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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6일 20시 01분 등록
자신을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영웅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이윤기 옮김/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저자 조사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래의 내용은 책의 표지 부분에 나온 저자 소개글입니다.
조세프 갬벨
Joseph Campbell(1904-1987)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조셉 갬벨은,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소년시절, 북미대륙 원주민의 신화와 아서왕 전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친 그는ㄴ, 콜롬비아 대학과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호를 두루 섭렵한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그는 『신들의 가면 The masks of God』(전4권)을 펴낸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그 역저의 서곡에 해당한다. 1934년 이래로 사라 로렌스 대햑의 문학부 교수로 재직해 온 그는, 프린스턴 개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다. 볼링겐 시리즈는 신화, 종료, 철학, 심리를 두루 연계하는, 인간과 문학의 뿌리에 대한 연구가 집약되어 있는 총서이다. 본 서는 볼링겐 시리즈 제 17권의 완역본이다.

2. 책에 밑은 그은 부분들 (인용)
프롤로그 원질신화

[14]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심연에서 유해하는 것일가?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가?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16] 인간이 가진 심성 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중에서도 인가이 가장 오샛동안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17] 많은 사람이 저 자신과 어머니가 짝는 되는 꿈을 꾸었거나와 이에 괘념치 않는 자, 그 팔자가 순탄하리라.

[27] 전통적인 통과제의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 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임 의식은 r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신명(神命)이라는 망토를 입혀주었다.

[28] 오만에 빠진 폭군의 자아는, 그의 사업이 아무리 번창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 그의 말에 저주를 내린다. 대개는 제어가기 어려운 자신의 충동적 소유욕의 그림자인, 예상했던 주위의 공격에 스스로 놀라고 겁을 집어먹고, 만나는 족족 싸우고 격퇴시키는 이 입지전적인 독재자의 에고는, 아무리 세상사에서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사실은 자신과 이 세계에 종말 고하는 使者다.

[29]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30] 영웅이 첫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因果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시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적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 융의 소위 <원형 심상>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35]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 단테의 신곡<지옥편>의 일부

[38] 재미있는 것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이,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이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은 우리로부터 먼데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수세기 동안 다이달로스는 장니 및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저긴 현상의 상징, 사회정의의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의 유형을 대표해 왔다. 그는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으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영웅이다.

[38]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 놓은 실만을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44]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 地上的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55]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은 곧 너를 찾음이다.

[58]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조본의 신비인 것이다.

[62]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제1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출발

[71]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기는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72] 소명은 언제나 변영의 신비 mystery of transfiguration, 완성되면 곧 죽음과 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통과 으레 혹은 순간을 개막한다.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이제 너무 웃자라, 낡은 개면과 정서 패턴은 몸에 맞지 않는다. 바야흐로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82]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으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96]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96] 러시아 원정에 즈음해서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것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는 없을 것이다.

[123]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신전 안, 고래의 배, 세계라는 산정된 공간 건어 위, 아래로 보이는 천상적 공간은 결국 하나다.

[123] 사람들 가운데엔 그저 물리적으로 신전 수호자 앞을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괴물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될 수는 없다. 침입자가 이 성전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는 한 얻은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러한 괴수들을 그저 괴물로만 본다.
* 절의 입구에서 사천왕문을 지날 때의 두려움...
영화 인디아나존스에서 장애물을 통과할 때, 신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한 존재라는 자각과 함께 회개하고 신을 경배하려고 몸을 굽혀야 하는 것처럼...

제2장 입문

[132]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133] 이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딸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용도리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를 강화하고 잇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143]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143] 시련의 첫 관문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질문은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자아가 스스로를 주음에 내어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왜 그런가하면, 주위에 있는 것은 머리가 많은 휘드라이기 때문이다. 절단한 곳에다 비방을 쓰지 않는 한 하나를 자르면 두 개의 머리가 나타난다.

[156] 나는 왕도라고 합니다. 티라의 왕이시여! 내가 바로 왕도입니다. 가십시오, 물을 떠서 형제들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대와 그대의 자손에게 왕위와 왕권이 영원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가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170] <화해 atonement>, 즉 <하나되기 at-one-ment>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신(초자아)으로 보이는 용과 죄악(억압된 이드))으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177] 한 아이가 자라, 어머니 품 속의 모적인 자장가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 때, 이 아기는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머니가 그때까지 <산>과 <악>을 표상하고 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

[178]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문 노릇을 해야 한다.

[184] 오라, 오 디튀람보스 Dthyrambos,
나의 이 남성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라.

[193]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
네 팔이 하느님의 팔 만큼 힘이 있단 말이냐?
너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와 같단 말이냐?
그렇다면 권위와 위엄으로 단장하고
권위와 영화를 걸치고
너의 분노를 폭발시켜 보아라.
건방진 자가 보이거든 꺽어버려라.
불의한 자는 짓밟아버려라.
땅굴 속에 가두어버려라.
땅굴 속에 가두어버려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아주리라.
네가 자신의 힘으로 헤어날 수 있으리라고.

[196]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붙여지고 경계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空의 무량세계가 열린다)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신의 은혜 안에서 중생을 돕는 존재로, 중생의 존재 안으로 삼투한다. 따라서 광대한 부처의 정신적 왕국 도처에서 그에게 하는 기도는 모두 가납된다.

[211] 우리는 모두 보살 이지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 받는 육신이 다른 육신적으로부터 우협을 받을 경우데도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깨비는 우리 기를 꺾지만, 유능한 휴보자인 영웅은 <사나이답게> 입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

[211] 이 자아는 스스로를 저 자아에게 넘기고, 저 자아는 스스로를 이 자아에게 넘긴다. 그래서 두 자아엔 서로 얻음이 있다. 그는 이 형상으로 저 세계를 얻고, 저 형상으로는 이 세계를 경험한다. 이것은 이슬람 밀교에도 알려져 있다. <30년간 위대한 신은 나의 거울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내 거울이자 말하자면 예전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고 위대한 신은 그 자신의 거울이다. 요컨대 나는 나 자신의 거울이다. 신은 내 입으로 말하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217] <서양은 판단은, 자기 확신의 필요성 때문에 현재까지 곡해되어 왔다고 하는 편이 안전하다.>

[223]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나오면(영원으로부터의 탄생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간다.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자가기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의 본체 안에 있다는 것까지 안다.

[249] 개인적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국에 따른 고통이다.

[250] <눈이, 말이, 마음이 하릴 없다.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한다. 이를 남에게 가르칠 방도도 알지 못한다. 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도 같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까지 초월해 있다.>
이것은 최고의, 그리고 궁극적인 시련이다. 영웅의 시련일 뿐만 아니라 신 자신의 시련이기도 하다.

제3장 귀환

[269] 그러나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294]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위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305]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 도가도비상도?


[305] 의미를 실어 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306]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즉 <자기 화해 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 Law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307]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 삶의 자유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에서

[308] 그러므로 애착을 떠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너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원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되, 흐트러지지 말고 나가 싸우라.

[313]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투사)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 속의 엄연한 불변성을, 존재의 영속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변화가 영속성을 파괴할 때도, 다음 순간(혹은 <다른 사물>)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제4장 열쇠

[319]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은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
제1장 유출

[327] 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사실은 모든 생각과 행동)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총체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원리는 인간의 육체의 형태 및 신경 구조처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유전된 것이다.

[332] 신 역시 스스로 하강하여 이 현상계의 고난에 몸을 맡겼다. 신은 인간의 삶을 떠맡고, 인간은, <대립물이 합일하는> 순간, 즉 신과 인간이 서로의 먹이로 각각 하강하고 상승하는 길목으로서의 태양의 문턱에서 만나는 순간에, 제 내부에 있는 신을 방면한다.

[347] 하늘과 땅이 서로 나뉘기 전에는 모든 것이 혼돈이라고 불리어지는 어둠의 거대한 덩어리였다. 여기에서 다섯 요소의 정기가 형상을 갖추니, 이어 다시 노인故老으로 변했다. 첫 번째 나타난 현인은 누런 노인이니 곧 흙의 주인이고, 두 번째는 붉은 노인이니 곧 불의 주인이었으며, 세 번째로는 어두운 노인이니 곧 물의 주인이었다. 네 번째로 나타난 것은 나무 왕자로 나무의 주인이었고, 다섯 번째는 쇠 어머니(金母)이니 곧 쇠붙이의 여주인이었다.
* 중국의 신화 조형물의 다섯 현인의 인격화

[348] 회임에서 생산이,
생산에서 생각이,
생산에서 기억이,
기억에서 의식이,
의식에서 욕망이,

언어가 풍부해졌다.
언어는 어렴풋한 인식 안에 있었다.

언어가 밤을 만들었다.
큰 밤, 긴 밤,
낮은 밤, 아주 높은 밤,
두껍게 느껴지는 밤,
만져지는 밤,
보이지 않는 밤,
죽음과 더불어 끝나는 밤.

무에서 출산이,
무에서 생산이,
무에서 풍요가,
생산의 힘,
살아 잇는 숨결,
숨결은 빈 공간에서, 우리의 위에 있는 대기를 생산했다.

대지 위에 떠 잇는 대기,
우리 위에 있는 거대한 창공은
새벽과 동거했다.
그리고 달이 생겨낫다.
우리 위의 대기는
빛나는 하늘과 동거했다.
이어 태양이 생겨났다.
달고 태양은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하늘의 큰 눈처럼
이어 하늘은 빛이 되었다.
이른 새벽과 이른 낮이 되었다.
한낮, 하늘에서 쏟아지는 한낮의 빛이 되었다.

우리 위의 하늘은 하와이키와 동거하여
땅을 낳았다.

[353] <공간은 넓게 펼쳐진 것이 아닌, 오목한 형상으로 끝이 없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 무한 위로 떠 있는 껍질이다.>

[355] 그는 두려웠다. 사림이 혼자 있으면 두려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내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 그는 짝이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는 남여가 부둥켜 안고 있는 형상만큼 커졌다.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인 이 형상을 둘로 나누었다. 향상은 남편과 아내로 나뉘었다.

[359] 이들은 모두 랑기와 파파의 포옹에 갇혀 있었다.
.....
「... 그 둘을 떼어 놓는 편이 좋겠다. 하늘을 우리 머리 위에 있게 하고, 땅은 우리 발 아래 있게 하도록 하자. 자 하늘은 우리에게 낯선 존재이게 하고, 땅은 우리를 보살피는 어머니로 우리 가까이 있게 하도록 하자!」
.... 이제 마테-마후타는 머리를 어머니 대지에다 파묻고, 발을 아버지 하늘에 버친 채 있는 힘을 다해 등과 사지를 펴고 있다. 랑기와 파파는 서로 떨어져 비명을 지르며 자식들을 원망한다.
..... 그러나 타네 마후타는 몽을 구부리지 않는다. 부모의 원망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래로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 위로 하늘을 밀어올리는 것이다.

[365] 비록 살해당하여 해체되었으나 티아마트에게도 공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싸움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혼돈의 괴물인 티아마트는 스스로 자신을 해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타아마트의 형해는 각각 그 놓여야 할 곳으로 이동한다. 마르둑과 그의 뒤를 잇는 신들은 티아마트라는 존재의 부분에 다름아니다. 이 창조된 형상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은 강력한 무기에 의해 위험과 고통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조의 현실이란 중심점에서 보면, 티아마트의 육신은 자발적으로 이에 응한 것이다. 따라서 그 육신을 도륙한 손은, 희생자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대리인의 손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잔을 돌리지 않았다.
[호모 루덴스]에서 디오스소느는 죽고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 데, 죽음은 모두 의도되고 자발적적인 죽임인 듯하다.

[365] 여기에 신화의 근본적인 모순, 즉 이중 초점의 모순이 있다. 우주 발생적 순환의 초기에 <신은 관여하지 않으나>, <신은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는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운명은 <우연히> 그러나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존재하고, 폭발하고, 해소되는 형식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덧없는 피조물들이 경험하는 것은 전쟁 구호와 고통의 비명이다. 신화는 이 고뇌(시련)를 부정하지 않는다. 신화는 안으로, 뒤로, 그 주변으로 본질적인 평화(천상의 장미)를 거느리고 있다.

[368] 강가에서 여자가 그에게 물었다.
「저희들은 어떻게 되나요? 언제까지 살아 있게 되나요? 저희 삶에는 끝이 없나요?」
....
「아닙니다. 제가 이 돌멩이를 던져 보겠습니다. 만일 이 돌멩이가 떠오르면, 우리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만, 가라앉으면 영원히 죽어 서로의 죽음을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여자는 돌멩이를 던졌고, 돌멩이는 가라낮았다. 노인이 말했다.
「그것 보아라. 네 운명은 네가 고랄T다. 인간에겐 끝이 있을 것이다.」

제2장 처녀의 잉태

[392] 「시바는 파괴의 신입닏. 시바는 세계의 파괴자입니다. 시바가 좋아하는 것은, 시체의 악취가 풍기는 무덤 안에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그는 썩은 시체를 좋아합니다. 썩은 시체는 그의 살벌한 가슴과 같은 것입니다. 시바의 옷은 살아 잇는 뱀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시바는 가난뱅이입니다. 더구나 시바의 근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처녀가 대답했다.
「그분은 당신과 같은 인간의 마음 저쪽에 있습니다. 가난뱅인지는 모르나 그분은 부(富)의 원천입니다. 무서운 분인 동시에 자비의 근원이십니다. 뱀으로 만든 옷이든 보석으로 수놓은 옷이든, 입는다면 마음대로 벗기도 할 것입니다. 비실재의 창조자이신데 근본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시바는 내 사랑이십니다」
그러자 청년은 본모습을 그러냈다. 그가 바로 시바였다.

제3장 영웅의 변모

[431]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441] 실제로 용의 살해자와 용, 제관과 제물은, 뒤집어 보면 결국 하나다. 이 하나인 세계에서는 대립물의 양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과 거인이 끊임없이 싸우는 세계는 이쪽 세계인 것이다. 어쨌든 용(아버지)은 어디에든 있다. 消散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치 탈환으로 늘어만 간다. 용(아버지)은 우리 삶이 걸린, 죽음이다. <죽음은 하나인가, 여럿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가 거기에 있는 한 그는 하나이지만, 여기 자식들 안에 있을 때는 여럿이다.」

[445] 영운의 전지 마지막 장은 죽음, 혹은 (저승을 향한) 떠남의 장이다. ...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제4장 소멸

[458]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에필로그

[479] 그의 육제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뭔고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480] 거꾸로 말하면 무관심과 반항(혹은 도피)은 개인과 사회를 단절시킨다.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481] 성별, 연령별, 직업별 차이는, 우리 인간의 특질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어느 단계에서 우리가 한동안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482] 토템의 깃발을 날리는 국가 개념은, 유아기의 상황을 지우기는커녕 유아적 자아를 강화, 확대시키고 있다.

[487] 동물의 세계도 아니고, 식물의 세계도 아니고, 천체의 기적도 아닌, 이제는 오직 인간만이 결정적인 수수께끼다.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회의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 <너>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살아 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488]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역자 후기
[489] 명저에 걸려 있는 고압전하가, 여유로운 정신으로 사상을 대하여야 할, 그러니까 事象이 덜 여문 독자와의 만남에서 예사롭지 않은 방전현상을 일으키고, 이 방전 현상의 체험이 독자로 하여금 그 감독의 여신으로만 사물을 파악하게 하는 편집증적 색안경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489] <명저의 해독>이란 명저에 대한 심술궂은, 극단적 찬양이 될 터이다.

[490] 「시인적 본성은 심리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고, 심리학적 관심은 신화에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 토마스 만

3. 책 내용 정리 및 감상

책에는 탄생, 모험 그리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온다. 그중에 관심이 가는 것은 죽음이다. 살아있는 이에게 죽음을 얘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험은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는 여행이다. 그 모험에서 영웅은 괴물을 만나거나 어떤 시련를 겪는다. 그가 죽이는 괴물은 자신을 막고 있는 장애물인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세계인 아버지이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이다. 그렇게 영웅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뭔가를 얻어서 귀환한다. 이때의 영웅은 모험을 떠날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이러한 세계 공통적인 신화 속에서 저자는 신이 아닌 인간을 만나기를 원한다. 자신의 내부에 내재해 있는 신을 만나기를 원한다.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우리 안에 내재한 영웅, 신을 만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럼 왜 그렇게도 많은 나라에 비슷비슷한 신화가 있는 것일까?
인간은 궁극적으로 뭔가를 추구하는 존재인가 보다.
눈에 보이는, 실존하는 자신보다 더 큰 존재이길 바라는 욕망이 이상의 세계를 꿈꾸게 하고 영원을 꿈꾸게 하나 보다.

저자는 ‘내가 신화를 통해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다.’라는 식으로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에서 읽은 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다시 태어날 것인가? 끊임없이 질문하는 저자를 만난다.

미궁처럼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로 짜여진 이 책 속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나는 존재는 자신의 내부에서 울부짖는 괴물이며, 틀을 깨어주길 바라는 우주이며, 세상을 품는 뜻을 가진 신이다.

현재에 선 위치에서 머문다면 아버지를 만날 수 없고,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채 성장하지 않은 아이인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내부의 신은 괴물의 모습을 한 채 울부짖고 있을 것이다.
모험에서는 궁극적으로 자신이 죽는다.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모험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 것인가?

저자 자신은 자신의 내부의 신을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뒤의 삶은 어떠했는지도.

작년 이맘때가 생각난다.
현재의 나는 죽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안 죽고 싶다고 하며 떼를 썼다. 사랑이 뭔지는 알겠지만 죽고 싶지는 않다고.
올해 3월에도 그랬다. 안죽고 싶다고.

이 책은 질문을 한다. 모든 것이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을 믿고 준비하는 이 가을에 질문을 한다. 스스로를 죽게 하는 것이 계속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짊어질 짐을 지는 것. 그럼 내 앞에 놓인, 여지껏 외면한 짐은 무엇인가?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4. 내가 저자라면
1)
처음 접했을 때는 또 '오이디푸스 이야기야?'라며 발끈 했었다. 대체 그게 뭐길래 심리적인 것을 다룬다는 것에서는 빠지지 않는 것일까. 그 이야기는 부담스럽다. 적어도 내게는. 직도 유아기의 한 부분을 붙잡고 '난 아니야, 아니야'라며 떼를 쓰고 있는 떼장이 나는 그렇다. 오이디푸스. 가장 뛰어난 인간이었지만 신이라 불리는 운명앞에서는 무기력 했던 사람. 그 사람을 이 책에서는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다. 보호의 틀을 깨고 스스로 일어선 사람 정도로.

오이디푸스에만 집착하기에는 이 책에는 수많은 인간이 오고, 영웅이 등장하고 신들이 관연한다. 영웅이 죽고, 신들이 죽고 다시 태어난다. 우주 속에서 무한한 것은 없으며 하나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들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2) 우리와 함께 하는 수많은 신들
세계지리 시간에 배우는 지역별 종교, 4대 종교에 주요 인물들은 다른 지역의 신들과 비슷하다. 지금의 종교전쟁으로 한창 시끄러운 사람들에게 모두다 하나의 개념 속에 있는 이름만 다른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허망할까. 저자의 기술은 그런 것들의 경계에 있을 수 있다.
많은 종교들이 원형신화와 얼마나 비슷한지, 혹은 어느 정도에서 각색된 것인자를 살펴보는 것은 한면만을 보고 세상을 다 보았다 하는 어리석음을 피해갈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신이라는 존재와 인간, 영웅을 아주 가깝게, 혹은 같은 존재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신과 인간의 존재는 구분이 모호하고, 인간과 우주의 구분도 모호하다.

책 안에서는 인간과 신이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신은 죽어 흩어져 신성은 모든 것 속으로 들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성을 가지고 있다. 물 속에 빠져서 물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모호하게 하는 것일까?

저자의 서술은 신과 인간(영웅)의 경계는 모호하다. 저자는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뒤섞어서 기술하는 것 같다.

3) 의식의 세계, 상징을 알게 싶게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책 속의 수많은 신들을 보면서, 그 신들이 가진 특징이 인간의 어떤 면을 숨겨두고 있는지 상징을 알고 싶다. 태부터 내려온 욕망과 궁금증에 대한 숨겨둔 이야기. 살짝 가려서 바로 보이지 않은 심리적인 상징체계를 다시 정리하고 싶다.
물론 이 책에서는 이러한 것이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저자의 다른 책에서 다루어졌을 것이다.
세계 각국의 신의 모습을 나타낸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서 인간의 욕망, 궁금증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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