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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9일 11시 45분 등록
■ 마르코 폴로에 대하여

1. 백 만 가지 사람, MILION

동그란 아치형 다리 아래로 물이 흐르는 베네치아에 사는 한 소년이 여행길에 나섰다. 그 소년의 양 옆에는 아버지로 보이는 한 남자와 그보다 조금 어린듯한 남자 한 명이 함께 하고 있다. 이 세 사람은 지구의 반대편에 도착을 한다. 동방 역사의 진로를 바꾼 세 사람. 그 가운데 서 있던 소년은 훗날 전설이 된다. 중학교 과정 세계사 한 자락에 버젓이 등장을 하고, 학술적 문헌으로 또는 역사 서적으로 읽히는 책의 저자로도 알려진다.
마르코 폴로. 24년간의 동방 여행을 한 여행가. 유럽에 중국을 처음 소개한 사람. 동방견문록이라는 너무도 유명한 책을 저술한 죄수. 그를 칭하는 꼬리표는 다양하다. ‘영감의 원천인 동시에 의심의 대상’이었던 마르코 폴로. 그 이름만으로도 너무나 유명하다.

CORTE DEL MILION이란 이름이 붙은 집은 그 겉모습이 넉넉하다. 밝은 황토빛 벽돌로 차곡차곡 쌓인 벽돌담이 13세기 분위기 그대로다. 간간이 보이는 초록색 창문은 밝은 황토빛과 꽤 잘 어울린다. 벽의 곳곳엔 빗물이 흘러내려 흰 자욱이 생겼다. 집의 이름이 왜 MILION인지에 대한 정설은 없다. 다만 그가 백만 달러를 벌어서인지, 백만 가지 거짓말을 해서인지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훗날 알려진 바에 의하면 MILION의 의미는 꽤 재미나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배나 다리의 숫자를 묘사할 때 언제나 수 천, 수 만개라는 숫자를 사용했다. 그 것은 당시 유럽에서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많은 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말을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MILION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나는 그와 MILION이란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럽인들이 나라의 경계선을 넘을 엄두도 못 내던 시절, 그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 여행은 17세의 소년에게 수 백 가지에 달하는 세상을 보여주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숫자인 MILION.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경험을 하고 돌아온 마르코 폴로. 썩 잘 어울린다.
이 집이 그의 집이라 추정되는 증거는 새 문양이다. 집의 기둥에 그려진 새 문양은 당시 그의 가문 문장이었다. 이 밖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건, 17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여행을 나섰다는 것, 당시 그들은 상인이었다는 것, 훗날 동방견문록을 쓸 수 있었던 재료인 아시아 지역을 여행했다는 것 정도이다.

이름만 들으면 “아! 동방견문록?” 하고 금새 대답을 할 수 있지만, 그 외엔 잘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동방견문록은 그를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고, 그의 삶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삶으로 유명해진 마르코 폴로. 삶으로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른 마르코 폴로. 그의 24년이란 삶은 결코 화려하지도, 부귀하지도 않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MILIOM이란 이름이 붙을 만큼 갖가지 경험을 하고, 갖가지 역사를 만들어낸 그이지만, 결과는 흑백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개혁자 아니면 허풍쟁이. 허풍쟁이 아니면 개혁자.

2. 동방, 그 끝의 17년

마르코 폴로는 1271년 베니스를 출발한다. 당시 그의 나이 17세였다. 우리의 나이로 고등학교 1학년의 풋풋함은 호기심으로 얼마나 그득 했을까. 여행길에 오른 그의 두 눈은 감옥에서 여행기를 이야기 할 때만큼이나 빛이 났으리라.
마르코 폴로는 이라크를 지나 이란으로, 페르시아를 거쳐 아프가니스탄에 차례로 도착한다. 그리고 3년 후, 중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위치한 파미르 공원에 발을 딛는다. “산에는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 없었다”는 그의 말은, 파미르 공원이 생물이라곤 살지 않은 황무지란 추측을 낳게 한다. 만년설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산악지대, 파미르 공원. 추위와 험난함이 그에게 고통이었다면, 이는 그가 훗날 겪게 될 감옥에서의 고통을 부르는 서막에 불과하다.
그는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파미르 고원을 엄청난 추위와 고도를 견뎌내며 지나갔다. 그리고 카슈가르로 내려가서 큰 시장을 방문했다. 그 시장은 온 세계에서 온 상인들로 넘쳐났다. 마르코 폴로는 상인들로 붐비는 시장의 모습을 묘사하곤 했다.

동방 견문록에 보면 ‘불에 타지 않은 옷감’과 티즈낫의 ‘뿔이 달린 양’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는 실제로 존재한다. ‘불에 타지 않는 옷감’은 석면이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석면이 전설 속 도마뱀의 비늘로 만든 옷감이라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을 깬 최초의 인물이 바로 마르코 폴로다. 실제로는 돌에서 뽑아낸 실로 짠 옷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실제 경험에 의한 것은 강력하다. 힘이 있다. 오랜 시간을 거쳐 정설이라 믿고 있는 것들도, 실제 경험한 것에 의해 깨어지고 다듬어지게 마련이다.

마르코 폴로가 ‘만리장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가 중국에 갔다는 이야기에 의심을 품는 것은 주장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만리장성은 마르코 폴로가 다녀간 뒤 300년 뒤에야 그 모습이 갖춰졌음이 밝혀지고 난 후에는 마르코 폴로의 진정성이 승리했다. 만리장성은 마르코 폴로가 여행을 했던 당시엔 그저 흙이 쌓인 광활한 사막과도 같은 모양새였다. ‘마르코 폴로 열병’ NGC 사진작가인 마이크 야마시타는 말한다. “마르코 폴로가 이 곳을 지나기 전 이란의 궁전을 보고 온 뒤라면, 이 흙무더기가 성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험준만 산맥을 넘고, 가장 사나운 바다와 가장 황량한 사막을 건너 17년 동안 동방을 여행했다. 신이 정해준 땅의 경계를 넘었으며 인간의 의지로 넘어설 수 없는 고난을 이겨냈다” 지금은 이러한 마르코의 여행이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모두가 믿는다. 지난 세월 동안 그의 세부적 묘사가 대부분 진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3. 베이징, 또 다른 여행의 MILION

중국은 마르코 폴로에게 특별한 장소였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중국을 다녀왔는지 여부를 떠나서, 중국이라는 나라로 인해 그는 개혁자와 허풍쟁이의 두 꼬리표를 달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와 중국은 이전부터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 이미 그 곳에 방문을 했었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가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중국을 여행하기 전이다. 1265년에 아버지와 삼촌은 먼저 중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 곳에서 그 둘은 쿠발라이 칸이라는 중국 황제를 만났다. 쿠발라이 칸은 그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271년에 아버지와 삼촌은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다시 중국에 간다. 세 사람이 중국에 갔을 때 쿠발라이 칸은 세 사람을 환영했다. “마르코는 언어를 잘 하는 학생이었고, 곧 중국어를 배웠다. 쿠발라이 칸은 마르코를 눈 여겨 봐 그에게 일을 주었다. 그는 황제를 대표하여 17년 간 중국 전 지역을 여행했다.” 그는 이 기간을 『동방견문록』에 그대로 소개했다. 영롱한 진주조개의 껍질이 열린 것이다. 신비에 싸여 있던 중국이 서양에 처음 된 역사적 사건이다.

마르코 폴로는 쿠발라이 칸의 신임을 얻어 –그의 말에 의하면- 항저우라는 도시를 다스리게 된다. 항저우는 바다와 무척이나 가까운 마을이었다. “이 항저우라는 곳은 매우 중요한 도시이다. 이 책을 쓰고 있는 마르코 폴로 자신이 몇 년간 이 도시를 다스렸다” 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그가 이 곳을 통치했으리라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역사 그 어디에도 마르코 폴로가 언급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펜이 적어두지 않았던 마르코 폴로. 혹은 역사의 펜이 적은 것을, 하얀색 잉크가 덮어버린 것은 아닐까. 류 교수는 ‘당시 원 나라 때의 기록은 모두 파괴되었기 때문’이라 일축한다.
마르코 폴로는 하급 관리였다. 소금에 대한 지식이 깊었던 그는 소금관리직으로 등용된 것이다. 항저우가 바다와 가까웠고, 소금이 주요생산품이었던 점으로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관직일지라도 철저히 기록했던 당시 중국의 상황은 류 교수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동방견문록에서 중국은 중요하다. 마르코 폴로를 알아감에 없어선 안 될 재료다. 중국은 마르코 폴로에게 진귀한 경험을 제공했다. 난생 처음 보는 전통 부족들의 부족 문화도 겪었고, 난생 처음 걷는 지형의 산맥이나 고원도 겪었다. 그의 24년간 여행의 마침표가 바로 중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중요하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도달하려 했던 곳이 중국이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4. 베니스로의 짧은 귀향 속 두 죄수.

마르코 폴로는 1254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1271년 그는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1291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르코 폴로가 역사상 위대한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 곳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베니스는 제노바와 수년 간 전쟁 중이었다. 여행을 계속하고 싶었던 그는 배의 선장이 된다. 그러나 그의 배를 이용해 전장에서 싸우다 패하고 만다. 결국 베니스는 전쟁에서 패하고, 마르코 폴로는 제노바의 포로가 된다. 당시로서 그는 무척이나 괴롭고 어려웠을 것이다. 전쟁 중에 겪은 다사다난한 고통과 상처가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가게 된 것은 어쩌면 행운이자 삶의 이끔이었으리라. 그가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동방견문록』의 탄생은 없었을 것이므로.

지금 우리가 들여다보고 있는 이 죄수는 행색이 초라하다. 여행 동안 몸에 베었을 위엄이나 당당함은 없다. 헝클어진 머리, 푹 꺼진 볼, 앙상한 팔목이 전부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진지했으리라. 그 이야기가 거짓이든 진실이든 무척이나 진지했으리라.
마르코 폴로는 감옥에서 낭만적인 글로 유명했던 작가 피사 데 루스티첼로를 동료 죄수로 만난다. 그 둘은 서로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서의 인생과 그의 여행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세계 최고의 여행가는 자신의 책을 감옥 안에서 쓴 셈이 되는 것이다” 1298~1299년의 시간 동안 집필 된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삶을 통해 신이 이루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구라는 행성에 떠있던 대륙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거울로써 등장시킨 인물인가. 신은 그의 소명이 “동방견문록”이라 여겼던 것일까. 그가 세상에 태어나 “경험한 것의 절반도 다 적어내지 못한” 동방견문록의 이야기를 마치자 신은 1324년 그를 하늘로 부른다.

5. 동방견문록

새벽은 어둡다. 어둡고 서늘하다. 그러나 희망적이다. 밝은 태양이 곧 떠오르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새벽을 품은 이는 언제나 그 모양이 희망차다.
『동방견문록』은 내게 희망의 책이다. 문장 하나로 다른 이의 마음과 이상에 희망을 품게 해주는 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방견문록』의 원제는《세계 경이(驚異)의 서》이다. 마르코 폴로가 옥중에 주고받은 이야기가 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또한 그보다 더 잘 알려진 것은 콜럼버스가 이 책을 읽고 인도와 일본을 찾아 나서는 항해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콜럼버스 역시 이 책에서 새벽의 희망을 본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쉬이 읽진 못한다. 우리나라에 출판되어 있는 책의 대부분은 어린이용 도서다. 강남의 한 서점의 경우 “동방견문록”이란 제목의 책 절반이 어린이용 도서였다. 알록달록한 그림이 섞인 그림책이다. 그 외의 책은 없나, 하고 찾아보니 방대한 분량의 완역본이거나 축약본이 전부다. 그저 보기만 해도 부담이 되는 두께와 모양. 오늘 날 『동방견문록』은 “당시 전 유럽을 경악에 빠뜨릴 만큼 원래의 흥미 넘치는 여행기의 모습은 흐릿하게 퇴색된 채 이제는 학술적 아이콘이자 역사학의 재료로만 읽히고 있다.” 일반인들이 선뜻 읽기엔 왠지 거리가 있을 것 같은 『동방견문록』이 된 셈이다. 그러나 로빈 브라운 저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같은 책은 유익하다. 학술적 아이콘으로만 여겨지던 책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하였으니 과거의 역사에 한 걸음 나아가기에 큰 도움이 된다.

『동방견문록』의 흥미진진하고 놀라운 이야기는 당시 유럽 세계를 충격으로 몰고 갔다. 당시의 유럽인들로서는 믿을 수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전설의 아서 왕보다 더 위대하고, 유럽의 어떤 황제보다 더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가졌을 것이 분명한 쿠빌라이 칸과 그의 광대한 제국에 대한 이야기, 그 제국에 속한 수많은 나라들의 다양하고 신기한 역사, 지리, 자연, 기타 문물에 대한 생생한 묘사 앞에서 유럽인들은 충격이 아니라 경악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방견문록』은 인쇄술이 거의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와 반대로 “이 책의 이야기들은 여전히 진실로서 신뢰를 얻지 못했고, 책의 저작에 루스티첼로라는 3류 소설가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마르코 폴로는 허풍쟁이로, 『동방견문록』은 터무니없이 과장된 이야기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이 책을 읽고 항해를 시작했다. 또 이 책으로 인해 세계사의 서막이 열리기도 했다. 실크로드를 통해 무역이 성사되기도 하고, 아랍 상인들은 향신료의 원산지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동방견문록』은 진귀한 역사를 담은 역사서로서 건재하고 있다.

6. 로빈 브라운

로빈 브라운은 작가이자 영화 제작자로 알려져 있다. 작품으로는 콘라드 로렌즈, 에녹 파월, 피터 스콧 경, 윌프레드 데자이거 경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있다. 저서로는 소설들과 두 권의 자서전, 그리고 2004년에 서튼(Sutton) 출판사에서 출간된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개화에 대한 연구서 『솔로몬과 시바의 잃어버린 성』이 있다.

출처: NGC 다큐멘터리 3부작 「마르코 폴로」「What is Marco Polo famous?」『역사의 사기꾼』, 『동방 견문록』, 출판사 리뷰

■ 내 마음에 들어온 글 귀

저자 서문

[14] 1324년에 마르코 폴로의 임종을 지켰던 신부는 마르코 폴로에게 그가 한 이야기 중에 취소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질문했다. 이에 마르코 폴로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채 쓰지 못했습니다.”
이제 시간이 흘러, 주로 20세기에 이루어진 여러 사람들의 여행을 통해 마르코 폴로가 옳았다는 것이 상당 부분 입증되었다.

[21] 그는 중국에 있는 쿠빌라이의 궁전으로 가는 길에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거의 1년 동안 산속에서 요양을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런 어려움은 항상 부차적인 것이었고, 그는 귀중한 여행에 고무되어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32] 사라진 원본은 조악한 프랑스어로 쓰였다는 데 거의 의견일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여전히 위대한 기행문 중 하나이며, 광대한 지역을 아우르는 점 때문에 최고 기행문이라 이를 만하다. 7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중앙아시아의 특정 지역과 광대한 중국 제국에 대해 세밀하게 서술한 이 책의 권위는 그대로 남아 있다.

[36] 그의 원고의 주된 맥락이 70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사소한 것까지 흠을 잡는 까다로운 학문적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시간이 흘러 여행가들이 중국을 탐험하면서 새로운 발견과 세부 증거들에 의해 그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점이 더 확인되었다.

[39] 138개의 서로 다른 판본 중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원본과 관련된 연구와 해석, 조사, 뒷받침, 증거는 문자 그대로 수백 가지에 이른다. 원본은 이미 사라졌는데 말이다.

[41] 프램튼 번역본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자면, 내가 주된 참고 자료로 이용한 것 중 하나이다.

[42] 상상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던 마르코 이야기의 색다른 맛은 모두 수도사 출신인 초기 번역가들의 종교적 고결함과 충돌했다. 그러나 프램튼은 그런 금기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사람이었다.

[42] 베네데토는 노고를 아끼지 않은 연구를 통해 두 작품에서 실질적으로 동일한 구절과 표현을 밝혀냈고, 그리하여 루스티첼로가 자신의 로맨스 소설들을 썼던 똑같은 정성과 성실함으로 지리학회본 또한 썼다고 결론 내렸다.

[44] 나(저자) 또한 개인적으로 루스티첼로가 마르코에게서 메모를 받아 대신 글을 썼다는 주장이 의심스럽다. 우리는 루스티첼로가 마르코의 메모를 바탕으로 작업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메모가 이야기의 세부 내용까지 묘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많은 내용을 기억을 더듬어 구술했음에 틀림없다. 산성의 노인과 같은 이야기들 중 일부는 상세한 메모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기억에 의한 것처럼 들린다.

[50] 영역본마저도 모두 너무나 ‘경건’했다. 마르코 폴로와 그의 책은 어느새 학술적 아이콘이자, 역사학의 재료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글을 읽으면서, 이 생기 넘치고 활발한 청년이 수도승에 의해 편집되고 미화되었으며, 정부에 의해 검열되고, 마르코 폴로를 연구한 학자들에게 숭배된 부분들로부터 탈출하려고 분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본질은 어디로 숨었는가? 어린 망나니, 혈기왕성한 젊은이, 궁전의 어릿광대, 쿠빌라이의 이야기꾼이자 유능한 상인이었던 마르코 폴로는 어디로 갔는가? 그것은 마치 본래는 매우 화려한 색상이었지만 700년이 지나 빛이 바래진 그림을 보는 것과 같았다.

[51] 이 책은 지구상에서 가장 막강한 지배자인 대칸 쿠빌라이의 조신이자,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됨으로써 자신의 원대한 꿈을 이룬 한 10대 소년의, 엄청나게 부유하고 비범한 한 여행가의 친근한 회고록이다.

서편

[58] 대칸은 교황에게 100명의 현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썼는데, 쿠빌라이가 말하는 현자란 ‘일곱 가지 학문’에 능하고,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옹호할 수 있으며,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진실하고, 타타르족이 숭앙하는 우상들은 악령에 불과하며, 동방의 사람들이 신으로 숭배하는 것들이 옳지 않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칸은 또 일행에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뿐인 진정한 신으로 숭배하겠다고 다짐하며,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성묘에 있는 등잔의 성유를 조금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덧붙였다.

[63] 그들 가운데 마르코는 특히 인정을 받았다.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타타르족의 예법을 모두 익히고 그들의 네 가지 언어를 읽고 쓰는 데 능통해졌기 때문이다.

[63] 마르코는 대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현명하게 일 처리를 완벽히 해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뛰어난 능력은 마르코를 높은 자리에 오르게 만들었다.

[64] 마르코는 또한 쿠빌라이가 멀리 떨어진 곳의 생활양식이나 풍습 등을 아주 소소한 것까지 낱낱이 듣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 주인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그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이리하여 마르코는 17년 동안 대칸의 부름으로 영토의 구석구석에 기밀 임무를 띠고 다녀오곤 했다. 때로는 그는 왕의 윤허를 받아 개인적으로도 기나긴 여행을 했다. 곧 그는 유럽인들에게 여전히 동방의 비밀로 남아 있던 것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그는 정기적으로 글을 썼고, 그 내용은 본문에서 밝혀질 것이다.

제1편 세상 밖으로

[82] 바그다드는 기독교도들에게 교황과 같은 의미를 갖는, 모든 사라센의 칼리프가 거주했던 굉장히 큰 도시이다. 도시 한가운데는 거대한 티그리스 강이 흐르는데, 상인들이 인도양에서 내륙으로 물건을 운송하는 데 그 강은 사용한다.

[82~83] 바그다드는 금실로 수를 놓은 비단과 새와 짐승 문양을 장식한 카펫으로 유명하다. 우리가 유럽에서 보는 진주의 거의 대부분은 세공을 위해 처음에 이곳으로 모인다. 또한 이곳은 마호메트의 율법과 마술, 물리학, 천문학, 점술, 관상학 연구의 중심지이다. 바그다드는 실로 그 어느 곳보다 크고 고귀한 도시이다.

[87] 그러자 정말 산이 사라졌다! 게다가 온 땅이 칼리프와 그의 일당을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로 심하게 진동했기에 그들은 몸을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칼리프는 비밀리에 기독교를 신봉했으며, 항상 옷 속에 십자가를 품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그는 죽은 뒤에도 사라센 선조들의 묘지에 묻히지 못했다. 그때부터 바그다드의 기독교도들은 산이 옮겨진 이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112] 이 지방 여자들은 아주 이상한 차림새를 하고 다닌다. 그들은 속옷 대신 허리 아래에 60, 80, 또는 100엘의 고급 면포를 두른다. 이 기다란 천을 모아서 주름을 잡아 두르는데, 이는 일부러 엉덩이를 크게 보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이 지방에서는 뚱뚱하고 엉덩이가 큰 여자들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117] 나는 카쉬가르에서 출발하여 정확히 닷새 후에 유명한 고도 사마르칸트에 도착했다. 사마르칸트는 대단한 곳이다. 도시를 둘러싼 아름다운 정원에서는 온갖 종류의 과일이 나는데, 도시 자체는 고귀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120] 드디어 기독교도들이 주출돌을 돌려줘야 하는 날이 되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했다. 기둥이 바닥에서 들어 올려지고 주춧돌이 빠져 나왔지만, 그 기둥은 오늘날까지 바닥에서 뜬 채 그대로 서 있다!

[122] 이곳에서 닷새를 가면 대사막 모퉁이에 있는 롭 시에 도달한다. 롭 사막을 건널 계획이라면 이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앞으로의 고된 여정을 위해 힘을 비축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특히 여러 마리의 낙타와 튼튼한 나귀가 필요한데, 이들은 상품을 운반하는 데에도 쓰이지만, 식량이 동나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 짐승들을 잡아먹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131] 매우 신실한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의 윤리에 따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올바른 삶을 살고자 노력하며 육욕과 호색을 삼간다.

[135] 그는 타타르족을 활로 무장시키고, 거대하고 날렵한 군대의 선두에 서서 도시와 지방의 정복을 시작했다. 칭기즈 칸은 정의와 덕의 정치를 계속했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그에게 복종하고 그의 보호와 은혜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152] 가끔 쿠빌라이의 점성가들은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컨대 구름이 몰려들고 비가 올 것 같은 때에, 대칸이 사는 궁전의 지붕에 올라가 주술의 힘으로 폭풍우를 잠재우고 비를 그치게 한다. 그리하여 주변에 비바람이 몰아치더라도 왕의 궁전에는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다.

제2편 왕중의 왕

[158] 마르코는 위대한 칸 쿠빌라이와 그의 거대한 제국에 기품을 더하는 장대한 궁정들에 진정으로 압도되었다. 그 결과 마르코는 동방과 그곳을 다스리는 막강한 지도자의 경이로움에 대해 주관적이고 편향된 애정을 쏟아 이 글을 서술했다.
이런 찬양에 가까운 묘사들은 부분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이 왕중의 왕에 대해 서구 세계가 알고 있는 것이 전무했다는 사실의 반영이기도 했다.

[160] 책에는 아주 많은 사례와 상세한 설명이 있으며, 이상하게 보이는 일들도 시간이 흐른 후에 상당히 정확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162] 쿠빌라이의 관심 분야에 대해서는 내가 몇 년간 전문적으로 몰두한 바 있다. 그러나 내 견해로는, 광대한 영토의 식물상과 동물상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었던 사람은 주로 사냥에 관심을 두었던 쿠빌라이보다는 바로 마르코 자신이었던 것 같다. 대칸이 전설적인 큰바다가오리의 거대한 깃털을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가져오라고 사절단을 보낸 적이 있다고 한 마르코의 보고도, 조류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진귀한 물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164] 제2편의 거의 모든 페이지가 유럽인들이 전혀 몰랐던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67] 그(쿠빌라이 칸)는 기독교도들 앞에서 자신이 기독교를 가장 진실한 최고의 종교로 여긴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p.175 참고)

[177]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선발된다. 먼저 여인들의 얼굴, 머릿결, 눈썹, 입과 입술, 그 밖에 여러 특징들을 검사하기 위해 심사관이 임명된다. 그들이 여인들의 전체적인 첫인상을 평가하고선 17. 18. 또는 20카라트 등으로 점수를 매긴다. 대칸은 보통 20이나 21카라트의 여성을 취한다. 여인들은 궁전에서 또 다른 검사관들에 의해 2차 심사를 받는다. 최종적으로 보통 30~40명의 여인이 대칸을 위해 선발된다. 그러나 대칸 앞에 나서기 전에 또 한 번의 심사를 거친다. 선발된 소수의 여인들은 며칠간 특정 귀족 부인의 관리를 받게 되는데, 그들이 밤에 여인들과 함께 밤을 보내면서 미처 발견되지 않았던 결점은 없는지, 코는 골지 않는지, 숨결은 부드러운지, 불쾌한 체취가 나지 않는지 등을 확인한다.
이 최종 시험을 통과한 여인들은 5명씩 한 조로 나뉘어, 사흘 밤낮으로 대칸의 개인 숙소에서 시중을 들며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은 행하게 된다. 짐작하겠지만 쿠빌라이는 여인들과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각 조가 순서대로 돌아가고 난 뒤에는 다시 첫 번째 조의 차례가 된다. 침실 시중을 들지 않는 조도 대칸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즉 음식이나 음료를 대령할 의무를 지닌다. 그는 이 나긋나긋한 젊은 여인들에게서 일거수일투족을 다 시중 받는다.

[205] 도시에는 특별한 법령이 적용된다. 시신은 절대 성 안에 묻을 수 없으며, 우상 숭배자가 죽으면 그의 시신은 전통적인 방식대로 화장을 하기 위해 교외 바깥으로 옮겨진다. 공개 처형도 도시와 한참 떨어진 곳에서 행해진다. 창녀들은 교외에서만 일을 할 수 있다. 물론 몰래 도시로 들어가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앞서 말했듯이 이곳의 창녀는 2만 5천명이나 된다. 상인의 수가 엄청나게 많고 늘 사람이 바뀌기는 하지만 솔직히 수요가 공급을 초과할 것 같지는 않다.

[206] 돈을 위조하는 행위는 사형으로 다스려진다. 대량으로 제조된 이 지폐는 모든 제국에 유통되며 누구도 감히 그를 어기지 못한다. 사실 그 돈으로 진주, 보석, 금은 등 당시에 구할 수 있는 모든 상품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혀 불편함 없이 사용한다.

[207] 나는 쿠빌라이가 이러한 통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 효율적인 경제 운용을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212] 천지를 떨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쿠빌라이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한없는 자비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매년 그는 폭풍이나 폭우, 메뚜기 떼의 습격, 해충이나 전염병으로 농작물의 피해를 본 지역에 감독관을 파견한다. 그는 이런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통상적인 공물을 요구하지 않을뿐더러, 자기의 곡식 창고를 털어 이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새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충분한 곡물을 지급한다.
그는 풍년이 들었을 때 곡식 공물을 많이 받아 여러 지역에 마련한 곡식 창고에 보관한다. 이 곡식 창고들은 천재지변이 들 때를 대비해서 항상 가득 채워둔다. 궁핍한 이들에게 곡식을 팔 때는 원래 가격에 네 배 분량을 내 준다. 이와 비슷하게, 가축이 떼죽음을 당하면 십일세의 징수를 하지 않는 방법으로 백성들을 보살핀다. 그의 관심을 자기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도록 돕는 데 모두 쏠려 있다.

[228] 이곳의 우상 숭배자들에게는 희한한 관습이 있다. 남자들은 처녀인 여자와 결혼하기를 꺼린다. 많은 남자를 접하지 않은 여자는 매력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종교적 믿음이다. 따라서 낯선 땅에서 온 상인들이 이곳에 도착하여 유숙하기 위하여 천막을 치면, 해질녘에 혼인할 나이가 찬 딸은 둔 어머니들이 찾아와서 그들이 머무는 동안 자기 딸을 당신들의 뜻대로 해달라고 간청한다. 당연히 제일 예쁜 아가씨가 선택을 받고 나머지는 아주 실망하거나 화를 내며 집으로 돌아간다. 선택된 여성들은 상인들이 다시 길을 떠날 때까지 그들과 쾌락의 시간을 보낸다.

[255] 한 번도 전쟁이라곤 해 본 적이 없던 왕은 여러분이 짐작하는대로 행동했다. 그는 준비된 함대에 보물과 값나가는 물건을 싣고 도망치면서, 왕후에게 마지막 한 사람까지 도시에 남아 그곳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남겼다. 그는 왕후가 여자이기 때문에 도시가 적에게 넘어가도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고, 자신은 바다로 나아가 철저히 요새화된 섬에서 죽을 때까지 머무를 생각이었다.

[271] 킨사이(지금의 항저우)에 대한 마르코의 설명
유독 거칠고 순했던 킨사이의 왕들은 아마도 이곳 백성들의 성격과 태도를 대변하는 것 같다. 그들은 평화적이고 조용하며, 무기를 소지하지도 집에 두지도 않는다. 도시 전체에 소란한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으며, 사람들은 작업장에서도 아주 침착하고 성실한 분위기에서 일을 한다. 그들은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아주 친절하게 대하며, 이웃사촌들과는 모두 한 가족처럼 생활한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를 조금도 의심하거나 질투하지 않으며, 아내에게 매우 정중하게 대한다. 아내에게 점잖지 못한 언사를 한 남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심하게 빈축을 산다. 이 도시를 방문하는 무역상들은 그들 집에 자유롭게 초대받아 매우 따뜻하게 대접받고 사업상 조언도 듣는다. 그러니 이곳 사람들이 쿠빌라이의 군대가 자기네 나라를 주둔하고 있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분개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의 왕과 지배자들이 이들 때문에 폐위되었기 때문이다.

[294] 그(마르코)는 또한 누가 자기의 황당한 이야기를 믿어 줄까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의 경험을 글로 옮기는 데 거의 3년이란 시간이 필요했고, 그가 감옥에 갇혀 달리 할 일이 없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일을 한 것으로 보아 말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듯이 이런 두려움들은 사실로 밝혀졌다. 그는 살아생전에 허풍선이 거질말쟁이라는 뜻의 ‘마르코 밀리오네’라는 별명을 얻었고, 임종 시에도 ‘나는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채 말하지 못했다’고 주장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297] 그(마르코)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섬과 육지에 대한 설명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대부분이 기행 작가들과는 달리 독자들에게 자신의 보고서가 풍문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세심하게 알리고 있다.

[300] 마르코 폴로가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썼다고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책이 이 해안에 대해 거의, 혹은 전혀 모르는 서구의 탐험가와 무역상, 선원들에게 읽힐 것으로 생각하고 썼기 때문이다. 우리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매우 상세한 주석이 달린 마르코의 책을 항해 내내 가지고 다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르코는 항해에 도움이 될 정도로 상세하게 글을 썼다. 또한 무역풍과 계절풍, 여름과 겨울에 인도와 걸프 사이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부는 바람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기술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의 책은 이 지극히 유용한 자연 현상에 대해 기술한 첫 번째 서양의 책이다. 이것이 기록 시대의 개막 이래 아프리카와 인도 사이의 교역을 증진시켰다.

[301] 내 견해로는 제3편이 전체 원고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며, 그 시작은 당시 선박에 대한 묘사, 자바로의 최초 육로 여행, 지구를 반 바퀴 돌고 온 믿을 수 없는 여행 등의 에피소드로 아주 적절했다.

[314] 나는 1285년에 이 왕국에 머물고 있었는데, 당시 그곳의 특이한 관습 몇 가지를 목도할 수 있었다. 우선 이 나라의 젊은 여자들은 왕을 알현하지 않고서는 결혼할 수가 없다.

[334] 또한 이들은 각자 매일 한 시간씩을 불길한 시간으로 정해 놓는데, 이를 코이악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이 시간이 되면 나쁜 일이 생길 거라 믿어 물건을 사지 않고 어떤 사업상 업무도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길한 시간이 언제인지 매년 책에 기록해 둔다.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난 날짜는 물론 시간까지 꼼꼼하게 기록한다. 점성학은 그들의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것 같다.

[367] 사라센은 기독교도들을 너무나 싫어해, 당시 베네치아인의 손에 있던 아크레 시를 술탄이 처음으로 포위하여 정복했을 때, 아덴 마을에서 술탄에게 3만 마리의 말과 4만 마리의 낙타를 제공했다고 한다. 술탄은 또한 남동쪽으로 72킬로미터 떨어진 에시에르 시도 통치했다.

[388] 대서사시에 어울리지 않은 허무한 끝맺음
전투가 시작되자 곧 노가이의 군인들이 숫자는 15만 밖에 되지 않으나 톡타이 군인들보다 더 노련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톡타이의 군대는 6만 명이나 전사하는 참상을 겪고 패주했다. 톡타이와 톨로부가의 두 아들은 매우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도망치고 말았다.

■ 『동방견문록』을 읽고 & 내가 저자라면

한 권의 여행서가 중세의 유럽을 충격과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베네치아 출신의 청년 마르코 폴로가 17년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난 후 펴냈던 『밀리오네 Il Milione』가 그 책이다. Il Milione는 ‘백만 가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마르코가 쓴 책의 내용이 당시의 유럽인들에게는 터무니 없는 거짓말로 들렸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이 책은 훗날,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온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이 책에 묘사한 그의 구체적인 서술의 대부분이 사실로 밝혀졌다. 마르코 폴로가 실제로 겪은 경험보다 더욱 멋져 보이도록 루스티첼로가 몇 가지 이야기를 더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많은 역사가들은 마르코의 여행 이야기를 대부분 실제로 일었던 사실로 보고 있다.

『동방견문록』은 위대한 탐험가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당대의 사람들이 그를 허황된 거짓말쟁이로 보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이 700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여전히 읽혀지고 있는 것이 놀랍다. 루스티첼로가 썼던 원본은 없어진지 오래다. 수많은 판본 중에 대표적인 것만도 138가지다. 그 중에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는 판본도 5가지다. 이 책을 옮겨쓰던 이들 중에 자기만의 합당한 이유 때문에 이야기를 더하거나 수정했을 것이다. 이렇게 『동방견문록』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새롭게 쓰여지고 더욱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읽혀져 왔다. 시간이 흘러, 미지의 세계였던 동방 세계가 조금씩 유럽에 알려지면서 마르코의 이야기의 진정성은 조금씩 굳건해져 갔다.

『동방견문록』의 내용은 놀라운 장면들로 가득하다. 마르코 가족의 여행은 목숨이 위험할 만한 여행이었다. 질병과 전쟁, 그리고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감 등은 늘 그들의 여행을 위협했다. 하지만, 마르코 가족의 여행은 그 위험의 한 가운데를 통과해 나갔다. 쿠빌라이 칸의 초대를 받아 마르코 가족을 따랐던 두 명의 신학자가 여행 도중 전쟁의 모습을 두려움을 느껴 다시 유럽으로 돌아갔던 모습을 보더라도 이들의 여행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가 있다. 『동방견문록』의 가장 놀라운 것은 온갖 위험을 견뎌낸 여행기라는 점이다. 마르코였기에 가능한 여행이었고, 마르코였기에 가능한 기록이었다. 마르코는 호기심이 많았고, 쿠빌라이 칸이 낯선 지방의 진기한 소식을 듣는 것을 좋아함을 알고 마르코는 여행할 때에 메모를 많이 하곤 했기 때문이다.

『동방견문록』의 또 다른 놀라운 점은 서술이 아주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책 전체를 통하여 여행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등장하는데, 그 지방의 풍경과 관습 뿐만 아니라 군대와 제국이 통치되는 방법, 가옥의 모습 등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쿠빌라이 칸의 궁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묘사도 세밀하다. 이런 묘사는 대부분이 사실과 일치한다는 점이 밝혀졌으니 마르코의 어떤 특별한 점이 『동방견문록』의 탄생에 기여했음도 분명해 보인다.

불행하게도 나는 이 책을 꽤 정성스럽게 읽었으나 그다지 흥미롭게 읽지 못했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동방의 여러 도시에 대한 설명은 조금은 지루했다. 역자가 가장 재미있다던 제3편(귀향)도 앞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간혹 중세 동방의 나라가 지녔던 독특한 관습 등은 이채롭기는 했으나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수많은 여행 장소에 대한 기록을 읽으며 독서의 즐거움은 느끼지 못했다. 마르코 폴로의 탐험은 400페이지의 분량으로 압축하기에는 방대한 지역을 다녀온 여행이다. 마르코가 느꼈던 감상이 많지 않고, 주로 그가 보았던 사실적인 설명이 주된 내용인데, 이것이 나에게는 흥미를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정보야 다른 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동방견문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새클턴의 모험기에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동방견문록』에는 마르코가 동방에서 쿠빌라이 칸과 어떤 정치적, 인간적 관계를 맺었는지 등에 대한 서술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내용이 그가 여행한 장소에 대한 기록이다. 참으로 많은 곳을 여행하였던 마르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지의 세계를 향한 그의 탐험 정신을 얻은 것이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유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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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민
2007.11.19 18:06:39 *.200.97.235
동방견문록을 작년에 연구활동하면서 과제로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시 떠오르네요. 팍스 몽골리아의 세계가 한 유럽인에 눈에 비친 모습에서 그 웅장함과 규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정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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