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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30일 11시 54분 등록


동방견문록

Divisament dou Monde
마르코 폴로 저, 배진영 편역, 서해문집


1. 저자에 대하여

마르코 폴로의 생애



1324년 1월의 어느 날, 마르코 폴로가 임종을 앞두고 누워 있을 때다. 그의 임종을 보기 위해 온 친구들은 마르코 폴로에게, 이제라도 ‘동방견문록’에서 했던 엄청난 거짓들에 대해 참회하라고 권했다. 친구들조차도 그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마르코 폴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는 일화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아직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백만선생.”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던 프레스터 존의 땅 동방을 다녀왔다는 그는 온갖 신기한 풍습과 거대한 도시, 엄청난 인구, 진기한 보석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럽 밖의 세상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던 13세기의 유럽인들에게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그를 허풍쟁이라고 했으며 더구나 입만 열면 ‘수백만의~’ 운운하는 그에게 ‘백만선생’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동방견문록이 8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공을 초월하는 인류의 고전으로 남아있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동방견문록’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필사되어 유럽 전역에 퍼졌고 ‘성경 다음으로 인기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더 넓은 세계를 욕망했던 많은 사람들은 ‘동방견문록’이 세운 공을 이제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베네치아의 유명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와 삼촌 마페오 폴로 역시 상인으로서 유명세를 떨쳤다. 폴로 형제는 1254년, 즉 마르코 폴로가 태어나기 직전에 동방의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베네치아를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마르코 폴로가 세상에 태어났다.

그가 자라는 동안, 동방으로 떠났던 폴로 형제는 킵차크 칸국과 일칸국 사이에 전쟁이 터져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동쪽으로 가게 되었다. 도중에 이들은 쿠빌라이에게 가는 알라우의 사신을 만나 함께 쿠빌라이칸을 만났다. 그리고 쿠빌라이 칸의 명을 받고, 교황을 만나기 위해 지중해에 위치한 아크레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크레에 도착했을 때 교황의 자리는 비어 있었고,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기를 기다리며 폴로 형제는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 때가 1269년, 열다섯이 된 마르코 폴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났다. 하지만 마르코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폴로 형제는 베네치아에서 2년정도 머무르다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지 않자 구빌라이에게 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동방 여행길에 오를 때 형제는 마르코 폴로도 함께 데리고 갔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낟.



폴로 일행은 아크레에서 성유를 얻어 떠났으나, 라이아스에 있을 때 새로운 교황 그레고리 10세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동방으로 떠났다. 그들은 투르크 지역과 페르시아, 파미르 고원, 카슈미르 지역을 거쳐 쿠빌라이의 수도로 들어갔다. 고비 사막을 지나고부터는 퀼라이가 보낸 호위병들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는 쿠빌라이가 폴로 형제를 각별히 여겼음을 짐작하게 한다. 베네치아에서 쿠빌라이의 여름 수도 샨두까지 들어가는 데 대략 3년의 시간이 걸렸다.

‘동방견문록’의 기록에 따르면 마르코 폴로는 그 곳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네 개의 언어를 익힐 만큼 총명했고, 새로운 환경에도 금방 적응했다. 그는 곧 쿠빌라이의 총애를 얻었다. 그리하여 쿠빌라이는 6개월 이상 걸리는 먼 곳으로 사신을 보낼 때면 마르코 폴로를 자주 보냈다. 마르코는 사신의 임무를 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의 문화와 풍습을 눈여겨 보았다가 돌아와서는 자기가 본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재미있게 전해주었다. 쿠빌라이는 그런 마르코 폴로를 아주 흡족해했다. 마르코 폴로는 3년 동안 얀구이(양저우) 시의 총독으로 파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확한 사료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대략 17년 정도이다. 그 사이에 중국의 북부와 남서부, 남동부 지역을 두루 다녔으며 거의 안 가본 지역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아마 샨두와 킨사이가 아닐까 한다. ‘동방견문록’의 3장과 5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샨두와 킨사이에 대한 그의 소개는 아주 상세하고 정확하며, 그곳에 대한 이야기의 분량도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중국에 머물면서 폴로 일행은 여러 차례 귀국의사를 밝혔지만 쿠빌라이는 그들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쿠빌라이의 영토 일부를 다스리고 있는 아르곤 왕의 왕비가 세상을 떠났고, 아르곤 왕은 죽은 왕비를 대신할 같은 혈통의 여인을 구하ㅣ 위해 쿠빌라이에게 사신을 보냈다. 쿠빌라이는 사신들에게 코카틴이라는 여자를 찾아 주었다. 공주를 얻은 사시난은 육로를 통해 돌아가다가 잦은 정복전쟁으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때 막 인도에서 폴로 일행이 바다를 거쳐 돌아왔다. 이를 본 사신단은 그들과 함게 가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쿠빌라이에게 폴로 일행과 함게 돌아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쿠빌라이는 어쩔수 없이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그들을 위해 거대한 배를 준비해준다.



1291년, 코가틴 공주 일행과 폴로 일행은 무려 열네척의 배를 거느리고 남중국해를 떠나 인도양으로 향했다. 2년여 기간 동안 항해를 마치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아르곤의 왕국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쿠빌라이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폴로 일행은 더 이상 쿠빌라이의 궁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으로 출발했다. 1295년, 드디어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25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척들에게조차 문전박대를 당하자 마르코는 자신이 입고 있던 타타르 복장을 뜯고 귀금속을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들을 환영하였다. 마르코는 그간 보고 들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었지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한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유럽 밖의 세계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던 13세기의 유럽 사람들에게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놀랍다 못해 의심스러운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마흔 남짓한 삶을 살 때까지 타지에서 유랑의 삶을 보냈던 마르코 폴로.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을까. 고향에 돌아와서도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베네치아에 돌아온 지 1년쯤 지나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지중해 해상권을 두고 전쟁이 일어났다. 마르코 폴로는 전쟁에 참전했으나 포로로 잡혀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감옥 안에서 이후 세계 역사를 움직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마르코 폴로와 피사의 작가 루스티겔로가 만난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지난 25년간 자신이 겪었던 모든 신기한 경험들을 쏟아냈고, 루스티겔로는 그것을 받아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299년, 위대한 고전 ‘동방견문록’이 완성되었고 같은 해에 마르코 폴로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1323년 1월 9일에 남긴 그의 유언장에 따르면, 그는 도나타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세 명의 딸을 두었다. 또한 가족과 종교단체에 남긴 유산으로 짐작컨대 그의 생활은 어느 정도 풍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하인인 피에르토를 영원히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고 그에게 베네치아 금화 100리라를 주롸고 유언장에 남기기도 했다. 그는 유언장을 쓴 후 1년쯤 지난 1324년 1월 8일,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르코 폴로의 여정과 기록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의 여행을 바탕으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기행문의 성격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통상적인 의미의 여행기는 아니다. 13세기 후반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느 지방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방위와 거리, 언어, 종교 등을 세세하게 기록하였다. 다시 말해 그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 유럽인들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다.

이 책은 모두 232장으로 나뉘어 있다. 서편에서는 마르코 폴로가 어떠한 연유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으며 어떤 사정으로 돌아와 이 책을 구술하게 되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1편은 대•소아르메니아와 투르코마니아에서 시작하여 이라크와 페르시아 지방을 포함하는 서아시아에 대한 기술이고, 2편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림분지를 경유하는 중앙아시아를 다루고 있다. 3편은 쿠빌라이의 수도인 상도와 대도의 모습과 대카안이 통치하는 모습을 묘사했고, 4편은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체류하면서 보았던 중국의 북부(카타이)와 사천•운남을 거쳐 미얀마에 이르는 지역을 설명하였으며, 5편에서는 남송의 영역, 즉 중국의 동남부에 대해 설명한다. 6편은 폴로 일가가 중국을 떠나 귀환하는 과정에서 보고들은 인도양 각지(대인도•소인도•중인도)의 사정을 서술했고, 7편에서는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중심으로 러시아와 북극지역까지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그가 설명하고 있는 지역은, 북으로는 ‘암흑의 나라’라고 불리는 극지대에서 남으로는 자바와 수마트라, 모가디슈까지 이르렀으며, 서로는 아나톨리아 고원, 동으로는 일본에까지 미치고 있으니, 사실상 유럽을 제외하고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세계를 서술한 것이다.


동방견문록이 움직인 세계사-지리상의 대발견




‘백만선생’- 당시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를 그렇게 불렀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프레스터 요한의 땅 동방을 다녀왔다는 그는 온갖 신기한 풍습과 거대한 도시, 엄청난 인구, 진기한 보석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럽 밖의 세상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던 13c의 유럽인들에게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으며 믿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해다. 사람들은 그를 허풍쟁이라고 했으며 더구나 입만 열면 ‘수백만의~’운운하는 그에게 ‘백만선생’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에 반신반의했을지라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동방견문록』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에 다양한 언어로 필사되어 퍼졌으며 유럽 사람들은 동방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다.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하는 13c의 중국은 유럽인들에게 문화적인 충격이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학문과 예술분야에서 연구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동방견문록』이 유럽의 문화발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부분은 단연 ‘지리상의 대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동방견문록』은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렬한 탐험 의지를 심어주었고, 15c를 전후로 하여 유럽의 많은 탐험가들이 아시아대륙 혹은 인도를 찾아 탐험을 떠났다. 신대륙을 개척하고 새로운 항로를 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 벤토 드 고에스가 그들이다.


동방견문록』과 실크로드

『동방견문록』에 기록된 마르코 폴로 일행의 왕복 노선이 바로 실크로드였으며, 이 책에는 몽골제국 시대의 이란, 중앙아시아 가지의 풍속, 관습, 지리, 물산 등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중국 각지의 정치, 문화, 풍속에 관한 귀중한 자료도 담고 있다.



마르코 폴로의 대 여행은 불세출의 영웅 칭기스칸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몽골 초원에서 일어난 칭기스칸은 몽골 부족을 통일한 후 잇달아 동방과 서방 원정을 감행하여 유라시아 전역을 통일하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 공적을 이루었다. 칭기스칸은 원정 중에 군사정보를 빠르게 보고받고 원정 지역에 군사들을 신속히 파견하기 위하여 정복지역에 도로를 닦고 곳곳에 역참을 설치하였다. 전시에 설치된 이 도로들은 몽골제국 지배 아래 평화가 도래하자,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상업망으로 동서교역의 간선도로 역할을 하였다.

원나라의 수도 대도에는 서역의 상인과 물자가 모여들었고 색목인이라 불리는 이들 서역 사람 중에는 등용되어 재정 분야에서 활약한 사람들도 많았다. 또 동에서 서로는 야율초재, 장춘진인, 유욱 등이, 서에서 동으로는 카르핀, 뤼브뤼키, 이븐 바투타 등이 실크로드를 따라 각지로 여행한 기록을 남겨 동서 교류의 실태를 아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때가 실크로드의 마지막 번성기라 할 수 있으며 천산북로, 천산남로, 서역남로 등 오아시스 실크로드 외에도 과거 스키타이족, 흉노족 등이 활약했던 초원 실크로드까지도 부활되었다.



2.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7) 임종 직전 친구들은 마르코 폴로에게, 이제라도 ‘동방견문록’에서 했던 엄청난 거짓들에 대해 참회하라고 권했다. 친구들조차도 그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마르코 폴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는 일화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아직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13) 그때 같은 감옥에 있던 피사 출신의 작가 루스티켈로에게 부탁하여 이 모든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기록된 것은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것들뿐이며, 이것은 그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17) 대칸은 신하에게 자기 이름으로 쓴 국서를 교황에게 전하도록 명하였다. 국서의 내용은 교황에게 “기독교의 총명한 사람 100명을 대칸에게 보내달라” 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100명의 총명한 사람이란 일곱 가지 기예 (문법, 논리학, 수사학, 산수, 기하학, 음악, 천문학 등 서구 지식인들이 중시하던 일곱 개 분야의 학문을 의미한다)에 통달하고 논쟁에도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그리하여 우상 숭배(기독교였던 마르코 폴로는 불교나 힌두교 등 기독교 이외에도 모든 종교가 “우상”을 숭배한다고 믿었던 듯하다)자와 이교도들에게 그들이 방 안에 두고 숭배하는 우상은 모두 마귀와 같은 물건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했다. 즉 그들에게 기독교의 계율이 그들 자신이 원래 갖고 있던 종교보다 좋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한 것이다.

(22) 니콜로의 아들 마르코는 타타르인의 풍속과 언어 그리고 그들의 문자를 매우 잘 익혔는데 그가 대칸의 조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네 가지의 언어를 알아듣고 마음대로 읽고 쓸 수도 있게 되었다. 대칸은 마르코 폴로의 총명함을 아껴 6개월 이상 걸리는 먼 곳에 그를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22) 대칸은 사신들이 직무를 보고하는 것보다 외국의 풍습이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흥미로웠으며 그런 것들을 듣고 싶었던 것이었다. 마크로는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임무 외에 그 지역의 기이한 상황들을 관심있게 보고 들었으며, 돌아가서 대칸에게 바칠 신기한 물건들을 준비해 두었다.

(41) 알라우 칸은 발다크의 성으로 들어가 안에 쌓여 있는 엄청난 양의 황금을 보고 몹시 놀랐다. 즉시 칼리프를 불러오게 하여 그의 탐욕스럽고 잔악한 죄악에 대해 물었다. 이렇게 많은 재물과 부를,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시켜 수비를 강화하는 데 쓰지 않아 적의 침입을 막지 못한 것이라 지적했다. 알라우 칸은 칼리프가 이처럼 재물을 좋아하니 칼리프의 재물이 쌓여 있는 탑에 그를 가두고 그에게 절대로 음식을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칼리프는 자기의 재물을 눈 앞에 두고 건물 안에서 굶어 죽었다. 그의 최후는 이처럼 비참했다.

(49) 이 마을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 나라에는 고대에 세 명의 왕자가 있었다. 그들은 방금 태어난 선지자를 함께 경배하러 갔는데 각자 자기의 예물, 즉 황금, 유황, 몰약을 가져갔다. 그들은 이 선지자가 분명 하늘의 왕인지, 지상의 왕인지, 아니면 치유자인지 시험해보려 했던 것이다. 그들끼리 말하길, 그가 황금을 받는다면 그는 지상의 왕이며, 유황을 받는다면 하늘의 왕, 몰약을 받는다면 치유자라고 했다.

(60) 이 곳 주민의 피부색은 암갈색이며 마호메트를 신봉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는데 부인들의 경우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4년동안 매일,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울어야 한다. 이처럼 곡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일정한 보수를 받기 위해 그는 자기와 털끝만큼도 관계가 없는 사람의 시체를 어루만지고 통곡을 한다.

(71) 이 지역에는 매우 뛰어난 명마도 있는데 말 발굽이 마치 쇠처럼 단단해서 따로 말굽을 해 줄 필요가 없다. 토착민들은 주로 이 말을 타고 다닌다. 이 말은 다른 가축들이 다닐 수 없는 험한 길도 잘 달린다. 그 곳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렉산더의 명마인 부케팔루스 혈통의 말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말은 태어날 때부터 이마에 특별한 표시가 있었다. 그런데 말의 사육 권한을 국왕의 숙부가 장악하게 되자, 그는 조카에게 말을 주려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숙부는 국왕에게 사형 당하게 되었다. 이에 숙부의 미망인은 남편의 죽음에 격분하여 그 종자의 말을 완전히 없애버렸던 것이다.

(87) 그곳에는 아직 군주가 없었지만, 주민들은 옹 칸이라는 사람에게 세금을 바쳤다. 프랑스어로 그는 ‘프레스터 존’을 뜻한다. 그가 바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위대한 군주, 프레스터 존인 것이다.

(92) 타타르의 대왕은 어디에서 죽건 간에 설사 100일의 여정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그 산으로 옮겨져 안장된다. 옮기는 사이에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시신을 운반하는 사람들의 칼에 베인다.

(107) 잔은 대전 중앙에, 탁자와 열 걸음 떨어진 곳에 놓여 있는데 마술사들은 그들의 기술을 이용해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잔들이 각각 스스로 대칸의 앞으로 가도록 한다.

(114) 대칸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기독교를 믿지 않는 다른 백성들, 즉 사라센, 우상 숭배자, 유대인 등의 사람들은 나얀의 깃발 위에 그려진 십자가를 비웃었다. “ 너희 하느님의 십자가가 기독교도인 나얀을 어떻게 도왔는지 보라!” 이 이야기가 대칸의 귀에도 들어갔다. 대칸은 도착하여 십자가를 조소하는 사람들을 심하게 질책했다. 이후 그는 곳곳의 기독교도들을 불러서 그들을 위로하며 말했다. “만일 너희 하느님의 십자가가 나얀을 돕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뭔가 더 좋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십자가는 옳고 바른 일만 행할 것이다. 나얀은 불충한 반역자로서 군주에게 반역했기 때문에 그가 당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옳지 않은 그를 하느님의 십자가가 돕지 않은 것은 잘한 것이다. 왜냐하면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115) 그는 기독교도들을 모두 부르고 그들에게 4종류의 복음서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성대하게 차리고 예절로써 복음서에 분향하고 입을 맞추었다. 그의 신하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는 부활절, 성탄절 등과 같은 기독교의 모든 중요한 절기 때마다 이렇게 해 주었다. 사라센이나 유대인이나 우상숭배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다. 대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숭배하고 존경하는 네 명의 성인이 있다. 기독교도는 그들의 신을 예수 그리스도라 하고, 사라센은 마호메트라 하고, 유대인은 못라고 하고, 우상숭배자들은 여러 우상들 중에 최초의 신인 사가모니 부르단(석가모니) 이라 한다. 나는 그들 네 명의 성인을 모두 숭배하고 경애한다. 특히 하늘에서 가장 권위 있고 진실한 자를 존경하며 그에게 나를 도와달라고 기도드린다.”

(116) 대칸(쿠빌라이)이 행한 것을 보면 그는 기독교를 가장 진실하고 정직하며 선한 종교라고 생각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기독교만이 선하고 신성이 충만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기독교도들에게 십자가를 앞에 가지고 가지 못하게 했는데, 거기서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135) 사자를 우리에서 풀어주면 맹렬한 기세로 목표물을 추격하여 잡는데 그 민첩성에 사람들의 찬탄이 끊이질 않는다. 이 때문에 사자를 우리 안에 가둬놓고 사냥 장소까지 데리고 가는데 그 옆에 작은 개도 함께 가둔다. 서로 익숙해서 사자가 사냥개를 해치는 일은 없다. 사자를 데리고 갈 때는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간다. 왜냐하면 혹시 바람결에 사자의 냄새를 맡고 사냥감들이 자취를 감춰버리면 사냥을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139) 대칸의 1년 동안의 생활은 보통 이렇게 지나간다. 6개월은 칸발루에서 지내고, 3개월은 사냥을 즐기고, 3개월은 더위를 피하며 머문다.

(169) 이 곳 사람들은 동정을 지키는 처녀를 아내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남자와 육체관계를 맺은 여자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들은 남녀의 성관계를 신이 주신 기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부가 한 명도 없는 여자는 여자로서 가치가 없다고 믿는다.

(177) 이 지역에는 독특한 풍습이 있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즉시 침대에서 일어나 아이를 씻기고 천으로 잘 감싸서 남편에게 준다. 그러면 남편은 그녀의 자리에 누워 아이를 옆에 두고 40일 동안 돌본다. 친척과 친구들은 모두 곁에서 그를 기쁘게 해준다. 부인은 집안 일을 돌보면서 침대에 있는 남편에게 음식을 갖다 주고 때가 되면 옆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인다.

(194) 킨사이라는 이름은 ‘천상의 도시’라는 의미이다. 이 도시의 웅장함과 화려함이 세계 어떤 도시들보다 빼어나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천당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220) 이 왕국의 원주민들은 대부분 우상을 숭배한다. 단 항구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곳을 끊임없이 방문하는 사라센 상인들에 의해 종교를 이슬람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 곳 사람들은 매우 야만적인데 고기라면 깨끗하거나 더럽거나 혹은 사람이거나 동물이거나 가리지 않고 다 먹는다. 그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처음 본 대상을 숭배하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것을 숭배하게 된다.

(222) 이 섬에서 머무르는 동안 마르코 폴로는 약 2천명의 장정들과 함께 바닷가에 요새를 지었다. 그들을 잡아 먹을 기회를 노리는 미개한 원주민으로부터 화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227) 왕은 1천 여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있다. 왕은 눈에 드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바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 심지어 동생의 부인까지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어 전투가 일어날 뻔한 상황이 여러 번 있었지만 동생이 분쟁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참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런 상황을 보고 그들의 어머니는 자신의 젖가슴을 드러내놓곤 말했다. “너희들이 그렇게 적대적인 행동으로 스스로를 불명예스럽게 한다면 나는 너희들을 먹여 키운 이 젖가슴을 지금 당장 도려내겠다.” 그리하여 불화는 수습되었다.

(240) 케스마코란에서 남쪽으로 약 800키로미터 떨어진 바다에는 50킬로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두 개의 섬이 있는데 한 섬은 여자 없이 남자들만 살고 있으므로 “남도”라 부르고, 한 섬은 여자 없이 남자들만 살고 있으므로 “여도” 라 부른다. 양 섬의 원주민들은 같은 인종이며 세례받은 기독교인이며 구약성서의 법을 지키고 있다. 예를 들어 부인이 임신을 하면 출산할 때까지 혹은 출산한 후 40일까지는 아내와 접촉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여도를 방문하여 따로 분리해 둔 거주지에서 자신의 부인들과 함께 3월에서 5월까지, 3개월 동안 머문다. 그리고 다시 남도로 돌아와서 여자들과 교제 없이 나머지 9개월을 보낸다. 부인들은 자식들을 데리고 있다가 아들은 열 네살이 되면 그들의 아버지와 같이 살도록 남도로 보낸다.

(249) 타타르인들은 그곳의 가축과 재산 등을 약탈하기 위해 어두운 시기에 맞추어 이곳까지 온다. 그곳은 어두컴컴하여 방향을 제대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약탈하러 갈 때 망아지를 가진 암말을 데리고 간다. 국경지역에 망아지들을 남겨 놓고 약탈이 끝나면 암말의 목에 굴레를 걸어 자유롭게 앞으로 가게 한다. 그러면 그 암말들은 모성의 본능으로 자신의 망아지를 둔 곳으로 바로 찾아간다. 이런 방법으로 타타르인들은 안전하게 그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되돌아 올 수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잃어버린 25년,
자기 생의 3분의 1이 모두 '거짓'으로 인정받는 기분은 어떤 것이었을까?
책에서 느낀 바도 많았지만, 마르코폴로의 삶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천복을 추구하며 살았다. 누구보다도 많은 걸음 수로 신세계를 돌아다닌 사람. 그럼에도 인정받지 못하고 죽음 앞에서도 친구들에게 추궁을 받아야 했던 사람. 죽을때 그의 내면에는 기쁨이 있었을까?

여전히 ‘잘 사는 것’은 내 인생의 화두로 남아있다. 아마 죽을때까지 품고 살아야 할 것이다. 허나 대략의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기쁘기 위해 사는 것이다. 자신을 기쁘게하고, 다른 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삶에 온전히 참여했던 그가 삶을 기쁨으로 받아들였길 간절히 바란다.

북리뷰를 쓰면서 처음에는 본문 위주로 글을 읽고 썼다. 나중에 수용을 위한 비평인 ‘내가 저자라면’이 중요함을 알았고 그래서 신경을 많이 썼다. 요즈음은 저자 조사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마르코 폴로가 말했듯, 대부분의 작가들 역시 ‘아직 그가 본 것의 절반도 이야기 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책보다 인생이다. ‘백범일지’에서도 ‘강의’에서도 사실 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들의 삶 자체였다. 그러므로 글을 잘쓰려기 보다는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다. 인생이 풍부하면 글은 그저 솔직히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맞지 않는 것을, 경험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려다보니 말이 길어지고, 힘이 들어가고, 기교가 늘어나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25년간의 여행 자취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그는 묵묵히 걸었다. 걷고 관찰하고 경험했다. 그는 앉아서 고민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삶에 온전히 참여하기'가 아닐까. 우리는 너무도 자주, 앉아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생각을 위한 생각. 그것만큼 효과적이지 못한 것이 또 있을까. 그래서 아마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철학자가 “생각하는 것, 그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제대로 생각하려면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서론은 이쯤에서 그만하자. 그의 삶에 대한 느낌은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그의 글을 보자. 그의 글은 결코 명문장은 아니다. 허나 그의 동방 여행기는 여러모로 서양에 동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선구자가 된다는 것 : 동방 진출의 초석

13세기까지 유럽인들에게 ‘세계’란 유럽과 이슬람 문화권이 전부였으며 ‘동방’은 그저 상상 속의 세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동양과 서양, 그 둘간의 오랜기간의 깊은 골이 보이는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러한 미지의 세계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옮기게 한 초석이 된 셈이다. 유럽 사람들은 동방견문록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접했고, 직접 신비의 세계를 확인하기 위해 동방으로 떠났다. 유럽인들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세계의 중심은 동방에서, 서방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이다. 그는 탐험을 위해 여러 책을 읽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읽었던 것이 라틴어로 번역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었다. 그는 책의 빈 여백에 일일이 주석을 달아가며 탐험을 위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책 속에 나오는 지역을 직접 화인하기 위해 탐험을 떠났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가 갔던 곳은 ‘동방견문록’에도 나오지 않는 신대륙 아메리카 였지만,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에도 콜럼버스는 그 땅이 인도라고 믿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 역시 마르코 폴로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향료를 찾으러 떠난다” 그의 항해일지 앞부분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다 한다. 그 전까지는 아랍을 통해 유럽까지 먼 길을 통해 왔으므로 상당히 귀하고 값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가 여행했던 아시아와 인도 지역에는 그 귀한 향료가 풍부하게 있었다. 결국 그는 인도를 다른 지역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올 수 있는 직항로를 개척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선구자가 된다는 것. 파이오니어(Pioneer)가 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진다. 선구자는 또 다른 선구자를 낳고, 세상은 그렇게 뻗어 나가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특별히 호기심이 많았던 인물일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호기심이야 말로 선구자를 만드는 일등 공신이기 때문이다. 어느 고양이보다도 호기심이 넘치는 우리 애기 한결이는 어떤 것을 처음으로 하는 선구자로 성장할까?


자료의 다양함과 정확함

그는 역사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정확하게 아시아의 나라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좀 과장된 점이 있긴 하지만 당시의 서아시아ㆍ중앙아시아ㆍ중국ㆍ남해(南海) 등에 관한 기사가 풍부하고 정확하며, 특히 중앙아시아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여행중에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기억해낼 수 있는 그의 기억력이 놀랍다. 내용의 풍부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가 임종시에 말한 “나는 아직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다”라고 이야기 한 이유를 알겠다. 그가 보고 들은 것을 그는 차마 다 표현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그의 관찰력은 대단하다. 심지어 지붕의 색깔까지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으로 그가 삶에 온전히 참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형식을 떠나, 내용이 담고 있는 막대한 양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록 만으로도 재밌다. 13세기의 세계가 어떠했는가를 넘겨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 그 자체다. 현대 사회를 이루고 있는 여러 문물들의 뿌리를 알 수 있는 내용들이 많이 있었고 과거를 그리 낯설지 않게 만들어 주는 기능도 해주었다.

기독교와 사라센의 뿌리깊은 불화, 석탄과 석유에 대한 순진한 묘사, 대몽골 울루스의 장대함 (그로 인한 동양의 자부심), 중국대륙의 풍성함, 제사/택일/달력/점성술,/굿판/연날리기 등의 옛 모습. 700여년 뒤에 내가 봐도 이렇게 신기한 내용들이 많은데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아마 이 책을 읽고 짐을 꾸린 이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아쉬움 : 제한적인 시각

대단한 견문록이긴 하나, 동양의 문화와 생활상을 보는 시각이 제한적인 듯 하다. 그 또한 서양인이어서 관심 영역이 동양의 내면까지 미치지는 못한 듯 보인다. 그가 관찰한 내용은 대부분 건물의 모양에 대한 이야기, 주민들의 생활상, 종교, 역사적 사실등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위주로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허나 그 지방 사람들의 철학이나 사상등의 내면세계에 대한 언급이 적다. 서양에 비해 동양이 내면의 가꿈을 중시함을 알았다면 보다 동양적인 견문록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서양의 기준에 맞추어 동양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부분들이 눈에 뜨인다. 예컨대 p. 235의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미개하여 주문과 점성술에 많이 중독되어 있다"는 구절이 그렇다. 마치 불교(우상숭배)를 믿는 사람들은 미개한 족속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책 전반에 걸쳐 특히 종교적인 부분에서 주관적인 편협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 P. 116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대칸(쿠빌라이)이 행한 것을 보면 그는 기독교를 가장 진실하고 정직하며 선한 종교라고 생각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기독교만이 선하고 신성이 충만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기독교도들에게 십자가를 앞에 가지고 가지 못하게 했는데, 거기서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모든 것을 객관화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서양에 동양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대중의 편견을 없애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동양의 미개인으로서의 우려가 있을 뿐이다.


아쉬움 : 잘못된 사실

동방견문록은 13세기의 중국 사회에 대해서 상당부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으나 사실과 모두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 여정을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았으므로 신이 아닌 이상 기억에 착오도 있었을 것이며,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다양한 언어로 필사하는 과정에서 오역하거나, 종교적인 이유 또는 기타 여러가지 이유로 내용을 첨삭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책을 읽다 보면 뭔가 이상하다 싶은 것들이 종종 눈에 띈다.

대표적인 예가 폴로 형제가 몽고에 투석기를 들여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투석기는 아라비아의 포술사였던 알라웃딘과 이스마일이 제작한 것으로 ‘회회포’라는 이름으로 1271년에 들여온 것이다. 알라웃딘과 이스마일은 포를 만드는 기술자를 보내달라는 쿠빌라이의 요청으로 보내진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최초에 마르코 폴로가 잘못된 구술을 했거나, 혹은 필사하는 사람이 이름을 바꿔넣었던 등등의 이유가 있겠다.

두번째 예는 지팡구 섬을 정복하기 위해 떠난 쿠빌라이의 원정대에 관한 오해이다. 마르코 폴로는 폭풍우로 실패한 원정대 중 일부가 다른 통로를 통해 섬을 탈출하여 수도를 정복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런 내용은 역사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아마도 쿠빌라이의 실패한 원정에 대한 중국인의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들어간 이야기를 마르코 폴로가 그대로 전해 듣고 이야기한 것인 듯하다.


편역 : 서해문집

번역이 훌륭하다. 다른 연구원들은 잘 읽히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단락별로 핵심을 짚어서 소제목을 달아 놓은 것도 훌륭하고, 전체적인 맥락을 짚어주는 것 또한 좋다.

특히 맨 앞에 나와있는 마르코 폴로의 소개가 좋다. 두 개로 나누어 썼는데 하나는 역사적 사건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짧은 글이고, 두번째는 각종 사료를 덧붙여 역사적 상황을 알 수 있는 긴 글이다. 앞 장이 뒷장의 지도(map)역할을 하여 이해하기 쉽다.

덧붙여진 삽화들이 이해를 돕는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158, 159페이지의 '지도로 보는 동방견문록'은 정말 최고다. 1장부터 5장까지가 기술된 경로와 현재 지명, 그리고 그곳에서의 상황을 요약해주고 있어 산발적이고 즉흥적인 산문에 흐름을 더해주고 있다. 이 지도가 맨 처음에 나왔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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