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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6일 08시 55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_ 조셉 캠벨


#1. 프롤로그

나는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것을 좋아한다. 한 순간, 서로 다른 분야가 하나의 주제로 겹쳐지거나, 다른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즐기기 때문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른 책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조셉 캠벨의 대담집인 '신화의 힘'을 들추다 이런 부분을 발견했다. 그는 이 그림을 일종의 '교육적인 묘기'같은 거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플라톤은 어느 책에선가, 영혼은 원 같다고 했어요. 나는 이 플라톤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칠판에다 원을 하나 그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원에다 가로 선을 하나 긋지요. 그러면 이 선의 위는 의식, 아래는 무의식이 됩니다. 다음에는,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나오는 곳을 표시합니다. 즉 가로 선 밑에 점을 찍는데, 이 점은 조금 전에 그린 원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

그런데 원 속의 가로 선 위에는 자아가 있어요. 나는 이 자아를 조그만 사각형으로 표시하지요. 이 자아는, 우리가 중심과 동일시하는 의식의 한 측면이에요. 하지만 보세요. 자아가 우리의 중심은 아니잖아요? 자아를 나타내는 사각형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나타내는 점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지 않아요? 우리는 자아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쇼를 연출하는 줄(주도권을 행사하는 줄) 알지만, 아니에요."
(신화의 힘, p. 260~261)

전철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랬다. 이 단순한 그림 속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내가 나라고 알고, 배우고, 믿고 있는 내가 사실은 진짜 내가 아니다. 이런 '사소한 깨달음' 혹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갈증'에서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웅은 자신의 중심을 찾기 위해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모험을 떠난다.


#2. 저자에 대하여


Joseph Campbell (1904-1987)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가이자 비교 신화학자로 칭송 받는 조셉 캠벨은 1904년 3월 26일, 뉴욕의 아일랜드계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와 함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본 그는 기병대에게 토벌되는 인디언에게 강하게 매혹된다. 그는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 '신화의 힘'에서 이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났어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란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고 신화 모티프와 유사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 그러다가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빠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버팔로 빌이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해마다 와서 <와일드 웨스트 쇼>로 공연을 벌였는데, 그걸 보고는 그만 인디언을 짝사랑하게 되고 만 겁니다. 인디언을 좀 더 알고 싶었지요. 우리 부모님은 너그러운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인디언에 관해 쓰여진 그 시절의 책을 사 볼 수 있었지요. 이렇게 해서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나는 인디언 신화에,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수녀 선생님에게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프가 있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어린 시절의 캠벨은 아메라카 인디언에 대한 책들을 즐겨 읽었다. 공립 도서관 어린이 서가에 있는 인디언 신화에 관한 책을 전부 다 읽었으며, 인디언에 관련된 물건을 수집하고, 뉴욕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14세 때엔 병에 걸려 한동안 집에 머물면서 자연 과학을 공부했고, 1919년 코테티켓 뉴 밀포드에 있는 캔터베리 예비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다트머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생물학과 수학을 공부하던 조셉 캠벨은 2학년 때, 메레코우스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망스'를 읽고 인문학에 눈을 뜨게 되고, 콜럼비아 대학 영문과로 전입한다. 그는 또한 육상 선수이며 색스폰 연주자이기도 했는데, 0.5마일에서 콜럼비아 대학과 뉴욕 시의 기록을 세웠고, 대학의 재즈 밴드에서 색스폰을 연주했다.

1924년 처음으로 유럽으로 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 때 그는 배에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 힌두교와 불교 등 동양철학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이후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아더 왕의 전설인 '성배'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는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 약 2년 동안 연구비를 지원받아 프랑스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현대 미술과 현대 문학(예이츠, 엘리엇, 그리고 조이스)을 처음 접하고, 산스크리트 문학과 인도 유럽 철학을 공부하고, 프로이트, 융, 토마스 만, 괴테 등의 작품을 만난다. 그의 책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와 서로 다른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이런 그의 경험에 연유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1929년, 대공황에 따른 경제 사정 악화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우드스탁 숲 속에 있는 오두막에 세들어 살면서 파리에서 시작한 공부를 이어, 엄청난 양의 독서를 시작한다. 그의 일생에 있어 이 시기는 사뭇 흥미로운데 박사 논문을 접고 이 곳에 은둔한 그는 한 4~5년 동안 자신의 진로를 구상하며 연구를 계속한다. 어쩌면 20대 중, 후반의 이 때가 그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내면으로, 책 속으로 영웅의 모험을 떠난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요컨데, 영웅이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因果)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p. 30)

1933년 85개의 대학에 지원을 한 끝에 그의 모교였던 캔터베리 예비학교에 취직하지만, 그해 말 다시 은퇴하고 우드스탁으로 돌아와 독서와 집필에 열중한다. 다음해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된 그는 이 대학 문학부에 재직하면서 이후 38년 동안 문학, 독일 철학, 비교 신화학 등의 분야를 가르쳤다.


Joe and Jean on their honeymoon in Woodstock, NY (1938)

1938년, 그의 학생이자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 단원이었던 진 어드먼과 결혼한다. 1940년에는 콜롬비아 대학의 인도학 교수였던 하인리히 침머를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은 그의 신화 연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1943년 침머가 폐렴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부인이 캠벨에게 침머의 유작들을 편집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이후 12년 동안의 작업으로 통해, 1946년 '인도의 예술과 문명', 1948년, '왕과 시신' 등을 차례대로 출판한다.

1944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의 집필을 시작한 그는 1949년, 두 곳의 출판사에서 거절을 받은 후 볼링겐 시리즈에서 드디어 출간하게 된다. 이 책은 국립예술문자협회에서 주는 상을 받게 되고, 이후 신화학자로서의 조셉 캠벨의 활발한 활동이 계속된다.

훌륭한 신화 강연자로,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 이름을 떨쳤던 그의 대표작으로는 이 책 이외에도, '신의 가면 _ The Masks of God' 4부작 (1959~1968), '신화와 함께 하는 삶 _ Myths to Live By' (1972), '신화의 이미지 _ The Mythic Image' (1974) 등이 있다.

1982년 하와이로 이사한 그는 1987년 10월 30일 호놀룰루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그해 12월 방연된 빌 모이어스와의 TV 인터뷰 '신화의 힘 _ The Power of Myth'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다.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랍니다. ….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그리고 또 행복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조셉 캠벨은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의 꿈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좇아, 자신의 마음의 길을 따라 거대한 신화의 세계에 들어섰고, 그 기나긴 여정과 인생이란 모험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천복을' 따라 살았던, 진정한 '자기 자신'을 살았던 현대의 영웅 중 한 명이었다.

* 참고 자료 : 신화의 이미지(The Mythic Image),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 캠벨 재단 홈페이지(www.jcf.org) 등



#3. 내 마음에 들어온 인용문


머리말
 
(6-7)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프롤로그 원질 신화
 
(14)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1)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라,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25) 우리는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 tomb of womb에서 무덤이라는 자궁 womb of tomb까지 완전한 순환 주기를 산다. 그것은, 꿈의 본질처럼 눈앞에서 곧 녹아버릴, 견고한 물질의 세계를 향한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흐름이다. 나 개인을 괴롭혔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모험에의 두려움을 돌이켜볼 때, 결국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유사 이래 이 세계 방방 곡곡, 그리고 문명의 갖가지 위장 아래서 남녀가 더불어 경험한 일련의 상투적인 변신 이야기 standard metamorphoses일 뿐이다.

(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29)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 palingenesia>(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29) 평화는 올가미다. 전쟁은 올가미다. 변화도 올가미이며, 항구 불변성이라는 것도 올가미다. 죽음이 승리하는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온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 뿐이다.
 
(30) 요컨대, 영웅이 첫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因果)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 융의 소위 <原型心象(원형심상, Archetypal images)>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39)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41)
미천한 종, 나의 날은 끝났다.
비밀을 밝혀라, 이다 산 요비스(제우스)의,
한밤중 자그레우스(디오뉘소스)가 배회하는 곳에서 나는 배회한다.
나는 자그레우스의 포효를 견디고
그의 진홍빛 피비린내나는 축의(祝儀)를 치렀으며,
태모(太母)님 산의 불길을 받아
나 역시 불붙어 이름을 얻으니,
사슬 갑옷의 사제 바코스.

(42-43)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 kathodos and anodos인 것이다.
 
(43)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 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 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된다.

(43)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실재 self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
 
(54) 돌이켜보면,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神的)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55)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은 곧 너를 찾음이다.
 
(65) 신화의 제신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 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 불명의 기븜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제1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출발
 
(81)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제는 의미 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험의 주체가 누리던 화려한 세계는 메마른 돌멩이가 구를 뿐인 황무지가 되고, 그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82)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82-83) 인간은 밤이고 낮이고, 자신의 어지러운 심성의 폐쇄된 미궁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자기의 이미지인 신적인 존재에 쫓긴다. 문을 나가는 길은 막힌 지 오래다. 출구는 없다. 인간은 사탄처럼, 죽자고 자기 자신에게 매달린다. 이때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혹자는 그러다 신 안에서 마침내 파멸하기도 한다.
 
(87) 주저한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87-88) 일종의 주어진 삶의 방식에 대한 철저한 파업 혹은 폐기라고나 할까, 그 결과 변형의 힘은 문제를 새로운 자장(磁場)으로 끌어내는 수가 있다. 이 자장에서 문제는 어느 한순간 마침내 풀릴 수 있는 것이다.

(88)
 
(97)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는 없을 것이다.
 
(107) 미지의 땅(황야, 밀림, 심해, 타향 등)은 무의식의 내용물이 자유롭게 투사되는 무대다.
 
(111-112)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119) 우리가 오감(五感)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계의 상징, 그리고 육체적인 어느 기관에 의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인 그 도깨비는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무기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번째의 무기로 바꾸어 대항하자 조복한 것이다. 이 여섯번째 무기가, 명(名)과 형(型)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120)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122-123) 관문의 통과가 자기적멸(自己寂滅)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124)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제2장 입문
 
(132)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理想)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139) 우리의 선조들이 신화적 종교적 유산의 상징적 정신적 의식에 힘입어 극복해 왔던 심리적 위험들을 오늘날 우리가(비신자인 경우, 아니면 신자라고 하더라도 계승받은 믿음으로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납득할 수 없을 경우) 혼자서 혹은 시험적, 즉흥적으로, 더러는 도움이 될 만한 지침도 없이 맞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신들과 악마들의 존재를 이성의 이름으로 부정한 <개화된> 현대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다.
 
(139)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143) 신이든 여신이든, 남자든 여자든, 신화의 등장인물이든 꿈을 꾸는 사람이든,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켜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동화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148) 마침, 태양이 그 젊고 힘찬 상승과 더불어 작열하며 안정을 얻고 죽음을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는 운명적인 시각이었다.
 
(153-154)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영웅이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더 위대할 수는 없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156)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160)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것에는 어차피 육욕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깨우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외없이 낭패의 순간을 경험한다. 삶, 사는 행위, 삶의 구조, 특히 삶의 괄목할 만한 상징인 여성은 더없이 순수한 영혼을 차마 상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170) <화해 atonement>, 즉 <하나되기 at-one-ment>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신(초자아)으로 보이는 용과 죄악(억압된 이드))으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178)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문 노릇을 해야 한다.
 
(186) 이 땅에 살기 시작한 이래로 인간은 이러한 신성한 절차를 통하여 현상계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불사의 존재를 향한 초월의 희망을 획득할 수 있었다.
 
(191) 이러한 사실은, 태양의 문을 통해 우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은혜는, 다른 존재를 징벌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벼락의 에너지와 동일함을 뜻한다. 불멸의 존재가 내뿜는, 망상을 쫓는 빛은, 창조하는 빛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192) 모든 신학 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192)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를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196-197) 부처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영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는 신적인 상태 divine state의 한 본보기다. <의식의 외피가 벗겨져 나가, 모든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 상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해탈의 상태이며, 영웅들이 됨으로써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상태다. 즉 <만물에는 불성(佛性)이 있으니>, (같은 말을 달리 하자면) <일체의 존재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200) 즉 영원성이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의 재결합으로 새 생명의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207)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210) 무한한 사랑이며, 전능한 보살인 관세음이 지각 있는 모든 존재를 포용하고, 굽어보고, 또 그 존재 안에 거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마음 안에는 평화가 있다.
 
(210) 이 모두가 만상을 한눈에 보고, 공(空)의 본질을 본질로 삼고, <대자대비로 굽어보시는 주(主)>의 자식이며, 무한히 계속되는 무상의 허상이며, 긴 꿈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분의 이름은 <내면에서 보이는 주 The Lord is Seen Within>이기도 하다.
 
(214) 우주를 움직이는 힘인 세 겹 불의 마지막 여신(餘燼)의 결정적인 순간까지 버텨낸 구세주는 홀연 거울에 둘러싸인 듯이 범인(凡人)과 같이 살고자 하는 자기 고유이 육체적 의지, 정상적인 욕망과 적의가 인도하는 대로, 현상적인 원인과 결과와 방법에 둘러싸여 살고자 하는 의지의 마지막 환상을 목격한다. 뜻밖의, 마지막 육신의 불길이 그를 공격한 것이다. 이것은, 불길이 다시 타느냐 꺼지느냐가 결정되는, 모든 것이 달린 순간이었다.
 
(216) <형상(色)은 빈 것(空)이며, 빈 것은 즉 형상이다. 빈 것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빈 것과 다르지 않다. 형상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빈 것이며, 빈 것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형상이다. 관념, 이름, 개념 그리고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224) 즉 <말씀은 곧 육신이다 (Et verbum caro factum est)>는 <보석이 연화 속에 있다 (Om mani padme hum)>인 것이다.
 
(237) 이렇게 해서 신들과 여신들은 원초적인 상태의 궁극적인 존재가 아닌, 불로불사 영약의 화신이나 그 수호자로 파악된다. 따라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영웅이 얻으려는 것도 그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영광, 말하자면 그들의 불로 불사적 존재를 가능케 하는 권능이다. 이 기기적인 에너지 본질만이 불멸적인 존재이며, 도처에서 이 에너지를 현현시키고 나누어주고 표상하는 신들의 이름과 형상은 가변적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제우스와 야훼의 궁극적인 부처의 벼락, 비라코챠의 비가 내리는 풍요의 은혜, 성별식(聖別式) 미사의 방울이 고지(告知)하는 덕목이며, 성자와 현자가 도달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의 광명이다.
 
(248)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오직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靜溢)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魔)가 인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아니다.
<천상적인 것이 도(道)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가 아니다.>
 
(250) <눈이, 말이, 마음이 하릴 없다.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한다. 이를 남에게 가르칠 방도도 알지 못한다. 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도 같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까지 초월해 있다.>
 
 
제3장 귀환
 
(263)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269) 두 세계의 상호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풀려나갈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269) 그러나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280) 영웅은 의식을 잃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월래 그가 살던 세계로 되살아난다. <불가사의한 도망>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웅은 자아를 지키는 대신 자아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조력자의 은혜로 영웅은 자아를 되찾는다.
 
(282) 이것이먀말로 영웅의 궁극적인 숙제다. 빛이 있는 세상의 언어로, 언어가 무용한 저 암흑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2차원의 평면으로 3차원의 현상을 타나낼 것이며, 다차원의 의미를 3차원의 이미지로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한 쌍의 대립물에 대한 정의의 시도가 무의미한데, 어떻게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는 말로 이를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감각의 배타적 증거에만 급급하는 일반인에게 어떻게 저 만유의 근원인 공(空)을 설명한단 말인가?
 
(282)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헛된 정열에 소진된 범상한 남자와 여자에게 왜 초월적인 은혜의 체험을 그럴싸한 것, 혹은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일까?
 
(294)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위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305)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306)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306)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즉 <자기 화해 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 Law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313)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투사)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 속의 엄연한 불변성을, 존재의 영속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변화가 영속성을 파괴할 때도, 다음 순간(혹은 <다른 사물>)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제4장 열쇠
 
(319-320)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야만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빈사 상태에 바진 성화(聖畵)는 그 영원히 인간적인 의미를 다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322) 「정말 잘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
……
「정말 잘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제2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유출
 
(327) 간단하게 공식화한 이 보편적인 교리는, 이 세계의 가시적인 모든 구성물(사물과 존재)은 편재하는 힘에 의한 결과라고 가르친다. 즉 이 힘은 모든 구성물의 생성 원리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 현현해 있을 동안 그들을 지탱하고, 그들을 채우며, 궁극적으로 그들이 돌아갈 귀소(歸巢)라는 것이다.
 
(330) 분화되지 않았으면서도, 도처에서 개체화된 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를 인식해야 하는 기관에 의해 좌절당한다. 인간이 지닌 감각 능력의 형식과 인간이 지닌 생각의 범주는 이 권능의 현현 그 자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마음의 기능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다채롭고 유동적이고 변화 무쌍하고 복잡한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332) 삶은 공주의 잠이고, 죽음은 공주의 깨어남이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영웅은, 그 자신이 자기 소멸의 편의수단일 분이다. 영혼을 깨우는 신은, 그 영웅과 죽음을 함께 한다.
 
(339) 보이지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추정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다.
의식 상태에 있는 만물이 공유하는, 자기 인식의 본질.
현상계는 이 안에서 소멸한다.
이는 평화요, 행복이요, <둘이 아닌 것>이다.
 
(342) <우주의 끝을 헤아리고, 그 끝이 곧 시작임을 아는 자라야 현자라고 불릴 만하다.>
 
(348) 세상이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357) 남녀간의 사랑의 신비에 따르면, 애정의 궁극적인 경험은 곧 이원성이라는 환상의 배후에 <둘은 곧 하나>라는 등식의 깨달음이었다. 이 자각은, 우주의 만상(인간, 동물, 식물, 심지어는 광물까지도)은 하나라는 자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애정의 체험은 우주적 체험으로 확산되고, 이 자각에 이르게 한 애인은 창조의 거울로 확대된다. 이러한 것을 체험한 남성이나 여성은 쇼펜하우어의 이른바 <도처에 널린 아름다움에 대한 앎>을 손에 넣은 셈이다. 바야흐로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고, 원하는 모습으로 둔갑해서 이 세상을 한유하며>, <오, 놀랍도다, 놀랍도다>로 시작되는 우주적 합일의 노래를 부르는 경지인 것이다.
 
(365) 여기에 신화의 근본적인 모순, 즉 이중 초점의 모순이 있다. 우주 발생적 순환의 초기에 <신은 관여하지 않으나>, <신은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는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운명은 <우연히> 그러나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존재하고, 폭발하고, 해소되는 형식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덧없는 피조물들이 경험하는 것은 전쟁 구호와 고통의 비명이다. 신화는 이 고뇌(시련)를 부정하지 않는다. 신화는 안으로, 뒤로, 그 주변으로 본질적인 평화(천상의 장미)를 거느리고 있다.
 
(372) 그들은 그림자를 본질로 오해한다. 그들은 그림자 영역에서의 필연적인 불완전성을 상징하는데, 우리가 이곳에 남아 있는 이상 장막은 걷힐 수 없다.
 
 
제2장 처녀의 잉태
 
(380) 우주적 여신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쓴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창조의 결과란 다양하고 복잡한 데다, 창조된 세계의 관점에서 경험할 때면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어머니는 동시에 죽음의 어머니다. 이 어머니는 기근과 질병이라는 추악한 마귀의 가면을 쓴다.
 
(389) 인간이 시야도 이제 좁아져 오직 가시적이고, 손에 잡히는 존재의 표피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심연을 투시할 전망은 이제 사라졌다. 인간 고뇌의 의미 심장한 형상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다. 사회는 오류와 재난 속으로 빠져든다. <소자아>는 <대자아>의 재판석을 강탈했다.
 
(392) 「그분은 당신과 같은 인간의 마음 저쪽에 있습니다. 가난뱅인지는 모르나 그분은 부(富)의 원천입니다. 무서운 분인 동시에 자비의 근원이십니다. 뱀으로 만든 옷이든 보석으로 수놓은 옷이든, 입는다면 마음대로 벗기도 할 것입니다. 비실재의 창조자이신데 근본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시바는 내 사랑이십니다」
 
 
제3장 영웅의 변모
 
(396) 전에는 사상(事象)의 실체가 보였지만 이제는 그 부수 효과만 인류의 눈, 작고 현실적인 동공의 초점 앞에 모일 뿐이다.
 
(400) 가령 예수는, 엄격한 고행과 명상으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강한 신이라고 믿어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와 같은 초월적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 그의 행적을 글자 그대로 흉내내는 수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예수라는 영웅은 글자 그대로 본이 되는 전형이라기보다는 묵상해야 할 사나의 상징이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神性)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409) 문제의 숙명적인 아기는 기나긴 암흑의 기간을 견디어야 했다. 이 기간은 극히 위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며,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다. 그는 자기 내부로 깊이, 혹은 미지의 세계인 외부로 던져졌다. 어느 경우든 그를 당혹케 하는 것은 미지의 암흑이다. 이곳은 으외의 존재, 자비로운 동시에 심술궂은 존재의 영역이다.
 
(412) 서양의 독자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충고는, 섬김의 도는 멀고,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 익히 알려져 있고 섬기는 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을 섬기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신이란 만물에 내재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지성으로 섬기면 신으로 현현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외부 세계에 있는 신을 발견하게 하는 것도 섬기는 자에 내재하는 그 신이다. 제사가 진행될 동안 크리슈나의 존재가 이원화하는 데서 이 신비가 드러난다.
 
(422) 요컨대 도깨비-폭군은 불길한 사상(事象)의 옹호자이며, 영웅은 창조적인 삶의 옹호자이다.
 
(431)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438) 광대무변한 무대에서 신의 화신은 영웅의 생애를 실천한다. 다시 말해서 영웅의 과업을 수행하고 괴물을 퇴치하는 것이다. 영웅의 행위가 위대한 것은,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나 할 수 있으리라고 헤아리던 일을 현실적으로 바로 눈앞에서 해치우는 데 있다.
 
(441)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용,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444) 삶의 너머에서 존재하는 이런 영웅은, 신화를 초월한 영웅들이기도 하다.
……
그들은 현상의 영역을 떠나 고귀한 존재의 화신이 하강하는 곳, 보살이 머물렀던 곳, <거대한 얼굴>의 옆모습이 <현현하는> 영역으로 들어갔다. <신비에 싸여 있던> 옆얼굴이 드러나면, 신화는 부차적인 언어이며, 침묵이 궁극적인 언어가 된다. 정신이 신비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남는 것은 오직 침묵 뿐이다.
 
(445)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제4장 소멸
 
(473)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 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480)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483) 이 표적의 중심에 이르면, 이기주의나 이타주의의 문제는 사라진다. 개인은 율법 안에서 자기를 잃고, 우주의 전적인 의미와 동일하게 재생한 것이다. 세계는 그를 위해, 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신은 이렇게 말했다.
「오 모하메드여, 네가 없었다면, 내 저 하늘도 만들지 않았으리라」
 
(484) 오늘날 집단 속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도 그렇다. 모든 것은 개인에 귀착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란 완전히 우의식적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동인(動因)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의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교류 통로는 단절되고, 우리는 둘로 찢기고 말았다.

(486) 의식은 오늘 밤의 꿈을 통제할 수도 예언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상징을 발명할 수도, 예언할 수도 없다. 모든 일은, 현대 세계의 살아 있는 심성의 심층에서는 물론, 전지구가 한 덩이로 맞붙은 거대한 전장에서 길고 무서운 과정이라는 전혀 다른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지금 쉼플레가데스의 두 바위 산이 서로 부딪히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우리의 영혼은 이 쉼플레가데스를 지나가야 한다.
 
(486) 『베다의 말씀처럼』,「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
 
(487-488) 이제는 오직 인간만이 결정적인 수수께끼다.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회의 이미지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 <너>로 이해되어야 한다.
 
(488)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가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역자후기
 
(490)「시인적 본성은 심리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고, 심리학적 관심은 신화에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4. 내가 저자라면

10월은 참 정신 없이 내달렸다. 8, 9월이 '경영'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묶여있었던 탓인지 10월의 책들이 준 변화의 충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니체와 고병권은 철학의 시를 통해 딱딱해진 머리를 연신 망치질해댔고, 요한 호이징하는 학자다운 근면한 자세로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 정도가 과연 공부더냐!'하며 큰 호통을 쳤다. 신동엽은 혁명의 시, 하늘의 시로 '월급'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초라한 영혼을 뒤흔들었고, 조셉 캠벨은 영웅의 신화를 통해 그저 표면에 머물고 있는, 남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내 척박한 마음의 밭을 갈아엎었다.

어찌 보면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안될 것 같은 무용한 이 책은 일종의 열쇠 같았다. 내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와도 같았다. 그런 예감 때문이었을까.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책을 펼쳐 드는 나의 마음은 마치 어린 시절, 따뜻한 이불을 덮고 이모의 옛날 이야기를 기다리는 듯한, 굳게 잠긴 동굴 속 마법의 문을 여는 비밀의 열쇠를 손에 쥔 듯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호모 루덴스'에 호되게 덴 경험이 있긴 하지만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가슴 뛰는 법이다.

1)책의 미덕

저자 조셉 캠벨은 해박한 지식과 전세계의 신화를 두루 아우르는 폭넓은 시각으로 수많은 신화, 민담, 옛날 이야기 속의 공통적인 뼈대를 도출해 내었고, 이를 '출발, 입문, 귀환'이라는 순환하는 원의 이미지를 통해 단순화시켜 독자에게 명료하게 설명해준다.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p. 45)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이 단지 단순화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 또한 책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수많은 나라와 시대를 자유롭게 오가며 인용된 신화 속 이야기들은 독자들에게 굳이 원전을 찾아보지 않고도 그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말 그대로 이 책은 수많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재미있다. 베다 경의 말처럼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 (p. 6)

여기에서 또 하나, 이 책의 미덕이 발견되는데, 심오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명쾌하게 풀어내는 저자의 혜안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진리의 단순함과 이야기가 주는 서사의 풍요로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음악과 같은 리듬감을 독자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핵심을 통찰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재미도 맛볼 수 있는 절묘한 균형 감각이 제법 두꺼운 책임에도 읽는 동안 크게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책도 음식과 마찬가지로 재료도 중요하지만 그 배합 비율 또한 간과할 수 없음을 말해 무엇 하랴.

2) 자신의 재발견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종교에 대한 갈등을 느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잊혀진 줄 알았던 꿈의 단편들을 떠오르곤 했다. 얕은 땅 위에 머물러 있던 좁은 삶의 지평이 조금씩 넓어지고, 영혼의 수면이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초등학교 2, 3학년때였을까? 처음 균열을 느꼈을 때...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하느님은 그리 착한 분이 아니구나. 이해하기 힘든 분이구나.' 또, 사춘기 쯤에 꾸었던 이런 꿈도 떠올랐다. '나는 미로를 헤맨다. 지저분한 시궁창 옆을 지나, 지저분한 바닥의 시장을 지나, 어느 골목의 입구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정신이 약간 이상한 듯한 묘한 아이인데, 회색빛의 창백한 얼굴인데도 야생의 생생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어린 시절 몇 번씩 다시 읽곤 했던 테세우스, 페르세우스, 이아손의 이야기도 만났고, 혼자 숲을 걸어가다, 부러진 나무와 썩어가는 나무를 보며 느꼈던 섬찟한 두려움의 감각도 다시 맛보았다.

이 책에 담긴 신화들에는 묘한 매력이 숨어 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영웅의 모험도 중요하지만 이야기들을 통해 느끼게 되는 영혼의 간지러움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신화 속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깊은 무언가가 있다. "신화는 당신이 걸려 넘어지는 곳에 당신의 보물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조셉 캠벨의 말이다. 영웅의 여정은 무언가를 새롭게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자신의 재발견'을 도와주는 책이다.

"돌이켜보면,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神的)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p. 54)

때문에 이 책의 진가를 알기 위해선 한번 읽는 것으로는 부족할 듯 하다. 옆에 두고 가끔 생각날 때면 한 번씩 꺼내 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러다 우연히 툭, 걸려 넘어진 곳에서 자기 자신의 보물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3) 영웅의 이야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첫 번째로 쓰고 싶었던 책이 바로 자신을 찾는 '영웅의 모험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에 대한 이야기…

"신이든 여신이든, 남자든 여자든, 신화의 등장인물이든 꿈을 꾸는 사람이든,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켜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동화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p. 143)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상징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써 내기에는 아직 내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고금을 오가며, 동서양의 연결하는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폭넓은 시각에 감탄하고, 또 그래서 조금 기가 죽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포기한 것은 아니다. 계획을 조금 수정했을 뿐이다.

'실(實)을 얻어야, 허(虛)를 깨우칠 수 있다.' 나는 우선 내 삶의 현장에서 시작할 것이다. 'Brand New Days _ 새로운 날들'(가제)이란 책을 먼저 쓰리라. 이 책을 통해 내 삶의 누추한 이야기를 '전환'의 이야기로 바꾸어내리라. 초라한 젊은 날의 방황을 '경이로운' 발견으로 바꾸어내리라. 그제서야 비로서 나는 하루 동안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으리라. 평화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선 우선, 싸워야 한다. 치열한 전장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서 어찌 고요함의 소중함을 말할 수 있으랴.

"너희는, 선인(先人)이 격은 것과 같은 시련을 겪지도 아니하고 지복(至福)의 낙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 코란

나는 코란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우선 내 몫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리라. 조셉 캠벨은 '신화의 힘'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우리는 우리 몫의 삶을 살면 됩니다. 삶이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저 우리 몫의 삶을 살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지요."


#5. 에필로그

1983년 조셉 캠벨이 79세 되던 해, 그는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의 초대를 받고, 그의 저작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스타워즈' 3부작을 보기 위해 스카이워크 랜치(Skywalker Ranch)에 초대된다.



현대의 신화 '스타워즈'의 주인공인 '루크 스카이워크'와 '다쓰베이더'는 일종의 상징이다. 조셉 캠벨은 다스 베이더란 인물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조직의 뜻에 따라 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 삶에 대한 위협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이 조직은 우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조직이 과연 우리 인류의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조직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이 조직을 더 이상 섬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 루크 스카이워커는 누구인가?

그는 조직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가슴으로 사는 사람이다. "컴퓨터를 끄고, 기계를 끄고 너의 느낌에 따라 너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는 벤 케노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이다.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 우리 또한 하늘을 걷는 스카이워커가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캠벨의 말처럼 "우리의 이상을 움켜안고, 루크 스카이워커처럼, 조직이 가해오는 비인간적인 압제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를 사랑하는 스카이워크가 되고 싶어하지만, 현실에는 자신을 통제하고,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드는 다스 베이더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다스 베이더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다. 우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완전히 넘어설 때야 비로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부디 "포스가 당신과 함께 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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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11.06 09:20:50 *.227.22.57
이거이거~ 점점 갈수록 멋지구나. 넌 어째 지치지도 않냐? ㅎㅎ

그나저나 도윤아. 넌 언제 시간되는거냐? 알려준다고 하지 않았나? ㅎㅎ 에잇! 성질 급한 내가 전화해봐야겠구나.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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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1.06 10:14:41 *.249.162.56
하하^^ 지금 바로 전화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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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1.09 07:08:59 *.72.153.12
여러 책을 읽어가며 영감을 엮어내는 게 놀랍다. 도윤 너는 그게 너의 기질이라고 하지만, 그것 외에 다른 것도 있나보다.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것을 부러워하다가
문득 도윤 너는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물러섬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깊어지고 책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내면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 앞에서 달아나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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