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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5일 11시 23분 등록


이런저런 일로 저자 조사를 충실히 못했습니다. 그래서 얼렁뚱땅 저자 약력을 복사해다가 넣을까 했더니, 저~ 아래 우제 누님의 글에 사부님의 불똥이 튀었군요. 어찌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월요일 11시 사무실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다지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은 듯 합니다. 할 수 없이 복사해다가 넣습니다. 반성하고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민담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맨하탄에 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즐겨 찾았다. 그 중 특히 박물관 한 켠에 있는 토템 기둥에 매료되었다고.

대학을 졸업하고 영문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는 동안 자신이 어렸을 적 즐겨 있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왕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캠벨은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 어를 공부하였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존 스타인벡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츠와 교류하였다. 1934년에는 캔터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이후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된 뒤 신화의 원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신화적 인물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영웅을 중심으로 한 그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다. 또한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큐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그는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전4권)을 펴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신화의 힘>,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윤기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번역작가이자 인문학적 글쓰기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문인. 난해하기로 이름난 세계적인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우리나라에 소개한 장본인으로, 지난 20여년 간 내놓은 번역서가 1백 50여권에 이른다.

그의 글들은 질적으로 아주 양호한 최상등품일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엄청난 속필다작이다. 1년에 열대여섯 권의 번역서와 소설, 산문집을 낼 정도니 알 만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에게 번역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 소설인데, 열 번쯤 되풀이해 읽은 후 번역에 들어가 1주일 만에 끝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작가의 학력을 굳이 따져보자면 `중졸`이다.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서른이 넘어 신학교도 다녔으니 `중졸`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여하튼 고등학교는 진학 후 두세 달 만에 작파했고, 그 후로는 모든 것을 `독학`으로 배우고 익혀 왔다.

그가 번역을 할 때 사전에서 가장 많이 찾는 단어는 Idea와Boy라고 한다. 번역작가가 이런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본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문맥에 따라 수없이 변화하는 그 의미를 딱 찍어 찾아내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노력은 약과다.

아무리 사전을 뒤지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 맞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많다. 사전 속에 갇혀 있는 말이 아니라, 등 푸른 생선처럼 싱싱하게 살아 있는 말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는 마치 해독이 안 되는 난수표를 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한다. 한 단어 때문에 꽉 막힌 채 애꿎은 술만 축내게 된다.

이윤기가 인문학의 바다에 처음 뛰어든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학비를 면제 받는 대신 교내 도서실 사서를 맡으면서, 물을 만난 고기마냥 도서관을 가득 메운 지식의 세계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었다.

미 8군에서 흘러나온 일본 시집이니 영어로 된 소설따위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겉 멋을 부려 본 것도 그 시절의 추억이요, 유달영 박사의 영향을 받아 `우리가 한국 농촌의 미래를 바꿔놓자`고 친구들과 의기투합했던 것도 그 때의 낭만이다.

영어와의 인연도 그 당시부터로, 새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영어에 미쳐, 무슨 말이든 영어로 바꿔 보려고 했고, 그게 잘 안되면 먹지도 자지도 못할 정도였다. 평생의 관심사가 된 종교학이나 신화, 인류학과의 만남도 중학 시절의 사건이었다.

이렇게 중학 시절에 이미 인문학의 단맛을 보아버린 이윤기에게 개발시대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육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지금도 스스로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한다. 직장생활을 한 것도 일생을 통틀어 딱 4년이다. 생활도 남들과 반대로, 조간신문을 읽고 취침해서 대낮에 일어난다.

1969년 국군 나팔수로 근무하던 그가 베트남전에 자원하여 참전했던 것도 별난 일이었고, 귀국 시 남들은 전자제품이다 뭐다 해서 한 밑천 장만해 오는데, 700여 권의 서양책들을 질머지고 돌아온 것도 별난 일이었다. 이 책들은 이윤기의 재산목록 1호가 되었으며, 그 중 여러 권이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그가 뒤늦게 종교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종교학이라는 큰 저수지 곁에 가면 크고 희한한, 인간의 본질과도 같은 고기가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991∼96년 사이에 미국 미시간주립대 종교학 연구원으로, 1997년에 같은 대학 비교문화인류학 연구원으로 있었던 것도 동일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이다.

그는 자신의 인문학적 관심을 스스로 `인간현상학`이라 명명하고,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이며, 종교란 또 무엇이며, 인간의 원형은 무엇인가 하는 화두에 매달리고 있다. 이 또한 그가 평생 추구해 온 `독학` 노선의 연장이다. 독자들은 그 사색의 결과물들을 이윤기의 산문집이나 소설들을 통해 음미할 수 있다.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p. 14)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p. 21)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 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p. 22)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좆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전후가 도착된 슬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삶의 목표가 어른이 되는 데 있지 않고,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 데 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데 있지 않고, 어머니와 유착되는 데 있다고 믿는 현상이 그것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소년 시절이라는 이름의 신전에서, 아들에 대한 부모의 소원이던 법률가, 실업가, 혹은 지도자를 섬기고 있는가 하면 아내들은 결혼한 지 14년, 두 아이를 낳아 길러놓고도 여전히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다. (p. 23~24)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p. 29)

아리아드네가 그랬듯이 우리도 이 사람에게로 달려가 보자. 그는 실타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아마(亞麻)를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들판에서 거두었다. 수세기에 걸친 경작, 수십 년에 걸친 채집, 수 많은 가슴과 손의 힘겨운 작업…… 이 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마를 훑고, 간추리고 헝클어진 실무더기에서 실을 자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혼자서는 이 모험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p. 38~39)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p. 39)

현대 문학은 우리들 앞에, 우리들 주위에, 우리들 내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참담하게 부서진 형체를 직시할 용기와 눈길을 부여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대학살의 참상에 불만을 토로하는 자연스러운 충동을 억압당한 곳에서, 비난도, 만병 통치약을 외칠 수도 없는 곳에서 비극 예술의 중요성은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유효하다. (p. 41)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p. 62)

사자의 포효, 이리의 울부짖음, 성난 바다의 광란, 그리고 피를 부르는 칼은 인간의 눈에는 과분한 영원의 편린들이다. (p. 63)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_나폴레옹 (p. 97)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p. 111~112)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_아난다 쿠마라스와미 (p. 124)

자아에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과 회귀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이 창조되지 않은 불멸의 존재임을 드러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p. 124)

그러나 우리의 심상이 기억해 낸 어머니가 항상 자비로운 것만은 아니다.
(1) 우리가 공격적인 환상을 투사하고 그러면서도 반격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무심하거나, 이르기 어려운 어머니도 있고,
(2) 구속하고, 금지하고, 벌주는 어머니도 있으며,
(3) 자기에게 묶어두기 위해 아이의 성장을 싫어하는 어머니도 있고,
(4)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위험한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거세 콤플렉스) 바라던 어머니이긴 하나 가까이해서는 안 될 어머니도 있다(오이디포스 콤플렉스)
따라서 어머니 중에는, 성인의 유아기 기억이라는 은밀한 곳에 숨어 있다가 Efoh는 엄청난 힘을 행사하는 〈나쁜〉 어머니도 있다. 이런 어머니는 아르테미스처럼 우아하면서도 고약한 여신으로 존재한다. (p. 148)

고도의 이해력을 갖춘 천재만이 이 숭고한 여신의 계시를 읽을 수 있다. 이해의 정도가 낮은 사람을 위해 여신은 그 신통력의 정도를 낮추어, 그들의 지진한 능력에 알맞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여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p. 153)

새들이 초록빛 숲 그늘에 깃들이듯
사랑은 온유한 마음속에 깃들인다.
이치로 보면
사랑 이전에 온유한 마음이 없었고,
온유한 마음 이전에 사랑도 없었다.
태양이 솟을 때 빛도 발할지니
태양에 앞서 빛은 있을 수 없다.
불길 속이 가장 뜨겁듯
사랑은 부드러움 속에서만 뜨겁게 타오른다. (p. 156~157)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적인 결혼은 영웅의 삶 전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웅의 궁극적인 체험과 행위의 예비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의 시련은, 자각의 위기를 상징한다. 이 자각의 위기를 통해 영웅의 의식은 증폭되고, 어머니 상의 파괴자, 즉 천생연분의 신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련을 받는 당사자는 자기와 아버지가 동일하다는 사실과, 자기가 곧 아버지의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p. 159)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p. 159)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할례 다음해에, 완전한 남성이 되고자 하는 입문자는 두 번째의 제의적 수술을 받는다. 이 두 번째 수술은 절개 수술이다(성기의 밑부분을 요도 속까지 절개하여 흉터를 만드는 것이다. 이 흉터는 〈페니스 자궁penis womb〉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남성의 질을 상징한다. 영웅은 의식을 통하여 남성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다. (p. 203)

종종 및 인종적 토템과, 공격적인 집단 행위를 겨냥한 제의는 사랑으로 증오를 정복하는 심리적 문제의 부분적인 해결책만을 나타낸다. 여기에서는 부분적으로밖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에고는 이러한 토템과 제식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강화된다. 무리의 구성원들은 자기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헌신할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는 사이에 세계의 나머지 부분(그러니까 인류가 사는 세계의 대부분)은, 그 구성원들의 동정과 보호와는 상관없는 세계로 밀려난다. 왜냐하면 나머지 세계는 그들이 믿는 신의 보호권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이어서 사랑과 증오의 두 원리가 서로 헤어지는 극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p. 205)

너희는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서 꾸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주어라. (p. 206)

기독교 국가의 전통인 세계 구원의 말씀과 상징의 궁극적이고 비판적 의미에 대한 이해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악마의 도시Civitas Diaboli〉에 대한 〈신의 도시Civitas Dei〉의 성전을 선포한 이래 격동의 몇 세기 동안 몹시 어지러워졌기 때문에, 세계 종교(우주적 사랑의 교리)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현대인은 마땅히 다른 위대한(그리고 훨씬 오래된) 우주적 친고universal communion로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근원적인 말씀이 평화, 모든 존재에 대한 평화를 지향하는 부처의 우주적 친교에 관심해야 하는 것이다. (p. 208)

유계(六界) 미망의 도시 가운데
으뜸가는 소인은 악업에서 나온 죄악과 우매함이다.
여기서 중생은 좋고 싫음에 의지하니, 언제 이 좋고 싫음이 다르지 않음을 알 틈이 없다.
오호라, 좋고 싫음의 무상함이여,
만상이 본래 비었음을 알면,
그대 마음에 대자 대비가 일어나리라.
그대와 남이 다르지 않음을 알면
남을 섬실 수 있으리라.
남을 능히 섬겨 내면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나를 만나면 불성에 이르리라. (p. 209)

세상으로부터의 출발은 오류가 아니라 여행의 첫 출발이다.이 먼 여로에서, 우주 순환의 심오한 적멸을 깨치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p. 217)

〈인간이 재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 신들이 웃는다〉 _일본 속담 (p. 248)

〈하느님이, 인간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_토마스 아퀴나스 (p. 305)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케나 우파니샤드』 (p. 305)

〈때로는 바보로, 때로는 현자로, 때로는 왕관에 미친 자로, 때로는 방랑자로, 때로는 예언자처럼 부동하는 존재로, 때로는 자비로운 얼굴로, 때로는 귀인으로, 때로는 폐덕자로, 때로는 무명인으로……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p. 307)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빈사 상태에 빠진 성화는 그 영원히 인간적인 의미를 다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p. 320)

신, 혹은 신들은 편의적인 방편 즉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을 잘 나타내고 또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는 하나, 신 혹은 신들 자체는 어디까지나 편이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과 형식을 통하여 이 세계의 얼개를 설명하는 성질이 부여되어 있을 뿐, 이들은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 331)

〈우주의 끝을 헤아리고, 그 끝이 곧 시작임을 아는 자라야 현자라고 불릴 만하다.〉 _토마스 아퀴나스 (p. 342)

「내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p. 355)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p. 400~418)

폭군은 자만한다. 그리고 자만은 바로 폭군이 파멸하는 씨앗이다. 폭군은, 자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따라서 그는 그림자를 본질로 오인하는 광대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p. 422)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p. 440)

「그가 거기에 있는 한 그는 하나지만, 여기 자식들 안에 있을 때는 여럿이다」 (p. 44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고,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p. 442)

「내가 쓰는 시대는 끝났다. 나는 나에게 계시된 것을 써왔고, 가르쳐왔지만, 내가 보기엔 참으로 하잘것없다. 이제 바라건대, 내가 가르치는 시대가 끝났듯이 내 삶 또한 그러하기를……」 _토마스 아퀴나스 (p. 443)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Durkheim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DEJG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p. 478)

사회적인 의미를 통해 개인은 축제를 정상적, 일상의 생존으로 수렴할 것을 배운다. 이로써 개인의 정체가 확인된다. 거꾸로 말하면 무관심과 반항(혹은 도피)은 개인과 사회를 단절시킨다.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p. 480)

의무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에서 추방된 자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추방은, 탐색 모험의 첫 단계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길은 자기 내부에서 탐색되고 또 발견되어야 한다. 성별, 연령별, 직업별 차이는 우리 인간의 특질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어느 단계에서 우리가 한동안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부에 있는 인간의 이미지는 의상과 아무 상관도 없다. (p. 481)

「오 모하메드여, 네가 없었으면, 내 저 하늘도 만들지 않았으리라」 (p. 483)

오늘날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세계적 종교도 일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이렇나 종교들도, 선전과 자화자찬의 도구로서, 갖가지 도당짓기의 요인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다(심지어는 불교까지도 최근 들어 서구 학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러한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세속적인 국가의 보편적인 승리는 모든 종교 조직을 부수적인, 필경의 무익한 위치로 끌어내려, 오늘날에는 종교적 무언극이 일요일 아침에 벌이는, 경건한 체하는 종교 놀음에서 더도 덜도 아니게 되고 말았다. 나머지 6일간은 물론 기업 윤리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들이 판을 친다. 그러한 가짜 신앙은 제대로 기능하는 세계에는 필요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보다 필요한 것은 전체 사회 질서의 진화다. 그래야 세속적인 삶의 의무와 행위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실제로 내재하고 또 그만큼 효과적인, 보편적인 신인(神人)의 이미지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이를 의식화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p. 485~486)

인간이 되려면,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인간의 얼굴로 바뀌어 있는 신의 얼굴을 알아보아야 한다. (p. 486)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 _니체 (p. 488)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지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p. 488)




다양한 민족과 인종,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무수한 신화의 사이에 공통된 형태가 있다는 조셉 캠벨의 주장은 선뜻 동조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신화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조각씩은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몇 편에서조차 공통점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단지 몇 편이 아니라 '모든' 신화를 가로지르는 공통점을 이야기하겠다는 저자의 의도는 조금 허황되게 느껴지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공통된 형태를 알려주겠다던 저자의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1부에서 '출발', '입문', '귀환'의 세 단계로 신화의 구성을 나누고 보니 뜻밖에도 이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신화가 보이지 않았다. 이 듬성듬성 짜여진 그물에 온갖 신화와 영웅이 모두 걸려들었다. 얼핏 보기엔 한 점의 연결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개의 이야기는 교묘한 자리에서 만났다. 동양의 부처와 서양의 아더왕이 만나서 다시 현대의 누군가의 꿈으로 토해졌다. 이렇듯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고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 누비는 저자의 지적 축제는 눈이 부실 지경이다.

저자가 한 자리로 끌어 모은 이야기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오이디포스나 미노타우로스의 신화에서부터 페르시아의 전설과 출처를 알 수 없는 동화나 민화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양의 이야기들은 각자의 독특한 매력으로 책을 풍성하게 한다. 책의 전반부는 이런 이야기들을 읽어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건을 해체하고 접근하는 분석 방식도 탁월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각각의 신화가 갖는, 시대를 넘어선 생명력에 의해 빛이 바랜다.

그러나 그래서 책의 전반부가 잘 읽히더냐고 누가 묻는다면 사실 그 반대에 가깝다고 해야 할 판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선은 신화의 공통점이라면서 저자가 내세운 '출발', '입문', '귀환'의 기준이 너무 느슨하다. 이런 느슨한 기준은 모든 신화를 잘 묶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공통점의 세밀한 부분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러다 보니 같은 '출발'에 등장하는 신화들 사이의 관계도 덩달아 느슨해지고 덕분에 연결이 유기적이지 못하다.

또한 각각의 매력적인 신화들은 분석을 위해 난도질을 당한 통에 제대로 된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신화들은 '출발', '입문', '귀환'에 어울리는 부분만 잘려서 따로 모아진 탓에 그 스토리가 갖는 매력도 생명력도 상당 부분 사라져버렸다. 부처의 이야기 한 토막이 나오는가 싶다가 페리샤 샤리만 왕의 이야기 한 토막이 그 뒤를 잇는다. '미스터 초밥왕' 1권 읽다가 고우영의 '삼국지' 1권을 읽는 셈이니 당연히 이야기는 맥이 끊어지고 재미는 떨어진다.

이런 마음으로 책을 끝까지 읽었더라면 여기까지가 이 책에 대한 리뷰의 전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의 책 읽기는 그렇게 싱겁게 끝나지 않았다. 그 작지만 놀라운 전환을 설명하기 위해 조금 긴 이야기를 하나 해야 할 듯 하다.

나는 어느 일요일 아침 뉴욕의 지하철에서 작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했다. 지하철을 탄 사람들은 조용히 신문을 읽거나 생각에 잠겨 있거나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매우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중년의 남자가 그의 아이들이 전철에 타면서 전철 내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 아이들이 마구 떠들어대며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었다.

그 중년의 남자는 바로 내 옆에 앉아 있었는데 두 눈을 감은 채 그런 상황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아이들은 마구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대고 물건을 집어 던졌으며 심지어 어떤 승객이 보고 있는 신문을 홱 낚아채기까지 하였다. 여간 신경이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라는 사람은 죽은 듯이 앉아만 있었다.

화를 내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이 남자가 자기 아이들이 저렇게 날뛰는데도 무신경하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 전혀 책임감을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모든 승객이 짜증을 내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이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아이들이 저렇게 많은 승객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이들을 좀 조용하게 할 수는 없겠습니까?"

그제서야 이 남자는 마치 그 상황을 처음으로 인식한 것처럼 눈을 약간 뜨면서 다음과 같이 힘없이 말하였다.

"그렇군요. 저도 뭔가 어떻게 해 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막 병원에서 오는 길인데 한 시간 전에 저 아이들의 엄마가 죽었습니다. 저는 앞이 캄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고 아이들 역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될 지 막막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일요일 오후, 그러니까 책을 삼분의 이쯤 읽어가고 있을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승오였다. 승오와의 짧은 전화 통화는 책을 읽으며 갖고 있던 나의 패러다임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형,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 대해서 사부님께서 써놓으신 글 봤어요?"

부랴부랴 게시판을 뒤지니 한 조각 글이 툭! 떨어졌다.

이 책은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의 기본 골격을 짜는데 흥분할 만한 영감을 주었다. 특히 영웅의 출발-입문-귀환 -소멸로 이어지는 변화와 성장 서클을 보며, 삶을 한번 신화로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을 위한 변화 모형을 그려보려 했었다.

그 순간, 일요일 아침, 한가한 뉴욕의 지하철에서 벌어졌던 것만큼이나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내 안에서도 일어났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어느새 신화를 넘어 변화를 말하는 책이 되어있었다. 모든 신화의 공통점이라는 '출발', '입문', '귀환'은 순식간에 개인의 변화를 위한 가슴 뛰는 조언이 되었다. '변화'라는 화두를 마음에 품고 책을 읽기 시작하자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야기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얼렁뚱땅 읽어버린 책의 전반부로 돌아가보니 놓치고 넘어가버린 별빛 같은 이야기들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세상으로부터의 출발은 오류가 아니라 여행의 첫 출발이다.이 먼 여로에서, 우주 순환의 심오한 적멸을 깨치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p. 217)

마음에 품은 것에 따라 한 권의 책이 신화에 대한 것에서 변화에 대한 것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이 작지만 소중한 경험은 앞으로 남은 연구원 생활과 연구원 2년 차의 1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을 품고 책을 읽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좋은 가르침을 하나 가슴에 품게 되었다.

매번 두껍고 어려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 느꼈던 성취와 극복의 쾌감이 이번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생하며 어렵게 읽은 책이라면 책꽂이에 던져두고 한동안 쳐다보지도 않을 법한데 이번은 어째 좀 다르다. 이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맨 앞 장으로 다시 돌아가고픈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냥 그렇게 읽어버린 책의 전반부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 듯도 하고 후반부를 읽으며 느꼈던 날카로운 비판과 따뜻한 사랑에 대한 여운 덕분인 듯도 하다.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는 니체의 말로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 저자에게 영웅은 어쩌면 평범한 우리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창조적인 비범함이 아니었을까. 저자가 들려준 신화에 비추어 나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바라보는 일은 가슴 설레는 숙제로 남았다.

「오 모하메드여, 네가 없었으면, 내 저 하늘도 만들지 않았으리라」 (p. 483)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 신이 나를 위해 하늘도 만들었다는데 말이다. 변화의 단서는 늘 가까운 곳에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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