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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6일 15시 34분 등록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신영복/돌베개


1. 저자에 대하여

저자 신영복 교수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한 뒤 8ㆍ15 특사로 가석방됐다.’라는 말이 그의 이력 중에 가장 인상적인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력과 비추어 그의 외모를 이야기할 때 마치 수형생활 20년을 빼버리기라도 한듯 젊어 보인다는 것과 맑은 눈빛을 말한다. 젊어 보이는 외모에 대해서 저자는 "나는 갇혀 있고, 세월은 혼자 흘러가는가 봅니다. 원래 군대나 학교, 교도소처럼 젊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은 잘 안 늙는 편입니다 ." 라고 매일경제(2006.3.7)와의 인터뷰에서 말 한바 있다.

저자 신영복을 처음 접한 것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으로 부터이다. 당시에 책 제목이 너무도 독특해서 사보게 된 책이다. 저자의 정갈한 편지글에서 감옥에서의 일상에서 발견하는 기쁨과 무기수로서 겪는, 체념인지 달관이지 모를 잔잔한 슬픔 같은 것을 엿보았다. 꽃순이라고 이름 붙인 들고양이, 칼잠을 자는 여름날의 감옥의 증오와 반성, 민들레꽃 하나에서 찾아내는 봄, 계절이 바뀜에 따라 안부를 묻는 말들. 그의 편지글들은 겨울눈이 쌓인 곳에 다시 서리가 내린 것처럼 정신이 맑아지는 아침을 맞는 것 마냥 정갈했다. 그 중에 가슴에 울리는 것이 몇몇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그만큼 내게 맞닿는 것이었나 보다.

옥뜰에 서 있는 눈사람.
연탄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달력을 통해 본 저자의 글씨들. 그리고, 얼마전 그의 서화작품을 모은 책을 접했다. 저자를 모르고 볼 때는 그는 이 세상과는 좀 많이 떨어져 사는 사람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여러 시간을 들여 그와(실제로는 그의 책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저자 신영복은 멀리 있다. 그의 고전 독법 강의를 묶어 책을 펴냈다고 밝히고 있어 세상과 멀리 떨어진 사람이 아님을 알게 하지만, 여전히 조금은 떨어져 있는 사람같다는 느낌이 여전히 많다. 뭔지는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책에서 엿본 저자 신영복의 한방향성의 주장, 혹의 그의 글의 정갈함, 혹은 시서화문사철을 모두 겸비한 조선시대 선비같은 모습, 독특한 이력, 약간의 경외감,...... 이 모든 것의 복합적인 것.

(홈페이지(http://www.shinyoungbok.pe.kr)의 [대담/인터뷰] 중에서 최근의 몇 개 중에 『강의』책에서의 그의 목소리와 같은 것을 발췌한 것입니다.)


■ ‘딴따라 출신 탁현민씨와 그의 10년지기 스승 신영복 교수와 젊은 대화’ 중에서 일부
(‘가벼움에 내용이 없으면 지루함이 됩니다 - 한겨레신문 2007.10.04’)

탁현민(이하 ‘탁’) : 그동안 선생님께서는 관계나 소통, 대화의 필요성과 회복을 강의나 책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말씀해 오셨어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관계, 소통, 대화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계세요?

신영복(이하 ‘신’) : 오늘날 대화는 굉장히 많아졌어요. 속도도 빨라졌고 댓글이나 매스미디어 등을 통해 넓이도 확장됐죠. 우리는 굉장히 많은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문화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과연 진정한 대화인가’에 대한 회의를 갖게 돼요. 오늘 아침에 소크라테스를 읽었어요. 소크라테스가 흔히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잖아요. 너 자신을 알라는 게 대화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었어요. 광범위한 대화, 급속한 대화 속에 있지만 대화와 소통이 부재하다는 막연한 느낌은 자기와의 대화가 없고 다른 사람을 향한 대화만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대화의 기제가 있음에도 인간적인 대화가 없는 것은 아닌지 아침에 소크라테스를 읽으면서 생각했어요.

탁 : 아침에 소크라테스라니, 역시 선생님 대단하세요. 저는 아침에 못 일어났는데.(웃음) 대화 자체가 굉장히 많아졌다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런데 요즘 보면 두 종류의 책이 유난히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연애 쪽 기술을 다루는 책들, 또 말의 기술이나 대화법을 다루는 책들이요. 그런데 연애의 기술을 다룬 책들이 쏟아지는 이유가 본질적으로 사랑을 잃고 사는 시대의 방증이라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말이나 대화의 기술에 관한 책들이 쏟아지는 이유도 결국 소통의 답답함이나 대화가 부족한 시대의 요구 때문은 아닐까요?

신 : 개그나 가벼운 대화 같은 것들이 뭔가 보이지 않는 억압으로부터의 탈출과 관련이 있다고 봐요. 지금 사회의 억압·지배구조는 과거의 물리적인 지배구조와는 다르죠. 개인이 억압구조를 느끼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해요. 가벼운 대화가 대화라기보다는 억압구조에서 탈출하려는 개인의 굉장히, 뭐랄까 자기에게 다가오는 무게에 대한 저항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시장화죠. 시장은 단 하나의 가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잖아요. 화폐가치와 그에 따른 이해관계죠. 이해관계를 중심에 놓은 대화는 충돌일 수밖에 없어요. 여기에서 오는 피곤함에서 탈출하려는 게 가벼운 기교라든지 표면에 천착하는 대화죠. 진정성이나 내면의 사색을 담는 대화와 이어지기는 어려워지는 거예요.

탁 : 최근 그런 예능 프로그램의 대화를 보면 상대방을 자극하거나 폄하하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이뤄지는 경향이 있어요. 상당히 가학적이죠. 상대방을 조롱하거나 비난하면서 재미를 만들어내는 구조인데 혹시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도 그런 경향으로 몰려가는 것은 아닐까요?

신 : 다른 사람을 폄하하고 곤욕을 치르게 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은 사실 오래된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도소에서 재소자가 교도관한테서 지독하게 얻어터지고 돌아오면 그걸 맞이하는 똑같은 처지의 재소자들도 참담한 심정을 갖게 돼요. 거기서 어떻게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느냐 하면, 다른 재소자 친구가 교도관의 역할을 하고 그 상황을 재현해 다시 한번 그 상황에 놓는 거죠.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하는 티브이를 보면서도 그 순간에는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그러한 티브이 프로그램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억압구조가 있다는 것의 방증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사회적 권위에 대한 저항성은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도 같아요.

탁 : 이전 시대가 텍스트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이미지의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머리 모양이나 패션과 같이 구태여 입을 벌려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의 외모나 분위기만으로도 일정 부분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말이나 대화의 총량이 줄어드는 건 아닐까요?

신 : 자기와의 대화나 진정성이 담겨 있는 대화는 없어진 반면에 오히려 언어 이외의 소통 기제는 다양해졌어요. 언어는 개념적 사고예요. 사물을 단순하게 바라보고 단순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폭력적 기제라고도 볼 수 있죠. 거기에 비하면 패션이나 이미지, 디자인이 굉장히 풍부한 소통 기제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앞으로 이런 기제가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겠죠. 언어적 소통의 소멸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거대담론이 소멸한다는 것이에요. 사회의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고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거대담론이 소멸해나간다는 거죠. 감각적이고 이미지 중심의 대화나 소통은 사회의 기본 구조를 바꿔가려는 거대담론이 해체된 이후의 포로들의 언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근본 담론은 없어지고 파편적인 대화만 있으면 사회의 기본 구조가 바뀔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드는 거죠. 그래도 개방적이고 다양한 의사소통 구조의 발전과 공유는 그 속에 담기는 콘텐츠나 진정성의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유력한 기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탁 : 칼럼 연재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대화에 대한 필요성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어요.

신 : 저는 그런 필요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소모적인 대화에 익숙해져 있고 중요한 주제를 기피하는 대화를 주로 하는 것이 사실이죠. 그러나 많은 걸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도 기쁘긴 하지만 뭔가를 깨닫는 것이 진짜 기뻐요.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인성을 고양하는 거예요. 좋은 사람이 된다는 얘기죠.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다른 사람에 대해 인간적인 이해를 하고, 그래서 좋은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가치입니다. 대화가 바로 그 부분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죠. 나 자신을 깨닫게 하고 인간관계를 배려하게 하고 우리가 발 딛는 구조나 역사를 성찰하게 하는 그런 진정성을 담아야 합니다. 소모적인 대화는 아픈 사람에게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진통제예요. 진통제는 조금 더 견디게 할 뿐이지 처방은 아니죠.

탁 : 사람들이 선생님에 대해 잘 모르는 점 중 하나는 선생님이 ‘얼리어답터의 기질이 있으시다’라는 거지요. 선생님은 그림도 포토샵으로 그리시죠. 인터넷 커뮤니티도 1997∼1998년 그때 일찍부터 만들어서 활동하셨구요. 90년대 초중반 인터넷에는 무한한 정보가 있다는 개념이 막 생길 그 당시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 중에 ‘인터넷이 많은 정보를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쓰레기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게 기억나요.

신 : 포토샵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부터인데, 그때 해외 기행하면서 화구를 가져갈 수 없어서 컴퓨터로 원고도 쓰고 그림도 그렸어요. 감옥에 있을 때 컴퓨터에 관한 기본적인 책은 2권 정도 읽고 나왔어요. 채팅은 안 해도 이메일은 해요. 인터넷은 검색 위주로 하고요. 정보는 얻거나 쌓아둔다고 하잖아요. 대화에서 담아야 하는 진정한 의미의 지식, 지혜는 얻는 게 아니에요. 지혜는 자기가 깨닫는 거예요. 얻는 것, 쌓아두는 것은 쓰레기가 될 가능성이 있죠. 정보, 지식, 지혜로 구분한다면 지금의 대화는 정보 수준의 대화예요. 지혜나 지식은 인간관계 속에서 얻든지, 스스로 깨닫는 것이어야 해요. 그런데 지금 환경은 인간관계 속에서 지혜나 지식을 얻을 만한 환경이 아니죠. 도시에서 공간공동체나 혈연공동체가 없어진 지는 오래지요. 도시에서 인간적인 대화나 공통의 주제를 찾아낸다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죠. 자본의 말단 구조에 달려 있는 칩같이 반짝반짝 하는 게 우리 대화의 실상이라고 봐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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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 제 칼럼 제목이 ‘말 달리자’인 것처럼 결국 말은 잘 달려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잘 달리는 데 기술적인 것들, 현란한 기교는 별로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지혜와 지식을 교류하면서 대화하는 방법이 있다면 뭘까요?

신 : 저는 글을 별로 많이 쓰지 않는 사람이에요. 쓰더라도 힘들게 쓰는 사람이죠. 아까 언어는 사물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폭력이라고 했었죠. 현란한 언어보다는 절제된 언어가 훨씬 더 많은 소통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많은 소통 기제가 있음에도 대화와 소통의 부재를 우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도 절제하고 침묵하고 여백을 많이 남겨놓는 것이 독자와의 대화를 더 잘할 수 있도록 해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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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 ‘신영복 선생님이 말하는 대화의 기법’ 정도로 정리가 되는데요?(웃음)

신 : 얘기가 기법으로 가는 것 같은데, 나는 감옥에 오래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적나라하게 만났잖아요. 결론은 뭐냐면 ‘그 사람의 생각은 자기 삶의 결론으로 갖고 있구나’ 하는 거에요. 삶의 결론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내가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은 나하고는 전혀 다른 삶의 궤적 속에 내 얘기를 가져가서 앉힌다구요. 맷돌을 예로 들면, 학생들은 맷돌의 연상세계가 청진동 빈대떡집밖에 없잖아요. 내 맷돌은 외갓집 장독대 위 맷돌이거든. 내가 맷돌에서 시작해서 나팔꽃으로 갔다가 돌담장으로 옮아가면 학생들은 청진동에서 어디로 가느냐구요. 사람들이 자기 경험 속에 내 얘기를 앉힐 수 있는 시간을 주거나, 자기의 경험을 포기하고 내 그림 속으로 들어오게 하거나 해야죠.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았다는 점을 인정하고 배려해야 대화가 가능한 거예요.


■ 시화전(2007년 2월) 을 열고서 레이디경향(2007년 3월호)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발췌
( ‘처음처럼’ 늘 푸른 선생님, 우리 선생님 신영복 교수 - 레이디경향 2007년 3월호)

“어렸을 때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에게 처음 붓글씨를 배웠어요. 그리고 4.19 이후에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을 때 다시 글씨에 대해 관심을 가졌지요. 지금과 같은 글씨체를 완성한 것은 감옥에 있을 때입니다. 감옥에서 낮에는 공장 일을 하고 밤에는 개인적인 시간을 갖게 해주었어요. 당시에 기독교 방, 불교 방, 동양화 방 같이 특별활동이 있었지요. 저는 운이 좋게도 거기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선생님의 글씨를 보고 있으면 너무나 부럽습니다. 하여 선생님께 물었지요. 어떻게 하면 글씨를 잘 쓸 수 있느냐고. 그러자 선생님께서 글씨를 잘 쓰는 것은 인생을 잘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글씨는, 쓰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키워온 정서와 삶의 철학이 담겨 있어요. 사람과 전혀 다른 글씨가 나오기는 힘들죠.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으면 글씨 속에 많은 경험과 무르익은 생각들이 알게 모르게 배어 나옵니다. 그래서 글씨는 나이가 지긋하게 된 후에 배우는 게 좋아요. 잘 쓰는 비결도 그래요. 자기 인생을 잘 사는 것과 다르지 않죠. 글이나 그림, 글씨에는 성품이 묻어나죠. 마음속에 있는 것을 종이 위로 내놓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선생님께서 글 쓰는 게 어렵다고 하시니까 한편으로는 ‘엄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꼭 글을 쓰는 것 말고도 세상 일이 다 어려울 거예요.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글, 글씨, 그림을 만들어낸 당사자들은 상당히 오랜 시간 고통과 불멸의 밤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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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립니다. 한데 선생님께서는 주춧돌부터 그리십니다. 물론 선생님께서 처음부터 주춧돌을 먼저 그리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도 처음에는 지붕부터 그리셨다지요. 노인 목수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감옥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제 자신이 갖고 있는 정서라든가 사고방식이 대단히 관념적이란 걸 깨달았어요. 감옥에 있는 동안에 목수의 집 그림이라던가 이러저러한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을 반성하고 새롭게 바꿔가는 노력을 하게 됐죠. 20년 동안 상당히 많은 부분 자기성찰도 하고 바꿔가기도 했어요. 그래서 가끔은 감옥에 있던 20년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 이름 붙이기도 합니다. 대학 시절이란 것은 나 자신을 새롭게 성찰하고 재조명하는 기간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약력
1941년 경남 밀양 출생
1963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숙명여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198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1989년 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
2006년 8월 정년퇴임
현재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석좌교수

1)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
엽서(1993년)
나무야 나무야 (1996년)
더불어 숲 1권 (1998년 6월)
더불어 숲 2권 (1998년 7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증보판 (1998년 8월)
더불어숲-개정판 합본 (2003년 4월)
신영복의 엽서 (2003년 12월)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년 12월)

2) 역서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년)
사람아 아!사람아(1991년)
루쉰전(1992년)
중국역대시가선집(1994년)

2. 책에 밑은 그은 부분들 (인용)


<1장 서론>
[19] 한 개인의 삶에서 그 시대의 양(量)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삶의 정직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라고 하다면....

[21]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21]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저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 [23] 우리의 고전 강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전 강독의 전 과정이 화두를 걸어놓고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이 화두는 물론 21세기의 새로운 문명과 사회 구성 원리에 관한 것이지만, 일에 대한 전망으로서보다는 오히려 현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6] 아침에 책방 도령의 글 읽는 소리를 듣자니 미록,지대, 자야로읽더라는 겁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책방 도력의 읽는 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미, 록지, 대자야로 바르게 끊어서 읽더라는 것이지요. 스스로 깨치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걸려서 그제야 깨닫는 그런 비능률적인 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매우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 麋鹿之大者也 : 미(큰 사슴미)는 사슴(사슴 록) 중의 큰 놈이다.

[27]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기하는 것이지요.

[29]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30] 서양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현대 세계의 기본적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 그럼 동양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는? 그럼 동양인의 정신적인 바탕, 구조, 동양의 정서를 이해하는 것인가?

[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거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을 모질게 해서는 안되며,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일에 소용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36]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있는 것이지요.

[36]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입니다.

[38]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최고의 질서란 그것의 상위에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힘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하여 지시적 기능을 하는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

[39] 어떠한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의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1]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 :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 논어

[42]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44]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지요.
* 노자가 자연을 최고의 자리에 두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45] 나는 21세기 담론은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새로운 구성원리로 바꾸어내고자 하는 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6] 동(同)은 이를테면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자 강철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동同의 논리를 화(和)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장 오래된 시詩와 언言>

[52]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의 정수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5] 정의(情意)가 언(言)이 되고 언(言)이 부족하여 가(歌)가 되고 가(歌)가 부족하여 무(舞)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56]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61]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수 있는 어떤 혼(魂)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62] 草尙之風 草必偃 초상지풍 초필언
誰知風中 草復立 수지풍중 초부립

[67] 기록은 무서운 규제 장치입니다.

[72] 한마디로 무일(無逸)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 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77]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81]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3장 주역의 관계론>

[100]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라는 표현을 하지요. 눈이 얼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달려 있다는 뜻이지요.

[102]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103]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07]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 사상가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비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127]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업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책(주역)에서 자연을 보는 것인가, 선현의 생각을 보는 것인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인가? 그래서 글은 쓰는 사람을 닮았다고하는 것인가 보다.

[129]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4장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141]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141]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人)에 대한 담론이든 민(民)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에서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42]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溫不亦君子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142] 노예제 사회에서는 학습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수기(修己)는 물론이며 치인(治人)도 학습의 대상이 아닙니다.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학습이 갖는 의미는 거의 없습니다. 학습에 대한 언급이 『논어』첫 구절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 변동기임을 짐작케 하는 것입니다.
* 그럼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더 높은 학위, 쓸만한 기술, 어학실력을 가지겠다고 열심이며, 자기개발 하겠다고 나서지 않는가 말이다.

[144]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150]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

[159]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熟知性)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160] 동양학에서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 그 개념 자체를 상술(詳述)하거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 보다는 그와 대비되는 개념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뜻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한시(漢詩)의 대련(對聯)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165] 화(和)의 놀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하는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가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175]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181]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現場性)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한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經驗知)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學)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임에 비하여 사(思)는 특수한 것(specialism)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亡)'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捨象)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182] '학이'편에 나오는 '학즉불고'(學則不固)란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학(學)이 협소한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186] 사실 진정한 지란 무지(無知)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

[189] 대중은 현명하다.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겸허해야 하는 이유이다.

[191]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려는 ‘화낭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實)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기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192]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宥和)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194]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雍也]
바탕이 문채(文彩)보다 승(勝)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198] “애석하구나! 문(文)이 질(質)이고 질이 곧 문이다. (만일 무늬가 없다면) 표범의 털 뽑은 가죽이 개와 양 털 뽑은 가죽과 무엇이 다르랴”

[199]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雍也]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P199)

[202]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 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5장 맹자의 의(義)>
[225]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仁) 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知)의 싹이다.

[236]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40] 자본주의는 상품사회(商品 社會)입니다. 상품 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 교환의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243]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249] “인(仁)을 짓밟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짓밟는 자를 잔(殘)이라 합니다. 잔적한 자는 일개 사내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일개 사내일 뿐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으나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249] 어린아이들일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을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6장 노자의 도와 자연>
[263]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
도라고 부를 수 잇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無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有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그 신묘함을 보여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은 신묘함의 문이된다.

[264]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269]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그릇이지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272] 무위란 작위(作爲)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274]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僞)입니다. '위'(僞)는 인(人) + 위(爲)입니다. 거짓(僞)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288]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그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地位)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강자가 지배하는 구도에 있어서 약자의 수가 항상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강자가 다수일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핵심입니다.
* ???? 다 공감은 못하겠다.

[289] 江海所以能爲百谷王子 以其善下之
바다(江海)가 모든 강(百谷)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292]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7장 장자의 소요>

[309]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 장자 외편 秋水

[310] 과도기는 언제나 백화제방의 시대입니다.

[313] “내가 듣기로는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이미 3천년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임금은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상자에 넣어 묘당에 보관한다고 합니다. 당신이 그 거북의 입장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기어 존귀하게 되고 싶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겠소?”

[319]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상 투쟁으로 끝나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326] 인위(人爲)로써 自然을 멸하지 말며, 고의(故意)로서 천성(天性)을 멸하지 말며, 명리(名利)로서 천성의 덕(德)을 잃지 말라. 이를 삼가 지켜 잃지 않는 것을 일러 천진(天眞)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 노자의 추수편 중에서

[328] 장자에게 있어 도(道)의 깨달음이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合一)입니다. .......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일고 있습니다. 교실과 책과 시험으로 채워진 학교 시절을 끝내고 싱싱한 삶의 실체들과 부딪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으리라고 생각합니다.

[334] 불치 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 까 두려워서였다.
* 가슴 아프다.

[335] 자기의 문화, 자기의 생산물, 자기의 언어, 자기의 신(神)을 강요하는 제국(帝國)과 패권(覇權)의 논리가 반성되지 않는 한 참다운 문명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달이든 별이든 북극성이든 은하계든 그리고 작은 풀 한 포기든 돌멩이 한 개에 이르기까지 별의 부스러기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P347)

[341] 목수 장석이 제나라고 가다가 사당 앞에 있는 큰 도토리 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아름이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산을 위에서 내려다볼 만하였다.
.....
“그런 말 말아야. 쓸데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빠리 썩어 버리고, 그릇을 만들면 쉬이 깨져 버리고,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리고, 기둥을 만들면 곧 좀이 먹는다. 그것은 재목이 못 될 나무야. 쓸모가 없어서 그토록 오래 살고 있는 것이야.”
장석이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 데 그 큰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나를 어디에다 견주려는 것인가? 그대는 나를 좋은 재목에 견주려는 것인가? 아니면 돌배, 배, 귤, 유자 등 과일나무에 견주려는 것인가? 과일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따게 되고, 딸 적에는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로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349] 남해 임금 숙, 북해의 임금 홀,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이 자주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 둘을 잘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같을 방도를 의논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 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줍시다.”
날마다 구명 한 개씩 뚫어주었는데 칠 일만에 혼돈이 죽어버렸다.
* 혼돈 살려내!!!!
산 것은 쉬이 죽게 할 수는 있지만, 이미 죽은 것을 어떻게 살려낸단 말이요.

[356]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8장 묵자의 겸허와 반전 평화>

[363] 사상이란 일정한 사회적 조건에서 생성되는 것이지만 그 사회적 조건이 변화하면 사상도 사상사(思想史)의 장(場)으로 물러납니다.

[365] 백성이 국가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참으로 두려워해야할 사태가 일어난다. (民不畏? 則大?至)노자

[379] 전쟁을 용인하는 한 그것이 어떠한 논리로 치장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기만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나쁜 평화가 없듯이 좋은 전쟁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382]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87] 키예프의 전승 기념탑은 언덕 위에 팔 벌리고 서 있는 모상(母像)이었습니다. 내가 의아해 하자 안내자가 설명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돌아오는 아들을 맞으러 언덕에 서 있는 어머니의 상이야말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전승의 의미를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어요.

[396] “양성군과 나는 스승과 제자이기 이전에 벗이었고, 벗이기 이전에 신하였다. 우리가 죽기를 마다한다면 앞으로 세상 사람들이 엄격한 스승을 구할 때 묵자학파는 반드시 제외될 것이며, 좋은 벗을 구할 때도 묵자학파는 제외될 것이며, 좋은 신하를 구할 때도 반드시 북자학파가 제외될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택하는 것은 묵자학파의 대의(大義)를 실천하고 그 업(業)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다.”
* 그이 뜻대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두 가지를 모두 선택할 수는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죽어야 했냐고 다시 묻고 싶다.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407]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하여 겨울을 거두어가는 법이 없으며, 땅은 사람이 먼길을 싫어한다고 하여 그 넓이를 줄이는 법이 없다. 군자는 소인이 떠든다고 하여 할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다. 하늘에는 변함없는 법칙이 있으며, 땅에는 변함없는 규칙이 있으며, 군자에게는 변함없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 순자의 [천론] 중에서

[423] 곧은 나무를 휘어서 바퀴가 되는 하는 것을 유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그리고 바퀴가 예전처럼 다시 펴지지 않게 하는 것도 이 유의 효과입니다.
* 유(매만저 바퀴처럼 구부릴 유) 車 +柔 +=> 유

[424] 蓬生麻中 不扶而直 白沙在捏 與之俱黑 - 「勸學」
쑥이 삼속에서 자라면 부축하지 않아도 곧게 되고 흰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함께 검어진다.

[425] 성인(聖人)이라면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군자는 자기의 내부에 있는 것을 공경할 뿐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10장 법가와 천하 통일>

[443]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생하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로울 것이며, 인(仁)의 도리는 처음에는 잠깐동안 즐겁지만 뒤에 가서는 곤궁해진다” (法之爲道前苦而長利 仁之爲道偸樂而後窮)

[452] 내가 바로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걸 곧 깨달았어요. 여러분도 탁을 가지러 집에 가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고나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신을 본 뜻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 나는 리포트 쓸 때, 현실이 없어. 막막하거든.

[456] 나는 그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 사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요. 사상과 시대, 사상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는 것도 같습니다.

[460] 모든 사상은 다른 모든 사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파란만장한 역사적 전개 과정의 일환으로 출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떠한 철학 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제약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개념적으로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11장 강의를 마치며>

[474] 만약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큰 것이고 충분히 넓은 것입니다. 한 포기 작은 민들레도 그것이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 그리고 갈봄 여름과 연기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지요. 공간적으로 무한히 넓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475] 우리의 현실과 그 현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구조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를 포섭하고 잇는 문화적 기제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 시대의 지배 담론이 아닌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깨달음엘 다짐해 오고 잇는 셈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覺)에 있어서 최고의 형태는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475]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476] “참다운 도의 어렵지 않으며 오로지 간택(揀擇)을 경계할 따름이다.” ...간택이 바로 분별지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트려야 하는 것입니다.

[477] 불교 철학의 관계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 이미지는 인드라의 그물입니다. 제석척의 그물망에 있는 구슬의 이야기입니다. 제석척의 궁전에 걸려 있는 그물에는 그물코 마다 한 개의 보석이 있습니다. 그 보석에는 다른 그물코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습니다.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는 이들 모든 영상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영상도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또다시 다른 보석에 비치고, 당연히 그 속에는 자신의 모습도 비치고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영상이 다중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478] (불교철학은) 모든 존재를 연기(緣起)로 파악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를 연기(煙氣)처럼 무상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88]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505] 창신이 어려운 까닭은 그 창신의 실천 현장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506]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가장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508]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의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場)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509]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509] 사상은 실천되는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510]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511] "서(書)는 여(如)"라고 합니다. .......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 나태해진 3기 연구원들에게 사부님께서는 몇일전 이 문구를 게시판에 남기셨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

[511] '그림'은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나아가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3. 내가 저자라면

1)
책에는 2가지의 열쇠가 있다. 하나는 저자가 동양의 정서라고 말하는 ‘관계’의 입장으로 풀어내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사상이 지금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 그 시대에서 짚어보자는 것이다. 이 둘은 때때로 비약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서론에서 자신의 의도를 밝히고, 3장 ‘주역의 관계론’, 4장 ‘논어의 인간관계론’ 5장 ‘맹자의 의’은 관계론과 잘 들어 맞는다. 나머지는 조금 억지스럽다. 몇 개의 장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대한 사상으로 풀어냈다.
두개의 열쇠의 꼬임은 교묘하지 않다. '관계론'는 길 찾는 도구이고, 고전 독법을 하는 것은 목표인가? 혹은 그 반대인가?

2)
저자는 고전의 일부를 가져다가 풀이하고 그 속에 담긴 뜻을 이야기할 때, 짧은 것은 그대로 다루었고, 너무 긴 것은 주요 부분은 다루고 나머지는 출전과 전체 부분에서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 지를 설명했다. 중학교 한문시간에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송인(권토중래)’의 고사를 배웠었다. 그 때는 전후가 없이 그 이야기만을 떼어서 보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정도로만 이해했었다. 행간까지 읽지 못한 것이다. 그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을 접하게 되니 이해가 더 된다. 과거의 사상으로는 현재의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비유로 나온 이야기임을 모르고 들었기 때문에 시대와 여러 사상들과의 관계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여러 사상들이 일관성이 없이 낱낱이 떨어져나갔던 것이다.

자신의 이론을 펴기 위해 일부만을 떼어낸 고전이 아닌, 고전을 통째로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물론 좋은 안내서의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

3) 내가 저자라면 쉬운 말로 풀어 쓸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대로 옮기면'고맙다. 단어 옆에 한자를 같이 써주어서.'이다.
실제로 책 읽는데, 어려웠다. 모르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국어사전, 옥편 필요했다. 저자의 말은 쉬운 단어를 골라쓴 것이 아니다. 두개이상의 한자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말이 많다. 이런 단어를 읽을 때는 잠깐씩 의미풀이 시간이 필요하다. 풀이해 주는 말이 어려워 다시 사전이 필요하다니. 요즘 학생들이 ‘합하다’라는 알아도 ‘결합(結合)’이라는 말을 못 알아 듣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결합이라는 말 정도는 알지만 내 경우도 그 학생들의 경우과 그리 차이나지 않은 것 같다. 50보 정도 떨어져서 100보를 비웃고 있는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옆에 한자를 써주어서 사전이나 옥편을 찾아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4)
노자와 장자를 설명하는 부분의 예시들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특히 책에서 뽑은 것이 아닌 저자가 직접 들어 준 맷돌의 예시는 언어와 화자와 청자의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예시로 적절하다.

5) 비약이 있다.
유는 무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그 쓰임이 있다는 대목에서 우리가 사회를 보는 눈이 숨겨진 억압구조 까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비약은 심하다.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까 궁금해하는 대목에서 멈춰있다. 현대사회에 대한 언급은 많이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나 상품사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여러차례 있다. 그렇지만, 저자 강의를 하는 동안에 사회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은 듯 하다. 그 사상이 나왔던 시대에서 그것을 짚어보고 현재에서 그것을 짚어서 보편적인 것을 찾자는 것으로 하자면 더 깊이 들어가거나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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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1.12 13:08:24 *.128.229.81
정화는 성실하다. 가을에 말털이 빡빡하여 추위를 이기듯 빡빡하게 잘 읽어 두었다. 앞으로 네글 네 그림의 좋은 바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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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11.12 13:49:44 *.114.56.245
사회를 낱낱이 짚어가기에는 버거웠거나 아직도 발이 공중에 약간은 떠 있음이 아닐까? 사색에는 풍부할지라도 어쩜 감옥이 현장성은 떨어지게 했을지 모를일이다. 참 잘 읽고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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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1.13 07:29:23 *.72.153.12
사부님, ^^*
우제님, ^^*

저자와 더불어 잘 놀고 싶은데....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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