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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6일 01시 43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민음사>

신화에 대한 이야기로 이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창의적인 발상을 하는 한 가지 방법을 탐구하는 사례로 생각하여도 좋을 듯하다. <생각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창조적 발상의 근원은 ‘What'보다는 ’How'에 달려있다고 말하면서,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도구로 열세가지를 제안한다. 그 중의 한 가지가 ‘패턴인식’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아폴로든, 동화 속의 왕자든, 듀톤의 신 오딘이든, 부처든, 모든 영웅은 일정한 영웅의 패턴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서로 접촉한 적이 없는 세계 각 문화권의 무수한 영웅들을 분석하여 보면, 결국은 하나의 영웅으로부터 탄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참으로 믿기 어렵지만, 평소 여러 종교에서 가르치는 말씀들을 통해 공통된 부분을 많았음을 느꼈고, 그에 대한 근거가 여기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신화에 대해 관심을 가진 독자는 물론 ‘단순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다. 다양한 사례들로부터 공통된 패턴을 끌어내는 한 모델로 삼아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빨간색 펜을 준비해두어야 한다. 밑줄 칠 깊이 새겨둘만한 말들이 많기 때문이다.

‘영웅은 하나이되, 그 영웅은 여러 이름으로 탄생한다.’ 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린다.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은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1904년 미국의 뉴욕에서 태어나, 평생을 비교신화학자로서, 서로 다른 문화권 신화와 종교의 공통되는 현상과 기능을 연구해 온 분이다. 어린 시절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화를 접하고, 문화적 접촉이 전혀 없었던 이들 민화와 아더왕 전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콜롬비아 대학과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아메리칸 인디언에 관한 책을 즐겨 읽었으며, 뉴욕 맨허튼에 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방문하였다. 캠벨은 그 박물관의 한 코너에 있는 토템 기둥에 특히 매료되었는데, 그 뒤로 1925년과 1927년에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에서 중세 프랑스 어와 산스크리트 어를 공부하였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존 스타인벡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츠와 교류하였다. 1934년에는 캔터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큐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그는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전4권)을 펴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신화의 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의 가면 1~4』,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세상을 떠났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6]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

[15] 정신분석학자들의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저술은 신화학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료다. 왜냐하면, 세부적인 데 이르면 견해가 다소 다를 수 있고, 특정 사례나 문제에 대한 해석이 서로 상반되는 경우는 있지만,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16] 인간이 가진 심성 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빨리 모태를 떠난다. 미완성인 상태,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17] 유아가 최초로 적의를 갖는 대상은 최초로 애정을 투사하는 대상과 일치하고, 유아가 최초로 갖는 이상은(이때부터 유아는 축복, 진리, 아름다움, 완전함이라는 이미지를 무의식 기저에다 간직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라는 이원일체 상황이다.

[22]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24] 우리의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인생의 오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화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도전해 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인간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남근이다.

[29]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35] 놀라운 것은 이 꿈에는, 영웅이 체험하는 모험이 지닌 보편적 신화 양식의 기본적인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의미심장한 위험과 장애와 도정에서 겪는 행운의 모티프는 갖가지 양태로 굴절하게 되는데, 바로 이 책에서 우리는 수백 가지로 굴절된 모티프와 만나게 된다.

[37]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우리 대부분은 가슴 안팎으로 이 미궁을 안고 있다는 이야긴데 아, 미노타우로스와 맞설 용기를 심어주는 미궁 탈출의 단서와, 괴물을 만나 도륙한 다음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이끌어줄 안내자, 저 아름다운 처녀 아리아드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38]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39]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41] 시공의 제약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하찮은 논리와 정서적 집착으로 찾아드는 죽음, 우리들이 흙으로 돌아가려할 때 비로소 온몸을 흔들면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보편적 생명에 대한 이러한 재인식, 이 생명을 향한 우리의 가파른 중심 이동, 그리고 <운명에의 사랑>, 즉 필멸의 운명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의 비극적 예술의 체험을 구성한다. 그 기쁨, 구원의 황홀은 바로 그 안에 있다.

[43]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 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43]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50] 대양을 방불케 하는 동양의 광대한 이미지로 표현되든, 그리스의 웅장한 서사시로 표현되든, 아니면 장엄한 성서의 이야기로 표현되든,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50] 장소가 어디 건, 그들의 관심(종교적, 정치적, 혹은 개인적)이 어디에 있건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되며, 영웅의 부재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거듭난 자, 위대한 자, 창조력을 얻어 돌아오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역시 한 목소리가 된다.

[53] 모험의 형태, 등장인물의 역할, 마침내 얻은 승리의 내용물에는 놀라울 정도로 별 차이가 없다.

[55] 위대한 영웅은 위대한 행적을 통해, 이 다양한 얼굴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고, 또 남들에게 알리게 된다.

[62]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71]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124]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132]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133] 이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용될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142] 수메르의 신화는 서구 세계에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수메르 신화는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니키아 전통 및 성서 전통(회교와 기독교를 잉태시킨)의 근원인 동시에 켈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슬라브인, 독일인의 이교적 종교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54]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156]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159]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저긴 결혼은 영웅의 삶 전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160] 우리는 이 일반적인 유형과의 비교에서 우리 자신의 입장을 밝혀내야 하고 이것을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는 제약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데 필요한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 도깨비란 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도깨비들이란, 자기 인간성의 미해결 수수께끼가 투영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개인이 자기 삶을 파악하는 징후인 것이다.

[160] 현대의 정신분석가 진료실에서는, 영웅 모험의 각 단계가 환자의 꿈과 환각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177]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 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191] 태양의 문을 통해 우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은혜는, 다른 존재를 징벌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벼락의 에너지와 동일함을 뜻한다. 불멸의 존재가 내뿜는, 망상을 쫓는 빛은, 창조하는 빛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192]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를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자기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194] 아들이 아버지를 알 나이가 되면 시련의 고뇌가 이미 그의 내부에 태동해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가 아닌, 행복이 기다리는 현존의 완전한 현현이다.

[196] 인간에게 알려진 신들 가운데 관세음보살만큼 많은 기도를 가납하는 신도 없을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즉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 붙여지고 경계 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공의 무량세계가 열린다)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그는 신의 은혜 안에서 중생을 돕는 존재로, 중생의 존재 안으로 삼투한다. 따라서 광대한 중생을 부처의 정신적 왕국 도처에서 그에게 하는 기도는 모두 가납된다.

[198] 관음은, 범인과 현자에게 두루 신성한 존재다. 왜냐하면 관음이 세운 맹세에는, 세상을 구제하고 세상을 버티는 심오한 직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198] 이때 체득되는 것은, 찰나와 영원이, 같은 경험에 대한 두 가지 측면들, 즉 동일의 비이원적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층면들이라는 사실이다. 즉 영원의 보석이 탄생과 죽음의 연화 속에 들어 있다는 <옴 마니 밧메 훔>인 것이다.

[200] 낙원은 <대립적인 것이 공존>하는 곳이었는데, 이제 인간은 이 낙원의 울타리에 의해 하느님에 대한 환상과 하느님 형상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단절되었다.

[200] 즉 영원성이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이 재결합으로 새 생명의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206]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서 꾸어준다.

[207] 자질구레한 신조, 예배의 방법, 교회 행정조직의 설립 같은 비교적 사소한 문제들(서양 신학자들은 여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를 무슨 중요한 종교 문제인 양 덤빈다)은 지켜지지 않을 경우 가르치는 일 자체에 부수적인 문제가 생기는 정도의 현학적인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

[212] 신이 종족적, 인종적, 국가적, 혹은 분파적 원형이라면 우리는 그 신에 의해 사역당하는 전사들이다. 그러나 신이 우주 자체의 주인이라면, 우리는 전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존재, 즉 모든 인간이 한 형제임을 깨달은 존재다.

[213] 열반이란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끈다는 뜻이다.

[215] 종교적인 가르침의 목적은 개인을 일반적인 미망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 아니라 그 미망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223]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나오면(영원으로의 탄생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간다.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의 본체 안에 있다는 것까지 안다.

[248]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오직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가 안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 아니다.
<천상적인 것이 도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

일본에는 <인간이 재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 신들이 웃는다>는 속담이 있다. 신도에게 내리는 은혜는 그 신도의 처지와 그가 발원한 소망에 준하여 내려진다. 은총이란, 특수한 경우의 발원에 내려지는 삶의 에너지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을 입고 있는 영웅이 완전한 깨달음의 은총을 구한다면 몰라도 그가 장수의 은혜와, 이웃을 시해할 무기, 혹은 자식의 건강 등을 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281]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기꺼이 이 일을 맡든, 어쩔 수 없어서 맡게 되든, 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2] 밤에 꿈으로 꿀 때엔 중요하게 보이다가도 밝은 대낮에 생각하면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시인이나 예언자는 맨 정신으로, 전날 밤에 했던 기도들 후회한다. 사회를 악마에게 넘겨버리고, 저 자신은 천상의 바위굴에서 문을 닫고 은거하는 편이 쉽기는 쉽다. 그러나 어느 정신적 산과의가 <시메나와>를 쳐놓고 퇴로를 차단한다 해도, 시간 속에서 영원을 표상하고, 시간 속에서 그 영원을 지각하는 작업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294] 카마르 알 자만의 기나긴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운명이 일상의 삶으로 구체화되는 완만하면서도 놀라운 역사다. 그러나 이 운명이 모든 이에게 다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체험하고, 반지를 얻어 다시 현실로 귀환한 영웅에게만 가능하다.

[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3원적이든, 2원적이든, 1원적이든, 다신론적이든, 유일신론적이든, 단신론적이든, 회화적이든, 언어적이든, 문서로 기록된 사실이든, 묵시적 환상이든)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305] 의미를 실어 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예수의 변모는, 개인적 의지를 소각시켜 버린 추종자들, 즉 스승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정에 의해 <인생>, <개인적인 팔자>, <숙명>이 제거된 지 오래인 사람들에 의해 목격되었다는 사실이다.

[306]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즉 <자기 화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313]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325]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턴과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고대적 인간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26]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이를 적절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오늘날의 세계에, 인간의 특징적 심층에 관한 풍부하고 웅변적인 자료를 장만해 주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투시경으로 소개하는 예화들은 동양과 서양, 미개인 및 문명인, 현대 및 고대 <호모 사피엔스>의 수수께끼에 관해 지금까지 묻혀 있던 사실을 밝혀준다. 그 전경은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이를 읽고, 그 일정한 패턴을 연구하고, 그 다양성을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의 운명을 조형해 왔고, 앞으로도 우리 사적, 공적인 삶을 주관해 나갈 그 무서운 힘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326] 신화와 꿈은 같은 근원(즉 환상이라는 무의식의 샘)에서 유래하고 그 문법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327] 그들은 불합리하게 신경증적 투사라는 방법을 통해 무의식을 실제 행위에다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완숙하고, 온당하고 실재적인 이해를, 엄격한 통제 아래 유아기적 원망이나 공포로 되돌려 놓는 것일 뿐이다. 이 말이 비교적 단순한 민간의 신화 체계(원시적인 수렵 종족이 의지하는 신화 및 제의 체계)에도 해당된다면, 호메로스의 서사시, 단테의 <신곡>, <창세기>, 그리고 동양의 시간을 초월한 사원이 반영하고 있는 우주적 메타포는 어찌된 일인가?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상징적 심상들은 인간의 삶을 버티고 철학, 시, 그리고 예술의 영감을 자극해왔다. 노자, 부처, 조로아스터, 그리스도, 혹은 모하메드에 의해 거론된 전승적 상징(도덕적,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전교한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에 의해 채용되었던) 덕분에 우리는 암흑이 아닌 깨어 있는 의식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331]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31] 현대의 심리학적 해석 체계의 열쇠는 바로 <형이상학적 영역 = 무의식>이라는 등식이다. 이 문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가 있다면 전후항을 바꾼, 즉 <무의식 = 형이상학적 영역>이라는 등식이다.

[342] 우리의 참 존재를, 파멸하는 형상이 아닌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화 체계는 그리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화 체계의 문법을 숙지하고 나면 비극적이란 표현은 천만부당하게 느껴진다. 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존재는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꿈으로 존재한다.

[348] 생명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원적 형태 아래 자가 생산을 위해 양극화했다는 것이다. 이 전 과정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성적인 용어로 나타낼 수 있다.

[365] 여기에 신화의 근본적인 모순, 즉 이중 초점의 모순이 있다. 우주 발생적 순환의 초기에 <신은 관여하지 않으나>, <신은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는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운명은 <우연히> 그러나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00]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428] 적과 싸워서 장악하는 주도권, 괴물과 싸워서 획득하는 자유, 폭군의 족쇄에서 풀려난 에너지는 여성으로 상징된다.

[440] 형제는 경기장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각기, 크리슈나에게서 자기의 모습을 보았다. 씨름꾼은 크리슈나를 씨름꾼으로 보았고, 여자들은 그를 보석상자로 생각했다. 신들은 그를 자기네 최고신으로 알아보았고 칸스는 그를 죽음의 화신인 마라로 보았다. 칸스는 씨름꾼들을 보내어 그를 대적하게 했으나 크리슈나는 그중 가장 힘센 자를 죽여 버리고는 왕좌로 뛰어올라 폭군의 머리채를 거머쥐고는 한주먹에 때려죽였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 신들, 성인들은 모두 기뻐했으나 왕비와 후궁들은 앞으로 나와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다. 크리슈나는 애곡하는 그들을 보고, 존재의 뿌리 되는 지혜로 그들을 위로했다.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441] 영웅이 변화를 가져오듯이, 무섭고 잔인한 폭군은 한 가지 편견에 고착된 인간을 표상한다. 시간의 순간순간이 이전의 순간순간의 족쇄에서 해방되듯이, 이 괴룡과 압제자는, 그 전세대, 즉 구세주를 맞던 그 이전 세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480] 이제 인간의 시야는 넓어졌다. 맡는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잠재적이긴 하나 필연적으로 그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480]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480] 진정으로 종교적인(순전한 주술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제의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피할 길이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는 계절적 축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484]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신화 체계(이제는 거짓으로 알려진)가 위대한 조정 수단으로 통영되던 비교적 안정되어 있던 시대 사람들이 안고 있던 문제와는 정반대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 당시엔, 모든 의미는 집단적인 것에, 위대한 익명의 형식에 귀착되었으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개인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오늘날 집단 속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도 그렇다. 모든 것은 개인에 귀착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란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동인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의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교류 통로는 단절되고, 우리는 둘로 찢기고 말았다.

[486] 우리는 새로운 상징이 보이게 됨에 따라, 이 상징이 지구의 갖가지 요소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한 민족 특유의 생활환경, 인종, 그리고 전통이 유효한 형식으로 화해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갖가지 상징을 통해 동일한 구원이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고, 또 알아야 한다. <베다>의 말씀처럼,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

[488]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 <너>롤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488]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평생을 비교신화학자로, 모든 문화권의 신화를 아우르는 신화의 원형을 찾고자 노력한 결과로 이 책이 탄생하게 되었다. <신의 가면>이라는 제목의 4부작 책의 서곡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바로 이 책이라고 한다. 낯선 제목이 책에서 느낀 처음 호기심을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의 주장은 무대가 다르고, 사건이 다르고, 의상이 다르지만, 인간의 무의식이 투사된 영웅 신화에는 거의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세계로부터의 분리를 상징하는 출발,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을 얻는 모험,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모험의 형태, 등장인물의 역할, 승리의 상징물에도 놀라울 정도로 차이가 없다고 한다.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신화는 꿈과 동일한 패턴을 갖는다고 한다. 융파 심리학의 관점(인간은 무의식 속에다 고대적 경험의 잔존물인 집단 무의식을 고유하는데, 꿈의 구조물인 원형 패턴은 곧 고대의 잔존물인 신화 상징을 나타낸다)으로 볼 때, 응축, 치환, 형상화 작업의 과정이 그대로 신화 형성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가 신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자료임을 보여준다.

세계 여러 나라의 예화를 넉넉하게 소개함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저자의 주장을 나름대로 설득하고 있다. 되도록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인도 알아들을 수 있게 그리려고 노력한 면이 엿보이지만, 나의 무지 탓인지 행간을 이해하는데 어려움도 많이 느꼈다. 또한, 최근에 신의 존재를 인정하여 영세를 받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로 인해 심적인 고통을 느끼는 부분도 있었다.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 331)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p 400)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형태의 신화들 속에서 공통된 패턴을 뽑아낸 부분은 단순화 전문가를 희망하는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필요없는 부분을 제거하고 핵심적인 요소만 남긴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아 개인적으로 매우 아쉽다. 그리고 많은 예화를 넣은 것은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는 방해가 되기도 하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였을까? 반대로 나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의 교차점에 무엇이 존재할까? 책을 읽는 동안뿐 아니라 읽은 후에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영웅이기에 그런 패턴을 만들었을까 아니면 그런 패턴 때문에 영웅이 되었을까. 영웅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영웅의 패턴을 통해서 나만의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겠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영웅에는 반드시 모험이 따른다는 것이다. 모험하지 않는 영웅은 없다는 말이다.

영웅이 되고자 하는 욕심은 없지만 모험 없는 승리는 없기에 새로운 모험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경영소설을 쓰는 것을 앞당기기로 하였다. 내가 쓰고자 하는 내용이 경영소설이고, 최근에 쓴 글 중에서 가장 몰입하여 쓴 경험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몰입의 즐거움을 가장 많이 느낀 시간이었다. 이번 주에도 다시 한 번 그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 그것이 혹시 신이 나에게 주신 복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우리에게 전하고 하는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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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7.11.11 14:06:21 *.131.127.35
여해 ! 슬퍼 마시요...
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던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존재를 느낀다는 거,,, 그리고 다가서려 한다는 거
그것이 더 나은 하루를 있게 한다는거가 중요하지 않겠습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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