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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2일 10시 25분 등록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 신영복[돌베개]

1. 저자에 관하여

[15]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어려서 할아버님의 사랑방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님의 사랑방에 불려간 것이 초등학교 6학년까지였어요. 그러나 그때의 붓글씨나 한문 공부란 것은 할아버님의 소일거리였다고 합니다. 나로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지요. 너무 어렸습니다. 그러나 유년시절의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층의 정서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교수 글이 내 삶의 궤적 속으로 들어온다. 나와 나의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쓰신 수많은 서책 사이에 오롯이 앉는다.

나는 할아버지를 직접 뵈 온 적은 없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고 고매하셨던 할아버지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께서 간직하셨던 수십 권의 서책과 문방도구들, 그리고 나막신을 비롯한 온갖 고문서들이었다. 덧붙인다면 할머니께서 간간히 들려주시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서당 훈장님, 한 때 꺼리가 없어도 보리 한 톨 받지 않으셨던 할아버지의 꼿꼿하심이다. 그러나 내 유년 시절은 가난으로 굶기가 다반사였기에 할머님은 할아버지의 꼿꼿하심이 결코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수많은 책들은 자랑스러운 징표이기에 앞서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 저렇게 많은 책만 남겨두고 가면 뭐할끼고, 새끼들이 굶는데”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수많은 책이 정신적 지주였고 삶의 지표였다. 특히 어머님께서는 당신을 지극히 아껴주셨던 그 분이셨기에 책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셨다. 나아가서 현재 생활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할아버지처럼 우리들이 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으셨다. 그러나 가난은 주변을 맴돌면서 우리를 끝임 없이 시험했다. 배고픔으로 위협했고 박물장수로 변장하여 우리를 유혹했다. 결국 할아버지가 남기신 그 많은 책들은 박물장수의 손을 통해 어디론가 떠나고 우리는 할아버지가 남기신 나막신을 끌면서 책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야 했었다. 이상이 아무리 높을 지라도, 사상이 아무리 견고할 지라도 우리의 발은 땅을 떠날 수 없다.

현재의 신영복 교수를 있게 한 것은
1. 유년의 할아버지
2. 20년간의 감옥생활
3. 이구영 선생님
위의 3가지 중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은 어느 것일까? 나는 나의 삶을 중심으로 답을 찾기에 1번에 비중을 둔다. 그러나 객관적 시각으로는 1번이 아닐 확률이 높다.

신영복 교수는 낯설지가 않다. 물론 그에 대한 친근함이 소주에서 왔을 수도 있고 강의에서 왔을 수도 있다. 우리 시대의 ‘어른’으로 나의 할아버지 일수도 있고 역사속의 인물을 초대 손님으로 하는 대담자로서로 일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낯설지 않음’이 나의 일상으로 들어와 나의 생활 속에 자리자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그의 생각이 인문학적 사상에 머문다던지 현실에 대한 철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던지 하는 이견이 있을지라도 나는 그의 사상을, 사유를 철저히 즐기고 있다.

신영복 : 저는 글을 별로 많이 쓰지 않는 사람이에요. 쓰더라도 힘들게 쓰는 사람이죠.
현란한 언어보다는 절제된 언어가 훨씬 더 많은 소통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많은 소통 기제가 있음에도 대화와 소통의 부재를 우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도 절제하고 침묵하고 여백을 많이 남겨놓는 것이 독자와의 대화를 더 잘할 수 있도록 해주죠.
(탁현민 공연연출가와의 대담 중)

그의 절제된 언어가 좋고 따뜻하고 진정성이 담긴 대화가 좋다.
그리고 나의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하는 그의 서체가 좋다.

저자에 관하여.
신영복(1941년 - )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작가이자 대학 교수이다.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과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20년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8년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출소 후,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를 역임하였고 2006년말에 정년 퇴임하였다. 퇴임당시 소주 포장에 들어가는 붓글씨를 그려주고 받은 1억원을 모두 성공회대학교에 기부하였다.

「저서」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
- 엽서(1993년)
- 나무야 나무야 (1996년)
- 더불어 숲 1권 (1998년 6월)
- 더불어 숲 2권 (1998년 7월)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증보판 (1998년 8월)
- 더불어숲-개정판 합본 (2003년 4월)
- 신영복의 엽서 (2003년 12월)
-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년 12월)

「역서」
-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년)
- 사람아 아!사람아(1991년)
- 루쉰전(1992년)
- 중국역대시가선집(1994년)

신영복 교수를 있게 한 이구영 선생
역사의 소용돌이를 우직하게 견뎌낸 정직한 삶
그는 조선봉건사회부터, 일제하의 식민지 사회, 6.25 전쟁, 북한 사회주의 사회, 22년의 감옥생활을 거쳐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까지, 민족의 기구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오직 자신의 신념 하나로 헤쳐왔다. 그 신념은 ‘모든 사람이 다함께 잘 살 수 있어야 옳은 세상’이라는 믿음, ‘내가 알고 느끼는 만큼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자기와의 약속이었다.울긋불긋한 꽃향기에 취하기보다 찬 겨울 매화향기에 마음을 씻으며 올곧게 살아온 삶,바로 노촌 이구영의 삶이었다. 그의 일생은 시대의 아픔과 모순을 드러내주는 창이었다. 충청도에서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공부에 매진했다. 의병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아버지와 숙부의 영향으로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각국의 정세와 우리 민족의 처지를 깨달아 가면서 반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1943년 합천독서회 사건으로 구속돼 1년간 징역살이를 했던 이구영은 해방 후에도 새로운 조국건설을 위해 적극 활동에 나섰다. 미군정 치하와 이승만 정권아래 연행, 구속을 되풀이 하던 중
6.25전쟁이 터지면서 내려온 인민군이 그 해 9월 후퇴할 때 함께 북으로 갔다. 그리고 8년 뒤 다시 남으로 내려온 그는
일제 때 자신을 검거했던 형사가 검문 도중 자신을 알아보는 바람에 체포되어 무기수로 22년을 꼬박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1980년 출소 후 1984년 이문학회를 창설하고 한문과 역사강의를 통해 후학을 양성했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두루 섭렵하며 자신의 사상을 두루 섭렵한 그를 가르켜 감옥 제자인 신영복 교수는 “노촌 선생이야말로 전정한 선비”라고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가야 할 길이라면 사람들 다 잠든 밤중이라도 깨어 일어나 길을 가야 한다.”
[출처 :http://cafe.naver.com/snchildrenlib/446]- 이구영 선생
http://www.shinyoungbok.pe.kr/ - 신영복 교수

2. 내마음에 들어온 글귀

책을 내면서

[6]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도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 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회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서론

[21]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24]근대사회의 (社會論)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25] 고전으로부터 당대 사회의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과 모색이 담론의 중심이 됩니다. 물론 그러한 논의를 위해서는 고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고 또 관련된 문헌 연구도 필요하겠지만 이 부분은 최소한으로 한정할 작정입니다. 고전 원문은 그러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의 의미를 넘지 않을 것입니다.

[28]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29]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時空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關係網입니다. 우리가 고전 강독의 화두로 걸어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를 비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고전 강독의 화두인 관계론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내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0]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合)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善을 추구합니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합니다. 서양 문명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화된 구조이며 이처럼 조화된 구조가 바로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38]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40]동양학에서는 자연을 ‘생기의 장’이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존재하고 있는 것 중의 최고最高, 최량最良의 어떤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은 최고의 질서입니다.

[42]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예를 들면 나의 자식과 남의 자식, 나의 노인과 남의 노인을 함께 생각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것(成人之美)을 인仁이라 합니다.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동양 사상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거론되는 화해和諧의 사상 역시 그렇습니다. 화和는 쌀(禾)을 함께 먹는(口) 공동체의 의미이며, 해諧는 모든 사람(皆)들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言) 민주주의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성의 고양이 곧 사회성의 고양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44]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예를 들면 나의 자식과 남의 자식, 나의 노인과 남의 노인을 함께 생각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것(成人之美)을 인仁이라 합니다.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동양 사상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거론되는 화해和諧의 사상 역시 그렇습니다. 화和는 쌀(禾)을 함께 먹는(口) 공동체의 의미이며, 해諧는 모든 사람(皆)들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言) 민주주의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성의 고양이 곧 사회성의 고양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시(詩)와 언(言)

[52]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풍國風에 주목합니다

[53]『시경』 독법은 우리들의 문화적 감성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기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되기보다는 정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픔과 기쁨이 절절히 배어 있는 『시경』의 세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55]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비 개인 긴 강둑에 풀빛 더욱 새로운데
남포에는 이별의 슬픈 노래 그칠 날 없구나.
대동강물 언제나 마르랴
해마다 이별의 눈물 물결 위에 뿌리는데

정의情意가 언言이 되고 언言이 부족하여 가歌가 되고 가歌가 부족하여 무舞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도 부족하고 노래로도 부족해서 춤까지 더해 그 깊은 정한의 일단이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악곡樂曲은 없어지고 가사歌詞만 남은 것입니다.
- 이호우, 김영랑-의 시 참조

[56]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62]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4]『시경』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삶과 정서의 공감을 기초로 하는 진정성에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시와 『시경』에 대한 재조명은 당연히 이러한 사실성과 진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을 통하여 현대 사회의 분열된 정서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6]『시경』은 황하 유역의 북방 문학입니다. 북방 문학의 특징은 4언체四言體에 있고 4언체는 보행 리듬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노동이나 생활의 리듬으로서 춤의 리듬이 6언체인 것과 대조를 보입니다. 『시경』의 정신은 이처럼 땅을 밟고 걸어가듯 확실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삶의 진정성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발이 땅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지향해야 할 확실한 방향을 잃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에 담겨 있는 사무사思無邪의 정서가 절실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71]하방 운동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당 간부, 정부 관료들을 농촌이나 공장에 내려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군 간부들을 병사들과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게 함으로써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운동이었지요. 간부들의 주관주의主觀主義와 관료주의官僚主義를 배격하는 지식인 개조 운동으로, 문화혁명 기간 동안 1천만 명이 넘는 인원이 하방 운동에 동원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75]나는 이 「무일」편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78]『시경』이 사실적이고 노동과 삶과 보행의 정서로 이루어진 시詩 세계임에 비하여 『초사』의 세계는 자유분방, 정열, 상상력, 신비, 환상 등 낭만적이고 서정적입니다. 『초사』는 시는 물론 산문, 소설, 희곡에 이르기까지 중국 문학 전반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84]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넓고 긴 안목이 비록 『초사』의 세계나 남방적 낭만주의와 무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처하고 있는 공고한 체제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포섭 기제를 드러내야 하는 당면의 과제와 한번쯤 연결시켜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138]첫째, 춘추전국시대는 철기鐵器의 발명으로 특징지어지는 기원전 5세기 제2의 ‘농업혁명기’에 해당됩니다. 이 시기는 철기시대 특유의 광범하고도 혁명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39]둘째,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구舊사회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입니다. 천자天子를 정점으로 하는 제후諸侯(특정국 제후가 공公)―대부大夫(상위 대부가 경卿)―사士(가신家臣)―서인庶人이라고 하는 사회의 위계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입니다.

[139]셋째,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화제방의 시기입니다. 주 왕실이 무너지면서 왕실 관학을 담당하던 관료들이 민간으로 분산되어 지식인(士君子) 계층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계층은 민간인 신분으로 강학講學 활동을 하거나 학파의 출현을 주도하게 됩니다. 공자학파 역시 춘추 말엽에 활동하던 여러 민간 학파 중의 한 갈래로 분류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동기에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정책 목표 아래 군사력, 경제력, 사회 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경쟁적으로 경주되는 시기입니다.

[140]사회 경제적 배경은 사상사의 이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상도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자와 『논어』를 논하기 위해서는 비단 춘추전국시대의 사회 경제적 배경만으로 충분할 리가 없습니다.

[144]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 不忠乎
與朋友交而 不信乎 傳不習(실천적 의미의 함의)乎
여러분도 각자 사회에 대하여 다양한 개념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집합으로 사회를 이해하기도 하고, 하나의 유기체 또는 건축적 구조로 규정하기도 하고 생산관계, 정치 제도, 문화기제, 소통 구조 등 여러 가지 개념으로 사회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이 모든 개념은 제도와 인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제도와 인간이라는 두 개의 범주가 인간관계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지요.

[149]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된 형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사유思惟의 차원에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우리가 『논어』의 이 구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통일적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150]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는 “스승이라 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구나 과거지사過去之事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159]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熟知性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소위 상품미학의 특징입니다. 오로지 팔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상품이고 팔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상품입니다. 따라서 광고 카피가 약속하는 그 상품의 유용성이 소비 단계에서 허구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허구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고 디자인의 부단한 변화로서의 패션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상품미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지요

[160]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子路」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161]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체성(identity) 역시 결과적으로는 타자他者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데리다J. Derrida의 표현에 의하면 관계 맺기와 차이 짓기, 즉 디페랑스differance(差延)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62] 이에 비하여 대비의 방식은 분리된 대상을 다시 관계망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대상 그 자체의 관념화를 어느 정도 저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동양학에서 대체로 대비의 방식을 선호하는 까닭은 동양학 그 자체가 관계론적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65]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172]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顔淵」   번지가 인仁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愛人이다.” 이어서 지知에 대해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知란 지인知人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知라는 대단히 근본적인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p174[173] 안연顔淵에게는 인이란 자기(私心)를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이라고 답변하였고 중궁仲弓에게는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사마우司馬牛에게는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其言也訒)이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의 의미는 특정한 의미로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또 질문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에게 맞는 답변을 공자는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82]우리는 주관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이란 참으로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동大同은 멀고 소이小異는 가깝지요.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기 쉽지요. 따라서 사회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학學과 사思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합니다.

[184]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    (危邦不入 亂邦不居)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는다.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나라에 도가 있으면 빈천이 수치요, 나라에 도가 없으면 부귀가 수치이다.    (邦有道 貧且賤焉恥也 邦無道 富且貴焉恥也)        ―「태백」泰伯 p185

[187]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191]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마찬가지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려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實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193] 마찬가지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려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實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194] 광고의 카피 속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 君子        ―「雍也

[195]내용이 형식에 비하여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는 의미입니다. 행行과 언言, 사람과 의상衣裳 등 여러 가지 경우에 우리는 이러한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주장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말없이 어떤 일을 이루어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보다 못한 옷을 입고, 그 사람보다 작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198]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199]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雍也」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200]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 호, 낙의 차이를 규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각각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 속에서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圓融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 형식이라기보다는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서와 장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는 역지사지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호는 대상을 타자라는 비대칭적 구조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와 호를 지양한 곳에 낙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전 강독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한다면 “낙은 관계의 최고 형태”인 셈입니다. 그 낙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어떤 터득이 가능한 것이지요.

[201]산과 강은 오랜 친구입니다.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雍也」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지자의 모습과 함께 알튀세르Louis Althusser를 떠올리게 됩니다. 특히 그의 상호결정론(over-determi-nation)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 있어서 일방적이고 결정론적인 인과관계를 지양하고자 하는 그의 정치한 논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반면에 인자는 오히려 노장적老莊的이기까지 합니다. 개별적 관계나 수많은 그물코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세계를 망라하는 그물, 즉 천망天網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3]흔히 『논어』가 갖는 최대의 매력은 그 속에 공자의 인간적 풍모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子는 학자를 뜻하고 가家는 학파를 뜻합니다만, 그 수많은 제자諸子 중에서 공자만큼 인간적 이미지를 남기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논어』라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공자의 이미지가 미화되었다는 것이지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주장입니다. 곽말약郭沫若 같은 대학자도 동의하는 것이지요. 공자의 인간적 면모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의 묘비명이나 예찬문禮讚文을 읽을 것이 아니라 그의 반대자의 견해를 통하여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지요.

[206]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논어』는 인간관계론의 보고寶庫입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백가百家들이 벌였던 토론(爭鳴)은 고대국가 건설이라는 사회학 중심의 담론이었습니다. 굳이 『논어』의 독자적 영역이라면 숱한 사회학적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의 義

[212]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의해서 의義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예시 문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맹자』의 제1장에서 맹자가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이 바로 의義입니다.

[213]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의해서 의義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예시 문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맹자』의 제1장에서 맹자가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이 바로 의義입니다.

[215]사실 『맹자』는 그의 주장과 같이 “문구의 생략과 중복이 절묘하고, 흐름이 경쾌하고 민첩하며, 비유가 풍부하고, …… 어떠한 상대도 설복시킬 정도로 논리가 정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의문, 감탄, 부정구否定句 등 문장의 형식도 다양하고 자유자재하여 한문의 문법과 예문의 교범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맹자』입니다.
[217]여럿이 하는 즐거움
가장 귀한 것은 백성이다. 그 다음이 사직社稷이며 임금이 가장 가벼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에 들게 되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에 들게 되면 대부가 되는 것이다


[225]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仁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知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네 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    이 네 가지 싹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선善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임금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이 네 가지 싹을 가지고 있는 사람 누구나 그것을 키우고 확충시켜 나갈 줄 안다면 마치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이나 막 솟아나기 시작한 샘물처럼 될 것이다(크게 뻗어나갈 것이다). 그 싹을 확충시켜 나갈 수 있다면 그는 천하라도 능히 지킬 수 있고 그것을 확충시켜 나가지 않는다면 자기 부모조차도 제대로 모실 수 없게 될 것이다.

[233] 반구제기(反求諸己而已矣)는 우리를,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自己反省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自慰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242]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249]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太甲篇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노자의 도와 자연

[253] 도는 자연을 본받습니다.
유가 사상은 서구 사상과 마찬가지로 ‘진’進의 사상입니다. 인문 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進)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귀歸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255]『노자』의 체계에 있어서는 자연의 생성 변화가 곧 도道의 내용입니다. 인위적 규제는 이러한 질서를 거역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을 불로 지지고, 말굽을 깎고, 낙인을 찍고, 고삐로 조이고, 나란히 세워 달리게 하고, 마구간에 묶어두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도덕적 가치는 인위적 재앙으로 보는 것이지요.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는 근본적으로 반문화적反文化的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 의지建築意志에 대한 비판입니다. 계몽주의든 합리주의든, 기존의 인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건축적 의지를 해체해야 한다는 해체론이며 바로 이 점이 노자의 현대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6]유가 사상은 법가에 비하여 비폭력적 지배 방식을 취하고 피지배층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매우 유화적宥和的인 정치 과정을 정착시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권력은 본질에 있어서 폭력적 지배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진한 이후의 제도 폭력이 지배하는 역사적 조건에서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저항적 지반이 광범하게 형성된 것은 역사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재앙으로 규정하고, 자연이라는 근본적 질서를 회복할 것과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주창하는 노자의 반문화反文化 사상이 지배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비판 담론뿐만 아니라 나아가 저항 담론과 대안 담론으로서 그 지반을 넓혀가게 됩니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노자』를 읽는 독법讀法, 다시 말하자면 『노자』의 현대적 의미를 조명해야 합니다.

[258]논어』에서 공자孔子의 인간적 면모를 볼 수 있는 것과 달리, 『노자』에는 노자老子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노자를 생환한다는 의미가 그 인간의 생환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우리의 『노자』 독법이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261]노자』는 산문散文이라기보다는 운문韻文입니다. 5천여 자에 불과한 매우 함축적인 글이며 서술 내용 역시 담현談玄입니다. 더욱이 노자 사상은 상식과 기존의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고도의 철학적 주제입니다. 그 위에 간결한 수사법은 여타 철학적 논술에 비하여 월등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독법은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264]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無는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無名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有名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자유로운 식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무와 무명은 같은 범주에 속합니다. 유와 유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명을 붙여서 읽거나 무명을 이름 붙이기 전으로 해석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섣부른 절충도 피해야겠지만 지나치게 차이에 주목하는 것도 옳은 태도는 못 됩니다. 논의의 핵심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지요.


[267]전체의 의미 맥락에 영향을 줄 정도가 아니라면 자구 해석에 있어서의 차이는 서로 용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노자 사상은 그 함축적인 수사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다른 표현과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의 번역을 시비하지 않았나 마음에 걸립니다. 더구나 노자에 대한 관점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그렇다면 당연히 장절章節에 대한 해석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8]도道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는 윤리적인 강상綱常의 도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 법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의 도라는 것은 노자가 의미하는 참된 의미의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 됨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

[270]이처럼 노자의 도道와 명名은 서양의 사유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유는 개념적 사유라는 것이 서양의 논리지요. 개념이 없으면 사유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이것을 노자류老子類로 표현한다면 ‘도비도道非道 비상도非常道 명비명名非名 비상명非常名’이 되는 것이지요.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것이 서양의 사유입니다. 개념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선험적 인식 구조에 의하여 구성될 뿐이지요.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노자의 도와 명에 관한 제1장의 선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272]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제2장 이 장은 상대주의의 선언이며, 이 장의 핵심 개념은 무위無爲입니다. 상대주의를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무위가 핵심적인 주제가 됩니다. 굳이 하나를 고집할 근거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과 저것은 상대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미美와 오惡, 선善과 불선不善의 구별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선언합니다.   널리 알려진 미美를 미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혐오스러운 것이다.   널리 알려진 선善을 선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283]『노자』 독법의 기본은 무위입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무위는 무행無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無不治)입니다. 혼란(不治)이 없는(無)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은 은둔隱遁과 피세避世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적극인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84] 노자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도무수유道無水有라고 했지요.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물로써 도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장은 매우 유명한 장입니다. 특히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이 경우 최고의 선은 현덕玄德이며 도道입니다. 물은 물론 현덕이 아닐 뿐 아니라 도 그 자체도 아니지만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293]  나는 이 장이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숨겨진 구조를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읽히기를 바랍니다. 한 개의 상품의 있음(有)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297]다음으로는 자연自然에 관해서입니다. 노자의 자연은 ‘Nature’가 아닙니다. 서구적 개념의 자연은 문명 이전의 야만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광물이나 목재를 얻는 자원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나 자연은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노자의 자연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self-so’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외부를 가지지 않은 존재입니다. 독립적 존재입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상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항상적 존재입니다. 최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개념이며 가장 안정적인 질서가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
[305]노자의 철학은 귀본歸本의 철학입니다. 본本은 도道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제25장)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소요

[309]우물안의 개구리는 바다를 이야기 할 수 없다.
우물 안 개구리(井底쿳)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 외편外篇 「추수」秋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의 출전입니다. 이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는 장자 사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장자가 당시의 제자백가들을 일컫는 비유입니다. 교조敎條에 묶인(束於敎) 굽은 선비(曲士)들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도道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일갈一喝합니다

[311]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사회적 규범 밖에서 자유를 추구하던 일민逸民들의 경물중생輕物重生, 즉 개인주의적인 생명 존중론이 양주학파楊朱學派에서 크게 고조되었는데 이 양주학파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장자』라고 합니다. 철학적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은 생명의 물리적 보존이나 생물학적 보존뿐만이 아니라, ‘정신의 자유’라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뜻입니다. 무한한 소요유의 추구를 표방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라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장자의 철학과 사회학의 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17] 그러나 『장자』는 그 전편에 흐르는 유유자적하고 광활한 관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이론과 사상뿐만 아니라 모든 현실적 존재도 그것은 드높은 차원에서 조감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조감자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물 속의 개구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장자』에 대한 올바른 독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27]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자연을 피하려는 둔천遁天의 형벌이다. 천인합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천제天帝의 속박(縣解)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 못하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술독을 안고 노래했다는 일화가 수긍이 갑니다.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339]쓸모없는 나무와 울지 못하는 거위
“어제 산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할 수 있었는데, 오늘 이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이란 도道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356]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天網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묵자의 겸애와 반전평화
[356]묵墨은 목수의 연장 가운데 하나인 먹줄(繩)의 의미로 읽기도 합니다. 먹줄은 목수들이 직선을 긋기 위해 쓰는 연장입니다. 그래서 법도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엄격한 규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 『묵자』에는 묵자가 방성 기구防城機具(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방어하는 기구)를 만들고 수레의 빗장을 제작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묵자를 공인이나 하층 계급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묵자 자신은 그러한 계층 출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묵자의 사상이 하층의 노동 계급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검은색은 이처럼 묵자의 면모를 구체화해줍니다

[369] 공자와 묵자는 다 같이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사회적 위기’로 파악했습니다. 무도無道하고, 불인不仁하고, 불의不義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공자와 묵자는 현실 인식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묵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세 가지의 고통을 받고 있는 바, 주린 자는 먹을 것이 없고, 추운 자는 입을 것이 없고, 일하는 자는 쉴 틈이 없다(有三患 飢者不食 寒者不衣 勞者不息)고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보더라도 묵자가 기층 민중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91]묵가를 설명하면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묵자 사상의 철학적 방법론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묵가의 조직과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묵자 사상의 철학적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삼표’三表의 원문을 읽어보지요. 삼표란 세 가지 표준이란 의미입니다. 판단에는 표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준이 없는 것은 마치 녹로쾖콼 위에서 동서東西를 헤아리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지요. 어떤 것이 이로운 것인지 어떤 것이 해로운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표론三表論은 이를테면 인식과 판단의 준거에 관한 논의입니다

[392]묵자의 삼표는 첫째는 역사적 경험이며, 둘째는 현실성이며, 셋째는 민주성입니다

순자, 유가와 법가사이

[405]하늘은 하늘일 뿐
순자가 유가학파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의 천론天論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천天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입니다. 인간 세상은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정통적 천인 도덕천道德天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는 종교적인 천, 인격적인 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순자의 탁론卓論입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유가의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정통 유가와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바로 순자의 천론이고, 순자가 이단인 이유가 바로 천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天과 인人은 서로 감응하지 않는 별개의 존재입니다(天人二分). 천은 자연이며 음양일 뿐입니다. 천은 천명天命, 천성天性, 천리天理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순자의 주장입니다

[408]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천적 노력이라는 것이지요. 순자의 ‘능참’은 ‘실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제어하여 활용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연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인본주의적 관점입니다.

[428]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養生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 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강의를 마치며

[477]불교 철학의 관계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 이미지는 인드라의 그물입니다. 제석천帝釋天의 그물망(Indra’s Net)에 있는 구슬의 이야기입니다. 제석천의 궁전에 걸려 있는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한 개의 보석이 있습니다. 그 보석에는 다른 그물코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습니다.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는 이들 모든 영상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영상도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또다시 다른 보석에 비치고, 당연히 그 속에는 자신의 모습도 비치고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영상이 다중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478]그런 점에서 불교 사상은 해체 철학의 진보성과 무책임성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책임성이란 모든 존재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존재의 의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언어가 어떤 지시적 개념이듯이 삼라만상이 어떤 지시적 표지標識로 공동화空洞化됨으로써 가장 철저한 관념론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의미 부여가 거꾸로 모든 것을 해체해버리는 거대한 역설입니다

[487]『대학』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첫째 명덕을 밝히는 것(明明德), 둘째 백성을 친애하는 것(親民 혹은 新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 셋째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止於至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를 3강령三綱領이라 합니다. 그리고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가 8조목입니다.

[505] 우리의 고전 독법은 관계론의 관점에서 고전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담론이었습니다. 이러한 담론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人은 인仁으로 나아가고 인仁은 덕德으로 나아가고 덕은 치국治國으로 나아가고 치국은 평천하平天下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천하는 도道와 합일되어 소요하는 체계입니다.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508]고전 강독을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과제로 남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참신과 관련된 것입니다. 참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창신은 재조명과는 다른 창의적 사고가 요구됩니다.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따라서 창신의 장에서는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여러분에게 과제로 남기는 시와 산문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509]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새삼스럽게도 다시 가슴의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앞으로 시와 산문을 더 많이 읽으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사철文史哲과 나란히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교육을 병행해왔다는 이야기를 강의 초반에 나누었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병행했던 것이지요. 물론 오늘날의 시서화가 그러한 정신을 옳게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그 정서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510]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人性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최후의 방법입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내가 저자라면

가끔은 현학적 허세 놀음도 즐거운 유희다.

본 강의가 성공회대 교육대학원에서 ‘고전 강독’이라는 강좌 명의로 개설되었던 것을 정리한 책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철저하게 그의 수강생이 되어 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강의 개설 목적에는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 좀 더 노골적인 표현을 쓴다면 교수의 평가에 우린 응할 필요가 없다. 다만 내가 좀 더 깊숙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면 본 강좌에 응하는 역사속의 인물들의 삶을 내 삶의 궤적 속으로 마음 놓고 끌어들여도 좋다는 것이다.
또한 신영복 교수의 강의에 대한 평가도 은근슬쩍 해 볼 수 있다. 나의 평가 에 따라 그의 강좌가 폐쇄되거나 특별히 수정을 가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음이 또한 매력이다. 이런 연유에서 나는 그의 강의를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었다. 황폐화된 인간관계를 재조명하고 타인을 아름답게 세우는 일에 눈 돌리는 일은 나의 ‘내면의 충만감’ 다음에 생각해도 하등의 불편함이나 도덕적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기에 자유롭고 즐거웠다.
저자는 서론에서 본 강의의 초점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p 25고전 강독에서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고전으로부터 당대 사회의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과 모색이 담론의 중심이 됩니다. 물론 그러한 논의를 위해서는 고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고 또 관련된 문헌 연구도 필요하겠지만 이 부분은 최소한으로 한정할 작정입니다. 고전 원문은 그러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의 의미를 넘지 않을 것입니다.
p29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時空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關係網입니다. 우리가 고전 강독의 화두로 걸어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를 비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고전 강독의 화두인 관계론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내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이 유의해주기 바랍니다.

저자도 위에서 언급했듯이 강의의 전반적인 흐름은 ‘관계중심론’에 두고 있다. 글을 쓰거나 읽음에 있어서 나름의 관점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기에 강의의 초점을 탓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그가 가끔 외눈박이가 되지 않나 감사만 하면 된다. ‘지나친 관계주심주의로 흐르지 않나 하는 우려의 눈이다. 혹자는 본 강의가 ’자본주의의 체제의 물질적 낭비와 인간관계 소외, 황폐화된 인간관계를 근본적인 시각으로 재조명 하는 것이라는 것에 2-3개의 눈을 가져다 대지만 우리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숨은 의도다 우리는 알고도 모르는척하고 따라가면 된다.

그의 강의는 즐거웠고 내면의 기쁨이었다. 현학적 허세도 좋았고 선인들과의 격 없는 놀음도 행복한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긴 사설로 그의 강의에 대한 평가도 좋지만 한주간의 즐거운 그의 강의에 나의 기쁨이 채 사라기전 강의 평가지에 평가지만 체크를 해보고자 한다.
첫 째 : 오랜만에 맛보는 고전 강독이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 속 인물을 타인의 눈, 그것도 사유가 농익은 교수의 직함을 가진 사람의 눈으로 들여다봄은 즐거움을 넘어선 유쾌한 사유다.

둘 째 : 내가 다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인물들과의 만남이다. 너무 많은 인물들의 초대는 자칫 초대된 이들을 소홀히 하기 쉽다. 그러므로 나는 내 한계를 넘어서는 ‘주역의 관계론과 법가의 천하통일은 결강했다.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독강 해 볼 참이다.

셋째는 그의 강의가 혹시나 일방적인 강의 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顔淵」
번지가 인仁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愛人이다.” 이어서 지知에 대해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知란 지인知人이다.”

스승이 계심에 여쭙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매 기쁘지 아니한가.
수강에 참여한 학생들이 스승에게 여쭈올 시간은 있었는가. 청강생인 나도 여쭐 말이 이렇게 있을 진대 그들도 분명 있었으리라. 있음이 당연한 일이다. 각 강의의 말미에 공자와 제자가 문답형식으로 풀어나갔듯이 강의에 대한 질문과 답의 형식이 있었기를 바란다. 이 책이 강의내용을 정리한 것이기에 지면상의 이유든 아니면 구성상의 이유로든 생략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의 철학 강의 수강경험을 잠시 언급하자면 질문은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그렇다 봉쇄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하다. 그 분은 앞에서 질문은 그에 대한 모독이다. 유럽의 모 대학에서 수학할 때도 그랬단다. 꼭 질문하고 싶으면 남아서 개별적으로 하란다. 생각으로는 강의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단순하고 관련된 질문은 그때 마다 풀어나감이 좋은 듯싶으나 그 해악이 있음인지는 나는 가늠하기 어렵다.

마지막은 나의 여물지 않은 본 강의에 대한 편협적 평가를 우려함이다.
고전에 대한 나의 ‘앎’은 미흡하기 그지없다. 다만 맛봄에 그 즐거움을 더할 뿐이다. 희망하건대 본 강의를 통하여 ‘동양의 고전 사상에서 인문학적 사유의 발견과 이를 바탕으로 한 나의 자연관을 나름대로 정립할지다. 나아가서 삶의 현장에서 자유롭고 편협되지 않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자연과 우리들의 어우러짐의 실천적 행동 모델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교육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환경교재’다.

저자가 마지막 부분에 언급한 구절이 나를 붙잡는다.

509]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새삼스럽게도 다시 가슴의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앞으로 시와 산문을 더 많이 읽으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사철文史哲과 나란히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교육을 병행해왔다는 이야기를 강의 초반에 나누었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병행했던 것이지요. 물론 오늘날의 시서화가 그러한 정신을 옳게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그 정서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강의 도중 나를 끌어 들였던, 그리고 연결고리에 매달려 있던 시 3편을 소개하면서 본 강의 평가를 마치고자 한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비 개인 긴 강둑에 풀빛 더욱 새로운데
남포에는 이별의 슬픈 노래 그칠 날 없구나.
대동강물 언제나 마르랴
해마다 이별의 눈물 물결 위에 뿌리는데 정지상의 [送人]


봄비

-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내 마음에 끝없는 강물 흐르네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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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1.12 10:56:45 *.128.229.81
우제는 이 책을 즐겼구나. 좋은가 보다.

정지상의 시가 정겹구나. 어려서 내가 기억하는 번역은 이러했는데


비개인 강둑에 풀빛 더욱 푸른데
남포로 님 보내는 슬픈 이 마음.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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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11.12 13:54:39 *.114.56.245
네. 힘에는 부쳤지만 즐거웠습니다. 숨겨두고 한 번씩 열어볼 꿀단지를 찾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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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1.13 07:06:12 *.72.153.12
책을 즐겁게 읽으시네요.
편안하고 부드럽고.... 그리고 그리움도 있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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