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7년 11월 5일 03시 57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민음사(2006) 이윤기 번역
저자: 조셉 켐벨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민담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맨하튼에 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즐겨 찾았다. 그 중 특히 박물관 한 켠에 있는 토템 기둥에 매료되었다고.

대학을 졸업하고 영문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는 동안 자신이 어렸을 적 즐겨 있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왕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캠벨은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 어를 공부하였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존 스타인벡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츠와 교류하였다. 1934년에는 캔터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이후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된 뒤 신화의 원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신화적 인물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영웅을 중심으로 한 그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다. 또한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큐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그는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전4권)을 펴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신화의 힘>,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알라딘]

이윤기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번역작가이자 인문학적 글쓰기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문인. 난해하기로 이름난 세계적인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우리나라에 소개한 장본인으로, 지난 20여년 간 내놓은 번역서가 1백 50여권에 이른다. 그의 글들은 질적으로 아주 양호한 최상등품일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엄청난 속필다작이다. 1년에 열대여섯 권의 번역서와 소설, 산문집을 낼 정도니 알 만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에게 번역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 소설인데, 열 번쯤 되풀이해 읽은 후 번역에 들어가 1주일 만에 끝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작가의 학력을 굳이 따져보자면 `중졸`이다.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서른이 넘어 신학교도 다녔으니 `중졸`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여하튼 고등학교는 진학 후 두세 달 만에 작파했고, 그 후로는 모든 것을 `독학`으로 배우고 익혀 왔다.
그가 번역을 할 때 사전에서 가장 많이 찾는 단어는 Idea와Boy라고 한다. 번역작가가 이런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본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문맥에 따라 수없이 변화하는 그 의미를 딱 찍어 찾아내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노력은 약과다.

아무리 사전을 뒤지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 맞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많다. 사전 속에 갇혀 있는 말이 아니라, 등 푸른 생선처럼 싱싱하게 살아 있는 말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는 마치 해독이 안 되는 난수표를 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한다. 한 단어 때문에 꽉 막힌 채 애꿎은 술만 축내게 된다.

이윤기가 인문학의 바다에 처음 뛰어든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학비를 면제 받는 대신 교내 도서실 사서를 맡으면서, 물을 만난 고기마냥 도서관을 가득 메운 지식의 세계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었다. 미 8군에서 흘러나온 일본 시집이니 영어로 된 소설 따위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겉 멋을 부려 본 것도 그 시절의 추억이요, 유달영 박사의 영향을 받아 `우리가 한국 농촌의 미래를 바꿔놓자`고 친구들과 의기투합했던 것도 그 때의 낭만이다.

영어와의 인연도 그 당시부터로, 새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영어에 미쳐, 무슨 말이든 영어로 바꿔 보려고 했고, 그게 잘 안되면 먹지도 자지도 못할 정도였다. 평생의 관심사가 된 종교학이나 신화, 인류학과의 만남도 중학 시절의 사건이었다. 이렇게 중학 시절에 이미 인문학의 단맛을 보아버린 이윤기에게 개발시대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육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지금도 스스로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한다. 직장생활을 한 것도 일생을 통틀어 딱 4년이다. 생활도 남들과 반대로, 조간신문을 읽고 취침해서 대낮에 일어난다.

1969년 국군 나팔수로 근무하던 그가 베트남전에 자원하여 참전했던 것도 별난 일이었고, 귀국 시 남들은 전자제품이다 뭐다 해서 한 밑천 장만해 오는데, 700여 권의 서양 책들을 질머지고 돌아온 것도 별난 일이었다. 이 책들은 이윤기의 재산목록 1호가 되었으며, 그 중 여러 권이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그가 뒤늦게 종교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종교학이라는 큰 저수지 곁에 가면 크고 희한한, 인간의 본질과도 같은 고기가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991∼96년 사이에 미국 미시간 주립대 종교학 연구원으로, 1997년에 같은 대학 비교문화인류학 연구원으로 있었던 것도 동일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이다.

그는 자신의 인문학적 관심을 스스로 `인간현상학`이라 명명하고,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이며, 종교란 또 무엇이며, 인간의 원형은 무엇인가 하는 화두에 매달리고 있다. 이 또한 그가 평생 추구해 온 `독학` 노선의 연장이다. 독자들은 그 사색의 결과물들을 이윤기의 산문집이나 소설들을 통해 음미할 수 있다. [알라딘 제공]

[내 마음에 들어 온 글귀]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4p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21p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 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22p

우리는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에서 무덤이라는 이름의 자궁까지 완전한 순환주기를 산다. 25p

오직 탄생 (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29p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33p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39p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43p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肉化)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54p

한 문화가 신화 안에서 인간 존재의 면면이나 그 문화의 면면을 키워나갈 때 그 문화는 상징적인 암시와 함께 싱싱하게 살아난다. 60p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81p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112p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 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120p

프레이저가 지적했듯이 의식으로서의 국왕가해는 고대사회의 일반적인 관례였다. 125p

신화학의 심상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이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153p

시바신의 오른 쪽 귀고리는 남자의 것이고 왼쪽 귀고리는 여자의 것이다. 이는 신이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169p

즉 이글거리는 태양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고 한 쌍의 대립적인 원소인 불과 물의 배후 에너지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191p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 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207p

보살 신화의 세 번째 경이로움은 첫 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상)이 두 번째 경이로움(찰나와 영원의 동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223p

고대 탄트라의 정통 가르침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신들은 정도(正道)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상을 표상하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는 것이다. 현대 정신분석학파의 이론에서도 그와 같이 설명한다. 교화된 여행자가 마침내 눈을 들어 성부, 성자, 성신의 시현(示顯)을 뚫고 영원한 빛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단테의 마지막 시구에서 암시하는 것 역시 이 같은 고등신학적 통찰과 일맥상통한다. 237p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249p

생명의 원천은 개인의 핵이며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찾아낸다.----말하자면 인간이 자기 내부의 뚜껑을 열어젖힐 수 있을 때 그렇다. 250p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281p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의미를 실어 나르는 수레를 의미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305p

영웅이 지난 전장은 모든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의 희생으로 삶을 영위하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자기 삶을 영위하려면 죄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구역질 나는 것이다. 307p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데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야 한다. 319p

우리는 이를 읽고 그 일정한 패턴을 연구하고 그 다양성을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의 운명을 조형해 왔고 앞으로도 우리 사적, 공적인 삶을 주관해 나갈 그 무서운 힘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326p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31p

영혼을 깨우는 신은 그 영웅과 죽음을 함께한다. 332p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러한 상징이 인간의 운명, 인간의 희망, 인간의 믿음, 인간의 어두운 신비의 메타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333p

우주 발생적 순환은 우주 자체의 반복, 즉 끝없는 세계로 표상된다. 각 순환의 주기 안에는 소멸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삶이 잠과 깨어있음의 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333p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창조 신화는 모든 피조물은 그들의 모태가 된 불멸의 존재와 닿아 있음을 상기시키는 파멸 의식과 함께 고루 퍼져 있다. 모든 피조물들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필경은 극점에 이르러 파멸하고 그리고 회기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화는 비극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참 존재를, 파멸하는 형상이 아닌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하는 측면에서 보면 신화 체계는 그리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화 체계의 문법을 숙지하고 나면 비극적이라는 표현은 천만부당하게 느껴진다. 342p

남녀간의 사랑의 신비에 따르면 애정의 궁극적인 경험은 곧 이원성이라는 환상의 배후에 “둘은 곧 하나”라는 등식의 깨달음이 있다. 이 자각은 우주의 만상( 인간, 동물, 식물, 심지어는 광물까지도) 은 하나라는 자각으로 확대될 수 있다. 357p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神性)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400p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 (니체의 말을 빌리면 “ 스스로 구르는 바퀴” 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 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431p

(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엄격하게 ‘자아’를 통제하고, 소리와 빛과 맛 같은 색(色)에 집착하지 않고, 애증을 버리고, 고독 안에서 사록, 소식(小食)하고, 말과 몸과 마음을 삼가고, 명상과 정신 집중에 전심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힘쓰고, 이기심과 권세, 자만심과 색욕, 분노와 편견을 떨치고, 마음 안에서 정일을 얻고,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능히 불멸의 존재에 값 하는 사람이라 일러 무방하다.) 443p

정신이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남는 것은 오직 침묵뿐이다. 444p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445p

신화의 해석에는 최종적인 체계가 있을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런 것은 있을 것 같지 않다. 477p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 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구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寶庫)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마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478p

사회적인 의미를 통해 개인은 축제를 정상적, 일상의 생존으로 수렴할 것을 배운다. 이로써 개인의 정체가 확인된다. 거꾸로 말하면 무관심과 반항 (혹은 도피) 은 개인과 사회를 단절시킨다. 480p

그러나 다른 길도 있다. 즉 사회적인 의무와 대중적 제의와는 정반대로 향하는 다른 길이 있는 것이다. 의무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에서 추방된 자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추방은 탐색 모험의 첫 단계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 내부에서 탐색되고 또 발견되어야 한다. 481p

현대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의 불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485p

토템의 깃발을 날리는 국가 개념은 우아기의 상황을 지우기는커녕 유아적 자아를 강화, 확대시키고 있다. 485p

세속적인 국가의 보편적인 승리는 모든 종교 조직을 부수적인, 필경은 무익한 위치로 끌어내려 오늘날에는 종교적 무언극이 일요일 아침에 벌이는, 경건한 체하는 종교 놀음에서 더도 덜도 아니게 되고 말았다. 485p

따라서 우리는 갖가지 상징을 통해 동일한 구원이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고 또 알아야 한다. “베다”의 말씀처럼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 486p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 ‘너’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 날이 도래하듯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488p

[내가 저자라면]

정말 많은 영웅 신화를 읽었다. 만약 저자의 그 패턴 분석 방법이나 상징에 대한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창조 신화, 탄생 신화, 인류 기원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이야기로 치부하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수 많은 세상의 신화나 이야기, 역사등를 총망라하여 분석한 글들이 그의 신화체계와 상징필터를 통해 잔뜩 실려있다.
그는 인간의 무의식이 투사된 세계 도처에 있는 영웅 신화에는 비슷한 패턴과 뚜렷한 상징이 있으며 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중에는 원형이라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영웅이 존재한다고 분석한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심지어는 물 속에 가라 앉은 아틀란티스대륙까지도 언급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신화이므로 그것의 사실 유무를 불문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음에 놀라웁다. 용케도 이런 이야기를 모아 글을 썼다. 도대체 저자는 어떤 독서를 얼마나 어떻게 한 것일까? 제목을 먼저 정했을까, 신화가 먼저였을까. 다 수집해놓고 쓴 것일까?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는가 하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읽었을 때 썩 와 닿지 않는 내용도 있긴 하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약간 진을 빼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눈 똑바로 뜨고 세상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이후 소위 뜬구름 잡는 소리는 무시하고 살아 왔는데 이 책은 그런 나의 생각을 좀 더 굳혀주게 될 듯하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발견된 신화체계의 유사성과 그 상징성의 분석은 안개가 걷힌 맑은 날의 모습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오늘날 우리들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나 생각 중에는 몇 천년 전부터 해 오던 것들의 반복이 꽤 많은 듯하다. 어제 일조차 까맣게 잊고 사는 현대인들은 이제 그 의미를 찾아 가는 길의 존재조차도 모를지도 모른다.

죠셉 캠벨이 이토록 길게 신화를 이야기 하고 영웅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내 안의 실체를 찾아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영웅들의 모습이다. 어디 천의 얼굴뿐이겠는가? 만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져 의심조차 하지 않는 사고들,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옭아매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살펴보게 하고 있다. 지금 보다 조금 더 정신적으로 자유로워 질 듯하다.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 ‘너’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평을 간결하게 평한 이윤기님의 글을 역자 후기에서 옮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은 융파 심리학의 입장 (인간은 무의식 속에다 고대적 경험의 잔존물인 신화 상징을 나타낸다는) 을 원용하면서 다양한 영웅 전설을 통해 인간의 정신 운동을 규명하는 한편 현대 문명에 대해 하나의 재생원리까지 제시하려는 야심적인 작품이다.

어찌 보자면 “진리는 하나”라는 간단한 내용에 예문으로써 신화가 너무 많이 실리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이 말은 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수 많은 신화를 읽으면서 느낀 건 소위 말하는 “구라” 가 좀 세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음을..
IP *.48.42.248

프로필 이미지
부지깽이
2007.11.05 07:39:31 *.128.229.81
향인아, 그대가 고양이 데리고 구라친 것과 같은 것이다. '너'를 가지고 구라를 치라는 뜻이다. '너'에 대한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다. 우리 속에 존재하여 우리를 지배하는 신화와 전설의 통제를 이해하라는 것이고 그것을 다시 재해석하고, 뒤집어 낼 수 있는 '너'의 신화를 만들어 내라는 것이다. 이야기꾼은 원래 구라쟁이야. 그대도 구라에는 소질이 있어 보여서 연구원이 된 것이지.. 누가 구라치는지 않치는 지 알려면 그 언어를 보면 되지. 구라칠 때는 보통 '최고의', 가장 신뢰받는 번역가'같은 단어를 쓰거든. 그대가 쓴 것처럼.

그런데 정말 고수는 그런 말을 안써. 왜냐하면 구라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지. 구라가 잘 통하려면 구라를 감춰야 한단 말야.
프로필 이미지
향인
2007.11.05 21:51:25 *.48.42.248
사부님, 실은 그것도 베낀 건데……….(긁적긁적)
명심하겠습니다. 고수 구라쟁이, 그거 한번 제대로 노려보겠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52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 신영복 [2] 호정 2007.11.12 2021
1151 [독서31]천의얼굴을가진영웅/조셉캠벨 素田 최영훈 2007.11.08 2291
1150 생각의 탄생-창조적이고 통합적인 사고의 힘 [4] 도명수 2007.11.07 3497
1149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 캠벨 호정 2007.11.06 1988
1148 열정과 결핍 ...이나리 [1] 이은미 2007.11.06 2337
1147 [31]자신을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영웅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 갬벨 校瀞 한정화 2007.11.06 2315
1146 [31]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켐벨 써니 2007.11.06 2316
1145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하나의 노래, 인간의 합창 [1] 여해 송창용 2007.11.06 2265
1144 (31)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 캠벨 [2] 박승오 2007.11.05 2295
1143 (30) 당신은 누구인가? _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고 [3] 時田 김도윤 2007.11.06 3391
1142 [리뷰028]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香山 신종윤 2007.11.05 1983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 캠벨 [2] 香仁 이은남 2007.11.05 1979
1140 금빛 기쁨의 기억 : 강영희 [3] 素賢소현 2007.11.05 2197
1139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Joseph Campbell [5] 우제 2007.11.04 2118
1138 이외수 &lt;날다타조&gt;5 [2] gina 2007.10.31 2204
1137 이외수 &lt;날다타조&gt;4 [1] gina 2007.10.31 2201
1136 이외수 &lt;날다타조&gt;3 [1] gina 2007.10.31 2284
1135 Leading Change-James O file [1] 海瀞 오윤 2007.10.30 2105
1134 벼룩이 본 코끼리와 벼룩 -찰스핸디 [3] 이은미 2007.10.30 2082
1133 [독서30]로버트프로스트의 자연시 그 일탈의 미학 [2] [1] 素田 최영훈 2007.10.29 3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