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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8일 10시 13분 등록
1. 프롤로그

글은 쉽게 넘어가고 문장의 뜻은 이해가 되지만, 문맥을 찾다보면 거대한 미로속에 갇힌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은데 시대를 뛰어넘고 장소를 뛰어넘다 보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꾹 참고 되돌아보기도 하고, 다시 몇 번을 읽어보기도 하였다. 답답한 터널 속에서 여기저기 더듬기를 마지막 몇 마디의 에필로그에서 갑자기 환해진 느낌이다. 환해진 느낌도 역시 그리 정확한 것이 아니다. 오랜 방황이 조그마한 단초에서 풀린 느낌이 들었다.

또 다른 하나는 지금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신물에 대한 드라마가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 영웅의 모습과 조셉 캠벨이 표현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의 걸어가는 길과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도 괜찮았다. 전설의 고향같은 구전설화와 건국기 등의 원전설화가 계속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이를 후대에 전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거기에 대한 이유를 지명(地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세검정, 화양리 등 그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 대중들의 인식에 각인되어 있는 커다란 사건과 관련된 것이 지명으로 남게 되었다. 청주공항의 마을이 비룡리라고 하였으며, 인천국제공항의 옛 섬 이름이 용유도라고 하여 뭔가 범상치 않은 지명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어쩌면 평생 동안 신화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지도 모르는 내게 캠벨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하였다. 깨기 어려운 둘레를 깨뜨리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다.


2. 저자에 대하여

기독교가 교리로 받아들여지는 미국의 학자가 신화를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미국에서 유럽의 유학과 학문적인 세속적이고 폐쇄적인 상아탑에서 탈출하여 신화를 통하여 그만의 세계를 이루어 내었다.

조셉 캠벨(Joseph Cambell, 1904년~1987년) 미국의 뉴욕에서 태어나, 평생을 비교 신학과 비교 종교학을 연구하였다. 그가 신화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를 따라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에 흠뻑 빠지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물을 보면서 인디언들의 신화에 심취하였다. 유물과 시가 그의 학구열을 일깨웠다. 그러한 신화와 고대 유물에 대한 열정이 정규 과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하였으나, 인문학적인 매력에 끌려 콜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27년에는 중세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캠벨은 콜롬비아 대학의 지원으로 파리대학과 문헨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와 불어를 배웠고, 독일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세계대전 전후의 유럽에서 풍미했던 지적이고 예술적인 혁명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혈기왕성한 20대에는 아일랜드에서 추방당한 James Joyce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캠벨과 마찬가지로 신화와 신화 속에 숨어있는 여러 가지 의미에 대하여 많은 토론을 하였다. James Joyce의 소개로 독일의 소설가인 Thomas Mann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고, Paul Klee와 Pablo Picasso의 초현실주의의 화가들 그리고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프로이트와 융을 만나게 된다. 20대의 젊은 캠벨은 유럽에서 불어와 독일어,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다양한 형태의 학문을 접하고 1929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다시 콜롬비아 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중세문학에 대한 연구를 더 한다고 요구를 하였으나 거절을 당하고 학술적인 권위나, 학위과정이 있는 연구를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 사건 이후로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고, 5년 동안 캠벨은 하루 9시간 이상 독서와 여행을 하며 독학을 한다. 1934년에는 Sarah Lawrence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고, 제자인 Jean Erdman과 결혼을 한다. Sarah Lawrence 대학에서 1972년까지 38년간을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화에 대한 많은 연구와 책을 발간하게 된다.

훌륭한 신화 강연자로,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 이름을 떨쳤던 그의 대표작으로는 이 책 이외에도,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 1959~1968) 4부작 신화와 함께 하는 삶(Myths to Live By, 1972), 신화의 이미지(The Mythic Image, 1974) 등이 있다.

1982년 하와이로 이사한 그는 1987년 10월 30일 호놀룰루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3. 나에게 다가온 책

가.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대학교 시절에 친구와 종교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한적이 있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아버지를 부정하느냐, 긍정하느냐는 절명의 명제 속에서 논쟁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알았다. 믿음과 세상에 대한 관점이 어쩔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종교 얘기는 그냥 살아가는 방법의 차이라고 생각하였다. 종교에 대해서는 뉴스에서 나오는 다른 세상의 일처럼 여기다가도 가끔 내 마음을 후벼 파는 사건들을 보면 다시 궁금증이 들게 된다. 정명석 사건이나 조계종 총무 선출을 놓고 스님들이 각목을 들고 싸우는 장면은 아직도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종교는 꼭 그래야만 하는?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오늘날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세계적 종교도 일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이러한 종교들도, 선전과 자화자찬의 도구로서, 갖가지 도당 짓기의 요인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심지어 불교까지도 최근 들어 서구학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러한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세속적인 국가의 보편적인 승리는 모든 종교 조직을 부수적인, 필경은 무익한 위치로 끌어내려 오늘날에는 종교가 무언극이 일요일 아침에 벌이는 경건한 체하는 종교놀음에서 더도 덜도 아니 되고 말았다.(485p)


신화의 새로운 부활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DNA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하늘을 날고 모험을 즐기는 영웅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까? 학교에 조용히 모셔져 있는 단군상의 목이 잘라지는 현실을 볼 때 종교의 순수한 기능을 넘어 세상을 끌고 가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종교가 인류의 구원이라는 대명제 대신에 세속적이고 정치화되고 하나의 커다란 세력을 통하여 착취의 대상으로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나. 신화에 열광하는 이유

신화에 대한 가장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일본인지도 모른다. 최인호의 소설 “잃어버린 왕국”에서 일본이 국민들이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신화를 날조하였다. “칠지도”라는 가상의 검을 만들었고, 식민사관을 통하여 우리의 고대 역사를 애매한 역사로 만들었다. 허구가 가미된 역사소설이지만 건국신화에 열망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출생과 기원은 하나의 시초가 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영원할 수 있다. 선택받은 종족이라는 것과 절대자로부터 검증된 종족이라는 것이 상당히 의미가 있다. 그러는 우리는 단군신화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친일 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남긴 마지막은 참회의 한 마디로 단군신화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실제 역사가 아닌 하나의 미신으로 간주해버리고 말았다. 거기까지만 해도 좋으련만 미신을 숭배한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목이 잘려진 채 나동그라진 사진도 종종 보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실제 가진 것을 모른 체 누군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우상만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4.가슴을 치는 구절

<머리말>

<5>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종교교의에 녹아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 데가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아이를 상대로 갓난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과 흡사하다. 우리는 이 큰 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따라서 이 경? 우리는 상징으로 분식된 진리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이는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는 우리가 말하는 내용 중 변형된 부분만 알아듣고는 속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른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과 면역성이 종종 이러한 부정적 인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진리의 상징적 분식을 피하고 아이들의 지적수준에 맞추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6>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데 있다.

<프롤로그>

<14> 어느 시대,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인간의 신화에는 끊임없이 살아 붙어왔고, 이러한 신화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살아있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1장 원질신화>

<1-1 신화의 꿈>

<19> 무이식은 꿈을 통해서, 혹은 벌건 대낮에 아니면 정신착란을 이용하여 갖가지 부질없는 몽상과 기이한 상념과 공포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허상을 마음으로 올려 보낸다. 인간이라는 왕국에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바닥 밑으로는 뜻밖에도 알라 딘의 동굴이 뚫려있다.

<21> 꿈을 읽는 현대 과학인 정신분석학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이 같은 비현실적 이미지에 유념하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이미지가 스스로 가능하게 하는 방법도 발견했다. 자아 발달의 위기는, 민간전승이나 꿈의 언어에 노련한 전문가의 감시인 앞에서 저질러진다. 이 전문가가 시험과 비전을 관장하는 원시림 성소의 주의, 즉 고대비법 전수자나 영혼의 안내자로서의 역할과 성격을 떠맡게 된다.

<22>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 정신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23> 신화와 제의의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있는 타락의 길을 버리고 영험적인 정신의 도움을 따르게 하는 우리의 내부의 고차원적인 신경증인지도 모르겠다.

<24>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저작에서 인간이 사는 삶의 순환 주기 중 전반부의 통과와 그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의 태양이 천정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기인 유아기와 사춘기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C.G.융은 후반부의 위기를 강조했다. 즉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빛나는 태양이 마침내 그 고도를 떨어뜨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밤의 자궁 속으로 사라지기 우해 기를 꺾어야 하는 시기를 말한다.

<29>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29> 오직 낡은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 있어야 한다.

<35> 놀라운 것은 이 꿈에는, 영웅이 체험하는 모험이 지닌 보편적 신화양식의 기본적인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의미심장한 위험과 장애와 도정에서 겪는 행운의 모티프는 갖가지 형태로 굴절하게 되는데, 바로 이 책에서 우리는 수백 가지로 굴절된 모티프와 만나게 된다.

<38>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2. 비극과 희극>

<39>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40>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 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41> 시공의 제약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하찮은 논리와 정서적 집착으로 찾아드는 죽음, 우리들이 흙으로 돌아가려할 때 비로소 온몸을 흔들면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보편적 생명에 대한 이러한 재인식, 이 생명을 향한 우리의 가파른 중심이동, 그리고 운명에의 사랑, 즉 필멸의 운명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비극적 예술의 체험을 구성한다.

<43>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국에서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들은 환상적이며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

<1-3 영웅과 신>

<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궤도는 통과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51> <회귀와 사회와의 재통합>은 정신에너지가 세계로 흘러들어오는 연속적인 순황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고, 영웅이 속한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영웅의 오랜 후퇴에 대한 변명이 되나, 영웅 자신에게는 가장 어려운 필요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52> 원질신화의 복합적인 영웅은 예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이 영웅은 사회의 존경을 받기도 하고 무시당하거나 경멸을 당하기도 한다. 영웅과 그가 속한 세계는 상징적인 어떤 장애로 고통을 받는다.

<1-4. 세계의 배꼽>

<60> 한 문화가 신화 안에서 인간존재의 면면이나 그 문화의 면면을 키워나갈 때, 그 문화는 상징적인 암시와 함께 싱싱하게 살아난다. 산과 숲은 저마다 초자연적인 보호자를 거느리고 있는데, 이러한 보호자들은 세계 창조에 관한 그곳 역사의 유명한 에피소드와 관련을 맺고 있다.

<65>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토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제때에 나고 죽는 , 자기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제 1부 영웅의 모험>

<1. 출발>

<77>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가 한 사람의 생애의 새로운 사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주인공이 필연적으로 맞서야 하는 무의식적으로는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 이 인물은 자기 정체를 밝힌다.

<82> 세계 전역의 신화의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래란 생과 사의 부단한 연속만은 아니다. 개인이 가진 현재의 이상과, 미덕과 목적의 체계가 어떻든 이득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고, 또 보장되어 있다.
<95> 영웅을 도와주는 노파나 요정 노파는 유럽의 민답에 자주 등장한다. 기독교의 성인 전에서는 성모마이라가 이 역할을 맡는다. 성모의 주선으로 성자는 천주의 자비를 얻는 것이다.

<105>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119> 우리가 오감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계의 상징, 그리고 육체적인 어느 기관에 의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인 그 도깨비는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무리고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룩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 번째의 무리고 바꾸어 대항하자 조복한 것이다. 이 여섯 번째의 무기가 명과 형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인 벼락인 것이다.

<122> 세계 도처에서 채집되는 이러한 모티프는 관문의 통과가 자기적멸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교훈은 쉽폴레가데스(출동하는 바위섬)의 모험에 이르러 한층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여기서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들어감은 신도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124> 아난다 쿠라라스아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ㅊ0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

<2. 입문>

<128>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ㅅ돈?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와 모험에서 가장 흥미롭게 나루는 부분도 바로 이 국면이다. 이 국면은 기적적인 시험과 시련을 다른 세계의 문학을 창출해 왔다. 영웅은 거듭나는데 필요한 충고와 호부(액막이), 그리고 이 영역에 이르기 전에 만났던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밀사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어쩌면 모험당사자가 자신의 초인간적 여행 도정의 도처에 자비로운 권능이 있어서 자기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지 모른다.

<133> 그러니까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든지, 고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기 정신의 미궁이라는 미로로 내려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저 시베리아의 <푸닥>과 성산에 못지않는 상징적인 것들(능히 여행 당사자들 삼켜버릴 수 있는)에 둘려 싸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비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정화>에 이르는 길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즉 감각이 <정화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모든 에너지와 관심이 <초월적인 것에 집중 될> 때인 것이다.

(144) 모든 장애물이 극복되고 도깨비가 퇴치되었을 때 영웅이 치르는 마지막 모험은 승리한 영웅과 세계의 영웅인 여신과의 신비스러운 혼례로 표상된다. 이로써 영웅은 천저, 천정, 혹은 땅 끝, 우주의 중심점, 신전의 성소, 혹은 마음속의 가장 어두운 방 속에서 위기를 맞는다.

(153) 신호학의 심성 언에서의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영웅의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159)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적인 결혼은 영웅의 삶 전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제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160)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사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 을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192)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 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 곳을 뚫고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207)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론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러운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213) 보살에 대한 첫 번째 경이로움은 바로 이것, 즉 보살이라는 존재의 양성 구유적 성격이다. 이 보살과 만남으로써 분명이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 서로 만난다.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란 여신과의 만남, 길고 아버지와의 화해다. 여신과의 만남의 과정에서 입문자는 남성과 여성은 둘이 아니라 < 개진 완두의 두 쪽> 임을 깨닫고 아버지와의 화해과정에서는 아버지는 성을 선행하며, <그>라는 대명사는 말의 방편이고, 지도적 원리로 확립된 부자관계의 신화는 말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223)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나오면 우리는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간다.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未璲?아버지에게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250) <눈이, 말이, 마음이 하릴없다.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한다. 이를 나에게 가르칠 방도도 알지 못한다. 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도 같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것 까지 초월해 있다.> 이것은 치고의, 그리고 궁극적인 시련이다. 여기에서는 성자와 성부가 동시에 적멸에 든다. 이는 인격과 가면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무너지는 것과 같다.

<3. 귀환>

(253)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신화의 규준인 舅徨?순환체계는 영웅에게 지혜의 시문, 황금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인간의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천제,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264) 교리적 상징의 유용한 기능은, 개인이 무턱대고 나서지 않는 한 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집과 가족을 떠나 너무 오랫동안 혼자 방황하고, 심연의 거울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면, 우 무서운 만남 자체가 그에게 재앙일 수 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꽃피어 왔던 전통적인 상징체계는 이때 영약으로 작용하여 살아있는 신의 치명적인 공격무대를 교회라는 신성한 공간으로 바陞塚?수 있다.>

(269) 두 세계의 상호관계를 불가능하게 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281)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기꺼이 이 일을 맡든, 어쩔 수 없어서 맡게 되든, 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8) 천국에서의 1년이 지상에서의 백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백년이라는 주기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360도라는 원의 중심각도 전체성을 뜻한다. 힌두교의 푸라나에 따르면 신들의 1년은 인간의 360년에 해당한다.

(289) 영웅과 땅의 직접적인 접촉을 단절시키면서도 그 세상 사람들 사이로 돌아다닐 때 탈 수 있는 절연 수단으로서의 백마는, 초자연적인 권능을 가진 자가 설정하는 금기의 생생한 실례라고 할 수 있다.

(294)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위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런 이야기를 한 곳에 모아보면 일치하는 하나의 필연적인 공통분모가 엿보인다. 기억 속에서 자기 영혼의 다른 부분과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신비스러운 반지는 영웅이 그 곳에 간적이 있음을 시사한다.

(297)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한 세계인 저승과, 일상적인 세계인 이승을 두루 돌아다니는 자유(그것도 한 세계의 원리로 다른 세계를 오염시키지 않되, 한 섟窩?선으로써 다른 세계의 전재를 깨우치면서)는 거장들의 재능에나 어울리는 자유다. 니체는 우주적인 춤의 신은 한곳에 붙박여 있지 않고, 이곳저곳을 가볍게 떠돌아다닌다고 주장한다.

(298) 신화란 신화는 이 한순간의 이야기 속에 모두 들어있다. 예수는 안내자이며, 길이며, 초월적인 세계, 귀환의 동반자다. 제자들은 그의 비의 전수자들이다. 그러나 그 신비를 통달한 자들이 아니라, 두 세계를 일거에 수렵하는 역설적 체험으로 안내받는 자들이다.

(306) 이러한 무애적 존재의 궁극적인 상태를 표상하는 것이야말로 신화적 존재의 대종을 이룬다. 특히 동양의 사회적 신화적 문맥에서 그러하다. 은자의 숲에 은거하는 현자와 운수행각의 탁발승은 동양의 삶과 전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신화에서 이러한 인물은 방랑하는 유태인, 개에게 쫒기는 거지, 음악으로 듣는 자의 영혼을 위무하는 방랑시인, 가장한 신, 오딘, 비라코챠, 에드슈로 나타난다.

<4. 열쇠>

(317)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와 손상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신화나 옛이야기의 윤곽은 원래 애매한 법이다. 고대의 흔적은 배제되거나 무시 되는 게 보통이다. 유입되는 신화는, 이를 유입하는 지방의 풍경과 관습과 신앙에 따라 윤색되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틀 거리가 빗나가게 되기도 한다. 더구나 이런 이야기들이 무수히 재연되다 보면 고의적이든, 우연이 든 와전과 전위가 불가피하다.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이야기의 어떤 요소는 무의미하게 되거나 때로는 상당히 기술적으로 부수적인 해석이 첨가되기도 한다.

(319) 많은 신화의 후반부에서 중심적 이미지는 건초더미에 바늘이 떨어지듯 부수적 삽화와 윤색된 부분에 숨겨진다. 따라서 문화가 신화시대의 시점에서 현실적 시점으로 옮겨옴에 따라 낡은 이미지는 감지되거나 증명되기 어려워진다.

(319)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중략)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 빈사 상태에 빠진 성화는 그 영원히 인간적인 의미를 다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332) 우주적 상징이 종잡기 어려운 역설로 표상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신의 왕국은 내제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외재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은 잠자는 공주, 즉 영혼을 깨우는 편의수단이다. 삶은 공주의 잠이고, 죽음은 공주의 깨어남이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영웅은 그 자신이 자기 소멸의 편의수단일 분이다. 영혼을 깨우는 신은 그 영웅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333)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우주 발생적 시간의 회전이 영원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333)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우주 발생적 시간의 회전이 영원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337) 동양철학의 기본개념은 이러한 회화적 양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화가 원래 철학적 공식의 설명인지, 아니면 철학이 신화로부터의 추출물인지 지금으로서는 말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신화가 지금부터 아득히 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며 이점은 철학도 마찬가지다. 신화를 창조하고 이를 보배로이 가꾸어 전승시킨 옛 현인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그 것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353) <공간은 넓게 펼쳐진 것이 아닌, 오목한 형상으로 끝이 없다. ‘존재하는 것’ 은 존재하지 않는 무한 위로 떠 있는 껍질이다.> 현대의 물리학자가 1928년에 그가 본 세계를 그리는 이 간략한 표현은 신화 체계의 우주적 알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3. 영웅의 변모>

(400) 그러나 전설을 만든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영웅들을 단순한 인간이 국한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들은 제한하는 지평을 넘어갔다. 보통 사람에게도 볼 수 있는 신념과 용기로 선약을 얻어 돌아오는 인간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전설을 만든 사람들에겐 탄생의 순간, 심지어는 잉태의 순간에 영웅에게 초자연적인능력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의 생애는 그의 모험을 절정으로 하는 엄청난 장관으로 그려진다.

(400)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세계이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422)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이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이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440) 심령에 의한 조형(유출)과 무로의 소멸, 젊음과 늙음, 탄생과 죽음, 형상을 창조하는 생명력과 타성적인 죽음의 중압은 영원히 갈마드는 것이다. 생명이 태동하고 이어 형상이 빚어지면, 쇠퇴가 따르고 이윽고 운명에 농락당한 잔해만 남는 것이다. 현명한 황제가 통치하는 황금기는 삶의 순간순간의 충동에 따라, 폭군이 지배하는 황무지 시대가 되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창조주였던 신도 종국에는 파괴자가 된다.

(445) 영웅의 전기 마지막 장은 영웅의 죽음, 혹은 (저승을 향한) 떠남의 장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전 생애가 요약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에필로그>

(478)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달라진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의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479) 출생, 세례, 장례, 취임 등의 종족적인 제의는 개인의 삶의 위기 및 행위를 표준적이고 비 개인적 형식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제의는 개인의 정체를 그 자신에게 보여준다. 인격체로서의 개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사로서, 신부로서, 과부로서, 성직자로서, 추장으로서의 개인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제의를 통하여 개인이 속하는 사회는 원형적 무대에서 옛 현인의 가르침을 시연할 수 있다. 모든 구성원이 자기 직위의 기능에 따라 이 제의에 참가한다.

(480) 제의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피할 길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는 계절적 축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483) 이 표적의 중심에 이르면, 이기주의나 이타주의의 문제는 사라진다. 개인의 율법 안에서 자기를 잃고, 우주의 전적인 의미와 동일하게 재생한 것이다. 세계는 그를 위해, 그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신은 이렇게 말했다.
“오 모하메드여, 네가 없었으면, 내 저 하늘도 만들지 않았으라.”

(484) 이제 신들에겐, 망원경과 현미嚥?의해 탐색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어졌을 뿐 만 아니라 한 때 신들이 섬김을 받던, 그런 사회도 이제는 없다. 사회의 구성 단위는 이제 종교적 내용물의 전달자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조직이다. 이 경제적 정치적 조직의 이상은 신성한 무언극을 통하여 천상의 형상을 끊임없이 물질적 우위와 자원의 우위를 겨루는 세속적인 국가를 지키는데 있다. 신화체계가 가득 담긴 지평의 꿈에 잠긴, 격리된 사회는 이제 착취의 대상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보한 사회 안에서도, 제의, 도덕률, 예술이라는 고대 인류 유산의 흔적은 조락의 길을 면치 못하고 있다.

(486) 이로써 우리는, 현대 영웅 사명의 특수한 소재식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암시를 얻게 되었고 우리가 계승한 모든 종교 양식이 타락한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신비와 위험의 영역에 대한 중력의 중심은 옮겨진 지 오래다. 송고시가 삐죽이 튀어나온 호랑이, 메머드, 그리고 동물왕국의 하등한 존재가 이질적인 면을 나타내는 게 고직이던 때, 아득한 시절의 원시 수렵인 들에게 있어, 굵직한 인간의 문제란, 이러한 존재들과 황야에서 공존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488)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언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하는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을 나㈍?부담하는 것이다.

(492) 오랜 세월, 우리 숨 줄이 닿아있던, 우리 육즙이 층층이 묻어있던 문화는 이제 이 땅에 남아있되, 오직 하나의 질투하는 신학에 가려져 있다. 신화나 종교를 보는 눈이 병적인 교조주의와 경직된 흑백의 논리에 길들어 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걸핏하면 조상이 우상으로 단죄되고 하나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오랜 역사 살림을 꾸려온 민족까지 우상의 자식들로 치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시대, 기댈 곳 없던 민중의 문화가 <미신>으로 업어치기를 당하고 충정에서 우러난 비판정신과 각자의 자유를 겨눈 정신적 편력의 간증이 <사탄>의 소리수작으로 간주되는 이 시대에, 모든 민중의 문하와 종교를 고루 짚어 보며, 그 바른 뜻을 더듬는 이 책을 우리 글로 옮긴 것은 그러므로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면 듣도 보도 않고 흰 눈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로운 종교 정신을 곧추세우는 데 밑바탕 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 (종교)도 좀 기웃거려 보는 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는 嚥【?甄?


5. 내가 작가라면

가. 진정한 배움에 대하여

그냥 가볍게 지나쳐 버리기 쉬운 신화에 대해서 캠벨은 커다란 금맥을 발견한 것 같았다. 외국의 여행지에 가면 박물관을 자주 들르게 되는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다. 어릴 때 동물원이나 박물관에 가면 정말 즐거웠는데, 세월은 마음속의 상상을 막고 새로운 것과 옛날 것의 진입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캠벨에게 있어서 신화에 대한 연구는 상아탑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책읽기를 통한 독학과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 영역이 구축되었다. 10월에 내가 만난 삶을 비추는 빛이라는 주제는 쉽게 넘어가지 못하고 아직까지 붙잡고 있다. 쉽게 털어낼 수도 없었고, 쉽게 다가설 수도 없었다. 책읽기에 대한, 진정한 배움에 대한 정체를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또 자신만의 영역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진리처럼 다가온다.

나. 책의 구성에 대하여

책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분된다. 프롤로그 원질신화 부분과 두 개 부분의 영웅의 모험이 나온다. 첫 번째 영웅의 모험에서는 출발, 입문, 귀환, 열쇠의 순으로 되어있고, 두 번 째 우주 발생적 순환은 유출, 처녀의 잉태, 영웅의 변모, 소멸 순으로 이루어 졌다. 영웅의 모험을 두 부분으로 나눈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두 개의 장에서 나오는 무수한 신화들의 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니 여기저기서 부딪히고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화가 비슷비슷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라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갔지만, 문맥을 찾기가 어려웠다. 더욱 어려웠던 것은 하나의 단어에 대한 상징이었다. 정신분석학이나 꿈의 해석에 나오는 그러한 단어들이 평소 내가 받아들이는 의미와는 달랐다. 단어들이 내포하는 거대한 벽속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캠벨의 말처럼 나도 조직적, 정치적이 되어서 그런 것 일까? 또한 중간 중간에 나오는 사진도 알기 쉽게 주석을 달아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책 본문에 있는 두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어져 있는 주석이 설명적인 부분을 사진부문에 조금 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신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알게 되었다.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야 하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 그 영원한 인간적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고 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가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488p)


마지막에 나오는 당부가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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