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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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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6일 00시 25분 등록
가슴팍에 맺힌 땀방울이 태양아래 반짝하고 빛난다.
짧게 깎은 머리, 탄탄한 어깨, 꽉 다문 입술...웃옷을 훌렁 벗어 제낀 두 사람이 땀 흘리며 운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 황홀한 듯, 부러운 듯 그들이 운동하는 양을 가만히 볼 뿐이다. 거칠고 야성적인 것은 자신들의 세계가 아니기에 직접 해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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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팍을 드러내놓고 운동하는 앞의 두 사람, 그들은 여성(움)이다.
그리고 여성을 황홀한 듯 부러운 듯 바라만 보고 있는 두 사람은 남성(맨움)들이다. 뭔가 이상하다고?? 이갈리아에선 일상적인 일일 뿐이다!



●이갈리아, 그 평등한 유토피아 세상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도나 제시카를 하느님 어머니의 딸이라고 믿는 이곳은 이갈리아(Egalia). 평등한 유토피아 세상이다. 생명의 근원인 여성이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이갈리아에 초대받으려면 먼저 이곳의 용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움은 여성, 맨움은 남성을 가리킨다. 남성은 일정 나이가 되면 ‘페호’(페니스를 바치기 위해 입는 옷)을 착용한다. 남성들은 작고 아담한 몸집,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절제가 미덕이다. 결혼을 하면 그들은 ‘하우스바운드’라 불린다. 남성들은 주로 여성의 ‘부성보호’를 받으며 집안일과 양육을 도맡고 있다. 여성은 정계, 사회 각 분야의 요직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다. 힘든 선원일, 공사판 일 모두 여성이 한다. 남성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생물학적으로 열세하다는 교육을 받고 자란다. 남성은 사회적 힘이 없다. 간혹 밤거리를 싸돌아 다니다 성폭행을 당하더라도 자신의 몸을 지킬 줄 모르는 그가 더 잘못인 경우가 많다.

뭐, 평등하지 않다고? 천만에! 남성도 평등하다. 남성들은 타고난 기질대로 (천성적으로 얌전하고 감성적인) 집안일과 양육을 담당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은 사회로 진출한 남성들도 많이 늘고 있는 추세긴 하다. 게다가 곳곳에서 “우리에겐 자유, 우리의 타고난 인격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며 남성해방주의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니 세상 얼마나 좋아졌는가. 그들이 별종 취급을 받을 뿐이긴 하지만!

이갈리아에선 작고 통통한 남자가 아름다운 남자로 칭송받는다. 여자? 여자에게도 미의 기준이 있다. 큰 키, 탄탄한 어깨, 오똑한 콧날, 그리고 능력. 그것이 여자의 미의 기준이다. 여성은 경제력이 강하고, 자식을 생산할 수 있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 만약 남성들이 여성들처럼 함부로 백주대낮에 웃통을 벗어 제끼거나 갑갑하다고 페호(음경을 가려주는 옷)를 차지 않는다면, 당신은 남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 얼마나 해괴 망측한 일인가!




● 산산이 깨지는 또 하나의 세계

주인공인 페트로니우스, 그는 마르고 키가 커서 별 매력이 없는 사춘기 맨움이다. 잠수부를 꿈꾸는 그는 맨움은 잠수부가 될 수 없다는 현실에 좌절을 느낀다. 하루는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다 불량배들에게 몹쓸짓을 당한다. 그러나 이런 반응이 돌아올 뿐이다.
“그러게, 니가 조심했어야지. 왜 밤길을 다니고 그러니!”
페트로니우스는 궁금해진다. 왜지? 왜 우리는 잠수부가 될 수 없고, 밤길을 조심해야 하고, 부성보호를 받아야 하는거지? 왜? 여자들이 더 우월해서? 여자들이 더 힘이 세서? 여자들이 아이를 낳기 때문에? 도대체 어느 누가 맨움을 ‘힘없고 쓸모없는’존재라고 교육하는 것인가? 왜 자녀양육은 우리가 도맡아야만 하는가? 우리는 왜 밤거릴 마음놓고 다니지 못하는가?


이 얘기를 읽으며 헷갈리는 게 아마 당신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너무 헷갈려 머리가 아파왔다. 부성보호? 아니, 남자가 치마입고... 치장이나 하며 집에서 애를 돌본다고? 이게 뭐야! 남성은 자신의 인생이 없나? 이거 너무 불공평하잖아!

1/3쯤 읽었을 때 나는 편하게 읽는 방법을 터득했다.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남성과 여성 그 둘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 여자가 브래지어 차고, 여자가 집에서 양육과 집안일을 맡고.... 그건 바로 지금의 세계였다.
순간 나는 헉~하고, 머릿속에 있던 어떤 세계가 산산이 깨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건 일종의 카타르시스였다.
나는 24년 만에 처음으로 다음의 물음을 던지기에 이르렀다.
“이런 제기랄! 도대체 여자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거지?”



●내가 생긴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 다채로움!

1인 전문가, 개인 브랜드, 자기계발, 강점혁명.....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당신만의 ‘그것’을 살려라!”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성(性)을 떼놓곤 생긴 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진정 말하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연히 나의 특성으로 살려야 할 '그것들'이 때때로 억압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 장면 하나
"너 참 씩씩하구나"
그렇다. 나는 얌전하다는 소리보단 너참 씩씩하다, 시원시원하다는 소릴 훨씬 많이 듣는다. 키도 껑충하고, 씩씩한 김귀자,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내 성격을 칭찬해 놓고는 "다소곳하고, 얌전하지 않은 소위 ‘여자다운 맛’이 별로 없어"라며 종종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기도 한다. 나는 매스컴에서 비춰주는 당연시되는 여성의 특징과는 많이 다른 내 모습이 콤플렉스라고 간주해버렸다. 나는 씩씩한 김귀자가 부끄러웠다. 어디서나 활달한 내 모습이 싫었다. 그런데 말이다, 다소곳하고, 얌전한 김귀자를 상상할 수 있을까? 나는 씩씩하고 쾌활하고 활동적일 뿐 아니라 어느 때엔 무척이나 조용하고 얌전해기도 한다.
기실 그 둘 다 나의 모습이다.


# 장면 둘.
올 초 남해로 연구원 모임을 갔을 때, ‘장례식 스피치’라는 것을 했다. 자신이 죽는다는 걸 가정한터라,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펑펑 운 두 남자가 있었다. 그들은 너무 심한(?) 감정표현 탓에 사람들로부터 “(고추)떼라”라는 놀림을 받았다. 남자가 울면 창피한 일일까? 남자는 감정표현이 절제된 사회적 동물이라서? 만약 그들이 여자였다면 어떤 말을 들었을지 나는 매우 궁금하다.


# 장면 셋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남자는 대를 이어야 한다. 함부로 부엌에 들락거리거나 가볍게 행동해선 안돼. 니들도 오빠를 받들어야 해.’ 집정리부터 빨래, 음식, 밭일 등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는 엄마나 언니들은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돈을 벌어오는 아빠와 기둥이 될 오빠는 무엇을 해도 인정받았다.(참고로 우리 할머니는 남자라고 편애하는 분은 아닌, 소위 깨인 분이심에도 그러하다.)

중학교 생물시간,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이 우위란다. 그래서 여성은 남성의 보호를 받는 거란다. 그런 힘의 차이가 지금의 사회구조를 만들어 놓았단다. 남자는 여자보다 근력이 좋아서 사회에 진출하는데 용이하다는 거다. 막말로 공사판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나? 고작해야 밥 나르는 거??

나는 남자가 되고 싶어졌다. 나는 남자가 되어서 할머니에게도 이쁨 받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고 싶어졌다. 중학교땐 머리도 짧게 자르고, 남자처럼 행동해 동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꽤 있었다. 그러나 여자로 태어난 내가 남자가 된다는 건 더 고달프다는 걸 알고, 꿈을 버렸다. ㅠ



●그러나 이곳은 이갈리아 대신, 대한민국...아~대.한.민.국.

책장을 덮었다. 아쉽지만, 이곳은 이갈리아 땅이 아니다. 나는 남성이 더 우위고, 모든 잘 나가는 신(神)은 남성으로 된, 여성이 보호 받고 살아야 하는 지구, 특히나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버렸다. 이곳에서 내가 웃통 벗고 운동할 일도, 힘자랑 할 일도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책장을 펼쳤지만, 이미 끝난 이야기다.
어찌됐건 나는 여성이고, 이곳에선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고, 남자로 태어나 다행인 경우가 훨씬 많은 시대다. 그러나 나는 꿈을 꿔본다. 내가 남자가 되는 것도 아니요, 이갈리아처럼 여성이 우위인 세상도 아니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은 평등한 세상이다.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내가 생긴 대로 잘 살 수 있는 세상’ 그런 평등의 세상이다. 21세기...아직도 나의 그런 바람이 너무나 큰 것일까?


생긴 대로 살고 싶다고?? 정말???????????
한 달 전 이 책을 읽고 지금에서야 북리뷰를 썼다. 너무 인상 깊게 읽은 만큼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아서 그를 정리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궁금하다.

구본형 변화경영 연구소를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많은 관심사는 ‘내 생긴대로 잘 사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성’, 혹은 ‘남성’ 이란 사실을 떼놓고는 내 생긴 대로 산다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이 내 생긴 대로 잘 살아가고 싶다면, 지금, 이곳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 책을 꼭 한번 보기를 권한다. 약간의 정신적 충격이 가해질지도 모르지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나보다 더 똑똑한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얼마나 멋질까? 그들은 어떻게 느낄까...참으로 궁금해진다.


•작가에 대해
저자는 1941년 노르웨이 오슬러에서 태어났는데, 70년 초반부터 여성해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오슬로 여성의 집>과 <매 맞는 아내들을 위한 쉼터>에서 일해오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전세계의 동성애자여, 일어나라>, <그래, 이제 그만>,<성 크로와에게 바치는 노래> 등이 있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1975년 출판된 이후 페미니스트들의 교과서라 불리며 많은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왜 70년대 초반에 여성해방 운동에 '적극'참여했는지 궁금했지만...찾을 수 없었다. 1시간의 웹서핑으론 부족한 듯 싶다...)
IP *.231.5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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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11.17 08:11:43 *.209.97.128

70년대는 여성해방의 시대로 그동안 억눌려왔던 모든 불평등이 뿜어져나왔으므로,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여성해방운동에 참여를 하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시대였겠지요. ^^ 그 때에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사회적인 양육태도에 불평등의 주된 요인이 있다고 봤다네요. 하지만 갈수록 남녀간의 차이에 대한 연구결과가 속속 보고됨으로써 요즘은, 남녀는 다르다, 그런데 여성적 특성이 더 우세한 시대가 오고 있다고 보는 거지요.

남녀는 아예 현실인식방법이 다르답니다. 여성은 우뇌와 좌뇌 영역 간에 좀 더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져 뛰어난 어휘구사력과 대인관계 직관력을 가진 반면에, 남자는 더 분석적이어서 추상적 논리 전개와 시공간적 능력이 강화되어 있다는거지요.

하지만 어떤 여자도 내면에 남성성을 갖고 있고, 어떤 남자도 여성성을 갖고 있는거지요. 그 비율이 사람마다 다른 걸테구요.

귀자의 고심은 이런 이론적인 측면이기 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보이지만, 우리는 논리로 죽고사는 사람들이니까요. ^^ 나는 ‘5가지 친밀한 관계/레스 & 레슬리 패럿 지음’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참고하구요.

성공한 사람들이 ‘가면’을 더 많이 쓰고 있답니다. 내 것을 주장하기보다, 사회와 상황이 요구하는 것에 더 영리하게 적응한 결과가 성공이라는거지요. 하지만 그 ‘적응력’ 또한 ‘나다움’에 들어간다고 보면, 어쨌든 나답게 살 수밖에 없는 것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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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자
2007.11.17 08:22:58 *.254.70.4
역시 명석하신 답변입니다. ㅎㅎ
나중에 한선생님이 위에 추천하신 책 찾아 봐야겠네요.
그리고 마지막 문단은...음 좀더 곱씹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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