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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5일 11시 44분 등록
1. 프롤로그

대학원에 들어서면서 뭔가 배움에 목말라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학을 다닐 때도 현실을 벗어나는 방법을 술과 방황으로 보내 참다운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살아나 대학원을 재밌게 마치게 되었다. 그러한 갈증은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늘 배움에는 열려있고, 배운다고 생각했지만 늘 허전한 그 무엇이 있었다.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고 한정된 독서로 늘 어딘가에 막혀서 방황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눈에 보일듯 하면서도 손을 뻗어보면 만져지지 않고 금새 내 눈 앞에서 사라진다. 어느 날인가 문득 논어에 필이 꽂혔다. 아마 『세종의 국가경영』이라는 책을 읽고 토론을 할 때도 본질은 공자에 있었다. 동양 리더십을 배울 때도 근간에 깔린 것은 공자였다. 기원전 500년 전 사람, 중국 초기의 혼란스러울 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근본적인 시스템을 고안한 사람, 자신의 이론이 국가의 경영에 반영되지 않자 훌훌 떠나 제자를 키우는 교육적인 대계를 세운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올해부터 논어를 배우게 되는 행운을 누렸다. 아마 실날 같은 그 무언가의 끈이 논어를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막상 책을 구입하고 읽어보고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보니 왜 기본사상의 한 가운데에 공자가 있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한자와 학문에 대한 독학도 가능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정치와 사회 전반에 내려온 과정과 역사를 대입하여 안내해주는 참된 스승이 필요한 책이 바로 논어였다. 강의에 나온 책은 중국의 정치문화 사상의 커다란 흐름이다. 2천 5백년 전의 전통을 고스란히 거쳐 사회제도가 바뀔 때마다 그것을 활용한 중국의 거대하고 유연한 몸짓이 부럽기만 했다. 지난달에 퇴계 선생의 평전을 읽었다. 현재 퇴계선생에 대한 일본과 한국과의 차이 때문에 속이 상하였다. 불과 500년이 조금 넘은 것을 우리는 다 잊고 산다는 자책을 하게 되었는데,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를 읽으면서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 동안 맹목적으로 발전이라는 거대담론과 암울한 현대사에 의하여 황폐해진 들판에 새싹이 돋아나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고전을 읽는 다는 것이 5천년의 태산준령을 호미로 맞서는 것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태산을 호미로 다 팔 수는 없지만 고전이라는 무한의 보물창고로 가는 황금열쇠를 받아진 느낌이다. 20년의 단절된 감옥살이에서 읽어낸 동양고전, 그 힘겨운 삶을 지탱해준 마지막 잎새가 아니었을까

2.작가에 대하여

27살의 혈기왕성한 절은이가 최고 학부에서 공부를 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하나의 사건으로 20년 동안 사형수로 감옥에 있다가 47살의 중년으로 사회에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다. 만약 본인에게 이러한 사건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신영복 선생님을 처음 본 것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이다. 제목에서부터 뭔가 색다른 맛이 느껴져서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감옥생활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속에서 진흙 속에서 핀 연꽃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인상에 남았던 구절은 바로 여름과 겨울의 감옥살이에 대한 단상이었다. 수인들끼리 좁다란 감방에서 칼잠을 자야 되는 상황에서 여름과 겨울의 일상에 대한 변화는 짧은 글이지만 수감생활의 애환을 느끼게 하였다. 어쩌면 20년 동안의 단절, 특히 5년동안의 독방생활의 단절이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주역의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痛)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문구가 생각이 난다.

신영복 선생님은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 1963년부터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1965년 까지 3년 동안 숙명여대 정경대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근무를 하였다. 근무중인 1968년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하다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동양철학’ 강의해왔으며 1998년 3월 13일 사면 복권되어 1998년 5월 1일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정식 임명되어 현재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엽서>(1993), <나무야 나무야>(1996), <더불어 숲>1,2(1998)가 있으며, 역서로는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 <사람아 아! 사람아>(1991), <노신전>(1992, 공역), <중국역대시가선집>이 있다.

참으로 간략한 개인의 역사이다. 감옥에서 만난 노촌 이구영 선생의 소개에서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삶의 정직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다. 라는 말을 하였다. 노촌 선생님이 조선말, 식민지 사회, 북한 사회주의, 20년의 감옥사회를 살았다고 한다면 신영복 선생님은 노촌 선생님의 삶보다 더 현대에 경험이 많은 연속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살았다. 이러한 인생의 흐름과 고전에서 만나는 부분이 바로 시제에 대한 독특한 시각으로 연결 된지도 모르다.

저자를 보면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경제학의 이론을 현실에서 찾아보려고 노력하였고, 60년대 부패정권에 대한 4.19혁명에 개발이라는 논리에 따른 자본주의의 독보적인 행태에 대한 고민을 하였고, 그것을 찾기 위한 몸부림에 그만 수인의 몸이 되고 만 것이라고 본다.

감옥바깥에서 우리 사회의 모순이랄까 역사적인 전개와 그 현실에 대해 이론적으로 해석해보려고 추구하던 중에 감옥에 들어갔지요. 들어가기 전에도 민중들의 문제는 민중들의 절박한 삶의 현장에서 그 이론과 사상의 틀이 추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내가 교도소에 들어옴으로써 민중의 맨 하층부분인 풀펜프로레타이라인 범죄자라든가 실패자라든가 하는 어쩌면 민중들의 가장 처절한 현장에 서게 되는 것이었지요. 아 내가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만나고자 했던 사람들은 이들 하층의 민중들을 범죄 또는 사건과 연관시켜 봅니다. 이들과 긴밀한 공동생활을 통해, 이들도 당초에는 농촌이나 공장에서 몸부림치다가 이러저러한 우연적·필연적 이유로 떨어져 나와 교도소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이들도 튼튼하게 삶의 현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사회와 사상 1989년 11월 통권 제 15호)에서 인용

논리나 사상은 추상적인 관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발로 설 때 이루어진다. 이런 삶의 결론이 바로 곧 사상이자 논리라는 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내가 지금까지 배워온 것도 어찌 보면 이러한 추상적 관념이라는 약한 토대위에서 쌓아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더 치열한 삶을 살아야 되는 이유가 있지 않나 한다.

삶과 현장, 이론과 실제를 이해한 것이 교도소라고 하지만, 저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글조차 제대로 쓸 수 없어 편지를 써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동양고전에 대하여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된 것은 바로 독방에서의 면벽명상이라고 한다.


무념무상의 상태로 호흡을 어떻게 하고, 기운을 돌리라고 하는데 잠깐 졸릴 때 말고는 무념무상이 안 됩니다. 그래서 아예 내가 겪었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되살리는 명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4살 때 기억을 되살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렸을 때 만났던 사람들, 겪었던 일들을 눈감고 앉아서 떠올려 보았습니다. 과거를 다시 체험하는 추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때는 대단히 사소한 일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주 엄청난 일이나, 그때 잠깐 만났다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나에게 깊이 영향을 주었던 사람, 반대로 오래 같이 있었는데도 나와 녹아들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양심과 정찰은 우리시대 진정한 가치입니다”라는 말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듯 싶다.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도 새롭게 다가왔다.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인생의 각 단계마다 시험을 보아야 하고 절차보다는 결과만 강조하는 세태에서 우리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과정은 하나의 교훈을 얻는
귀중한 장소가 아닌가 한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우리의 인생이 100점 인생은 없다고 본다.

이러한 관계론과 성찰에 따른 그의 길을 볼 때 시간에 대한 관점도 특이하였다.

과거는 흘러가는 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실천은 무인지경에서 새집을 짓는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505p)


20년 동안의 수인생활이 시간이 흐르고 없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공존하는 거대한 틀 속에서 고전 속에서 찾은 여러 가지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년 동안의 수인생활이 그에게 준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세상을 떠받들고 거대 담론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서산대사가 남긴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라는 말처럼 2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자유인의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한 말이 아니었을까?



3. 가슴을 치는 구절

<책을 내면서>

(6) 고전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장 서론>

(19)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삶의 정직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라고 하다면 노촌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사신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촌선생님의 삶은 어느 것 하나 당대의 절절한 애환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중의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선생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는 사실이지요.

(21) 오천년 동안 단절 되지 않고 전승되어 내려오는 문명이 세계에는 없습니다. 이집트만 하더라도 고대문자 해독이 불가능합니다. 해독에 필요한 모든 자료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 고대 문헌은 마치 현대 문헌처럼 친숙하게 읽히고 있습니다. 전승과 해독에 있어서 세계 유일의 문헌입니다. 그 규모가 엄청날 수밖에 없지요.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겪입니다.

(22) 이러한 상황이 오늘과 다르지 않습니다. 변화와 개력에 대한 열망과 이러한 열망을 사회화하기 위한 거대 담론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상황이라는 것이 고전강독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24 근대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원리가 관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 사회의 사회 론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가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6) 여러분이 영어공부 시작한 지가 최소한 10년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어 논문을 쓰거나 영시를 짓고 감상할 정도가 되기는 어렵지 않나요? 그러나 과거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는 4,5년이면 뛰어난 문장력과 시작수준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과학적 방법이나 첩경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여러분이 마음에 드는 고전 구문을 선택해서 암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29) 일단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30) 서양문명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회된 구조이며 이처럼 조화된 구조가 바로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32) 그러나 최근의 동양에 대한 관심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신대륙에 대하 콜럼버스의 관심입니다. 과도하게 축적된 초국적 자본이 자본주의 시장권에서 분리되어 있던 동구권과 러시아 대륙에 이어서 다시 광범한 중국 시장에 쏟는 관심, 이것이 주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6)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베버의 체계에는 동양 사상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관계론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이 결여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37)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 즉 도는 가까운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39)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근대 사회의 신념체계인 자본주의 성장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45) 동양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장 오래된 시와 언>

52)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업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풍에 주목합니다. 시경의 국풍 부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

(62)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경의 시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게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65)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75) 고전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77)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84) 낭만과 낭만주의의 창조적 정신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각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넓고 긴 안목이 바로 초사의 세계나, 남방적 낭만주의와 무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처하고 있는 공고한 체제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포섭기제를 드러내야 하는 당면의 과제와 한번쯤 연결시켜 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3장 주역의 인간관계론>

(90)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이면서 동시에 연역지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형식이 관계론 적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92)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신ㄱ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101)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107) 주역의 관계론적 철학사상이 이러한 사회 역사적 지반위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 사상가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123) 그러나 박괘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 만들기입니다. 희망을 만들어내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비록 박괘의 상전과 단전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희망을 만들어가는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과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ㅠ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28)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전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129)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130)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세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痛)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야적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1)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저에서 과학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객관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달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장 논어 인관관계론의 보고>

(141) 공자의 사상이 서주시대 지배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의 획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143) 중요한 것은 이 습을 복습(復習)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습’의 뜻은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내고 있듯이 ‘실천(實踐)’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 어린 새가 날개 짓을 하는 모양입니다.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가 기쁜 것이지요.

(145) 계급관계는 생산관계이기 이전에 인간관계입니다. 자본제도의 핵심은 위계적인 노동 분업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산자에 대한 지배 체제가 자본제도의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론은 물론 변혁 이론의 일환으로 제기된 것이지만 생산자에 대한 지배 권력이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에 의하여 ㅎ생해지든, 사회주의 사회의 당 관료에 의해 행해지든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제도의 핵심 개념이 바로 인간관계라는 사실이지요.

(149)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우리가 논어의 이 구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통일적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149)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구절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지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154) 예와 형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관계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입장이지요. 사회적 질서는 이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7 이글에서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미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소(素)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소의 의미는 인간적 품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품성이란 바로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도야되는 것이며 인간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입니다.

(159)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니라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는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162) 논어의 화동론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로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이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화이부동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164)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 격동기에 도처에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극좌와 극우, 그 근본적인 구성원리에 있어서 상통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이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68) 마음이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좌우명으로 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녹아들어있는 그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4) 논어 전체의 구성에서 보더라도 그럴 뿐만 아니라 인과 지, 애인과 지인은 논어의 근본담론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인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라는 대단히 근본적인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177)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와 빈천의 역사를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과하지 않는 일입니다. 몇몇 드러난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그가 누리고 있는 부귀의 형성과정에 대해 전혀 무지합니다. 특히 서울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내려가면 그곳에서는 그 역사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187)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8)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 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200) 그러나 중요한 것은지, 호(好), 낙(樂)의 차이를 규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각각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 속에서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 형식이라기보다는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6) 여러 차례 이야기 했습니다. 논어는 인간 관계론의 보고입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백가들이 벌였던 토론은 고대국가 건설이라는 사회학 중심의 담론이었습니다. 굳이 논어의 독자영역이라면 숱한 사회학적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 맹자의 의(義)>


(215) 사실 맹자는 그의 주장과 같이 “문구의 생략과 중복이 절묘하고, 흐름이 경쾌하고 민첩하며, 비유가 풍부하고.... 어떠한 상대도 설복시킬 정도로 논리가 정연하다.” 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의문, 감탄, 부정구 등 문장의 형식도 다양하고 자유자애하여 한문의 문법과 예문의 교범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맹자입니다.


(227) 여하튼 맹자의 성선설은 사회 원리인 예가 인간 본성에 순응하는 천리라는 것을 밝혀 두고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 윤리인 인보다는 객관적 구조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객관적인구조가 기존의 제도와 체제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보다 효과적인 이론으로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맹자의 성선설은 불인인지심을 확충하는 체계이며 이 불인인지심의 확충이 곧 본성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233) 반구제기(半球諸己)의 자세란 IMF 사태에서 우리의 종속적이고 비자립적인 구조를 먼저 보는 것이지요. 물론 친인소연을 다 아울러야 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인(因)을 미루어 놓고 먼 연(緣)을 먼저 보는 것은 사태를 그릇되게 보는 것이지요. 사활적 공세를 전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패권주의와 그러한 세계 경제체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는 우리의 경제적 위상을 아울러 보아야 하겠지만, 반구제기는 우리를,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원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237)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안다’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의미합니다.

(240)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사회입니다. 상품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과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교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241) 신도림역의 지하철 좌석 이야기는 동 시대의 횡적인 인간관계의 실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모스크바의 젊은이와는 판이한 우리나라 젊은이의 대담은 인간관계가 세대 간에 어떻게 단절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대 간의 관계가 그만큼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는 종횡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245) 일원이 모든 틈새를 다 비춘다는 것은 한 점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불영과불행 도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는 학과라고 할 때의 그 과입니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 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단 뜻이지요.

(249) 맹자의 사회주의와 민본주의는 오늘의 사회적 현실을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맹자는 그 사상이 우원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패자들에게 수용되지는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수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맹자의 민본 사상은 패권을 추구하는 당시의 군주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아마 제선왕이었지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맹자는 참으로 명쾌하고도 단호하게 답변하여 군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습니다. “인을 밟은 자를 적이라 하고, 의를 짓밟는 자를 잔이라고 합니다. 잔적한 자는 일개 사내에 불과합니다. 주의 무왕이 일개 사내일 뿐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으나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6장 노자의 도와 자연>

(254) 제자백가의 사상은 물론 여러 층위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정책적인 대응을 본령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노자는 다른 학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반대합니다. 인위적 제도나 규제는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책이 되지 못하며 도리어 혼란과 불의를 가중시킬 뿐이라는 기본적 입장을 분명하게 천명하게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는 근본적으로 반문화적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의지에 대한 비판입니다. 계몽주의든 합리주의든, 기존의 인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건축적 의지를 해체해야 한다는 해체론이며 바로 이점이 노자의 현대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262) 노자는 무위와 관조라는 동양적 사유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일 뿐만 아니라 과학, 문화, 예술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서구에 소개된 이후 현재 약 60여종의 번역본이 있으며 현대 서구사상에도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어쨌든 나로서는 노자 강의가 질주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264)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는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자유로운 식물이라고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무와 무명은 같은 범주에 속합니다. 유와 유명도 마찬가지입니다.

(269) 도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는 윤리적인 강상의 도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법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의 도라는 것은 노자가 의미하는 참된 의미의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 됨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

(271) 결론적으로 무의 세계든, 유의 세게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한 세계입니다. 유의 세계가 가시적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무의 작용이며, 현상상태이며, 그것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아이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그 어머니 때문에 복잡한 경우와 같은 것이지요.

(273) 노자 텍스트에서 대부분의 위는 인위 작위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의 개입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자 사상의기조는 대체로 유가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인의예지란 인위적인 것이며 그 인위적인 것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지요. 예약, 명분, 문물 등에 대한 반성과 반문화적 관점이 노자 전편을 일관하고 있습니다.

(280)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 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수많은 화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 합니다.

(281)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85)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하기도 하고 할수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려가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287) 노자가 군주학이 될 수 없는 가장 근본적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패권 경쟁의 무도한 작위를 철저하게 반대하는 것 그것이 민초들이 정치학인 셈이지요. 뿐만 아니라 반전증명 사상을 설파하고 약한 자가 이긴다는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노자의 비판 담론은 전쟁의 최대 희생자인 민초들의 삶과 투쟁에 뛰어난 실천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상이며 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89) 제66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이기선하지(以其善下之 바다가 모든 강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구절의 선은 well이 아니라 more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노자가 민초의 전략전술이며 정치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291) 과학적 방법이란 싸우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부쟁(唯不爭) 고무우(故無尤), “오직 다투지 않음으로써 허물이 없다.”

(300) 대직약굴(大直若屈)에 대해서 왕필은 “곧음이란 한 가지가 아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직(大直)을 대절(大節) 즉 비타협적인 절개와 지조의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으로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302) 처음에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더듬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더듬은 청중을 지배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대변(大辨)이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눌변이 청자의 연상 세계를 확장해 준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304) 그것의 핵심은 동(動)보다는 정(靜)을 만(滿)보다는 허(虛)를, 교(巧)보다는 졸(拙)을, 웅(雄)보다는 자(雌)를 그리고 진(進)보다는 귀(歸)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데 있습니다. 노자 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 사상에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노자 사상은 장자, 열자 등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계승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유가 측에서도 노자를 계속 읽고 해석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노자 사상은 중국 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데 매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305) 노자의 철학은 귀본의 철학입니다. 본은 도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 받는다.” 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제7장 장자의 소요>

(310) 2천년을 격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장자를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 한다면 혹시 나 자신도 우물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입니다. 과도기는 언제나 백화제방의 시대입니다. 오늘날도 예외는 아닙니다. 수많은 담론의 와중에서 우리가 골몰하고 있는 것이 결국은 패권 경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장자 독법의 핵심적 과제라고 생각하지요.

(311)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자 제 1편 소요유(逍遼遊)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는 보행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314) 장자의 정치학은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 모색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절대적 자유와 소요를 장자의 정치적 선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패권 경쟁을 반대하고 궁극적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자와 노자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317) 그러나 장자는 그 전편에 흐르는 유유자적하고 광활한 관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이론과 사상뿐만 아니라 모든 현실적 존재도 그것은 드높은 차원에서 조감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조감자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물속의 개구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장자에 대한 올바른 독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19) 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

(325) 포정해우의 이야기는 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도에 관한 이야기임은 물론입니다. 장자 사상의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 평가됩니다.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것을 체득하고 있는 경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논어의 지지자(知之者) 불여호지자(不如好之者),호지자(好之者) 불여낙지자(不如樂之者)와 통하는 경지라 할 수 있지요.

(328)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래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교실과 책과 시험으로 채워진 학교 시절을 끝내고 싱싱한 삶의 실체들과 부딪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으리라고 생각합니다.

(331)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지출보다는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333) 장자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계와 효율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반성이 효율성 논의에 그치지 않고 근대 문명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 반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35) 자기의 문화, 자기의 생산물, 자기의 언어, 자기의 신을 강요하는 제국과 패권의 논리가 반성되지 않는 한 참다운 문명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340)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도는 상품생산에 유용한가? 아닌가 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적 가치 나아가 근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문명론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어야 하고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능력과 경쟁력이란 고연 무엇인가를 조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343)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이라거나, 사회적 의미가 박약하다거나, 실천적 의미가 제거되어 있다는 비판을 장자를 잘못 읽거나 좁게 읽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363) 따라서 학파간 차이는 그 시대의 과제를 인식하는 관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학파간의 차별화가 진행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학파간의 침투가 진행되는 것이 사상사의 일반적인 과정입니다.

(366) 맹자에 따르면 “묵가는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여 정수리에서 무릎까지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가가 주공을 모델로 했다면 묵가의 모델은 하나라의 우임금입니다. 우임금은 황하의 치수를 담당하여 장딴지와 정강이의 털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신명을 바쳐 일했던 사람입니다.

(370) 이러한 현실 인식에 근거하여 묵자는 겸애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라는 상생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당면의 실천적 과제로서 반전 평화의 기치를 내걸고 헌신적으로 방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373)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혼란의 원인을 알아야 다스릴 수 있으며 그 원인을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고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회의 혼란을 다스리는 것 역시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382) 그래서 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 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자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전쟁이야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388)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묵자가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던 문제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져야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90)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사람들의 소용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 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생산규모를 유지하려고 하는 정도라면 차라리 큰 문제는 아니지요.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부단히 그 규모를 확대해 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 활동의 일환인 것입니다.

(396) “양성 군과 나는 스승과 제자이기 이전에 벗이었고, 벗이기 이전에 신하였다. 우리가 죽기를 마다한다면 앞으로 세상 사람들이 엄격한 스승을 구할 때 묵자학파는 반드시 제외될 것이며, 좋은 벗을 구할 때도 제외될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택하는 것은 묵자학파의 대의를 실천하고 그 업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다.” 엄정하고 결연한 태도입니다.

(400) 묵자가 죽은 후에도 200여 년 동안 여전히 세력을 떨쳤지만 그 후 2천년이라는 긴 망각의 시대를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묵가는 좌파 사상과 좌파운동이 그 이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겪어 나갈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역사의 초기에 미리 모여준 역설적이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9장 순자, 유가와 법가>

(405) 순자가 유가학파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의 천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입니다. 인간세상은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순자는 종교적인 천, 인격적인 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순자의 탁론입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유가의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정통유가와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바로 순자의 천론이고 순자가 이단인 이유가 바로 천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08)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하다는 것이지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능참, 즉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17) 순자의 성악설도 그런 점에서 같은 구조입니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하는 논리의 일환입니다. 순자의 이론 체계는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라는 사회 제도에 의하여 악한 성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순자는 모든 사람은 인의와 법도를 알 수 있는 지의 바탕을 갖추고 있으며 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419) 순자의 가장 크 공헌이 바로 이 예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새롭게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예는 공자의 주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순자의 예는 전국시대의 예이며, 이 전국시대의 예가 바로 법으로서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에 도덕적인 내용 이외에 강제라는 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하누 순자의 예론은 전국 말기의 현실적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23)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인간사회의 문화적 소산은 사회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회 조직이 바로 예입니다. 그리고 그 예가 곧 제도와 법입니다. 이러한 제도와 법을 준수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방금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이러한 제도와 법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지요. 더 푸르게 만들기도 하고, 둥글게 만들거나 곧게 만들기도 하고, 날카롭게 벼리지도 하는 것, 이것이 교육입니다.

<제10장 법가와 천하통일>

(439) 그리고 법은 기본적으로 강제력입니다.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강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법일 수 없는 것이지요. 법가가 형벌을 정책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법가의 정치형태가 중앙집권적 전제군주 국가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47) 이러한 한비자의 사상은 그것이 군주 철학이란 점에서 비판되기도 하지만, 한비자의 군주 철학은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야말로 난세를 평정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논리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혼란 역시 임금의 권위가 무너짐으로써 시작된다는 것이 한비자의 인식입니다.

(456) 그러나 나는 그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 사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상과 시대, 사상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는 것도 같습니다. 그것의 분리가 바로 관념화의 과정이고 물신화의 과정입니다. 더구나 법가 이론은 한비자의 인간적 면모를 심하게 왜곡합니다.

(462) 군주의 술치는 군주의 은밀하고 부정적인 권력이라기보다는 관료제라는 새로운 제도의 작동원리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법가를 다시 읽는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성과 법치주의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리를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1장 강의를 마치며>

(471) 동양고전은 5천년동안 쌓여온 것으로 엄청나기가 태산준령입니다. 우리의 강좌는 호미 한자루로 그 앞에 서 있는 격입니다.

(475) 이 깨달음의 문제는 우리가 이번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강조해온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그 현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구조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를 포섭하고 잇슨 문화적 기제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 시대의 지배 담론이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깨달음을 다집해 오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覺)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480) 유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개별적 대응을 꾸준히 계속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말 한휴의 노불 비판이 그렇습니다. 한유와 마차가지로 이고 역시 불교와 도가를 비판하고 대학과 중용이라는 새로운 문헌적 근거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송대 신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송대에 접어들면서 경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광범위하게 진행됩니다. 그것이 남송의 주희에 이르러 집대성 되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바입니다. 주자는 우주론, 인성론, 공부론 등 광범위한 체계를 완성하고 사서를 확정하여 유교의 도통을 확립합니다.

(485) 송대의 신유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통일국가를 재건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해야 하는 시대적 대응과제의 일환으로서 등장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종교와 이성의 갈등기에 비종교적 엘리트들이 직면했던 고뇌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무정부적 상황은 당대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게 있어서 시급히 개변하지 않을 수는 없는 매우 불안정하고 위험한 정치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486) 어쨌든 불교와 신유학은 도전과 응전이라는 역사의 어떤 전형을 엿보게 합니다. 역사의 매 단계에는 이러한 구도가 중층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이러한 중층적인 구도를 명쾌하게 드러내는 것이 역사 이해의 본령이라고 생각합니다.

(499) 중요한 것은 송대 신유학은 노불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해이해지 사회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당대 지식인들의 지적 대응과정의 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 700년 동안 중국사회는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사회적 모델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가기 때문입니다.

(505) 과거는 흘러가는 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실천은 무인지경에서 새집을 짓는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506) 이것은 서구적 가치가 개인의 존재성을 강화하고 개인의 사회적, 물질적 존재 조건을 확대하고 해방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 구별됩니다. 서구적 가치는 인성의 고양보다는 개인의 존재 조건을 고양하는 것이며, 그 존재 조건들 간의 마찰과 충돌을 합리적으로 규제하는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내가저자라면

500여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내용이지만, 전체적으로 동양의 고전을 짜임새 있게 담아내었다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저자의 말대로 고전이라는 태산준령에 호미로 맞서는 격이라는 말을 했지만 논어나 주역 어느 한권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내용이다. 정책이나 프로젝트의 현실성 등을 파악하기 위하여 파일럿 프로그램이라는 시험 프로그램 같은 느낌이 든다. 간단하게 소개가 아닌 가장 핵심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어 상당한 무게를 느끼기도 한다. 어쩌면 고전이라는 것이 저자와 책의 특징만 암기하는 것이 아닌 읽는 순서와 고전이 주는 독특한 맛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것 같다. 시경은 처음 듣는 개념이지만, 한시의 오묘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읽은 책은 주역과 논어이다. 주역은 초아선생님으로부터 호를 받을 때 구한 책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괘와 효에 대한 복잡함이 아닌 언제 읽어봐도 깔끔한 느낌이 든다. 가끔 일이 풀리지 않을 때 한괘 씩 찾아서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논어는 계속 읽고 있다.

책이라는 것은 동시대의 고민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화두를 주어야 한다고 본다. 앞으로 책을 쓴다면 강의처럼 선조들의 쌓아온 보고 속에서 우리 시대에 맞는 그 무엇인가를 찾고, 그것을 화두로 하여 살아갈 날에 대한 지침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중국은 사실 고전을 가지고 많은 응용과 유연함을 보이며 아직까지 고전의 밑바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하여 조선이라는 나라는 유교의 사상을 500년 동안이나 치국에 응용을 하였다. 그 결과가 타의든 자의든 간에 무수히 많은 이론들이 발전되어 왔고, 삶의 처절함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의 번뇌가 뒤 따랐다. 거기에 비하여 현재를 사는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정보의 양에 허덕이고 있다. 정보의 양보다는 하나라도 정확하게 알고 이를 몸으로 체득하여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소련의 몰락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독주체제에 맞서는 거대한 패러다임이 필요한 이때에 동양의 고전이 주는 교훈은 다양하고 색다르다. 어쩌면 존재론적인 서양의 문화처럼 리더십이라는 것도 체계적이 훈련에 의하여 발전된다고 볼 때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동양의 교훈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 저자가 말대로 상업화와 자본주의 발달은 인간성의 말살과 인간 스스로 제어를 하지 못하고 파멸에 간 다음에야 잘못을 깨닫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다. 감옥에서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여 편지로 글을 써온 저자에게 다산 선생이 유배지에서 많은 책을 지은 것과 비교를 해보면 그 차이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무려 30년 넘게 발전이라는 명제 아래 가슴깊이 묻어왔고, 그 본능을 잊어버렸다.

마지막으로 고전이 주는 교훈은 아직도 무궁무진하다. 이제야 호미 들고 커다란 산의 텃밭을 하나 마련한 느낌이다. 그동안 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도로를 통해서 인생을 살아왔다. 속도와 목적만이 유일한 도로를 빠른 자동차로 걸어왔다. 중간에 얼핏 스쳐간 것이 꽃인지 나무인지 모르고 지나왔다. 하루가 바쁘다고 살아오는 나에게 20년의 갇힌 다음 풀어놓는 저자의 고전 강의가 더욱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길이란 개념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한손에는 고전이라는 무한한 보고의 열쇠를, 다른 한손에는 내가 가야할 방향을 찾아주는 나침반을 든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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