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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9일 06시 43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시인 신동엽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박정희의 유신 치하에서 눈을 감았다. 일제 말기의 수탈정책에 굶주렸고, 해방 이후 이념 논란에 고민했으며, 6.25 전쟁의 부조리를 병약한 몸으로 견대냈고, 4.19 혁명과 5.16 쿠데타의 소용돌이를 지나쳤다. 말 그대로 우리의 가슴 아픈 현대사를 온 몸으로 살다 가신 분이다.

그는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 시기는 일제의 수탈 정책이 한창이던 헐벗고 굶주린 시대였다. 부여 초등학교 시절, 신동엽은 과묵하고 내향적인 성격으로 친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또, 그는 6년 내리 우등상을 탈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다 한다.

1943년 전주 사범학교에 입학한 그는 문학, 종교, 사상서에 파묻혀 살았으며, 일제의 무리한 근로 봉사와 형편없는 식사로 인한 굶주림으로 인해 건강을 잃어가고 있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좌, 우익 그 어느 쪽에도 가입하지 않은 그는 양쪽에서 린치를 당했고, 남한 총선을 반대한 동맹 휴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그래도 초등학교 교원 자격은 인정되었던지 그는 인근의 한 국민학교에 발령을 받았으나, 재학 시절 그와 대립하던 이가 같은 학교에 있자 부임 사흘 만에 그만둔다. 그의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밭 600평을 팔아 신동엽에게 대학 등록금을 내주었다.

1949년 사학과에 입학한 그는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외세에 의해 분단이 되어있는 암담한 정치적 현실에 좌절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고향인 부여로 피난을 갔지만 그곳에서 인민군에게 붙들려 강제 부역에 시달렸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인민군이 퇴각한 뒤, 다시 부산으로 이민을 갔으나 그 해 12월 이번에는 국민 방위군으로 징집된다. 이 곳에서 군간부들의 부정부패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다 이듬해 2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귀향한다. 이때,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민물의 날게를 생으로 잡아먹는 것이 뒷날 간디스토마로 고생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전쟁 기간 동안 '대전 전시 연합대학'을 졸업한 신동엽은 전쟁이 끝난 1953년 졸업 후, 서울에서 한 친구의 헌 책방 일을 도우며 자취생활을 했다. 그해 초겨울 어느 따뜻한 날 신동엽은 당시 이화여고 3학년 생이었던 인병선을 만나게 된다. 인병선은 이화여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고, 두사람은 열렬한 연애 끝에 1956년 결혼을 하게 된다. 아내 인병선은 남편 신동엽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가 만난 것은 내가 여고 졸업반이던 해 겨울 어느 따뜻한 날이었다. 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서 한낮이 되자 나는 집 근처 책방으로 신간 서적을 사러 나갔다. 가끔 들러 주간지와 월간지를 사오던 서점이었다. 몇 가지 뒤적이다 찾는 것이 눈에 띄지 않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책방 주인에게 "○○ 없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바로 등뒤에서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 책은 아직 못 갖다 놓았습니다만 그 대신 이건 어떨까요?" 그리고 내 어깨 너머로 책 한 권을 빼들었다. 나는 책을 따라 자연히 그와 마주섰다. 그리고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속 깊이 “아!”하고 부르짖었다. 그 크고 빛나는 눈! 비록 작달막한 키에 빛 바랜 허름한 군복점퍼를 걸치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그처럼 빛나는 눈을 본 일이 없었다. 그 눈빛은 너무 깊고 넓어 나의 온 가슴을 채우고도 남는 것 같았다. 이것이 우리들의 운명의 해후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나를 그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 것 같으면 맵찬 눈매를 한 소녀가 가끔 들러 대중잡지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예지 아니면 사상지 그리 어려운 학술 서적만 사가더란다."

둘은 부여에서 신혼 살림을 차렸으나 여전히 가난했다. 다행히 아내가 양장점을 개업하여 조금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자 그는 시인의 꿈을 키우게 된다. 보령농고에 취직했으나 디스토마가 발병해 각혈과 고열에 시달리면서, 이를 폐결핵으로 오인해 가족과 헤어져 본가에서 요양하게 된다. 이 때 시쓰기에 몰두해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탄생한다. 이 시가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게 되고, 그의 평생지기인 박봉우를 만나게 된다.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교육 평론사에 재직했으나, 이후 이곳을 그만둔 1961년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명성여고 야간부의 교사로 재직하게 된다. 1960년대 4월 혁명과 이후 혁명이 좌절된 뒤, 정치적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깊은 침잠을 세계로 빠져든다. 그러나 그는 결코 현실을 도피하지 않았고, 1964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인 6.3 사태를 겪으면서 본격적인 참여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는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서명에 참여하고, '발', '4월은 갈아엎는 달' 등을 발표하고, 1967년 그의 대표작인 '껍데기는 가라'와 대작 서사시인 '금강(錦江)'을 발표한다.

죽기 1년 전인 1968년 시인으로서 그의 삶은 절정에 이르렀고, 왕성한 활동을 했다. '봄은', 오페레타 '석가탑', '산문시1',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등의 유작이 이 때 창작되었다. 이 해에 또 한 명의 위대한 시인이었던 김수영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고, 이듬해인 1969년 4월 7일, 시인 신동엽은 그의 나이 39세에 문병 온 남정현의 품에 안겨 간암으로 숨을 거둔다.

그의 주요 시집으로는 '아사녀(阿斯女)'(1963)와 그가 별세한 뒤 출판된 '신동엽 전집' (1975),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980)와 미발표 시집인 '꽃같이 그대 쓰러진' (1989), '젊은 시인의 사랑'(1989) 등이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감했던 것일까. 그의 시 '담배연기처럼'은 가족을 먼저 떠나야만 했던 가장으로서의 안타까움이 묻어 나오는 듯 해서, 뼈마디 시린 현대사의 한 자락을 살다 간 짧은 그의 생애을 닮은 듯 해서 읽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는 '시를 살다간' 좋은 시인이었다.

담배연기처럼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다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드레박질이여.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맷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퍼 못 다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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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시인 신동엽을 위한 홈페이지(my.dreamwiz.com/garaya/dongyup/), 신동엽 시인의 문학과 삶(my-cgi.dreamwiz.com/rahany/sdy-main.htm), 바람구두의 문화 망명지(windshoes.new21.org/poem-sindongyup.htm) 등

* 이 홈페이지들에 그의 삶과 시들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시인에게 관심이 생긴다면 참고해 볼만 하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시


아사녀(阿斯女)

모질게도 높은 성(城)돌
모질게도 악랄한 채찍
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
죄없는 월급쟁이
가난한 백성
평화한 마음을 뒤보채어쌓더니

산에서 바다
읍(邑)에서 읍
학원(學園)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
봄따라 왁자히 피어나는
꽃보래
돌팔매,

젊은 가슴
물결에 헐려
잔재주 부려쌓던 해늙은 아귀(餓鬼)들은
그혀 도망쳐 갔구나.

-------애인의 가슴을 뚫었지?
         아니면 조국의 기폭(旗幅)을 쏘았나?
         그것도 아니라면,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총알을
     박아 보았나?------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
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사월십구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陽)달진 동남아 하늘 고흔 반도에 이주 오던 그날부터 삼한(三韓)으로 백제(百濟) 고려(高麗)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자락 매듭 고흔 흰 허리들의 줄기가 3.1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 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 오른 아사달(阿斯達)의 아사녀(阿斯女)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굽이의 찬란한 반항이었다.

물러가라, 그렇게
쥐구멍을 찾으며
검불처럼 흩어져 역사의 하수구 진창 속으로
흘러가버리렴아, 너는.
오욕된 권세(權勢) 저주받을 이름 함께.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태백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 . 개나리 . 복사

알제리아 흑인촌에서
카스피해 바닷가의 촌아가씨 마을에서
아침 맑은 나라 거리와 거리
광화문 앞마당, 효자동 종점에서
노도(怒濤)처럼 일어난 이 새피 뿜는 불기둥의
항거......
충천하는 자유에의 의지.....

길어도 길어도 다함없는 샘물처럼
정의와 울분의 행렬은
억겁(億劫)을 두고 젊음의 뒤를 이을지어니

온갖 영광은 햇빛과 함께,
소리치다 쓰러져간 어린 전사(戰士)의
아름다운 손등 위에 퍼부어지어라.

(p. 16)


빛나는 눈동자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두운 밤
너의 눈은
세기(世紀)의 대합실 속서
빛나고 있었다.

빌딩마다 폭우가
몰아쳐 덜컹거리고
너를 알아보는 사람은
당세에 하나도 없었다.

그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조용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다만 사랑하는
생각하는, 그 눈은
그 밤의 주검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자시(子時)다, 새벽이다, 승천(昇天)이다

어제
발버둥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세상에 항거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위엄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빛나는 눈동자.
너의 세상을 밟아 디디며
포도알 씹듯 세상을 씹으며
뚜벅뚜벅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
너의 그 눈을 볼 수 있은 건
세상에 나온 나의, 오직 하나
지상(至上)의 보람이었다.

그 눈은
나의 생과 함께
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

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여
인류는 헤매인 것이다.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 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된 높은 의지의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

산정(山頂)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의 눈
깊게. 높게.
땅속서 스며나오듯한
말없는 그 눈빛.

이승을 담아 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 버린
오, 인간정신 미(美)의
지고(至高)한 빛.

(p.32)


山에 언덕에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p. 42)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p. 67)



종로5가(鍾路五街)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 온 고구마가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가.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딩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뻐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거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p. 69)



그 사람에게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p. 80)



산문시(散文詩) 1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아이덱거 럿셀 헤밍웨이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가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p. 83)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 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p. 84)



금강(錦江)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
1919년 우리는
우리 얼굴 닦아놓았다.

1894년쯤엔,
돌에도 나무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하늘,
잠깐 빛났던 당신은 금새 가리워졌지만
꽃들은 해마다
강산을 채웠다.
태양과 추수(秋收)와 연애와 노동.

동해,
원색의 모래밭
사기 굽던 천축(天竺) 뒷 길
방학이면 등산모 쓰고
절름거리며 찾아나섰다.

없었다.
바깥세상엔. 접시도 살점도
바깥세상엔
없었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영원의 하늘,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123~124)


우리들에게도
생활의 시대는 있었다.

백제의 달밤이 지나갔다,
고구려의 치맛자락이 지나갔다,

왕은,
백성들의 가슴에 단
꽃.

군대는,
백성의 고용한
문지기.

앞마을 뒷마을은
한식구,
두레로 노동을 교환하고
쌀과 떡, 무명과 꽃밭을
아침 저녁 나누었다.

가을이면 영고, 무천,
겨울이면 씨름, 윷놀이,
오, 지금도 살아있는 그 흥겨운
농악이여.

시집가고 싶을 때
들국화 꽂고 꽃가마,
장가가고 싶을 때
정히 쓴 이슬마당에서
맨발로 아가씨를 맞았다.

아들을 낳으면
온 마을의 경사
딸을 낳으면
이웃마을까지의 기쁨,

서로, 자리를 지켜 피어나는
꽃밭처럼,
햇빛과 바람 양껏 마시고
고실고실한 쌀밥처럼
마을들은 자라났다.

지주도 없었고
관리도, 은행주도,
특권층도 없었었다.

반도는,
평등한 노동과 평등한 분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그 위에 백성들의
축제가 자라났다.

늙으면 마을사람들에 싸여
웃으며 눈감고
양지바른 뒷동산에 누워선,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남겼다.

반도는
평화한 두레와 평등한 분배의
무정부 마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그 위의 청춘들의
축제가 자라났다.
우리들에게도 생활의 시대는 있었다.

(136-138)


벼슬자리란 공으로 들어오지
않는 법,
밑천을 들였으면
밑천을 뽑아야,

그리고 지금이나
예나, 부지런히 상납해야
모가지가 안전한 법,

그래서 큰 마리낙지 주위엔
일흔 마리의 새끼낙지가,

일흔 마리의 새끼낙지 산하엔
칠백 마리의 말거머리가,

칠백 마리의 말거머리 휘하엔
만 마리의 빈대 새끼들이,

아래로부터, 옆으로부터,
이를 드러내놓고 농민 피를 빨아
열심히, 상부로 상부로
올려 바쳤다.

(139)


4월달, 우리들, 밥은
익었었는데
누군가가 쇳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구나.

연인이여, 너와 나의 쌀밥에
누군가 쇳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구나.

(143)


굶주리고 아들 딸애들의
그, 흰 죽사발 같은
눈동자를,
죄지은 사람처럼
기껏 속으로나 눈물 흘리며
바라본 적이 있은
사람은 알리라,

뼈를,
깎아 먹일 수 있다면
천 개의 뼈라도 깎아 먹여주고
싶은,
그 아픔을
맛 본 사람은 알리라.

이미 끝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어라,
이미 죽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어라.

(144)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인가,
눈을 뜨지 못한 짐승,
그렇다,
우리 주위엔 얼마나 많은
눈 뜨지 못한 짐승들이
사람 탈을 쓰고
밀려가고 있는가.

(151)


하늬는 하늘을 봤다
영원의 하늘,
내것도,
네것도 없이,
거기 영원의 하늘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늬의 발밑엔,
꿈틀거리던
두 마리의 버러지.

그렇다,
불쌍하달밖에 없었다
자기의 생 영위키 위해
삐걱비걱 땀 흘리며
하루를 숨쉬던 허리.

내것
네것
없는 하늘 소리가
무한에 와서
무한으로 흘러간다.

    어디로 가는
바람인지, 수숫잎을
흔들면서 한무더기가
지나간다.

오, 아름다운 노을
저 노을을 볼 때
우리는 이 세상,
어떻게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오, 아름다운 하늘
저 노을을 볼 때 어떻게 이 세상,
서러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152-153)


흘러가는 강물.
가까운 거리에서
원초스런 눈짓으로
일진, 일퇴,
속삭이고 있는
둘의 눈동자,

열려있는 창문이었다.
자기들의
내실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열려있는 창문
둘이서, 시간을 거스르며
서정을
두레박질하고 있었다.

사슴이 이따금 찾아와
입술 적시고 가는
숲속의 호수,

열두 개의 보석을
쪼개고 들어가면,
자리하고 있을
이슬 젖은 선녀의
안마당,

지나간 바람과
내일의 하늘이
사이좋게 드나들고 있을
투명한 하늘,

이야기가
소용없었다
촉촉히 젖은
둘의 입술,
가늘게 떨리면서
열렸단 멎고
열렸단 말 뿐,

손과 손
마음과 마음
역사와 역사는
얽혀 흐르면서
뼈 없이 녹아,
구석과 구석을 적시고
지상에서 천상을 향하여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諧調의 음악이 되어

무한한 공간을
흘러가고 있었다.

(158-160)


출세한다는 건
피 빨아먹는 자리,
놀고 먹는 자리,
백성의 피기름 솟는
흡구 자리 하나
차지한다는 것,

피라밋처럼
정상을 향해
벼슬길로
기어오른다,

형제의 등을 밟고
친구의 목을 부러뜨리고
제 자신의 낯짝도
쥐어뜯어가며
벼슬 높은
정상으로
정상으로,

여기저기
나 있는
달 표면의 자죽 같은
흡구 곁으로
기어올랐다.

오늘,
얼마나 달라졌는가

(180-181)


광화문이 열렸다.
사흘 동안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군중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문은 금세 닫혔다,
들어간 사람도, 나온 사람도 없었다,
그러면 그 사이
쥐새끼가 지나갔단 말인가, 아니야,
바람이었다, 거센 바람이
굳게 닫힌 광화문의 빗장을
부러뜨리고 밀어제껴버린 것이다,
그 문의 빗장은 이미
썩어 있었다.

모든 고개는 다시 더 제껴져
하늘을 봤다,
그 무수의 눈동자들은 다시 내려와
서로의 눈동자를 봤다,
눈동자,
주림과 추위와 분노에 지친
사람들의 눈동자,

단식하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맑다,
서로 마주쳐 천상에서 불타는
두 쌍, 천 쌍, 억만 쌍의
맑은 눈동자.

(187-188)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얻어맞았단 말인가
깨어졌단 말인가

깨진 항아리 속에서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휘장을 찟고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맑은 강물을 보았단 말인가
안창에서 흐르고 있는
붉은 강물을 보았단 말인가

살 속 숨쉬고 있는
하늘을 보았단 말인가
정신 깨치고 흐르는 하늘을 보았단 말인가

생명을 보았단 말인가
광란에 마비돼가던 혈관이
사관침으로 소생하기 시작했단 말인가

하늘을 보았단 말인가
피의 노랠 들었단 말인가
쇠옷을 긁어내고
다스운 피를 만졌단 말인가,

그들은 벌써
관아를 향해 뛰고 있는 발이
아니었다.

신들린 사람처럼
힘이 전신에 솟구쳐
견딜 수 없어, 그저 달리고 있었다

그건 기막힌 하나의
슬픔이었을까

수백년의 누더기 속서 풀려나와
고삐를 스스로 끊고
뛰고 있었다

이유없이 얽매이었던
수십대의 고삐를 끊고
뛰고 있었다

하늘을 본 것이리라
자기 가슴 속의 피를
만져보고 놀란 것이리라

자기의 하늘을 보고
놀란 것이리라.

(211-212)


하늘,
하늘 흘러가는
하늘소리를 들었는가,

보이지 않은
하늘 너머,

하늘 너머
그 멀리 흘러다니는
하늘소리를 들어보았는가,

빛보다 빠른
시간보다 빠른
초시간을 짚어보았는가,

하늘 땅보다 깊은
공간보다 깊은
초공간을 짚어보았는가,

시공의 흐름을 거슬러
공간의 흐름을 거슬러,

자유자재로
시공 위 좌정해본 적이 있는가

그래서, 보았는가
무엇을, 너는,

없음이어라
없음이어라

없었노라. 바람이었노라
지나가는 음영이었노라,
없음이어라. 없음이어라

그러나 어찌하랴
그래도 여전히
남는건
연민임을,

아퍼, 괴로워하는
이 시간의 살덩이만이
불쌍할 뿐이어라,

지금, 이 시간
어디선가
찡그리고 있을 피부가
불쌍할 뿐이어라,

미워할 사람도
예뻐할 사람도 없었노라
다만
살아 있음한 목숨의
불쌍함뿐,

그럼 우리가 본 하늘은
무슨 하늘이었단 말인가,

불쌍,

우리는 보았다
가엾은 심줄,

애처로운 목,

서러운 사람들이
서러운 목 뽑고
서러운 코 흘리며
서러웁게, 살아가고 있었다,

살아 있음의
불쌍함이여,
숨쉬고 있음의
불쌍함이여,

(218-221)



낮이면
하늘을 가리는 흙먼지
밤이면
어둠을 수놓는
수천 개의 모닥불.

어디서 왔는가
바위 같은 주먹,
꿈틀거리는 심줄이여,

오,
무서운 감격이여
반란이여,

오 무서운
힘이여
신이 나는 모임이여,

내일은 공주
모레면 수원
글피면 한양성

천추에
한 못다 풀
양반성의
점령이여

조국의 해방이여
백성의 해방이여

농민의,
노동하는 사람들의 하늘과 땅이여

오, 발가벗고 싶은 감격이여
오, 위대한 반란이여,

꿀과 젖이 흐르는 땅,
꽃과 과일이 만발하는 강산이여,
눈빛과 웃음이
어우러지는 땅,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여.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여.

(p. 249-250)


꽃이 지듯
밑없는 어둠으로
수백명씩
만세를 부르며,
흰 옷자락 나부껴
수천명씩
차례차례
뛰었다,

민족의 제전,
반도의 상봉우리 높이
불타고 있는 저 모닥불 속에
던져라,
우리의 젊음,

없었노라
이 목숨 내맡길 자리.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 聖火,

젊음을 부르는
성화,

왔노라,
이제야 왔노라
거대한 천명.

이제야 보았노라
우리의 하늘

발밑에서 불타는
우리의 하늘,

던져라
젊음,
던져라
창,
던져라
증오,
던져라
반역,

영원의 강물이
우릴 손짓한다

오, 위대한
몸부림이여

깊은 하늘,
용광로 불길 속에
사방, 팔방에서
무수히 던져지는
저 꽃다발,

지글거리는
역사의 밭이여,

꽃불 튀기는
피의 잔치여,

내가 왔노라,
이제야
내가 여기 있노라,

뼈를 남기고
승천하는
승리여,

내 여기 왔노라
이제야
처음, 내 여기 왔노라,

내 여기서
불타며 승리했노라,
살덩이를 여기
찢어던지며
내 영혼은 여기서
승리했노라,
만세,
만세를 불렀노라,
노래했노라
우리의 형제들은,

다음날의
백화 요란한
하늘밭 위해
우리의 목숨을
거름밭에 던졌노라
용감히 노래하며 던졌노라,

알맹이를 발라서
던졌노라.

(257-260)



피가 어깨를 적시고
흙에로 스민다
피의 고향은 흙일까?

살이 아프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여기가 어딘데?

너에게도
고국 가면, 콩밥 묻어둔
아랫목

쪽니 나온 마누라가
웃고 있겠지?

 
"불쌍한 것들"

(252)


그러나
이제 오리라,
갈고 다듬은 우리들의
푸담한 슬기와 자비(慈悲)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리 세상 쟁취해서
반도(半島) 하늘 높이 나부낄 평화,
낙지발에 빼앗김 없이,

우리 사랑밭에
우리 두렛마을 심을, 아
찬란한 혁명의 날은
오리라,

겨울 속에서
봄이 싻트듯
우리 마음 속에서
연정(戀情)이 잉태되듯
조국의 가슴마다에서
혁명, 분수(噴水) 뿜을 날은
오리라.

그럼,
안녕.

언젠가
또 다시 만나지리라,

무너진 석벽(石壁), 쓰다듬고 가다가
눈 인사로 부딪쳤을 때 우린
십겁(劫)의 인연(因緣),,

노동하고 돌아가는 밤
열한 시의 합승 속, 혹, 모르고
발등 밞을지도 몰라,
용서하세요.

그럼
안녕,
안녕,

논길,
서해안(西海岸)으로 뻗은 저녁 노을의
들길, 소담스럽게 결실한
붉은 수수밭 사잇길에서
우리의 입김은 혹
해후(邂逅)할지도
몰라.

(302-303)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

  간 밤에 밟히워 간 가난한 목숨들의 명복을 위하여, 지금 어디선가 아우성치고 있을 못된 아귀(餓鬼)들의 진혼을 위하여. 그리고는 내일날 태양빛 찬란히 빛나 있을 사형집행장, 꽃바람 부는 교외, 잔디밭 언덕으로 끌려나갈 아름다운 인류들의 눈물을 위하여.
 
내 동리 불 사른 사람들의 훈장(勳章)을 용서하기 위하여. 코스모스 뒤안길 보리 사발 안은 채 죽어 있던 누나의 사랑을 위하여.
  
감옥돌 묻으러 갈 꽃상여의 길 닦이를 위하여. 아프리카사막서 일사병으로 눈먼 식민지 병사들의 월급봉투를 위하여. 그리고는 먼 훗날, 당신이 서 있을 대지를 쪼개고 솟아 나올 시생대 암층 깊숙이 우리의 대서사시를 새겨 넣기 위하여.

(306)


(343)
내 일생을 시로 장식해 봤으면.
내 일생을 사랑으로 채워 봤으면.
내 일생을 혁명으로 불질러 봤으면.
세월은 흐른다. 그렇다고 서둘고 싶진 않다.


(347) 나는 그곳을 빠져나와 강 기슭을 거슬러 한없이 걸었다. 언젠가 버리고 온 내 가슴에 낡은 담장이 자취없이 무너져 내리고, 그 무너져 내린 담장의 자리 위에서 조그만 꽃씨 하나가 말없이 떡잎을 갈라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370) 시(詩)란 바로 생명의 발현인 것이다. 시란 우리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인 것이다. 하여 그것은 항시 보다 광범위한 정신의 집단과 호혜적 통로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371) 하여 시인은 선지자여야하며 우주지인이어야 하며 인류발언의 선창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382) 우리들은 정신을 찾아 각고의 길을 헤매야 한다.
시(詩)에서의 피나는 노력과 고심이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기교나 수사법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높은 경지에 이르려는 정신인의 구도적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수운이 삼천리를 10 여 년 간 걸으면서 농노의 땅, 노예의 조고을 본 것처럼, 석가가 인도의 땅을 헤매면서 영원의 연민을 본 것처럼, 그리스도가, 그리고 성서를 쓴 그의 제자들이 지중해 연안을 헤매면서 인간의 구원을 기구한 것처럼 오늘의 시인들은 오늘의 강산을 헤매면서오늘의 내면을 직관해야 한다.
자기에의 내찰, 이웃에의 연민, 공동언어를 쓰고 있는 조국에의 대승적 관심, 나아가서 태양의 아들로서의 인류에의 연민을 실감해 봄이 없이 시인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3. 내가 저자라면

시인 신동엽의 시는 나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또 한편으로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단지 자신의 마음 속의 여린 슬픔이 아닌 우리 민족의 피 끓는 역사적 아픔을 '금강'이란 대작의 시로 노래했던 그는 이런 자신의 역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껍데기는 가라'며 혁명하라고 외쳤으며,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하며 한탄하기도 했다.

'종로5가'에서 낯선 소년의 눈동자를 보고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연결하며 고달픈 삶을 슬퍼하기도 했고, 수운과 녹두장군과 같은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꿈꾸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뜨거운 혁명가인 동시에 '산문시1'처럼 평화를 꿈꾸고, '산에 언덕에', '그 사람에게'와 같은 시들을 노래하는 결이 고운 감성을 지녔던 천상, 시인이었다.

그는 아마 때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 순박한 가슴을 가진 시골 청년이었으리라. 모든 것을 꿰뚫을 듯 반짝이는 눈을 가진 지혜로운 시인이었으며, 우리의 삶 속에 가득한 불의와 타락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올곧은 정의를 가슴에 품었던, 더 좋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이 세상을 갈아엎으려 했던 피 끓는 혁명가였으리라. 그는 그가 자신의 글에 썼듯이 "일생을 시로 장식"했으며, "일생을 사랑으로 채"웠으며, "일생을 혁명으로 불질"렀다. 그러나 그의 몸은 질곡의 현대사를 짊어지고 나가기엔 너무 약했고, 그는 그렇게 짧지만 반짝이는 삶을 살다 '담배연기처럼' 사라졌다.

그의 시와 글을 읽으면서 '시'와 '사랑'과 '혁명'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하루를 허비하고, 변하지 않을 것처럼 일생을 산다. 그러나 우리는 늘 변화하는 강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어느 한 순간, 방심하고 있던 우리를 변화의 강물이 덮친다. 그러나 그 변화는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늘 일상을 함께 하던 삶의 강물 속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나 혼자 사는 것처럼 인생을 살고,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내가 못 가진 것들을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불의를 보고는 우리의 무기력함을 핑계 삼으며, 못 본 척 하고 지나치고, 고작 달마다 받는 월급이라는 마약에 취해 일상을 버텨나간다. 하루 하루, 점점 작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의 시구처럼, 그렇게…

"우리들은, 꿀 먹은 벙어리 / 눈은 반쯤 감고, 月給의 / 행복에 젖어 / 하루를 / 산다."

그러나 오늘의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니다. 내일의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너이다. 나는 우리이다. 나는 어제의 희망이고, 지나간 이들의 꿈이며, 그들이 흘린 핏덩이이다.

검은 강처럼, 눈부신 햇살처럼 시는, 사랑은, 혁명은 그렇게 불현듯, 느닷없이, 갑자기 다가온다. 순식간에 다가와 우리의 가슴을 열어젖히고 '존재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러나 마음이 굳게 닫혀 있다면, 세상사에 찌들어 순정을 잃었다면, 자신을 길 가 어딘가에서 잃어버렸다면, 우리의 '금강'같은 역사를 알지 못한다면,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있지 않는다면 그 변화의 요구는 그냥 자신을 슬며시 스쳐 지나가거나, 덧없는 욕정처럼 우릴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가버릴지도 모른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아차, 하는 순간에...

지나간 뒤에 그리워해야 소용없다. 떠나간 뒤에 후회해봐야 소용없다. 하지만 늘 깨어있는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세상에 물들지 않고 버텨낸다는 것은,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시로, 사랑으로, 혁명으로 일생을 가득 채운다는 것은 우리 같은 보통사람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만약, 흘러가는 저 강물처럼 살 수 있다면, 떠가는 저 구름처럼 살 수 있다면, 늘 변화하며 살 수 있다면, 매일 죽으면서 살 수 있다면, 매일 새롭게 태어나며 살 수 있다면, 무엇보다 내가 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산다는 것은 매일 매일이 새로운 또 하나의 즐거운 놀이가 될지도 모른다.

시란 무엇일까? 심각한 동시에 가벼운 것, 진지한 동시에 유치한 것, 피 흘리는 민중의 삶과 한 떨기 '원추리' 꽃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 비에 젖은 소년의 가난한 눈동자와 일을 마친 뒤, 푸른 바다 같은 휴식의 즐거움 사이, 피 흘리는 시체들의 한과 마구 내달리는 들뜬 신명 사이, 그 엄청난 간격 사이에 시가 흐르고 있다. 그 유유한 강물 속에 사랑이 있다. 혁명이 있다. 삶이 있다. 놀이가 있다. 내가 있다. 그리고 네가 있다. 역사가 있다. 현재가 있다. 미래가 있다.

이제껏 나는 과거는 지나가버린 것인 줄, 미래는 앞으로 다가올 것인 줄로만 알았다. 역사는 역사이고, 미래는 미래일 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역사는 미래였다. 미래는 과거였다. 현재는 바로 나였다. 내가 바로 너였다. 그렇게 내가 찾고 있는 답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다른 곳에 있었다. 멈춰 있는 것이 아닌 살아 있는 것에 있었다. 시는 억지로 쓰는 것이 아니다. 시는 '살아야' 하는 그 무엇이었다. 시인이 말했듯 '시'는 바로 '생명의 발현'이었다.

언젠가 사부님의 10대 풍광에서 우리의 역사를 서사시로 써내고 싶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또 한때, 신동엽 시인의 시를 사랑했다는 글도 읽었다. 사부님께선 "금강"처럼 꿈틀 꿈틀거리는 우리 민족의 맥박을 짚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피와 땀으로 이뤄진 치열한 역사의 흐름을 유장한 언어로 담아내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나도 언젠가 신동엽 시인처럼 '동학' 혁명을 풀어낸 글을 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나의 심장 속에 흐르는 그 꿈틀거림의 핏줄기를 따라가보면 그 곳에 우리의 역사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명의 매캐한 매연 너머 '구름 한송이 없이 맑은 하늘'이 원시림처럼 찬란하게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 곳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하늘님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막연한 예감이 든다. 괜스레 가슴이 울렁거린다. 가을인가보다.



IP *.60.237.51

프로필 이미지
dormouse
2007.10.29 10:44:05 *.60.237.51
오늘아침, 시골청년 덕분에 여러 마음을 느껴보았습니다.
창문을 여니, 시원한 공기와 파란 하늘이 함께 들어오네요.
프로필 이미지
김도윤
2007.10.29 13:09:14 *.249.162.56
잠쥐님, 오랜만입니다^^ 시골청년은 저인가요. 시인인가요?
덕분에 맑은 공기를 마셨다면 다행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한정화
2007.10.31 08:30:34 *.72.153.12
꼭 다 읽고 싶은데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느라 반밖에 못 읽었다.
인용 앞부분 읽으면서 시인과 도윤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신이 공감하는 부분을 인용으로 끌어왔겠지만, 인용이 리뷰자를 나타내기도 하고, 리뷰자가 꿈꾸는 세상을 나타내기도 하니까.

천 갈래의 길이 있다고 해도 그것들 모두를 탐하고, 또 그것들 중에 자신과 가장 맞는 하나만을 탐하는 예술가 이기도 하니까.

도윤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좋다고 한 읽는이의 탐심. ^^*
프로필 이미지
도윤
2007.10.31 15:38:47 *.249.162.56
'내가 저자라면'을 다시 읽어봤는데, 이때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썼는지 잘 모르겠다. 좀 무책임하지만 그렇다.

가끔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쓴다. 그러면 과연 시인은 자신이 알기 때문에 쓰는 것일까? 과연 그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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