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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2일 03시 22분 등록

<강의, 신영복, 돌베게>


우리가 실제로 자주 접하는 상황을 잠시 살펴봄으로써 오늘날의 현실과 그 현실의 원인 그리고 원인의 해결책으로 이 책이 요청하는 시대적 담론인 ‘관계론’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언제든지 앉을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앉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1호선 인천가는 전철이었어요. 영등포역에서 승차했는데 몹시 피곤하기도 하고 두 시간 강의를 앞두고 있어서 전철 속에서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도림역에서 내릴 사람을 골라 그 앞에 섰습니다. 정확하게 신도림역에서 그 사람이 일어나더군요. 그래서 막 앉으려고 하는 순간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 사람에 옆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가 재빨리 그 자리로 옮겨 앉고 자기 자리에는 자기 앞에 서 있던 친구를 앉히는 거였어요. 거기까지는 예상치 못했던 거지요. 나는 엇비슷이 두 사람 걸치기를 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의 정면에 서서 그 좌석에 대한 확실한 연고권을 주변에 선언해두었던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내 주변에는 나와 경쟁상대가 될 만한 나이든 사람도 없었거든요. 태무심으로 있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지요.”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어요. 그 앞에 선 채로 나는 매우 착잡한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 때 떠오른 것이 이 곡속장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여자와 내가 만난 적도 없고 다시 만날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은 평균 20분 정도를 승차한다고 합니다. 승객들은 평균 열 정거장 이내에 서로 헤어지는 우연하고도 일시적인 군집일뿐입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의 하나로 수오지심, 즉 치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분을 초고하지 않는 일시적 군집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피차 배려하지 않습니다. 소매치기나 폭행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잠시만 지나고 나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매우 공감가는 내용이다. 이처럼 이 책은 몰입을 만들어 사색으로 이끌고, 마음 깊숙한 곳을 울리어 결국에는 깊은 깨달음을 준다. 최근에 이 책만큼 몰입했던 책이 없었던 것 같다. 책을 손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책을 ‘머리’로 이해하다가 ‘가슴’으로 읽어 나갔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자는 저자의 뜻이 이 책을 통하여 제대로 전달된 듯하다. 제목에 걸맞은 참으로 훌륭한 강의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삶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는가보다. 그만큼 사람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는가보다.

사람마다 각자의 삶이 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사람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그 관계에 대한 내용을 기술한 것이다. 저자가 성공회대학교에서 <고전강독>이라는 강좌 명으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오늘날의 여러 가지 당면과제를 고전을 통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다음 세 가지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첫째, 지금의 현실을 시대적 관점에서 성찰해보고 싶은 사람이다. 과거는 오래된 미래라고 한다. 세계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등 현재의 환경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기에 시간과 공간의 ‘관계’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둘째, 동양고전을 처음 읽어보려는 사람을 위해 첫 번째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고전은 인문학의 보물창고이다. 인문학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것만큼 좋은 길잡이는 없을 것이다.

셋째, 특히 대학생들에게 필독할 것을 감히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 책의 내용이 교양과목으로 강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점보다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속도와 효율만을 강조하는 당구공의 사회 속에서 치열한 경쟁으로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발등에 떨어진 불만을 끌려고 하는 미래의 지식인인 젊은 세대들에게 ‘나무와 숲’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주는 명저이기에 때문이다. 여기에 책 속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장자가 제자들과 산길을 가다가 잎과 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나무를 베지 않고 있는 나무꾼에게 그 까닭을 묻자 나무꾼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장자 일행이 산에서 내려와 친구 집에 묵었는데 주인은 매우 반기며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거위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한 놈은 잘 울고, 한 놈은 울지 못하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하자 주인은 울지 못하는 놈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제자들이 장자에게 물었습니다.

“어제 산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할 수 있었는데, 오늘 이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서겠습니까?”
장자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나는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쓸모가 있으면 천수를 다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쓸모가 없으면 취직이 안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도 있습니다. 대체로 여러분의 고민이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학의 고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이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졸업 후의 취업을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재材와 부재不材에 대한 현실적 고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자가 제기한 재와 부재의 논의는 이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자가 중간에 서겠다고 한 것은 중간 지점인 절충의 자리에 서겠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간도 사실은 도와 비슷하지만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 장자의 결론입니다.』

나는 이 글에서 중간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쓸모없는 것은 없다’라고 말이다. 장자가 말하는 중간이란 그 나름의 쓸모가 따로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단순화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을 추천하는 다른 일체의 설명은 더 이상 쓸데없음을 책 속의 한 예화로 대신한다.

“진秦나라 임금이 딸을 진晉나라 공자公子에게 출가시켰습니다. 그 딸을 시집보낼 때 70명의 첩을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혀 딸려 보냈습니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공자는 그 첩들을 사랑하고 그 딸은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논변이 많으면 그 핵심을 놓친다는 것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지요.”

‘관계’ 렌즈로 투영된 동양사상의 스펙트럼을 가슴으로 느껴보기 바란다.


1. 저자에 대하여

신영복 선생님은
1941년 경남 밀양 출생
1963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숙명여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198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1989년 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
2006년 8월 정년퇴임현재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석좌교수

저서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 엽서(1993년), 나무야 나무야 (1996년), 더불어 숲 1권 (1998년 6월), 더불어 숲 2권 (1998년 7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증보판 (1998년 8월), 더불어숲-개정판 합본 (2003년 4월), 신영복의 엽서 (2003년 12월),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년 12월), 처음처럼(2007년 2월)

신영복은 1941년 경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간이학교 ‘교장’으로 의령에서 근무했을 때 교장사택에서 태어난 것이다. 195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 후 4·19와 5·16을 겪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주로 다른 대학이나 연합서클 지도에 주력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1965년 2학기와 1966년 초에 《청맥(靑脈)》이란 잡지의 예비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참석, 여기서 신영복은 6, 7년 선배인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을 몇 차례 만나게 되었다. 《청맥》은 통혁당 핵심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로, 반미적인 논설이 종종 실렸다. 이들 모임은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되었다.

1968년 8월 24일 악명 높았던 김형욱(金炯旭)의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통일혁명당사건을 발표했다. 북한에 연계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지하당 조직인 통일혁명당이 적발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태·이문규·김질락 등이 사형당했고, 신영복은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모두 여섯 번이나 사형이란 무거운 꼬리표가 붙은 뒤 정상참작(?)으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통혁당에는 가입한 적도 없고, 김질락 이외에는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던 신영복이었다. 그런 그가 ‘통혁당 지도간부’이며 무기수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젊은 날의 아슬아슬한 임사체험(臨死體驗)이었다.신영복은 20년 감옥생활에서 육군교도소 시절이나 독방생활만 한 안양시절 등을 빼고는 꼬박 15년을 대전교도소에서 보냈다. 대전은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좌익 사상범이 많았다. 한국전쟁 당시의 부역사건으로 들어온 사람도 많았고, 빨치산 출신들도 있었다.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안내원도 있었다. 신영복은 해방 전후의 분단현실을 온몸으로 담아내고 있는 이들과 일상을 같이했다. 그러면서 체험하듯 역사를 대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생환(生還)된 역사’였다.

신영복은 1988년 8월 15일, 잡혀간 지 20년 만에 출옥했다. 서울대 출신의 ‘잘 나가던’ 경제학도가 통혁당 사건으로 덜컥 들어간 것이 68년. 27세 창창한 젊은이는 한때 사형수와 무기수를 거쳐 47세 중년이 되어서야 ‘바깥세상’으로 돌아왔다.

“제 인생은 감옥 전과 감옥, 감옥 후로 나눌 수 있어요. 감옥 전은 엄밀한 의미에서 배우고 시키는 것 하는, 심부름 같은 삶이었습니다. 감옥은 혹독하게 우리 사회와 시대를 체험하는 시간이었지요. 감옥 후는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는 중입니다. 제가 가장 많이 성장한 기간은 감옥인 셈이죠. 감옥에서 나와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하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요. 제게 지금 사는 아파트 대신 한옥집으로 옮기라고 권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무슨 도사 대하듯 하는 사람들을 접하면 참 난감합니다.”

신영복은 출옥 1년 만에 결혼식을 했다. 6살 연하인 부인은 당시 KBS 라디오 PD. 슬하엔 초등학교 5학년짜리 아들을 두었다.
-오랜 감옥생활 끝의 결혼이니 이상하게들 볼만도 했겠지요.
“사실 결혼을 안 하려 했는데 부모님 뜻이 워낙 완강했어요. 하지만 소개해준 분들이 내 사정도 아내의 사정도 잘 알고 계시던 분들이라…. 소개받고 한번 만나서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

성공회대학에서는 1989년 3월부터 그에게 강의를 맡겼다. 여기서 경제원론을 가르치는 것으로 신영복은 젊은 학생들과의 만남을 시작했다. 경제원론 이외에 ‘한국사상사’와 ‘중국고전강독’도 강의했다. 감옥에서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준거를 동양고전의 지혜와 가치에서 찾고자 탐색한 것이 강의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그의 신분은 ‘비정규직’이었다. 그로부터 근 10년이 지나 사면·복권된 뒤인 1998년 5월 그는 ‘정규직’ 교수로 된다.
  “감옥 20년, 출소 후 칩거 7여년 후”인 1996년 신영복은 《사색》의 후속편으로 《나무야 나무야》를 세상에 내놓았다. 《나무야 나무야》가 나온 지 2년 뒤인 1998년, 신영복은 생애 첫 해외 여행길에 올랐다. 그가 처음 여정에 오른 날은 공교롭게도 그때로부터 28년 전(1970년)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내려지던 바로 그 날이었다. 1심과 2심에서 이미 사형언도를 받았던 그로서는 생사의 갈림길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28년 후의 그 날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빠져나와 세계로 출국한 날이다. 한 날을 두고 28년의 전과 후가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어쨌든 새로운 세기에의 길목에서 띄운 신영복의 해외엽서는 그 후 《더불어숲》으로 엮어져 나왔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다. 특히 민주화운동 관련 기념물에는 그가 도맡아 글씨를 쓰고 있다. 한동안 대박을 터뜨린 소주 ‘처음처럼’도 그의 글씨이다. 어려서 할아버지께 잠시 배우다가 잊어버렸던 붓글씨를 신영복은 옥중에서 다시 만났고, 거기에서 만당(晩堂) 성주표(成柱杓)·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신영복의 한글 글씨는 우리 서예 발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이전 한글 글씨체는 궁체가 주류를 이루었다. 정적이고 귀족적인 미학을 지닌 서체였다. 그러나 궁체는 신경림·신동엽의 시나 민요 또는 운동 현장의 뜨거운 목소리 같은 것을 담아내기엔 전혀 맞지 않았다. 신영복은 그런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두고 고심하던 중 어머니가 보내준 모필 서간체 글씨를 보며 깊이 느낀 바 있었다. 그는 이 필법을 도입하여 궁체에 대비되는 ‘민체(民體)’ 또는 ‘연대체’·‘어깨동무체’라 불리는 서체를 창안했다.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아내는 독특한 경지를 이룬 것이다. 서예는 인간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신영복의 글씨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서체가 20년의 감옥살이와 무관할 리 없다는 데서 그의 서체를 ‘옥중서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글씨솜씨와 한학에 대한 조예는 정평이 나있다. 연배로 보아선 다소 이례적인 일이다 싶어 그 내력이 궁금하던 터였다. 
“할아버님의 슬하에서 붓글씨를 익혔습니다. 그러나 제가 조금이나마 서도를 하게 된 것은 감옥에서 훌륭한 스승들을 만난 덕입니다. 교도소 당국에서 초빙했던 만당 성주표(晩堂 成周杓)선생, 정향 조병호(靜香 趙炳鎬)선생으로부터 옥중사사를 했고 한학자인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선생과 같은 방에서 지내는 행운이 주어져 동양고전을 익혔지요.”
-비뚤비뚤 서로 이웃해 의지한 글씨들이 만들어내는 조화가 신묘하다고까지 하는 이른바 ‘신영복체’는 어떻게 만들어진 겁니까.
“한문은 상형문자인데 비해 한글은 기호라서 삭막한 기호에 내용성을 갖게 하기가 어려워요. 한글은 궁체가 기본인데, 민중시를 궁체로 쓰면 내용과 형식이 괴리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민중시를 담을 글씨체 모색의 결과 그런 체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협동체’ ‘연대체’ ‘민체’ ‘어깨동무체’라고 부르더군요.”


2. 내 마음에 들어 온 글귀


[6]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하고 생각합니다.

[21]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21] 사회변혁기는 사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담론이 주류를 이룹니다.

[22] 현대 자본주의 특히 그것이 관철하고자 하는 세계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춘추전국시대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국강병이 최고의 목표가 되고 있는 무한 경쟁 체제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담론을 통하여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명론 그리고 최대한이 사회 건설 담론이 개화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고전강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23] 유럽근대사의 구성원리가 근본에서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24]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어법입니다. 작은 거인이나 점보 새우와 같은 모순된 어법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된 표현 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

[26] 과학적 방법이나 첩경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요.

[26] 과거의 어학 교육은 어학을 위한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받은 영어 교과서는 I am a boy. You are a girl.로 시작되거나 심지어는 I am a dog. I bark.로 시작되는 교과서도 있었지요. 저의 할아버지께서는 누님들의 영어 교과서를 가져오라고 해서 그 뜻을 물어보시고는 길게 탄식하셨지요.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천지와 우주의 원리를 천명하는 교과서와는 그 정신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천지현황과 “나는 개입니다. 나는 짖습니다.”의 차이는 큽니다. 아무리 언어를 배우기 위한 어학교재라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27] 사상은 시간적 존재 형식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존재형식도 갖습니다. 동양이라는 어휘 그 자체가 공간적 의미입니다. 서양에 대한 동양이란 뜻입니다.

[28]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다.

[29]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37]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7]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39]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9]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40] “봄여름에는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지 않고 촘촘한 그물로 하천에서 고기를 잡지 않는” 것이지요. 동양 사상의 현실주의란 이러한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인간과 인간관계를 두루 포괄하는 사회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1]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입니다. 이 사회성이 바로 인성의 중심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42]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42] 동양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43] 서양문명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모순 구조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상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2]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52]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의 정수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5]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도 부족하고 노래로도 부족해서 춤까지 더해 그 깊은 정한의 일단이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악곡은 없어지고 가사만 남은 것입니다.

[56]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58] 우리가 거짓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62]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4]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동서남북의 각각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춘하추동의 각각 다른 시간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68] 농경민족은 유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70]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75]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어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일>편은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 행위에 의해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기를 바랍니다.

[77]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82]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87]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87]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 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 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89]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90]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101]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1]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102]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103]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03] 선두가 전체 국면을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선두는 겨우 자기 한몸 간수에 여력이 있을 수 없는 고단한 처지입니다.

[119] 지천태괘와 천지비괘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같이 교(交)와 통(桶)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와 통이 곧 ‘관계’입니다.

[120] <주역>은 이처럼 어떤 괘를 그 괘만으로 규정하는 법이 없고 또 어떤 괘를 불변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법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관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122]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씨과실은 먹지 않는다.

[124]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127] 나는 세상에 무엇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127] 위(位)가 개체 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應)은 개체간의 관계론으로 보다 상위의 관계론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지요.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응, 즉 인간관계를 디딛돌로 하여 재기하는 것이지요. 작은 실수가 있고, 끝남이 없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 등등을 우리는 이 단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128] 나는 이 괘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미제괘가 왜 <주역> 64괘의 마지막 괘인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주역>을 읽었을 때는 미제괘가 꼭 나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요. 마지막 단계에 작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끝판이라고 방심하다가, 아니면 얼른 마무리하려고 서두르다가 그만 실수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미제괘를 읽고 난 후로는 어떤 일의 마지막 단계가 되면 속도를 늦추고 평소보다 긴장도를 높여서 조심하는 습관을 가지려고 했지요.

[128]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129]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고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129]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하지 않으면 진미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129] 나는 이 미제괘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메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30] <주역>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32]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144] 증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매일 세 가지(또는 여러번)를 반성한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하되 그것이 진심이었는가를 반성하고, 벗과 사귐에 있어서 불신 받을 일이 있지나 않았는지 반성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 ‘전불습호(傳不習乎)가 나옵니다만 이 경우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현의 말씀을 복습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잘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을 “전하기만 하고 행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145] 여러분도 각자 사회에 대하여 다양한 개념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집합으로 사회를 이해하기도 하고, 하나의 유기체 또는 건축적 구조로 규정하기도 하고 생산관계, 정치 제도, 문화기제, 소통구조 등 여러 가지 개념으로 사회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이 모든 개념은 제도와 인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제도와 인간이라는 두 개의 범주가 인간관계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지요.

[145]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149]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된 형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사유 차원에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149] 온고이지신이란 구절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지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 구절은 대체로 온고쪽에 무게를 두어 옛것을 강조하는 전거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온고보다는 지신에 무게를 두어 고를 딛고 신으로 나아가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150]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구나 과거지사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151]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152] 전문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층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차를 전문적으로 모는 사람, 수레바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 배의 노를 전문적으로 젓는 사람 등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 신분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였습니다.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예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152]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152]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강조되고 있는 전문성 담론이 바로 2천년 전의 노예 계급의 그것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반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153] 덕치가 평화로운 시대 즉 치세의 학이라고 한다면 행정명령과 형벌에 의한 규제를 중심에 두는 법치는 난세의 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6]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159]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162] <논어>의 이 화동론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163]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164] 근대사의 정점에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패권적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논리가 바로 존재론의 논리이며 지배, 흡수, 합병이라는 동의 논리입니다.

[166] 子曰 德不孤 必有隣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또는 이웃이 생긴다.

[172]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라는 사실입니다.

[174] “지란 지인이다”라는 단호한 선언이 실용적 의미로 왜소화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논어> 전체의 구상에서 보더라도 그럴 뿐만 아니라 인과 지, 애인과 지인은 <논어>의 근본 담론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인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일뿐 아리라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175]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팔기 위해서’ 진력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모든 것을 파는 사회이며 팔리지 않는 것은 가차없이 폐기되고 오로지 팔리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회입니다. 상품가치와 자본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체제에서 추구하는 지식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한 점의 인연도 없습니다. 지는 지인이라는 의미를 칼같이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한 사회입니다. 무지막지한 사회일 뿐입니다.

[178] 사회의 관계망과 역사의 관계망, 즉 시공을 관통하는 관계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망을 뜨개질하는 것이 근본적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은 우리들의 천민 의식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지 않는 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179]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하되 학하지 않으면 위대롭다.

[180] 그런데 내가 감옥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됩니다. 책을 읽어도 도대체 머리에 남는 것이 없었어요. 심지어 어떤 책을 30~40페이지쯤 읽고 나서야 그 책은 전에 읽은 것이란 걸 알게 됩니다. 감옥에서 책읽는 것이란 그저 무릎 위에 책 한 권 달랑 올려놓고 읽는 것입니다. 독서는 독서 이후와 완벽하게 단절된 그저 독서일 뿐입니다.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소요일 뿐입니다. 책을 덮고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정리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을 읽는 것이나 책을 덮고 생각하는 것은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의미 이상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할아버님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사(思)를 경험과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분명한 것은 학과 사를 대(對)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81]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181] ‘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182] 세상이란 참으로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동은 멀고 소이는 가깝지요.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기 쉽지요. 따라서 사회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학과 사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합니다.

[182]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이지요.

[183]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 사고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185] 지혜를 드러내기보다는 그것을 숨기고 어리석은 척하기가 더 어렵다.

[186] 진정한 지란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라는 것이지요.

[188] 공을 숨기고 겸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188] 중요한 것은 무욕과 무사를 설파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과를 불문하고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치장하더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194] 바탕이 문채보다 승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룰 어울린 후에야 군자이다.

[198]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199]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202] 인자는 한마디로 세상의 무궁한 관계망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지자는 개별적인 사물들 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13]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9] 오늘날 행복의 조건 즉 樂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독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무심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일반적 정서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닮는 것을 피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에 가치를 두려고 하지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225]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네 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

[229] 인간 본성의 사회적 존재 양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성선이란 어떤 경우에나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에 따라 달리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237]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마차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237]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 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238]나는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언제든지 앉을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앉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1호선 인천가는 전철이었어요. 영등포역에서 승차했는데 몹시 피곤하기도 하고 두 시간 강의를 앞두고 있어서 전철 속에서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도림역에서 내릴 사람을 골라 그 앞에 섰습니다. 정확하게 신도림역에서 그 사람이 일어나더군요. 그래서 막 앉으려고 하는 순간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 사람에 옆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가 재빨리 그 자리로 옮겨 앉고 자기 자리에는 자기 앞에 서 있던 친구를 앉히는 거였어요. 거기까지는 예상치 못했던 거지요. 나는 엇비슷이 두 사람 걸치기를 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의 정면에 서서 그 좌석에 대한 확실한 연고권을 주변에 선언해두었던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내 주변에는 나와 경쟁상대가 될만한 나이든 사람도 없었거든요. 태무심으로 있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지요.

두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어요. 그 앞에 선 채로 나는 매우 착잡한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 때 떠오른 것이 이 곡속장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여자와 내가 만난 적도 없고 다시 만날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은 평균 20분 정도를 승차한다고 합니다. 승객들은 평균 열 정거장 이내에 서로 헤어지는 우연하고도 일시적인 군집일뿐입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의 하나로 수오지심, 즉 치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분을 초고하지 않는 일시적 군집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피차 배려하지 않습니다. 소매치기나 폭행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잠시만 지나고 나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242]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242]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248] 자기는 하지 않고 시키기만 하는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환경만을 만들어 주는 맹모에 비해서도 훨씬 뛰어난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직접 자신의 일면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교육적 효과는 차치하고라도 참된 스승의 모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250]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

[253] 유가 사상은 서구사상과 마찬가지로 진의 사상입니다.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255]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261] 간단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정리한다.

[269] 도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70] 무와 유는 그것에 접근하는 접근로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는 개념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271] 노자 철학을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 중에서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물이기 때문에 물의 비유로써 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273] 세상 만물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 전화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 체계입니다.

[280]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281] 지식의 도구인 언어 그 자체가 가장 이윤 폭이 큰 첨단 상품이 되고 있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도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도무지 무욕할 수도 없고 무지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282]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 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생선의 비유는 일상 생활의 비근한 예를 들어서 친근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284]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285]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거나 객관적 조건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도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그 진행과정이 순조롭지 못하고 당연히 다투는 형식이 됩니다.

[285]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하기도 할수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289]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가 바로 현실이며 정의라는 것이지요.

[289]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290] 하방 연대에는 보다 진보적인 역량이 덜 진보적인 역량과 연대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덜 진보적인 역량은 더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292] 빔이 쓰임이 됩니다. 누구나 수레를 타고 그릇을 사용하고, 방에서 생활하지만 그것은 수레나 그릇이나 방의 있음에만 눈을 앗기어 그 있음의 배후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지요.

[293] 한 개의 상품의 있음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293] 자본주의적 가치란 소유와 소비라는 유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유지되는가, 이 유의 세계가 어떠한 것을 축적하고 어떠한 것을 파괴하고 있는가를 주목하는 실천적 관점이 바로 노자의 현대적 독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93] 보통 사람들은 소유없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노스님의 무소유는 사찰 종단의 거대한 소유 구조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무소유가 가능한 것은 소유가 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295] 최고의 정치는 무치라는 것이지요. 그 다음이 백성들이 친애하고 칭송하는 임금입니다. 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임금이 백성들을 자상하게 보살피기 때문에 백성들이 친애하고 칭송하겠지만 이러한 임금은 없는 듯이 존재하는 임금만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이 두려운 임금입니다. 권력을 행사하고 형벌로 다스리는 패권정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운 임금보다 못한 임금이 바로 백성들이 업신여기는 임금입니다. 멸시의 대상이 되는 임금이지요.

[296] 공성사수, 즉 일이 성취되더라도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기가 이룩한 일을 생색내지 않는 것입니다.

[296] 백성들이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임금을 믿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이지요.

[301] 언어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소통은 화자와 청자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맷돌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 세계의 소통없이는 결코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자의 연상세계와 청자의 그것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정확한 의미의 소통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302] 기본적으로는 언어란 불충분한 표현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언어는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찾아내고 그 대상에 대한 청자와 화자의 합의가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303] 진보란 단순화입니다.

[304] 노자 사상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것의 핵심은 동보다는 정을, 만보다는 허를, 교보다는 졸을, 웅보다는 자를, 그리고 진보다는 귀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 데 있습니다. 노자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 사상에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309]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317]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319]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324]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은멈추고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입니다. 천리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넣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직인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번도 인대를 밴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326]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이것이 자연이며 도의 세계입니다.

[326] 소와 발이 네 개 있는 것 이것이 천이요, 말머리에 고삐를 씌우고 소의 코를 뚫는 것 이것이 인이다.

[327]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330] 생산성, 경쟁력, 효율성이라는 신화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장자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양적 가치는 ‘인성의 고양’입니다.

[331]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자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단어을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지출보다는 실현이 더 적절한 어휘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332] 내가 기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한포기 풀이 자라는 것을 보더라도 그 풀은 햇빛과 물과 토양과 잘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추운 겨울에는 깜깜한 땅속에서 뿌리로만 견디며 봄을 기다릴 줄 압니다. 그러나 기계는 철저하게 자기 식대로 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거나 주변 조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습니다.

[333]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34]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339]장자가 제자들과 산길을 가다가 잎과 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나무를 베지 않고 있는 나무꾼에게 그 까닭을 묻자 나무꾼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장자 일행이 산에서 내려와 친구 집에 묵었는데 주인은 매우 반기며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거위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한 놈은 잘 울고, 한 놈은 울지 못하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하자 주인은 울지 못하는 놈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제자들이 장자에게 물었습니다.

“어제 산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할 수 있었는데, 오늘 이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서겠습니까?”
장자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나는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쓸모가 있으면 천수를 다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쓸모가 없으면 취직이 안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도 있습니다. 대체로 여러분의 고민이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학의 고민도 나찬가지입니다. 대학이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졸업 후의 취업을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재材와 부재不材에 대한 현실적 고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자가 제기한 재와 부재의 논의는 이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자가 중간에 서겠다고 한 것은 중간 지점인 절충의 자리에 서겠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간도 사실은 도와 비슷하지만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 장자의 결론입니다.

[343]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 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347] 직접적 원인을 인이라 하고 간접적 원인을 연이라 한다면, 즉 친인소연이라 한다면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352] “지혜란 무엇인가?”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를 여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은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큰 도적은 궤를 훔칠 때 통째로 둘러메고 가거나 주머니째 들고 가면서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제물을 모아주는 것이다.”
오늘날의 지식이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이런 역할에 지나지 않지요. 정권을 유지하게 하거나, 돈을 벌게 하거나, 나쁜 짓을 하고도 그것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을 대행하는 일이지요.

[355] 전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게 마련이고, 제는 토끼를 잡는 올무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이렇듯 그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이야기 하고 싶구나.

[356] 나는 반대로 고기는 잊어버리고 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57]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63]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되듯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 침투합니다.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과제를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각 학파가 전개하는 논리적 정합성은 당대 사회가 공유하는 지적 수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학파간의 차이는 접근로와 강조점이 조금씩 다를 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368]진秦나라 임금이 딸을 진晉나라 공자公子에게 출가시켰습니다. 그 딸을 시집보낼 때 70명의 첩을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혀 딸려 보냈습니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공자는 그 첩들을 사랑하고 그 딸은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논변이 많으면 그 핵심을 놓친다는 것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지요.

[374]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376] 묵자가 중국에서 자취를 감춘 때가 기원전 100년경이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 찾아온 동방박사가 망명 묵가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380] 제나라와 진나라가 처음에는 작은 제후국이었으나 전쟁을 통하여 영토가 확장되고 백성이 많은 강대국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공전을 예찬하는 논리가 있지만 묵자는 단호하게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논박합니다. “만 명에게 약을 써서 서너명만 효험을 보았다면 그는 양의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약이 아니다. 그러한 약을 부모님께 드리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382]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83] 마치 소비가 미덕이듯이 전쟁이 미덕이 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자본주의 발전과정은 제국주의적 팽창과정이었으며,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해소하는 방식이 냉전이든 열전이든 항상 전쟁에 의존해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10년 주기로 경제공항이 반복되어왔으며 대규모 전쟁 역시 10년을 주기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의 전쟁사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386]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388]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져야’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91] 기업의 논리, 경쟁의 논리, 효율성의 논리에 의해서 생산 규모아 소비 수준이 설정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진보는 단순화라는 간디의 명제를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묵자의 <절요>편은 소염론, 사과론과 함께 과잉 생산과 대량 소비로 귀착될 수 밖에 없는 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낭비구조를 조명하는 유력한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낭비 구조와 함께 거대한 소염구조도 함께 주목해야 하는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392] 무엇을 삼표하고 하는가. 본(本), 원(原), 용(用)이 그것이다. 어디에다 본할 것인가? 위로 옛 성왕의 일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어디에다 원할 것인가? 아래로 백성들의 이목(현실)을 살펴야 한다. 어디에다 용할 것인가? 나라의 법과 행정이 시행되어 그것이 국가, 백성, 인민의 이익에 합치하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394] 묵자의 사상은 하느님이외의 어떤 것도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07] 물리적 천관에 의거하여 순자는 인간의 적극 의지를 주장합니다.

[410] 뛰어난 장인은 손대지 않고 남겨두는 데서 그 진가를 발휘하며, 뛰어난 지자는 생각을 남겨두는 데 그 진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413]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414]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에 의하면 본성은 선악 판단의 대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DNA의 운동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 DNA운동은 자기의 존속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명쾌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단연 계란이 먼저라는 것이지요. 닭은 계란 속의 DNA가 자기의 존속을 위하여 만들어낸 생존 기계일 뿐입니다.

[415] 인간의 모든 욕망도 이 DNA의 존속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그러한 장치의 다양한 기능 중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417] 순자는 모든 가치 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인문 철학자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421] 예란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421] 이 법과 제도가 안정적으로 작동케 하기 위해서 교육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423]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인간 사회의 문화적 소산은 사회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회의 조직이 바로 예입니다.

[426] 순자는 법이란 무엇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잠재력을 길러내는 것이며, 법이란 글자 그대로 물이 잘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427] 사회의 질서가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공감과 동의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를 계승한 법가의 이론이 바로 이 점을 간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가 단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428]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432] 법가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응방식을 모색해갑니다. 법가의 사관을 미래사관 또는 변화사관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439] 법의 공개성이야말로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46] 호랑이가 개를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은 발톱과 이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발톱과 이빨을 개에게 내어주어 그것을 쓰게하면 호랑이는 반대로 개에게 굴복당할 것이다.

[449] 나라의 쇠망을 알려주는 일곱가지 징표
“나라는 작은데 대부의 영지는 크고, 임금의 권세는 가벼운데 신하의 세도가 심하면 나라는 망한다. 법령을 완비하지 않고 지모와 꾀로써 일을 처리하거나, 나라를 황폐한 채로 버려두고 동맹국의 도움만 믿고 있으면 망한다. 신하들이 공리공담을 좇고 대부의 자제들이 변론을 일삼으며, 상인들이 그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아놓고 백성들이 곤궁하면 나라는 망한다. 궁전과 누각과 정원을 꾸미고, 수레, 의복, 가구들을 호사스럽게 하며,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고 재화를 낭비하면 나라는 망한다. 날짜를 받아 귀신을 섬기고, 점괘를 믿으며 제사를 좋아하면 나라는 망한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만 따르고 많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한사람만을 요직에 앉히면 나라는 망한다.”

[451] 정나라에 차치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을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시장의 신발 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 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은 살 수 없었다. (그 사정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차치리의 답변은)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457] 교사가 졸성보다 못하다는 이 말의 뜻은 나는 세상 사람들 중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로 읽고 있습니다. 아무리 교묘하게 꾸미더라도 결국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460] 모든 사상이 갖는 한계란 실상 완성된 체계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이 역사적으로 제약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자면 절대적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언제나 상대적 진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는 역사적 제약의 다른 표현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474]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이라고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475]개인이 갇혀있는 분별지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있는 집합표상, 즉 업을 깨닫는 일입니다.

[486] 불교와 신유학은 도전과 응전이라는 역사의 어떤 전형을 엿보게 합니다. 역사의 매단 계에는 이러한 구도가 중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러한 중층적 구도를 명쾌하게 드러내는 것이 역사 이해의 본령이라고 생각합니다.

[495] 정자가 말하기를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庸)이라 한다. 중은 천하의 바른 도요, 용은 천하의 정한 이치이다.

[496]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504]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창신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지적 관심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506] 바로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전강독 강의를 재조명하는 것이지요.

[509]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509] 시와 산문을 더 많이 읽으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509]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510] 사상의 존재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510]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515]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3. 내가 저자라면


역사학자 E. H. Carr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하였다. 저자는 그 대화의 주제를 ‘관계’로 정하고 동양고전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교도소라는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간속에서 자신만의 독법으로 진행해왔다. 그 대화의 내용을 후배들에게 강의형식을 빌어 이야기하였고, 그 내용을 ‘강의’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하였다.

책을 읽고 난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책 속에 나온 구절로 대신할 수 있겠다.
“‘득어망전(得漁忘筌) 득토망제(得兎忙蹄)’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리고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어버린다.)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이렇듯 그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싶구나” (P 356)

그런데 저자는 그 반대로 고기는 잊어버리고 망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고기는 하나의 현상이고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지변에 구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에 뜻을 따라 이 책의 내용을 다르게 구성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바로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로 사상의 발전 방향을 정리하고 싶다. 사상은 역사적으로 변화 발전하였다. 변화의 방향이 주류와 비주류의 대립에 의해, 또는 도전과 응전의 방식으로 그것이다. 이를 물리학의 한 법칙인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새롭게 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구성해보면, 사상이 변화하는 주기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고, 미래의 흐름도 통찰해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기지 않을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사상의 중심이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상의 흐름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통찰해보는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양극단의 존재는 각 극단 서로에게 유용하다. 서로가 발전하는 동기를 부여하며, 힘의 균형을 통해 조화를 이루어나간다.

요즈음 사람이 중요하다고 한다. 심지어 직장을 얻는데도 사람이 중요하다고 하여 인맥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관계가 사람 그 자체의 가치보다는 그 사람의 활용가치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최근 신문에 시골에 있는 의사는 떡을 돌린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 그 의사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떡을 돌린 의미는 무엇일까? 옛날처럼 단순한 이웃의 정을 나누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이웃을 고객으로 생각하는 한 방편일까? 현재 우리네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이고 만남이 있더라도 상업성이 전제되는 그런 만남만이 존재하는 사회인가? 시골의사가 돌린 떡이 ‘돈’이 아니라 진정으로 ‘정’이 고파서 돌린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IP *.212.167.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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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1.12 07:29:37 *.128.229.81
꼼꼼하고 성실하다. 그물이 촘촘하면 작지만 진귀한 고기를 놓치지 않는다. 소설가는 어디서나 소재를 찾고 느닷없는 연결을 즐긴다. 인생은 어디에나 그 비밀을 흘려 두어 지칠 때 눈에 띄게한다.
프로필 이미지
여해
2007.11.13 11:49:57 *.93.113.61
창의력이 부족한 저에게 연결은 중요한 창조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사부님께서 깨우쳐주셨죠. 하지만 연결의 재료가 많이 부족하여 그 강도가 약하고 다양하지 못합니다. 사부님 말씀대로 그 소재를 언제 어디서나 찾고 느닷없이 연결을 즐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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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3 강의 : 신영복 [1] 素賢소현 2007.11.12 2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