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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26일 08시 37분 등록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아름다움을 비추는 두 거울을 찾아서) - 장파(푸른 숲)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중국 남서부 지방은 광활했다. 버스로 몇 시간을 달려도 그저 비슷한 풍경만 펼쳐질 뿐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공자. 맹자의 사상적 잔재가 남아 있는 그 중국이 아니라 우리보다 한수 아래인 싸구려가 판치는, 단돈 천원이면 무엇이든 한 가지는 살 수 있는 그러한 나라였다. 그 때가 1990년대 말이었으니 지금부터 약 10년 전 쯤 되는 셈이다. 그 후로도 나는 여행이라는 명목으로 네 다섯 차례 더 중국을 방문하였고 그 때마다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나의 시각이 바뀌었다. 첫 번째 방문이 싸구려가 판치는 중국이었다면 두 번째 방문의 중국은 규모면에서 대국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 이어진 몇 번의 중국방문의 결론은 모호함이었다. 중국이라는 거대 나라를 알 수가 없었다. 범접할 수 없는 위엄에 주눅이 들어 귀국길에 오르면 공항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내 나라가 견고하기 이를데 없어보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행길에서는 중국의 모순된 양면성을 읽는다. 단정하건데 여행이 계속되면 될수록 중국에 대한 나의 시각은 모호함을 더해 갈 것이다.
그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지만 객관적인 시각이라는 전제로
첫 번째는 영토의 광활함에 있다. 즉 넓은 국토에 수많은 종족들이 살아가는 거대국가의 특징을 몇 번의 방문관차로 특징짓기 어렵다는 것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인 셈이다.
두 번째는 우리들의 편견이 먼저 작용한다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사전지식이 나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우리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얼마만큼 정확히 알고 있나 하는 의구심 같은 것이 작용한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서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을 읽고 소화하기에는 입안에서의 씹기 과정부터 힘들었다. 물론 눈 딱 감고 우물거리며 씹다가 적당한시기에 꿀꺽 넘기면 그만이겠지만 몸에 좋을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주 동안 다 읽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꿀꺽 삼키기에는 벅차다.
이러한 나의 고민을 미리 읽은 역자의 친절로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음은 역자와 저자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다.
1. 여기서 말하는 西는 고대 희랍과 로마 문화라는 기초위에 헤브라이에서 기원한 기독교 문화를 융합하여 성장해 온 서구문화를 지칭한다.
2.중국 문화는 현대 이전 것으로 한정짓는다.
3.본서에서는 동서양의 美에 대한 단순한 비교다.
(그러나, 저자의 말을 빌리면, 단순비교일지라도 그 뒤에 숨어있는 그림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구 문화는 전 지구화된 오늘날의 세계에 무엇을 제공해 왔고 무엇을 제공해 줄 것인가. 중국 문화는 오늘날의 세계에 무엇을 제공해 왔고 무엇을 제공해 줄 수 있는가?)
4. 사상을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며 인류의 사상적 도구를 이해함으로 필요한 시기에 그 도구를 가져다 사용한데 그 목적을 둔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동서양의 동양은 중국 중심이다.

-- 저자에 관하여--
(저자에 대한 많은 정보는 얻을 수 없었기에 다음 인터넷에서 얻은 짤막한 것으로 대신함)

1954년 중국 충칭(重慶)시에서 태어났다. 쓰촨(四川)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베이징(北京)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그곳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다. 1984년 런민(人民)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15년간을 재직하며 '중국미학사' '중서미학연구' 등을 강의하고 있다.
'미학연구소' 소장과 '전국심미문화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중국 미학계를 이끌고 있는 장파의 주요 저서로는 「중서미학과 비극의식 中西美學與悲劇意識」「20세기 서구미학사 20世紀西方美學史」가 있다. 또 1998년 중국도서상을 수상한 「중국예술학 中國藝術學」과 「중국전통예술의변천 中國傳統藝術學」「천년화하예술의 개관 天年華夏藝術一瞥」을 비롯해 9편의 공동 저서와 80여편의 논문이 있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발문-아름다움을 비추는 두 개의 거울

[542]이 책의 도입부가 ‘비교 미학’이라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하는 소이는 자명하다. 이름하여 ‘비교’란, 마오쩌둥 의 서거 이후, 이른바 ‘신시기’로 불리는 기간 내내 중국을 횡행한 바 있는 개혁과 개방, 특히 개방이라는 슬로건과 맞물린 것이고, 그 비교의 대상은 다름아닌 서구를 지칭하는 것이다.

[542]중국 문화를 둘러싼 세 가지 세력은 첫째가 바로 수 천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의 전통 문화이고 둘째가 마찬가지로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먼저 근대의 자리를 선점한 서구 문화이며, 마지막이 마르크스, 레닌 그리고 스탈린의 사상이 융합된 소련의 문화다.

[544]서구근대화에 대한 일방적 따라잡기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다시 중국의 전통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문제시 되었으며,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근대에 대한 의구심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빈틈으로부터 중국의 고전적 사유에 대한 재발견의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타진된 결과물이 바로 장파 교수의 { 중서 미학과 문화정신}으로 보면 크게 빗나간 진단은 아닌 셈이다.

[544]동방과 서방의 ‘유’와 ‘무’를 둘러싼 대접 방식의 차이가 문명의 발상 지점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를 앞세우고‘무’를 후경으로 배치시킴으로써 ‘무’를 한낱‘유’의 보조 개념으로 떨어뜨린 일, 혹은 ‘유’와‘무’ 를 이분법이라는 장벽으로 갈라놓음으로써 양자간의 소통의 길을 막는 것이 서방이었음에 비해, 우리네 동방에서는 역으로 ‘무’를 앞세우고 ‘유’를 그로부터 말미암는 것으로 자리 잡게 하는 동시에 ‘무’와 ‘유’ 사이를 가로막아 양자를 고립시키는 길을 택하지 않고 언제나 소통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먹고 되먹는,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상반상생’의 길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파 교수의 표현법을 빌리자면 ‘문화정신의 차이가 가로 놓이게 되는 것이다.

[545]변증법과 음양론의 차이인 것이다. 흔히 동서양을 대비하려 들 경우 이보다 더 극명한 대비가 따로 없을 듯 하거나와, 변증법과 음양의 이치야말로 한편에서는 발전과 진보라는 선물을 안겨준 반면, 다른 한편에는 정체와 순환이라는 굴레를 씌운 것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기 때문이다.

[546]‘돌아가는 것이 진보’ 라는 발언은 그런 의미에서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보조를 알리는 새로운 후천적 개벽의 닭소리는 아니겠는가?

[546]이른바 총체성이란 장파교수도 언급하고 있듯이 부분의 합으로서 전체를 넘어서는 개념임을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1+2+3+4=10이라는 등식이 부분들의 단순 집합으로서 전체라는 수학 상의 양적 집적을 말한다면, 총체성은 부분이 모였을 때 그 부분의 합은 그렇게 모임으로써 전체를 대표하는 새로운 질을 획득한다는 개념일 터다.

[547]아울러 이 대목에서 개입되어야 할 것이 ‘공능’이라는 개념이다. 비슷한 우리말로 얼핏 기능이라는 말을 떠 올리면 근접한 것이지만, 정체성과 총체성이 다르듯이 공능과 기능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곧 어떠한 메커니즘이나 시스템 혹은 이론적인 페러다임의 구체적인 가동이 이 기능성을 통해 입증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가동이나 작동의 장 전체를 ‘신’과 ‘기’가 감싸 안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것이다.

[549]이 글을 옮겨 펴낸 까닭은 중국문학도보다 실은 서구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 이울러 국문학에서 고전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감히 권하고자 하는데 있음을 굳이 밝혀 두어야겠다.
해제
[9]사이버 공간은 이제 오감 통합이라는 거창한 사업을 완성했다. 그런데도 그것은 옛날 암묵적 기술에 의지한 수공업적인 고급예술에서 빛나던 예감. 영감. 초월성과 아우라(Aura)에 결코 연속시키지 못하며 관조나 깨달음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애당초 없다. 도리어 마조-사디스트적인 정신분열과 착란, 각종 순환기 장애 등의 질병을 몰고 올 뿐이다. 미학의 기초는 감각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각을 통한 미적 체험이 참으로 삶과 세계변혁에로 향한 교육학적 효과를 얻으려면 이같이 거의 완성에 가까운 오감 통합의 세련된 기계 기술적인 과학 주준을 깊은 깨달음이나 오묘한 아우라의 체험에 연속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11]작품은 계몽자도 오락의 대상도 이입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소통자로서 감상 과정에 들어오는 것이다. 작품은 감상자를 통해서 스스로를 초월하는 것이다. 감상 과정은 감상자와 작품이 양방향으로 초월하는 과정이다.

[14]오늘 우리는 동서양의 미학적 과정에서 전 인류가 요구하고 있는바 물질- 정신 간, 주체-객체 간, 창조-향수자간의 미학적 소통과 창조, 그리고 그것을 또 한 번 넘어서는 진정한 제3원의 성스러운 생성, 숨겨진 질서의 놀라운 출현에 관한 미학 담론, 감각적 성성(聖性)의 새로운 미적 체험을 되살려야 되는 것이다.

[30]중국 문화는 아편전쟁 후 지난한 현대화 과정 속에서 줄곧 세 가지 문화 세력의 여향을 받았다. k나는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전통 문화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먼저 현대화로 나아간 서구 문화이고 마지막 하나는 마르크스, 레닌 그리고 스탈린의 사상이 융합된 소련 문화이다. 미학역시 마찬가지다.

[31] 본서에서는 문화 정신의 차원에서 중서 미학의 특색을 연구할 것이다. 문화 정신은 하나의 문화에 담긴 모든 시대, 모든 사상의 총화로서, 그 문화의 특징을 가장 분명하게 반영한다.

1. 문화 정신

[35]문화 정신을 논하는 두 가지 근거
첫째 :보편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문화 정신이 제기될 수 있도록 해 주는 문화성을 띤 사실적 기초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 특수성을 지닌다는 것인데, 이는 미학과 연관된다.

[37]형이 상학에 대한 이성적 이해가 철학이고(그것은 세계의 통일성을 연구하는데, 세계의 궁극적 본질은 이념 또는 물질로 귀결된다. ) 초이성적 이해가 신학이다.(하느님이 세계의 통일성을 결정한다.) 철학과 신학은 상호 보완적으로 서구의 우주관을 구성하였다. 중국에서는 유가와 도가에서 모두 경전으로 받드는 ‘주역’에서 “형이하의 것‘을 기(구체적 사물)라 하고, 형이 상의 것을 도라 한다. 도는 곧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각기 세분하여 보면 유. 불. 도가 모두 가가자의 도를 가지고 있지만, 이를 종합해서 살펴보면 이 삼각자가 상호 보완하면서 중국 문화의 우주관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9]그러나 중서의 우주관을 비교할 때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은 ‘부’는 개별적인 개념이 아니라, 도, 무, 이, r가 일체화도니 중국의 정체적 우주관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40]서구 문화 정신은 Being과 그것의 풍부한 전개를 통해 더 자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햄릿이 깊은 고민에 빠져 내뱉은 명언과도 같다. “ 유냐, 그것이 관건적인 문제이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

[41]서구의 우주론은 Being에서 Substance로 발전하면서 그 특징이 확연해 진다. 즉 우주는 실체의 세계라는 것이다.

[47]중국의 유무상생론에서 무는 서구인이 이해하듯 실체가 차지하는 위치와 우동 장소로서의 허공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성하고 변화하고 창조하는 작용으로 충만한 기를 뜻한다. 중국문화에서 무로 이해되는 광대 무벼난 우주 공간은 기로 가득 차 있다. 기는 떠돌아 흐르다가 만물을 파생시킨다.

[48]항상 무에서 오는 그 오묘함을 보려하고, 항상 유에서 그 돌아감을 보려 한다. 이 두으 s같은 근원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이를 하나로 이름할 때 현이라 한다. 현하고 또 현하니 모든 미묘함의 문이다.
[49]기의 우주에서 무의 근본이며 항상적인 기이다. “무는 만물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 임무로, 어디로 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한곳에 머물지도 않는다. 음양은 이것에 의지하여 변화·생성하고, 만물은 이것에 의지하여 꼴을 이룬다.

[51]하나는 실체의 우주이고, 다른 하나는 기의 우주이다. 하나는 실체와 허공의 대립이고, 다른 하나는 허실의 상생이다. 이것이 중서 문화의 우주 모델에 있어 각 방면의 차이를 양산하는 근본적인 차이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상이한 방식이다. 서구인들은 무엇을 보든지 간에 실체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고, 중국인들은 기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건축물에서 서구인이 중시한 것은 기둥 양식과 벽면 등 실체적 요소이거, 중국인이 중시한 것은 허공인 문과 창이다. 인체를 묘사할 때 서구인이 중시한 것은 비례이고, 중국인이 중시하는 것은 정신의전달이다. 우주를 대할 때 서구인이 중시한 것은 이념이 진화하는 논리적 구조이고, 중국인이 중시한 것은 “그 구체적인 행위는 모르지만 그 공능은 알 수 있는 ”, 기가 만물로 변화하는 공능의 운행이다.

[59]애초에 형식을 운용하려던 서구인의 바람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진리의 추구, 즉 세계를 진실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는 완전의 추구, 즉 세계의 총체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형식은 서구인의 첫 번째 소망을 만족시켜 주었다. 하지만 두 번째 소망은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다. 후현대에 이르러 형식 원칙은 총체성 상실에 따른 당혹감을 가져다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형식 원칙은 진정한 의미와 세계 속의 인간의 진정한 위치를 인식하게 해 주었다.

[66]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시대에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인이 공자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만세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형식 원칙으로 말미암아 서구 문화의 형식이 부단히 변화 · 발전했다면, 정체 공능으로 말미암아 중국 문화는 시대적 수준을 넘어서 앞서 나갈 수 있었고 또한 이 때문에 문화적 정체를 겪어야했다.

[67]중국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철인이나 지자가 예술이나 기술 혹은 우주에서 어떤 진리를 까달았다고 하자. 그 진리에 대해서 중국인은 “입으로는 말 할 수 없고, 그 마음속에 비결이 들어 있다”고 하거나[장자], 혹은 “그것은 세속인에게 설명하기 어렵다”고 한다. 요컨대, 마음으로 알수는 있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정신으로 깨달을 수는 있지만 분명한 형체로 나타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구에서는 어떤 학자가 진리를 발견했다고 선언하면 사람들은 그에게 연필을 건네 주며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한다. 증명하지 못하면 허튼소리임이 입증된다. 아니면 즉각 그의 말에 따라 실험을 해 보아서 그것이 옳은지 틀린지 그 진상이 온 세상에 밝혀지게 된다. 이 두 가지 이야기가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중국과 서구의 문화 형식과 총체 기능에 수반되는 명료함과 모호함의 차이이다.

[68]서구의 문화 이론은 그 출발점이었던 탈레스에서부터 명료함을 특징으로 했다. 우주 만물의 본원은 물이다. 얼마나 확정적이고 명료한가! 그런데 확정성과 명료성이 발전하려면 반드시 이전의 견해를 부정해야 한다. ‘부정→전진’, 이것이 바로 서구 문화 발전의 기본적 특징이다.

[69]명료함은 세계를 인식하는 인류의 인식 자체에서 나온 것이며,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인류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서구인은 인식 과정과 인식 법칙을 총괄하는 과정에서, 실체성과 형식 원칙의 은밀한 규제하에, 도구의 명료성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70]물질적 도구, 즉 과학 기술은 근대에 특히 실험적 수단을 통하여 완비되었고, 정신적 도구, 즉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체계화되었다.

[75]서구 문화가 줄곧 추구해 온 객관 세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그들을 순수한 객관 세계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의 문화적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창조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76]충만함을 일러 아름답다 하고, 충만하면서 빛을 발하는 것을 일러 크다.

[77]모호한 중국문화도 확정성을 추구한다. 기는 만물로 화하여 끊임없이 생성한다.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되는 것을 일러 도라고 한다. 오행은 상생상극한다 등은 모두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하지만 이런 확정성은 정체 공능의 확정성으로 본질적으로 모호한 것이다.
모호성은 공식과 정의로서는 표현해 낼 수 없고, 형식화하거나 인간이 검증하 f수 없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중국의 정체 공능은 우주 전체를 파악하고자 했고, 이는 농업사회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실천 능력을 넘어 서는 것이다. 반드시 달성해야 하지만 인간의 실제 능력으로는 달성할 수밖에 없었다.

[80]통발은 물고기를 잡기위한 것이다. 물고기를 잡고나면 통발은 필요가 없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자는 것이다. 토끼를 잡고나면 올가미는 필요 없다. 말이라는 것도 뜻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뜻을 얻으려면 말은 필요 없게 된다.

[81]우주의 차원에서 봤을 때, 도는 영원불변이다. 동중서는 “하늘이 변치 않으니 도 역시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차원에서 봤을 때, 심성 역시 영원불변하는 것이다. 육산상이 말한바 “수천 수백세 전에도 그리고 수천 수백세 후에도, 성인이 나타난다면 그 마음과 그 이치는 항상 같다.

[84]기, 음양 오행의 우주는 순수 자연적 우주가 아니라 문화적 우주이다. 그런데 중국인은 표층을 초월했기 때문에, 스스로가 우주의 본성과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우주는 대단히 안정적이며, 변화 시킬 필요도 없고 변화 시킬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적 우주로 받아졌기 때문이다.

3. 문화적 이상의 표현 : 화해(和諧)

[119]화해란 최선의 생존 상태와 최선의 발전 상태를 뜻하며,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서간의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그 화해의 내용과 형식, 발전 경로는 상이할 수밖에 없다. 중국 문화에서 화의 관념은 원시적 제의에서 발생하였다.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야, 명하노니 음악을 관장하여 자제들을 가르치되, 곧으면서 온화하고 관대하면서 위엄 있어야 하느니라. 강직하되 포악하지 말고 대범하되 거만하지 말라. 시는 뜻을 말로 표현한 것이고 노래는 말을 읊조린 것이다. 소리는 읊조림에 의지하고 음률은 소리와 화하는 것이니, 여덟 가지 소리가 화해를 이루어 질서를 잃지 않으면, 귀신과 사람이 이로써 화합하리라.

[120]그렇다면 음악이 왜 이처럼 중요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을까? 음악은 가장 신비롭고 아주 짧은 시간에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고 마음을 바꿀 수 있다. 따라서 박자를 중심으로 하는 원시 음악은 아주 교묘하게 사람들의 행동을 조정하며, 신의 힘은 음악을 통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아주 일찍부터 농경사회로 진입한 고대 중국인은 자연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체험함으로써 음악과 기후의 상응관계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121]감성적 측면에서 볼 때, 음악은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바람을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에 몸으로는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바람도 느낄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다. 바람에 닿는 사물은 흔들리기 때문이다. 양자의 공통점으로 말미암아 음악은 기후로 대표되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매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갖게 될 것이다.

[121]바람은 음악으로 예측할 수 있고, 음악은 바람에 영향을 주어 바람을 조절하고 때맞춰 비를 내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상고시대의 사람들에게 음악은 기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우주와 만물전체의 화해와도 관련된 문제였다.

[123]고대인이 음악을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우주의 화해라는 최고의 이상이었다. 고대인이 음악을 통해서 추구한 화해는 인간과 자연의 화해만이 아닌 사회, 정치의 화해, 우주전체의 화해였다. 고대인들이 성인이 음악을 지었던 것을 거듭 강조했던 것도 정치와 관련된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정치는 농업 생산에 의해 담보된 것이지만, 음악은 정치성을 띤 농업 생산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각 계층의 화해, 정치 윤리적 문제 및 사회 윤리의 화해, 인간과 자연의 화해 등과 긴밀히 연계되어 중국문화에서 전우주의 화해를 구성하였다. 재차 강조하면 음악의 화해에서 우주의 화해를 발견했기 때문에 바람이 중국문화의 근본 개념인 기(氣) 의 전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러한 기의 특징이 중국적 화해관의 특징과 발전 방향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125]화해란 국을 끓이는 일과 같다. 국을 끓이기 위해선 물과 불을 준비하고, 육장을 마련하고, 음식의간을 맞추고 생선과 고기를 삶고 장작으로 불을 때야 하는데, 요리사가 그 국을 화해시키고 고르게 하여 맛을 낸다. 군자는 그것을 먹고 마음을 가지런히 한다.
[126]음악의 화해와 자연의 기가 상호 연관되어 우주적 화해의 기초를 이룬다면, 음식의 화해와 인체의 기의 연관관계는 사회적 화해의 기초가 된다고 하겠다. 요리할 때 솥은 중국 상고시대 국가의 최고 상징이었다.

-서구시대 화해의 기원-

[127]서구의 화해도 음악에서 시작되었다. 수는 음악의 화해를 만들고 음악의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수의 화해는 음악미의 본질이자 모든 예술의 본질이었다. 건축미는 수의 비례에 있으며, 조각미도 수의 비례에 있었다. 중국문화에서는 음악이 바람과 기를 통해 우주적 화해에 이르렀다면, 그리스문화에서는 수를 통해 우주적 화해에 이르렀다. 기가 중국적 우주의 근본인 것처럼, 피타고라스는 수가 세계만물의 본원이라고 생각 했다.

[128]중서 문화에서 화해관념의 기원은 모두 음악과 관련되지만, 서구에서는 음악의 과학적 성격을 강조했고, 중국에서는 음악의 정치적 공능을 중시했다. 서구의 화해는 명료한 수로 설명되며, 우주의 보편성은 수를 통해 얻어진다. 중국의 화해는 모호한 바람과 기로 설명되어지며 바람과 기를 통해 우주적 성질로 변화하였다.

[128]중국문화의 화해의 관념의 특징을 정리하면 1)모든 존재를 포용하는 화해관이다. 2)시간을 공간화한 화해관이다.3)대립하지만 서로 겨루지 않는 화해관이다. 우주의 정체적 화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천차만별의 사물을 결합해야 한다. 고대인의 말을 빌리면 “화해가 충만해야 만물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131]중국문화에서 우주는 인간이 들어 있는 우주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상화에 근거하여 화해로운 우주모델을 창조하여, 그것을 객관적인 도라고 여겼다. 그리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런 우주의 법칙에 종속되며, 인간 사회도 우주의 화해 운동을 준수하고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고 여겼다.

133]그러나 사회 제도적의 등급적 화해의 절대 진리성은 우주의 정체적 화해 속에서 그 허위성을 쉽게 드러낸다. 그것은 주기적인 왕조의 붕괴나 사대부들의 실의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사대부들은 난세나 불길한 시운으로 예의 허위성이 남김없이 드러날 때조차도 우주의 정체적 화해를 의심하지 않았으며, 천일 합일이라는 근본 구조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사회제도 속에서 사회의 부분만을 의심하거나, 사회제도를 매개로 하여 천일 합일이 추구되어야 하는가만을 의심하였다.

[136]중국의정체적 화해에서 중요한 원칙은 대립적인 요소를 조합하여 대립물이 충돌하지 않고, 상반상성 하도록 하는 것이다. 중국 문화에서 정체적 화해의 두 가지 기본 특징(시간과 역사의 공간화, 그리고 대립 요소의 화해)이 집중적으로 구현된 것은 음양의 화해와 오행의 화해라는 이론적 도식이다. (주역)의 팔괘와 64괘에는 많은 시간적 직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시간적 직선은 순환적 원으로 공간화 된다.

[140]서구의 화해 사상의 관건은 대립적 요소들을 엌덯게 처리하는냐에 달려 있다. 이는 중국이나 서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음악연구를 통해 “음악은 대립적 요소간의 화해로운 통일이며, 잡다한 것을 통일시키고 불협화음을 협화음으로 만드는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피타고라스는 회화는 화해는 흰색 검은색, 노란색, 빨간색, 등의 상이한 배합에 있고, 음악의 화해는 상이한 음조의 고음, 저음, 장음, 단음 등의 배합에 달려 있으며, 이와 같은 예술의 화해는 자연모방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3. 내가 저자라면

개인적인 생각으로 책을 읽기 전 활동이 때로는 중요하지만 오히려 방해가 될 때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읽기 전 활동이란 저자에 대한 탐색 이전에 서문, 혹은 역자 후기등을 먼저 읽어보는 활동이다.

책의 읽기 전 활동은 해제를 읽는 것, 그리고 글의 차례를 읽어내는 것 정도로 했다. 나머지는 내가 책을 읽어가면서 저자에게 묻는 것으로 해결할 셈이었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면 이 책을 번역한 학도들에 있었다. 그들의 번역 실력을 떠나서 그들의 나이나 경륜을 먼저 의식한 셈이다. 美學이라는 거대한 사상적 구조를 그들은 과연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나, 나아가서 단아 하나하나가 가지는 농익은 의미를 그들이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우려였다. 하기야 본인 또한 미학에 대한 거칠은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는 마당에 무엇을 염려하랴만은 신윤복 교수가 이야기 한 ‘남은 다 볼 수 있다.’라는 즉면에서의 우려다.
개인적인 관심사와 편견은 이 책에 푹 빠져들게 했다. 그러나 끝임 없이 일어나는 의구심은 책장을 넘기는데 발목을 잡았다. 얄팍한 선지식의 괴롭힘이었다. 이는 한 번 잡은 책장을 1시간 넘게 지속할 수 없게 만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1장을 끝내고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다 먹지 않기로 작정한 셈이다. 즉 동서양의 미의 근원이 왜‘음악으로부터 파생되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푼 것에 대 만족을 하고 다음의 것은 너무 알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자기만족이다. 플라톤에서부터 공자에 이르기 까지 ’신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음악이다.‘라는 단순 명제에 대해서 수년 동안 의구심을 품어왔다. 그들의 혹신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근원을 알고 싶었던 게다. 그 해답을 장파교수는 제공했다.


[120]그렇다면 음악이 왜 이처럼 중요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을까? 음악은 가장 신비롭고 아주 짧은 시간에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고 마음을 바꿀 수 있다. 따라서 박자를 중심으로 하는 원시 음악은 아주 교묘하게 사람들의 행동을 조정하며, 신의 힘은 음악을 통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아주 일찍부터 농경사회로 진입한 고대 중국인은 자연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체험함으로써 음악과 기후의 상응관계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121]감성적 측면에서 볼 때, 음악은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바람을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에 몸으로는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바람도 느낄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다. 바람에 닿는 사물은 흔들리기 때문이다. 양자의 공통점으로 말미암아 음악은 기후로 대표되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매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갖게 될 것이다.

위 대목은 동양(엄밀히 말하자면 중국)의 음악적 사유를 명확하게 제공해 준다. 바로 느낌 , 기가 그 원류인 셈이다.
다음은 서양의 사유 부분이다.

[127]서구의 화해도 음악에서 시작되었다. 수는 음악의 화해를 만들고 음악의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수의 화해는 음악미의 본질이자 모든 예술의 본질이었다. 건축미는 수의 비례에 있으며, 조각미도 수의 비례에 있었다. 중국문화에서는 음악이 바람과 기를 통해 우주적 화해에 이르렀다면, 그리스문화에서는 수를 통해 우주적 화해에 이르렀다. 기가 중국적 우주의 근본인 것처럼, 피타고라스는 수가 세계만물의 본원이라고 생각 했다.

동서양의 화해의 원류를 음악에서 찾아내었고 동양에서는 그 도구적 작용으로 음식을 이야기 했지만 나는 ‘신’과의 소통 방법적이 면에서 음악을 다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커다란 수확이다. 비록 나머지 부분은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읽어나가야 하겠지만 커다란 숙제를 해결한 것은 만족할 만 하다. 다음으로는 역자에 대한 이야기다. 책의 중간쯤을 읽어가다가 역자의 발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의 번역의도를 알고자 함도 있었지만 첫째목적은 그가 사용한 공능의 의미를 알고자 함이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우리의 생각에 앞서 독자가 가질 뻔한 궁금증을 미리 짚어 상세히 서술해 놓았다. 덧붙여 내가 발견한 또 하나는 그의 거침없는 말의 ‘뿌림’이었다는 것이다.‘아름다움을 비추는 거울’, 책을 다시 들추게 된 과정의 거침없는 고백, 건축물의 대문에 달린 문패 등의 거친 표현은 살아있는 언어의 발견이다. 글이 가져야 하는 전달효과의 최대화를 과감하게 뿌리친 역자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바로 그 언어의 살아있음이 좋았다. 이양하의 ‘페이트의 산문’에 나타난 글과는 색다른 맛을 준다.
아울러 신자유주의 물결을 등에 업고 개발과 속도의 경주에서 오는 옛 사상의 무너짐에 ‘되돌아 봄’의 기회를 찾아보고자 한다. 중국의 지식인들이 서구 근대문명의 비수를 눈치 채고 재빠르게 치유의 길을 옛 고전에서 찾아내려는 시도를 했듯이 나 또한 나를 둘러싼 외적 ,내적 상황을 고전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중국으로부터 야기되는 힘의 경제 논리라든지, 중국의 신경제주의가 야기시킨 환경문제도 이참에 되돌아 볼 생각이다. 생각은 글로 나타날 것이고 글을 행동적 실천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사실 책을 다 읽지도 못했다.
소화를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읽은 부분만큼은 나를 매료시켰음에 틀림없다. 양의 적음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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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12.01 19:41:34 *.70.72.121
언니는 왜 또 바꿔서 하셨어요?ㅋㅋ 잘하셨네요. 이리 골치 아픈 걸 홀로 읽으시느라 고생했어요. 하도 골치가 아파서 언니는 어땠나하고 들어왔네요. 리뷰가 걱정이예요...ㅠ.ㅠ

많이 다녀오셨군요. 나는 중국에 한 번도 못 가봤는데... 언제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희석이도 간다고 했거든요.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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