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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3일 22시 15분 등록
(326)
何謂天 何謂人 北海若曰 牛馬四足 是謂天 落馬首 穿牛鼻 是謂人  ―「秋水」
소와 말의 발이 네 개 있는 것 이것이 천天이요, 말머리에 고삐를 씌우고 소의 코를 뚫는 것
이것이 인人이다.

… “그러므로 인위人爲로써 자연自然을 멸하지 말며, 고의故意로써 천성天性을 멸하지 말며, 명리名利로써 천성의 덕德을 잃지 말라. 이를 삼가 지켜 잃지 않는 것을 일러 천진天眞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327)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道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合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교실과 책과 시험으로 채워진 학교 시절을 끝내고, 싱싱한 삶의 실체들과 부딪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으리라고 생각합니다.
 
(332) 도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그 편리성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순백한 생명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용두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지요. 순백한 생명이 안정되려면 자연과의 조화가 필요한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의 삶은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하지요.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삶이며,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고,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334)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고생만 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길을 모르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달성할 수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三人行而一人惑 所適者猶可致也 惑者少也 二人惑則勞而不至 惑者勝也 而今也以天下惑 予雖有祈嚮 不可得也 不亦悲乎: 「天地」)
 
(338) 세상에서 도道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形과 색色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名과 성聲일 뿐이다.

(343)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步行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344)
昔者 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齊物論」
어느 날 장주莊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物化라 한다.

(346) 꽃과 나비가 비록 제물齊物의 관계에 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꽃은 꽃이고 나비는 나비입니다. 장주는 장주이고 나비는 나비입니다. 이 사실을 장자는 물화, 즉 변화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순과 통일을 운동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태적靜態的 제물론이 아니라 동태적動態的 제물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물物, 즉 사물은 운동합니다. 정지도 운동의 한 형태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요. 직접적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간접적 원인을 연緣이라 한다면, 즉 친인소연親因疎緣이라 한다면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이 모든 존재의 정체성整體性을 부정하는 해체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존재를 꽃으로 보는 화엄華嚴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347) 여러분은 배우는 제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또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 서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은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즉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interpenetrate)하는 것이지요.

(347) 나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우주의 모든 물物은 별의 부스러기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349) 여기서 구멍을 뚫는 행위가 바로 통체적인 전체를 분分하고 별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누고 가르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전체적 연관이 소멸되고 남는 것은 분별지分別智와 분별상分別相이며, 개아個我로서의 존재들입니다. 혼돈은 이러한 분석과 분별 이전의 통체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혼돈이 죽어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진정한 세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352)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를 여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은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큰 도적은 궤를 훔칠 때 통째로 둘러메고 가거나 주머니째 들고 가면서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것이다.”
 
(353) 감추어진 것을 알아내는 것이 성聖입니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勇입니다.
늦게 나오는 것이 의義이며,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지知입니다.
도둑질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인仁입니다.

(355)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吾安得夫忘言之人 而與之言哉
전筌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게 마련이고,
제蹄는 토끼를 잡는 올무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이렇듯 그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싶구나!

(356-357)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天網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374) 天下之亂物 皆起不相愛 ―「兼愛」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382) 그래서 묵자께서 말씀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전쟁이야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是故 子墨子曰 古者有語曰 君子不鏡於水 而鏡於人 鏡於水 見面之容 鏡於人 則知吉與凶 今以攻戰爲利 則蓋嘗鑒之於智伯之事乎 此其爲不吉而凶 旣可得而之矣: 「非攻」)
 
(385) 止楚攻宋 止楚攻鄭 阻齊罰魯
墨子過宋天雨 庇其閭中 守閭者不內也
故曰 治於神者 衆人不知其功 爭於明者 衆人知之  ―「公輸」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고,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으며,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막았다. 묵자가 송나라를 지날 때 비가 내려서 마을 여각에서 비를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지기가 그를 들이지 않았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고 싸우는 사람은 알아준다.

(387)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돌아오는 아들을 맞으러 언덕에 서 있는 어머니의 상像이야말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전승의 의미를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어요.

(387-388)
子墨子見染絲者 而歎曰 染於蒼則蒼 染於黃則黃
所入者變 其色亦變
五入必而已則 爲五色矣 故染不可不愼也
非獨染絲然也 國亦有染        ―「所染」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는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 실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392) 何謂三表 …… 有本之者 有原之者 有用之者
於何本之 上本於古者聖王之事
於何原之 下原察百姓耳目之實
於何用之 發以爲刑政 觀其中國家百姓人民之利
此所謂言有三表也   ―「非命 上」
무엇을 삼표라고 하는가. …… 본本, 원原, 용用이 그것이다. 어디에다 본本할 것인가? 위로 옛 성왕聖王의 일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어디에다 원原할 것인가? 아래로 백성들의 이목(현실)을 살펴야 한다. 어디에다 용用할 것인가? 나라의 법과 행정이 시행(發)되어 그것이 국가, 백성, 인민의 이익에 합치하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소위 판단(言)의 세 가지 표준이라고 한다.
 
(399) 실천 행위는 과도하였으며 절제는 지나치게 엄정하였다. 「비악」非樂과 「절용」을 저술하였다. 사람이 태어나도 찬가를 부르지 않으며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않았다. 묵자는 만인의 사랑과 만인들 간의 이익을 말하고 서로의 투쟁을 반대했으니 그는 실로 분노하지 말 것을 설파한 것이다.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지 말고, 울고 싶을 때 울지 말고, 즐거울 때 즐거워하지 말아야 한다면 이런 묵가의 절제는 과연 인간의 본성과 맞는 것인가? 묵가의 원칙은 너무나 각박하다. 세상을 다스리는 왕도王道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묵자와 금활리禽滑釐의 뜻은 좋지만 실천은 잘못된 것이다. 스스로 고행을 자초하여 종아리에 살이 없고 정강이에 터럭이 없는 것으로 서로 경쟁을 벌이게 할 뿐이다. 사회를 어지럽히기에는 최상이요 다스리기에는 최하이다. 묵자는 천하에 참으로 좋은 인물이다. 이런 사람을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다. 자기의 생활이 아무리 마른 나무처럼 되어도 자기의 주장을 버리지 않으니 이는 정말 구세救世의 재사才士라 하겠다.

(400) 묵가는 좌파 사상과 좌파 운동이 그 이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겪어 나갈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역사의 초기에 미리 보여준 역설적인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405-406) 천天과 인人은 서로 감응하지 않는 별개의 존재입니다(天人二分). 천은 자연이며 음양일 뿐입니다. 천은 천명天命, 천성天性, 천리天理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순자의 주장입니다.
 
(407) 군자에게는 변함없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408-409)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聽天由命)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人定勝天)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능참, 즉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14) 윌슨에게 있어서 본성이란 이 화학물질의 운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DNA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생명이며 그런 점에서 곧 본성입니다.

(422)
君子曰 學不可以已 靑取之於藍 而靑於藍 氷水爲之 而寒於水
木直中繩 輮以爲輪 其曲中規 雖有槁暴 不復挺者 輮使之然也 故木受繩
則直 金就礪則利 君子 博學而日參省乎己 則知明而行無過矣 故不登高山 不知天之高也 不臨深谿 不知地之厚也 不聞先王之遺言 不知學問之大也  ―「勸學」

나는 말한다. 학문이란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먹줄 받아 곧은 나무도 그것을 구부려서 둥근 바퀴로 만들면 컴퍼스로 그린 듯 둥글다. 비록 땡볕에 말리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까닭은 단단히 구부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면 슬기는 밝아지고 행실은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 알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에 가보지 않으면 땅이 두꺼운 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선비는 선왕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으면 학문의 위대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423) 곧은 나무를 휘어서 바퀴가 되게 하는 것을 유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그리고 바퀴가 예전처럼 다시 펴지지 않는 것도 이 유의 효과입니다. 나무를 곧게 만드는 것도 교육이며 쇠를 날카롭게 벼리는 것도 교육의 역할입니다.
 
(423) 순자가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욕구 충족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성악적 측면이 순자의 교육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으며, 성인이나 폭군이나 군자나 소인이나 그 본성은 같은 것이며,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인간관이 되고 있습니다(凡人之性 堯舜之與桀跖 其性一也 君子之與小人 其性一也 塗之人可以爲禹: 「性惡」).
 
(428) 예로써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함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하며 이것이 예의 기원이라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428)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養生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 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10. 법가와 천하 통일
 
(442) 그러나 오늘날 역시 군주는 아니더라도 지배 계층이 법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해야 합니다. 입법과 사법을 동시에 장악하고, 금金과 권權을 동시에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대부는 예로 다스리고 서민은 형으로 다스린다는 과거의 관행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443)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생스럽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로우며, 인仁의 도리는 처음에는 잠깐 동안 즐겁지만 뒤에 가서는 곤궁해진다”(法之爲道前苦而長利 仁之爲道偸樂而後窮)는 주장이 그렇습니다.
 
(449) 凡人主之國小而家大 權輕而臣重者 可亡也 簡法禁而務謀慮 荒封內而恃交援者 可亡也 群臣爲學 門子好辯 商賈外積 小民右仗者 可亡也 好宮室臺榭陂池 事車服器玩好 罷露百姓 煎靡貨財者 可亡也 用時日 事鬼神 信卜筮而好祭祀者 可亡也 聽以爵不待參驗 用一人爲門戶者 可亡也  ―「亡徵」
나라는 작은데 대부의 영지는 크고, 임금의 권세는 가벼운데 신하의 세도가 심하면 나라는 망한다. 법령을 완비하지 않고 지모와 꾀로써 일을 처리하거나, 나라를 황폐한 채로 버려두고 동맹국의 도움만 믿고 있으면 망한다. 신하들이 공리공담을 좇고, 대부의 자제들이 변론을 일삼으며, 상인들이 그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아놓고, 백성들이 곤궁하면 나라는 망한다. 궁전과 누각과 정원을 꾸미고, 수레·의복·가구 들을 호사스럽게하며,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고 재화를 낭비하면 나라는 망한다. 날짜를 받아 귀신을 섬기고, 점괘를 믿으며 제사를 좋아하면 나라는 망한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만 따르고 많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한 사람만을 요직에 앉히면 나라는 망한다.
 
(452)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456) 나는 그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 사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요. 사상과 시대, 사상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는 것도 같습니다. 그것의 분리가 바로 관념화의 과정이고 물신화의 과정입니다.
 
(457) 악양은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고, 진서파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신임을 받았다. 교묘한 속임수는 졸렬한 진실만 못한 법이다. (巧詐不如拙誠)

교사巧詐가 졸성拙誠보다 못하다는 이 말의 뜻을 나는 세상 사람들 중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로 읽고 있습니다. 아무리 교묘하게 꾸미더라도 결국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거짓으로 꾸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458) 그림이든 노래든 글이든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59) 어떠한 사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전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구성하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460) 모든 사상은 다른 모든 사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파란만장한 역사적 전개 과정의 일환으로 출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떠한 철학 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제약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466-467) 그 결정적 과오는 역시 윗사람의 의중을 당자보다 먼저 헤아려 영합하기에 급급했고 스스로 공명정대한 원칙을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11. 강의를 마치며
 
(471) 동양고전은 5천 년 동안 쌓여온 것으로 엄청나기가 태산준령입니다. 우리의 강좌는 호미 한 자루로 그 앞에 서 있는 격입니다.
 
(474)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無邊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微物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475) 우리의 현실과 그 현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구조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를 포섭하고 있는 문화적 기제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 시대의 지배 담론이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깨달음을 다짐해오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覺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a Becoming)입니다. 칸트의 “물物 자체”(ding an sich)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물 자체라는 생각은 순전히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合으로서, 그것이 맺고 있는 전후방 연쇄(link-age)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476) 이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들은 우리가 그 전체를 볼 수 없는 거대한 과정 위에서 생멸하는 작은 점들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작은 점들에 대해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성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점들이 의식된 또는 의식되지 않은 다른 사건들로부터 독립적으로,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떤 것은 원인이고 어떤 것은 결과라고 판단합니다. 해체解體 철학의 논리가 바로 이러한 인식의 원천적 협소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정체성은 애초부터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긴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76)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트려야 하는 것입니다. 묵자가 슬퍼했듯이 ‘국역유염’國亦有染, 나라 전체가 물들어 있기 때문에 국가와 체제가 쌓아놓은 거대한 벽을 허물어야 하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에 대한 의식의 변혁 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깨달음(覺)의 의미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깨달음의 의미를 지극히 명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고전 읽기의 시작이며 그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79) 물론 최대한의 거대 담론 체계에 있어서 금수초목은 물론 인생사 모두가 덧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화엄의 찬란한 세계이면서 동시에 덧없는 무상의 세계임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한계 내에서 우리의 삶을 영위하고 우리의 생각을 조직하고 우리의 시공에 참여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488)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 즉 “물物에 격格하여 지知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지知란 인식이나 깨달음의 뜻입니다. 그리고 격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입니다만 격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물과의 관계를 통하여 인식을 얻는다는 것이지요. 실천을 통하여 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물이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든 없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주관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외계外界의 독립적 대상을 의미합니다. 물질과 같은 의미입니다. 인식과 깨달음이 외계의 객관적 사물과의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500) 중국의 유학 사상은 이처럼 송대의 새로운 재편과 중흥을 거쳐 대단히 안정적인 체제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바로 그 견고하고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대응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지요. 견고한 구조는 변화에 대한 무지와 지체로 이어지고 당연히 19세기 말 근대 질서의 도전을 맞아 힘겨운 대응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504) 이 경우의 새로움이란 단지 이론에 있어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입장과 자세에 있어서의 ‘새로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창신創新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지적 관심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505) 창신이 어려운 까닭은 그 창신의 실천 현장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우리의 선택 이전에 주어진 것이며 충분히 낡은 것입니다. 현실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요. 과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을 창신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과거란 지나간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실천은 무인지경無人之境에서 새집을 짓는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창신은 결과적으로 온고창신溫故創新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곡선의 형태로 수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조와 우상을 과감히 타파하는 동시에 현실과 전통을 발견하고 계승하는 부단한 자기 성찰의 자세와 상생의 정서를 요구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고전 강독이 바로 그러한 자세와 정서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고 생각합니다.

(506)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506-507) 바다로 간다는 것은 단순한 고전 독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독법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근대성을 반성하고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문명사적 과제와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508) 창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창신은 재조명과는 다른 창의적 사고가 요구됩니다.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따라서 창신의 장에서는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509)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heart)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에 있다는 의미는 사상을 결정하는 부분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의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509)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509)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509)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510)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人性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최후의 방법입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사상의 장場을 문사철의 장으로부터 시서화의 장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

(511) 시적 정서는 하나의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줍니다. 공간적으로 상하좌우의 여러 지점地點을 갖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춘하추동의 여러 시점時點을 갖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엇과 어떻게 관계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511) 그림은 우선 ‘그림’이라는 의미에 충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은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나아가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시와 문 그리고 서와 화라는 정서적 영역은 우리의 독법인 관계론을 확장하고 다시 그것을 인격화할 수 있는 소중한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512)
千山鳥飛絶 萬徑人踪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에는 사람의 발길 끊어졌는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홀로
눈보라 치는 강에 낚시 드리웠다.

(515)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 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다른 식목자는 그렇지 않다. 뿌리는 접히게 하고 흙은 바꾼다. 흙 북돋우기도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한다. 비록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핀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 알아본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차츰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4. 내가 저자라면

책장을 덮었다. 시공 너머, 아주 머나먼 곳으로 시간 여행을 다녀온 듯, 아득하다. 시경에서 중용에 이르는 동양의 고전들을 며칠 동안의 짧은 시간 안에 살펴보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숲'이란 책에서 신영복 선생님은 여행의 의미를 이렇게 말씀한다.

"여행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떠남과 만남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자기의 성(城)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며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대상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동양 고전과 함께 한 짧은 여행을 마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지금, 나는 무엇을 떠나 보냈고, 무엇을 만났는가? 이것이 여행에서 돌아온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나는 무엇을 떠나 보냈고, 무엇을 만났는가?'

신영복 선생님은 '태산 준령'과 같은 동양 고전의 산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도록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주었고, 강의를 하듯 쉽게 풀이해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관점을 통해 옛 것이 고루한 옛 것으로 남아있지 않도록 끊임없이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켜 주었고, '관계론'이란 핵심 주제를 통해 읽는 이의 가슴에 묵직한 질문을 던져 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사부님께선 '좋은 스승은 좋은 질문을 던져주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가 내게 던져 준 화두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부란 무엇인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관계성을 자각'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물'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성찰하는 일이다. '생각의 찌꺼기'인 책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연결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고, 끊임없이 창신創新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트려야 하는 것입니다." (p. 476)

난 우물 속 개구리였다. 아직도 북한군을 늑대로 그리던 어린 날의 '똘이 장군'식 이념 교육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의 것보다는 서양의 것이 더 좋게 보이는 문화적 사대주의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좁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늘 최고의 것, 최선의 것, 더 빠르고 더 멋진 것을 찾은 상품 미학과 자본주의 논리에 세뇌되어 있는 어리석은 백성 중 한 명이었다.

우주는 상하사방上下四方 고금왕래古今往來, 공간과 시간의 수많은 관계망으로 엮여있는 일종의 매트릭스였다. 나와 너는 아무런 의미 없는 남이 아니었다. 서산대사의 시구처럼 '저것이 나'이고, '내가 저것'이듯 모든 것은 하나였다.

둘째, 관계론과 존재론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은 브랜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그가 그토록 비판하는 CF를 만드는 일이다. 상품 미학을 창조하고, 트렌드를 따라잡고,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는 말하듯, 어찌 보면 허구인 이미지와 사실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며 먹고 살고 있다.

또, 앞으로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 또한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를 만질 수 있는 건축물처럼 형상화시키는 일,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이는 노자와 장자가 노래하는 무위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인위의 세계이다. 관계론이 아닌 존재론의 세계이다.

그가 내게 던진 과제는 이처럼 무언가를 건축하는 것과 해체하는 것 사이의 갈등과 모순을 해결하는 일이다. 이는 또한 '변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자와 맹자는 인간 사이의 인과 의에서 답을 찾으려 하고, 노자와 장자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불교는 모든 것은 화엄이며, 결국 덧없는 것이라 말하고, 유교는 대학과 중용을 통해 이렇게 해체된 파편들을 다시 이어 붙이려 한다.

사상은 완결된 그 무엇이 아니다. 역사의 도도한 강물과 함께 흘러가는 흐름이다. 모래성을 쌓듯, 끊임없이 짓고 허무는 과정이다. '존재'가 없다면 어찌 '관계'가 유지될 것인가. 사부님의 말씀이 작은 위안을 준다. "고전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세계가 아니다. 보완의 개념으로 생각해야 한다."

만약 관계론과 존재론을 포용하는 건축물이 있다면 과연 어떤 형태일까? 얼핏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떠올랐지만 답은 역시 자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과 나무, 그 곳에 답이 있을 것 같다.

셋째, 놀이와 학습과 노동의 조화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雍也」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이 주제는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 자신과 현재의 한계를 깨치는 조감적인 시각, 자신을 낮추어 가장 낮은 바다로 흘러가는 관계론과 함께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핵심 화두였다. 이 화두와 연결되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글은 바로 '활 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다음의 글이었다.

"궁술弓術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활 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두 발을 딛는 자세와 어깨와 팔의 각도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흉허복실胸虛腹實이라 하여 가슴은 비우고 배는 든든히 힘을 채워야 하는 것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활을 쏘는 동작 전체에 일관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동작과 동작 사이에는 순서와 절차가 있으며 그 하나하나의 동작이 끊어지지 않고 서로 휴지休止 없이 정靜과 동動으로 유연하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종횡십자縱橫十字를 이루면서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궁도弓道에서 이러한 것들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궁도란 것이 살을 과녁에 적중시키는 단순한 궁술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 과정과 자세의 정진正眞 여부가 중中, 부중不中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 232)

과녁을 꿰뚫기 위해선 과녁을 겨냥하는 동시에 과녁을 잊어야 한다. 결과에 집중하게 되면 과정에 소홀하게 되고, 과정이 유연하게 연결되지 않으면 결과가 좋지 않다. 어렵지만 과정과 결과를 조화시켜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서 우리는 즐길 수 있다. 아니, 즐겨야 깨달을 수 있다. 어린 아이가 무심코 모래성을 쌓고 허물고, 레고를 조립하고 해체하듯 그 무심한 아이의 몸짓 속에 답이 있다.

인생은 완성이 아닌, 그 과정과 순간을 즐기는 놀이이다.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이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p. 199)


#5. 에필로그

이 책은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이 외에도 곰 씹을 주제들이 많지만, 오늘은 여기에서 잠시 멈춘다. 또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여행에 대해 또 이런 말을 했다. "여행은 돌아옴(歸)이었습니다. 자기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되돌아 오는 것이었습니다."

한바퀴 휘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3월 남해로 가던 그때처럼, 사부님과 함께 강과 바다로 여행을 다녀왔고, 연구원 시험을 치를 때 인용했던 신영복 선생님의 문장을 다시 만났고, 주역을 접할 때는 우리가 '미래'라는 첫번째 주제를 다루며 서양의 책들을 공부하자, 이를 매우 안타워하시던 초아 선생님 얼굴도 떠올랐다.

나는 그때보다 얼마나 나아졌을까? 그러나 저 도도한 강물과 드넓은 바다 속에서 물 몇 그릇 길었다고 해서 무엇을 깨달았겠는가? 저 하늘을 나는 새의 자유로움을 잠시 엿보았다면, 깊은 심연 속의 본질을 잠시 엿보았다면 우선은 즐거운 일이 아닌가.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beaten pass)입니다. 도道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辵과 수首의 회의문자 會意文字입니다. 착辵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IP *.249.16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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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11.13 10:42:23 *.227.22.57
도윤... 하여간 너는...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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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ny
2007.11.13 11:21:13 *.60.237.51
안정되면서도 움직임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하나로 정해진 것 보다는 모순되더라도 여러 것들을 그대로 함께 두는 것이 더 좋은 것은 그 여유로움과 변화의 가능성 때문인가봅니다.
'걸어가면서 생각하고' 그런 '순간을 즐긴다', 소중한 깨달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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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1.13 14:37:05 *.249.162.200
종윤이형, 바위를 구덩이 밖으로 밀어 올려야 되는데, 일정이 허락치를 않네요... 결국 부끄럽게 칼럼을 못냈습니다. 주중에 짧은 여행기라도 올려서 죄송한 마음을 달래야겠습니다.

프레니님, 격려의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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