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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Joseph Campbell - 민음사 (이윤기 옮김)
1. 저자에 관하여
Joseph Campbell ( 1904년 3월 26일 - 1987년 10월 31일 )
미국의 신화 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로서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리 우며, 평생을 서로 다른 문화권 신화와 종교의 공통되는 현상과 기능을 연구해 왔다. 어린 시절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화를 접하고 문화적 접촉이 전혀 없었던 이들 민화와 아서왕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및 뭔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파리 대학과 뭔헨 대학에서는 중세 프랑스어와 산크리스트 어를 공부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존 스타인백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츠 생물학자와 교류하였다. 1934년에는 캔트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이후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된 뒤 신화의 원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시작하였는데, 그 중 신화적 인물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융파 심리학의 입장 - 인간은 무의식 속에다 고대적 경험의 잔존물인 집단 무의식의, 꿈의 구조물인 원형 패턴은 곧 고대의 잔존물인 신화 상징을 나타낸다는- 을 원용하면서 다양한 영웅 전설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운동을 규명하는 한편 현대문명에 대해 하나의 재생원리까지 제시하려는 작품이다. 그는 본 서에 신화, 옛이야기, 동화, 민간 전승, 역사적인 기록, 학술 조사서를 가리지 않고 영웅이면 모두 등장시킨다. 그는 특정 영웅이 누비던 시대는 물론, 그 영웅 이야기가 허구인지 실재인지도 문제 삼지 않는다.
또한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마마큐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신의 가면] 전 4권을 펴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신화의 힘]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야생수거위의 비행] [신화이미지]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1904년 3월 26일 뉴욕 출생
1925년 콜럼비아 대학교 졸업
1927년 콜럼비아 대학교 영문학 석사과정 수료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교수로 재직
1949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발표
1959~1967년 <신의 가면> 1~4 권 집필
1987년 10월 31일 호놀룰루에서 사망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신화의 힘> 중에서) -Joseph Campbell-
이윤기 [역자]
- 1947년 경북 군위출생, 소설가 번역가
-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하얀 헬리콥터’로 등단
- 순천향대학교 문학 명예박사
- 성결교신학대학 신학대학원
- 미국 미시간 대학 문화 인류학 객원교수
- 미국 미시간주립 대학 종교학 초빙 연구원(1991-1996)
- 제29회 동인문학상, 제4회 한국번역가상 (2000년), 제8회 대산 문학상(2000)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6]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 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경은, ‘진리는 하나 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The Mono myth (원질 신화)
[17]유아가 죽음과 사랑의 충동을 구분하는 숙명적인 행위는 지금의 널리 알려진 오디푸스 콤플랙스의 바탕을 형성한다. 프로이트는 50년 전에 성인이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오디푸스 콤플랙스로 지적한 바 있다.
[21]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23]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드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30[ 해탈 혹은 물러섬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신 분석학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이 영역이 바로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잠잘 때 들어가는 곳이 바로 이영역이라는 것이다.
[38]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울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39]한동안 육체에 깃드는 영속적인 생명의 원리와 합일하며, 실재가 허깨비로 분장(고통받는 자와 보이지 않는 원인을 하고 있을 동안, (인간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는 비극) 이 우리의 필멸의 육체를 찢고 해체할 때, 우리들 자신은 바로 그 밑바닥으로 녹아 들어간다.
[43]신화와 동화 고유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환상적이며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
[45]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50]곧 알게 되겠지만, 대양을 방불케 하는 동양의 광대한 이미지로 표현되든, 그리스의 웅장한 서사시로 표현되든, 아니면 장엄한 성서의 이야기로 표현되든,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52]원질신화의 복합적인 영웅은 예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이 영웅은 사회의 존경을 받기도하고, 무시당하거나 경멸을 당하기도 한다. 영웅과 그가 속한 세계는 상징적이 어떤 장애로 고통을 받는다. 동화일 경우 이러한 장애는 금반지 하나가 사라졌다는 등 가벼운 이야기이지만, 묵시록 적 이야기에는 온 세상의 심리적, 정신적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거나 떨어진 판국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53]보잘 것 없는 영웅이든, 이방인의 영웅이든, 유태족의 영웅이든, 영웅의 행장에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잣거리에 나도는 이야기는 영웅의 행위를 주로 물리적으로 그려내지만, 고급 종교에서는 영웅의 행적이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험의 형태, 등장인물의 역할, 마침내 얻는 승리의 내용물에는 놀라울 정도로 별 차이가 없다.
[55]영웅의 성공적인 의미는, 생명의 흐름의 기적은 다시 한 번 세계의 몸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 이 흐름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음식물의 순환,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현현(顯現)을 나타내는 듯 하다.
제1부 영웅의 모험
[71]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97]동화에서, 영웅에게 나타나 영웅에게 필요한 호부(액막이)를 주거나 충고해 주는 것은 숲속의 난장이, 마법사, 은자, 목동, 혹은 대장장이인 것이 보통이다. 고급 신화에서는 이 역할을 맡는 조력자는 스승, 나룻배 사공, 영혼을 내세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발전한다. -- 그런 조력자를 맞는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통고다.
[105]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고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부모의 감시 밖이 아이들에겐 위험지역이고, 사회의 보호 밖이 종족의 구성원들에겐 위험 지역인 것과 마찬가지다.
[119]우리가 오감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계의 상징, 그리고 육체적인 어느 기관에 의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인 그 도깨비는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무기로 더 이상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 번째 무기가, 명(名)과 형(型0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여기에서 상황은 일전한다. 태자에게 도깨비는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손에서 벗어난다. 그는 이제 영원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뿐만 아니다. 현상계의 마력이 무너지자 그는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그는 신(보시를 받을 자격이 되는 신적인 정령)이 된다.
[120]영웅은, 그 관문을 지키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화해하는 대신, 그 미지의 힘에 빨려들어, 겉보기에는 죽은 것으로 나타나곤 한다. 세계 도처에서 채집되는 이러한 모티브는, 관문의 통과가 자기 적멸(自己寂滅)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124]자아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과 회귀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로 창조되지 않는 불멸의 존재임을 드러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p128]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와 모험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32]우리는 모든 원시 종족에서 주술사가 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주술사가 신경증적, 혹은 정신병적이거나, 아니면 그이 주술이 신경증이나 정신병과 같은 메카니즘에 바탕을 도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응될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 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 libidinal tie를 강화하고 있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잡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135]꿈꾸는 사람의 특수한 정신병적 장애는 곧잘 감정적인 성실성이나 힘으로 나타나는 수가 있다.
[138]꿈꾸는 사람은 철저하게 유리되어 깊은 지하 감방에 홀로 방치되어 있다. 그 방의 벽과 벽 사이가 점점 좁아지다가 이윽고 꿈꾸는 사람은 꼼짝도 못하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어머니의 자궁, 감옥, 그리고 무덤의 이미지에 관련되어 있다.
[139]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으로 들어가려고 하느냐.(코란)
[143]영웅은 자기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남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144]모든 장애물이 극복되고 도깨비가 퇴치되었을 때 영웅이 치르는 마지막 모험은, 승리한 영웅과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스러운 혼례로 표상된다.
[145]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 이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이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애조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도니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 때 이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았던 좋은 어머니(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우리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그녀는 영원한 잠에 빠져든 미녀처럼, 아직 우리 속 여원의 바다 밑바닥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153]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하여 해방된다.
[157]여신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단계다. 이 사라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160]도깨비들이란, 자기 인간성의 미해결 수수께끼가 투영된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개인이 자기 삶을 파악하는 징후인 것이다.
[177]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 시켜준다. 한 아이가 자라, 어머니의 품속의 목적인 자장가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 때, 이 아기는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세상을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때 마땅히 거쳐 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머니가 그때까지[산]과 [악]을 표상하고 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
[192]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키레우스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웅은영혼의 문을 열어 공포를 극복하고 이 광대무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근엄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해야 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를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그가 화해했음을 안다.
[198]시간(결코 끝나지 않는)이 끝나는 순간까지 앞서서 잔잔한 영원의 강으로 뛰어들겠다는 각오로 열반의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은, 겁과 찰나의 구별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한 마음에 대한 완전한 지식 안에서 용해되어 버린다. 이 때 체득되는 것은, 찰라와 영원이, 같은 경험에 대한 두 가지 측면들이라는 사실이다.
[207]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인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게 가능하게 된다. 구세주가 전해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고, 힘써 전파했지만 실천만을 끝내 꺼렸던 보음은 하느님은 사랑이며, 하느님은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며,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그의 아이들임을 가르치고 있다. 자질구레한 신조, 예배의 방법, 교회 행정조직의 설ㄹ비 같은 비교적 사소한 문제들(서양신학자들은 여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를 부슨 중요한 종교문제인양 덤빈다.)은 지켜지지 않을 경우 가르치는 일 자체에 부수적인 문제가 생기는 정도의 현학적인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
[249]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253]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영웅에게 지혜의 시문 황금양털, 혹은잠자는 미녀를 인간의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 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전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
시키는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257]승리한 여신이나 신의 축복을 획득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구원할 불사약을 가지고 원상 복귀할 대목이 되면, 영웅 모험의 이 최종 단계에서 초자연적인 후원자에 의한 지원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만일 전리품이 그 수호자의 의지에 반한 상태에서 영웅의 손에 들어갔거나, 영웅의 귀환의사가 신이나 악마의 찬성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이 신화 주기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격렬한, 때로는 익살스러운 추격전이 벌어진다. 마법의 장애물이 신비스러운 것이면 신비스러운 것일수록, 영웅의 도피가 교묘하면 교묘할수록, 이 탈출과 저지의 양상은 그만큼 복잡해진다.
[262]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에서 또 하나 자주 등장하는 방법은, 도망치는 영웅이 끊임없이 장애물을 던져 추격을 지연시키는 방법이다.
[280]영웅은 의식을 잃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원래 그가 살던 세계로 되살아난다.
[불가사의한 도망]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웅은 자아를 지키는 대신 자아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조력자의 은혜로 영웅은 자아를 되찾는다. 신화영역에서 영웅의 역설적이고 험난한 관문 통과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뿐만 아니라 천신마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했던 사회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1]영웅의 귀환은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기꺼이 이 일을 맡든, 어쩔 수 없어서 맡게 되든, 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1]영웅이 당면하는 관문의 첫 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313]탈리에 신은 마귀를 두려워했지만, 바로 그 마귀에 의해 삼켜졌고 그래서 재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325]오늘날 지식인들에게, 신화의 상징체계가 지닌 심리학적 의미를 감지해 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정신분석학자들의 연구가 있은 후 , 신화가 꿈의 내용물로 이어졌으며, 금이란 정신 역동의 증후라는 사실에는 별 의혹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326]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이(신화)를 적절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오늘날의 세계에, 인간의 특징적 심층에 관한 풍부하고 웅변적인 자료를 장만해 주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투시경으로 소개하는 예화들은 동양과 서양, 미개인 및 문명인, 현대 및 고대[호모사피엔스]의 수수께끼 에 관해 지금까지 묻혀있던 사실을 밝혀준다. 그 전경은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이를 읽고, 그 일정한 패턴을 연구하고, 그 다양성을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의 운명을 조명해 왔고, 앞으로도 우리 사적, 공적인 삶을 주관해 나갈 그 무서운 힘을 f이해해야 할 것이다.
[326]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 언어로 가능하다.
[327]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 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원리는 인간의 육체의 형태 및 신경 구조처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유전된 것이다.
[331]구원은 초 의식으로의 귀환과, 이 에 따른 세상의 소멸에 있다. 이것은 우주 발생적 순환, 세계 현현의 신화적 이미지, 그리고 비현현 상태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중요한 테마 및 공식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탄생, 삶, 죽음은 무의식으로의 하강 및 회귀로 볼 수 있다. 영웅은, 살아 있을 동안에, 창조 과정 중에는 지각되지 않는 초의식의 요구를 알고 이를 대리하는 작가다.
[338[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즉 태양의 조명을 받고, 만물에 공통된 외계 우주의 험난하고 총체적인 사실들을 인식하는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즉 꿈을 꾸는 당사자와는 본질상 동일한 개인적인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다.
[339]보이지 않고, 말할 수 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추정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다. 의식상태에 있는 만물이 공유하는, 자기 인식의 본질. 현상계는 이 안에서 소멸한다. 이는 평화요, 행복이요 [둘이 아닌 것이다.] 신화는 이 순환 속에 머문다. 그러나 신화는 이 순환의 침묵에 둘러싸인 형태, 순환과 침묵이 서로 삼투하는 형태로 드러낸다. 신화는 존재하는 안팎에 충만해 있는 침묵의 계시록이다.
[356]신비주의자는 자기 내부로 명상해 들어감으로써, 원초적인 양성 상태인 이 심오하고 영속적인 존재를 만난다.
[358]신화는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하나의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의 능력은 스스로 기능해 나간다. 다른 한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는 주도권을 포기하고 우주 순환의 다음 단계에서 등을 돌려버린다. 후자의 신화 양식에서 나타난 어려움은 오랜 원초적 암흑이 계속될 동안, 창조된 지식이 우주적 어머니의 품 안에 있을 때 이미 시작 되었다.
[402]실제 역사적 인물의 행위가 영웅적인 것이었다면, 이 전설을 만드는 사람은 그를 위해 영웅의 모험과 그 심도가 유사한 정도의 모험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모험이 바로 초자연적인 영역으로의 여행인데 이 여행이 독자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라는 밤바다로의 여행,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삶으로 구체화하는 인간의 운명의 측면, 혹은 영역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441]무섭고 잔인한 폭군은 그가 폐위시킨 예전의 군주나 그를 제거할 영리한 군주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까지 표상한다.
[477]신화체계는 진실만 말하는 고대의 해신 프로테우스와 같다. 이 해신은 땅에서 기는 모든 생물, 물속에 사는 모든 생물, 심지어 타오르는 불꽃에게도 말을 시킬 수 있고 그와 똑같이 변신할 수도 있다. 프로테우스로부터 배우기를 바라는 삶의 항해자는 그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를 조여야 한다. 그러면 그는 온전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교활한 신은 아무리 재주 있는 질문자에게라도 그 질문자에게 자신의 지혜를 전부 드러내는 법이 없다.
[478]신화에 대한 각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본다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480]종교적인 제의의 가장 중용한 동기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이러한 동기는 계절적 축제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485]세속적인 국가의 보편적 승리는 오든 종교조직을 부수적인, 필경은 무익한 위치로 끌러내려, 오늘날에는 종교적 무언극이 일요일 아침에 벌이는, 경건한 체하는 종교 놀음에서 더도 덜도 아니게 되고 말았다. 나머지 6일간은 물론 기업윤리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들이 판을 친다. 그러한 가짜 신앙은 제대로 기능하는 세계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보다 필요한 것은 전체 사회 질서의 진화다. 그래야 세속적인 삶의 의무와 행위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실제로 내제하고 또 그 만큼 효과적인, 부편적인 신인의 이미지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이를 의식화 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86] 진리는 하나 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
[488]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했다. 창조적인 영웅이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화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 )을 부담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역자의 후기에 ‘사상이 덜 여문 독자의 방전 현상’이란 글귀가 있다. 이것저것 집적거리며 여신(餘燼)으로만 사물을 파악하게 하는 편집증에 대한 우려함이다.
역자의 우려함이 나에게 해당됨인가 해서 저자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나는 20대 초반의 풋풋한 대학생이 되었기에 묻고 답함에 꺼리 낌이 없었다. 노학자는 스승이자 할아버지, 사부님이었다. 그는 넉넉한 미소로 답해주었고 나의 의견을 경청해 주었으며 내가 이야기하는 우리의 신화나 전설, 동화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솔직했고 재미있는 이야기꾼이었으며 고 문집 편집자였다.
앞서 저자 탐색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그는 본 서에 신화, 옛이야기, 동화, 민간 전승, 역사적인 기록, 학술 조사서를 가리지 않고 영웅이면 모두 등장시킨다. 그는 특정 영웅이 누비던 시대는 물론, 그 영웅 이야기가 허구인지 실재인지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가 풀어놓은 온갖 형태의 영웅 이야기는 흡사 박물장수의 보자기에서 쏟아져 나온 것과 같았다.
그가 우리 앞에 보자기를 풀어놓은 목적은 명확했다. 수많은 것들에서 유사성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 유사성은 보는 이에 따라서 수많은 기준을 가질 수 있기에 그는 ‘융의 심리학 입장’이라는 기준을 제시했으며 유사성을 찾아내는 최종 목적은 다음에 있다고 했다.
[6]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 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경은, ‘진리는 하나 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저자는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들을 하나의 틀 속에 고정 시킨다. 그의 주에 따르면 디오니소스의 이야기든, 부다의 이야기든 동화 속의 왕자 공주의 이야기든 모든 영웅들은 일정한 영웅들의 싸이클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서로 접촉이 없는 세계 각 문화권의 무수한 영웅 신화와 심층 심리학의 꿈 해석에서 재발견 되는 영웅의 상징 체계는 ‘동일’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 ‘동일’이라는 이름은 끝없이 우리 의식의 내부로 향하고 있다.
[55]영웅의 성공적인 의미는, 생명의 흐름의 기적은 다시 한 번 세계의 몸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 이 흐름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음식물의 순환,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현현(顯現)을 나타내는 듯하다.
나는 ‘캠벨 이야기에서의 3가지 편견’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이야기를 읽어나갔다.
첫째는 ‘융의 심리학’의 입장에서 시작 한다는 점에 있어서이고, 다음은 ‘유사성’의 시각에서의 출발이었으며 마지막은 이야기들의 ‘신빙성’에 관한 것이었다.
첫째의 것은 ‘신화’를 읽는 방법에서다.
‘신화’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뭘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다.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다. 캠벨은 융의 입장을 선택했다. 시각의 한계점이 보인다.
두 번째 ‘유사성에 둔 기준’이다. 사물은 분류기준에 따라서 그 소속이 달리 된다. ‘참외’라는 과일을 두고 보자. 외형적 기준에서 색깔을 중심으로 분류할 때는 노란색 끼리 모인다. 그러나 ‘과일’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된다면 이의 소속은 또 달라진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직업군으로 분류될 때와 ‘성’ 또는 나이 등으로 분류될 때마다 소속이 달리 된다.
마지막은 ‘신빙성’에 관한 것이며 덧붙인다면 ‘자료 수집에 관한 제한점’까지 곁들인다. 이야기는 이야기 인만큼 ‘신빙성’에 크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신빙성보다 그 이야기가 가지는 의미나 목적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낫겠다. ‘재미’에 목적이 있다면 우리를 흥미롭게 한다면 그만이고 ‘외로움’이나 ‘두려움’에 대한 위안이라면 위안을 주는 것이면 만족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모여 우산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색깔을 투영할 때 일어나는 ’착시‘현상의 문제점이 따른다는 것이다.
역자가 우려했듯이 나는 덜 여물어도 아주 덜 여문 독자다. 동시에 이 책은 일주일 정도의 단시간에 읽은 것이다. 책이 나에게 다가온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내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저자에게 다가갔을 지라도 단거리 선수의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일주일간의 저자와의 여행에 그가 가진 깊은 매력은 찾아낸 셈이다.
저자가 ‘이야기 속의 영웅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 시도는 색다르다. 수많은 신화나 이야기 속에서 유사성을 찾아내어 새롭게 그려 낸 일은 ‘영웅’ 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가 이야기 하는 영웅의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HERO'의 형태의 거대한 몸집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오롯이 녹아 있는 ’hero'의 모습이다. 그것이 아프리카에서 왔던 문명의 제국에서 왔던 그들은 우리 의식 속에 흐르고 있는 ‘그것’으로 통한다. 그들은 결코 ‘미신’이라든가 ‘세련된 종교’라든가 하는 것으로 ‘패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저자가 이야기 하는 ‘그것’은 사명을 띠고 있다. 집단 속에서 ‘나’가 아닌 거대한 우주 속에서 ‘개인’이라는 이름으로 유리되어 방황하고 있는 우리를 ‘영웅’이라는 하나의 집단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집단속의 영웅이 곤란에 처할 때는 그를 구원하는데 힘을 가하고 ‘나’는 영웅의 그늘 안에서 함께 함에 위안이라는 것을 얻을 수 있게 함이다. 일생의 연구과정이 오롯이 녹아 있는 저자의 대작이 좀 더 진하게 나의 속에 녹아드는 여유로움을 가지는 날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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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관하여
Joseph Campbell ( 1904년 3월 26일 - 1987년 10월 31일 )
미국의 신화 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로서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리 우며, 평생을 서로 다른 문화권 신화와 종교의 공통되는 현상과 기능을 연구해 왔다. 어린 시절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화를 접하고 문화적 접촉이 전혀 없었던 이들 민화와 아서왕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및 뭔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파리 대학과 뭔헨 대학에서는 중세 프랑스어와 산크리스트 어를 공부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존 스타인백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츠 생물학자와 교류하였다. 1934년에는 캔트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이후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된 뒤 신화의 원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시작하였는데, 그 중 신화적 인물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융파 심리학의 입장 - 인간은 무의식 속에다 고대적 경험의 잔존물인 집단 무의식의, 꿈의 구조물인 원형 패턴은 곧 고대의 잔존물인 신화 상징을 나타낸다는- 을 원용하면서 다양한 영웅 전설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운동을 규명하는 한편 현대문명에 대해 하나의 재생원리까지 제시하려는 작품이다. 그는 본 서에 신화, 옛이야기, 동화, 민간 전승, 역사적인 기록, 학술 조사서를 가리지 않고 영웅이면 모두 등장시킨다. 그는 특정 영웅이 누비던 시대는 물론, 그 영웅 이야기가 허구인지 실재인지도 문제 삼지 않는다.
또한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마마큐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신의 가면] 전 4권을 펴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신화의 힘]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야생수거위의 비행] [신화이미지]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1904년 3월 26일 뉴욕 출생
1925년 콜럼비아 대학교 졸업
1927년 콜럼비아 대학교 영문학 석사과정 수료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교수로 재직
1949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발표
1959~1967년 <신의 가면> 1~4 권 집필
1987년 10월 31일 호놀룰루에서 사망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신화의 힘> 중에서) -Joseph Campbell-
이윤기 [역자]
- 1947년 경북 군위출생, 소설가 번역가
-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하얀 헬리콥터’로 등단
- 순천향대학교 문학 명예박사
- 성결교신학대학 신학대학원
- 미국 미시간 대학 문화 인류학 객원교수
- 미국 미시간주립 대학 종교학 초빙 연구원(1991-1996)
- 제29회 동인문학상, 제4회 한국번역가상 (2000년), 제8회 대산 문학상(2000)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6]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 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경은, ‘진리는 하나 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The Mono myth (원질 신화)
[17]유아가 죽음과 사랑의 충동을 구분하는 숙명적인 행위는 지금의 널리 알려진 오디푸스 콤플랙스의 바탕을 형성한다. 프로이트는 50년 전에 성인이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오디푸스 콤플랙스로 지적한 바 있다.
[21]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23]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드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30[ 해탈 혹은 물러섬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신 분석학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이 영역이 바로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잠잘 때 들어가는 곳이 바로 이영역이라는 것이다.
[38]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울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39]한동안 육체에 깃드는 영속적인 생명의 원리와 합일하며, 실재가 허깨비로 분장(고통받는 자와 보이지 않는 원인을 하고 있을 동안, (인간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는 비극) 이 우리의 필멸의 육체를 찢고 해체할 때, 우리들 자신은 바로 그 밑바닥으로 녹아 들어간다.
[43]신화와 동화 고유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환상적이며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
[45]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50]곧 알게 되겠지만, 대양을 방불케 하는 동양의 광대한 이미지로 표현되든, 그리스의 웅장한 서사시로 표현되든, 아니면 장엄한 성서의 이야기로 표현되든,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52]원질신화의 복합적인 영웅은 예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이 영웅은 사회의 존경을 받기도하고, 무시당하거나 경멸을 당하기도 한다. 영웅과 그가 속한 세계는 상징적이 어떤 장애로 고통을 받는다. 동화일 경우 이러한 장애는 금반지 하나가 사라졌다는 등 가벼운 이야기이지만, 묵시록 적 이야기에는 온 세상의 심리적, 정신적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거나 떨어진 판국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53]보잘 것 없는 영웅이든, 이방인의 영웅이든, 유태족의 영웅이든, 영웅의 행장에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잣거리에 나도는 이야기는 영웅의 행위를 주로 물리적으로 그려내지만, 고급 종교에서는 영웅의 행적이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험의 형태, 등장인물의 역할, 마침내 얻는 승리의 내용물에는 놀라울 정도로 별 차이가 없다.
[55]영웅의 성공적인 의미는, 생명의 흐름의 기적은 다시 한 번 세계의 몸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 이 흐름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음식물의 순환,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현현(顯現)을 나타내는 듯 하다.
제1부 영웅의 모험
[71]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97]동화에서, 영웅에게 나타나 영웅에게 필요한 호부(액막이)를 주거나 충고해 주는 것은 숲속의 난장이, 마법사, 은자, 목동, 혹은 대장장이인 것이 보통이다. 고급 신화에서는 이 역할을 맡는 조력자는 스승, 나룻배 사공, 영혼을 내세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발전한다. -- 그런 조력자를 맞는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통고다.
[105]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고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부모의 감시 밖이 아이들에겐 위험지역이고, 사회의 보호 밖이 종족의 구성원들에겐 위험 지역인 것과 마찬가지다.
[119]우리가 오감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계의 상징, 그리고 육체적인 어느 기관에 의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인 그 도깨비는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무기로 더 이상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 번째 무기가, 명(名)과 형(型0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여기에서 상황은 일전한다. 태자에게 도깨비는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손에서 벗어난다. 그는 이제 영원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뿐만 아니다. 현상계의 마력이 무너지자 그는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그는 신(보시를 받을 자격이 되는 신적인 정령)이 된다.
[120]영웅은, 그 관문을 지키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화해하는 대신, 그 미지의 힘에 빨려들어, 겉보기에는 죽은 것으로 나타나곤 한다. 세계 도처에서 채집되는 이러한 모티브는, 관문의 통과가 자기 적멸(自己寂滅)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124]자아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과 회귀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로 창조되지 않는 불멸의 존재임을 드러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p128]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와 모험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32]우리는 모든 원시 종족에서 주술사가 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주술사가 신경증적, 혹은 정신병적이거나, 아니면 그이 주술이 신경증이나 정신병과 같은 메카니즘에 바탕을 도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응될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 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 libidinal tie를 강화하고 있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잡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135]꿈꾸는 사람의 특수한 정신병적 장애는 곧잘 감정적인 성실성이나 힘으로 나타나는 수가 있다.
[138]꿈꾸는 사람은 철저하게 유리되어 깊은 지하 감방에 홀로 방치되어 있다. 그 방의 벽과 벽 사이가 점점 좁아지다가 이윽고 꿈꾸는 사람은 꼼짝도 못하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어머니의 자궁, 감옥, 그리고 무덤의 이미지에 관련되어 있다.
[139]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으로 들어가려고 하느냐.(코란)
[143]영웅은 자기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남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144]모든 장애물이 극복되고 도깨비가 퇴치되었을 때 영웅이 치르는 마지막 모험은, 승리한 영웅과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스러운 혼례로 표상된다.
[145]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 이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이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애조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도니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 때 이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았던 좋은 어머니(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우리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그녀는 영원한 잠에 빠져든 미녀처럼, 아직 우리 속 여원의 바다 밑바닥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153]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하여 해방된다.
[157]여신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단계다. 이 사라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160]도깨비들이란, 자기 인간성의 미해결 수수께끼가 투영된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개인이 자기 삶을 파악하는 징후인 것이다.
[177]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 시켜준다. 한 아이가 자라, 어머니의 품속의 목적인 자장가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 때, 이 아기는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세상을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때 마땅히 거쳐 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머니가 그때까지[산]과 [악]을 표상하고 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
[192]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키레우스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웅은영혼의 문을 열어 공포를 극복하고 이 광대무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근엄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해야 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를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그가 화해했음을 안다.
[198]시간(결코 끝나지 않는)이 끝나는 순간까지 앞서서 잔잔한 영원의 강으로 뛰어들겠다는 각오로 열반의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은, 겁과 찰나의 구별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한 마음에 대한 완전한 지식 안에서 용해되어 버린다. 이 때 체득되는 것은, 찰라와 영원이, 같은 경험에 대한 두 가지 측면들이라는 사실이다.
[207]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인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게 가능하게 된다. 구세주가 전해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고, 힘써 전파했지만 실천만을 끝내 꺼렸던 보음은 하느님은 사랑이며, 하느님은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며,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그의 아이들임을 가르치고 있다. 자질구레한 신조, 예배의 방법, 교회 행정조직의 설ㄹ비 같은 비교적 사소한 문제들(서양신학자들은 여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를 부슨 중요한 종교문제인양 덤빈다.)은 지켜지지 않을 경우 가르치는 일 자체에 부수적인 문제가 생기는 정도의 현학적인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
[249]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253]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영웅에게 지혜의 시문 황금양털, 혹은잠자는 미녀를 인간의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 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전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
시키는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257]승리한 여신이나 신의 축복을 획득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구원할 불사약을 가지고 원상 복귀할 대목이 되면, 영웅 모험의 이 최종 단계에서 초자연적인 후원자에 의한 지원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만일 전리품이 그 수호자의 의지에 반한 상태에서 영웅의 손에 들어갔거나, 영웅의 귀환의사가 신이나 악마의 찬성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이 신화 주기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격렬한, 때로는 익살스러운 추격전이 벌어진다. 마법의 장애물이 신비스러운 것이면 신비스러운 것일수록, 영웅의 도피가 교묘하면 교묘할수록, 이 탈출과 저지의 양상은 그만큼 복잡해진다.
[262]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에서 또 하나 자주 등장하는 방법은, 도망치는 영웅이 끊임없이 장애물을 던져 추격을 지연시키는 방법이다.
[280]영웅은 의식을 잃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원래 그가 살던 세계로 되살아난다.
[불가사의한 도망]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웅은 자아를 지키는 대신 자아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조력자의 은혜로 영웅은 자아를 되찾는다. 신화영역에서 영웅의 역설적이고 험난한 관문 통과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뿐만 아니라 천신마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했던 사회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1]영웅의 귀환은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기꺼이 이 일을 맡든, 어쩔 수 없어서 맡게 되든, 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1]영웅이 당면하는 관문의 첫 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313]탈리에 신은 마귀를 두려워했지만, 바로 그 마귀에 의해 삼켜졌고 그래서 재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325]오늘날 지식인들에게, 신화의 상징체계가 지닌 심리학적 의미를 감지해 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정신분석학자들의 연구가 있은 후 , 신화가 꿈의 내용물로 이어졌으며, 금이란 정신 역동의 증후라는 사실에는 별 의혹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326]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이(신화)를 적절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오늘날의 세계에, 인간의 특징적 심층에 관한 풍부하고 웅변적인 자료를 장만해 주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투시경으로 소개하는 예화들은 동양과 서양, 미개인 및 문명인, 현대 및 고대[호모사피엔스]의 수수께끼 에 관해 지금까지 묻혀있던 사실을 밝혀준다. 그 전경은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이를 읽고, 그 일정한 패턴을 연구하고, 그 다양성을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의 운명을 조명해 왔고, 앞으로도 우리 사적, 공적인 삶을 주관해 나갈 그 무서운 힘을 f이해해야 할 것이다.
[326]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 언어로 가능하다.
[327]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 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원리는 인간의 육체의 형태 및 신경 구조처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유전된 것이다.
[331]구원은 초 의식으로의 귀환과, 이 에 따른 세상의 소멸에 있다. 이것은 우주 발생적 순환, 세계 현현의 신화적 이미지, 그리고 비현현 상태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중요한 테마 및 공식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탄생, 삶, 죽음은 무의식으로의 하강 및 회귀로 볼 수 있다. 영웅은, 살아 있을 동안에, 창조 과정 중에는 지각되지 않는 초의식의 요구를 알고 이를 대리하는 작가다.
[338[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즉 태양의 조명을 받고, 만물에 공통된 외계 우주의 험난하고 총체적인 사실들을 인식하는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즉 꿈을 꾸는 당사자와는 본질상 동일한 개인적인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다.
[339]보이지 않고, 말할 수 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추정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다. 의식상태에 있는 만물이 공유하는, 자기 인식의 본질. 현상계는 이 안에서 소멸한다. 이는 평화요, 행복이요 [둘이 아닌 것이다.] 신화는 이 순환 속에 머문다. 그러나 신화는 이 순환의 침묵에 둘러싸인 형태, 순환과 침묵이 서로 삼투하는 형태로 드러낸다. 신화는 존재하는 안팎에 충만해 있는 침묵의 계시록이다.
[356]신비주의자는 자기 내부로 명상해 들어감으로써, 원초적인 양성 상태인 이 심오하고 영속적인 존재를 만난다.
[358]신화는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하나의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의 능력은 스스로 기능해 나간다. 다른 한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는 주도권을 포기하고 우주 순환의 다음 단계에서 등을 돌려버린다. 후자의 신화 양식에서 나타난 어려움은 오랜 원초적 암흑이 계속될 동안, 창조된 지식이 우주적 어머니의 품 안에 있을 때 이미 시작 되었다.
[402]실제 역사적 인물의 행위가 영웅적인 것이었다면, 이 전설을 만드는 사람은 그를 위해 영웅의 모험과 그 심도가 유사한 정도의 모험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모험이 바로 초자연적인 영역으로의 여행인데 이 여행이 독자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라는 밤바다로의 여행,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삶으로 구체화하는 인간의 운명의 측면, 혹은 영역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441]무섭고 잔인한 폭군은 그가 폐위시킨 예전의 군주나 그를 제거할 영리한 군주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까지 표상한다.
[477]신화체계는 진실만 말하는 고대의 해신 프로테우스와 같다. 이 해신은 땅에서 기는 모든 생물, 물속에 사는 모든 생물, 심지어 타오르는 불꽃에게도 말을 시킬 수 있고 그와 똑같이 변신할 수도 있다. 프로테우스로부터 배우기를 바라는 삶의 항해자는 그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를 조여야 한다. 그러면 그는 온전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교활한 신은 아무리 재주 있는 질문자에게라도 그 질문자에게 자신의 지혜를 전부 드러내는 법이 없다.
[478]신화에 대한 각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본다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480]종교적인 제의의 가장 중용한 동기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이러한 동기는 계절적 축제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485]세속적인 국가의 보편적 승리는 오든 종교조직을 부수적인, 필경은 무익한 위치로 끌러내려, 오늘날에는 종교적 무언극이 일요일 아침에 벌이는, 경건한 체하는 종교 놀음에서 더도 덜도 아니게 되고 말았다. 나머지 6일간은 물론 기업윤리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들이 판을 친다. 그러한 가짜 신앙은 제대로 기능하는 세계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보다 필요한 것은 전체 사회 질서의 진화다. 그래야 세속적인 삶의 의무와 행위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실제로 내제하고 또 그 만큼 효과적인, 부편적인 신인의 이미지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이를 의식화 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86] 진리는 하나 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
[488]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했다. 창조적인 영웅이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화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 )을 부담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역자의 후기에 ‘사상이 덜 여문 독자의 방전 현상’이란 글귀가 있다. 이것저것 집적거리며 여신(餘燼)으로만 사물을 파악하게 하는 편집증에 대한 우려함이다.
역자의 우려함이 나에게 해당됨인가 해서 저자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나는 20대 초반의 풋풋한 대학생이 되었기에 묻고 답함에 꺼리 낌이 없었다. 노학자는 스승이자 할아버지, 사부님이었다. 그는 넉넉한 미소로 답해주었고 나의 의견을 경청해 주었으며 내가 이야기하는 우리의 신화나 전설, 동화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솔직했고 재미있는 이야기꾼이었으며 고 문집 편집자였다.
앞서 저자 탐색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그는 본 서에 신화, 옛이야기, 동화, 민간 전승, 역사적인 기록, 학술 조사서를 가리지 않고 영웅이면 모두 등장시킨다. 그는 특정 영웅이 누비던 시대는 물론, 그 영웅 이야기가 허구인지 실재인지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가 풀어놓은 온갖 형태의 영웅 이야기는 흡사 박물장수의 보자기에서 쏟아져 나온 것과 같았다.
그가 우리 앞에 보자기를 풀어놓은 목적은 명확했다. 수많은 것들에서 유사성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 유사성은 보는 이에 따라서 수많은 기준을 가질 수 있기에 그는 ‘융의 심리학 입장’이라는 기준을 제시했으며 유사성을 찾아내는 최종 목적은 다음에 있다고 했다.
[6]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 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경은, ‘진리는 하나 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저자는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들을 하나의 틀 속에 고정 시킨다. 그의 주에 따르면 디오니소스의 이야기든, 부다의 이야기든 동화 속의 왕자 공주의 이야기든 모든 영웅들은 일정한 영웅들의 싸이클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서로 접촉이 없는 세계 각 문화권의 무수한 영웅 신화와 심층 심리학의 꿈 해석에서 재발견 되는 영웅의 상징 체계는 ‘동일’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 ‘동일’이라는 이름은 끝없이 우리 의식의 내부로 향하고 있다.
[55]영웅의 성공적인 의미는, 생명의 흐름의 기적은 다시 한 번 세계의 몸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 이 흐름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음식물의 순환,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현현(顯現)을 나타내는 듯하다.
나는 ‘캠벨 이야기에서의 3가지 편견’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이야기를 읽어나갔다.
첫째는 ‘융의 심리학’의 입장에서 시작 한다는 점에 있어서이고, 다음은 ‘유사성’의 시각에서의 출발이었으며 마지막은 이야기들의 ‘신빙성’에 관한 것이었다.
첫째의 것은 ‘신화’를 읽는 방법에서다.
‘신화’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뭘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다.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다. 캠벨은 융의 입장을 선택했다. 시각의 한계점이 보인다.
두 번째 ‘유사성에 둔 기준’이다. 사물은 분류기준에 따라서 그 소속이 달리 된다. ‘참외’라는 과일을 두고 보자. 외형적 기준에서 색깔을 중심으로 분류할 때는 노란색 끼리 모인다. 그러나 ‘과일’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된다면 이의 소속은 또 달라진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직업군으로 분류될 때와 ‘성’ 또는 나이 등으로 분류될 때마다 소속이 달리 된다.
마지막은 ‘신빙성’에 관한 것이며 덧붙인다면 ‘자료 수집에 관한 제한점’까지 곁들인다. 이야기는 이야기 인만큼 ‘신빙성’에 크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신빙성보다 그 이야기가 가지는 의미나 목적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낫겠다. ‘재미’에 목적이 있다면 우리를 흥미롭게 한다면 그만이고 ‘외로움’이나 ‘두려움’에 대한 위안이라면 위안을 주는 것이면 만족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모여 우산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색깔을 투영할 때 일어나는 ’착시‘현상의 문제점이 따른다는 것이다.
역자가 우려했듯이 나는 덜 여물어도 아주 덜 여문 독자다. 동시에 이 책은 일주일 정도의 단시간에 읽은 것이다. 책이 나에게 다가온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내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저자에게 다가갔을 지라도 단거리 선수의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일주일간의 저자와의 여행에 그가 가진 깊은 매력은 찾아낸 셈이다.
저자가 ‘이야기 속의 영웅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 시도는 색다르다. 수많은 신화나 이야기 속에서 유사성을 찾아내어 새롭게 그려 낸 일은 ‘영웅’ 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가 이야기 하는 영웅의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HERO'의 형태의 거대한 몸집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오롯이 녹아 있는 ’hero'의 모습이다. 그것이 아프리카에서 왔던 문명의 제국에서 왔던 그들은 우리 의식 속에 흐르고 있는 ‘그것’으로 통한다. 그들은 결코 ‘미신’이라든가 ‘세련된 종교’라든가 하는 것으로 ‘패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저자가 이야기 하는 ‘그것’은 사명을 띠고 있다. 집단 속에서 ‘나’가 아닌 거대한 우주 속에서 ‘개인’이라는 이름으로 유리되어 방황하고 있는 우리를 ‘영웅’이라는 하나의 집단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집단속의 영웅이 곤란에 처할 때는 그를 구원하는데 힘을 가하고 ‘나’는 영웅의 그늘 안에서 함께 함에 위안이라는 것을 얻을 수 있게 함이다. 일생의 연구과정이 오롯이 녹아 있는 저자의 대작이 좀 더 진하게 나의 속에 녹아드는 여유로움을 가지는 날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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