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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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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3일 23시 43분 등록

강 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저, 돌베게


1. 저자에 대하여





1968년,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1심과 2심에서 사형,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신영복 선생님. 잡혀가 수사를 받을 때 그는 수사관에게 “한 3년쯤 살다 나올 것”이라 들었다 한다. 그러나 그는 1988년 8월 15일, 20년 20일만에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가 석방된 해, ‘사회와 사상’지의 기자가 물었다. “통일혁명당사건이란 도대체 무슨 사건이었습니까? 무엇을 했길래 20년 이상이나 감옥살이를 했나요?”

“통일혁명당사건을 나도 잘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감옥을 살았던 것은 내가 했던 일보다도 남북의 정치적 상황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나 합니다. 우리가 한 일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연구 모임을 하면서 학생서클들을 조직해 지도했고 나아가 일부 학생시위를 조직했는데, 요즘의 학생운동 수준이지요.”

민족분단은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으로 몰아넣었다. 일단 굳게 닫힌 옥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 어느 사회에서보다 한국사회에서의 형량은 엄청난 인플레이션 현상을 보이고 있다. 20대의 청년은 40대가 되어서 비로소 특사라는 형식으로 풀려나올 수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숙명여대 강사를 거쳐 육사 교관을 하다가 구속되어 일반적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긴 세월 감옥을 살게된 신영복 선생님의 경우는 이 분단시대의 진보적 지식인이 당하는 수난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감옥에서 밖으로 내보낸 편지들을 밖의 가족과 친지들이 책으로 엮은「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는 89년 1학기부터 성공회신학대학에 출강, 한국사상가 등을 강의하고 있다.


지금의 신영복 선생님을 만든 ‘감옥에서의 20년’

다음은 그가 석방되던 해에 진행된 인터뷰를 요약한 것이다. 인터뷰를 읽으며 가슴이 뜨겁게 아팠다. 그가 감옥으로부터 기대한 것과 얻은것에 대해 알 수 있었다.

Q. 감옥 안에서 바라본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무기수가 되어 감옥 안의 한계상황에 던져짐으로써 부딪치게 되는 느낌은 무엇이었습니까?
감옥 바깥에서 우리 사회의 모순이랄까 역사적 전개와 그 현실에 대해 이론적으로 해석해보려고 추구하던 중에 감옥에 들어갔지요. 들어가기 전에도 민중들의 문제는 민중들의 절박한 삶의 현장에서 그 이론과 사상의 틀이 추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내가 교도소에 들어옴으로써 민중의 맨 하층부분인 룸펜프롤레타리아인 범죄자라든가 실패자라든가 하는, 어쩌면 민중들의 가장 처절한 현장에 서게 되는 것이었지요. “아, 내가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만나고자 했던 민중의 실체를 여기서 직접 만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들 하층의 민중들을 범죄 또는 사건과 연관시켜 봅니다. 이들과 긴밀한 공동생활을 통해, 이들도 당초에는 농촌이나 공장에서 몸부림치다가 이러저러한 우연적•필연적 이유로 떨어져 나와 교도소까지 들어오게 되었지만, 이들도 튼튼하게 삶의 현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지요.


Q. 실제로 겪어본 교도소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교도소란 사회의 모순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제가 육사에서 중위계급을 달고 교관으로 있다가 군사재판을 받고 육군교도소에 한동안 수감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군 이탈이나 상관 살해 등 격정적인 사건으로 들어온 수인들이 많았는데, 이같이 개인적인 성격 등으로 사고나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보다가 일단 민간교도소로 넘어가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노인들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노인은 그들 성격이 사건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사건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생이란 사회적인 것입니다. 범죄사건이 그 사람의 인생과 연결되면서 그 범죄사건의 강한 사회성을 우리에게 설명해줍니다. 이런 점에서 교도소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바라다보는 시각은 한마디로 사회의 모순구조를 통해서 바라다보는 시각입니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을 바라다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고, 또 국립박물관에서 바라다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으며, 안기부에서 바라다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지요. 교도소에서 바라다보는 시각은 사회에서 가장 힘든 자리에서 그 사회에 끝내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 사회의 중압이 내리누르는 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범죄를 범인의 개인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나는 개인적인 책임보다는 사회적인 책임이 훨씬 크다고 보아요. 그 속에서 나는 늘 경험했습니다. 만기출소하는 사람과 악수하면서 이 사람은 다시 들어오지 않겠지, 저 사람은 재소생활을 보아 틀림없다고 생각되는데 늘 그 예상이 빗나가곤 했습니다. 많은 경우 다시 들어옵니다. 그 사람의 인간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사회적 조건이 다시 교도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때문에 돌아오는 것이지요.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요.

Q. 밖의 사회적 양상은 교도소 안으로 투영되지요. 우리 사회의 모순과 변화하는 모습이 범죄양상에 어떻게 투영됩니까?
"초기에는 생활고에 의한 범죄가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청소년범죄가 늘어나지요. 또 범죄행위의 조포화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들과 이야기해보면 사회 자체에 대한 반감, 계층간의 깊어지는 골에 대한 노골적인 저항감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계층들을 소외시켜나가고 있는 국가사회의 운용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지요.

Q. 아직도 수감되어 있는 빨치산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구빨치나 신빨치들은 오늘의 학생운동가들이 이론이나 사상으로 출발하는 것과는 달리 자기 생활상의 현실적인 요구 때문에 산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이론에 대해 잘모르지만, 무엇이 자기를 누르고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를 몸으로 확실히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나는 이 사람들을 통해 초토화된 우리 역사의 진면목에 관해 귀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생생한 체험의 역사였습니다. 일반재소자로부터 사회의 모순구조를 살펴보는 사회인식을 키울 수 있었다면, 사상범들을 통해서는 한국현대사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고 이것은 살아 있는 나의 역사의식을 키울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Q. 교도소란 본질적으로 인간을 억누르는 국가권력의 합법적 폭력기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우리의 교도정책의 가장 반인간적이고 반인권적•전근대적인 것은 재소자들이 스스로의 생각을 마음대로 적을 수 없다는, 다시 말해 집필할 수 있는 기본권이 박탈되고 있다는 데 있지 않나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정다산의 책을 읽으면서, 유배지에서 그렇게 집필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읽고 생각하고 그것을 정리해 기록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징역을 살면서 늘 느꼈습니다. 이는 저뿐 아니라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너무나 당연한, 본능적인 바램이지요.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람시, 우리의 단재 선생이 감옥에서 위대한 저작을 저술해냈지요. 글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게 하고 쓰지도 못하게 하는 우리 사회의 행형제도는 그 기본적인 성격이 무엇이라는 걸 짐작케 합니다. 밖에 나와서 글을 쓰려니까 잘 안돼요. 안에서도 늘 독서를 하긴 했습니다만, 독서라는 것도 독서한 내용을 서로 토로하고 집필하는 과정으로 연결될 때 독서다운 독서가 되겠지요. 학술적•현실적 실천과 연계되는 독서가 진정한 독서입니다. 독서를 위한 독서, 실천과 유리되어 있는 인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Q. 드디어 출소하게 되었는데, 어떤 감회라도 몰려오던가요?
저는 밖에서 양심수석방운동 등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계속 들어왔고, 또 20년이나 살았으니까 조만간 나가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그렇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가서 내가 어떻게 설 것인가 하는 문제가 걱정되었습니다. 막상 나오려하니, 나보다 징역을 많이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랬지만 이제 징역을 살기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미안했습니다. 감옥으로부터 먼저 나오는 사람은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빚을 지는 느낌이지요. 이걸 초월할 수 있는 몇몇 사람들과 이야기는 했지만, 다른 친구들과는 악수도 못하고 조용히 걸어나왔습니다.

Q. 출소 이후 한 학기를 쉬다가 89년 봄학기부터 성공회신학대학에서 다시 학생들과 만나게 되는 데, 20년 전의 강단과 오늘 다시 서는 강단은 세월 이상의 어떤 차이가 있던가요?
옛날에는 책에 의존해서 책의 내용을 단순히 전달하는 데 그쳤지만, 특히 지금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신학을 전공하기 때문에, 저는 학생들과 인간의 문제, 민족과 사회의 문제를 더불어 생각하는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창백한 철학이나 무색한 사회과학적 논리가 아니라 이것들이 우리 역사와 현실과 인간문제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는가를 논의하지요. 제가 여기서 강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청강하러 오는 학생들이 많은데, 이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오늘의 젊은이들이 민족과 사회문제뿐만 아니라 인간문제에 진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Q. 20년 만의 단절 끝에 다시 만나게 되는 친구들로부터는 뭘 느끼게 되었나요?
나는 관념적이든 창백했든간에 지식인의 사고를 갖고 있다가 전혀 인연이 없던 재소자들의 사회, 우리 사회 밑바닥의 소외된 동네에서 20년이란 세월을 살았던 것인데, 이 기간 동안 제가 의도적으로 시도했던 것은 자기개조 자기변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이들과 더불어 어울리면서 나의 관념성을 척결하고 뜨거운 현실성과 구체성을 획득해보겠다는 노력을 의식적 으로 했는데, 20년을 그 속에서 있다가 나와서 만나본 옛날 친구들은 그 외형은 많이 변했지만 그 사고의 유형이라 할까 의식구조는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았어요. 사람이 참 달라지기 어렵다, 자기 자신을 변혁시키고 개조해나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걸 느꼈습니다. 나의 경우를 투사해보아도 마찬가집니다. 징역들어가기 전과 징역살다 나온 이후 나는 과연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결국 개인을 단위로 하거나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인간의 변혁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를 어느 동네, 누구의 이웃에, 어떤 문제 속에 자기를 세우는가에 따라 그 변혁은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고 완성된다는 겁니다. 한 개인의 변혁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신영복 – “나의 대학 생활” 강의

신영복 선생님의 홈페이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가슴이 멎는 듯한 글을 하나 만났다. “나의 대학 생활”이라는 제목의 영남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이었다. 전문이 길어 몇가지마 발췌해둔다.

* 고리끼의 작품 중에 <나의 대학시절>이란 작품이 있죠. 그런데 사실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고리끼는 대학은커녕 학교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거든요…그는 노동자 합숙소의 생활을 자기 인생의 대학시절로 쓰고 있었어요. 매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곳을 자신의 대학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나의 대학시절을 여러분들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제가 다녔던 서울대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같이 징역살았던 사람들을 만나면 서로 '동창생'이라고 부릅니다. 전주대학 동창생, 대전대학 동창생 그렇게 부릅니다. 어쩌면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깨달음을 바로 그 대학에서 깨달으며 고뇌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나의 대학시절>은 바로 그 대학시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세상의 밑바닥에서 모멸 당하면서 살아온 그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들의 분류기준으로서는, 제가 비록 자기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자기들을 억압하고 모멸하던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어요.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인식이었고 내게는 매우 힘든 5년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실에서, 책을 통해서, 수많은 이론과 논의를 통해서 간추린 지식이 현실의 벽에 부딪칠 때, 이런 경우에는 가장 먼저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언어를 버리는 것입니다. 언어가, 말이 얼마나 무력한 것이라는 것을 재빨리 깨닫는 일입니다. 언어는 현실에 있어서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언어는 현실적으로도 많은 경우에 오히려 진실을 감추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위장하고, 변명하고 은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각색된 그의 인생이야기는 그의 가난한 소망이 담긴 이야기이고 동시에 일정한 반성이 담긴 이야기라고 느껴졌어요. 그렇다면 그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실제로 살았던 사실의 주인공으로 우리가 인식할 것인가, 아니면 각색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우리가 그 사람을 판단할 것인가? 저로서는 참 곤혹스러웠어요. 왜냐하면 각색이란 그 속에 상당한 분량의 반성과 그의 가난한 소망이 담긴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각색된 것을 '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색된 이야기가 물론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로 살았던 사실로서의 그의 인생은 도리어 사회가 각색한 것이나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볼 건가. 사실을 중심으로 볼 건가, 진실을 기준으로 해서 봐야 할건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라고 생각되었어요.

* 사람들과의 관계,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서 제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은 사회에 대한 인식,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저는 비록 20년동안 마치 못처럼 한 곳에 못박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20년은 제가 사회에 있었더라면 결코 만날 수 없었던 많은 사람을 만났던 세월이었어요. 사회라는 것은 사람들의 집합이지요. 사회의 본질이 인간관계잖습니까? 물론 계급관계라고 질적 규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여하튼 기본적으로는 '관계'입니다.

저는 그 세월동안 그때까지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많이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생각들을 쌓아올리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2가지로 요약해서 이야기하죠. 그 중의 하나가 사회를 모순구조 속에서 바라보는 그런 관점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나의 대학시절>에 만난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마치 진펄에 무릎걸음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사회를 그 모순구조에서 인식하는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한가지는 제가 아까 '역사의식'이라고 그랬는데, 사회인식에 이어서 역사의식을 새롭게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돌이켜보니까 해방전후라는 게 사실 얼마 안됐는데, 10년 20년밖에 안됐는데, 그렇게 까마득한 역사, 어떤 화석화된 역사로서 우리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이유가 뭔가? 그런 반성을 했습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하지요. 현재의 과제와 연결되어 있는 역사를 정립하는 것이 역사학의 임무라고 믿지요. 수많은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서 갖게 되는 생생한 역사의식은 제게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제가 사형 받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정리를 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같이 들어간 선후배들과 함께 정리했었지요. '죽음이란 삶의 완성이다.' 생각하면 아주 낭만적인 논리입니다. 유관순 누나가 독립만세 부르다가 감옥에서 죽는 것은 유관순 누나의 삶의 아이덴티티가 아름답게 완성되는 것이다. 충무공의 전사도 마찬가지다.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서 피끓는 젊은이가 포악한 군사정권에 항거하다가 죽는 것도 식민지 청년의 삶의 완성이다. 그랬어요.

그랬는데 어느 날 저희 노부모님이 접견마치고 돌아 나가는 뒷모습을 제가 보게 되었어요. 순간 충격을 받았어요. 사형은 내 삶의 아름다운 완성이라고 하는 것이 공허하기 짝이 없어지는 것이었어요. 나의 죽음이 저 부모님의 심정에 무엇이겠는가. 저 부모님의 가슴에 뻥 구멍 뚫는 일이 아니겠는가. 순간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감방에 돌아와 혼자 생각했어요. 나의 존재라는 것이 과연 나의 개별적 존재로서 완성되는 것인가.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그 사람들의 걱정과 어떤 배려 속에 내가 여기 저기 흩어져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 내가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내가 받았던 교육들이 그런 서구 근대성의 어떤 특징인 존재론적인 사고로 굳어져 있는 건 아닌지. 관계는 존재라는 말도 생각났어요.

제가 <나의 대학시절>에 확인한 것은 그런 겁니다. 사람과의 관계, 그것을 확대하면 바로 사회의 어떤 본질적인 구조가 되는 것이지만. IMF상황 나아가 자본주의 200년사에서 우리가 청산해야 할 환상은 무엇인가. 상품생산, 상품교환 구조가 양산하고 있는 바로 인간관계 그 자체가 황폐화되고 파괴된다는 사실이 아닌가 합니다. 수많은 수도꼭지를 만들어 내야 되는 물질적인 낭비, 많은 사람들을 삶의 현장으로부터 쫓아내는 인간의 낭비에서부터 결국 인간관계 자체를 황폐화하는 것이 바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 대학생활동안에 생각해야 할 것은 참 많습니다.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우리사회에 만연한 콤플렉스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고 작은 톱니바퀴의 종속구조를 생각해야 하고,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여러분들은 대학공간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대학의 교육도 마찬가지로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띄우고 근본적인 것에 생각을 모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자본의 논리로부터 독립하는 시간과 공간을 대학이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지요.




2.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21)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23) 유럽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 가는 운동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자본운동의 표현입니다...근대 사회의 사회론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6)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37)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39)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2) 동양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 삼재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특을 법어나고 있습니다.

(44) 유가와 도가는 서로 견제하고 중용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

(58)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일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72) 한마디로 무일(無逸)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77)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82)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 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88) 나는 점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부류의 의기방자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못되어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101)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 밖에 없습니다.

(103)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29)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129)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129)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 미제괘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매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53) 덕치(德治)가 평화로운 시대 즉 치세(治世)의 학(學)이라고 한다면 행정명령과 형벌에 의한 규제를 중심에 두는 법칙(法則)은 난세(亂世)의 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4)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다시 말하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189) 일단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그 거짓말과 상충되는 말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거짓말을 했을때 누구누구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를 기억해둬야 합니다. 거짓말이 탄로나지 않기 위해서는 거짓말과 거짓말이 행해진 환경을 동시에 기억해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이 거짓말에 노출되는 사람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도대체 감당이 불감당이지요.

(195) '내용이 형식에 비하여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는 의미입니다'...예를 들어 광고 카피의 문장과 표현이 도달하고 있는 그 형식에 있어서의 완성도에 대하여는 누구나 감탄하고 있는 일이지만 광고내용을 그대로 신뢰하는 소비자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 사史하다(사치스럽다)고 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사회운동 단체의 성명서처럼 도덕성과 정당성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주장을 전개하는 형식이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 언어를 적절히 절제함으로써 훨씬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을 떨어트려놓아 아쉬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지요. 질이 승하여 야野한(거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198)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199~200) 지(知)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好)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樂)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200)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圓融)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3) 한마디로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명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에 비하여 사회성이 많이 담긴 개념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219)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 진선(盡善)하지 않으면 진미(盡美)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232) 궁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활 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더 중요한 것은 활을 쏘는 동작 전체에 일관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궁도에서 이러한 것들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궁도란 그 과정과 자세의 정진 여부가 중中, 부중不中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중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자신에게서 찾는 반구제기反求諸己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삶의 자세와 철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236)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는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240~241)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商品社會)입니다. 상품 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 교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243)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275)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280)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니.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282) 노자의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굽는' 이야기 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302)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화자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333)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56)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76) “큰 나라가 약소국을 공격하고, 큰 가(家)가 작은 가를 어지럽히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고, 다수가 소수를 힘으로 억압하고, 간사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고, 신분이 높은 자가 천한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천하의 해로움이다.” - 묵자(墨子) 겸애(兼愛) 중에서

(386)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413)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쟁탈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남을 해치게 되고 성실과 신의가 없어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음란하게 되고 예의와 규범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따르고 감정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싸우고 다투게 되어 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서 드디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426) 순자는 예론에서 예는 기르는 것(養)이라고 했습니다. 순자의 예가 곧 법이 되는 것은 이미 얘기했지요. 따라서 순자는 법이란 무엇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잠재력을 길러내는 것이며, 법이란 글자 그대로 물(水)이 잘 흘러가도록(去)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428)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養生)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 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 순자(荀子) 악론(樂論)

(475) 불교에서 깨닫는다느 것, 즉 각覺이란 이 연기의 망網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 있는 분별지分別智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표상, 즉 업業을 깨닫는 일입니다.

(505) 창신(創新)이 어려운 까닭은 그 창신의 실천 현장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우리의 선택 이전에 주어진 것이며 충분히 낡은 것입니다. 현실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요. 과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을 창신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과거란 지난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505~506) 우리의 고전 독법은 관계론의 관점에서 고전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담론이었습니다. 이러한 담론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508)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509)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사철과 나란히 시서화에 대한 교육을 병행해왔다는 것이죠...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몇가지 의유에 대하여 부언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 되어야 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정을 기르는 것은 인성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최후의 방법입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510)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詩書畵)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러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

(515)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여행에서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사부는 말했다.
"이번 책 '강의'를 읽고, 원본을 구해서 읽고 싶은 책 한 권이 있다면 성공적이다."
일전에 사부님의 10대 풍광 속의 ‘30대에 해야할 7가지 일’ 중 '마음에 드는 철학자 두 명을 골라 그 ‘분’을 그 ‘놈’으로 만들어라" 는 말도 떠오른다.

그래, 나는 누구의 사상이 가슴에 꽂혔는가?
공자와 노자. 두 명이다.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필요에 의해 읽고 싶은 책은 논어이고, 부족한 그릇을 채우기 위해 읽고 싶은 책이 노자이다.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를 처음 읽었을 때 가슴을 울렸던 개념 ‘천하에 도가 있으면 유가를 따라 자신을 드러내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도가를 따라 숨는다’의 두 주역이다.

논어 ‘이론과 실천의 통일’ – 학습에 대하여

논어에 나오는 여러 글들이 재미있었는데, 특히 ‘학습’에 대한 글들 – 특히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글들이 가슴을 울렸다. 게다가 논어는 공자의 인간적인 면모가 도처에 드러나 있다는 점, 공자와 제자들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사부와 연구원들의 관계에 대입하여 읽기에 재미있을 듯 하다. (노진형의 필명이 자로가 아니던가). 인간관계에 대한 내용이 많다 보니 카네기의 강의에도 잘 활용될 수 있어 좋겠다.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爲政」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아마도 나는 ‘학습’에 대한 책을 쓸 것 같은데, 논어의 이론과 실천의 통일에 대한 부분을 많이 인용할 듯 하다. 학교 연구실에서 학문에만 몰두하여 현실에는 어두운 연구원들을 나는 많이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자신의 경험만을 고집하는 현장 활동가들도 보았다. 두 부류의 대표적인 사례가 카네기 연구소에 있는데 해외에서 리더십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리더십이 전혀 없는 본부장님(이론가)와 고생끝에 자수성가하여 ‘하면된다’는 신조를 굽히지 않는 사장님(행동가)가 그들이다.


노자 - 효율성과 속도의 반성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功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노자의 이 구절은 인식론이며 실천론이다. 그 인식에 있어서 분별지分別智를 반성하고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선악의 구분처럼 천박한 인식은 없다고 합니다. OX식의 이분법적 사고도 저급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노자는 먼저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한다.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이다.

춘추전국시대는 현대와 같은 무한경쟁의 시대로서 부국강병의 방법론을 두고 수많은 이론들이 속줄한다. 직접 일하지 ㅇ낳고 패자에게 기생하여 지식을 팔고, 그것을 발판으로 사사로운 이해를 도모하는 지식인 계층들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자기계발서 또는 학습서들이 근거없는 심리학 이론에 기대어 ‘효율성’을 강조하고 있는가? 반성할 일이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세상에서 지식 또한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고, ‘지식을 위한 지식’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거대한 시장이 되는 것이다.

교육 ‘시장’에서 일하고,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슴에 간직해야 할 말이다. 선생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스스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조급한 실천은 지양하고 열린마음과 보폭이 큰 걸음걸이로 대응해야 한다.

속도와 효율성, 그것은 자연의 방식이 아니다. 도로이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지만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길’은 도로와는 다르다. 길은 코스모스르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겯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하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발견의 계기이기도 하다.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에게 ‘길’을 제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먼저 맨발로 길을 걸어야 한다.


저자의 생각의 통로로서의 고전

서문에는 “필자로서는 고전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 현실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쓰여있다. 이것이 ‘강의’라는 책이 가지는 힘이다.

이 책은 동양의 고전을 풀이한 책이 아니다. 그것은 저자의 생각과 주장을 전달하는 통로이며 도구로서 잘 사용되고 있다. 각 장의 초반에는 주로 그러한 책이 쓰여지게 된 배경이나, 이해를 위한 핵심 포인트등의 일반적인 설명이 있지만, 그 이후는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절 몇개를 인용하여, 현대에 비추어 이것을 해석하고, 의미를 끌어낸다.

개인적으로 자본주의가 갖는 병폐에 대한 각성을 여러 고전을 통해 설명하는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예컨대 노자의 글의 인용이 좋았다.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해야 하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해야 하며,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정치는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게 하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하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정치를 하면 혼란이 있을 리 없다.”

노자는 백성들이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으나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과장된 CF광고를 통해 볼 수 있듯,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라는 것. 지식도 예외는 아니며 ‘지식으로서의 지식’이 유통되고 판매되고 있는 현실등을 고려할 때 도무지 무욕無欲할 수도 없고 무지無知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점이 그의 생각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와 현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노자』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는 이유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부딪침’에 비유했다. 부딪침은 ‘관계’ 없음(無)이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商品社會)’이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긴다’고 비판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일회적인 화폐관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의 비판은 때로는 칼처럼 날카로웠고, 어떤 때는 가위처럼 단호했다.

고전은 현재를 진단하고 저자의 주장을 펼치는데 대단히 유용한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은 서문에서 “남이 써 놓은 책을 풀이한 것일 뿐 무엇하나 지은 것이 없어 ‘저자’라는 호칭이 부담스럽다”고 쓰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신영복의 고전 독법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신영복의 ‘고전을 통한 세상 읽기’이며, 그래서 훌륭한 책이다.


일상과 고전의 연결

엘리베이터의 귀신 – 주역의 점(占)에 대한 설명
할아버지의 ‘책 1시간 읽고, 30분 생각하라’ 조언 – ‘학이불사즉망’의 설명
전기수리공 ‘머리는 하나지만 손가락 열개’ – 이론의 주관성 비판
지하철 내리는 사람 구별법 – ‘만남의 부재’에서 오는 불인(不仁) 등등.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이야기들에 몇번이나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이 ‘강의’가 가지는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을 고전의 통찰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고전을 아주 쉬운 일상으로 푸는 것, 그것이 비범함이며 책의 매력이다. 매력이란 기대된 것과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일 때 나타난다.

이것이 또한 철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철학으로 그물을 촘촘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놓으면 일상의 흘러가는 작은 물고기들이 걸려들지 않겠는가.


대가 핵심을 꿰뚫는 능력 홍승완 연구원 리뷰 참조

1장과 11장은 그야말로 대가의 통찰력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명확한 커뮤니케이션’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전문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나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대가는 핵심을 꿰뚫는 사람이다. 표현 방식은 양념이고 포장이다. 적당히 잘 버무리고 맛스럽게 담으면 여러 사람이 즐길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적어지는 정도의 차이다. 중요한 것은 핵심이고, 양념이나 포장이 핵심을 담지 못하면 부실해질 뿐이다.

1장의 핵심은 두가지이다.

첫번째는 앞서 밝힌 오래된 고전을 현대에 연결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이고 ‘과거는 오래된 미래’다. 선생님의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E.H.Carr가 보여준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과 일치한다.

두번째는 고전 강독의 전 과정에 화두(話頭)를 걸어놓고 진행한다는 점이다. 선생님이 내걸은 화두는 ‘관계론(關係論)’이다. 동양 사상은 인문주의이고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기 때문이다. 결국, 삶이란 사람과 사람의 만남, 지속적인 만남이고 살면서 가장 필요한 것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관계론이 동양사회와 사상의 정수라면, 서양사회의 핵심은 개별적 존재의 실체성과 그것에 대한 강조, 바로 ‘존재론(存在論)’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고전 강독의 의의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이고, 고전 강독의 관점과 재료는 ‘동양의 관계론’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11장 ‘강의를 마치며’에서 전하는 글은 또한 젊은이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 온고창신(溫故創新). 과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바탕으로 오늘의 주체가 되어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창신(創新)의 장(場)’을 시작할 것, 그리하여 내일을 밝게 할 것. ‘고전 독법에서 문명 독법으로’ 나아갈 것. 동양고전의 내용보다 동양고전에서 얻은 ‘성찰적 관점’을 중요시 할 것.

* 가슴과 실천. ‘가슴’이야말로 ‘관계론의 장’이라는 점.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하며, 그 이유는 ‘감성과 인격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이라는 점. ‘실천된 사상만이 나의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 것.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는 것.

* 좋은 사람, 좋은 사회, 좋은 역사.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가슴에 새길 것. 이것 하나는 지금 바로 새길 것.


커뮤니케이션 : 옆사람에게 이야기하듯 하는 문체

신영복 선생님은 서문에서 ‘이 책은 그 동안의 고전 강의를 정리한 것’이라 밝히고 있는데, 책도 마치 그 강의를 듣는 것처럼 쉽게 읽힌다. 대학에서 강으를 듣는 것처럼, 처음에는 과정의 목적과 진행 방식, 유념할 것들을 설명한 뒤, 한 챕터씩 진행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앞에 앉은 중학생에게 설명하듯 글을 적으라 했었는데 그래서 이 책이 이해하기 쉬운 이유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강의가 자주 삼천포로 빠짐에도 불구하고 전혀 낮설지 않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방식으로 논외의 중요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주역에서 말하는 ‘절제와 겸손’에 대해 이야기하는 130, 131페이지가 대표적인 예이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그럼에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라던가, 논의를 불필요하게 확대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으로 먼저 사과하는 것이다. 설득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미리 사과하기'와 일맥상통한다.


아쉬운 점이라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선생님은 고전을 읽는 것을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것’에 비유했으나 내게는 고전 이전에 이 책이 그랬다. 그러므로 책의 내용에 대해서 나는 비판할 역량이 없다. 그저 ‘있으면 더 좋았을 것들’ 몇 가지를 적어본다.

우선은 고전의 ‘해석’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들이 사족처럼 지나치게 눈에 띈다는 점이다. 예컨대 ‘학이불사즉망’의 사(思)를 ‘실천’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또는 노자의 무(無)와 유(有), 현(玄)을 설명하는데 무려 다섯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어 약간 흐름을 방해하는 듯한 느낌이다. (실제로 그 장의 마지막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앞으로는 번역상의 차이가 있는 경우에도 결정적인 것이 아닌 한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것들은 주석으로 묶어 두는 것은 어땠을까? 우리는 고전을 '공부'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다기 보다는 '배우'기 위해 읽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저자라면 책의 구성에서 독자를 위한 몇 가지 ‘장치’를 달아두었을 것이다. 참고문헌과 더 읽어볼 만한 책들을 묶어서 부록으로 넣거나, ‘찾아보기’나 색인을 뒤에 붙이고, ‘인물 사전’으로 고전에 친숙치 못한 독자를 배려했을 것이다. 허나 사실, 그렇지 않아도 두꺼운 책에 수십페이지를 더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겠다.

덧붙여, 홍승완 연구원이 리뷰에서 말한것처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외에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것, 고전에 대한 칭찬 일색(단점 없는 고전), 동양 사상=중국 사상(그렇다면 한국적 가치와 사상은?), 민초에 대한 과도한 애정(특히, p285~291에서는 다소 흥분한 듯) 등의 것들은 생각해 볼 만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이 책은 훌륭한 스승이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우선 고개를 숙이고 배우기에 힘써야 한다. 이 책은 연구원 생활 중 읽은 가장 훌륭한 책중의 하나로 꼽고 싶다. 1년차가 끝나면 가장 먼저 뒤적여 몇일을 함께 뒹굴 책이다. 좋은 책을 만난 기쁨이 크다.

. 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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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11.14 03:33:32 *.232.147.239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핑계이지만
어젯밤을 꼬박새고, 오늘 휴가를 내고 열심히 쓰고 있는데 침대위에서 햇볕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있는 한결이(울 괭이)를 보았습니다. 어젯밤 형이 시간 못맞출까봐 자기도 안절부절하며 돌아다녀 피곤했나 봅니다.

평소 저를 잘 피하는데 오늘은 가까이 다가가니 볼을 부비며 안기어 뽀뽀를 해 주더군요. 기분이 좋아 얼르다가 저까지 스르륵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그 품이 얼마나 따뜻하던지, 포근히 안은채로 자는 낮잠이 얼마나 달던지, 12시간을 내리 잤습니다.

그래도 핑계치고는 좀 귀엽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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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
2007.11.15 18:27:48 *.184.136.254
책 본다고 고생이 많았구나.
한결이를 끼고 자는것보다 더 좋은 것도 있을 텐데..빨리 구하길.

고전해석이 긴 이유는 아마도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일 거야.
도올 논어를 보면 한구절 가지고 50분 가량 강의하는 것도 많더라구.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해석을 덧되고 경험이 붙고 해서 그럴꺼야.
여기 나온 구절을 따로 복사해서 방앞에 붙여 두고 읽고 있는데,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이 남..
고생했다. 신승리의 갈대가 아직도 가슴속에 묻어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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