가결한 구성 요소라는 사실, 놀이 요소가 무든 제의 및 종교의 한가운데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불변의 모호함에 항상 의지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유독 진지함이 없는 비(非)제의적 문화 현상 속에서는 이 모호함은 정말 곤란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289) 그의 위엄에 알맞은 화려한 복장을 과시하던 전시대의 우아한 신사들이 이제 진지한 시민이 되었다.

(294) 프로페셔널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과 내키는 대로 하는 태평스러움을 상실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또한 아마추어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아마추어들은 열등 콤플렉스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295) 스포츠는 모든 면에서 비속한 것, 성스럽지 않은 것이 되었으며 사회 구조와의 유기적 연관성을 모두 상실해 버렸다.

(297) 진정으로 놀이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어린애처럼 놀아야 한다.

(298) 일부 대기업에서는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놀이 정신을 주입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되면 사정이 뒤바뀌어 놀이가 일이 된다.

(301) 예술이 스스로를 의식할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장점을 의식할 때, 예술은 그 영원한 어린애 같은 무구성(無垢性)의 일부를 상실하기 쉽다.

(307) 우리는 점차 문화 속의 놀이 요소가 한창 만개하였던 18세기 이래로 계속 쇠퇴해 왔다는 슬픈 결론에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된다. 오늘날의 문명은 이미 놀이를 잃었다. 놀이가 아직 남아 있는 듯한 부분에서도 그것은 거짓된 놀이일 뿐이다. 내가 대충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문명은 거짓되게 놀기 때문에 어디서 놀이가 끝나고 어디서 놀이가 아닌 것이 시작되는지를 말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308) 정치적 기계 장치의 기초가 되는 인간관계의 탄력성이 “놀이”를 허용함으로써 참을 수 없게 또는 위험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긴장을 완화시켜 준다.

(312) 현대의 전쟁이, 그 겉모습으로만 볼 때, 놀이와의 연관성을 모두 상실했다는 점이다. 최고 문화를 표방하는 국가들이 국제 의례를 무시하고 후안무치하게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국제법 체계 속에 내재한 놀이 규칙을 파괴한다. 위엄을 위해서 그들이 벌이는 전쟁 놀이는 진정한 놀이가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전쟁이라는 놀이 개념을 배반한다.

(315) “용서하게.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내 눈이 신을 바라보고 있고 또 신에 의해 감동되었기 때문이라네. 자네 말마따나 인간은 아주 하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라네. 얼마간의 고려의 대상은 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지.”

(316)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의지가 우리에게 명하는 어떤 행동이 진지한 의무인가 또는 놀이로서 적법한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즉각 그 시금석을 제공할 것이다. 행동하려는 우리의 결심 속에 진실, 정의, 동정, 용서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행동이 놀이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우리의 걱정스러운 의문은 곧 무의미해지고 만다. 우리의 행동이 지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데에는 한 방울의 동정이면 족하다. 우리의 행동이 정의와 고상한 자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인식인 양심은 항상 끝까지 우리를 미망시키는 의문, 그 행동이 놀이적인 것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압도하여 영원히 침묵시킬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커피를 마실 때는 반드시 방문을 걸어잠근다. 커피의 향을 음미하는 일에 순수하게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커피는 수동분쇄기에 원두커피를 직접 갈아 마신다. 그 정도의 손놀림을 통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출근하는 길이 일곱 개가 넘는다. 소소한 다양성을 통해 일상의 변주를 즐기는 것. 대부분의 사람이 겨우 10분이 더 걸린다는 이유로 한번도 가 보지 않은 길을 그는 택한다. 그렇게 해서 빨리 도착한 10분 덕분에 삶의 역사가 바뀌지는 않는다고 말하면서..”

얼마전 한명석님이 보내주신 편지에 적혀 있던 부산대 이왕주 교수의 삶에 관한 글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회사에서 집으로 올 때 나는 언제나 똑같은 길을 걷는다. 몇 개월 전 이사왔을 때, 몇 개의 길로 실험해본 후에 결정한 '가장 빠른 길'로 말이다. 예외는 없다. 가장 가까우므로, 그만큼의 시간을 세이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전부터 약간 에두르는 길을 걷는 것도 아주 재미있음을 알게 되었다. 좀 더 햇볕이 푸른빛으로 내비치는 공간, 좀 더 살아 숨쉬는 듯한 공간을 지나치는 것은 언제나 활기를 선물해준다. 가끔 새벽에 산책도 다닌다. 차디찬 공기만큼이나 하루를 확 깨워주는 것도 없다. 이것은 연구원을 시작하면서부터 나에게 일어난 변화이다. 나는 온 몸의 감각을 열어놓고 고른 호흡으로 삶의 모든 향기를 마시며 살고 싶다. 축구의 목표가 골대가 아니고, 삶의 목표가 잘 나가는 것이 아니듯, 음미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믿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호이징하에 따르면 놀이란 실제적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 움직임의 유일한 동기는 놀이 자체에서 얻는 기쁨이다. 호이징하가 말하는 놀이의 특징은 먼저 ‘자유로운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과는 구별되는 영역으로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만 유효한 규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이 배제된 특수한 상황에서 동일한 규칙을 가지고 행동하던 놀이의 구성원들은 놀이가 끝난 후에도 지속되려는 성질이 있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고 한다. 놀이의 이러한 특징은 그는 인간 문명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제의와 축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신앙과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법률과 전쟁, 지식, 시, 신화, 철학, 예술이 놀이로부터 출발한 문화라는 것을 증명하여 보이고 있다.

어쨌든,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방대한 양의 원천 자료로 독자를 압도해 버리는 책, '놀이'라는 책의 주제에 맞지 않게 꽤나 진지하고, 그래서 다분히 재미없는.. 그러나 주제 자체가 흥미로워, 하품을 하면서도 끝까지 책을 붙들고 읽어야 했던 책이었다.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보자.

역사와 어원을 통한 놀이 개념의 명확화
호이징하는 철학자이지만 철학적인 논변을 통하여 놀이에 접근하지 않는다. 문화 속에서의 놀이가 가진 생동적인 측면을 도식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역사적이고 어원학적인 접근을 통하여 문화 속에 녹아 있는 놀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특히, 2장은 장 전체가 '놀이'라는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서 여러 문화권의 '놀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8개의 언어에 대한 놀랄정도로 다양한 자료조사와 치밀한 분석. 그것을 통해 저자가 얻고자 한 것은 놀이에 대한 개념의 정의였다. 2장 뿐만이 아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여러 장에서도 계속해서 저자는 단어의 유래를 살피면서 개념을 명확히하고자 하였다.

언어는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유래를 조사하는 것은 특정 단어에 대한 사람들의 오랜 기간동안 잘 변하지 않는 인식, 즉 개념을 명확하게 할수 있도록 도와준다. 글을 쓸 때 개념을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을 때는 주제의 키워드의 유래를 살펴보자.

’놀이’라는 단어의 번역
그런데 ‘놀이’라는 번역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겠다. 호이징하는 “놀이”라는 개념을 그리스어에서부터 유럽의 여러 언어를 비롯하여 심지어 아시아의 중국 일본의 언어까지 포괄하여 언어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쩐지 영어의 ‘Play’를 그대로 번역해 놓은 한국어 ‘놀이’는 그가 이야기 하고 있는 개념을 나타내기에 딱 들어맞는 단어는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얼핏 생각해도 영어만 해도 Play the piano, Play tennis와 같이 연주를 하다. 테니스를 치다 등 여러 가지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로 쓰일 수 잇는데 우리말 ‘놀이’는 그러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따라서 책을 읽는 내내 ‘놀이’라는 단어에 대한 선입관을 지우고 그가 정의하는 놀이라는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애써야했다.

책의 구성 : 개념 – 증거 – 결론
책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는 듯 하다. 1장부터 3장까지는 새로운 인간관 ‘호모 루덴스’를 제시하며 ‘놀이’의 본질적 특성에 대해 다루어 명확한 개념화를 하는 부분이다. 특히 3장은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중간의 버퍼 장으로, 2장까지 다룬 놀이의 개념과 범주로 4장부터 나올 역사와 문화의 모든 분야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2부 – 즉, 4장에서 10장까지는 법률, 전쟁, 지식, 시, 철학, 예술 등의 분야와 놀이와의 관계를 체계적, 유기적으로 분석하여 모든 것이 놀이로부터 유래되어 있음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밝히고 있다.

3부- 11장과 12장은 그러한 개념을 현대 문화에 적용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은 어느 정도까지 놀이 형식을 유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결론 부분이다. 그는 현대의 문명은 그 페어플레이를 모르는 '미숙성'으로 말미암아, 문화가 지닌 놀이적 측면을 망가뜨리고 있음을 지적하며, 놀이정신에 대한 사회의 자각을 요구하고 있다.

어찌보면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 혁명’과 구성이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처음엔 개념을 잡아주고, 중간은 자세한 사례로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 부분은 그것의 적용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하는 구성. 빈틈 없는 구성같아 보인다.

놀이 : 자유와 규칙, 모순의 조화
호이징하가 정의한 놀이의 특성들을 아울러보면, 자발적으로 조화로운 질서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에 더해 자율적이고 생동하는 것, 그것이 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자유’와 ‘질서’는 충돌하는 것이 아닌 모순적인 결합을 보여준다. 모순을 잘 활용하는 것. 이중성을 관리하여 새로운 개념을 정의하는 것. 이것은 모든 철학과 글쓰기의 기본인 듯 하다.

’우리는 놀줄 아는가?’: 독자로부터 자문해보도록 유도
책 후반부에 이르러 ‘우리는 얼마나 놀 줄 아는가?’ 라고 자연스레 자문하게 된다. 사실 호이징하는 ‘놀이하는 인간’을 논하면서, ‘놀지 않는 인간’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은 어느 정도까지 놀이 형식을 유지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유롭게 놀기보다는 문명의 산물에 둘러싸여 ‘놀아나고’ 있지는 않은가?

그는 “속임수나 놀이를 망치는 훼방은 분명히 문명 자체를 파괴한다”라고 말함으로써 현대문명에서 놀이의 상실을 문화비판으로 연결시켰다. 다시 말하면 페어플레이가 없는 곳에는 문화가 파괴되며 놀이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문화는 놀이의 규칙이 성실히 지켜질 때 가치 있는 문화를 전개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리프킨과 마찬가지로 호이징하 역시 사회에 개입하여 문제를 진단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아쉬운 것
전체적으로 ‘명쾌함’이 가장 아쉽다. 문장이 길고, 복잡하게 나누어 설명하다보니 한번에 읽지 않고 쉬다보면 전체에서 어디쯤 와있는지, 명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책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너무나 많은 자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임플리케이션을 구체화 해주지 않아서가 아닐까.

예컨대, 놀이 개념에 대해 1장의 마지막이나, 3장의 마지막에서 명확히 규정해 주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표 형태라면 더욱 좋겠다. 그러면 4장부터 나오는 법률과, 전쟁 등에서 나타나는 놀이 특성의 체크리스트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책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1장과 3장의 내용만 명쾌하게 요약하였어도 나머지 장들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으리라.

책을 어렵게 만드는데에는 번역의 문제도 만만치 않은 듯 하다. 문장 전체가 너무 길어 호흡이 끊기고, 중간중간 오탈자도 보인다. 80년대에 번역된 이후로 수정을 보지 않은 듯 하다. 독자들이 책을 벗삼아 즐기도록 하려면 좀 더 번역에 신경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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