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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2일 12시 34분 등록


대한민국에는, 아니 최소한 서울 하늘 아래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참이슬(眞露)'를 마시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하나는 '처음처럼'을 마시는 사람들이다.

난데없이 왜 소주 타령인고 하니,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신영복 교수를 잘 모르는 사람조차 이 분을 피해갈 수 없는 커다란 관문이 있으니 바로 소주, '처음처럼'이다. 얼마 전, 동명의 책을 출판하기도 했던 신영복 교수는 대한민국 양대 소주의 하나인 '처음처럼'의 로고를 쓴 주인공이다. 대학교수가 어쩌다가 소주 로고를 쓰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대가로 받은 1억 원을 몽땅 장학기금으로 기부한 것으로 봐선 돈이 목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처음 만나게 된 신영복 교수님의 책이 바로 '처음처럼'이었다. 2기 연구원, 도명수 선배님의 '금과옥조'라는 표현에 매료되어 별다른 망설임 없이 책을 구입했다. 책은 그다지 두껍지도 않았고 글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소주 넘어가듯 제법 잘 읽혔다. 글 한 자락, 한 자락이 가슴을 타고 넘을 때마다 쓴 맛과도 같은 생각들이 끊임없이 피어 올랐다. 삶의 진득함이 그득히 베어있었다. '처음처럼'은 그렇게 가벼우나, 가벼이 읽고 내려놓을 수는 없는 책이었다.

신영복 교수는 1989년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에서 강의를 해오고 있다.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1965년부터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했다. 그러다가 1968년 통일 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한 후 198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했다.

20년 20일 복역. 2년 2개월 2일의 군복무를 부분적으로는 악몽처럼 기억하고 있는 내게 20년 20일이라는 시간은 그 세월의 무게가 온전히 느껴지지 않을 만큼 긴 시간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대학교수의 삶을 살아가던 28살짜리 젊은이의 인생에 죽음과도 같은 무기징역을 선사한 통일혁명당사건은 어떤 것이었을까. 내 무지를 탓하기도 전에 호기심이 앞서 달려나갔다.

인터넷을 뒤적이고 보니 다음과 같은 통일혁명단사건의 내용이 백과사전에서 발견됐다.

통일혁명당(統一革命黨)사건이라고도 한다. 김종태(金鍾泰)는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許鳳學)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미화 7만 달러와 한화 2,250만 원)을 받고 남파된 거물간첩이었다. 그는 운수업으로 위장하여 통일혁명당(북한노동당의 在南地下黨)을 조직하고, 전(前)남로당원·혁신적 지식인·학생·청년 등을 대량 포섭하였다. 그리고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정부전복을 기도하려 하다가 일망타진되었다.

이 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된 자는 158명이었으며, 그 중에는 문화인·종교인·학생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73명이 송치(23명은 불구속)되었는데, 김종태는 1969년 7월 10일 사형이 집행되고, 이문규(李文奎) 등 4명은 9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들 일당을 검거하면서 무장공작선 1척, 고무보트 1척, 무전기 7대, 기관단총 12정, 수류탄 7개, 무반동총 1정과 권총 7정 및 실탄 140발, 12.7mm 고사총(高射銃) 1정, 중기관총 1정, 레이더 1대와 라디오 수신기 6대, 미화 3만여 달러와 한화 73만여 원 등을 압수하였다.


그렇다면 신영복 교수는 간첩이었다는 말인가.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이젠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는 이념은 아니라지만 엄연한 분단국가인 21세기의 대한민국에 간첩출신의 노교수가 버젓이 활동한다는 것이 가능이나 한 소리인가 말이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이 사건에 대해서 노교수는 그저 담담히 말한다.

통일혁명당사건을 나도 잘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감옥을 살았던 것은 내가 했던 일보다도
남북의 정치적 상황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나 합니다.

우리가 한 일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연구 모임을 하면서
학생서클들을 조직해 지도했고 나아가 일부 학생시위를 조직했는데,
요즘의 학생운동 수준이지요.


그는 그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조차 그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 원인인 통일혁명당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 저자 조사에서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었다는 정도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한다. 이것은 그 내용이 다소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신영복 교수의 인생과 작품을 이해하는데 그 사건에 얽힌 정치적 관계가 갖는 의미를 설명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특별 가석방으로 출옥한 후 신영복 교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 이 책을 연원으로 '더불어숲' 모임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현재 더불어숲 모임은 여러 소모임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자발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다음은 신영복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더불어숲에 대한 글이다. 현재 신영복 교수가 걸어가는 길의 방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여 그 내용을 옮긴다.

[더불어숲]의 시작은 1988년 8월 14일 출소한 신영복 선생님과 그 직후 출간된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그 연원을 두고 있습니다. 1989년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외부활동을 하시게 되고, 1990년부터는 선생님이 과거 옥중에서 만났던 지인들을 비롯한 주변분들과 함께 산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산행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은 몇몇 독자들도 참여하게 되는데 이 산행모임과 이를 바탕으로 1996년부터 시작된 '목동 파리공원 대화모임'이 오늘날 [더불어숲]의 모태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숲]의 지향은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이 발목 박고 서서 그곳의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해 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며,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이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전체와 튼튼히 연대되고 있어야 한다"는 점과 "나는 이것을 너는 저것을 갖추어 혼자로서는 비록 인격적으로 빈곳이 많을지라도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 연대성의 든든한 바탕에 인격의 뿌리를 내림으로써 사회적 미덕 속에서 개인적 덕성을 완성해 가는 쪽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말을 실천해 가는 데 있습니다.

[더불어숲]에서 만남은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현재 [더불어숲]은 매달 한 차례 '열린모임'(처음 오시는 분도 부담없이 오시는 자리입니다)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운동회', '소풍', '대풍', '모두모임', '번개모임' 등으로 숲을 풍성하게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숲 속의 또다른 작은 숲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소모임들에서의 만남도 있습니다. 이러한 만남은 "무슨 목적을 내걸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화가 가능하리라는 작은 기대로 만나는 일이며, 형식을 갖추려고 하기보다는 편안하게 서로 만날 수 있으면 되고, 그 자리에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되는" 그러한 만남입니다.

[더불어숲]은 해마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모두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동안 [더불어숲] 게시판에 실렸던 글들을 모아 <나무가 나무에게>를 출판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 동안의 만남들, 즉 인터넷 공간에서의 만남과 현실 공간에서의 만남을 모두 아우르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더불어숲]이 급변하는 환경과 구태의연한 사회구조가 이루는 불협화음 속에서 어떻게 인간적인 삶을 지켜갈 수 있는가를 함께 고민하고, 나아가 인간적 삶을 지키는 튼튼한 진지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자는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불어숲]은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특별히 회원의 자격이나 가입절차는 없습니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거나 일꾼들에게 전화를 주시는 바로 그 순간 [더불어숲] 가족이 됩니다.


신영복 교수의 삶을 살피다 보니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좌절과 고통의 시절을 넘어 이제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는 노학자의 인생은 그 자체로 교훈이며 강의이다.

이번 주의 책, '강의'에도 등장하는 글이지만 '처음처럼'의 마지막에 담긴 '석과불식(碩果不食)'이란 글을 더한다. 이 글을 통해 신영복 교수가 이야기하는 희망 속으로 들어가보자.

석과불식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씨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희망의 언어'입니다.
무성한 잎사귀 죄다 떨구고 겨울의 입구에서
앙상한 나목으로 서 있는 감나무는 비극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 가지 끝에서 빛나는 빨간 감 한 개는 '희망'입니다.
그 속의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기 때문입니다.
그 봄을 위하여 나무는 엽락분본葉落糞本
잎사귀를 떨구어 뿌리를 거름하고 있습니다.




고전 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 24)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비교하는 방식의 접근 방법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시각 즉 비교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러한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물론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한 경우보다는 그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 즉 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p. 28)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p. 37)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최고의 질서란 그것의 상위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힘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하여 지시적 기능을 하는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 (p. 38)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p. 47)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p. 56)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p. 64)

여러분도 아마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소설 읽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많은 글들을 읽고 나서 생각하면 핵심적인 요지는 시 한 편과 맞먹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시는 읽는 시간도 적게 들고 시집은 값도 비싸지 않습니다. 시를 많이 읽기 바랍니다. (p. 65)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稼穡)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小人之依)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聞知)이 없다고 한다. (p. 70)

여담이지만 나한테 건설 회사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는 후배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무일’이란 이름을 추천했지요. 건설 현장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싶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싫다고 하더군요. 건설 회사가 ‘일이 없으면’(무일)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무일無逸이 물론 그런 뜻은 아니지만 어감이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일이란 의미에 대하여 아무런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러분과 같은 신세대 정서로는 그러리라고 생각됩니다. 한마디로 무일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p. 71~72)

주공은 일반삼토一飯三吐, 일목삼착一沐三捉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것이지요. (p. 74)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p. 77)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신목자 필탄관新沐者必彈冠 신욕자 필진의新浴者必振衣’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오래된 과제를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p. 82)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 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 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도피 또는 복고적이라는 실천의 허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왔기 때문입니다. (p. 83)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87)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p. 92)

사회나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틀을 잘 관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우리의 인식 틀이 의외로 기계적이고 단선적인 논리 구조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 논리로 짜여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p. 95)

『주역』은 사회 경제적으로 농경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는 유한 공간有限空間 사상이며 사계四季가 분명한 곳에서 발전될 수 있는 사상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의 반복적 경험의 축적과 시간 관념의 발달 위에서 성립할 수 있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1년 내내 겨울이 지속되는 극지極地나 반대로 상하常夏의 열대 지역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역』은 변화에 관한 사상이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p. 107)

태괘는 주역 64괘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괘라고 합니다. 하늘의 마음과 땅의 마음이 화합하여 서로 교통하는 괘입니다.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양은 물론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자연의 형상과는 역전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태화泰和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위로 향하고 땅의 기운은 아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만난다는 이치입니다. 서로 다가가는 마음입니다. (p. 109)

九三 无平不陂 无往不復 艱貞无咎 勿恤其孚 于食有福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리라.

제3효는 하괘의 상효입니다. 한 단계가 끝나는 시점입니다. ‘무평불피无平不陂 무왕불복无往不復’은 어려움은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한 번 겪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한 단계를 마무리하는 시점에는 그에 따른 어려움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럴수록 마음을 곧게 가지고 최초의 뜻, 즉 믿음(孚)을 회의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113)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p. 127)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0)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p. 128~129)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p. 129)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관을 이유로 들어 그를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사상가로 매도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人에 대한 담론이든 민民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 141)

생각하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영원히 지나가고 다시 오지 않는 과거는 없습니다. 몇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고분古墳의 주인공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까맣게 잊었던 과거의 아픔 때문에 다시 고통받기도 하고, 반대로 작은 등불처럼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옛 친구를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나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허약하고 잘못된 것이지요. (p. 147)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의 나이를 200살, 300살이라고 대답한다. 나무가 변하지 않고 사막이 변하지 않고 하늘마저 변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대지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나이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마저도 변화가 아니라 반복이다. 아프리카의 오지에 1년을 365개의 숫자로 나눈 캘린더는 없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p. 147)

미래로부터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은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매우 비현실적이고도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미래에서 자란 나무를 현재의 땅에 이식移植하려는 생각만큼이나 도착된 것이다. 시간을 굳이 흘러가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물질적 실재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작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은 반대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p. 148)

옛것 속에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애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p. 150)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p. 150)

오늘날도 전문성을 강조하기는 막스 베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자본가는 어느 한 분야에 스스로 옥죄이기를 철저하게 거부해왔던 것이지요. 오늘날의 대자본이 벌이고 있는 사업 영역을 점검해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크게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으로 작게는 다각적 경영, 문어발 확장이 그런 것이지요.

전문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층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차를 전문적으로 모는 사람, 수레바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 배의 노를 전문적으로 젓는 사람 등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 신분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였습니다.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예六藝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모두 익혀야 했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도 읊고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창칼도 다루었습니다. 문사철文史哲 시서화詩書畵를 두루 익혀야 했습니다. 고전, 역사, 철학이라는 이성理性뿐만 아니라 시서화와 같은 감성感性에 이르기까지 두루 함양했던 것이지요.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p. 151~152)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강조되고 있는 전문성 담론이 바로 2천 년 전의 노예 계급의 그것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반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논어』의 이 구절을 신자유주의적 자본 논리의 비인간적 성격을 드러내는 구절로 읽는 것이 바로 오늘의 독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p. 152)

“어부가 바닷고기 다 잡을 수 있나요?” 처벌받는 사람은 법을 어긴 사람이 아니라 다만 운이 나쁜 사람인 것이지요. (p. 155)

자기 흉내를 내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요. (p. 166)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p. 169)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p. 172)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대상물과는 달리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 하물며 자기의 알몸을 보여줄 리가 없지요. 지知와 애愛는 함께 이야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p. 174~175)

세상에 영합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법이지요. 그나마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것은 세상을 우리에게 맞추려는 우직한 노력 때문입니다. (p. 187)

교도소는 거짓말이 많은 곳입니다만 동시에 거짓말이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곳입니다. 같은 감방에서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거짓말이 언젠가는 탄로가 나게 마련입니다. 일단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그 거짓말과 상충되는 말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거짓말을 했을 때 누구누구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를 기억해둬야 합니다.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기 위해서는 거짓말과 거짓말이 행해진 환경을 동시에 기억해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이 거짓말에 노출되는 사람의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납니다. 도대체 감당이 불감당이지요. 아무리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p. 189)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 君子 ―「雍也」
바탕이 문채文彩보다 승勝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p. 194)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雍也」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p. 199)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p. 202)

맹자가 말하였다. “화살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여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불인不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만 화살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화살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갑옷이 화살에 뚫려서) 사람이 상할까 봐 걱정한다. 무당巫堂과 장인匠人도 역시 그러하다(무당은 당시 의사였기 때문에 사람의 병이 낫지 않을까 걱정하고, 장인은 관棺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지 않아서 관이 팔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므로 기술(職業)의 선택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仁에 거居하는 것이 아름답다. 스스로 택해서 인에 거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을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p. 229~230)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으면 자기를 이긴 자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과녁에 맞지 않은 까닭을)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p. 231)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p. 242)

석봉의 어머님은 매우 훌륭한 교육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하지 않고 시키기만 하는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환경만을 만들어주는 맹모에 비해서도 훨씬 뛰어난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직접 자신의 일면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교육적 효과는 차치하고라도 참된 스승의 모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p. 248)

자본주의 역사는 자본 축적의 역사이고 자본 축적은 모순의 누적 과정입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 누적된 모순으로 말미암아 축적 과정 그 자체의 작동이 불가능하게 되는 전반적 위기의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과 위기는 패권 국가들의 집단적 담합과 폭력적 개입에 의하여 그것이 억제된 상태일 뿐입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물리적 억압과 간섭이 그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문화와 의식구조에 있어서 엄청난 허구와 비인간적 논리가 구축됩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은 물리적 강제를 은폐하고 유화宥和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현대 자본주의는 그 어떤 체제보다도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대중 조작(記號操作) 체계를 장악하고 이성의 포섭뿐만 아니라 감성의 포섭까지 완성해놓고 있습니다. 엄청난 건축을 완성해두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해체주의자로서의 노자가 생환生還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노자의 언어와 담론이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를 조명해내고 자본주의 문화의 허구와 총체적 낭비 체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노자가 생환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p. 257)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p. 270)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니.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p. 280)

나는 이 장이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숨겨진 구조를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읽히기를 바랍니다. 한 개의 상품의 있음(有)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노자』를 상품과 노동의 화두로 읽는 것이 『노자』를 매우 얕게 읽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학玄學을 경제학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본주의적 가치란 소유와 소비라는 유有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有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유지되는가, 이 유의 세계가 어떠한 것을 축적하고 어떠한 것을 파괴하고 있는가를 주목하는 실천적 관점이 바로 『노자』의 현대적 독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 293)

언젠가 라이브 콘서트에서 느낀 것입니다. 노래 중간 중간에 가수가 엮어 나가는 이야기가 청중을 사로잡고 있었어요. 가수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압권이었습니다. 배경음악을 깔고 낮은 조명 속에서 이따금씩 말을 더듬는 것이었어요.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것을 찾느라고 가끔씩 말이 끊기는 것이었어요. 말이 끊길 때마다, 나도 그랬지만, 청중들이 그 가수를 걱정해서 각자가 적당한 단어 한 개씩을 머릿속으로 찾아보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뜸을 들이던 가수가 찾아낸 단어가 우리가 생각해낸 것보다 한 수 위였어요. 그 순간 청중은 언어 감각에 있어서 가수보다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어요. 가수에게 패배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더듬는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더듬음은 청중을 지배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대변大辯이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눌변訥辯이 청자의 연상 세계를 확장해준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p. 302)

춘추전국시대는 거대한 사상적 혼란기였습니다. 사이비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횡행하는 이른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그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것이 못 되었음은 물론이고 겨우 패권 경쟁을 위한 정책 대안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우물을 벗어나지 못한 개구리에 지나지 않으며 여름을 넘기지 못하는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입니다. (p. 310)

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큰 공헌은 자본주의 체제를 과도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역사적 관점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란 이전의 다른 모든 체제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질 과도적인 체제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것이지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종말’이란 그 어감과는 반대로 최고 단계를 의미합니다. 궁극적 귀착점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가 최후의 체제라는 것이지요. 역사의 방황이 끝나는 지점이지요. 뿐만 아니라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여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입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높은 관점에서 그것을 조감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인식을 조감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과제이지요.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상 투쟁으로 끝나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p. 319)

그렇기 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 짧은 것은 늘여서도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환이 없어질 까닭이 없다. 생각건대 인의仁義가 사람의 본성일 리 있겠는가! 저 인仁을 갖춘 자들이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이것이 자연이며 도의 세계입니다. (p. 325~326)

노魯나라 교외에서 갈매기를 잡아 묘당廟堂에 모시고 구소九푑의 음악과 태뢰太牢의 요리로 대접했더니 3일 만에 죽었다. 백락伯樂이 말을 잘 다루고, 도공陶工이 점토를 잘 다루고, 목수가 나무를 잘 다룬다고 한다. 말을 불로 지지고, 말굽을 깎고, 낙인을 찍고, 고삐로 조이고, 나란히 세워 달리게 하고, 마구간에 묶어두니 열에 둘 셋이 죽었다. 점토와 나무의 본성이 어찌 원圓과 곱자와 먹줄에 맞고자 하겠는가. (p. 327)

생산성, 경쟁력, 효율성이라는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장자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양적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입니다.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가 아닙니다. 도의 깨달음과 도의 체득 그리고 합일입니다. (p. 330)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支出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지출보다는 실현이 더 적절한 어휘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p. 331)

厲之人 夜半生其子
遽取火而視之 汲汲然 唯恐其似己也 ―「天地」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p. 334)

오늘날의 도는 상품 생산에 유용한가 아닌가 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적 가치 나아가 근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문명론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어야 하고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능력과 경쟁력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조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각성이 도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 340)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步行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p. 343)

“지혜란 무엇인가?”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를 여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은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큰 도적은 궤를 훔칠 때 통째로 둘러메고 가거나 주머니째 들고 가면 서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것이다.” (p. 352)

사상은 개인에 앞서서 반드시 ‘사상적 과제’가 먼저 존재합니다. ‘누구의’ 사상이기에 앞서 반드시 ‘무엇’에 관한 사상이게 마련입니다. (p. 362~363)

天下之亂物 皆起不相愛 ―「兼愛」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p. 374)

반전 평화론이야말로 전국시대 최고의 사상이며 최상의 윤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통일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전쟁 방식에 의한 정의의 실현이 공공연히 선언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전쟁을 용인하는 한 그것이 어떠한 논리로 치장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기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쁜 평화가 없듯이 좋은 전쟁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p. 379)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p. 386)

“절용이 미덕이다” “아니다”, 오늘날도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과소비를 삼가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이다가 다시 경기 활성화를 위해 소비를 늘려야 한다는 반대의 목소리에 가려지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생산과 소비 수준은 한마디로 사람들의 삶을 기준으로 하여 그 규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 축적 논리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나는 사실 거리마다 즐비한 그 많은 음식점이 불황을 겪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식을 해야 할지 걱정됩니다. 마찬가지로 10개의 월드컵 경기장을 계속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경기를 벌여야 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장해야 할지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p. 390)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의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On Human Nature)에 의하면 본성은 선악 판단의 대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DNA의 운동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윌슨의 주장이 극단적 환원주의還元主義라고 비판되고 있지만, 나는 그의 이론이 본성 문제에 있어서 훨씬 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DNA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이 DNA는 40억 년 전으로부터 어느 시점, 또는 장구한 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물질이라는 것이지요. RNA와 단백질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반생명권半生命圈에서 성립된 것으로 기막히게 성공적(?)인 화학물질로 규정합니다. 수십억 년에 달하는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는 바로 이 DNA의 운동이며 그 일대기입니다. 윌슨에게 있어서 본성이란 이 화학물질의 운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DNA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생명이며 그런 점에서 곧 본성입니다.

이 DNA의 운동은 자기自己의 존속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개체의 존속과 개체를 넘어선 존속, 즉 생존과 유전과 번식이 유일한 운동 원리입니다. 윌슨은 아주 재미있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명쾌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윌슨의 체계에 있어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명백합니다. 단연 계란이 먼저라는 것이지요. 닭은 계란 속의 DNA가 자기의 존속을 위하여 만들어낸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일 뿐입니다. 이 경우의 존속이란 개체를 넘어선 존속입니다. 유전과 번식도 존속의 개념임은 물론입니다. 닭은 DNA의 존속, 즉 유전과 번식을 위하여 만들어진 중간 매개체일 뿐입니다. 계란 속의 DNA가 자신의 존속을 보다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계란을 만들어내야 하고, 많은 계란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 중간 매개체로서 닭을 만드는 것이지요. 닭은 계란의 생존 기계일 따름입니다. 이것이 윌슨 이론의 핵심입니다.

윌슨의 이론에 의하면 DNA는 비단 닭만 만들어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도 이 DNA의 존속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식욕과 성욕이 이 DNA의 활동인 것은 물론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정신 활동도 일정한 수의 화학적 및 전기적 반응의 총체적 활동을 일컫는 것에 다름 아니며, 이것은 DNA의 생존을 위한 장치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이성은 그러한 장치의 다양한 기능 중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성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 희생, 정직, 종교, 예술 등 일체의 정신적 영역도 이 DNA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결혼 제도는 물론이며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건설하는 모든 사회적 현상도 일단 DNA의 운동으로 환원됩니다.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사회과학을 통합하리라고 예상되기도 합니다. (p. 415)

맬서스의 『인구론』은 사회 개혁의 열망을 잠재우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과학이라는 옷을 입히는 것이었지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데올로기를 과학과 법칙으로 디자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자의 성악설도 그런 점에서 같은 구조입니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하는 논리의 일환입니다. (p. 417)

송나라 사람이 밭을 갈고 있었다. 밭 가운데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토끼가 달리다가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후로 그는 쟁기를 버리고 그루터기만 지키면서 다시 토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토끼는 다시 얻지 못하고 송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되었다. 지금 선왕先王의 정치로 오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그루터기를 지키고 있는 부류와 같다. (p. 432)

오늘날 역시 군주는 아니더라도 지배 계층이 법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해야 합니다. 입법과 사법을 동시에 장악하고, 금金과 권權을 동시에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대부는 예로 다스리고 서민은 형으로 다스린다는 과거의 관행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p. 442)

정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度)을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시장의 신발 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 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은 살 수 없었다. (그 사정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차치리의 답변은)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p. 451)

자어가 상商나라 재상에게 공자를 소개했다. 공자가 (재상을 만나고) 나오자 자어가 들어가서 (재상에게) 공자를 만나본 소감을 물었다. 재상이 말하기를 “내가 공자를 보고 나니 자네가 마치 벼룩이나 이처럼 하찮게 보이네 그려. 나는 공자를 임금께 소개해드리려고 하네.” 자어는 공자가 임금에게 귀하게 여겨질까 두려워서 재상에게 말했다. “임금께서 공자를 보시고 나면 장차 임금께서 재상님을 벼룩이나 이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러자 재상은 다시는 (공자를 임금께) 소개하지 않았다. (p. 455)

나는 그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 사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요. 사상과 시대, 사상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는 것도 같습니다. 그것의 분리가 바로 관념화의 과정이고 물신화의 과정입니다. (p. 456)

법가를 끝으로 고전 강독을 마칩니다. 강의 첫 부분에서 이야기했듯이 동양고전은 5천 년 동안 쌓여온 것으로 엄청나기가 태산준령입니다. 우리의 강좌는 호미 한 자루로 그 앞에 서 있는 격입니다. (p. 471)

테러란 기본적으로 거대 폭력에 대한 저항 폭력입니다. 거대 폭력이 먼저 거론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더구나 저항 폭력을 테러로 규정하고 테러를 빙자하여 폭압적인 개입과 일방주의적 지배를 관철하려는 패권 국가의 거대 폭력이 건재하는 한 세계 평화는 요원한 것이지요. (p. 492)

중국의 유학 사상은 이처럼 송대의 새로운 재편과 중흥을 거쳐 대단히 안정적인 체제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바로 그 견고하고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대응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지요. 견고한 구조는 변화에 대한 무지와 지체로 이어지고 당연히 19세기 말 근대 질서의 도전을 맞아 힘겨운 대응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 나라의 경우도 조선 후기 성리학의 완고한 구조로 말미암아 사회 역량의 내부 소모와 전체 과정의 지체를 겪지 않을 수 없었음은 물론입니다. (p. 500)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p. 505)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506)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따라서 창신의 장에서는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여러분에게 과제로 남기는 시와 산문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p. 508)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p. 511)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 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다른 식목자는 그렇지 않다. 뿌리는 접히게 하고 흙은 바꾼다. 흙 북돋우기도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한다. 비록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핀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 알아본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차츰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p. 515)




#1. 과거의 헤르메스, 자유의 몸이 되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1988년 9월, 한반도가 온통 올림픽의 열기로 들끓었다. 올림픽의 구호는 그저 스포츠에만 머물지 않았다. 생산성, 경쟁력 그리고 효율성을 부르짖는 자본주의의 모습과 올림픽은 어쩐지 교묘하게 닮아 있었다. 사람들은 속도에 중독되어 있었고, 소비와 쾌락에 물들어 있었다. 깨끗한 국제 도시, 서울의 위상을 위해 곳곳은 철거민의 피눈물로 얼룩이 졌다.

서울 올림픽이 그 성대한 개막을 알리기에 대략 한 달쯤 앞서 한 사내가 감옥에서 풀려났다. 20년하고도 20일의 죽음과도 같았을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뒤로 한 채 청년이었던 사내는 어느새 중년이 되어 다시 세상으로 토해졌다. 뜻을 추구한 대가로 청춘을 바친 그는 올림픽의 열기로 터질 듯 달아오른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조금 늦었지만 그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2 매트릭스의 존재를 의심하다.

자본주의가 온 세상을 집어 삼켰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정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성공의 논리는 거침없이 사람들을 집어 삼켜버렸다. 처음에는 한두 사람이 조금 빨리 걷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모든 사람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어디로 달리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모두들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가고 있는 방향에 몸을 실었다. 나는 그들 중에 한 명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어느 순간 숨이 턱까지 차 올랐다. 그래서 뛰던 걸음을 늦추고 얼마나 왔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달렸으면 꽤나 멀리 왔을 법도 한데, 나는 처음 뛰기 시작했던 자리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서있었다. 맥이 탁 풀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숨이 넘어가도록 달려왔다는 말인가. 더 가져야 한다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속삭이던 저주 같은 속삭임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속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결국 나도 매트릭스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오래된 미래로 눈을 돌리다.

사람들은 전보다 열심히,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했고, 덕분에 여가는 줄어들었다. 다행히도 보수는 늘었지만 사고 싶은 것들과 사야 할 것들은 끊임없이 생겨났다. 돈은 항상 부족했다. 이제 생존은 더 이상 목표가 될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디어는 쉴 새 없이 거짓말을 쏟아냈고, 사람들은 뻔히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속아넘어갔다. 똑똑한 사람들이 도대체 왜 매번 같은 방식으로 거꾸러지는 것일까?

세상은 온통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새로운 기술과 문명이 가져다 줄 새로운 세상을 말하는 장사꾼들로 넘쳐났다. 이들의 감언이설에 가슴이 부풀었다가 오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번을 속고 보니 나름대로 면역이 생겼다. 핑크빛 청사진에 돋보기를 들이대자 희미하게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보고 듣고 꿈꾸던 미래는 과거에서 온 미래가 아니었다.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흘러가는 물과 같은 미래가 아니었다. 토막토막 잘려서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밖에서 굴러들어온 미래였다. 내 것이 아닌 타인의 미래였다. 굽혔던 허리를 펴고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그 순간,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의식에 균열이 일어났다. 빛이 새나오는 그 갈라진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자 '오래된 미래'로 향하는 길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망이 끓기 시작했다. 갈라진 사이로 머리를 들이 밀었다. 그렇게 여행이 시작되었다.

#4 여행의 초입에서 '그'를 만나다.

온몸이 갈라진 틈을 통과하자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커다란 미로가 눈에 들어왔다. 엄청난 크기의 미로는 제대로 된 진입로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고, 공포가 느껴질 만큼 복잡했다. 시간과 언어의 벽으로 단단히 보호되어 있는 미로 앞에서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겨우 달랬다. 여기서 쓰러지면 떠나온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다시 정신 없이 달리고 조금씩 죽어가야 할 참이었다.

오천 년의 시간과 광대한 중국 대륙의 미로를 관통해서 오래된 미래의 성지로 가야 했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줄 그곳으로 가야 했다. 아니, 그보다는 허기와 갈증의 근원을 설명해줄 그곳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한글 세대 특유의 무지와 경쟁에 밀려 바닥까지 떨어져버린 지구력으로 미로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바로 그때 그가 내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20년의 세월을 뚫고 어둠에서 자유로 걸어 나온 그가 다시 20년의 시간을 넘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자네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 아니던가?"

#5 지도와 칼 그리고 용기를 얻다.

그의 왼손에는 '강의'라는 이름의 지도가 들려있었다. 또 그의 오른손에는 '관계'라고 새겨진 칼이 들려있었다. 그는 먼저 '강의'를 내밀었다.

"오래된 미래로 향하는 것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네. 오늘을 다시 밝히는 일이어야 하네. 조화와 가치를 생각하고 미래를 향해 길을 가는 것이지. 이 지도를 가지고 가게. 완전하진 않지만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이번엔 '관계'라는 이름의 칼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매듭이 너무 복잡하면 때론 잘라야 할 때도 있다네.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되면 이 칼을 휘두르게. 반드시 도움이 될 거야. 그러나 너무 자주 사용하지는 말게. 날카롭지만 그만큼 쉽게 무뎌지기도 한다네."

그는 말을 이었다.

"두려워하지는 말게. 자네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가는 거라네. 그리고 한 가지 알려줄 것이 있는데, 자네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다네. 조금 서둘러야 할거야."

#6 솔직한 시를 만나다.

미로에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글프게 노래하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子惠思我 褰裳涉洧 子不我思 豈無他士 狂童之狂也且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치마 걷고 유수라도 건너가리라.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내가 그대뿐이랴.
바보 같은 사나이 멍청이 같은 사나이.

그녀가 부르는 구슬픈 가락에 마음이 울컥했다.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세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멈추지 마세요. 고민하세요. 그들 사이에 조화를 찾게 될 거예요."

무엇을 더 물을 사이도 없이 그녀는 황급히 사라졌다. 다시 지도를 펼치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7 주역의 미로에 갇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헤매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효(爻)와 괘(卦), 위(位)와 응(應)이 만들어낸 주역의 미로 안에서 나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8개의 소성괘와 64개의 대성괘에 혼이 팔려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가운데 사방의 벽이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주춤거리면 완전히 갇혀버릴 것만 같았다.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고 사방에서 조여 들어오는 벽의 움직임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그만 규칙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변화'였다. 위와 아래로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그 다양하고 신묘한 '변화'가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초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벽은 없다. 후천세계도 없고, 선천세계도 없다. 현혹되지 말아라. 변화를 읽어라."

손에 들고 있던 '관계'의 칼이 떠올랐다. 마음을 한 곳에 모으고 힘껏 휘두르자 '절제'와 '겸손'이 번개처럼 쏟아져 나갔다. 그 기세에 코 앞까지 다가왔던 벽의 한 쪽 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그 무너져 내린 사이로 몸을 던졌다. 스치듯이 주역의 미로를 빠져 나온 그 틈새로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무슨 의미일까?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풀리지 않는 숙제를 품고,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8 다섯 명의 성인, 토론을 벌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제법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제각각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누구 하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중에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은 자신을 '공자'라고 했다. 그는 주로 '인(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쉴새 없이 풀어놓는 그의 이야기에 한참을 넋을 잃고 있던 중에 유난히 한 소절이 마음을 파고 들었다.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왼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리고 보니 '공자'보다 조금은 더 젊고 단단한 모습을 한 '맹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공자'와 비슷한 듯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주로 '의(義)'에 대해서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화살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여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불인不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만 화살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화살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갑옷이 화살에 뚫려서) 사람이 상할까 봐 걱정한다. 무당巫堂과 장인匠人도 역시 그러하다(무당은 당시 의사였기 때문에 사람의 병이 낫지 않을까 걱정하고, 장인은 관棺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지 않아서 관이 팔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므로 기술(職業)의 선택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한 손에 '도덕경'을 들고 '도(道)'와 '자연(自然)'을 말하는 소박한 '노자'와 바다를 이야기하는 우물 안 개구리를 꾸짖는 '장자'의 모습이 보였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때로는 마음이 편안해졌고 때로는 가슴이 뛰었다. 그들이 들려준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특히 장자의 '포정해우(庖丁解牛)'는 무릎을 치게 했다. '술(術)'을 넘어 '도(道)'에 이르는 길에 대한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때 묵직하게 이곳에 모인 이들을 꾸짖는 목소리가 들렸다. 검소하게 차려 입은 깡마른 체구의 '묵자'였다. 다른 성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 바빴던 것과는 달리 묵자는 이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묵자'는 다른 이들의 주장이 전쟁에 빌미를 제공하고 천하의 사람들을 불행에 몰아넣는다고 꾸짖었다. '묵자'의 말이 이어졌다.

"天下之亂物 皆起不相愛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들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슬슬 한 가지 의문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제각각 살았던 시대가 다른 이들이 어떻게 한 자리에 모인 것일까?"

그러나 그 의문은 곧이어 엉뚱한 답이 되어 돌아왔다.

'다른 시대와 다른 환경에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일어난 사상이라 이리도 다르구나. 그러나 다르면서도 어느 것 하나 틀리다 할 수 없는 것도 바로 그래서이구나. 결국 내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이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로구나.'

계속 머물며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작지만 소중한 가르침을 새기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9 미로의 끝으로 걸음을 재촉하다.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앞서 만났던 다섯 명의 성인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문제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길을 재촉하는 중에 만난 '순자'와 '한비자'는 그나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사이도 없이 헤어져야만 했다. 다행히 걸음을 재촉하는 내 뒤통수에 '한비자'가 던진 한마디가 고맙게도 가슴에 남았다.

"宋人有耕者 田中有株 兎走觸株 折頸而死 因釋其耒而守株 冀復得兎 兎不可復得 而身爲 宋國笑
송나라 사람이 밭을 갈고 있었다. 밭 가운데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토끼가 달리다가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후로 그는 쟁기를 버리고 그루터기만 지키면서 다시 토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토끼는 다시 얻지 못하고 송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되었다."

미로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려웠던 여행의 끝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정의 끝에 다가갈수록 한 가지 생각이 계속해서 커지고 있었다.

''오래된 미래'를 향해가는 여정을 떠났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목표를 향하는 여정이 즐겁지 않다면 목표에 도착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렇게 서둘러 가면 결국 나에겐 무엇이 남게 될 것인가?'

#10 미로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무거운 마음을 추스르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저만치 앞에 작은 표지판이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기쁜 마음에 뛸 듯이 다가서니 '종(終)'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종(終)'이라면 '끝'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길은 거기서 끝이었다. 걸음을 서둘러 결국 도착한 여행의 끝에는 그렇게 허무한 표지판이 하나 서있을 뿐이었다. 결국 내가 품었던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정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간에 쫓기며 급한 마음으로 달려오느라 세세히 살피지 못했던 그 길에 내가 찾던 답이 있었던 것이었다. 눈물이 날만큼 억울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 다시 돌아 온 길을 되짚어 갈 용기가 솟지 않았다.

표지판 너머를 바라보니 처음 여행을 떠났던 그 세계로 이어지는 공간의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머물 수는 없으니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에 쫓겨서 투덜대며 정신 없이 걸었던 여정에 대한 후회도 그저 마음에 새기고 묻어두는 것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느새 지도와 칼을 건넨 '그'가 곁에 서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인생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이라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 자신을 찾는 여행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어."

그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에게 주었던 지도는 조금 손때가 묻었군. 그런데 '관계'의 칼은 아직도 날이 서있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모양이야. 두 가지 모두 자네에게 주겠네. 이번 여행이 마지막 여행은 아닐 테니까 말이야. 이 두 가지를 들고 언제든 자네가 원할 때, 이곳으로 돌아오게. 다른 지도와 칼을 준비한다면 그땐 또 다른 여행이 펼쳐질 걸세. 잊지 말게. 좋은 여행을 하기 위해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네."

그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 내가 남았다. '오래된 미래'를 거쳐 내가 찾던 미래에 닿은 것은 아니었다. 매트릭스를 빠져 나와 온전히 나로 살아가게 된 것도 아직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균열을 넘어 이 세계로 들어오기 전의 내가 아니다. 나는 끊임없이 길을 나설 것이고 점점 더 내가 찾는 그 미래에 다가설 것이다.

여행은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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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11.12 10:28:27 *.232.147.17
왠지 '내가 저자라면'이 도윤형 컬럼 스타일인데요? 좋네요
시간이 뒤쫓아와서 주변 경치를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은 (연구원 누구나) 어쩔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그래도 이 책은 연구원 1년차가 끝나고 꼭 다시 뒤적거리고 싶은 책 중 하나일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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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1.12 13:17:32 *.128.229.81
좋다. 시작할 때의 그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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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2007.11.13 07:24:06 *.72.153.12
내가 저자라면 좋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나냐.
당신의 귀환을 축하합니다.

세상에는 두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종윤에 열광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종윤을 알지 못하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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